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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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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
Sergei Sergeyevich Prokofiev
파일:Sergei_Prokofiev_circa_1918_over_Chair_Bain.jpg
출생 1891년 4월 23일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손초프카
(現 러시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크라스노아르메이스크군 크라스노예)
사망 1953년 3월 5일 (향년 61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
[[소련|]][[틀:국기|]][[틀:국기|]]
직업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학력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수상 소련 국가상 (1943, 46, 47, 51; 6개)
러시아 SFSR 인민예술가 (1947)
레닌상 (1957)
노동적기훈장

1. 개요2. 생애
2.1. 사후의 복권
3. 음악 성향
3.1. 프로코피예프 스스로 이야기한 음악 성향
4. 사생활5. 주요 작품들
5.1. 교향곡5.2. 관현악곡5.3. 협주곡5.4. 실내악5.5. 피아노곡
5.5.1. 피아노 소나타5.5.2. 그 외
5.6. 합창곡5.7. 가곡5.8. 오페라5.9. 발레5.10. 영화음악
6. 수상 경력7. 기타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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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프로코피예프의 연주와 인터뷰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 1891년 4월 23일 ~ 1953년 3월 5일). 러시아 제국/ 소련 작곡가 피아니스트. 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소련 시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근·현대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음악은 대중성과 혁신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현재에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2. 생애

러시아 제국 손촙카(現 러시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크라스노예)[1]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심취해 다섯 살 때 첫 작품인 피아노 소품 '인디언 갈롭'을 작곡했다. 이어 아홉 살 때는 첫 오페라인 '거인'을 작곡해 집에서 연주하기도 했고, 체스에 몰두하기도 했다.[2]

아들이 확실히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간파한 어머니는 1902년에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을 맡고 있었던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에게 조기 교육을 시켜줄 것을 부탁했는데, 타네예프는 자신의 대위법 제자였던 작곡가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손초프카로 가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해주도록 했다. 글리에르는 어린 프로코피예프를 음악적으로 충실하게 지도하였으며, 기꺼이 그의 체스 상대가 되어준다든가 놀이도 함께 하는 등 많은 교감을 쌓았다. 그 결과 프로코피예프는 소년 시절에 습작 교향곡을 글리에르의 지도 하에 작곡할 정도로 성장하였다.[3]

그러나 프로코피예프의 부모는 손초프카가 아들이 음악 교육을 받기에는 너무 낙후되고 고립되어 있다고 판단했고, 190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그 곳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게 아들이 쓴 작품의 악보를 보여주면서 입학 시험을 치르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글라주노프는 제안을 받아들여 프로코피예프에게 시험을 보게 해 입학시켰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여기서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고, 학생들이나 교수들도 프로코피예프의 도발적인 행동과 무례함에 당혹스러워했다. 여기서 쓴 작품들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반음계 어법과 불협화음이 자주 사용되었고, 이는 보수적인 성향의 음악원에서 자주 논쟁을 유발했다.

음악원 졸업 후 프로코피예프는 젊고 도발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러시아 음악계에 일찌감치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처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들에서 보수파와 혁신파 사이에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일찍부터 주목받은 프로코피예프는 1911년 러시아의 유력 음악 출판사인 유르겐손과 계약해 자신의 작품들을 출판했고, 1913년부터는 해외 연주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여행 중 프로코피예프는 프랑스 파리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젊은 작곡가들과 손을 잡고 신작 발레들을 공연하던 흥행주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만났고, 디아길레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재능에 감탄했는지 발레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의 첫 무대음악인 '알라와 롤리'는 내용이나 음악이나 직전에 공연되었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많이 유사했기 때문에 디아길레프는 결국 공연을 포기했으며 이 때부터 프로코피예프의 공연음악 수난사가 시작된다.

1차대전으로 인해 유럽의 음악 활동 전반이 위축되자 프로코피예프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전쟁 중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음악원에 재등록해 오르간을 배우기도 했으며, 이 시기 작곡된 교향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등에서는 신고전주의적 성향을 도입하면서 그간의 파격 일변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가지고 오페라 '도박사'를 완성해 초연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초연 계획은 같은 해 발생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대신 프로코피예프는 고전주의 양식을 응용한 첫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작곡하면서 혼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혁명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프로코피예프는 음악 활동을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고 당시 교육인민위원장이었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의 허가를 받아 191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로 꽤 성공을 거두었지만, 작곡가로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초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빚만 잔뜩 지고 큰 고충을 겪어야 했다. 미국에서도 실망한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옮겨갔고, 여기서 전쟁 전 만난 디아길레프에게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위촉받아 '어릿광대'를 작곡했다. '어릿광대'는 1921년에 파리에서 초연되어 대박을 쳤고, 스트라빈스키와 모리스 라벨, 장 콕토를 비롯한 진보적 문예 인사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을 시카고에서 초연해 역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후 뉴욕에서 재연했을 때는 전보다 못한 반응을 보였으며 이에 프로코피예프는 또 한 번 미국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1923년에 파리로 이주해 오페라 '불의 천사'의 작곡에 주력하는 한편 두 번째 교향곡과 발레 '강철 계단'으로 모더니즘 작곡가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도발적인 작풍에도 점차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후 작곡 스타일을 조금씩 바꾸어갔다.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불의 천사'도 1927년에 베를린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시립 오페라단이 초연하기로 일정을 잡았지만, 악보 발송에 차질이 빚어지는 바람에 취소되어 또 물을 먹었다.

같은 해에는 1918년 출국한 이래 거의 9년 만에 소련에서 연주 여행을 했는데, 레닌그라드에서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이 소련 초연되어 절찬을 받고 자신도 피아니스트로 호평을 받는 등 예전과는 다른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서방에서 억까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프로코피예프는 '모국'에서는 자신을 알아주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 때부터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소련으로 귀국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소련 정권이 보여주는 억압과 통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4]

1929년에 디아길레프가 발레 '방탕한 아들'을 공연한 것을 끝으로 사망하자, 프로코피예프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련 문화예술계와 작업을 시작해 발레와 영화음악 등을 소련에서 발표했다. 소련도 고급 예술 인사를 초빙하는 데에 관심이 많았는데, 스탈린도 일기에서 '우리는 프로코피예프를 집에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적었을 정도였다. 소련에서는 그의 소련 정착을 위해 자유로운 연주 기회의 보장과 고급 아파트 및 운전기사 제공, 여행의 자유 등 여러 회유책을 제시했고, 여기에 넘어간 프로코피예프는 결국 1936년에 영구 귀국을 선언했다.

첫 해의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프로코피예프는 애국자로서 환영을 받았으며, 곧 전년도에 쓴 발레 '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연을 위해 당국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무렵 소련의 문화 정책은 초기의 자유로움과 전위성에 대한 허용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단계였고, 프로코피예프의 작품 역시 초기의 급진성으로부터 멀어져 어느 정도 정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주의에 빠졌다'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도 여타 소련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정권의 노선에 영합하는 소위 '접대용'작품들에 주력하는 쪽으로 창작 노선을 바꾸었고, 10월 혁명 20주년 기념 칸타타나 소련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음악 동화 ' 피터와 늑대'등을 작곡해 선보였다. 하지만 칸타타의 경우 지나치게 거대하고 난잡하다는 당국의 비판을 받아 연주를 허락받지 못했고, 그 반대로 1937년에 작곡한 노골적인 스탈린 우상화 작품인 '우리 시대의 노래'는 너무 단순하고 밋밋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5]

이 시기 이후로 프로코피예프의 해외 여행은 크게 제한을 받았고, 1938년에 마지막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가진 뒤에는 당국으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해 이후 평생동안 소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소련 정주 선언 이래 의욕적으로 작곡한 오페라 '세묜 코트코'도 초연에 심하게 애를 먹었는데, 초연 직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독일과 관계가 개선되면서 독일을 악역으로 설정한 대본을 급히 수정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오페라의 초연을 같이 준비하던 연출가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가 대숙청에 쓸려나갔고, 프로코피예프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숙청당할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로코피예프는 1939년에 스탈린 동무의 60번째 생일에 맞추어 '건배'라는 제목의 한층 더 노골적인 우상화 칸타타를 발표했고, 이 작품은 폐기된 이전의 두 교성곡들과 달리 공식적으로 환영받았다.[6] 그리고 당시 소련에서 가장 주목받던 영화 감독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프로코피예프에게 자신의 신작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오리지널 스코어(영화음악)을 작곡해 달라고 부탁해온 것도 '명예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예이젠시테인은 프로코피예프에게 가능한 모든 편의를 베풀었고, 심지어 몇몇 전투 장면에서는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리듬에 영상을 맞추어 촬영하는 등 매우 긴밀한 협업으로 걸작을 만들어냈다.[7] 프로코피예프는 영화 발표 후 음악의 일부를 연주회용 칸타타로 다듬어 내놓았고, 이 칸타타는 프로코피예프의 후기 작품들 중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소전쟁이 터진 뒤에는 다른 주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동부로 피신했고, 거기서도 이런저런 정권 영합성 작품들 외에도 바이올린 소나타나 현악 4중주 등을 계속 작곡했다. 특히 전쟁소나타로 불리는 피아노 소나타 6-8번은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신랄함이 소련 시기에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순수 기악 작품에서의 성과였다.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야심차게 작곡한 교향곡 5번은 이듬해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하차투리안의 교향곡 2번 등과 함께 전쟁 중 작곡된 소련 교향곡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널리 선전되었다. 이 무렵 프로코피예프의 위상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매우 공고해져, 음악적인 절정기를 맞았다.

하지만 그 즈음 프로코피예프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낙상 사고로 뇌진탕을 겪었고, 이후 건강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종전 이후 스탈린의 심복인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문화예술계에 대한 비판 운동[8]을 개진하기 시작하여, 소련 음악계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는 그들을 질시해 온 당국자와 작곡가들에 의해 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애매한 분위기로 종전의 승리감을 잘 표현하지 못했던 교향곡 6번과 피아노소나타 9번이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프로코피예프는 굴욕적인 자아비판서를 발표해야 했다.
"나는 선율의 중요성에 대해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다. 나는 선율을 사랑하며,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한다. (...) 나 역시 무조성에 빠졌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조성으로 음악 작품을 구성하는 것은 단단한 토대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은 반면, 조성 없이 구성한다는 것은 모래 위에 세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명백히 깨달은 이후,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조성 음악에 대한 애정을 느껴왔다고 말해야겠다. 뿐만 아니라, 조성과 온음계적 음악은 무조성과 반음계적 음악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는 쇤베르크와 그 제자들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만 봐도 자명하다..."[9]

간신히 숙청은 면했지만 프로코피예프의 많은 작품들은 소련에서 연주 금지조치를 당했고, 이에 수입은 메마르기 시작했다.[10] 전쟁 중 흐지부지되었던 '세묜 코트코'를 대신할 새로운 대작 오페라였던 '전쟁과 평화'도 초연되지 못했고, 예이젠시테인과 작업한 《이반 뇌제》의 2부도 상영금지를 당하는 등 계속 불운이 이어졌다. 1948년에 예이젠시테인이 사망하고 1950년에 먀스콥스키가 사망하는 등, 프로코피예프는 예술적 동지들을 잃어가는 가운데 서서히 자신의 건강을 잃어갔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가운데에도 프로코피예프의 창작열은 식지 않고 있었다. 검열과 탄압, 그리고 악화된 건강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1952년에는 자신의 첼로 협주곡을 대규모로 개작한 협주 교향곡을 초연하였고, 교향곡 7번도 발표했다. 그리고 6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구상하는 등,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마지막 대작들을 쏟아내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시간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고, 이듬해인 1953년 3월 자동차 드라이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직후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은 더 많은 곡을 썼어야 했다며 부르짖었다고 한다.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로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날에 이오시프 스탈린 역시 사망하였다. 엄혹한 스탈린 시대를 딛고 살아남은 쇼스타코비치와 달리 프로코피예프는 결국 스탈린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한 셈이다. 모든 언론들이 스탈린의 사망 소식을 대서특필하고 군중들이 몰려오는 가운데 프로코피예프의 사망 소식은 완전히 묻혔고, 그는 모차르트만큼이나 초라한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하필 프로코피예프의 집이 붉은 광장에서 가까웠던 탓에 프로코피예프의 관은 스탈린을 조문하기 위해 몰려든 수십만 명의 군중들을 피해 골목을 전전하며 한참을 돌아나가야 했다. 심지어 조화마저 스탈린의 장례식에 총동원되어서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는 꽃이 별로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소련 시절 오랜 라이벌이었던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게 위안거리.[11]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로스티슬라프 두빈스키가 기억하는 프로코피예프와 스탈린의 장례식날(영문)

2.1. 사후의 복권

파일:USSR_stamp_Prokofiev_1981.png
1981년에 발매된 프로코피예프 기념우표
이처럼 프로코피예프는 말년에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으며 운명의 장난처럼 스탈린과 같은 날에 죽는 바람에 장례식마저 초라하게 치러야 했다. 하지만 사후 프로코피예프는 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금세 복권되었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57년의 레닌상 수상이다.[12] 이처럼 소련 내에서 평가가 바뀐 것은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운동과 더불어 문화 예술 분야에서 각종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덕분인데, 한편으로는 쇼스타코비치나 하차투리안과 같이 암흑시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동료 작곡가들의 노력도 그의 음악이 다시 빛을 보는데 한 몫 했다.

소련 시절에는 주기적으로 프로코피예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으며 당시 소련 연방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국제공항은 1973년에 재공사를 마치고 개항하면서 '도네츠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13]

한편 공산국가와 서방국가의 냉전이 한창이었던 시절 프로코피예프는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와 같이 서방에서 활약했던 음악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음악적 평가가 높지 않았지만,[14] 양쪽 진영 사이에 해빙기가 찾아오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평가가 다시 높아졌다. 그리고 21세기 현재,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현대음악 중에 가장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로 정착하였다.

3. 음악 성향

"피아노는 타악기다."
초기에는 그야말로 '앙팡 테리블'이라는 수식어가 딱 어울릴 정도로 도발적이고 대담한 작풍으로 수많은 논쟁을 유발했는데, 특히 자신의 주요 악기였던 피아노곡에서는 지금도 처음 듣는 이들에게 꽤 충격적일 정도로 불협화음의 난타, 복잡한 조바꿈, 대담한 화성 진행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의 경우는 지독한 난이도, 막나가는 화성 전개로 초연 당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더 낫다"는 평까지 들었다고양이 울음소리는 원래 좋다[15]. 낭만주의 시대에 자주 쓰인 분산화음, 노래하는 듯한 레가토 등은 그의 작품에서 대놓고 무시되고 있으며, 낭만성과 거리가 먼 타악기적인 울림과 선율 대신 음향과 구조에 주력하는 그의 피아니즘은 20세기 피아니즘의 대표격으로 인정받고 있다.
토카타 Op.11(1912) 악마적 암시 Op.4 (1910)

이와 같은 도전적이고 대담한 수법은 피아노 분야 한정으로 그의 음악인생 내내 지속됐으며, 그 덕분에 프로코피예프는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과 더불어 피아노 분야에서 러시아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을 남긴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다. 인기 측면에서는 귀에 친숙하게 들리는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이 좀더 앞서지만 독창성과 음악성 측면에서는 단연 프로코피예프가 돋보인다. 그가 남긴 9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시대적으로 모차르트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쇼팽의 2, 3번 소나타,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 이후 가장 중요한 피아노 소나타 트랙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 전쟁소나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6, 7, 8번의 세 소나타는 당대에 필적할만한 작품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관현악곡에서는 다소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일반적으로 프로코피예프의 관현악법은 스트라빈스키[16]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쇼스타코비치의 일사불란하면서도 효율적인 관현악법에 비해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후배인 쇼스타코비치가 외려 보수적이고 모험수를 두지 않는 관현악법을 구사했다면,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예프는 다소 급격한 단절감을 내비치는 의외성 있는 관현악법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색다른 음향 효과를 도출하여 자신의 오케스트라 운용에 논리성을 얻어내는 스트라빈스키와 달리, 프로코피예프의 경우 정말로 악기법에 미숙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 허점들을 이따금 드러낸다. 명백히 음량이 부족한 악기[17]들에 중요한 대목을 맡기면서 금관에 대적시킨다든지, 지나치게 우연적인 효과를 얻어낸다든지 하는 부분이 결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러한 거친 관현악법이 나름 개성으로도 작용하여, 곳곳에서 드러나는 익살과 의외성 등은 프로코피예프의 관현악곡만이 갖고 있는 매력으로 꼽히기도 한다. 스키타이 모음곡(Scythian Suite, Op.20)과 어릿광대 발레 모음곡(Chout Suite, Op.21)으로 대표되는 프로코피예프의 초기 관현악곡은 선배 스트라빈스키의 초기작품과 마찬가지로 불협화음과 금관악기/타악기의 전폭적인 사용을 통한 강렬한 음향과 역동적인 리듬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이런 특징은 그의 후기 작품에서도 일정 부분 유지되고 있다. 다만 흔히 '고전 교향곡'으로 불리는 교향곡 1번(Op.25)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Op.19) 등에서는 나름 신고전주의적인 수법을 실험하기도 했는데, 1920년대의 스트라빈스키처럼 직접적으로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전향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의 관현악곡들이 좀더 형식미와 정돈된 수법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면 나름 신고전주의를 자신의 스타일로 체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18]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의 경우 대중적으로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19] 나름 프로코피예프 자신이 애정을 갖고 작곡에 임한 분야였다. 특히 심기일전하여 작곡한 후기의 교향곡들(5-7번)은 상당한 음악성을 가진 말년의 걸작으로 평가되며, 소련 음악의 성과로 받아들여진다.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곡이나 교향곡 외에도 오페라나 발레 같은 무대 작품에 상당한 관심과 열정을 쏟은 것으로 유명한데 문제는 공연운이 영 따라주지 않았다는 것. 이 분야에서는 남긴 작품이 꽤 많은데도 거의 대부분이 초연에서 망하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초연조차 못하고 한참 뒤에야 성사되었다.[20] 그 때문인지 프로코피예프 자신도 이들 대작이 초연되지 못할 때를 대비해 관현악 모음곡 등 연주회용 작품으로 많이 리메이크를 해놓았고, 교향곡 3번과 4번(초판)도 각각 '불의 천사'와 '방탕한 아들'의 음악 소재를 가지고 쓰여졌다.

소련 귀국 후에는 그 이전에 보여준 신고전주의 성향과 스탈린의 철권 통치 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의도가 겹쳐서 좀 더 평이한 작풍을 보여줬는데, 간간이 그 작풍이 개인적인 의욕과 합쳐져 빚어낸 명작들도 있기는 하지만 상당수는 강철 대원수의 애널써킹용으로 작곡된 탓에 그의 명성에 먹칠만 하고 있는 저퀄 작품이 되고 말았다. 특히 이 시기 작곡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는 노골적으로 스탈린과 공산주의 체제를 찬양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무시당하고 있다. 그와 소련 음악계의 투톱을 이루던 쇼스타코비치 역시 이러한 어용 작품 생산을 해야 했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체제가 출범할 때부터 러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름 익숙해져서 이런 저급한 작업을 효율적이고 빠르게 처리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한 프로코피예프는 이런 작업에 익숙하지 않았고, 결국 간부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어야 했다.

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는 결국 프로코피예프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쳤는데,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별 문제가 없던 그의 건강은 낙상사고를 겪고 스탈린 정권의 탄압과 검열이 심해지면서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말년에는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결국 61살이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아야 했다. 생애 항목에 있는 것처럼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깨닫자 '나는 더 많은 음악을 써냈어야 했다'며 한탄했다고 하는데, 이게 말뿐만은 아닌 게 실제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많은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래식 팬들 입장에서 상당히 안타까운 대목.

이렇듯 대작곡가의 말년에 어울리지 않는 굴욕으로 인해 그의 말기 작품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자신의 역량을 드러내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평가가 많지만, '당의 요구이기는 하지만 선율미 있는 음악을 더욱 추구하게 됨으로써 나름의 의미가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21] 유럽에서의 현대음악이 점점 더 전위성을 추구해가면서 걸출한 조성음악 작곡가들이 점점 증발해갔는데, 이러한 중에서도 말기의 프로코피예프는 조성을 갖추면서도 뛰어난 작품성을 잃지 않은 몇 안 되는 거장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던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의 대부분이 해금되어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소련 붕괴 후에는 초기 작품들이나 무대 작품들의 적극적인 음반/영상물 출반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이 분야에서도 뒤늦게나마 명성을 얻고 있다. 20세기 작곡가들 중에서 흔치 않은 인기 작곡가[22]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러한 대중적 수요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3.1. 프로코피예프 스스로 이야기한 음악 성향

프로코피예프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음악 성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5가지 단어로 정리를 했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음악원에 다니던 20대 초반부터 이런 작곡 방향을 확립해 놓았다고. 역시 자뻑의 대가

프로코피예프가 스스로 밝힌 이와 같은 음악적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작품군이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이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을 비교해보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 비극적이고 웅장한 비장미와 슬라브적 감성이 돋보이는 반면,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구성 속에 현대음악의 각종 기법들이 효과적으로 적용되어 있으며 좀더 경쾌한 분위기 속에서 곳곳에 위트와 풍자, 패러디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이러한 대조되는 작풍 속에서 나름대로 서로의 영향을 주고받았다.

4. 사생활

프로코피예프는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하지만……다른 사람을 떼밀어 벽에 부딪히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그의 면전에서 3번 협주곡을 연주하던 때의 일이다. 그 학생의 선생은 제2피아노로 반주를 넣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코피예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선생의 멱살을 움켜쥐고 이렇게 소리쳤다. "이 얼간이 같은 자식아! 연주도 할 줄 모르냐? 이 교실에서 나가!" 학생도 아니고 선생에게 말이다.

그는 난폭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쇼스타코비치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부지고 활기가 넘쳤다. 그런 특성은 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그는 원칙에 엄격하지는 않아도 자기 소신을 지키는 기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의 회고

프로코피예프는 어린 시절부터 꽤 건방진 성격 때문에 숱한 적을 만들고 다녔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재학 시절에도 보수적인 교수들(특히 글라주노프)의 뒷담화에 열심이었다. 이러한 건방진 성격은 음악원을 졸업하고 출세한 후에도 정도는 덜해졌을 지언정 계속되었는데, 일찌감치 서유럽에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던 9살 선배 스트라빈스키와도 여러 차례 갈등을 빚었다. 그들의 공동의 후원자였던 디아길레프가 스트라빈스키를 '큰 아들', 프로코피예프를 '작은 아들'로 불렀던 만큼 경쟁의식은 자연스럽게 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예프는 서로의 작품에 대해 잊을 만하면 촌철살인을 주고받는 등 긴장관계를 형성했지만, 그들은 서유럽 망명 시절 러시아인들로서 표면적인 우정을 유지했다. 프로코피예프가 소련으로 돌아간 후, 스트라빈스키는 프로코피예프 말년의 음악들에 대해 혹평하면서도 여전히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라고 보았으며 말년에도 그 평을 바꾸지 않았다.[25]

음악인생 전반의 라이벌이 선배 스트라빈스키였다면, 후반의 라이벌은 후배 쇼스타코비치였다. 프로코피예프는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제1번으로 막 명성을 얻고 있을 때부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호의적으로 대했지만 15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만큼 내심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모양이다. 프로코피예프는 귀국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대해 '리틀 말러'라고 비아냥거리며 묘하게 별로 대단한 음악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비쳤고[26] 선율미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쇼스타코비치도 이에 물러서지 않고 프로코피예프가 신통치 않은 작품을 작곡하기라도 하면 가차없이 비판했고, 후일 회고록인 '증언'에서는 프로코피예프가 자신의 작품들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버거워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고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 전쟁기에도 이들은 소 닭 보듯 하는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이런저런 비판을 주거니 받거니 했으며, 이런 껄끄러운 관계는 1948년 안드레이 즈다노프에게 둘이 사이좋게 폭풍 관광을 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즈다노프에 의한 대대적인 비난 이후에야 두 사람은 피해의식을 통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정도로 관계가 호전되었다.[27] 쇼스타코비치는 이후 스탈린의 죽음으로 초라하게 진행된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 얼마 안되는 조문객으로도 참가하여 '의리를 지켰다'. 쇼스타코비치와 비슷하게 하차투리안과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1948년 이후로 연대 의식을 느꼈는지 그간의 감정을 풀고 그럭저럭 원만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28]

이처럼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과는 ( 먀스콥스키를 제외하면) 다소 긴장어린 관계로 점철된 프로코피예프였지만, 외국인들과는 그런 자존심 대결을 할 필요가 없었던지 두루두루 친했다. 모리스 라벨, 프란시스 풀랑크,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찰리 채플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과 친교를 맺으면서 나름 문화계의 이너 서클 느낌을 즐겼고, 이러한 교류는 그가 1936년에 소련으로 영구귀국하고 다시는 외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풀랑크는 죽기 1년 전에 고인인 프로코피예프와의 기억에 바치며 절절한 오보에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가족 관계도 소련 귀국 후 그리 순탄치 않았는데, 일단 소련 성립 후 외국에서 활동할 시기에 스페인 가수 리나 유베라와 한 결혼은 처음에 잘 풀리나 싶었다. 둘 사이에서 장남 스뱌토슬라프와 올레그가 각각 1924년과 1928년에 태어났고, 이들은 프로코피예프가 소련 귀국을 결심했을 때도 그대로 따라갔다.

하지만 소련으로 간 뒤에 이들도 프로코피예프와 마찬가지로 현시창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는데, 독소전쟁 중에는 정권의 탄압 같은 외적인 난관 외에 프로코피예프 자신의 불륜으로 인한 내적인 위기까지 닥쳐왔다. 독일군이 한창 모스크바를 목표로 맹공을 퍼붓고 있을 때 소련 당국은 외국 외교관과 주요 인사들에게 동쪽으로 피난할 것을 명령했는데, 프로코피예프는 가족 동반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리나가 아들들과 남겠다고 결정해서 혼자 피난해야 했다.

이 피난 기간 중 프로코피예프는 젊은 여류 작가인 미라 멘델손과 만났는데, 미라와의 관계가 깊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리나와 별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혼까지 가지는 않았고, 프로코피예프도 리나와 아들들에게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종전 후인 1948년에 리나가 스페인으로 망명을 시도했다는 날조 혐의로 체포되어 20년 징역을 선고받게 되자, 간신히 이어오던 가족 관계는 거의 개박살나 버렸다. 그 후 프로코피예프의 가족들은 굉장히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리나는 프로코피예프 사후인 1956년이 되어서야 스탈린 숙청 피해자들이 복권되면서 풀려났고, 1974년에 출국 허가를 받아 소련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리나의 아들들인 스뱌토슬라프와 올레그는 그대로 소련에 살면서 각각 건축가와 미술가로 활동했고, 이후 소련 사회에서 아버지가 복권되는데 나름대로 기여하기도 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해 다룬 훌륭한 예술가이자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글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5. 주요 작품들

5.1. 교향곡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7번
교향곡 1번 中 3악장

5.2. 관현악곡

스키타이 모음곡 中 헤브라이 주제에 의한 서곡 Op.34

5.3. 협주곡

프로코피예프의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협주곡 3번 피아노 협주곡 4번 피아노 협주곡 5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첼로 협주곡 협주 교향곡 (첼로) 첼로 소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Op.10 바이올린 협주곡 Op.19

5.4. 실내악

플루트 소나타 中

5.5. 피아노곡

상술하였듯이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의 타악기적 기법을 바탕으로 많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였다. 한 예로 " 전쟁소나타" 중 한 곡인 피아노 소나타 7번에서는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장조와 단조를 혼합하는 화성법으로 독특한 음악적 색채를 보여주며, 타악기적 연주기법의 사용으로 날카로운 리듬이 여과 없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많은 작품에서 특유의 서정적인 멜로디를 가미하여, 현대음악이면서도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중 1번과 3번은 단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토카타 피아노 소나타 7번[29]

5.5.1. 피아노 소나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7번 8번 9번 10번(미완성)

5.5.2. 그 외

5.6. 합창곡

5.7. 가곡

5.8.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 中

5.9. 발레

신데렐라 中 로미오와 줄리엣 中 사랑의 춤

5.10. 영화음악

6. 수상 경력

7. 기타


파일:1920px-Donetsk_Airport.jpg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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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7년 소련이 개명했으며, 2016년 우크라이나 탈공산화법에 의해 옛 이름의 우크라이나어형인 손치프카로 되었으나, 2024년 12월 이 곳을 점령한 러시아의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은 2014년 이후의 개칭을 인정하지 않는다. [2] 참고로 체스는 6살 때부터 두기 시작했고 체스도 음악만큼의 위상은 아니어도 알레킨, 카파블랑카, 라스커 등의 굵직굵직한 체스챔피언들과도 경기한 기보도 남아있다. [3] 글리에르는 프로코피예프가 대작곡가로 성장하는 것까지 지켜보았고, 프로코피예프보다 오래 살았다. [4] 특히 귀국을 최종 결정할 무렵에는 쇼스타코비치가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으로 제대로 작살이 나는 것을 보면서 마지막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5] 다만 피터와 늑대는 어린이를 위한 우화로서, 그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 [6] 이 때 가족들은 드디어 그의 곡이 연주될 수 있게 됐다면서 엉엉 울었다고(...) [7] 사실 예이젠시테인의 프로코피예프와 긴밀히 협업을 해야 할 이유가 있기도 했다. 전작인 <베진 초원>이 스케쥴 지연과 시나리오 문제로 엎어지면서 예이젠시테인의 상급자들이 줄줄히 총살당하던 와중이었기 때문. 스탈린이 마지막 기회로 내려준 《알렉산드르 넵스키》마저 망할 경우엔 예이젠시테인 본인의 목도 날아 갈 판이었다. [8] 1948년에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친선'으로 불붙은 대대적인 음악계 숙청 운동이었다. [9] 물론 전혀 사실이 아니다. 쇤베르크 파의 음악이 서유럽에서 젊은 작곡가들에게 폭발적으로 전파되어 비로소 전성기를 맞이한 때는 이 때였다. 물론 이 글은 프로코피예프 본인의 소신과 아무 상관없이 쓴 글이니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10] 로스트로포비치에 따르면 이 때 프로코피예프는 식료품을 구입할 돈마저 부족하여 아침을 굶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11]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는 말년에 갈수록 상대방에게 호의적인 교류를 하는 등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괴팍한 회고록 탓에 프로코피예프에게 적대적인 쇼스타코비치의 이미지가 형성되긴 했지만. [12] 원래 이 상은 사망한 사람에게는 수여하지 않는데 프로코피에프는 예외적으로 수상자가 됐다. [13] 다만 이 공항은 내전으로 파괴되어 버렸는데 자세한 것은 아래 후술. [14] 현재도 프로코피예프는 연주 빈도나 대중적 위상에 비해 음악학계에서의 평가가 다소 미묘한 편이다. [15]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 난이도 끝판왕 수준의 곡으로, 심지어 프로코피예프 본인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 1930년도에 가졌던 공연에서 프로코피예프 본인이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이때 제대로 악보를 따라가지 못해서 연주를 완전히 망쳐버렸을 정도. 다만 후술하는 것처럼 이 곡의 초연 당시의 악보는 화재로 유실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2번 협주곡은 1923년에 사실상 새로 작곡된 곡이다. 초연 당시의 2번 협주곡은 현재 연주되는 2번 협주곡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 초기의 작품인 발레음악 '불새'나 교향시 '나이팅게일의 노래'로 이미 당대 최고의 관현악법을 구사했다는 평을 받았다. [17] 특히 피아노나 하프 등 보조악기들 [18] 프로코피예프는 철저한 '반낭만주의자'였지만 고전기의 작품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애정을 갖고 있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 시절에 고전주의를 자신의 음악의 중요한 모토 중 하나로 삼기도 했다. [19] 쇼스타코비치는 프로코피예프에 대해 교향곡보다는 극음악에서 장점을 발휘한 작곡가라고 보았다. [20] 외국인(러시아인)이라는 불이익도 감안해야 한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6인조의 평범한 수준의 작품이 프로코피예프보다 더 각광을 받는 바람에 프로코피예프가 꽤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21] 특히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런 식으로 말년의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을 옹호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말년에 이르러 프로코피예프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듯했다'며 묘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22] 현재에도 미국에서는 프로코피예프가 가장 잘 연주되는 20세기 작곡가 중에는 무조건 상위권에 속한다. [23] 특히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음악에서 이 토카타적인 요소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런데 정작 프로코피예프 본인은 이 토카타적 요소가 5가지 요소 중 가장 덜 중요하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24]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이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서정적 특징 때문이다. 현대음악에서 경시되고 있는 선율적인 요소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좀더 친숙하게 들릴 수 있었던 것. [25] 쇼스타코비치에 따르면 프로코피예프는 스트라빈스키만 자신의 필생의 라이벌로 여겼으며, 틈만 나면 그의 뒷담화를 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투닥거리면서 서로 챙겨줬던 정이 있는지, 죽기 전에는 친구를 통해 미국에 있는 스트라빈스키의 안부를 물어봤다고 한다. [26] 1940년에 쇼스타코비치가 피아노 5중주를 작곡하여 소련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을 때, 프로코피예프는 쇼스타코비치 면전에서 이 작품을 크게 비판하고 쇼스타코비치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들을 공격해댔다고 한다. 할 말은 하고 만다지만 사회성은 부족한 프로코피예프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 [27] 여러 정황상 쇼스타코비치가 말년의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진심으로 보인다. [28] 프로코피예프가 워낙 여기저기 갈등을 빚고 다니는 성격인지라 '소련 음악의 세 거장'이 서로 비판을 주고받고 견제하는 사이였다는 서술도 있지만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은 분명히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는 사실이 아니다. 즉 프로코피예프만 문제였던 것. [29] 3악장은 그란 투리스모 5의 오프닝곡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30] 영화음악인 "알렉산드르 넵스키"에서 발췌해서 칸타타로 만들었다. [31] 노골적인 어용 음악가 시절의 작품이다. 서정적인 곡조와 달리 가사는 노골적으로 스탈린을 찬양하고 있다. [32] 네 번째 음을 B플랫이 아닌 B로 [33] Sergei Prokofiev: Soviet Diary 1927 and Other Writings. London: Faber and Faber, 1991. [34] 처절하게 우크라이나 국가를 부르다가, 전선 바깥에서 반군의 발포 음성이 들리자 푸틴을 욕하고, 분대장으로 추정되는 자가 "저 좆같은 러시아놈들한테 갈겨!"라는 발포 명령을 내리며 영상이 끝난다. [35] 다만 여러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라흐마니노프가 처음부터 프로코피예프에게 날카롭게 대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