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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아람 일리치 하차투리안 Ара́м Ильи́ч Хачатуря́н Aram Ilyich Khachatur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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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 |
아람 예기아이 하차트랸 (Արամ Եղիայի Խաչատրյան)[1] |
출생 | 1903년 6월 6일 |
러시아 제국 티플리스현 티플리스구 코드조리 (現 조지아 트빌리시 코조리) |
|
사망 | 1978년 5월 1일 (향년 74세)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학력 | 모스크바 음악원 |
활동 | 1926년 ~ 1978년 |
정당 |
[[소련 공산당|]] (1943~1978) |
배우자 | 니나 마카로바 (1933년 ~ 1976년, 사별) |
자녀 | 눈, 카렌 |
종교 | 무종교 ( 무신론)[2] |
서명 |
[clearfix]
1. 개요
아르메니아계 소련인 작곡가 겸 지휘자이다.2. 생애
러시아 제국 캅카스 부왕령 티플리스현 티플리스[3]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조지아인은 아니었고 가족 모두가 아르메니아인 가계였다.[4] 어릴 적부터 아르메니아 전통 음악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민속음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제본공 아버지인 예기아(Եղիա, 러시아어로 일리야) 하차투리안이 벌어오는 얼마 안되는 돈으로 입에 풀칠하는 형편이라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래도 학창 시절 취주악 동아리에서 테너호른( 미국식 영어로는 알토호른)을 독학으로 익혀 연주하는 등 어느 정도 음악 활동은 했다.1921년에는 모스크바의 제2예술극장에서 무대 감독으로 일하던 형 수렌(Սուրեն) 하차투리안을 찾아갔는데, 형 수렌은 생물학을 전공하려던 하차투리안에게 비록 교육은 제대로 못받았지만 음악에 소질은 있으니 음악원에 입학 한 번 해보라고 권유했다. 하차투리안은 처음에는 가방끈도 짧고 해서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미하일 그네신이 세운 그네신 음악원에서 시험을 본 뒤 의외로 바로 합격했다.
처음에는 첼로 연주자를 지망해 세르게이 비치코프와 안드레이 보리샤크에게 배웠지만, 이후 원장인 미하일 그네신이 주관하는 작곡과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작곡가로 진로를 바꾸면서 여러 편의 실내악과 독주곡을 썼다. 1929년에는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옮겨 니콜라이 먀스콥스키와 세르게이 바실렌코에게 각각 작곡과 관현악법을 배웠고, 1934년에 졸업 작품으로 첫 교향곡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과 1940년에는 각각 피아니스트 레프 오보린과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이 호평을 받았고,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1941~42년에는 시베리아에서 피난하면서 자신의 최대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는 발레 '가야네'를 작곡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발레는 전쟁 중임에도 국내외에서 상당히 자주 상연되었고, 1943년에는 발레에서 발췌해 연주회용 관현악 모음곡도 세 곡이 나왔다.
이외에도 전쟁 분위기에 맞추어 소련군을 찬양하는 노래나 행진곡 같은 선전용 작품을 만들기도 했고, 1943년에는 전쟁의 참화와 분노를 다룬 두 번째 교향곡을 발표했다. 이 곡은 그 전에 발표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과 그 후에 발표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 두 작품과 함께 전쟁 중 창작된 소련 교향곡들 중 걸출한 명작으로 선전되면서 국내외에서 자주 공연되었다. 이 무렵 하차투리안은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소련 음악의 세 거성으로 불리며 서방에서도 명성을 떨쳤다.[5]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른 유명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주도한 음악계 숙청에 휘말렸는데, 1943년에 이미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상태였지만 당적을 갖고 있던 것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해 교향곡 3번을 비롯한 신작들이 모조리 형식주의 작품이라고 격하게 비난 당했다.
결국 하차투리안도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아비판을 강요받았고, 대숙청 시대 때 그랬던 것처럼 '명예회복'을 위해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영화의 OST 같은 체제 순응 성향의 작품을 쓰거나 모교인 그네신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 강사로 일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후 찾아온 해빙기에 다시 복권되었고,[6] 1956년에는 가야네에 이어 두 번째 발레 대작 ' 스파르타쿠스'를 발표했다. 이 발레도 마찬가지로 소련 발레 중에는 지금도 생명력을 얻고 있는 명작으로 손꼽히며, 마찬가지로 연주회용 모음곡 세 곡으로 정리되기도 했다.
1950년대 초반 부터는 작곡가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는 지휘자로도 연주회에 자주 출연했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같은 서방 악단과도 공연하고 음반을 만들었다. 1961년부터 1968년 까지는 자신이 협주곡을 이미 남긴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단악장의 협주 작품들인 협주 광시곡들을 하나씩 더 작곡했고, 생애 후반기였던 1970년대 중반에는 현악기들을 위한 무반주 독주곡들을 남겼다.
1978년에 75회 생일을 약 한 달 남겨두고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에 묻혔다.
3. 주요 작품들
3.1. 교향곡
- 교향곡 1번 E단조 (1934)
- 교향곡 2번 E장조 (별칭 '종'. 1943, 1944 개정)
- 교향곡 3번 C장조 (또는 교향시. 1947)
3.2. 관현악곡
가면무도회 모음곡 |
가야네(Gayane) 모음곡 No.3 中 "칼의 춤"(Sabre Dance). 마성의 BGM.[7] 키보드매니아에 수록되기도 했다. |
- 무용 모음곡 (1933)
- 가야네 모음곡 1~3번 (같은 제목의 발레에서 발췌. 1943)
- 가면무도회 모음곡 (같은 제목의 부수음악에서 발췌. 1944)
- 러시아 환상곡 (1944)
-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음곡 (같은 제목의 영화음악에서 발췌. 1949)
- 승리의 시 (1950)
- 발렌시아 과부 모음곡 (1952, 같은 이름의 부수음악에서 편곡)
- 스파르타쿠스 1~3번 (같은 제목의 발레에서 발췌. 1955)
- 환영 서곡 (1958)
- 레르몬토프 모음곡 (1959, 같은 이름의 부수음악에서 편곡)
3.3.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D♭장조 |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
- 피아노 협주곡 D♭장조(1936)
-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1940)[8]
- 첼로 협주곡 E단조 (1946)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광시곡 (1961)
-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광시곡 (1963)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광시곡 (1968)
3.4. 실내악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품 (1926)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레토 (1929)
- 현악 4중주 (1931)
- 클라리넷,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3중주 (1932)
- 바이올린 소나타 (1932)
3.5. 독주곡
- 무반주 첼로를 위한 소나타 환상곡 (1974)
-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독백 (1975)
- 무반주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노래 (1976)
3.6. 피아노곡
- 피아노 모음곡 (1932)
- 토카타 (1932)
- 3개의 소품 (1945)
-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곡집 제1번 (1947)
- 피아노 소나티나 (1959)
- 피아노 소나타 (1961)
-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곡집 제2번 (1965)
3.7. 합창곡
-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1944)
- 여성 독창자, 합창, 바이올린, 하프와 관현악을 위한 '환희의 송가' (1956)
- 독창과 관현악을 위한 '조국에 대한 담시' (1961)
3.8. 발레
- 가야네 (1941-42)
- 스파르타쿠스 (1954)
4. 수상 경력/주요 직위
- 사회주의노력영웅 (1973)
- 레닌훈장 3회 (1939, 1963, 1973)
- 10월 혁명 훈장 (1971)
- 노력적기훈장 2회 (1945, 1966)
- 소련 인민예술가 (1954)
- 러시아 인민예술가 (1947)
- 아르메니아 인민예술가 (1955)
- 그루지야(조지아) 인민예술가 (1963)
- 아제르바이잔 인민예술가 (1973)
- 러시아 공훈예술가 (1944)
- 아르메니아 공훈예술가 (1938)
- 레닌상 음악 부문 (1959)
- 소련 국가상 (1971)
- 국가 스탈린상 예술 부문 4회 (1941 2급, 1943 1급, 1946 1급, 1950 1급)
- 아르메니아 국가상 (1965)
- 소비에트 최고 회의 의원 (1958~62)
- 동독 예술원 회원 (1961)
5. 창작 성향
어릴 적부터 친숙했던 아르메니아를 비롯해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캅카스 지역과 터키, 이란, 여타 중앙아시아의 전통음악 소재를 특히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음악원 학생 시절 작곡된 작품들도 러시아 5인조 선배들처럼 국민악파 스타일로 고향의 민요 선율을 도입하거나 그 양식을 따르고 있다.졸업 후에는 여기에 강렬한 불협화음이나 쉴새 없이 반복되는 격렬한 리듬 등 모더니즘 요소를 더했고, 이렇게 해서 성공시킨 작품들이 협주곡들과 발레들이었다. 특히 '가야네'에 나오는 칼춤(Sabre Dance)는 엄청나게 몰아붙이는 듯한 8비트 리듬과 관악기의 날카로운 연주가 곁들여져 하차투리안 작품 중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다. 반대로 같은 발레에 나오는 아다지오의 경우 토속성과 서정성을 겸비한 것으로 유명하며,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도 다른 클래식 작품들과 함께 OST로 사용된 바 있으며, 에이리언 2의 엔드 크레딧 음악에도 짧게 인용되었다.
물론 다른 러시아/소련 작곡가들처럼 왈츠 같은 서구에서 유래한 춤곡이나 그 양식의 음악도 곧잘 썼고, '가면무도회'에 나오는 단조의 멜랑콜리한 왈츠가 특히 유명하다. 다만 교향곡 같은 순수 기악 작품에서는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예프만큼의 명성은 얻지 못했으며, 3번의 경우 지나치게 비대해 보이는 편성[9] 때문에 높으신 분들에게 과대망상 형식주의 작품이라고 까였고, 지금까지도 실제 연주 기회가 뜸한 편이다. 그래도 그 중 협주곡은 특유의 춤곡 분위기도 잘 살렸고, 독주자의 기교도 드러낼 수 있어서, 자신의 레파토리를 넓히려고 약간 독특한 곡을 원하는 독주자들이 종종 선택해서 다른 기악곡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연주 기회가 많은 편이다.
6. 사생활
꽤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예프와 달리 비교적 큰 말썽 없이 가정을 꾸리고 살았는데, 모스크바 음악원 재학 시절 먀스콥스키의 문하생으로 만나 사귀기 시작했던 작곡가 니나 마카로바(1908-1976)와 결혼해 평생을 해로했다. 이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카렌 하차투리안은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고, 이름이 똑같은 조카(1920-2011)는 삼촌과 마찬가지로 작곡가로 활동했다. 또 다른 조카 에민 하차투리안(1930-2000)도 지휘자로 활동하는 등, 가문에서 꽤 많은 음악 관련 종사자가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창작 인생 초반에 걸쳐 상당히 유명한 곡들을 숨가쁘게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하차투리안에 대해서는 '게으른 작곡가였다'는 증언들이 많다.[10] 그만큼 일할 만큼만 일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확실한 결과물을 내놓는, 경제적인 타입의 작곡가였을지도 모른다.
7. 그 외
강사/교수직을 지내면서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대부분 소련이나 여타 사회주의 국가 혹은 제3세계 출신 학생들이 하차투리안의 문하생으로 거쳐가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발레 등 리드미컬한 곡의 작곡자로 지나치게 유명했고, 자신도 그걸 자각하고 있었는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특히 선율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고 한다.이들 제자 중에는 월북 작곡가로 유명한 김순남도 있었고,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을 가르치면서 꽤 재능 있는 학생이라고 치켜세우면서 김순남이 작곡한 노래 '조선 빨치산의 노래'를 러시아어 번안 가사로 편곡해주기도 했다.[11] 하지만 김순남은 한국 전쟁 후반에 북한에서 귀국하라는 지시에 따라 얼마 배우지 못하고 떠나야 했고, 귀국 후 숙청과 복권을 반복하다가 결핵으로 인해 제대로 활동을 못하고 사망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현재까지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인물로 아르메니아 음악을 세계화했다고 평가되어 큰 존경을 받고 있다. 같은 아르메니아계로 저명한 작곡가인 앨런 호바네스나 유명 밴드 시스템 오브 어 다운 등을 생각해보았을 때, 아르메니아는 많지 않은 인구에 비해 음악적 저력이 꽤나 강한 나라이다.
그의 악보와 영화음악 자료들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8. 둘러보기
[1]
Aram Eġiayi Xačʿatryan. 그의 이름인
Խաչատրյան의 아르메니아어 발음은 [χɑtʃʰɑtˈɾjɑn\]이므로 하차투리안이 아닌 하차트리안 내지는 하차트랸으로 표기해야 하나 러시아어 표기나 영어 표기가 널리 통용되는 탓인지 하차투리안이라는 표기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어로는 아람 일리치 하차투랸(Арам Ильич Хачатурян),
영어로는 애럼 카처투어리언(Aram Khachaturian)으로 표기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아람 일리치 하탸투랸"으로 표기를 심의했으나, 2021년 재심의를 통해 "아람 일리치 하차투랸"으로 표기를 정정했다. 사실 러시아어 표기나 아르메니아어 표기를 봐도 '탸'가 나올 여지가 없었던지라 이전 표기는 명백한 오류였다.
[2]
Bill Dunn, "
Aram Khachaturian", Freedom from Religion Foundation
[3]
現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
[4]
트빌리시는 원래 동부 아나톨리아 반도처럼 아르메니아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5]
'소련 3대 작곡가'라는 호칭은
마치 공신력 없는 일본 매체가 무작위로 붙인 듯한 느낌이 나지만, 1940년대의 유력한 서방 언론들이 이미 거론하며 즐겨 사용한 표현이었다(Three Titans of Soviet Music). 물론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천재성과 생산성이 워낙 압도적인 만큼 하차투리안은 평가에 있어 그에 못 미치는 느낌이 나지만, 보통은 세 명을 꼽으라 할 때
카발레프스키 대신 하차투리안이 거론되는 편이다.
[6]
에둘러 자신의 입장을 암시한 쇼스타코비치와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여 음악적 해빙을 촉진시켰다.
[7]
흡사
톰과 제리의 경쾌하고 익살스러운 추격전이 연상되는 듯한, 명랑하고 천진난만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8]
프랑스의
플루트 연주자인
장 피에르 랑팔(Jean-Pierre Louis Rampal, 1922-2000)이 작곡가 하차투리안의 제안으로 1968년에 이 곡을 플루트 협주곡 버전으로 편곡한 바 있으며, 관현악 파트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바이올린 솔로 파트만 플루트 솔로 파트로 편곡한 것이다. 하차투리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플루트 협주곡으로 편곡한 버전 또한 플루트 독주자들에게 유명한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9]
3관 편성의
관현악단에
트럼펫 주자 15명(!!!), 그리고
파이프오르간까지 동원된다. 트럼펫 주자들은 모두 숙련된 인물들이 필요하고, 오르간의 경우
딥 퍼플의 존 로드가 했을 법한 속주를 퍼붓는 등 기교적으로 꽤 까다로운 곡이다.
[10]
쇼스타코비치나
리흐테르가 하차투리안의 이런 느긋한 성향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11]
이 편곡은 하차투리안의 다른 편곡 작품들과 함께 작품 전집 악보에도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