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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레프 톨스토이 Лев Толстой | Leo Tolsto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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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Гра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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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8년 9월 9일 | ||
툴라현 크라피브나군 야스나야 폴랴나[2] (現 중앙 연방관구 툴라주 쇼키노군 야스나야 폴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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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0년 11월 20일 (향년 82세) | ||
랴잔현 라넨부르크군 아스타포보역 (現 중앙 연방관구 리페츠크주 레프 톨스토이군 레프 톨스토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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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툴라주 야스나야 폴랴나 |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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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소설가, 시인, 극작가, 철학자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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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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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 카잔 황립 대학교 (법학 / 중퇴) | |
사조 |
그리스도교
아나키즘 채식주의 리얼리즘 지공주의 톨스토이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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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간 | 1847년 – 1910년 | ||
신체 | 181cm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파문) → 톨스토이주의[3] | ||
부모 |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1794~1837), 어머니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톨스타야[4] (1790~1830) | ||
배우자 |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톨스타야[5] (1862년 결혼) | ||
자녀 | 14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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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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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소설가이자 사상가.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레프 톨스토이/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특징
톨스토이는 현실주의 소설의 대가로서, 그의 두 가지 장편인, 전쟁과 평화 및 안나 카레니나로 유명하며, 이 작품들은 통상 이제까지 쓰여진 가장 훌륭한 소설들로서 여겨지고 있다. 전쟁과 평화는 특히 사실상 많은 독자들과 비평가들을 위해 이런 형식을 정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톨스토이의 단편작들 중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lyich)은 보통 중편 소설의 가장 훌륭한 예들로 분류된다. 특히 그의 만년의 삼십 년 동안 톨스토이는 또한 도덕 및 종교 선생으로서 세상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신조인 악에 대한 비폭력 저항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비록 톨스토이의 종교적 사상들이 더 이상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관심을 끌지는 못하지만, 그의 삶과 성격에 대한 흥미는, 무엇보다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관심이 증가되었다.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튜 아놀드는 "톨스토이의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삶의 파편이다."라고 말했다. 20세기의 러시아 작가인 아이삭 바벨은 논평하기를, "만일 세상이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쓸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의식에 대한 지극히 작은 변화들도 관찰하며 신체의 미미한 움직임들도 기록하는 그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다른 소설가들은 의식의 한 가지 단일한 행위로서 묘사하는 것을, 톨스토이는 일련의 무한히 작은 단계로 그럴듯하게 쪼개어 나간다. 영국의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에 의하면, 그는 당연히 톨스토이를 "모든 소설가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여겼는데, 이와 같은 관찰력들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끌어내었으며, 그들은 "톨스토이가 우리들 위에 고정하고 있는 시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만년의 톨스토이를 방문한 사람들 역시 그가 자신들의 내뱉지 않은 사상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의 무척 불편한 느낌들을 이야기하였다.
톨스토이를 그의 능력들에서 신처럼, 그리고 인간의 조건들의 제약들을 탈피하려는 그의 투쟁들에서 거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자연과 순수한 활력의 현신으로 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를 세상의 양심의 화신으로 보았으나, 그를 알고 있는 또는 그의 작품들을 읽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단지 이제까지 생존하였던 가장 위대한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살아있는 상징이었다.
3.1. 초기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서, 톨스토이는 '유년시절'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가 편집장인 유명한 잡지인 소브레메니크 ("현대인")에서 출판하기 위해 기고하였다.네크라소프는 열광하였으며, 익명으로 출판된 작품은 두루 칭찬 받았다. 다음 몇 년 동안 톨스토이는 캅카스에서의 자신의 경험들을 토대로 한 많은 이야기들을 출판하였으며, "Nabeg"(1853, "습격") 및 크리미아 전쟁 중의 세바스토폴 포위에 대한 세가지 스케치들 - "Sevastopol v dekabre mesyatse " ("12월의 세바스토폴"), "Sevastopol v maye " ("5월의 세바스토폴"), 그리고 "Sevastopol v avguste 1855 goda" ("8월의 세바스토폴"; 모두 1855-56년에 출판되었음) - 이 포함되었다. 처음의 스케치는, 무명의 병사들의 용기를 다루었는데, 황제에 의해 칭찬 받았다. 마치 여행 안내처럼 2인칭으로 쓰여졌으며, 이 이야기는 역시 톨스토이의 엄격한 실험에 대한 예리한 관심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관찰함에 있어서의 도덕성에 관한 그의 평생의 관심을 증명해준다. 두 번째의 스케치는 폭격에 죽기 직전의 병사의 (이런 장치의 초기의 사용들 중의 하나인) 의식의 흐름을 담은 긴 구절을 포함한다. 이야기의 유명한 말미에서, 작가는, 그의 어느 등장인물도 진정으로 역사적이 아님을 언급한 뒤에, "나의 이야기의 영웅 - 나는 영혼의 모든 힘으로 그를 사랑한다... 그는, 지금도 그리고 언제나 아름다울 것이다 - 은 진리이다"라고 단언한다. 독자들은 그 이후로 톨스토이의 그와 같이 "절대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 주목을 해왔으며, 이 언어는 흔히 미학적으로 효과적인 현실주의적 소설문학을 붕괴시킨다.
크리미아 전쟁 후에 톨스토이는 군대에서 물러났으며 제일 먼저 성 페테스부르크의 문학세계에서 환영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가시 돋친 자만심, 어떤 지적 진영에도 가입할 것에 대한 거부, 그리고 자신의 완전한 독립의 고집은 곧 급진적인 지식인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그는 자신의 평생을 통하여 "의고주의자(擬古主義者)"로 있으면서, 지배적인 지적 경향들과 반목하였다. 1857년에 톨스토이는 파리를 여행하였으며 자신의 돈을 도박으로 날린 뒤에 돌아왔다. 러시아에 돌아 온 후에, 그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은 교육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유지에 농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교육 이론 및 실제를 공부하기 위하여 서부 유럽을 여행한 뒤에, 그는 12호의 잡지, Yasnaya Polyana (1862-63)를 발행하였으며, 이것들에는 그의 도발적인 논문들인 "Progress i opredeleniye obrazovaniya" ("진보 및 교육의 정의") - 여기서 역사가 어떤 내재적인 법칙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 , 그리고 "Komu u kogu uchitsya pisat, krestyanskim rebyatam u nas ili nam u krestyanskikh rebyat?" ("누가 누구의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가: 우리의 자녀들인 농부 아니면 농부의 자녀들인 우리?") - 여기서 문제에 대한 통상적인 답변을 뒤집는다 - 를 포함하였다. 톨스토이는 1862년 저명한 모스크바의 내과 의사의 딸인 소피야 (소냐)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하였으며, 곧 그의 모든 힘들을 그의 결혼 및 전쟁과 평화의 집필에 쏟았다.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는 13명의 자녀들을 낳았다(그 중 3명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1850년대와 1860년대의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자신의 도덕적 및 철학적 관심들을 표현하려는 새로운 형식들을 가지고 실험하였다. '유년시절'에 이어서 그는 곧 Otrochestvo (1854; 소년시절) 그리고 Yunost (1857; 청년)을 추가하였다. 많은 이야기들이 유일한 반자서전적인 주인공인, 드미트리 네클루도프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는 후일 톨스토이의 소설인 '부활'의 영웅으로 재등장하였다. "Lyutsern"(1857; "루선")에서, 톨스토이는 한 사건을 언급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서 시간을 초월한 의미를 숙고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명상들의 과정에 대해 숙고한다. "Tri smerti" (1859; "세 사람의 죽음들")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없는 귀부인의 죽음, 죽음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한 농부, 그리고 그 철저한 자연의 목적이 인간의 기만과 대비되는 한 그루의 나무의 죽음들을 묘사한다. 오직 작가의 초월적인 의식만이 이들 세 사건들을 묶어줄 뿐이다. "Kholstomer" (1863년 작; 1886년 개정 출판; "Kholstomer"; "말의 이야기")는 인기 있는 톨스토이적인 장치인 "어색함"의 극적인 사용으로 유명해졌다--, 즉, "친숙한 사회적 관습들을 당연히 여기지 않는 한 관찰자의 "순박한" 관점에서 시작되는 묘사이다. 독자들은 "Kholstomer"의 주인공이자 주된 화자가 늙은 말인 것을 발견하고는 충격 받았다. 무척 많은 톨스토이의 초기 작품들처럼, 이 이야기는 인간 사회의 기만과 인습성을 풍자하고 있으며, 이는 또한 톨스토이의 소설 '카자키'(1863; 코사크 사람들)를 지배하였던 주제이다. 이 작품의 영웅인, 방탕하며 자기 중심적인 귀족, 드미트리 올레닌이 캅카스에서 복무하기 위하여 장교로 입대한다. 코사크 사람들 안에서 살면서, 그는 자연과 생체 리듬들에 더욱 가까운 삶을 감사히 여기게 된다. 소설의 중심 장면에서, 올레닌은 숲속에서 사냥하던 중에,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은 심지어 한 마리 모기라도 "바로 나 자신과 같이 단지 그렇게 별개의 드미트리 올레닌"인 것을 지각한다. 자신이 과거 삶의 헛됨을 깨닫고서, 그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한다.
3.2. 중기
행복하게 결혼하여 야스나야 폴리야나에 자신의 아내 그리고 가족과 안착한 뒤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창의력의 절정에 도달했다. 톨스토이는 1860년대의 나머지 해들을 '전쟁과 평화'의 집필에 쏟았다. 그리고 나서, 표트르 대제 1세에 관한 소설을 쓸 것을 생각하였으며 잠시 교육(널리 사용된 독서용 초급 독본을 만들어내었다)으로 돌아갔던 막간의 기간 뒤에, 톨스토이는 그의 또 하나의 위대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하였다. 이들 두 작품은 일상생활과 지루한 미덕의 이해에 뿌리를 둔 인간의 경험에 대한 환상을 공유한다.'전쟁과 평화'는 세가지 자료들 - 나폴레옹 시기의 전쟁들에 관한 역사적인 해설, 허구적 인물들의 전기들, 그리고 역사의 철학에 관한 일단의 수필들 - 을 담고 있다. 1860 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비평가들은 어째서 이들 세 부분들이 밀착할 수 있는지 놀라고 있으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톨스토이가 장문의 수필들을 포함한 것을 트집잡고 있으나, 독자들은 줄어들지 않는 열정으로서 계속해서 그것들에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작품의 역사 관련 부분은 아우스터리츠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승리로 이끌고간 1805년의 전투, 평화의 시기, 그리고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정된 시각들과는 반대로,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을 무능하며, 자기중심광적인 어릿광대로, 황제인 알렉산더 1세를 역사가들이 그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에 집착하는 공언가로, 그리고 러시아인 장군인 미카일 카투조프(이전에는 비난 받았다)를 인간의 의지와 계획의 한계들을 깨닫고 있는 참을성 있는 노인으로 묘사한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소설의 전쟁 장면들로서, 전투는 혼란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장군들은 그들이 "모든 부수적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상상할지 모르지만, 전쟁은 정말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 의하여 순간에 결정되는 "수백만 가지의 다양한 우연들"의 결과이다.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는, 어떤 제도 또는 모델도 인간 행동의 무한한 복잡성에 대한 설명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소설책의 허구적 인물들 중에서, 독자들의 관심은 제일 먼저 안드레이 볼콘스티 공작에 초점이 주어지는데, 그는 모든 것을 가짜이며 천박하거나 단순히 진부한 것으로 경멸해 온 거만한 사람이다. 상류 사회의 위선을 인정하면서 그는 영광을 얻기 위하여 군대에 들어가며, 이것을 그는 진정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여긴다. 아우스터리츠에서 심하게 부상당하고 나서, 그는 영광과 나폴레옹을 성 페테스부르크의 사교모임들만큼이나 시시한 것으로 보게 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안드레이 공작은 자신이 헌신하였던 활동들에 대하여 되풀이하여 공허함을 발견한다. 1812년 그의 죽음에 대한 톨스토이의 묘사는 흔히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효과적인 장면들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소설의 또 하나의 주인공은, 실수를 연발하며 성실한 피에르 베주코프로서, 모든 의문들을 해결할 것을 약속해 주는 어떤 철학적 체계에 대한 믿음과 그를 무감각한 절망으로 밀어 붙일 만큼 절대적인 상대성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는 적어도, 지혜는 체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의 삶의 평범한 진행과정들에서 발견되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톨스토이적인 진리를 발견하며, 특별히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주인공인 나타샤와 그의 결혼에서 그러하다. 책이 멈출 때에 - 사실 그것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칠 뿐이다 - 피에르는 새로운 유토피아적 계획에 대한 그의 흥분으로 이런 교훈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흥미 없고 일상적인 활동들이 삶을 유익하거나 악하게 만든다는 톨스토이의 사상과 관련하여, 책 속의 진정한 지혜 있는 인물들은 지식인들이 아니라 단순하며 점잖은 병사인 나타샤의 형제인 니콜라이, 그리고 관대하며 신앙심이 깊은 여자인 안드레이의 누이 마리아이다. 그들의 결혼은 소설의 중심적인 진부한 가치들을 상징한다. 전쟁과 평화에 들어 있는 수필들은 책의 두 번째 중반부에서 시작하는데, 역사에 관한 일반 법칙들을 세우려 하는 모든 시도들을 풍자하며, 모든 역사적 서술들을 지지하는 무분별한 억측들을 거부한다. 톨스토이의 관점에서, 역사는 전쟁처럼 근본적으로 우연성의 산물이고, 아무런 방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무런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들의 원인들은 무한히 변하며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역사에 관한 서술은 과거를 설명한다고 주장하지만 필연적으로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역사적 기술들의 형태는 사건들의 사실적 과정이 아니라 이전의 역사적 서술들에 의해서 확립된 근본적으로 문학적인 기준들을 반영한다. 톨스토이의 수필들에 의하면, 역사가들도 역시 수많은 다른 긴밀히 연결된 오류들을 범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가 위대한 사람들 -장군들이거나 정치 지도자들이거나 또는 그들과 같은 지식인들 -의 계획들과 사상들로서 모양을 가지며 그 방향은 주요 결정들에 이르는 극적인 순간들에서 결정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사실상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비록 그들의 행동들이 문서화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취해지는 무수히 많은 작은 결정들의 총계에 의하여 만들어 진다. 톨스토이가 설명하듯이, 거대한 사건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오직 나무의 꼭대기만이 보이는 먼 지역의 시각으로부터 그 지역이 오로지 나무들만 포함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소설은 그 독자들에게 제각기 작은 영향을 행사하는 조그만 사건들의 무수한 예들을 준다 -- 바로 그것이 전쟁과 평화가 너무 길다는 한가지 이유이다. 평범한 것의 효용성과 제도 구축의 무용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신념은 그 시대의 사상가들과 그를 대치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가장 논란이 되는 측면들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안나 카레니나(1873-77)에서 톨스토이는 이와 같은 사상들을 가족의 삶에 적용하였다. 소설의 첫 번째 문장은 가정적인 관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마도 톨스토이의 가장 유명한: "모든 행복한 가정들은 서로 닮아 있다; 제각기 불행한 가정은 그 나름대로 불행하다"일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세 가정 - 오블론스키, 카레닌 및 레빈 - 의 이야기들을 엮어 간다. 소설은 오블론스키의 가정에서 시작되는데, 그곳에선 참을성 많은 돌리가 그녀의 다정하며 방탕한 남편 스티바의 부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의 친절함, 그녀의 가족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일상 생활에 대한 관심 안에서, 돌리는 소설 속의 도덕적 나침반으로 서게 된다. 대조적으로, 스티바는 비록 결코 악을 바라진 않지만, 재산을 낭비하고, 자신의 가족을 등한시하며, 그리고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여긴다. 스티바가 상징하는 것은 아마도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매 순간마다 내리는 조그만 도덕적 선택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암시하도록 구상된 것이다. 스티바의 누이인 안나는 뻣뻣하고 현실적이지만, 다른 면에선 정부 각료인 알렉세이 카레닌의 아내로, 그리고 어린 소년 세리오자의 어머니로 소설을 시작한다. 그러나 안나는 자신을 낭만적 소설의 주인공으로 상상하여, 스스로 장교인 알렉세이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도록 한다. 그녀의 남편에게서 오직 최악만을 보도록 훈련하고서, 그녀는 결국 브론스키와 살기 위해 그와 그녀의 아들을 떠난다. 소설 전체를 통하여, 톨스토이는 사랑에 대한 낭만적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 그 자체인 것으로 동일시하는데, 우월한 종류의 사랑, 즉, 훌륭한 가정들의 편안한 사랑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안나는 그녀의 남편과 자식을 버린 데 대한 양심의 고통을 겪으며, 거의 미친 상태에 그리고 현실과의 완전한 격리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를 속이는 습관을 발전시킨다. 그녀는 마침내 기차 밑으로 뛰어들면서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가 삶에 대해 틀리게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자각은 오직 그녀가 철길 위에 누워 있을 때 그녀에게 다가오고,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세 번째의 이야기는 돌리의 누이인 키티와 관련한 것으로, 그녀는 처음에 자신이 브론스키를 사랑한다고 상상하지만 그때 진정한 사랑은 그녀 가정의 오랜 친구인, 콘스탄틴 레빈에 대해 가진 편안한 느낌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구애, 결혼, 그리고 가정의 평범한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며, 삶의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행복과 의미 있는 존재를 다듬어 나간다. 소설 전체를 통하여, 레빈은 죽음에 직면하는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의문들에 의해서 고통 받는다. 비록 이런 의문들은 결코 답을 얻지 못하지만, 그것들은 레빈이 자신의 가정과 일상의 일에 전념하면서 올바르게 살기 시작할 때 사라진다. 그를 창조한 톨스토이처럼, 레빈은 지식인들의 체계들을 위선이며 삶의 복잡함을 껴안을 수 없다고 여긴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에서 공히 윤리학은 특정한 상황들에 적용되는 시간을 초월한 원칙들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사상을 전개한다. 오히려 윤리학은 감수성에 의존하며 평생을 통하여 특정한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특정한 상황들로 발전된다. 톨스토이의 추상성들에 대한 특수성의 선호는 종종 그의 사상의 특성으로 묘사된다.
3.3. 종교적 신념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자마자 톨스토이는 깊은 존재적 절망감에 빠지며,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Ispoved (1884; 나의 고백)에서 묘사하고 있다. 죽음을 맞이할 때에 모든 활동은 철저히 의미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보통 사람들의 신앙에 감명을 받고서 종교에 귀의하였다. 처음엔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러시아 정교에 몰두하였으나, 그는 신속히 그것과 모든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속속들이 왜곡한 부패한 단체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믿은 것이 그리스도의 메시지임을 발견하고서 그리고 죽음에 대한 무기력한 두려움을 극복한 뒤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의 나머지를 그의 새로운 신앙을 발전시키며 전파하는 데 헌신하였다. 그는 1880년대 초기에 그는 세 편의 긴밀히 연관된 작품들, Issledovaniye dogmaticheskogo bogosloviya (1880년에 집필; 교리적 신학의 연구), Soyedineniye i perevod chetyrokh yevangeliy (1881년에 집필; 4 복음서의 합일과 해석) 및 V chyom moya vera? (1884년에 집필; 나는 무엇을 믿는가)를 집필하였다. 그는 후일 Tsarstvo bozhiye vnutri vas (1893;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및 많은 다른 논문들 및 소 논문들을 집필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톨스토이는 모든 성례들, 모든 기적들, 삼위 일체, 영혼 불멸 및 많은 다른 전통적 종교의 강령들을 거부하였으며,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특별히, 산상 설교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의 참된 메시지를 흐리게 하는 것들이라고 여겼다. 그는 구약성서 및 많은 부분의 신약성서를 거부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그리스어를 연구한 뒤에 자기 자신의 "교정된" 복음서 버전을 창작한 이유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서 그가 일컫는 바, "예수라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며 오직 삶에 대한 진실한 설명에 도달한 현명한 사람이었다. 톨스토이의 종교적 의례의 거부는 안나 카레니나에서의 자신의 경향과 두드러지게 대조되는데, 그곳에서 종교는 교리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전통적인 형태들로서 보여지고 있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 당하였다.긍정적으로 말하자면, 톨스토이의 과거 수십년 간의 그리스도교는 다섯 가지 신조를 강조하였다: 화를 내지 말라, 정욕을 갖지 말라, 맹세를 하지 말라, 악에 저항하지 말라, 그리고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악에 대한 무저항은 간디에게 영감을 준 교리로서, 악이 반드시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한 방법, 특히 폭력으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톨스토이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정부가 그들의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폭력의 위협에 의존하기 때문에, 톨스토이는 일종의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병역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투표나 법정에 호소함을 삼가라고 권고했다. 그는 그러므로 자신의 유언을 작성하거나 심지어 유익한 사업들에도 저작권에 의하여 확보된 로열티들을 사용할 때에 상당한 내적인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톨스토이는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는 것에 성공하지 못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 (약속들을 포함하여) 맹세들에 반대하는 명령을 자신의 초기 작품으로부터 각색한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미래를 아는 것의 불가능성, 그러므로 사전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위험이 그것이었다. 정욕에 반대하는 계명은 결국 그로 하여금 완전한 금욕을 이상으로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는 남자에 관한 어두운 중편소설인 그의 Kreytserova sonata [1891; 크로이체 소나타]에 대한 후기에서) 제안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아내는 이미 그들의 억지스런 관계를 걱정하면서 거부하였다. 그의 가장 극단적인 사상들을 수호하기 위하여, 톨스토이는 그리스도교를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지니게 되는 등불과 비유하였다; 그것은 인류가 영적으로 진보함에 따라서 언제나 새로운 도덕적 영역들을 밝히며 언제나 더 높은 이상들을 드러낸다.
3.4. 말기
안나 카레니나 이후 톨스토이의 소설문학은 두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도덕적 이야기들을 썼는데, "Gde lyubov, tam i bog" (1885년 기록;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 "Chem lyudi zhivy" (1882년 기록;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리고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세계의 문학이 아는 한 가장 훌륭한 이야기"라고 다소 지나치게 칭찬하였던, "Mnogo li cheloveku zemli nuzhno" (1885년 기록; "사람은 얼마나 많은 토지가 필요한가") 등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톨스토이는 현실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교훈적인 소설을 썼다. 이들 작품들 중 일부는 멋지게 성공하였으며, 특히 Smert Ivana Ilicha (1886년 기록; 이반 일리치의 죽음)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으며 자신의 삶이 사소한 것들에 낭비되었음을 점차 깨닫는 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중편소설이다. Otets Sergy (1898에 작성; 신부 세르지오스)는, 톨스토이의 자아 비판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으로, 성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성자는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오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말해준다. 거대한 성인으로 여겨지지만, 세르지오스는 자신의 명성이 근거 없음을 깨닫게 된다; 꿈으로 경고를 받고서, 그가 어릴 때부터 알아왔던 소박하며 기품 있는 여자를 찾기 위해 몰래 탈출한다. 마침내 그는 그가 아니라 그녀가 성자이며, 참된 성자는 자기 자신의 일상적인 선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임을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그러므로 톨스토이가 그의 초기의 위대한 소설들의 시각으로부터 자신의 개종 후에 옹호하던 사상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1899년 톨스토이는 그의 세 번째로 긴 소설인, Voskreseniye (부활)을 출판하였다. 그는 그의 로열티를 박해 받던 종교적 분파인 두호보르의 캐나다로의 이주를 지불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소설의 주인공, 나태한 귀족인 드미트리 네클루도프로는 배심원으로 나갔다가 피고를 알아보는데, 창녀인 카추사 마슬로바를 그가 과거에 유혹한 적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그녀를 범죄적 삶으로 내몬 것이었다. 그녀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 받은 후에 그는 그녀를 따라가기로, 그리고 만약 그녀가 동의한다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소설의 가장 주목할 만한 대화에서, 그녀는 그의 위선에 대해 비난한다: 과거에 당신은 나로부터 쾌락을 찾았으며, 이제 당신은 나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하는군요.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소설이 끝나가면서, 네클루도프는 마침내 그가 톨스토이적인 진리들을, 특히 다른 사람들을 판단함에 대한 어리석음을 이해하면서 영적인 각성을 성취한다. 소설의 가장 유명한 장들이 교회와 법률 제도를 풍자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개종은 그에게 예술에 관한 한 권의 책과 여러 편의 논문들을 쓰도록 하였다. 때때로 그는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그가 언제나 주장하던 사상들을 표현하였지만, 또한 때때로 그는 자기 자신의 초기 소설들과 양립하지 않는 사상들을 지지하였으며, 초기의 것들을 거부하였다. Chto takoye iskusstvo? (1898; 예술은 무엇인가?)에서 그는 참된 예술은 특정한 경험에, 즉 명제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염"에 의해서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매우 구체적인 느낌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톨스토이의 시각에서, 높은 예술성을 가진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실제적 경험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 예술의 영리한 모방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실상 전혀 예술이 아닌 "위조된" 작품들이다. 톨스토이는 더욱이 참된 예술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며, 이는 주어진 작품들이 청중을 물들이는 도덕적 감각력에 달려있다. 대부분의 인정된 대작들을, 셰익스피어의 희곡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위대한 소설들을 포함하여 모조이거나 악하다고 비난하면서, 톨스토이는 칭송의 목적으로 문학 작품 중에선 실러와 위고와 디킨스의 작품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은 자의 집]과 성서의 요셉 이야기 등을 선별하였다. 책에 싣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후배 작가들로는 안톤 체호프와 막심 고리키 등이 있었으며, 특히 그의 젊은 친구인 안톤 체호프에 대해선 '그의 표현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체호프의 드라마에는 냉담하였으며, 어느 유명한 재담에서 한번은 체호프에게 그의 희곡이 셰익스피어의 것들보다 훨씬 조잡하다고 말했다.
톨스토이의 만년의 작품들에는 또한 풍자극 Zhivoy trup (1900년 작; 살아있는 시체), 그리고 농부의 삶에 대한 비참한 희곡, Vlast tmy (1886년 작; 어둠의 힘)을 포함한다. 그의 사후에, 수많은 출판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가장 주목받는 것은 중편 소설 Khadji-Murat (1904; 하지무라트)로서, 톨스토이의 초기 소설을 연상케 하는 캅카스에 대한 훌륭한 작품이다.
4. 작품 목록
4.1. 장편
<rowcolor=#fff> 작품명 | 발매 연도 | 장르 |
전쟁과 평화 | 1869 | 전쟁, 역사물, 연애, 철학 |
안나 카레니나 | 1878 | 픽션, 사실주의 |
부활 | 1899 | 철학, 정치 |
자전 소설 3부작 '유년시절' '소년시절' '청년시절[6] | - | 자전, 성장 |
4.2. 중단편
- 세바스토폴 이야기
- 캅카스의 포로
- 바보 이반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 하느님은 아시지만 기다리신다
- 세 현자들
- 하지 무라트 - 캅카스 전쟁 시기 북캅카스의 체첸 일대에서 용맹을 떨친 아바르인 전사 하지 무라트의 삶을 그린 중편소설이다. 1896년 8월부터 쓰기 시작해서 8년이 지난 1904년이 되어서야 완성한 작품이다. 참고로, 하지 무라트는 실존인물이며, 톨스토이가 그 사람의 일대기를 약간 각색해서 자서전+소설 형식으로 쓴 책이다.
- 크로이체르 소나타
- 가정의 행복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악마
- 위조 쿠폰 - 사후 발간. 로베르 브레송이 〈 돈(L'Argent)〉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레송에게도 마지막 영화다.
- 예르마크 - 이반 4세 때 시비르 칸국을 원정하여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을 시작한 카자크 족장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 1532년 ~ 1585년 8월 6일)의 이야기.
4.3. 사상
- 예술이란 무엇인가
- 참회록(고백록)
- 교회와 국가
- 인생론
- 인생독본
5. 평가
자세한 내용은 레프 톨스토이/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여담
- 아내 소피야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아이들을 두었고 그 중 다섯은 어린 시절에 죽었다. 하지만 사실 톨스토이에겐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하녀 아크시니야 바지키나와 결혼전에 관계로 인해 낳은 사생아 아들이었지만,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었다. 티모페란 이름의 이 아이는 마구간 지기, 산지기로 평생을 살았다. 톨스토이는 결혼 전에 있었던 자신의 옛 여자관계를 비롯한 자신의 15년 간의 과거를 적은 일기를 예비 신부 소피야에게 보여준 뒤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도박으로 수많은 재산을 날렸고 온갖 여자들; 집시, 창녀, 어머니 친구들의 농노들과 관계한 사실은 물론 사생아까지 있다는 사실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레빈이란 인물에 투영한다. 레빈이란 인물 역시 자신의 더럽고 방탕한 과거와 무신앙을 고백한 일기장을 키티에게 건네고 결혼 승낙을 받아낸다. 그외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방탕과 무신앙에 대해 처절하게 회개한 참회록을 남겼고 그의 참회록은 아우구스티누스,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과 더불어 세계 3대 참회록으로 꼽힌다.
- 이런 독특한 남편 때문에 소피야는 대단히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유모도 없이[7] 혼자서 13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물론 톨스토이의 글을 일일이 읽고 필체를 교정하는 작업을 맡아야 했다. 게다가 노년에 겨우 대문호의 아내로서 편안하게 사는가 했더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갑자기 남편이 모든 재산을 버리고 뛰쳐나가려 하니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또한 톨스토이가 지나치게 대문호로 추앙받은 나머지 소피야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처럼 '위대한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악처' 취급을 받기도 했다. 소피야는 고된 결혼생활을 했는데 그나마 작품 교정과 정서 작업을 할 때만이 몸은 고되나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톨스토이가 작곡한 피아노곡 |
- 1849년경에 '왈츠 F장조'라는 피아노곡 1곡을 작곡한 적이 있는데, 정확히는 톨스토이 혼자만의 힘으로 작곡한 것은 아니고, 그의 친구였던 지빈(Zybin) 형제의 도움을 받으며 작곡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1906년에 이 곡을 직접 녹음하기까지 했다.
- 그의 장남인 세르게이 르보비치 톨스토이(Sergei Lvovich Tolstoy, 1863~1947)는 작곡가이자 민족음악학자로 활동하며 인도 음악을 심층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유럽인 중 한 명이 되었으며,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8].
- 그의 목가적 정신이 담긴 소설 작품들이나 소설책 표지나 속표지에서 볼 수 있는 수염이 성성한 푸근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9] 할아버지와도 같은 인상과는 달리, 청년기는 매우 이기적이며 성적으로 난잡하기로 유명했다.[10] 이와 같은 그의 정신적 사상과 행동간의 괴리는 톨스토이를 연구할 때 관심있게 보는 주제 중 하나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의 돌아온 탕자. 그러나 노년기에 처절한 참회를 거쳐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도 위선적이라는 이야기와[11] 그의 극단적인 기독교적 아나키즘 사상 때문에 인격파탄자라는 비난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위선자였다거나, 극단적인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인한 인격파탄자이기만 했다면 마하트마 간디가 그의 사상에 깊이 감화돼 평생 그를 본받아 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톨스토이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로 그가 여인숙에 머물고 있을 때 소녀가 톨스토이의 가방을 보고 그 가방을 갖고 싶다고 하자 그는 일이 있어서 나중에 가방을 주겠다고 약속한 다음 그 여인숙을 나왔다. 나중에 그 여인숙을 찾아왔더니 그 소녀는 그사이 병으로 이 세상에 없었으며, 그는 여인숙 딸의 무덤에 가서 그 가방을 걸어 주었고 그 뒤 어느 사람이 그 무덤에 돌가방을 조각해 돌십자가에 건 다음 프라우다(pravda - 사랑을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라는 글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동시대를 살았던 대문호이자, 살아왔던 길이나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바가 정반대였던 도스토예프스키와는 서로 의식하는 사이였는데, 서로의 작품에서 서로의 이름이 꽤 자주 언급된다.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대작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카츄샤가 젊은 시절 즐겨읽었던 작품의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이며, 그의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주인공 이반 표도로비치가 악마와 대담하는 도중[12] 악마가 이반 표도로비치를 자극하며 '인간의 예술적 섬세함은 그 대단한 레프 톨스토이도 따라가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두 대문호는 사적으로 친하거나 하진 않았으며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13], 이처럼 서로의 작품에서 상대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내비쳤다.
- 1880년 9월 26일, 톨스토이는 평론가 니콜라이 스트라코프에게 편지를 보내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은 푸쉬킨의 작품을 포함하여 새로운 모든 문학 작품들 중 가장 아름다운 책" 이라고 썼다.[14]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암병동에서 그의 이름이 나온다. 병원 환자들이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사랑으로 산다는 말에 열혈 공산당원 환자인 루사노프가 톨스토이와 소련 작가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혼동하여 스탈린 상을 세 번이나 탄 영웅적 작가가 그런 반동적 소설을 쓸 리가 없다고 발광하다가 레프 톨스토이란 얘기에 그런 톨스토이도 있었냐?라면서 궁시렁대면서 안도한다.
- 유럽 문단에서 1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스웨덴과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인 러시아인에 기독교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를 표방했다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이에 스웨덴 일각에서도 톨스토이의 수상 불발에 이의를 제기했다. #
- 1904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톨스토이는 이 전쟁을 강력히 비판했으며 당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들한테 불교를 가르치던 일본인 승려인 샤쿠 소엔한테 같이 손잡고 반전투쟁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샤쿠 소엔은 "이 전쟁(러일전쟁)은 정의롭다"며 거부했다. 백인이여, 불교가 그렇게 평화적인가
6.1. 감상법
보통 톨스토이의 작품을 감상하는 독서가들의 케이스는 세 가지로 갈린다.(사실 이렇게 안 갈릴 수가 없다.) 하나는 기존에 다른 고전문학들을 감상하며 또다른 영감을 받기 위해서, 또다른 하나는 고전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글을 읽어왔으나 고전 문학을 새로이 접하는 이들, 마지막으로 아예 처음 글 읽기를 톨스토이로 시작하는 이들이다.톨스토이의 작품들은 읽기에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다.[15] 다만 기본적으로 장편소설로 갈수록 작품 자체의 커다란 스케일과 그 스케일들을 완벽하게 채우는 인물과 배경의 묘사에 적응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글의 묘사 방식이나 전달하는 기법 자체도 현대의 글쓰기와는 다른 문체를 사용하기에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이해가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때문에 보통 기존의 다른 고전 문학을 감상해본 케이스라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를 바로 시작해도 무난하게 감상할 수 있다. 고전 문학을 접해본 이들에게는 톨스토이의 문체 자체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고전 문학을 새로이 접하거나 글읽기가 처음이라면 글의 묘사 방식이나 전달하는 기법의 문제로 인하여 장편은 비추천. 물론 작품이 명작이기에 오랜 시간을 들이며 천천히 감상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으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나 하지 무라트 등 중단편도 굉장히 높은 성취의 문학 작품인만큼 부담없이 시작하는 편이 좋다.
6.2. 가족관계
전쟁과 평화 떡밥과 관련하여 쿠투조프가 톨스토이 가문 조상설까지 돌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쿠투조프가 딸만 5명을 남기고 외손자 마트베이 톨스토이가 물려받았다 해서 레프 톨스토이는 쿠투조프의 외증손이라는 잘못된 속설까지 있는데, 결론부터 쓰자면 쿠투조프는 레프 톨스토이의 조상이 아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할머니는 고르차코프(Горчаков) 공작 가문 출신 펠레게야 톨스토야 백작부인(Графиня Пелагея Николаевна Толстая)으로 쿠투조프의 딸 프라스코비야 톨스타야가 아니다.톨스토이 가문은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16]에서 발원한 귀족가문으로 꽤 후손이 많은 편이다. [17] 쿠투조프의 진짜 외증손은 이반 톨스토이 백작(Граф Иван Иванович Толстой, 1858–1916)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18]
레프 톨스토이 직계 조상의 간략한 가문 역사를 쓰자면 17세기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절부터 톨스토이 가문은 궁내관, 궁정고관 군인 등을 지냈고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절 레프 톨스토이의 현조부 표트르 안드레예비치가 여러 활약으로 백작 작위를 획득하고, 가문의 중시조급 조상이 됐다.[19] 이후 예카테리나 1세를 옹립해 공신이 됐지만 이반 5세의 후손 안나 이바노브나가 등극하자 고조부 이반 페트로비치와 나란히 체포돼 작위와 재산이 박탈됐다. 이반 페트로비치는 현조부보다 빨리 병사하여 가문의 위기가 닥치기도 했지만, 증조부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시절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즉위하며 작위와 재산이 복구됐고, 조부 일리야 안드레예비치는 해군장교와 근위병으로 활약하고 준장으로 퇴역했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는 조부 일리야 안드레예비치의 장남으로 1812년 전쟁에 참여하여 훈장을 얻었고 중령 퇴직 후 카잔 주지사를 지냈다.
톨스토이의 외가 볼콘스키 공작가문은 톨스토이의 친가보다 더 명문가이다.[20] 가문의 기원은 7–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류리코비치 가문과 체르니고프스키 가문의 후손으로 러시아 전통 귀족 중에서도 성골급으로 치는 초명문가이다. 볼콘스키 가문의 성은 과거 영지의 볼코나(Волкона) 강에서 유래하여 13세기부터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톨스토이가 물려받은 야스나야 폴랴나는 외증조부 육군소장을 지낸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공작이 구입하였으며, 외조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는 예카테리나 2세 시절 고관을 지냈다가 좌천돼 영지에 정착했고 외동딸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Графиня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Толстая, 1790–1830)을 낳았다. 딸이 2세 때 아내가 사망하였지만 평생 재혼하지 않고 딸 하나만을 열심히 길렀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외조부는 당시 러시아 귀족과 달리 상당한 지식인이라서 프랑스 문화와 볼테르에 관심이 많았고, 어머니 마리야에게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 영어에 수학, 물리학, 경제학까지 가르치고 자신은 식물과 원예 연구를 하면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어머니 마리야는 외조부가 죽고 얼마 후에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를 만나 결혼하고 톨스토이 가문은 외가 재산을 몽땅 물려받아서 부유하게 됐다.
-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톨스타야 (1844 ~ 1919)
- 세르게이 르보비치 톨스토이 (1863 ~ 1947): 소련에 잔류
- 타티아나 르보브나 스코티나-톨스타야 (1864 ~ 1950): 프랑스~이탈리아로 이주
- 일리야 르보비치 톨스토이 (1866 ~ 1933): 미국으로 이주
- 레프 르보비치 톨스토이 (1869 ~ 1945): 입헌군주주의자, 스웨덴으로 이주
- 마리아 르보브나 톨스타야 (1871 ~ 1906)
- 안드레이 르보비치 톨스토이 (1877 ~ 1916)
- 미하일 르보비치 톨스토이 (1879 ~ 1944)
- 알렉세이 르보비치 톨스토이 (1881 ~ 1886): 요절
- 알렉산드라 르보브나 톨스타야 (1884 ~ 1979): 미국으로 이주
- 이반 르보비치 톨스토이 (1888 ~ 1895): 요절
- 아크시니야 바지키나
- 티모페 톨스토이 (1861 ~ 1934)
6.2.1. 영지
러시아에서도 명문 귀족이었던 톨스토이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는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 '밝은 숲의 빈터')라고 불린다. 모스크바에서 남방 200km 떨어져 있는 툴라 시의 근교에 있다. 외조부 니콜라이 볼콘스키 공작의 영지로 외동딸이자 톨스토이의 어머니였던 마리야 볼콘스카야가 물려받고 니콜라이 톨스토이와 결혼한 후 이곳에 정착했다. 백작 작위를 가졌던[21] 톨스토이는 장년기 이후 이곳에 정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자신의 저택을 이용하여 학교를 만들어 소작농들의 자식을 가르쳤다. 이 저택은 작은 도서관도 딸려 있는데, 장서 수는 2만 권을 넘는다고. 사망한 후에는 이 영지 내의 묘지에 묻혔다.
톨스토이가 사망한 후, 미망인 소피야는 정부에 이곳을 국가가 관리해 줄 것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1917년 집권한 공산 정부는 집권한 후 바로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하고 국가가 관리했다. 1919년 소피야가 75세로 세상을 떠나자 이곳의 관리를 톨스토이의 막내딸 알렉산드라에게 맡겼는데, 그녀는 공산 정부가 싫어서 이후 해외로 망명한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모두 9남 4녀(다만 이 중 4남 1녀는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를 얻었을 만큼 자손이 많았으므로 다른 자손들 중 한 명씩을 골라서 관리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후 큰아들 세르게이를 제외한 톨스토이의 자식들은 모두 소련을 떠나 타국으로 망명했다.
큰아들인 세르게이는 작곡가, 둘째 아들인 일리야는 작가, 셋째 아들인 레프도 작가 겸 조각가가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미국으로 귀화하여 미국에서 톨스토이 재단을 세우고 톨스토이 책자를 냈는데 1979년에 95세라는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이 영지는 독일군에게 접수되고 저택은 독일군의 야전병원으로, 그가 남긴 원고들은 독일군의 땔감이 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더구나 독일군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톨스토이 묘지 옆에 전사한 자군 병사들의 무덤을 조성했다.
그 당시 톨스토이의 저택을 접수했던 부대를 지휘한 독일군 지휘관 하인츠 구데리안은 자서전 《기계화부대장(Panzer Leader)》에서 자기는 대문호의 저택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땔감설은 소련의 모략선전이라고 주장했다. 근데 소련의 선전선동 못지 않게 구데리안의 자서전도 자기 변명이 꽤 많아서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독소전쟁이 끝나고 나서 독일군이 톨스토이의 저택에 저지른 여러 만행들은 모두 원상복구되었고, 오늘날에는 2차 대전 이전의 상태로 보존되어 공개되고 있다. 팬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며, 현재도 톨스토이를 기리며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
실제
러시아어 발음은 [ˈlʲef nʲɪkɐˈla(j)ɪvʲɪtɕ tɐlˈstoj\](례프 니칼라이비치 탈스토이)에 가깝다. 톨스토이 스스로는 '료프(Лёв, [lʲɵf\])'라는 발음을 사용하였으며, 레프(Лев)라는 이름의
영어식 표기인 리오 톨스토이(Leo Tolstoy)로도 불린다. 레프는 러시아어로 '
사자'라는 의미이다.
[2]
크라피브나(Крапивна)의 형용사형인 크라피벤스키군(Крапивенский уезд)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톨스토이의 《
부활》에 등장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3]
경우에 따라
무종교 및 원시
그리스도교로 보기도 한다.
[4]
혼전성은 '볼콘스카야(Волконская)'.
[5]
혼전성은 '베르스(Берс, Behrs)'로
독일계 러시아인이다.
[6]
셋을 별개의 작품으로 보느냐 하나의 작품으로 보느냐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하나의 작품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7]
톨스토이는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당시 귀족 여성들이 애들을 유모에게만 맡기는 것에 반대했다.
[8]
다만 그의 작품 대부분은 출판되지 않았다고 한다.
[9]
그의 노년의 모습들을 보면, 소위 카리스마가 쩐다는 식으로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양의 위인들 중에서는
베토벤과 더불어 대표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다.
[10]
34세에 결혼한 이후
혼외정사를 삼갔다. 젊은 시절의 방탕한 생활도 대부분 톨스토이 자신의 고백과 일기에 근거한다.
[11]
예를 들어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부자가 인정있는 척 하는 것보다 가증스럽고 역겨운 일은 없다. 부자가 정말로 인정이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넉넉하게 먹고 살만한 재산을 제외한 나머지 재산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으면서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만, 아내의 거센 반발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이 크다. 결국 아내와 이 문제로 크게 다퉈 자신의 소신을 실현하려 가출했다가 죽은 것을 볼 때 부당하고 가혹한 비난이다.
[12]
이는 이반 표도로비치의 환각에 의한 것이다.
[13]
투르게네프 등 공동으로 친한 사람이 많았음에도 이상하게 단 한 번도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14]
출처:열린책들 도스또예프스끼 연보
[15]
의외로 톨스토이의 수준의 문학 작품 중에서 그만큼 평이한 서사 전달을 하는 작가는 드물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면
닥터 지바고 같은 작품 한번 읽고 오면 이해가 간다.
[16]
현재의
리투아니아와 중세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백만광년급으로 다른 나라였다. 중세 리투아니아 공국의 지도층은 물론
리투아니아인이었지만 정교회를 믿는
벨라루스인,
루테니아인 귀족들도 상당수였다.
[17]
톨스토이 가문의 여러 인물들 참조.
[18]
톨스토이 가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
[19]
원래 표트르 대제의 반대파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섭정공주 편이었으나 전향해서 표트르 대제의 신임을 얻었고 이후 여러 군공과 초대
오스만 제국 대사로 10년간 재직하면서(전쟁시엔 2년간 감금도 되었다) 공을 쌓았는데
표트르 1세에 반기를 들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빈으로 도망간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를 설득하여 납치한 공로도 유명하다.
[20]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Kнязь Андрей Болконский)의 이름이 외가인 볼콘스키(Волконский) 가에서 유래한다. 작품내에서는 본래 철자인 키릴 문자 В(라틴 문자 V)에서 Б(B)로 바꿨을 뿐이다.
[21]
러시아에서 귀족은 작위라기보단 신분인데 적자는 장남은 물론 막내아들까지 다 백작으로 칭할 수 있다. 다만 딸들은 시집을 가면 남편 작위를 따른다. 톨스토이 소설에서 '공작의 영애'로 불리는 경우가 이 경우인데 백작에게 시집가면 백작부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