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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 ~ 5.17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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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내란 ~ 12대 대선
정치 활동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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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두환계 노태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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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 전두환계 노태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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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계 청구동계 민정계
14대 총선 ~ 자민련 창당
상도동계 새한국 신정 국민 청구동계 민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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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창당 ~ 15대 대선
민주계 상도동계 국민 이회창계 자민련 민정계
15대 대선 ~ 3회 지선
민주계 이회창계 민국 한국 자민련 민정계
3회 지선 ~ 16대 대선
민주계 이회창계 민국 자민련 민정계 한미연
16대 대선 ~ 17대 총선
통합 민주계 이회창계 민국 하나로 자민련 민정계 친박
17대 총선 ~ 17대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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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총선 ~ 새누리당 당명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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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적
2.1. 이명박 정부 이전2.2. 이명박 정부 당시2.3. 박근혜 정부 당시2.4. 바른정당 창당과 자유한국당으로의 복당2.5. 황교안 대표 재임과 21대 총선 이후2.6. 제20대 대통령 선거 국면2.7. 윤석열 정부에서 관료 대거 등용
3. 명단
3.1. 정치권
3.1.1. 친이 6인회3.1.2. 현역 광역자치단체장 및 교육감3.1.3. 현역 국회의원3.1.4. 현역 기초자치단체장3.1.5. 그 외 인물들
3.2. 검찰3.3. 그 외
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2000년대에 생겨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2] 친박과의 계파 싸움으로도 유명했다. # 2018년 3월 2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 발부를 인용해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이 결정됨에 따라 구심점을 상실하고 와해되었다. 물론 친박계가 당권을 잡고 친이계를 못잡아먹어 안달이던 2010년대 중반부터 이미 비박계 내에 분화되어 있었다.[3]

다만 결속력이 마피아급으로 박근혜를 중심으로 하나되어 뭉친 친박과 달리[4] 친이는 그렇게까지 단단한 조직은 아니라 사실상 김영삼 세력인 상도동계 이회창계 등을 기반으로 한 빅텐트에 가까웠다는 의견도 있다. 즉, 정치적 성향을 떠나[5] 꼴보기 싫은 친박 견제를 위해 일단 뭉쳤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이명박을 보스로 탄탄히 뭉쳤다기보다는, 친박이 싫어서 혹은 이명박 역시 김영삼이 정계에 입문시킨 인물이였으니 일단 계보상 이쪽으로 붙어 넘어온 것이 다수였다는 것. 결국 하나되어 결속을 강조하던 친박보다는 다소 구성이 널널한 편이라 남경필, 정두언 등 소장파들부터 윤한홍 등 보수파, 이도저도 아닌 한나라당 내 무계파 세력들도 범친이로 자리잡고 있었다.

다수의 비박이 아무래도 보스로 김영삼을 모셨다 보니, 김영삼 라인 중에서 그 당시 가장 유력한 대권후보로 거론되던 손학규 이명박을 중심으로 비박 세력이 뭉치다 결국 기업가, 행정가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이명박이 최종 후보로 낙점되었다는 것.[6] 당장 친이 좌장인 이재오도 김영삼이 정계에 입문시킨 인사로 사상 역시 유사했다.[7]

이러다보니 박근혜 구속 후 세력이 급격히 약화된 친박과 달리 친이로 불렸던 정치인들은 이명박이 구속된 후에도 비박 정치인으로 꽤 남아있는 편이다. 박씨 가문이란 혈통으로 맺어진 친박과 달리 친이계는 이명박이 구속되었어도 윗 라인격으로 김영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이 역시 다양한 계파로 분산되었다.[8]

이들 중에서 온건파 일부는 나중에 친유 인사가 되기도 했으며 사회보수주의파 일부는 친홍 쪽으로 가기도 했다. 하지만 친홍도 친유도 되지 않은 다수의 친이들은 2021년부터 유력 대권후보로 떠오른 윤석열에게 주목해 친윤이 되었고, 실제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다시 권력의 중심세력이 되었다.[9] 이른바 윤핵관이라 불린 장제원, 권성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2022년 8월 15일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에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제외시키면서 친이 좌장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을 비롯한 친이 원로들이 다시 윤 대통령을 강도높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즉 세분화해서 보자면, 친이가 전성기일 당시 유력 정치인들은 각을 세우는 모양새고, 당시 소장파에 가까워던 인사들 다수는 친이 -> 친윤이 된 모양새이다. 그러다 2022년 12월 28일 연말 특별사면 대상에 이명박이 포함되어 석방되었고, 이후에도 친이 원로 몇몇은 정부 비판적 시각을 보였으나 어쨌든 친이 좌장이던 이재오가 2023년 7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에 임명되고 유인촌이 문화특보로 입각후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다시 임명되는 등 친이 원로 몇몇이 다시 공직을 맡으면서 적당히 넘어가는 모양새다.[10]

2. 행적

2.1. 이명박 정부 이전

1990년대 3당 합당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끌던 신한국당은 YS가 힘을 잃게 되면서, 90년대 후반 이회창 전 총리에게 당권이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도 이후 2번이나 대선에서 낙선하면서 2002년 12월 정계은퇴를 하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떠오른 두 인물이 김영삼 대통령이 영입한 이명박과, 후에 한나라당에 합류한 박근혜였다.

주도권을 먼저 잡은 건 박근혜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대표를 맡은 박근혜는 탄핵 역풍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121석을 확보하며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이로 인해 기존 민정계는 와해되어 친박으로 흡수되었고 박근혜는 재보궐선거와 2006년 지방선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며 한나라당의 당권을 장악했다. 당권이 친박의 중심인 민정계, 공화계로 넘어가자 구심점을 잃은 민주계는 이명박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고, 이것이 친이 / 친박 계파의 탄생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내 경선을 치르면서 두 후보의 지지자들로 한나라당 내부가 확 나뉘면서 친이와 친박이라는 계파정치가 시작됐다. 당시 여권에선 고건 전 총리의 불출마가 확정되면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사실상 마땅한 대권후보가 없는 상황이라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기면 본선도 이길 확률이 컸기에 한나라당 경선은 그만큼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자수성가한 기업인 출신으로 다소 권위주의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던 박근혜 후보보다 일반 대중, 특히 이념적으론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신봉한 온건 보수주의, 지역적으론 수도권 PK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다.[11] 반면 박근혜 후보는 한나라당 당원들과 대경권의 박정희 향수에 취해있던 권위주의적 보수 인사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연장선상에서 당시 YS는 이명박을 지지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가 전면에 나선 2007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이 무소속 후보들에게 줄줄이 패하며 당원들의 지지가 줄어드는 타격을 입게 된다. 또 이명박 후보가 YS에 의해 정계로 입문한 관계로 민주계 인사들 대다수[12]와 운동권, 민주투사 출신 및 한나라당 소장파들의 지지를 받았고, 반면 박근혜 후보는 민정계, 공화계 출신 지지를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3][14]

이쯤해서 이명박 후보 측은 여론조사 반영비율을 크게 높인 경선을 요구했으며, 실제 경선 결과 당원투표는 박근혜 후보가 이겼지만 여론조사에서 이명박 후보가 더 크게 이겨 대선 후보가 되었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다. 여담으로 당시 17대 대선에서 연예인들의 경우 이명박과 사적으로 친한 유인촌, 이덕화[15], 그리고 김보성[16] 등이 이명박 지지 선언을 했었다.

2.2. 이명박 정부 당시

2.2.1.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이명박은 한나라당 대선후보로서 당무우선권을 갖게된 후, 사무총장과 사무부총장에 각각 본인의 측근들인 이방호 정종복을 임명한다. 이렇게 당권을 잡은 친이계는 17대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정권까지 잡는데 성공하여,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박계에 대한 공천 학살이 일어나 많은 친박계 정치인들이 탈당해 친박연대를 결성하기도 했다.[17] 이 때 사무총장으로서 공천 학살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이방호를 낙선시키기 위해, 친박계가 당시 민주노동당 소속 후보로 사천시에 출마한 진보 성향의 강기갑 후보를 팍팍 미는 정치 코미디가 벌어지기도 했다.[18]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박근혜가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타 당인 친박연대 후보들에게 "꼭 살아서 돌아오시라"는 격려를 남기는 묘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하튼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는 TK 지역에서 선전하고 비례득표율 13.2%를 얻어 총 14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민주노동당을 제치고 원내 4당으로 올라서지만, 결국 TK 지역 외에선 별 성과를 내지 못하다보니 친박 성향의 무소속 출마자를 시작으로 친박연대를 포함한 친박 세력은 몇년 후 소리소문없이 한나라당으로 복당하게 된다.

18대 총선에서의 친이계들은 수도권, 특히 서울에서 크게 약진했다. 뉴타운 건설 등 부동산 재개발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워서 당선된 친이계 소장파들, 소위 타운돌이들이 대거 탄생한 선거이다. 대표적으로 나경원( 중구), 강승규( 마포구 갑), 강용석( 마포구 을), 진수희( 성동구 갑), 김동성( 성동구 을), 권택기( 광진구 갑), 유정현( 중랑구 갑), 진성호( 중랑구 을), 정태근( 성북구 갑), 김효재( 성북구 을), 신지호( 도봉구 갑), 현경병( 노원구 갑), 권영진( 노원구 을), 홍정욱( 노원구 병), 전여옥( 영등포구 갑), 김용태( 양천구 을), 김성태( 강서구 을), 김성식( 관악구 갑), 이범래( 구로구 갑) 등이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18대 총선 당시 친이계들은 이명박 마케팅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20대 총선 당시 TK 친박들 이상이라고 봐도 무장할 정도다. 상단에서 언급한 타운돌이들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들에 출마한 후보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대부분 이명박 마케팅을 주요 선거전략에 포함시켰다. 예를들어 이명박의 대선 싱크 탱크였던 안국포럼 출신인 김영우( 포천시·연천군)의 경우, 전체 11 페이지의 공보물 중 단 한 페이지를 제외한 모든 페이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언급했다. # 앞서 언급된 타운돌이긴 하지만, 대선 캠프 뉴미디어 팀장이자 인수위 전문위원이었던 진성호( 중랑구 을) 또한 슈퍼 MB맨을 자처했다. # 윤진식( 충주시)은 이명박의 대선 공보물이 마음에 와닿았는지, 자신의 선거 공보물 1, 2 페이지에서 그대로 패러디하기도 했다. 둘다 1페이지에서는 와이셔츠에 파란색 계열 넥타이를 입고 태극기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고, 2페이지는 주황색 계열 상의를 입은채로 책을 펴놓고 필기구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 ## 심지어 윤영( 거제시)의 경우 자신의 외모가 이명박과 흡사하다는 점을 활용해 아예 본인을 거제의 이명박이라고 지칭했다. #

2.2.2. 박희태 대표최고위원 선출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당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친이계는, 이후 전당대회에서 승리하여 대표최고위원을 배출하기 위해 움직인다. 당초 친이계는 이재오를 내세우려고 했으나, 이재오가 자신의 지역구에서 낙선하여 크게 내상을 입는 바람에 다른 중진을 찾게된다. 결국 친이계는 비록 이명박, 이재오와 함께 친이 6인회에 속했지만, 고령으로 인해 공천에서 컷오프됐던 박희태를 당대표 후보로 밀게 되었다.

이 때 당대표로 나선 박희태의 선거조직은, 마치 지난해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를 연상시킬 정도로 인적 중복 현상을 보였다. 좌장격인 최병국을 중심으로, 친이계 내에서도 이재오계의 핵심인 안경률이 총괄본부장을 맡았고, 대선 당시 경선대책위 부위원장이었던 정의화와 경기지역 선대위원장 역할을 했던 고흥길이 고문을 맡았다.

또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 그룹으로 꼽히는 안국포럼 출신의 백성운, 김효재는 각각 조직과 메시지를 전담했다. 참고로 백성운은 대선 경선 당시 종합행정실장을 맡았었다.또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의 '입'으로 활동했던 진수희와 경기지역을 담당했던 차명진이 박희태 캠프의 공보 일을 전담하다시피했다. 각 지역을 총괄하는 인사들 또한 서울의 장광근, 경기도의 원유철, 대구 주호영, 부산의 김정훈, 울산의 김기현, 강원도의 허천, 충남의 홍문표, 경북의 이병석, 경남의 김재경 등 대선 시절 이명박 경선대책위 주요 인사들과 겹쳤다. #

결국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희태가 당대표로 선출되었고, 마지막까지 촉각을 곤두세우던 친이계와 청와대 관계자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됐다는 표정이었다. 고소영ㆍ강부자 내각 논란, 총선 압승 실패, 쇠고기 협상 파문 등으로 그동안 '액션 플랜'이 꼬일 대로 꼬였던 여권이 궤도를 이탈했다가 제 선로를 찾은 것이다.

상단에서 말했듯이, 박희태를 첫 여당 대표로 만들기 위해 이상득계ㆍ이재오계ㆍ친이 직계를 아우르는 친이계가 총출동했다. 또 다른 친이 인사인 공성진이 6월 17일 여의도 대하빌딩 9층에 사무실 개소식을 할 때만 해도, 공성진 측은 "1등도 할 수 있다"며 기세등등했다. 친이재오계가 조직력을 가동하면 박희태 측도 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다. 하지만 이 같은 기세는 개소식 이후 며칠 가지 못했다.

박희태 진영과 이재오계 당협위원장들이 공동으로 박ㆍ공 공동캠프를 차렸다. 대하빌딩 4층에 박희태 후보 사무실이, 같은 빌딩 9층에 공성진 후보 사무실이 있지만 같은 빌딩 2층에 박·공 공동 캠프가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서는 '1순위 박희태ㆍ2순위 공성진'이라는 카드를 마련했다. 공성진은 4등으로 겨우 최고위원이 됐다. 공성진 측은 "사실 박 대표를 만들기 위해 공 의원이 희생한 감이 없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재오계 안경률은 박희태 캠프에서 총괄본부장을 맡았다. 또 안경률이 나서서 친이계와 청와대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다는 고 한다. 6월 30일 친이계의 대거 회동에도 안경률이 역할을 했다. 당시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전당대회 한 주 전까지 계속 1위를 노리던 정몽준 측의 기세가 친이계의 대거 회동 시도를 계기로 급전직하했다고 판단했다. 대의원의 표심이 급격히 정 후보 측에서 떨어져 나와 박 대표 측으로 붙었다는 것이다. 공성진 측은 "친박 쪽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사실은 정몽준 측을 견제하려던 것"이라면서 "모임이 몇 시간 전에 취소되긴 했지만, 성사된 것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전당대회 마지막 주부터 모든 시나리오는 친이계의 뜻대로 맞아떨어졌다. 전당대회를 바로 앞두고 이미 '박희태-정몽준-허태열-공성진'이라는 순위 결과가 점쳐졌다. 투표가 진행 중일 때 친이 소장파 권택기는 "박 대표와 정 후보가 각각 1ㆍ2등을 하고, 3ㆍ4ㆍ5등은 1ㆍ2등과 좀 차이가 날 것"이라면서 "허 후보가 조직력에서 앞서지만 정 후보가 일반인 여론조사에서 휠씬 앞서 2등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과는 전망 그대로 나타났다.

종합적으로 볼 경우, 2008년 전당대회 결과, 친이계는 박희태, 공성진, 박순자까지 3명의 최고위원이 지도부에 들어갔다. 지명직 2명을 포함하면 5명의 최고위원이 친이계열로 분류되었다. 여기에다 당시 원내대표 홍준표와 정책위 의장 임태희까지 가세해 지도부 9명 중 친이계가 7명이나 된다. 정몽준까지 친이로 분류하면 8명이 된다. 허태열만 친박계 인사로 지도부에서 활동했다. 박희태 대표 체제에 대해 이혜훈은 “화합을 내세우는 분이라 잘 할 것”이라면서도, 친박 인사들과 화합 가능성을 묻자 “앞으로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명박과 가까운 박희태가 당 지도부를 이끌게 됨에 따라, 향후 청와대 친정 체제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상이 공공연하게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박희태는 취임 후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친이계 역시 외부의 시각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조해진은 “대통령이 정치를 잘 모른다고 하는데 어떻게 당을 좌지우지한다고 할 수 있냐”면서 “정치를 잘 아는 박 대표가 당이 중심이 되도록 잘 이끌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재오계 김용태 역시 "대통령 자신이 정치를 잘 모른다고 고백했다"면서 "박 대표가 백전노장이라 정치를 복원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김용태는 “박 대표가 우선 사람들을 두루 만나 화합의 통로를 열어나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2.2.3. 안상수 대표최고위원 선출

이후 박희태는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양산시에 출마하기 위해 2009년 9월 당대표직에서 물러났고, 최고위원들 중 최다 득표자였던 범친이계 정몽준이 당대표직을 맡게 된다. 이후 정몽준은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예상보다 부진한 성적을 거두면서 사퇴하게 되었다. 결국 당시 원내대표였던 김무성[19]의 비대위 체제를 거쳐, 2010년 7월 14일 전당대회에서 친이계 핵심 안상수가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명의 최고위원에는 범친이계 홍준표, 친이 중도성향 나경원 , 당시 친이핵심으로 분류됐던 정두언, 친박계 서병수가 차례로 뽑혔다. 안상수는 대의원 투표와 일반국민 여론조사를 합산한 결과 총 4천316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이어 최고위원이 된 홍준표는 3천854표로 2위를 차지했고. 나경원은 2천882표로 3위, 정두언은 2천436표로 4위, 서병수는 1천924표로 5위를 차지했다. 이로서 안상수 대표체제 또한 박희태 대표체제와 마찬가지로 친이계 위주 당 지도부로서 자리잡았다. #

2.2.4.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전후

다만 2012년 총선과 대선이 다가오면서, 끝내 친이계는 당권을 박근혜에게 내어주고야 만다. 이명박과 친이계는 이명박이 차기 대권 주자로 도장을 찍어두고 있었던 친이계에게 당권을 넘기려고 했으나 친이계 내에서 차기 대권후보로 유력했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1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걸었다가 실패하며 시장직을 사퇴하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었고,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 등으로 인한 야당의 맹공세와 지지율 하락으로 인해 당권마저도 미래 권력이던 박근혜와 친박계에게 빼앗기고, 친박계는 그렇게 친이계에 대한 공천탈락의 명분을 얻으며 18대 총선의 복수를 할 기회를 잡고 만다.

결국 박근혜 비대위원장 체제에 의해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19대 총선에선 반대로 친이계가 상당수 갈려나갔다. 특히 간판급 친이계 현역들 상당수가 공천에서 탈락되었다. 그 중에서도 지난 총선 뉴타운 건설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워서 당선된 친이계 소장파들, 소위 타운돌이들이 대거 희생양이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강승규, 신지호, 홍정욱, 유정현, 진성호, 진수희, 권택기, 전여옥 등이 있다. 중진들의 경우 이윤성, 안상수, 김무성[20], 안경률 등이 대표적인 희생양들이다. 다만 친이계 현역이더라도 친이계 색이 옅거나 지역구 내 지지기반이 탄탄한 인사들은 다시한번 공천을 받는데 성공했는데, 대표적으로 이재오, 정두언, 정병국, 심재철, 원유철, 김영우, 권성동, 주호영, 정의화, 김정훈, 박민식, 나성린, 김기현, 김태호, 김재경, 이군현 등이 있다.

또 그래도 현직 대통령은 이명박이었던만큼, 이명박 정부에서 몸담은 인사들 중 상당수도 19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윤진식 대통령실 정책실장, 류성걸[21] 기획재정부 차관, 김희국[22] 국토해양부 차관, 이재균 국토해양부 차관, 김종훈[23] 통상교섭본부장, 김성찬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김회선 국가정보원 2차장, 심윤조 외교통상부 차관보, 이강후 지식경제부 우정사업정보센터장, 김희정 대통령실 대변인, 정문헌 대통령실 통일비서관, 심학봉 대통령실 지식경제비서관실 선임행정관 등이 있다. 이러한 양상에 대해 한겨레 진보언론들 이명박근혜 공천이라며, '정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이명박 대통령과, 대권 가도에 청와대의 도움이 필요한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밀월'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2.3. 박근혜 정부 당시

2012년 대선 결과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한동안 친이계들은 더더욱 당권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2014년 세월호 침몰 참사로 박근혜의 지지율이 낮아진 상태에서 친이계들에게 다시 반짝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결국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친이계의 몇몇 여성 정치인들은 국회 재입성에 성공했고, 남성 정치인은 낙선했다. 이후 친이계는 비박계와 함께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민심이반과 달리 당 내부에선 아직 친박계가 건재했기 때문에 이한구 공관위원장을 비롯한 친박 세력이 공천권을 휘두른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이계는 그나마 살아남았던 친이계 좌장 이재오 의원을 비롯해 비박계와 함께 다시 한번 공천학살을 당한다.[24] 오죽하면 이재오 의원이 아무리 사람이 미워도 그러는 것 아니다고 성토했을 정도였다. 그 덕에 당의 친박 순도는 이전보다 높아졌으나, 20대 총선에서 참패하며 새누리당 자체가 위기에 빠지는 바람에 친박계는 위기에 빠지고 친이계는 총선 패배의 주범으로 친박계를 까며 속으로 내심 미소를 짓게 되었다.

하지만 무소속으로 출마한 친이계 좌장 이재오 후보가 낙선함으로 인해 새누리당에서 구심점을 잃은 친이계는 사실상 비박계 중 한 계파 정도로 의미가 변화된 상태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 되었다. 예외가 있다면 이재오 전 의원이 ' 늘푸른한국당'이라는 친이 계열 위주의 신당을 창당하며[25] 새누리당을 나갔고, 이명박 전 대통령 또한 이쪽을 은근히 지원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인데 원외정당이라 큰 존재감은 없었다.

그러다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친박은 어떤 형태로든 궤멸이 뻔한 수순에 오른 반면,[26] 친이계는 대다수가 바른정당으로 가며 재기를 노리게 된다. 바른정당은 주로 친이, 친유, 친무 등 비박 성향 국회의원들이 탈당해 창당한 정당으로, 친박들이 포진한 자유한국당에서도 조원진과 같은 진성 친박 성향 정치인들은 새로 정당을 만들어 탈당을 하고 있어 자유한국당도 성향이 어찌될지 종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또한 국민의당 친안계에도 한때 친이계였던 정치인들이 일부 있어 총 4개의 정당에 친이계 및 범 친이계 정치인들이 있는 셈이 되었다. 늘푸른한국당 대선 후보 이재오는 확실히 친이 성향 정치인으로 구분되고,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또한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이 있다. 바른정당 대선 후보인 유승민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접점은 거의 없지만, 예전의 친박 성향은 거의 사라졌으며, 김희국, 류성걸 외에도 친이계 출신인 정병국, 이성권, 박정하와도 가까워지고, 친이계 일부가 친유로 편입되는 상황이라, 역시 친이계와 어느 정도는 접점이 있다.

이렇게 되어 친이, 비박들은 4개의 당 중 1개라도 성공하면 주도권을 잡는 형국이 되었고, 그렇게 4명의 대선 후보 라인업으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아직 소멸하지 않은 친박 등을 견제하면서 재기를 노리는 중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친이계의 재개는 당 내에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친이계 정치인들은 높은 정권 지지율에 숨죽여 살며 2018년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상황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친이계들이 여러 정당에 퍼져 있는 상황을 극복하고 지방선거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친이계들이 있는 정당 통합 즉 다시 말해서 자유한국당 바른정당 국민의당의 합당설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국민의당은 애초에 이때만 해도 중도 계열 정당이었고, 바른정당도 중도우파 정당으로서 유승민, 유의동, 정병국과 같은 일부 비박계 의원들이 자강론을 주장하고 있어 통합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었다.

2.4. 바른정당 창당과 자유한국당으로의 복당

상기했듯 탄핵 정국에서 몰락하는 새누리당 친박들로부터 집단탈당하여 바른정당을 결성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알렸었다.[27]

다만, 남원정, 친무, 친유, 소장파와 일부 현역 친이계들이 바른정당을 창당한 것과 달리, 친이계 중진들은 늘푸른한국당을 창당했다. 새누리당에 있던 친이계 성향 전현직 정치인들이 새누리당을 탈당해 늘푸른한국당에 합류하기도 했다. 김용태, 남경필이 선도 탈당한데다가[28], 정병국이 창준위 위원장직을 맡았으며 또한 1월 11일, 이재오 최병국이 공동 대표, 이외 정운찬 前 국무총리를 주축으로 해서 친이계의 주축이자 본진이라 할 수 있는 늘푸른한국당이 정식으로 창당했다.

또한 늘푸른한국당 창당식 축사에 바른정당에서 친이계 상당수 인사들과 남경필이 참석해서 축사를 낭독하면서[29], 추후 늘푸른한국당은 바른정당에 존재하는 친이계나 친이 성향을 가진 이들과 규합할 확률이 충분히 높아져, 주목받는 상황이다. 그 외에도 아직 자유한국당에 범 친이계 정치인들이 소수 남아 있어 이러한 친이계들이 규합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이러한 규합에는 반문정서를 가지고 있는 국민의 당이나 더불어민주당 일부 비문성향 정치인들이나 자유한국당의 잔류한 소수 옅은 친박 성향 정치인이 일부 참여할 가능성까지 예상되기도 한다. 여담으로 국민의당에도 이태규와 같이 한때 친이계에 있었던 의원들이 일부 섞여있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 선거로 들어서고, 친이계는 갑작스러운 대선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는지, 안철수와 유승민 후보가 패배한 데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현재 높은 상황이라 지지율 회복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친이계는 여러 정당에 퍼져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친이계가 주축이 되어 창당한 바른정당을 중심으로 바른정당을 자유한국당이나 국민의당 둘 중 하나 또는 이 3개의 정당을 모두 합당해서 하나의 거대한 보수야당을 출범시켜 친이계 정치인들을 결집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30]

이러한 움직임은 언론을 통해서도 알려졌는데, 현재 바른정당의 이혜훈과 유승민과 같은 비박계 자강파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통합의 움직임에 반발하는 시각이 있어 통합 작업은 쉽지 않았다. 현재 자유한국당의 경우 홍준표 대표 체제로 들어서면서 박근혜 탈당과 친박 핵심 의원 탈당과 같은 친박계 색깔을 빼는, 친박 청산 작업에 돌입하고 있어 이러한 작업이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염두에 둔 행동이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실제로 홍준표는 바른정당과 통합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어찌 되었든 보수 야당 통합을 주도하는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와 바른정당의 김무성 모두 범친이계 인물로 구분되는 것이 특징으로[31], 국민의당의 경우 친이계와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비노 성향 정치인들과 손학규계 등이 있는 정당으로써, 친이계 정치인들이 일부 있어 역시 통합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바른정당의 경우는 바른정당 소속이었던 친이계 정치인들은 정병국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다 바른정당 2차 탈당사태 때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던 데다가 바른정당 - 국민의당의 합당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친이계의 본진인 늘푸른한국당도 이명박이 피의자로 입건되면서 지도부가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한 만큼 바른미래당에 들어서서는 친이 색채가 상당히 옅어졌다.

어찌 되었든, 친이계는 친이계 정치인들을 '한 정당'에 모으려는 이른바 '보수 야당 통합'을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이며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2018년 이명박의 구속과 엄벌 여론이 60%를 넘을 정도로 친이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이명박 대통령의 기치 아래에서 이들이 다시 뭉쳐서 계파를 형성하는 것은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부활은커녕 와해를 걱정해야 할 판국. 이명박의 최측근인 김백준 구속 직후 증거가 터져 나오며 이명박이 피의자로 입건되자, 그 동안 정상적으로 퇴임한 전직 대통령인지라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지지여론도 훅 꺼져버렸다.

2018년 기점에서 구심점이 필요한 친이계는 범 친이계였던데다 당내 세력 확장이 필요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구애를 끈질기게 받아와 일부는 친홍계로 흡수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 허나 7회 지방선거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를 포함한 비박계, 구 친이계 지도부가 역대급 참패를 해버리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홍준표를 포함한 당 지도부 전원이 사실상 사퇴함에 따라 홍준표를 중심으로 잠깐 뭉쳤었던 구 친이계들 또한 앞날이 다시 깜깜하게 되었다.

2.5. 황교안 대표 재임과 21대 총선 이후

2019년 2.27 전당대회로 친박계로 분류되는 황교안 전 총리가 당대표에 당선되면서 자유한국당이 전체적으로 다시금 친박색이 강화됨에 따라 친이계들의 앞날이 더욱 불확실하게 되었다. # 다만 황교안은 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친박이라는 평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표가 된 이후부턴 비박과 친박 사이 줄타기 행보를 하였고, 21대 총선을 앞두고 자유한국당의 후신인 미래통합당의 공관위원장으로 친이계인 김형오를 선임하였다.

이 때문인지 미래통합당 공천에서 생각보단 친이계가 선전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황교안은 홍준표, 김태호, 정병국 등 자신의 대권 가도에 방해가 되는 중진들은 죄다 쳐낸데다[32], 친박 인사 중에서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인사들은 대거 살려뒀기에[33], 이 쪽도 저 쪽도 제대로 청산 못했다는 평을 받으며 총선을 치르게 된다.

결국 21대 총선에서 황교안 지도부는 영남을 제외한 대다수의 미래통합당 지역구 후보들이 갈려나가는 대참패를 당하게 된다. 특히 수도권 121석 중 고작 16석 밖에 못 얻으며 악몽과 같은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했다. 친이계의 경우 오세훈, 나경원 같은 중진 인사들이 낙선했으나, 그 와중에도 주호영, 장제원, 정진석, 김기현, 박진과 같은 중진급 친이, 범친이계 인사들이 살아남았고, 권성동 의원 또한 무소속으로 생환한 후 복당했으며, 강기윤, 조해진과 같은 인사들도 생존 신고를 하면서 향후 당권 경쟁에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사이가 나쁘지 않은 친유계와 보수 소장파도 생환한 사람이 있기에[34] 21대 총선에서 친박 인사들이 대거 낙선한 점도 친이계에겐 호재라 할 수 있다.[35] 연장선상에서 친이계 주호영 의원이 21대 총선 직후 치러진 원내대표 경선에서 여유있는 표차로 원내대표에 당선되었다.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오세훈 박형준이 당선됨에 따라 친이계 재건에 청신호가 켜졌다. 여기에 재보궐선거 이후 치러진 신임 원내대표 선거에서 친이계 중진 김기현 의원이 친박계 김태흠 의원을 더블스코어 차이로 여유있게 누르고 당선되며[36] 친박의 조직력은 사실상 완전히 와해 됐음이 증명되었다. 주호영 의원 또한 현재 차기 당 대표가 유력한 상황이기에 친이계가 대선 정국을 앞두고 당내 주도권을 잡는 것이 더욱 수월해질 것이라고 전망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호영 의원은 여러 논란들 페미니즘 지지로 인한 2030대 남성의 반발[37] 로 인해 고작 15%에 그쳐서 3위로 낙선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사건과 관련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대다수의 친이로 분류된 정치인은 의외로 이명박 구제에 적극적이지 않다. 친이라는 세력이 친박과 달리 결국 이명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고 보기 어렵고 결국 김영삼이나 이회창의 라인인 비박 세력들이 잠시 이명박을 보스로 세웠을 뿐이라는 것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부분이다. 게다가 법적 절차가 이미 마무리된지라 더이상 어찌할 방법은 없을 듯. 결국 계파 수장을 잃은 친이계는 비박계로 활동 영역이 커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38]

2.6. 제20대 대통령 선거 국면

실제로 2021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자 많은 친이계들이 " 대장은 윤석열 때문에 구속됐는데, 부하들은 다 윤석열에게 갔다"는 냉소가 나옴에도 이명박을 감옥으로 보낸 윤석열로 갈아탔으며 尹캠프 ‘윤곽’… MB계가 외곽 지원, 광화문 근처에 둥지 틀어 심지어 중앙일보의 어느 정치부 기자가 “윤 전 총장이 야권의 대선후보가 된다면 MB는 자신을 구속한 그를 지지할 수 있을까를 MB측근에게 물었더니 1초만에 ‘찍으실 것’이란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문제는 그러한 내용을 칼럼에 쓰자 곧바로 MB측에선 “우리는 배알도 없는 줄 아느냐”고 해당 기자에게 강하게 항의를 했다고 하는데, # 이러한 모습들은 결국 친이계들에게 있어 이명박이란 변함없는 충성의 대상이 아닌 정치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관계로, 절대적인 충성과 숭배의 대상으로 상명하복과 서열이 뚜렷한 친박과는 완전히 다르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친이에게 더 호재인 사실은 친박과 다르게 친이는 친유, 소장파 등 온건파나 친무와 같은 중립계파와도 같이 할 수 있어서 전후방으로 친박, 친황을 더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성 우파로 평가받지만 극우하고는 거리를 두는 친홍하고도 어느정도 협력이 가능한 위치에 있기도 하다.

하지만 친이계가 '단일한 계파'로서 행동하는 지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김종인이 친이계의 핵심 임태희를 윤석열의 총괄선대본부장에 앉힐 것을 요구하는 와중에 이재오는 김종인의 킹메이킹이 궁색하다며 비판했다. # # # 그리고 김종인과 윤석열 캠프의 주호영은 김종인 비대위 당시 갈등을 겪기도 했다. #

그래서 대선 국면을 거치면서 정치 계파로써 친이계는 상도동계처럼 해체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게 되었으나, 대표적인 친이였던 오세훈 박형준, 홍준표가 광역단체장에, 임태희가 경기도교육감에 당선되어 부활하였고 친이계 인사 대부분이 친윤에 합류한 것을 보면 친이계 출신 인물들의 활동은 2024년 현재에도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7. 윤석열 정부에서 관료 대거 등용

이와 같이 '정치적 행동'의 의미에서 친이계는 영향력을 잃는듯 했으나,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이동관 前 방통위원장, 유인촌 문체부장관 등 이명박 정부 시절 인사들이 두루 등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23년 8월 22일, 이명박 본인이 점심 모임 자리에서 '윤석열 정부에 힘을 실어주자'라고 발언하였다고 한다. #

3. 명단

3.1. 정치권

친이계 출신이라도 상대적으로 중도적인 인물과 보수적인 인물이 섞여있을 수 있으며, 정치생명을 이명박 대통령과 계속 함께한 인물도 있고 도중에 정권 비판을 하며 거리가 생긴 인물도 있고 애매하게 퇴임 이후 색이 엷어진 의원도 있으므로 친이라고 무조건 하나의 균질한 집단으로 정의되진 않는다. 애초에 언론에서의 분류란게 으레 그렇듯 본인은 친이계라고 생각하는데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본인은 친이계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포함된 인물이 있을 수도 있다.[39] 또 리스트를 보면 수도권이나 PK 쪽이 고향이거나 지역구인 사람이 많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래도 PK는 TK 기반의 박근혜에 대한 반발심이 크고 상대적으로 김영삼을 따르던 자유주의 세력의 위세가 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40] 비박/반박 성향으로 인해 친이로 간 인물도 꽤 있었다.[41]

현재 친이계는 20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 공천에서의 조직적인 배제[42] 이명박의 구속으로 위상이 상당히 감소하였고, 측근들은 크게는 비박계 안에서 친홍, 친무, 친유, 친안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또한 일부는 2012년, 2017년에 문재인을 지지하며 친문으로 변질 되기도 했다. 2023년 현재 기준으로는 친이 인사 다수가 친윤으로 뭉친 상황이다.

#, # 이 자료들을 참고하면 대략 누가 친이계로 분류됐는지 알 수 있다.

3.1.1. 친이 6인회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캠프를 이끌었던, 이명박을 포함한 최고 지도부 인사 6명을 일컫는다.

3.1.2. 현역 광역자치단체장 및 교육감

3.1.3. 현역 국회의원

3.1.4. 현역 기초자치단체장

3.1.5. 그 외 인물들

그래서 견원지간인 이명박/이재오와 박근혜의 사이를 정진석이 직접 나서서 여러 번 중재하기도 했다. 20대 국회에서는 친박계에 시달리더니, 확실히 비박으로 전향하고 현재 이명박 전 대통령과 자유한국당 내 친홍, 친무계와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나름 마당발인 듯. 주호영과 함께 이명박의 1심 재판 마지막 변론기일에 참석하기도 했다. 윤석열의 고향[69] 친구로서, 대표적인 친윤 중진으로도 분류된다.

3.2. 검찰

3.3. 그 외

4. 관련 문서



[1] 2021년 윤석열이 정계 입문한 이후로는 친이 소장파들은 다수가 친윤이 되었고, 이재오 같은 일부 중진들은 반윤이 되었으며 일부는 친유, 친안, 친홍, 오세훈계 등으로 흩어지면서 해체되었다. 물론 정치 세력적으로는 이미 2010년대 중반부터 세가 급락해 비박계로 흡수된 상태긴 했다. [2] 비박 개념까지 포함할 경우 2010년대 후반까지다. [3] 비박계의 개념이 사라진 2020년대는 온건~개혁보수파에 걸쳐 있다. [4] 장제원 의원은 모 시사대담 프로에서 한번은 친박 의원들과 식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약간 종교적인 냄새가 났다는 식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래서 본인하곤 좀 안 맞다고 느꼈다고 한다. [5] 비교적 넓은 스펙트럼을 포함하고 있는 계파라 그런지 사회보수주의 사람들부터 온건한 성향의 온건 보수주의 성향의 인물들까지 포진해있었다. 다만 이미지적으로는 친박에 대비되어 좀 더 온건, 중도파 느낌이었다. [6] 물론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명박이 박근혜를 이기고 있었다는 점도 주효했다. [7]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원수지간이라지만 친노 세력과도 뿌리 자체는 YS로 같았다. 사실 2002년 대선 역시 이회창vs노무현으로 결국 김영삼이 영입한 법조인 출신이라는 점은 동일했다. 다만 노무현은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해 김대중한테 갔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2008년 초까지만 해도 친노, 친이 사이는 각자 당내 반대파들에 대한 동병상련도 있어 그렇게 나쁘지 않았으나, 광우병 시위 사태로 지지율이 폭락한 MB정부가 이를 만회하고자 참여정부 인사에 대한 표적수사를 진행하면서 갈라서게 된다. [8] 오히려 이명박 구속으로 타격을 입은 사람은 원세훈 등 관료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9] 윤석열도 검사 시절 승진은 이명박 시절때 가장 빨랐고 이명박 시절 내내 요직을 꿰차고 있었다. 본인도 이명박 정부가 검찰의 중립성을 가장 잘 보장한 정권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 윤석열 본인이 이명박을 부패 혐의로 잡아넣은 장본인 중 한명이라는걸 감안하면, 저 발언은 검찰총장 임명 후 되레 문재인 정부랑 각을 지고 있던 시절 나온 정치적 의도가 담긴 발언이라는건 감안해야 한다. 참고로 윤석열은 대선 전 이명박을 정계에 입문시킨 인물인 김영삼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다. [10] 애초에 윤석열 정권 관계자 과반수 이상을 친이계 출신이 장악한 상태라, 일각에선 총선을 앞두고 국정 경험이 없는 윤석열이 자신의 친위대 격인 검사 라인 대신 아예 친이계에게 전권을 맡긴것 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11] 다만 결집력은 TK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다. [12] 다만 예외적으로 강삼재는 이명박 대신 대선 국면에서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출마한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면서 자유선진당에 입당했다. [13]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공화계 우두머리였던 JP는 박근혜 지지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명박을 지지 했다. 사실 김종필 박정희와도 사이가 썩 좋진 않았다고 한다. 차기 대권주자로 인정받지 못한 섭섭함+당시 박정희의 2인자 견제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4] 여담으로, 상도동계에서 친박으로 편입된 케이스는 친박연대 서청원, 친박무소속연대 김무성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던 반면, 민정계에서는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과 박희태, 김형오 등 이후 신민주계를 거쳐 친이계로 편입된 케이스도 은근히 있었다. 그 외에 민정계의 이한동, 유종하, 이재창 등도 이명박을 지지하거나 이명박 편에 섰다. [15] 김영삼 딸이 친구라 김영삼과 연이 깊다. [16] 비락식혜 광고로 유명한 김보성 맞다. [17] 정확히는 정근모를 대선 후보로 내세웠던 참주인연합에 대거 입당하여 이름을 바꾼 것인데, 총선이 코앞이라서 신당을 창당할 여유가 없다보니 이렇게라도 한 것이다. [18] 이 여파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18대 총선에서 강기갑 후보는 영남 지역 진보 후보 당선이라는 이변을 만들었다. 농촌 지역이다 보니 친박세가 상대적으로 강했고, 그렇게 진보+친박표가 합쳐져 이변을 만들어낸 것이다. [19] 비록 원조친박이긴 하지만, 김무성이 원내대표에 선출된 것은 친이계의 추대에 의한 것이었던 만큼, 당시 김무성은 범친이계로 분류됐다. [20] 원조 친박이지만 친이계의 추대로 원내대표가 되면서 박근혜와 결별했던 만큼 굳이 둘 중에 따지자면 친이라고 봐야한다. [21]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 추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2] 4대강 정비 사업 기획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3] 당시 이명박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였던 한미 FTA 실무를 총괄했다. [24] 이 때 김희국, 류성걸, 신성범 친유와 동시에 분류된 친이계 정치인들이나 권은희, 유승민 친유계도 컷오프되고, 이재오, 주호영 등 친이계 중진들도 컷오프되었다. [25] 이재오 본인은 친이 모임에서 우리가 언제적 친이냐며 늘푸른한국당은 그냥 자신이 하고 싶어서 만든 당일 뿐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선을 그으면서 중도진보 및 비 친이 인사들도 포용 가능하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론 인재풀이 친이계 특성이 강했다. [26] 실제로 몇몇 의원들은 박근혜 탄핵소추 가결 직후, 범죄, 뇌물수수, 청탁행위를 검찰에서 재조사당하는 지경이 됐다. 친박계 좌장인 최경환이 대표적인 예이다. [27] 탈당의 배경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제시된다. 이러한 시각이 나온 배경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친이계 정치인들을 만났을 때, "국민을 보고 가라"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이 친이계의 새누리당 집단 탈당을 지시하는 발언이었다는 시각이 있었다. [28] 남경필의 경우, 2007년 17대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은 친이로는 분류되지 않는 소장파에 가깝지만, 성향과 당시 이명박을 지지했던 행적에서 양분할 경우 범 친이계로 분류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물론 친이계에 토사구팽을 당한 케이스라 비박계라고 보는게 더 정확하다. [29] 특히 당시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경우 큰 목소리로 환영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밝히며 축사를 낭독했다. 친이계로 분류되는 정병국, 정의화, 주호영 또한 축사를 낭독했는데, 이들보다 소리를 크게 냈다. 이를 봤을 때, 남경필과 친이계 인사들도 늘푸른한국당과 연계할 가능성이 충분해졌음이 나타났다. [30] 실제로 친이계 중진들이 창당한 늘푸른한국당이 현재는 이명박의 구속에 이은 몰락으로 와해되면서 지도부가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했지만, 늘푸른한국당은 바른정당, 국민의당과 합당해 몰락하는 자유한국당을 흡수해 보수정당을 재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31] 다만 둘 다 진성 친이는 아니다. 오히려 김무성의 경우 상도동계 - 친박 핵심 - 친무 - 반박까지 행보가 참 다이내믹한 편이었다. [32] 여기서 황교안의 대권 경쟁자인 유승민은 미리 불출마를 해서 황교안이 컷오프를 하지 못한 사례가 된다. [33] 여기서 김규환, 김재원, 윤상현, 정태옥 등 친박계 일부와 핵심 친박 5적이라고 분류되는 인물은 컷오프 되거나 사실상 불출마를 선언하였으나, 곽상도, 김석기, 김정재, 김진태, 이만희, 이장우, 정점식, 추경호 19대 총선 20대 총선에서 친박 위주로 공천된 초재선 의원들은 살아남았고, 김선교, 유상범, 윤갑근, 최형두 친박들 중 본인과 가까운 신인들을 텃밭에 단수공천이나 전략공천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황교안의 최측근이던 민경욱은 공관위 결정마저 뒤집고 계속 살려줘 호떡 공천이란 비아냥까지 받았다. [34] 범 친이 정병국, 정운천 등이 친유계와 가까운데다, 원조 친이라던 조해진이 친유에 속하기도 한다는 점도 있다. 사실 김성동, 김영우, 김은혜, 김희국, 류성걸, 박정하, 신성범, 이성권, 정문헌, 정병국, 정운천, 진수희 등이 친이계나 친유계 모두에 속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바른정당 탈당 사태 당시에 생긴 감정이 없지는 않겠지만 둘 다 친박, 친황과는 완전히 척을 지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다. 친이계 입장에서는 친유나 보수 소장파가 가장 비슷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다. 둘 다 온건 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적인 특성을 보인다. 물론 친유에는 구 친이계 인사 외에도 구상찬, 권영세, 김세연, 유의동, 유승민, 이혜훈 등 구 친박 인사들이 존재하는데다 강대식, 김웅, 유경준 등 최근에 영입된 인사들도 존재한 까닭에 친이와는 구별되는 특성을 보인다. [35] 단, 새누리당/혁신과 통합 보수연합에서도 지상욱, 홍철호 등 이탈 인사가 존재하고 있고, 임이자처럼 친박보다는 이철우와 가까운 까닭에 계파 색이 옅은 인사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새누리당/혁신과 통합 보수연합 내 인사 중 상당수가 친박이지만 일부는 이탈했다거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가입한 케이스도 있다. [36] 다만 김기현 원내대표는 비록 친이계면서도 한 때 친박인 이한구가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있을 때 그의 밑에서 원내수석부대표를 지냈고 같은 친박인 최경환이 원내대표로 있을 때는 정책위의장을 지내는 등 친이임에도 친박과도 한 때 가까웠던 사이다. [37] 더불어민주당이나 정의당처럼 2030대 여성 당원수가 상당 비율이 있는 곳이면 몰라도, 국민의힘은 새로 유입된 당원의 대다수가 2030대 남성이기에 당대표 선거에서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38] 당장 구속 전에 이명박의 자택에 간 정병국조차도 김종인의 이명박, 박근혜 관련 사죄를 간접적으로 지지하면서 거리를 두고 있으며, 친이 핵심인 박진 의원,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나 대부분 친이 인사들도 김종인의 사죄를 지지한다. [39] 특히 친이vs친박 다툼이 심할 당시엔 친박 의원 아님 무조건 친이, 친이 의원 아님 무조건 친박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친이는 아니고 그냥 중도나 비박 정도일 뿐인데 친이로 포함된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40] 상술했듯 2007년 대선 경선 당시 YS는 박근혜 말고 이명박을 지지했다. 이유로는 YS가 이명박을 직접 픽업한 점, 박정희 때의 악연과 이후 '칠푼이'라는 발언에서도 보이듯 박근혜의 능력 자체를 낮게 취급한 점 등이 거론된다. 다만 박씨 부녀를 경멸한 YS와 달리, 이명박은 박근혜를 품어야 되니 한동안 박정희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또한 민정계 인사들과 공화계 인사들 중에도 이명박을 지지하거나 이명박 캠프에 가담한 사람이 제법 많다. 사실 개혁보수 세력이 MB를 지지한 건 맞지만 MB가 개혁보수 성향이었느냐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41] 반대로 TK는 친박 강세로, 친이가 친박을 상대로 공천학살을 자행했던 18대 총선 당시에도 이 지역의 친박들은 막강한 지역기반으로 상당수가 공천을 받았다. 물론 대경권에도 강석호, 권영진, 김범일, 김희국, 류성걸, 이병석, 이상득, 정종복, 주성영, 주호영 등 친이계가 생각보다 많다. 주로 이명박 일가의 고향인 경북 포항 위주로 존재한다. 반대로 부울경에도 강석진( 경남 산청군·함양군·거창군·합천군), 김기춘( 거제시), 김도읍( 북구·강서구 을), 김용갑( 밀양시·창녕군), 김학송( 창원시 진해구), 박대출( 진주시 갑), 박맹우( 울산 남구 갑), 박완수( 창원시 의창구), 배덕광( 해운대구 을), 백종헌( 금정), 서병수( 해운대구·기장군 갑), 안홍준( 창원시 마산회원구), 엄용수( 밀양시·의령군·함안군·창녕군), 유기준( 서구·동구), 유재중( 수영), 윤영석( 양산시 을), 이강두( 산청군·함양군·거창군), 정갑윤( 울산 중구), 정점식( 통영시·고성군), 허태열( 북구·강서구 을) 등으로 대표되는 친박 의원들이 어느 정도 있었다. 수도권에도 강석훈, 권혁세, 길정우, 김명연, 김문수, 김선교, 김선동, 김용남, 노철래, 민경욱, 손범규, 신동우, 심윤조, 원유철, 유정복, 윤상현, 이경재, 이현재, 전하진, 주광덕, 차명진, 한선교, 함진규, 홍문종, 황교안, 황우여 등이 있다. [42] 20대 새누리당 공천에서 주요 공천 배제 대상은 친이계와 친유계였는데, 19대 국회의원 공천 과정에서는 이명박이 아직까지 힘이 있었던지라 친이계 중진들은 거의 공천을 받았지만, 이명박이 대통령직을 퇴임하면서 힘을 잃은 20대 공천 과정에서는 친이계는 완전히 전멸하다시피 했다. 실제로 20대 국회에서 이명박 직계라고 할 만한 의원들은 정병국, 주호영, 김영우, 장제원, 권성동 이렇게 딱 5명밖에 안된다. [43] 이상득을 포함한 영일-포항 권역이나 그 인근 지역 출신인 친이계 인사들의 모임을 뜻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 엄청난 권력을 누려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44] 김기춘 노태우 정부 사람이지만 김영삼과 동향에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김영삼과 가까이 지냈다. [45] 더불어 유죄 확정 전에 새누리당에서도 제명되었다. [46] 참고로 국회의장은 사망 시 국립묘지 안장 대상 중 하나인데, 박희태는 범죄 때문에 국립묘지에 매장되지도 못한다. [47] 18대 총선 당시 경상도에서 친박연대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었다고 하지만, 친박연대가 직접 나선 TK와 달리 박근혜에 대한 비토 심리가 있었던 PK에서는 부산의 대표적인 지역 정치인 김무성을 필두로 한 친박 무소속 연대에서 친박 후보를 냈다. [48] 유승민, 김무성 등과 같이 취급한다. [49] 또 조은희는 대구의 경북여고 출신이다. [50] 17대는 이상락 의원이 학력위조로 인해 의원직을 잃으면서 생긴 재보궐선거, 19대는 김미희 의원이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인해 의원직을 잃으면서 생긴 재보궐선거. [51] MB 정부 때 정치에 입문했다가, 이후 박희태 돈봉투 사건을 고발하며 정치 일선에선 물러났다. 그리고 교육감 선거에 출마해 상기한 흑역사를 찍게 된다. [52] 사실 민주자유당 신한국당에서 같이 민주로서 김영삼을 모시고, 포항과 인연이 있는 기업인 출신이라는 매우 비슷한 내력을 보면 김무성이 왜 친이가 아닌지 이상할 정도다. [53] 이명박은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이후 종로구 안국동에 대선을 대비하는 씽크탱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안국포럼이다. 이후 김영우 등의 안국포럼 출신 인사들은 이명박 정권에서 친이계 정치인이나 청와대 참모로 활약한다. [54] 그래도 보수의 분열까지 있었는데도 험지에서 득표율이 40% 정도여서 이 정도면 선방했다는 평을 들었다. [55] 제18대 국회에서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었다. [56] 이명박이 서울특별시장이었을 때 보좌했던 인물들을 말한다. [57] 2010년 포항시장 선거에서 " 한나라당 후보는 전라도에서 돌아다니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대통령 고향에서 민주당 후보가 활개를 치고 다닙니까?"라고 말하며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동시에 이 행보를 보인바 있다. 그리고 민주당 후보보다 무려 4배 이상 많이 득표하여 경북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58] 김성태라는 이름을 가진 정치인 두 명도 있는데, 이 둘도 자유한국당 소속이다. [현역] 의원 [60] 장제원의 아버지 장성만 또한 사상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결과적으로 보면 장제원의 집안이 해당 지역 기반이 강한 자체 경쟁력이 있는 후보였던 덕분에 무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61] 2008년 소장파였던 정태근, 남경필 등과 함께 이상득에게 MB 정부 성공을 위해 18대 총선 불출마와 정계 은퇴를 요구했다. 이후 이상득이 구속된걸 보면 실제 이들의 충고는 옳았다. [62] 이 때 새로운보수당 자유한국당의 통합을 지지하는 정병국, 정운천, 오신환, 하태경 새로운보수당 자유한국당의 통합을 반대하는 유승민, 이혜훈, 유의동, 지상욱 간의 갈등이 있었고, 결국 유승민이 불출마하면서 갈등은 해결되었다. 현재는 다시 예전처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63] 미리 불출마를 한 유승민과 다르게 정병국은 출마하려고 했으나, 황교안 친박, 친황 황교안의 대권행보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정병국을 컷오프하기로 했다. 정병국 대신 공천받은 사람은 친박, 친황 출신인 김선교로, 친이, 친유 정병국을 쳐내고 황교안 친박, 친황 심기로 김선교를 공천한 것. 미래통합당 공천관리위원회에서는 정병국 강남구 을에 공천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결국 박진이 공천되었다. [64] 이명박과 친분이 거의 없었다고 알려진 바 있으나, 실제로는 이명박과 원래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65] 정운찬이 국무총리로 있었던 시절 이재오는 18대 총선에서 낙선하여 국회에 있지 않고 국민권익위원장으로 내각에 있었다. 정운찬과 접촉이 많을 수 밖에 없다. [66] 소선거구제 이래 전북에서 최초로 당선된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보수정당 소속으로 당선된 황인성, 강현욱 등의 케이스가 있었다. [67] 허삼수는 하나회의 일원 중 하나로, 3당 합당 이전에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의 후보 노무현에게 부산 동구에서 패배한 민정당 후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삼당합당 이후 노무현이 김영삼을 떠나면서, 뒤에 치러진 14대 총선에서는 김영삼에 의해 민자당 후보로 출마하게 되어, 같은 지역구에서 노무현에게 설욕했다. 하지만 15대 총선 당시 김영삼이 당 내 민정계를 축출할 때, 그도 같이 신한국당 공천에서 떨어졌다. [68] 전여옥도 외부자들에서 18대 국회의 정진석은 범 친박계였다고 언급한 바 있고, 이명박, 이재오 및 친이계와도 친분이 있었지만, 18대 국회에서는 박근혜와 친박의 편을 조금 더 들어준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19대 때 김무성이 박근혜 및 친박에 의해 공천을 받지 못하고 친이계 초재선들이 대거 공천탈락했을 때와, 20대 때 친이계와 유승민계가 철저한 공천 배제로 인해 친이계가 파멸당하고 유승민계까지 큰 타격을 입었을 때도 정진석은 전부 잡음 없이 공천을 받았다. 이렇듯 범친박계라고 분석해도 무리가 아닌 정치인이었으나, 20대 국회 초부터 박근혜와 친박을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비박으로 전향했다. [69] 정확히는 윤석열은 서울특별시 출신이고, 공주는 본적이다. 부친 윤기중의 고향이 공주로, 정확히는 윤기중도 논산시에서 태어나서 공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70] 사실 조진래는 영남고를 2달만에 자퇴해서 정식 동문은 아니다. [71] 자유한국당 복당을 주문했다고도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는 않은 정보다. 확실히 알려진 건 강한 야당, 보수를 강조했다. [72] 이 때문에 17대 대선의 한나라당 경선 당시 친박 성향의 독자들에게 엄청 욕먹기도 했다. [73] 애초에 서울신문에서 발간한 18대 국회의원을 다룬 서적에서는 유승민과 친하다고 적어두었다. [74] 대신 한승수는 이명박의 취임 이후 국무총리에 임명되면서 곧바로 정계에 복귀하였다. [75] 당시 그가 제친 사람 중 1명이 황교안이었다. [76] 다만 친이 중 일부는 하필 2000년대 대안우파로 떠오르던 한국식 뉴라이트색에 물들어 상도동계보다 우경화 되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77] 다만 정병국은 상대적으로 사이좋게 지낸 케이스였다. [78] 물론 더 정확히 따지고 보면 유승민은 친박 이전 이회창계다. [79] 다만 홍준표는 여러모로 독고다이 스타일에 보수적이면서도 계파색은 옅은 특이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도 정통 친이라기보단 범친이 정도로 분류되었다. 다만 대학 직속선배인 이명박과 개인적인 연이 있어 서울시장 당선되기 전까지 행동을 같이 했고,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직후 캠프에서 탱커 노릇을 자처하면서 이명박을 도왔었다. [80] 물론 알다시피 유승민, 권영세는 지금은 친박계로부터 멀어진 상태다. 특히 유승민은 박근혜와도 거의 원수 사이다. 다만 친박계도 친이계 내부 계파 중 그나마 성향이 맞는 이상득계와는 한동안 같이 연대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