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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는(New Right)는 기존의 올드라이트(Old Right)와 대비되는 신우파를 일컫는 말로, 90년대부터 흐름이 시작되어 2000년대 본격적으로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2. 설명
우선 뉴라이트는 한국에서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애초에 뉴라이트는 네오라이트와 뜻은 같으며 국제적으로는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 행정부의 정책기조를 이룬 신보수주의에서 점점 독자적으로 발전한 사상으로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 이것이 한국 수입 혹은 현지화 과정에서 변형되어 사용되면서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선 보통 뉴라이트라고 하면 뉴라이트전국연합 등의 단체나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을 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국의 주류 언론에서 거의 처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장으로 재직하다가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일하게 된 이동관이었다.뉴라이트는 조금씩 세를 불려나가다가 2005년을 기점으로 동아일보의 기획 기사 등을 통해 신보수 운동으로 성장했는데, 핵심적인 특징은 기존 올드라이트의 상징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반공주의를 구시대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좀 더 다양화된 이념 체계를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뉴라이트 내부에도 온갖 스펙트럼이 결집되어 있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볼 순 없지만, 올드라이트와 확실히 다른 점은 있다. 일단 올드라이트가 거의 반공밖에 없는 인상이라면 뉴라이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강조하는 시장보수라는 인상이 있다. 그러나 비판 측에선 뉴라이트의 노선도 자세히 살펴보면 '친시장'이 아닌 '친대기업'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파 자유지상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하며, 친대기업적 관치경제, 그러니까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기는 개입하는데 그 목적이 '빈곤과 실업 같은 자본주의의 폐단을 어느 정도 완화하여 민중의 불만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것을 예방'하고 '경제의 형평성을 강화'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정부가 '대기업을 살리고 이들의 기득권을 굳히기 위하여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경제'만' 옹호하는 왜곡된 경제적 자유주의라고 규정함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수 진영의 경제적 개입주의, 신중상주의 정책들에 대해 대다수 뉴라이트 단체들은 일언반구도 없다.
올드라이트는 색깔론이 가미된 냉전적인 반공주의를 추구한다. 반면 90년대 이후 본격 등장한 뉴라이트는 소위 뉴라이트 사관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수정주의적 사관을 제시했는데, 후술된 식민지 근대화론, 1948년 건국절 제정 주장, 이승만 재평가 시도 등이 대표적이다.[1] 한국 뉴라이트 주요 인사들의 과거가 주로 20세기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했던 주체사상파였던 것을 감안하면 숭배 대상만 갈아치운 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서울대 출신의 주사파들이 그런 편이었다.[2] 한편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이론적 구심점을 잃게 된 상당수 운동권 그룹들은 여러 방향의 활로를 모색했는데 그중에는 민중당처럼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꿈꾸는 진보정당으로 시작했다가 선거에서 빛을 보지 못하자 결국 주류 정당에 줄을 댄 케이스도 있었다. 이후 보수 진영으로 전향한 인물 중 유명 인사로는 신지호, 한오섭, 박형준, 임해규, 차명진 등이 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계 견제의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전향한 운동권 인사들을 많이 영입했는데 이재오, 이명박[3], 이우재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다만 이들이 뉴라이트와 다른 점은 그래도 보수정당을 개혁해보자고 중도~중도우파 정도로 전향한 이들과 달리 뉴라이트 세력은 이념이나 사상부터 보수를 넘어 극우화되었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운동권 세력 일부와 이들을 주류 정치권에 편입시키길 거부했다.[4] 이에 실망한 이들이 이념을 전향하여 뉴라이트를 탄생시켰다. 주로 한총련의 옛 산하 단체였던 전북총련이 뉴라이트의 시초가 되었다고 하는데, 뉴라이트 진영에서 초기부터 들고 나왔던 북한인권운동은 전북대가 구심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니 뉴라이트 세력이 과거 운동권이나 공산권 운동가들의 주요 전략이었던 벼랑 끝 전술과 당내 계파 싸움 이전투구를 일으켜 내부 분열과 지도부 장악을 노리는 극악한 패거리 정치질로 이어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들의 방식이 매우 극단적인 이유는 자신들이 전향자라는 과거를 가진 불리한 입지에 놓여 있기 때문도 커보인다.[5] 즉, 인정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급속히 세를 키웠는데 이는 기존의 86세대 중 보수정당에 우호적인 정치세력이 이들 외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보수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존의 학자들에게 대립각을 세우면서 보수 세력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급속히 세를 키웠지만 그들의 공격적인 언행은 자기 맘에 안 드는 보수세력에게도 마찬가지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좌우 가리지 않고 이들을 멀리하는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6] 실제로 뉴라이트에 몸 담다가 괴리를 느끼고 떠난 사람도 많다.
좌파 성향 사이트는 당연하고 대안 우파 성향이 강한 디시인사이드 국내야구 갤러리 및 미국 정치 마이너 갤러리에서도 이들을 위장보수라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결국 2020년대 기준으론 이들 때문에 정치, 사회 갤러리는 사실상 사회에 실질적인 영향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극우 유튜버들 떡밥이나 갖고 노는 하꼬방으로 전락하고 그나마 정치에 관심이 있는 나머지 갤러들은 부동산 갤러리나 자동차 갤러리 등으로 흩어졌다.
'뉴라이트가 곧 극우'가 된 현실도 자세히 살펴보면 성향이 어느 정도 갈리는데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지만[7] 동시에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정말 한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국 혐오 적인 역사관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심하면 한국은 그냥 인종 계열부터가 잘못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뭔가 해결책을 제시해 볼 생각도 없다는 점에서 정치 발언이라고 해주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2010년대 이후 뉴라이트계의 대표격인 이영훈도 2019년 저서 반일 종족주의에서 한국에서 특정 시기 사기 범죄 비율이 높다며[8] 한국인은 거짓말을 잘하는 민족이라고 싸잡아 일반화하여 비하한 바 있다. 그래서 위안부나 강제 징용도 거짓일 확률이 높다는 논리까지 전개했는데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9] 특히 조선을 구제불능의 국가처럼 정의하여 일제의 지배가 없었다면 근대로 발전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는 정도로 폄하한다.[10] 이에 대해 그래도 이영훈은 제국주의 비판론자에 가깝고 이 책은 다른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과 함께 공동으로 집필한 책이기 때문에 이영훈 본인만의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영훈 평소의 행적이나 발언을 보았을 때 문제가 되는 발언은 다른 집필가들의 의견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역시 추론적 주장에 불과하고 그 책의 대표 저자가 이영훈인 이상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다 떠나서 이영훈 자체가 이승만학당 교장으로 후술되어 있듯이 모순된 주장을 많이 하며 본인의 전문 분야도 아닌 세종대왕을 갑자기 건드려서[11] 일부 극단적인 혐한들이 야갤 등 대형 갤러리에서 이영훈 책으로 역사 배운 자신들의 주장을 늘어놓는데 같은 자국혐오 성향이라도 야민정음이라는 대형 밈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 한글만큼은 일종의 성역으로 간주하는 야갤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비난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에 이영훈을 아주 싫어한다.
3. 역사와 조직
오늘날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 사실상 국부(國父)로 내세우자는 주장이나 일제강점기에 대해 우호적인 주장을 하는 인물 중 다수가 뉴라이트 소속이거나 비슷한 사관을 추구하기 때문에 비판적인 대중들은 뉴라이트를 극우 종일(從日)파 정도로 인식하고, 오늘날 행적만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상기했듯이 뉴라이트 운동의 토대를 다진 사람들은 본래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었다. # # #
뉴라이트의 토대는 1998년 김영환, 홍진표, 한기홍[12] 등 NL 출신 전향파를 주축으로 한 <시대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김영환 등 초기 전향파들은 극좌나 극우도 아닌 '새로운 운동 모색'의 뜻을 밝혔고[13] 이들은 군사정권의 ' 국가주의 보수' 대신 기업과 시장의 자율을 믿는 ' 서구식 자유주의'를 내세웠으며 더 나아가 북한 체제도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봉건체제로 규정하며 기존 국가주의 보수들이 '북한=섬멸대상'으로 본 것과 달리 북한 정권과 민중을 분리해 북한 주민들을 돕자는 '북한민주화운동'을 제창했다.[14] 처음에는 북한민주화운동에 진보 진영의 참여를 예상했으나 국민의 정부의 ' 햇볕정책'과 충돌하면서 점차 성향이 우경화되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선 대다수 전향파들이 확실히 보수로 자리잡았다.
NL 전향파들이 본격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2004년 11월 23일 '자유주의연대'가 출범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보수 인사들의 주목을 받으며 "수구좌파와 수구우파가 주도하는 정치는 끝을 고해야 한다"고 하여 좌우 모두에 전면적 투쟁을 선언하며 새 전기를 맞이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당시 참신한 주장들을 했지만 기존 보수가 극렬하게 반발하며 위장전향 의혹을 받자 철회했으며 이후 '새로운 사회운동 모색'이라는 초심은 사라지고 보수화만 남았다. 그나마 경제적 자유주의는 보수 세력에게 받아들여지면서 기존의 국가자본주의 비슷한 냄새로부터 탈피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지만 이마저도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를 혼합한 정책으로 차별성을 잃은 데다 점점 변질되어 상술한 대로 친기득권 관치경제 옹호로 나아갔다. 2005~2006년 들어서 '뉴라이트' 이름을 내거는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 정치에 투신했고 2007년 17대 대선을 즈음해 이명박 후보 지지로 자리잡았다.
초기에 뉴라이트를 표방했던 건 신지호 의원을[15] 주축으로 하고 안병직 교수를 수장으로 하는 '뉴라이트 재단'이었지만, 직후 김진홍[16] 목사를 중심으로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생겨나 한동안 뉴라이트 재단과 마찰을 겪다가 2009년 6월 16일 모든 걸 포기한 뉴라이트 재단이 단체 이름을 시대정신으로 교체하였다. 2002년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생겨난 바른사회시민회의도 뉴라이트 계열이다.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 결국 본인들끼리 계파 갈등을 하기도 했다. # 크게 보면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학자, 정계 및 단체에 진출하는 행동가, 그리고 이들의 돈줄이나 다름없는 추종자 무리로 나뉘었다. 이런 체계가 갖춰지니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함에도 꽤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것이다. 다만 대중 반응이 영 아니라서 유의미한 후학 양성이 안 되니 결국 사멸하는 거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3.1. 주체사상과의 연관성
결론부터 말하면 종북주의자로 살던 시절의 전체주의 사상을 간직한 채 친일반민족행위 옹호와 혐북으로, 방향만 돌아선 사람들이 바로 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하드웨어만 다를 뿐 근본적인 소프트웨어가 같다.뉴라이트의 사상적 뿌리 중 하나인 안병직은 원래 마르크스와 마오쩌둥 연구자였다. NL의 이론인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의 창시자로도 알려져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의 마지막 마르크스 경제학 교수였다는 김수행 전 교수에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가르친 사람이 바로 안병직이었는데 그런 후에 안병직 본인은 뉴라이트가 되었다. 그 안병직의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80년대에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정착되고 낙성대연구소의 이영훈 등으로 이어졌다. 90년대 초부터 개신교 우파나 전경련, 조선일보 류근일 등과 손잡고 보수 운동이 될 때 전향한 NL들도 합류했다. 다시 말해 뉴라이트의 이념적 뿌리는 명확히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다. 80년대에는 PD 중 일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태경, 김영환 부류의 전향한 NL이 끼어든 건 90년대의 일이다. 사상의 원조는 PD가 좋아하던 마르크스주의다. 즉, 안병직과 이영훈이 마르크스 유물론적 사상의 줄을 타다가 식민지 근대화론 주장자가 된 것은 맞는 말이다. 어찌보면 마르크스주의가 뉴라이트가 된 것도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데 나치 독일 시절에는 히틀러유겐트가 된 공산주의자들도 많았다. 히틀러도 민주주의자들보다 공산주의자를 나치로 전향시키기 쉽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출처
안병직은 2005년 일본에서 귀국한 뒤 '뉴라이트재단'을 창립해 좌파 진영과 사상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김문수· 차명진· 임해규· 이재오· 박형준 등 당시 한나라당 내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사상적 스승'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들은 안병직을 한나라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들였고 안병직은 2007년 말 보수정당의 싱크 탱크인 여의도연구원 13대 이사장직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안병직의 캐치업 이론은 MB노믹스가 강조하는 세계화의 이론적 토대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했다. 대북 문제에 있어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비핵·개방 3000' 구상을 지지하며 " 상호주의 이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이걸 보면 당장이라도 북진통일을 주장할 것 같은 인상과 달리 뉴라이트 대부도 이론적으론 상호주의를 내세운다. 안병직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 2008.04.25.
앞에서 설명했듯이 뉴라이트 대부분이 80년대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김일성을 찬양하고 주체사상 체제로의 통일을 추구하다가 90년대 들어 소련과 동구권 붕괴를 지켜보고 북한 체제의 실상을 알게 되고 나서 정반대 방향으로 전향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다.[17] 그런데 이들이 겉으로는 전향을 했다고 하지만 주체사상적인 사고회로 자체는 전혀 벗어난 것이 없어서 다음과 같은 뉴라이트만의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단순히 극과 극이 통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사학에 근거를 둔 듯한 발언을 자주 하는 데다가 실제로 뉴라이트 중에도 경제사학 전공자가 많아 황당한 주장을 함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많은 사람들이 낚이곤 한다. 당장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에서도 뉴라이트 측의 저자들을 보면 대부분 경제학자 내지 경제사 전공자들이었다. 집필진을 보면 알겠지만 뉴라이트 출신 역사학자들이 많이 참여하였고 서술에 뉴라이트 학계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였다. 반면 전향파 1세대 한기홍은 박찬수 저서 <NL 현대사>에서 "북한 주도 현대사에는 반대하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했다. 뉴라이트에도 스펙트럼이 다양했다."라고 말하며 최근 수년간 <시대정신>에까지 뉴라이트 색채를 빼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방법론적 관점에서는 과학적 방법론이나 실증주의를 강조하며 '기존 좌파들'[18]의 주장은 이념적이며 종교적일 뿐인 유사과학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19] 사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경제학이나 나아가서 인문학 전반을 비판하는 것은 흔한 레퍼토리지만 이들이 대중에게 "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실증적인 편"이라고 알려진 경제학을 좋아하는 것과 통한다.
그러나 뉴라이트는 엄연히 경제학, 그중에서도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상 연구자였지, 전문적인 역사 연구가가 아니므로 이들이 만들었던 국정 교과서가 온갖 오류와 모순 투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 이후로도 뉴라이트 인사들이 세계사에 관하여 제국주의 역사상 식민지배 국가에 대한 피해 소송이나 보상이 제기된 바도 없고 이루어진 바도 없다는 등 심각하게 잘못된 정보가 섞인 발언들을 마구 하는 것도 이들이 세계사에 대해 상당히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마르크스주의 색채가 강하게 남았는데 마르크스주의에서 근대 자본주의 다음 단계를 사회주의나 미래 공산주의라고 주장한 점, 공산주의 국가들이 기존의 역사와 단절을 선언하는 점[20]을 감안하면 냉전이 소련의 패배로 끝나자 뉴라이트 계열에서 공산주의가 실패했으니 근대 자본주의를 인류 문명의 최종단계로 규정하며 확실한지 논란의 여지가 크지만 근대 자본주의를 한반도에 들여온 것처럼 보이는[21] 일제강점기를 숭상하거나 대한민국 이전의 역사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4. 사상
1.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이라고 하는 자나 단체
2. 1948년을 ‘ 건국절’이라고 하는 자나 단체
3.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을 일본이라고 강변하는 자나 단체
4.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를 폄훼하고 ‘임의단체’로 깎아내리는 자나 단체
5. 식민사관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을 은연 중 주장하는 자나 단체
6. 일제강점기 곡물 수탈을 ‘수출’이라고 미화하는 자나 단체
7. 위안부나 징용을 ‘자발적이었다’고 강변하는 자나 단체
8. 독도를 한국땅이라고 할 근거가 약하다고 주장하는 자나 단체
9. 뉴라이트에 협조, 동조, 협력하는 자나 단체
광복회 선정 9대 뉴라이트 정의
뉴라이트는 고유의 사관과 경제관으로 특징되는데, 기존의 올드라이트와 구분해 시장보수로 불리기도 하지만 정작 시장주의와는 핀트가 어긋나는 부분도 많은 뉴라이트 경제관과 기타 말 많은 사관으로 인해 비판도 많이 받는 사상이다.2. 1948년을 ‘ 건국절’이라고 하는 자나 단체
3.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을 일본이라고 강변하는 자나 단체
4.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를 폄훼하고 ‘임의단체’로 깎아내리는 자나 단체
5. 식민사관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을 은연 중 주장하는 자나 단체
6. 일제강점기 곡물 수탈을 ‘수출’이라고 미화하는 자나 단체
7. 위안부나 징용을 ‘자발적이었다’고 강변하는 자나 단체
8. 독도를 한국땅이라고 할 근거가 약하다고 주장하는 자나 단체
9. 뉴라이트에 협조, 동조, 협력하는 자나 단체
광복회 선정 9대 뉴라이트 정의
자세히 보면 사상이나 경제관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존재하고 있는데, 바로 약자와 패자에 대한 멸시와 전면적 부정[22] 그리고 승자로 여겨지는 세력[23]에 대한 무비판적인 추종[24]이다.
4.1. 뉴라이트 사관
4.1.1. 조선에 대한 폄하
뉴라이트는 이전의 체제였던 조선을 폄하하고 고종을 무능을 넘어서 아예 매국노로 만드는데 집착하는데, 정작 인권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일본 제국을 재평가하고 해방 이후 독재자들도 찬양하는 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25] 한 예로 뉴라이트의 거두인 이영훈은 세종대왕을 가리켜 노비종모법으로 노비를 양산[26]하는 등 노비들의 인권을 침해했다거나 기생, 공녀를 만들고 수령고소금지법으로 백성들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 시절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나 제주 4.3 사건 진압을 명분으로 한 민간인 학살로 인해 수십만의 무고한 국민들이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언급하길 꺼리는데[27] 뉴라이트들이 정말 현대 사회의 인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신분제가 당연하던 세종 시기를 들추지 말고 이승만 정부[28]와 일제의 강제동원 같은 근대적 법체계하의 국가 폭력부터 신랄하게 비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조선의 전근대성을 욕하면서 거꾸로 이들에 대해서는 이중잣대를 내세우며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며 마치 관왕묘나 종묘사직을 세우는 것처럼 각종 상징물을 수도에 지어놓고 싶어한다.[29]이외에도 뉴라이트는 조선사를 비난하기 위해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의 종속성을 과장하거나, 조선의 자주적 측면들조차 폄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무색할 정도로 일본에 대해서는 사대에 가까운 모습들을 많이 보이며 모든 잘못을 상대 진영으로 돌린다.[30] 뉴라이트는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사대를 그토록 비토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조선 시대 유학자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맹목적인 추종과 사대를 일삼는다.[31] 일본에 대해 우호성을 갖고 반일 때문에 한국이 미개해졌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고전적 역사관에서의 사림파와 위정척사파들이 중국 문화에 멀어지면 오랑캐처럼 변해간다고 주장했던 모습들과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에선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세력이 분명 제도적으로 더 우월한 건 사실이고, 중세 시절만큼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점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대국의 극우적 시각조차 협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수용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 안보에 절대적인 상수는 한미동맹인 걸 생각하면 필요 이상으로 일본에 과한 양보나 제스처를 보내는 점은 분명히 있고, 이는 조선에 대한 폄하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4.1.2. 권위주의 독재에 대한 이중적인 찬양
유신정권, 5공 시절에는 박정희 및 전두환 정권은 같은 독재자임에도 이승만을 거의 대놓고 안 좋게 평가했는데, 그들은 이승만을 만악의 근원으로 상정하여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32] 즉, 이승만의 독재와 자유당의 부패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는데 이를 자기들 기준에서 볼 때 무능한 야당이나 데모꾼들에게 맡길 수는 없으므로 군부가 나라를 이끌어야 했다는 주장이었다.그러므로 1980년대까지도 이승만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욕을 먹는 처지였는데[33] 뉴라이트는 전향하기 전 김일성을 숭배하던 자리를 이승만으로 갈아치워서 이승만을 국부, 건국의 아버지 등으로 평가할 뿐만 아니라 이승만에 대한 비판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주장까지 펼치기 시작했다. 건국절 논란에 대해서 이승만은 1919년 건국이라는 입장을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948년 건국을 고수한다.
뉴라이트는 자유민주주의를 특히 강조해왔다. 역사 교과서 논란 때도 단순히 ' 민주주의'라고 서술하면 괜찮다고 주장하면 종북몰이를 시전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 자유민주주의를 망가뜨린 독재자 이승만에 대해서만은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이는 뉴라이트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하나부터 짚고 넘어가면, 뉴라이트에서도 일부 세력은 박정희식 국가주의를 찬양하기도 하지만[34] 뉴라이트는 기본적으론 이승만을 더 찬양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일부는, 특히 초기 세력일수록 군사정권은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군부독재보단 문민독재가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는 불명. 이는 뉴라이트 초기 인사들의 출신 자체가 군사정권에 대항하던 운동권 출신 전향 인사들이 많았으니 더 그런 점도 있다. 심지어 뉴라이트 내부에서도 극우 인상이 있는 김문수조차도 이승만은 열심히 추켜세우면서 군사정권은 이해하게 되었다는 수준 정도로 표현한 바 있다.
사실 이 부분에서 뉴라이트의 태생적 모순점이 생기는데, 이승만이 군사독재보단 그들 기준 그나마 나은 민간 독재자라고 한들, 이승만 역시 발췌 개헌이나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등 황당한 짓거리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단 시작은 북한과 달리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시작했고[35], 유신독재처럼 자유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대놓고 무너뜨리진 않았기에 자유민주주의 타령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승만의 최대 흑역사는 이런 것들을 넘어 각종 학살 논란이지만.
어찌됐든 이승만이 입으론 자유민주주의를 떠들면서 행동으론 그 자유민주주의를 스스로 망가뜨린 독재자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오늘날 보수 진영엔 김영삼이라는 나름의 훌륭한 인물도 있다. 그럼에도 90년대 이전까진 좌우 모두에게 욕을 먹었던 이승만을 추앙하는 이 모순점은 뉴라이트의 태생 시기가 아직 김영삼이 살아있을 때라 성역화하기 애매한 점이 있었고, 게다가 IMF 직후라서 도저히 김영삼을 고평가할 수 없는 현실적 사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군사정권은 건너뛰고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이승만이 나왔고, 여러 모순점에도 불구하고 재평가 정도로 시작한 것이 과한 성역화 과정에서 온갖 이중잣대와 내로남불 주장들이 많이 개발된 것으로 추정된다.[36]
사족으로 2015년 김영삼의 사망 이후 김영삼을 개혁보수적 뉴라이트의 시조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는데[37], 뉴라이트 원년 멤버인 신지호 전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2019년 인터뷰에서 그는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 논란이나 박정희, 이승만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움직임에 대해 비판하면서, YS 정부 때 뉴라이트가 태동됐다고 보는 시각에 대해 "나는 사실 그렇게 본다. YS 자체가 개혁보수의 원조다."고 평하기도 했다. # 그러나 현재 뉴라이트 주류 세력은 이런 시각과는 거리가 있다. 보수 전체로 놓고 봐도 표면적으론 YS를 내세우며 자유민주주의를 찾지만, 정작 올드라이트를 포함한 기존 보수 지지 세력 다수는 민주 진영에서 넘어온 김영삼보단 이승만, 박정희를 추앙하는 모순점 속에서, 그들의 독재와 일부는 친일조차 옹호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2010년대 후반 홍준표가 보수정당 당사에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걸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도 김병준 비대위원장 등으로부터 떼어내자는 말이 나왔다. 2020년에도 YS계였던 정병국 의원이 "당 대표실에 걸려있는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굉장히 혼란스러웠다."면서 "세 분이 당의 뿌리라는데, 그들은 극과 극으로 싸웠던 사람들이다. 보수란 가치의 혼란이 오게 된 근거"라고 지적했다. #
이런 모순점들 때문에 이들이 일제와 이승만, 일부는 더 나아가 박정희를 찬양하는 것은 그저 반공을 내세운 독재자를 숭배하고 그 이전의 한국인들을 폄하함으로써 과거 공산주의, 주체사상에 빠졌던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와 열등감의 방어기제일 뿐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실제 이런 자기 혐오감 때문에 극단적 전향을 하는 사례는 종종 나타난다. 그 시절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반성만 하고 조용히 살면 될 것을 역으로 또 잘못된 방향성을 갖고 사회를 분열시킨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사실 이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엄밀히 말하자면 이론적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반대를 자본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처럼 배워왔던 것, 제1세계를 공산진영에 대조되는 자유진영으로 일컬었던 반공주의적 표현이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38] 쉽게 말해 우리식 자유민주주의, 사이비 자유민주주의다.
4.1.3.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근대화론은 1980년대 말 혹은 90년대 초 어느 무렵부터 뉴라이트의 대부 안병직 교수가 학계에서 주장하기 시작한 내용으로, 요지는 '일제가 없었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아주 더디게 진행됐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물론 허수열 교수의 '개발 없는 개발' 등 이미 학계에선 여러 반박 논쟁이 오간 주제이긴 하지만, 일단은 안병직의 제자이자 뉴라이트 사관으로 유명한 이영훈 교수의 글을 참고해보자.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가 조선을 지배한 목적에서부터 기존의 수탈론과 이해를 달리합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기본 목적은 이른바 ‘영구병합’이었습니다. 일제가 남긴 통치사료를 보면 ‘영구병합’이란 말이 지겨울 정도로 자주 나옵니다. 영구히 일본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지요. 일본사람들은 여기에 20~30년간 살다가 돌아가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영구히 살려고 왔습니다. 이 점을 똑바로 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구병합’이란 거창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조선의 사회와 경제를 일본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야지요. 조선의 정신과 문화를 그대로 두어서도 안 되지요. 그럴 목적에서 일제는 그들의 법과 제도와 문화를 조선에 이식하였습니다. 한갓 수탈이나 자행하여 민심을 잃기보다 좀 더 근본적인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달렸던 것이 일제의 조선 지배 35년간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1912년에 공포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이란 법을 들 수 있습니다. 그때 시행된 일본의 민법은 지금 대한민국의 민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법을 대조하면 조항의 내용과 순서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근대 민법의 핵심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에 대해 법학자들은 ‘사적 자유의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국가나 다른 사람에게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그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다는 뜻이지요. 그렇다고 일제가 조선에다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도입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본 자신이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이전의 단계였지요. 그들이 만든 근대국가는 가족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정치원리에 기초한 천황제 국가였습니다.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실천하는 것은 미국에 의해 천황제 국가가 해체된 1945년 이후부터이지요. 그렇지만, 일제는 천황제라는 정치체제하에서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의 원리로서 근대적인 민법을 서유럽에서 도입하여 자기류로 정착시켰습니다. 그 서유럽 기원의 민법이 1912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에 이식된 것입니다.
(중략)
흔히 사람들은 일제가 토지와 식량을 수탈했다는 교과서의 서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그렇다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자는 말이냐”라고 불쾌해합니다. 저는 제국주의 비판의 논리가 그렇게 단순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는 수탈 여부로 비판할 것이 아니지요. 수탈 여부와 무관하게 제국주의는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름 아니라 인간 본성에 반하는 체제가 제국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다른 누구보다 명확히 한 사람이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분이신 한용운 선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본인 검찰의 심문에 대응하여 한용운 선생이 작성한 ‘조선독립의 글’이란 문장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그렇지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시체와 다를 바 없지요. 인간생명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한용운 선생이 일제의 조선 지배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자유의 논리에서였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한용운 선생의 글을 읽고 일본인 검찰은 마음으로 승복하고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입니다. 그에 비출 때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각종 세금은 거두어 가면서 정치적 권리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 일제의 지배체제였습니다. 그런 모순은 어차피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모순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책은 조선인을 모조리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입니다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제2장에서 썼습니다만, 차별을 받는 가운데 조선인들은 그들이 하나의 운명공동체인 민족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민족의식은 역설적으로 일제의 동화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일수록 더욱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동화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의 방책은 조선인이게도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제는 1942년 조선의 청년들을 일본군대로 동원할 계획에서 1946년부터 조선인의 참정권을 인정할 방침을 세웁니다. 일제가 일찍 패망하는 통에 이 방침은 공수표가 되었습니다만, 실제 실현되었더라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지는 짐작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조만간 해체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다고 보지요.
그런데 일본인 검찰을 감복시킨 한용운 선생의 자유정신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저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다”는 선생의 외침에서 문득 미국 독립혁명의 사상가인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연설을 떠올렸습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바다를 건너 온 정신이었습니다. 전통 성리학의 정신세계에서 그런 인간 자유론이 생겨날 여지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이 점에 특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용운이란 당대의 지식인은 더 이상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신세계는 인류 보편의 자유 가치를 찾아 동서양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국주의 비판이 일본인 검찰에게 경의로 받아들여진 것도 그가 이미 세계인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한용운 선생의 정신세계에서 저는 제가 앞서 이야기한 ‘문명사의 대전환’의 가장 훌륭한 예를 발견합니다. 중화제국이라는 문명권의 일부로 위치했던 조선 문명이 자유를 인간의 본성으로 알고 개인을 궁극의 실체로 인정하는 서유럽 문명권으로 포섭되어 가는 그 대전환 말입니다. 제가 식민지기를 이해하고 또 일제의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시각은 바로 그러한 ‘문명사의 대전환’입니다. 그러한 시각을 가리켜 세간에서는 흔히들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 진의가 올바로 이해되지 않은 가운데 편견에 가득 찬 비판만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에 대해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39]
「대한민국 이야기」 中
그 대표적인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1912년에 공포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이란 법을 들 수 있습니다. 그때 시행된 일본의 민법은 지금 대한민국의 민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법을 대조하면 조항의 내용과 순서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근대 민법의 핵심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에 대해 법학자들은 ‘사적 자유의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국가나 다른 사람에게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그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다는 뜻이지요. 그렇다고 일제가 조선에다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도입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본 자신이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이전의 단계였지요. 그들이 만든 근대국가는 가족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정치원리에 기초한 천황제 국가였습니다.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실천하는 것은 미국에 의해 천황제 국가가 해체된 1945년 이후부터이지요. 그렇지만, 일제는 천황제라는 정치체제하에서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의 원리로서 근대적인 민법을 서유럽에서 도입하여 자기류로 정착시켰습니다. 그 서유럽 기원의 민법이 1912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에 이식된 것입니다.
(중략)
흔히 사람들은 일제가 토지와 식량을 수탈했다는 교과서의 서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그렇다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자는 말이냐”라고 불쾌해합니다. 저는 제국주의 비판의 논리가 그렇게 단순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는 수탈 여부로 비판할 것이 아니지요. 수탈 여부와 무관하게 제국주의는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름 아니라 인간 본성에 반하는 체제가 제국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다른 누구보다 명확히 한 사람이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분이신 한용운 선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본인 검찰의 심문에 대응하여 한용운 선생이 작성한 ‘조선독립의 글’이란 문장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자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변하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
그렇지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시체와 다를 바 없지요. 인간생명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한용운 선생이 일제의 조선 지배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자유의 논리에서였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한용운 선생의 글을 읽고 일본인 검찰은 마음으로 승복하고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입니다. 그에 비출 때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각종 세금은 거두어 가면서 정치적 권리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 일제의 지배체제였습니다. 그런 모순은 어차피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모순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책은 조선인을 모조리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입니다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제2장에서 썼습니다만, 차별을 받는 가운데 조선인들은 그들이 하나의 운명공동체인 민족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민족의식은 역설적으로 일제의 동화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일수록 더욱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동화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의 방책은 조선인이게도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제는 1942년 조선의 청년들을 일본군대로 동원할 계획에서 1946년부터 조선인의 참정권을 인정할 방침을 세웁니다. 일제가 일찍 패망하는 통에 이 방침은 공수표가 되었습니다만, 실제 실현되었더라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지는 짐작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조만간 해체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다고 보지요.
그런데 일본인 검찰을 감복시킨 한용운 선생의 자유정신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저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다”는 선생의 외침에서 문득 미국 독립혁명의 사상가인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연설을 떠올렸습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바다를 건너 온 정신이었습니다. 전통 성리학의 정신세계에서 그런 인간 자유론이 생겨날 여지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이 점에 특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용운이란 당대의 지식인은 더 이상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신세계는 인류 보편의 자유 가치를 찾아 동서양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국주의 비판이 일본인 검찰에게 경의로 받아들여진 것도 그가 이미 세계인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한용운 선생의 정신세계에서 저는 제가 앞서 이야기한 ‘문명사의 대전환’의 가장 훌륭한 예를 발견합니다. 중화제국이라는 문명권의 일부로 위치했던 조선 문명이 자유를 인간의 본성으로 알고 개인을 궁극의 실체로 인정하는 서유럽 문명권으로 포섭되어 가는 그 대전환 말입니다. 제가 식민지기를 이해하고 또 일제의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시각은 바로 그러한 ‘문명사의 대전환’입니다. 그러한 시각을 가리켜 세간에서는 흔히들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 진의가 올바로 이해되지 않은 가운데 편견에 가득 찬 비판만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에 대해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39]
「대한민국 이야기」 中
이 글에서 이영훈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일제강점기 동안 근대화가 있었다.
2. 조선 수탈론은 과장되었다.
3. 그러나 수탈 여부를 떠나 제국주의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며 식민지 체제도 모순으로 가득찬 불합리한 존재였다.
그러나 3번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매우 약하게 주장하고 1, 2번 주장이 갈수록 강조되는 게 뉴라이트의 현실이다.2. 조선 수탈론은 과장되었다.
3. 그러나 수탈 여부를 떠나 제국주의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며 식민지 체제도 모순으로 가득찬 불합리한 존재였다.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에 일본 토요타재단의 지원이 있어서 태생적 논란이 존재한다. # 다만 토요타재단은 아름다운재단처럼 진보 성향으로 인식되는 단체에도 후원했던 적이 있어서 토요타 재단의 지원만 갖고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한다고 보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내용적으로 보면 기존 학계의 일본의 식민지 수탈 연구가 과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40] 지적을 하는 영역을 넘어 아예 일제가 수탈이 아니라 전근대 조선에게 혜택을 베푼 것이고 이 덕분에 현대 한국의 경제 성장에도 기여했다고 사실 관계를 왜곡하여 논란이 된다. 예를 들어 기존 경제사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 수탈 관련 연구가 어느 정도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한 일부 학자들도 그럼에도 그것은 조선 인민들에겐 고통이었고[41] 일제강점기에 세운 기반도 6.25 전쟁으로 인해 온전히 이어지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게 주된 입장이었다.[42] 그러나 뉴라이트는 일제의 수탈이 과장되어 있음을 주장하다 못해 아예 일뽕으로 수렴해버렸다. 따라서 주류학계가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론에서 벗어나 문제점은 축소하고 성과는 강조하는 식의 소모적인 밸런스 게임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피장파장 논리, 독립운동가와 조선에 대한 비난과 친일에 대한 재평가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적 동조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이라고 사실처럼 호도한다.
이는 주류 학계에서 보기에는 기존에 일제강점기에 관련한 어떤 주장을 하든지 학자가 보든지 간에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인데 일단 뉴라이트의 주장 중 "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한반도가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음은 사실이 아니며,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당시의 총력전에 동원되는 수준은 차이가 없었다"는 주장만 해도 그렇다. 이것이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이는 당시의 일제가 스스로의 영토 전역을 쥐어짜지 않고서는 전쟁을 수행할 국력이 없었다는 의미로, 오히려 일뽕에 반하는 근거일 뿐이다. 해외의 사례만 들어봐도 뉴라이트의 입장은 굉장히 기이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가령 오스트리아만 해도 40년대 초반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를 "국가합병이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에 합병된 것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감사하자는 오스트리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뉴라이트는 고종을 비롯한 이씨 왕족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었다며 비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의 식근론을 반영한다면 조선은 자체적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파탄국가였으며 일본에게 식민통치를 받아야만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으므로 고종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비판할 상황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고종은 여러 독립운동과 망명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을사조약과 병합에 끝까지 반대하였다. 왕족중 나라를 판 사람이라고 하면 직계중에는 없고 방계에서는 이준용 정도인데 이준용은 을미사변 당시 고종이 반역자로 지목해서 쫒겨났고 이토 히로부미가 이준용의 귀국을 요청해도 고종이 거절하였으며 일제가 고종을 강제퇴위시킨 이후에 겨우 밀입국 형식으로 들어왔을 정도라서 고종과 연관이 없다.
또한 반공 우익이라는 타이틀에 모순되게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의 근대적 인프라가 많이 깔려 있던[43] 북한의 1950-70년대 경제 발전에 대해 과하게 집착한다.[44] 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의 경제는 망하고 세계 최빈국으로 몰락했음에도. 이는 이들이 처음 정치 활동을 할 때만 해도 북한의 정치에 먼저 심취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마치 김일성과 김정일은 따로 놓고 보던 황장엽처럼.
4.1.4. 왜곡/선택적 안티내셔널리즘 = 일뽕
각국의 뉴라이트는 미국 정도를 제외하면 다수는 강경한 민족주의 성향이거나 아니더라도 친민족주의에 가깝지만 한국의 뉴라이트 관련자들은 그들만의 공통적인 성향이 있는데 일종의 안티내셔널리즘 성향이다.[45] 이는 다인종/다민족이 섞여 사는 미국 특성상 강한 민족주의 자체를 좋게 보진 않는 미국식 세계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그런 이유로 뉴라이트를 찬양하는 한국인들이 본인들이 민족주의를 혐오한다고 주장하는데 아이러니한 건 한국에서 반일 민족주의가 가장 강하게 나타났고 교과서에 일본이 가장 악랄하게 서술되었던 시절이 이승만 정부와 군사독재 정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뉴라이트 관련자들은 이들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찬양하는데 이는 그들의 민족주의 혐오와 모순되는 일이다. 따라서 그들이 정말 민족주의를 혐오한다면 이승만과 박정희를 누구보다 더 앞장서서 맹렬하게 비판해야 한다. 즉, 스스로 모순된 논리에 빠진 것도 모르거나 애써 무시하는 셈이다. 공과를 분리해 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택도 아닌 것조차 사실 관계까지 왜곡해 가면서 무슨 종교마냥 기승전 찬양해대니 큰 문제다. 실제로 브라이언 마이어스 같이 진지하게 혈통적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학자들은 이승만, 박정희를 민주당계나 NL계 좌파민족주의자들보다 더 까면 깠지 옹호하지는 않는다.[46]
또한 그토록 민족주의를 혐오하면서도 정작 일본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47]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유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 # 다시 말하자면 일본의 민족주의에 호응하고 인권을 탄압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옹호하면서 한국의 민족주의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는 혐오한다. 애초에 이승만은 그 행적에 대해선 비판받기도 하지만[48] 대승적으론 독립운동가 출신이었으며 그들 중에서도 사상적으론 지독한 혐일 성향이었다.[49]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믿음 때문에 반민특위를 해산시키고 악질 친일파들을 총애한 것으로 까이긴 하지만 이후 교육 과정에 많은 반일 요소를 넣었으며 '일제강점기가 그립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소위 '빨갱이' 이상의 정치범으로 간주했을 정도였으며 "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명백히 우수하다", " 일본인은 짐승과도 같다"는 민족 차별적 발언까지 남겼던 한마디로 뉴라이트가 빨갱이 취급하며 가장 혐오할 만한 사상의 소유자였다. 심지어는 집권 중 공개적으로 일본은 공산당보다 무서우니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남겼다.[50] 그런데도 뉴라이트들은 이승만의 독립운동만큼은 예외적으로 호평하는 것을 넘어 진정한 독립운동은 이승만의 외교 독립운동 하나밖에 없고 전적으로 이승만의 외교 독립운동 덕분에 한반도가 독립한 것처럼 주장하며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죄다 폄하해대니 코미디도 저런 코미디가 없고 내로남불도 저런 내로남불이 없다.[51][52] 즉, 이승만의 기준대로라면 뉴라이트야말로 가장 먼저 척결되어야 할 대상이다.[53]
이들이 보여주는 이중적인 면모 중 대표적인 건 일뽕스러운 면모와 소위 "건국 대통령" 운운하면서 우상화의 지경에 이른 이승만 찬양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승만은 본인이 친일파들을[54] 기용하는 등의 큰 과오가 있으나 이는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이 현실적 위협인 북한을 상대하기 위해 택한 고육지책에 가깝다. 이승만 본인의 성향은 반일, 그것도 극반일이었고 때문에 독도 점유도 이승만 때 일어났으며 한일수교가 이루어진 것도 이승만이 하야한 지 5년 뒤의 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여 대한민국을 지원하겠다고 하자 노발대발하며 일본의 의도가 뭐든간에 일본군이 한반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 북한이 아닌 일본에게 총구를 겨누겠다고까지 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한국이 북한과 전쟁 중인 틈을 타 일본은 독도를 무단 점령하려고도 했지만 독도수비대에 의해 꺾였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반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정책인 평화선( 이승만 라인)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해군을 동원해 독도 영해를 넘어온 일본인 어부 4천 명을 강제로 체포해 잡아가두고 그 과정에서 40명의 일본인 어부들이 사망했다. 뉴라이트가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정말로 반대한다면 먼저 이승만의 독도 평화선 선포와 그 과정에서 어부들의 강제 감금, 미국이 직접 요구한 일본과의 외교 관계 수립 거부[55] 등을 혹독하고도 가열차게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뉴라이트는 이슈화를 거부하며 굳게 침묵하고 있다. 심지어 뉴라이트를 추종하는 한국의 일부 넷 우익들은 이승만 라인의 선포와 그에 따른 일본인 어부들의 사망에 대해서 이승만 본인이 아니라 엉뚱하게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에 책임을 돌리는데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이승만 본인이 한국 정부의 대표고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는데 그가 해군에 절대로 일본인 어부들을 체포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면 저런 일이 벌어졌을 일이 없다.
즉, 뉴라이트가 멋대로 성역화해 망상하는 것과는 달리 이승만 본인은 철저한 반일 민족주의자였고 그런 신념을 집권 후에 전혀 꺾지 않았다. 만약 이승만 본인이 살아서 뉴라이트의 탈민족주의 담론을 듣는다면 크게 화를 내며 반발할 것이다. 이승만 본인은 하나의 나라에 하나의 민족만 있어야 한다는 일국 일민주의를 부르짖었고 실제로 그 때문에 혼혈아들을 모두 해외로 강제 입양을 보냈다.(...) 당연하지만 이것도 엄연한 인권유린이다.
그런데 뉴라이트가 이 부분에 대해 심도 있게 비판한 적이 있는가? 민족주의가 나쁘고 그래서 탈민족주의를 외친다는 뉴라이트는 왜 이승만의 민족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가? 비유하자면 "나치즘은 나쁘지만 히틀러는 위대한 영웅이다."라는 주장처럼 민족주의는 나쁘다면서 정작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위대한 영웅이라고 찬양하는 뉴라이트의 태도는 터무니없는 모순일 뿐이다.
일부 뉴라이트 관련 잡지들은 이승만이 무슨 탈민족주의자였던 것처럼 선전하지만 이는 독도를 지키기 위해 평화선을 선포하고 해군을 동원해 4천 명의 일본인 어부들을 체포하고 그 와중에 44명의 일본인 어부들을 죽게 만들었고 더 나아가서는 일본에 대한 테러를 계획할 만큼 강경한 반일 민족주의자였던 이승만을 터무니없이 왜곡하는 짓이며 이승만이 강경 반일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은 뉴라이트의 아킬레스건 중 하나다.
이승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오명을 살 때는 이승만이 친일이라는 건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며 이승만의 자필까지 들먹이며 이승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56] 그야말로 뉴라이트의 적은 뉴라이트가 따로 없다. 이는 그들이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아전인수격으로 하려다 보니 생긴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박정희 본인이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친일파인 것은 사실이며, 대통령이 된 후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 정책을 펴기도 했으나, 동시에 박정희 본인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가진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회고들을 보면, 박정희가 프랑스의 식민지인 코르시카 출신이면서도, 프랑스의 황제가 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대한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증언들이 많은데, 이를 통하여 박정희가 식민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57] 친일 성향이면서도 동시에 민족주의자였던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 을 저술하여,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와, 일제강점기의 식민 잔재들을 없애고 민족을 해방할 것과 민족의식의 각성을 주장하였다. 서구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추종을 하는 사대주의적 태도를 비판하고[58], 한국은 한국의 사정에 맞는 우리식의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민족의 저력>, <민족중흥의 길> 등을 저술하였으며, 휘호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등을 남겼다. 그는 일본 문화를 배척하였으며, 한글 전용 정책을 펴고 독립운동과 이순신 장군 등을 찬양하는 보훈 활동을 하고 미국 및 서구권과의 갈등시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에서의 조선군들을 기리는 등, 뉴라이트 기준대로라면 반일, 반미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정희는 육사 졸업 후 춘천의 제8연대에 첫 배속을 받았다. 나는 한국에 부임한 후 첫 몇 개월을 8연대의 창설 연대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잘못했으면 만났을 것"이라며 애기의 끈을 맺을 수 있었다.
내가 경비대사령부본부로 전근되자 元容德이 8연대 연대장으로 교체돼 갔었는데 원용덕으로부터 朴의 애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내가 박정희를 처음 만나기 전의 일인지, 그를 만난 후에 元으로부터 그 인품을 소개받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元은 朴에게 매우 강한 외국인 혐오증이 있다고 애기해 줬다.
그는 8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해 연대의 미군 고문관과 한바탕 언쟁을 한 바 있었으며, 元연대장이 장교들에게 훈시하는 가운데 "한국군 장교들은 영어를 좀 배워야 한다"고 말하자 朴소대장이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면서 발뒤꿈치를 잔뜩 세우고는 "이것이 미국 군대입니까, 한국 군대입니까"라고 치받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내 머리에 남아 있는 인상깊은 말이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31~32p
내가 경비대사령부본부로 전근되자 元容德이 8연대 연대장으로 교체돼 갔었는데 원용덕으로부터 朴의 애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내가 박정희를 처음 만나기 전의 일인지, 그를 만난 후에 元으로부터 그 인품을 소개받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元은 朴에게 매우 강한 외국인 혐오증이 있다고 애기해 줬다.
그는 8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해 연대의 미군 고문관과 한바탕 언쟁을 한 바 있었으며, 元연대장이 장교들에게 훈시하는 가운데 "한국군 장교들은 영어를 좀 배워야 한다"고 말하자 朴소대장이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면서 발뒤꿈치를 잔뜩 세우고는 "이것이 미국 군대입니까, 한국 군대입니까"라고 치받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내 머리에 남아 있는 인상깊은 말이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31~32p
한일수교가 1965년에 이뤄지기 이전인, 1963년에 박정희 본인이 저술한 책의 내용이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 재개는 해방 이후 10여 년간 묵혀 놓았던 숙제였다.[59] 그러나 이제 한·일 국교정상화는 피차의 이익이나 태평양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급박한 추이 등으로 더 이상 끌 수 없는 해결을 지어야 할 단계에 서 있다. 그렇다고 안팎의 조건을 이유로 무작정 일본의 과거 소행을 묵과하고 가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설사 우리가 재산 상 주장하는 모든 것이 관철된다고 하더라도 수십 년간 입어 온 정신적인 타격이 하루아침에 가실 리는 없는 것 아닌가.
본인이 여기서 명확히 하고 싶은 것은, 일본이 완전한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진심으로 회개하고 당면한 내외 정세와 관련하여 한국에 협조한다면 불유쾌한 과거의 상처는 재론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은 해방 이후 단 한 마디도 과거의 죄악에 대해 사과한 바가 없다. 더구나 우리가 청구하는 최소한의 조건마저 회피하는 것을 보면 문제 해결에 대한 성의가 손톱만큼이라도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평화선, 어로협정 등이 그렇고 재산청구권과 관련하여 특히 그렇다. 재산청구권이란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의한, 해방과 동시에 우리에게 귀속되어야 할,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앗아간 우리의 재산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즉,
1. 일제 하에 강제징병, 또는 징용이란 명목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희생된 한국 국민에 대한 보상
2.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일본 정부 발행의 국채, 저금의 상환
3. 일본인이 한국 은행에서 반출하여 간 금괴와, 해방 당시 소각한 한국 은행 소유 일본은행권과, 일본에 있는 한국 은행 재산의 반환
4.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일본 법인체의 주식, 기타 유가증권의 상환
5. 한국인 선박의 반환
6. 수천 점의 문화재, 국보의 반환
등이 그 중요한 내용이다.
우선 금괴와 선박에 대하여 살펴보자. 해방 직전 그들은 당시 평가 가격 15억 원 상당의 금괴를 비밀리에 옮겨 갔다. 그때 15억 원은 해방 직후의 7대 1 환율로 보면 2억 달러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선박은 해방 당시 한국 연안에 있었던 것이 그 청구 대상으로 우리의 청구 톤수는 16만 톤이다. 이 두 가지만 보더라도 우리의 경제사정에 얼마나 유익한 청구권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청구하는 내역은 단지 우리의 재산을 돌려달라는 것일 뿐, 36년간 강제점령에서 빼앗긴 것을 되돌려 달라는 요구는 한 푼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베트남 정부에 대해서는 7천만 달러의 점령배상금을 지불하면서도 우리의 정당한 재산 청구에는 끝내 무성의로 일관하니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일본의 심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간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 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말한 대로 그들의 성의는 언제나 입 언저리에서 맴돌았을 뿐이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제6장 우리와 美, 日 관계, 韓.日 간의 관계
본인이 여기서 명확히 하고 싶은 것은, 일본이 완전한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진심으로 회개하고 당면한 내외 정세와 관련하여 한국에 협조한다면 불유쾌한 과거의 상처는 재론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은 해방 이후 단 한 마디도 과거의 죄악에 대해 사과한 바가 없다. 더구나 우리가 청구하는 최소한의 조건마저 회피하는 것을 보면 문제 해결에 대한 성의가 손톱만큼이라도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평화선, 어로협정 등이 그렇고 재산청구권과 관련하여 특히 그렇다. 재산청구권이란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의한, 해방과 동시에 우리에게 귀속되어야 할,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앗아간 우리의 재산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즉,
1. 일제 하에 강제징병, 또는 징용이란 명목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희생된 한국 국민에 대한 보상
2.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일본 정부 발행의 국채, 저금의 상환
3. 일본인이 한국 은행에서 반출하여 간 금괴와, 해방 당시 소각한 한국 은행 소유 일본은행권과, 일본에 있는 한국 은행 재산의 반환
4.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일본 법인체의 주식, 기타 유가증권의 상환
5. 한국인 선박의 반환
6. 수천 점의 문화재, 국보의 반환
등이 그 중요한 내용이다.
우선 금괴와 선박에 대하여 살펴보자. 해방 직전 그들은 당시 평가 가격 15억 원 상당의 금괴를 비밀리에 옮겨 갔다. 그때 15억 원은 해방 직후의 7대 1 환율로 보면 2억 달러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선박은 해방 당시 한국 연안에 있었던 것이 그 청구 대상으로 우리의 청구 톤수는 16만 톤이다. 이 두 가지만 보더라도 우리의 경제사정에 얼마나 유익한 청구권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청구하는 내역은 단지 우리의 재산을 돌려달라는 것일 뿐, 36년간 강제점령에서 빼앗긴 것을 되돌려 달라는 요구는 한 푼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베트남 정부에 대해서는 7천만 달러의 점령배상금을 지불하면서도 우리의 정당한 재산 청구에는 끝내 무성의로 일관하니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일본의 심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간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 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말한 대로 그들의 성의는 언제나 입 언저리에서 맴돌았을 뿐이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제6장 우리와 美, 日 관계, 韓.日 간의 관계
본인은 이 기회를 빌려 미국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한·미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한번은 논의하여야 할 성질의 것으로, 혼자서 가슴에만 품고 있을 이유가 없다. 설사 미국이 불편하게 여기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알려야 하고, 미국이 알아야 할 문제라면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우리는 미국을 좋아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제도가 그렇고, 우리를 해방시켜 준 것이 그렇고, 공산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방위해 준 것도 그렇고, 경제원조를 해 주어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그와 같은 은혜를 베풀었으면서도 우리를 부려 먹거나 뭔가를 강요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부당한 간섭이나 기미가 엿보였다면 우리의 태도는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이런 점에서 한국인의 신경은 참으로 예민하다. 우리는 몹시 까다롭고 고개 숙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은 그같이 우리에게 은혜로운 상대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하여 싸워 주고 도와주는 것은 백 번 고맙지만, 이러한 결과, 즉 미국이 원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궁극적인 이유는 국토의 분단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단독행위가 아닌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그 일단의 책임이 그 사람들에게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분단은 독일이나 베트남의 경우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 패전국 독일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고, 베트남의 경우는 내란의 산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는 일본에 시달렸고 또한 임시정부가 연합국 편에 서서 싸웠던 엄연한 교전국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분단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우리는 6·25전쟁을 잊을 수 없다. 이것 역시 분단의 씨가 뿌려진 끝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단순히 한국의 방위만을 목적으로 치러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평화와 태평양 지구 방위정책에 직결되는 문제였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만약 6·25전쟁에서 우리가 패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랬더라면 공산권의 망동은 어김없이 전 아시아 그리고 전 세계에 전쟁의 불씨를 던졌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위태로워졌을 것은 물론이요, 소련의 잠수함은 오키나와 기지를 위협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서부 방위선은 사실상 샌프란시스코 연안으로 후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한·미 양국 간의 관계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런 사실을 기본으로 본인은 다시 몇 가지 소신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미국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한국의 실정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번을 양보해서 한 민족, 한 국가가 현대 자본주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 사회에 고유한 전통과 문화가 있고 자주국가인 이상 무조건 동화될 수는 없다. 하물며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 전반이 균형 잡히지 못한 우리 현실에서 그 제도의 실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연륜을 무시하고 아이가 하루아침에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어버이와 같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오히려 부작용만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둘째, 경제원조의 의욕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일률적인 미국화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이상과 미국의 경제적인 원조를 밑거름으로 한국 고유의 주체성, 확고한 자아의식이 확립되고 그 위에 자율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참된 희망이 성취되는 것이요, 또한 대한민국이 외적과 대결할 수 있는 견고한 방파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왕에 줄 바에는 우리의 뜻에 맞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경제시책에 대한 실력을 못 미더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당장 먹고 입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장차 살아 나갈 기틀을 잡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애기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제6장 우리와 美, 日 관계, 韓.美 간의 관계
우리는 미국을 좋아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제도가 그렇고, 우리를 해방시켜 준 것이 그렇고, 공산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방위해 준 것도 그렇고, 경제원조를 해 주어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그와 같은 은혜를 베풀었으면서도 우리를 부려 먹거나 뭔가를 강요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부당한 간섭이나 기미가 엿보였다면 우리의 태도는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이런 점에서 한국인의 신경은 참으로 예민하다. 우리는 몹시 까다롭고 고개 숙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은 그같이 우리에게 은혜로운 상대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하여 싸워 주고 도와주는 것은 백 번 고맙지만, 이러한 결과, 즉 미국이 원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궁극적인 이유는 국토의 분단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단독행위가 아닌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그 일단의 책임이 그 사람들에게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분단은 독일이나 베트남의 경우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 패전국 독일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고, 베트남의 경우는 내란의 산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는 일본에 시달렸고 또한 임시정부가 연합국 편에 서서 싸웠던 엄연한 교전국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분단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우리는 6·25전쟁을 잊을 수 없다. 이것 역시 분단의 씨가 뿌려진 끝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단순히 한국의 방위만을 목적으로 치러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평화와 태평양 지구 방위정책에 직결되는 문제였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만약 6·25전쟁에서 우리가 패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랬더라면 공산권의 망동은 어김없이 전 아시아 그리고 전 세계에 전쟁의 불씨를 던졌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위태로워졌을 것은 물론이요, 소련의 잠수함은 오키나와 기지를 위협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서부 방위선은 사실상 샌프란시스코 연안으로 후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한·미 양국 간의 관계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런 사실을 기본으로 본인은 다시 몇 가지 소신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미국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한국의 실정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번을 양보해서 한 민족, 한 국가가 현대 자본주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 사회에 고유한 전통과 문화가 있고 자주국가인 이상 무조건 동화될 수는 없다. 하물며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 전반이 균형 잡히지 못한 우리 현실에서 그 제도의 실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연륜을 무시하고 아이가 하루아침에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어버이와 같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오히려 부작용만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둘째, 경제원조의 의욕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일률적인 미국화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이상과 미국의 경제적인 원조를 밑거름으로 한국 고유의 주체성, 확고한 자아의식이 확립되고 그 위에 자율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참된 희망이 성취되는 것이요, 또한 대한민국이 외적과 대결할 수 있는 견고한 방파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왕에 줄 바에는 우리의 뜻에 맞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경제시책에 대한 실력을 못 미더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당장 먹고 입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장차 살아 나갈 기틀을 잡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애기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제6장 우리와 美, 日 관계, 韓.美 간의 관계
문화 · 사회 분야
봉건적 전근대성과 맹목적인 사대관념을 철저히 배격하고 외래사조의 장점만을 수용하여 우리 민족의 고유성, 전통, 주체의식을 토대로 새로운 문화관을 확립한다. 이렇게 새로운 사회풍토를 만들어 '우리의 것'을 견지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 우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자아 상실, 민족 혐오, 실속은 없고 겉만 화려한 허례허식, 기생주의를 일소하고 자립갱생의 기상을 드높인다. 거짓과 불신과 의심이 없고 정직과 신용과 상호부조하는 기풍을 환기하여 새로운 국민성을 조성해야 한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제8장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봉건적 전근대성과 맹목적인 사대관념을 철저히 배격하고 외래사조의 장점만을 수용하여 우리 민족의 고유성, 전통, 주체의식을 토대로 새로운 문화관을 확립한다. 이렇게 새로운 사회풍토를 만들어 '우리의 것'을 견지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 우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자아 상실, 민족 혐오, 실속은 없고 겉만 화려한 허례허식, 기생주의를 일소하고 자립갱생의 기상을 드높인다. 거짓과 불신과 의심이 없고 정직과 신용과 상호부조하는 기풍을 환기하여 새로운 국민성을 조성해야 한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제8장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반면에 뉴라이트가 그렇게 싫어하는 김대중은 오히려 제1공화국에서부터 문민정부까지 이어져온 일본문화 수입금지 및 왜색 규제를 철폐하고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굳이 김대중까지 가지 않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던 신익희나 일본 정치인도 호의적으로 보았던 여운형이 있다. 게다가 위에서 이영훈이 비난한 세종대왕 또한 일본의 일부 기술들이 조선보다 뛰어나다며 교류가 잦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한국사에서 정말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비난하거나 외면하면서 관계조차 맺지 않고 누구보다 적대적이었던 사람은 찬양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친일조차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웃긴 점은 일본의 민족주의는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뉴라이트의 거두인 이영훈은 본인의 저서인 반일 종족주의에서 "서유럽에서 생겨난 민족은 왕과 귀족의 횡포에 저항하는 자유시민의 공동체였습니다", "그와 달리 한국의 민족은 일반 민서(民庶, 민중)와 분리된, 그 위에 군림하는 독재주의나 전체주의입니다"[60]라고 주장하면서 서양의 민족주의는 우월하고 한국의 민족주의는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서양에서도 무산자나 여성은 부유한 백인 남성보다 투표권을 훨씬 늦은 시점인 1900년대 초반이나 중엽에서야 얻는 식으로 차별을 당했으며 무엇보다 서양의 민족주의가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와 나치즘으로 이어지면서 두 번에 걸쳐 수천 만 명의 사람들을 죽게 한 세계대전을 일으킨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그렇기 때문에 뉴라이트의 한국 민족주의 비판은 제대로 된 탈민족주의 성향이 아니라 차라리 막연한 혐한 정서에 더 가깝다. 애당초 민족주의를 반대한다면 서양과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를 둘 다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민족주의의 우열성을 가리고 있으니 모순되었다. 사실 이건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본인들도 논리적 정밀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막연한 혐한과 국까로만 승부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뉴라이트 자체가 이미 2010년대를 지나며 세력이 약화되어 단체적으로는 무의미해진 측면이 있으나 2020년대 들어 뉴라이트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네티즌들 중에선 다수가 반일 민족주의에 대해선 비판하면서 정작 중국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는 더 조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61] 중국이 독재 등 제도적으로 비판받을 점은 분명 있으나 제도를 떠나 중국인 전반을 비하하는 비속어도 남발하는거 보면 과연 이들이 진짜 반민족주의 비슷한 부류라고 할 수 있느냐부터가 의문이 든다. 게다가 자기들 맘에 안들면 죄다 친중 드립을 치면서 정작 노태우, 박근혜처럼 친중 정책을 취한 보수 정치인들은 전혀 지적하지 않는 인지부조화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오성홍기에 절하던 시절은 다 까먹은 모양이다.
뉴라이트는 한일 간 우호관계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덮어씌우기에 한일이 서로 협력해서 이익을 보는 것을 원하는 진짜 친일의 입장에서는 뉴라이트처럼 막무가내로 혐한 국까 성향을 보이는 세력과 동급으로 취급되지 않으려고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뉴라이트식 일뽕은 한일관계에 도움되기는커녕 오히려 한국에서 일본의 이미지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일본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반일 감정을 양산한다. 사실 진짜 친일의 입장에서도 뉴라이트를 좋게 평가하기 어렵다. 진짜 친일을 하려면 한일 양국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상호 존중하면서 모두의 이익이 되는 협력적 관계를 추진하려 하지, 한국을 무작정 비하하면서 일본을 찬양하는 것은 혹시 한일관계를 이간질하려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역효과만 내기 때문이다.
4.2. 대북관
북한 자유화와 대북제재 강화로 북한 정권의 붕괴( 북한 붕괴론)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에 입각한 흡수통일을 지향한다.[62] 특히 올드라이트와 달리[63] 북한 인권 문제를 강하게 제기해 왔는데, 북한 자유화를 통한 체제 붕괴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진보 진영을 향해서는 "민주주의를 추구한 진보 세력이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대해서 눈을 감는 건 모순"[64]이라는 식의 공격을 해왔다. 뉴라이트 인사 중 일부는 북한 주체사상과 일본 천황제와의 연관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다만 오늘날 주류 뉴라이트들을 생각하면, 북한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면서 같은 전체주의 기반 국가였던 일제를 옹호하는 모순된 가치관을 표출하고 있는게 참 아이러니하다.4.3. 뉴라이트 경제관
4.3.1. 왜곡된 선택적 경제적 자유주의
뉴라이트는 오스트리아 학파를 지지하며 국가가 시장의 경제활동을 정치논리나 공기관하에 예속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전술한 조선 폄하와 어울려 조선은 상업을 천시했으니 좌파국가였다는 억지를 쓰기도 하며[65] 동시에 경쟁을 상당히 예찬하고 강조한다. 물론 경쟁 자체는 사회에 필수적이지만 이들은 한국 사회를 과열 경쟁까지 몰고 가려고 해서 문제가 된다.[66] 근데 이 요소는 결국 소위 "건국 대통령", "정통성" 운운하며 정부의 절대 권위를 주장하는 것과 모순이 생긴다. 게다가 자유주의적인 정책과 거리가 한참 먼 박정희, 전두환 등이 수출주도 성장 정책을 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사실 일부 뉴라이트 인사들은 과열 경쟁이 결과적으로는 실보다 득이 많기 때문에 이를 지지하는 것보단 "한국인 따위는 평생 경쟁하면서 팍팍하게 살아야 된다"는 황당한 사디즘으로 보일 때가 많다. 착취든 경쟁이든 아무튼 통계적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다 식이다 보니 식민지 시대의 착취를 수출로 미화하거나 독재정부의 탄압을 축소하려든다. 이는 단순히 탈민족주의나 자국 비판을 넘어서 자국민을 폄하하는 뉴라이트 특유의 황당한 사고방식이 제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면이라 할수 있다.
조선의 사농공상 제도를 비판하면서 현재의 경제에 대한 가치관에 조선과 유교를 들이대며 비난하기도 한다.[70] 동시에 조선처럼 망하지 않으려면 현대의 상인인 기업인들에게 이권을 줘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많이 하는데 이것도 조선과 한국의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71]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상인들은 고종 황제와 결탁해 이승만 등의 독립협회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란 말이 있어 보이는지 경제적으론 신자유주의를 떠들지만 정작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은 신자유주의와는 방향성 자체가 달랐으며 이승만도 마찬가지다. 그의 대표적인 경제정책인 농지개혁법은 오히려 소작농 등을 자작농으로 만들고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정책이었다.[72] 박정희 역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등[73]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 정책을 지향했으며 현실적으론 국민의 정부 들어서야 완성되지만 의료보험 등의 복지 정책도 관심이 있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은 아무리 대기업 회장이라도 정부에서 까라면 까야 했으며 말 안 듣고 반항할 시 온갖 압박과 규제가 들어오는 냉혹한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비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적인 측면만 따지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의 정책이 훨씬 맞는 부분이 많았다. 이러한 정책들은 찬양하지 않는 게 아이러니하다. 사실 뉴라이트가 신자유주의를 추종한다는 것도 옛말로 현재는 '이승만이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었다'며 틈만 나면 시장경제를 운운하고 다닌다.
사실 뉴라이트는 미국식 세계화(신자유주의, 탈민족주의)를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집단에 불과하며 미국식 세계화나 한국사를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다.[74] 그 증거로 뉴라이트는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혐오하면서 정작 그 반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정책( 평화선)을 펼쳤던 강경한 반일 민족주의자인 이승만을 찬양하고 자유무역을 찬양하면서 정작 집권 내내 외제품을 금지하고 국산품 애용 등 보호무역 정책을 펼친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한다. 그래서 뉴라이트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뉴라이트들이야말로 한국사를 멋대로 왜곡한 엉터리 동인지를 쓴다고 조롱하기도 한다. 이는 뉴라이트가 미국식 세계화는 절대선이라고 믿고 그 미국식 세계화를 일제, 이승만과 박정희가 실시했고 그를 위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적대했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 아래 잘못된 잣대로 한국 현대사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IMF등 외국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한국 재벌의 비정상적인 경영구조에 대해서도 별 비판이 없으며, 왜곡된 경제적 자유주의 이외에 다른 자유주의[75]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5. 근황
5.1. 교학사 한국사 교과용도서 뉴라이트 논란
2012년에 뉴라이트 계열 조직들이 다수 활동 정지 상태가 되거나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버리는 등 와해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보수 진영과 동화하는 모습도 보여준다.2012년 6월 13일 정형근 뉴라이트전국연합 의장이 한나라당 의원 시절인 2008년 1월 유동천 제일저축은행장에게 돈이 든 쇼핑백을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검찰이 돈다발을 들고 나오는 정 의장의 모습이 찍힌 CCTV를 증거로 제시한 후 더 이상 부정해도 소용없음을 알고 인정한 것이다. 뒤이어 6월 21일에는 뉴라이트 단체 대표인 김범수가 미소금융 자금을 빼돌렸다는 이유로 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차례대로 뉴라이트 간부들의 부정부패가 드러났고 겨우 몇 해 전만 해도 뉴라이트 소속이라는 걸 자랑하던 이들이 의원 공천에서도 탈락하면서 스스로를 뉴라이트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렇게 부르는 것을 화내면서 부정하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시대정신으로 이름을 바꾸고 뉴라이트는 실패했다며 부정하게 됐다.
그래서 2013년 이명박 정부가 막을 내리면서 뉴라이트의 정치/사회적 존재감이 소멸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으나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득세하기 시작하였고 뒤이어 중고교생 근현대사 교과서에 뉴라이트 사관을 지지하는 한국현대사학회에서 집필한 교과서를 등장시켜 다시금 논쟁의 한가운데에 등장했다. 교학사에서 출판한 해당 교과서는 9월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까지 최종 통과했고 이로써 뉴라이트에서 만든 교과서가 중고교에서 쓰이는 것이 현실화될 뻔했다.
기사를 통해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역사 4단체 뉴라이트 교과서(교학사 한국사) 검토 공동 설명회/2013. 9. 10./1분 30초부터 시작/역사학자 목소리는 2분 40초 부터 나옴. |
다른 교과서들이 계엄군이 시민을 폭행하는 사진이나 숨진 아빠의 영정사진을 안은 아이 사진 등을 실은 것과는 달리 이 교과서에는 관련 사진이 등장하지 않는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과 이들이 1995년 내란죄 등으로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실도 이 교과서에서는 누락되는 등 역시나 우려하던 일이 예상대로 발생했다. 을미사변을 일제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는 식의 내용이 나오는 데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달성한 게 참여정부(정확하게는 최초 통계로는 2007년, GDP 통계 개정 후 2006년)가 아닌 이명박 정부 시절에 이루어지고 감사원으로부터 총체적인 부실로 평가된 한식 세계화를 성공적인 세계화의 대표적인 예로 서술되는 등 현대사 관련에서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안한 부분도 드러났다. 놀라운 건 이것도 원 내용이라고 볼 수 있는 대안 교과서보다 많이 순화된 편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검정 기준에는 맞췄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걸 역으로 얘기한다면 원래 대안교과서가 그만큼 막장이란 얘기다.
심지어 교과서 내에 들어간 자료사진 상당수가 디시인사이드를 포함한 인터넷에서 긁어온 데다 출처마저 불확실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기사 40년 전에 폐기된 학설을 기재하고 부여가 한반도에 있었으며 안시성주를 양만춘이라고 명시하는 등 고대사 부분도 오류투성이로 밝혀졌다.[76] 기사 그 덕분인지 채택률이 1%를 조금 넘는 수준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9월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10월에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등 역사연구에 관련된 기관에 뉴라이트계 학자가 임명되었다. 참고로 이명박 정부 말기였던 2012년 9월에는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직에 이미 뉴라이트 계열 인사가 임명된 데 이어 2014년 2월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에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를 천명했던 박상증 목사[77]가 임명되기도 했다. 6월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에는 위에서 언급된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임명되고 2014년 8월에는 KBS 이사장에 이인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내정되는 등 박근혜 정부에서 많은 요직에 뉴라이트 계열학자가 포진되어 논란이 일었다. 2015년 9월에는 문제의 조우석을 KBS 이사로, 고대영 KBS비즈니스 사장을 본사 사장으로 임명했다.
전국에서 단독으로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부산 부성고등학교의 이사인 박근령은 일본 포털사이트 니코니코 동화와의 특별대담에서 "일본에 위안부 문제 사과를 계속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던가, "사과를 요구하고 비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것은 패륜이다", "신사참배를 비판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을 타박하는 뉴스만 나가서 죄송하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협정 때 다 끝난 이야기다", "한국에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같은 발언을 했고 천황폐하라고 극존칭을 썼다.
2014년까지만 해도 위와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노조들은 저항할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특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박상증 목사 선임을 반대한 신형식 기획조정실장 등 부서장급 6명을 좌천시키기도 했다.
5.2. 기존 우파 진영과의 유착
17대 대선때 뉴라이트 시민단체들은 ‘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전면에 나섰으며 이후 광우병 논란 등으로 이명박 정부가 코너에 몰리자 ‘이명박 지키기’에 나섰다. 쇠고기 협상의 문제점과 광우병 논란 등을 보도했던 방송사들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가 하면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서도 직접 경고에 나섰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성명을 통해 MBC ‘시사매거진 2580’ 폐지를 주장했으며 MBC의 편파 방송 의혹을 제기했다. 보수단체 소속 회원들과 함께 KBS에 대한 국민 감사 청구를 내고 연일 성명을 내면서 “KBS는 사욕에 촛불을 이용 말라”, “KBS는 겸허한 자세로 감사를 받아라”고 주장하는 등 외곽조직으로 활동했다. 뉴라이트 ‘이명박 구하기’ 나섰다. 2008.06.19.노무현, 이명박 정부 시절처럼 '뉴라이트'란 용어 자체를 공개적으로 내걸고 활동하는 이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재연하는 교과서 논쟁…진보·보수 격돌예고>
재연하는 교과서 논쟁…진보·보수 격돌예고
새누리당은 2013년 뉴라이트 교과서가 검정에서 통과되어 논란이 되자 "역사교과서 대한민국에 자학적" 이라며 뉴라이트 교과서를 옹호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
2008년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비롯하여 뉴라이트 성향의 책들을 다수 출판한 기파랑 출판사의 대표 안병훈은 박근혜 대통령의 원로 자문그룹으로 알려진 7인회 중 한 사람이며 #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 "뉴라이트 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길은 다르지 않다"고 발언했던 전례가 있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모임인 교과서포럼(공동대표 박효종, 이영훈, 차상철)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주최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기파랑)" 출판 기념회에 참석해 뉴라이트 교과서를 극찬하며 뉴라이트의 교과서 포럼 등의 교과서 수정 움직임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하여 "우리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며 "이것을 바로잡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이 책의 출판은 중요한 의미가 있고 후일 그 자체로 역사에로 기록될 것" 등의 말을 하였다. #, #
교학사 뉴라이트 교과서로 논란이 된 데다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은 새누리당 내의 근현대사역사연구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4선 의원들을 포함해 국회의원 가입자 수가 100명을 기록했다. 즉, 새누리당 의원의 3분의 2 가량이 김 의원 모임에 가담한 것이다. #, #, #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은 "역사교실에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안을 잘 모색해서 좌파와의 역사전쟁을 승리로 종식시켜야겠다" 고 발언했다. #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 저자인 이명희는 11일에 그 역사연구 모임에서 "좌파가 학계와 교육·언론·예술·출판계, 최근 연예계에까지 많이 들어가 반수 이상을 점하고 있다" 면서 "현 국면이 유지되면 10년 내 한국 사회가 구조적으로 전복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국사편찬위원인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은 25일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 주도 국회의원모임 초청강연에서 "피만 빨린 게 아니라 영생을 얻었으며 드라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라는 드라큘라에게 물려서다" 라고 발언하였으며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분개하는 것은 전체주의" 라면서 "비교사적 관점에서 공과 과를 분명히 밝히고 잘못된 것은 분명히 짚어야 하지만 자긍심을 가질 부분은 하이라이트를 줘야 한다" 고 덧붙였다. # 정정보도문이 있다. #
2012년 18대 대선을 즈음해 최홍재, 허현준 등 일부 뉴라이트 인사들이 '국가주의 보수'를 대변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고, 이듬해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선임행정관에 최홍재와 허현준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 유영익 전 연세대 교수를 각각 내정했다. # 그는 이승만 재평가의 선봉에 서서 그를 찬양하는 저서만 여러 권 낸 적이 있으며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주장을 선두에서 했고 뉴라이트 포럼 상임고문으로 논란을 일으킨 대안교과서를 감수했으며 '민주주의' 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 로 바꾸라고 압력을 행사해 역사학계의 반발을 불러온 적이 있으며 뉴라이트의 정신적 지주 내지는 대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 #, #, # #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다수의 일본 우호적 발언, 분단상황과 일제 수탈을 미화한 발언 등으로 논란이 된 문창극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으나 낙마하였다. # 심지어 '뉴라이트' 운동가 출신 박효종을 방통심의위원장 임명을 강행하였다. # 그는 2005년부터 뉴라이트 계열 운동단체인 교과서포럼의 회장을 맡았다. 교과서포럼은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출간한 바 있다. 2014년 초에 최홍재가 청와대 선임행정관직에서 물러나고 3급으로 승진한 허현준이 단독으로 직무를 맡아 '화이트리스트'를 직접 수행했다.
2016년 11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뉴라이트는 파멸로 접어들었고 특히 허현준 선임행정관이 국정농단 수사 결과 2014년 세월호 집회반대 극우 단체 관제시위에 연루된 게 알려지면서 더 타격을 받았다. 당연히 그냥 죽기 싫은 그들은 계속해서 친박집회에 참가했다. 결국 2017년에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서 아주 박살나는 분위기였지만 비박 뉴라이트들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박찬수 한겨레 논설실장은 저서 <NL 현대사>에서 뉴라이트의 몰락을 "보수정권 10년간 스스로 무너진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래도 뉴라이트들이 국가주의 보수와 차별성(?)을 주장하고 북한이 건재한 상황이라 언제든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는데 보수 세력 내부의 뉴라이트 진영은 윤석열 정부[78] 집권 후 일단 부활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보수 세력에 뉴라이트가 기생한 형태인데 그게 윤석열 정부의 친일 기조와 맞물려 부각된 것이다.
5.3. 존 마크 램지어 위안부 논문 게재 논란
2020년대 들어 종종 망언을 내뱉는 수준에서 사라져가던 이들이 다시금 수면에 떠오른 것은 존 마크 램지어 교수의 논문 게재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뉴라이트 인사들의 래퍼런스가 결국 램지어의 논문에 인용되었고 # 이들 스스로는 학문적으로 이미 논쟁이 끝난 위안부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을 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램지어를 지지하는 성명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지만 당연히 글로벌 학계에서도 병먹금 취급을 받아서인지 이후 색다른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5.4. 윤석열 정부의 뉴라이트 기조 논란
자세한 내용은 윤석열 정부의 뉴라이트 기조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참고로 윤석열 정부가 홍범도 흉상 철거 등 뉴라이트 논란으로 시끄럽자 일부 지지자들이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 때 '독립군'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데, 문제는 당시 학살당한 '독립군'들의 실체가 바로 독립을 핑계로 러시아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다닌, 한마디로 일부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테러리스트 독립운동가'에 가장 딱 맞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홍범도는 항목에도 있듯 독립군을 학살한 적이 없다.
6. 비판
일본 극우와 한국 뉴라이트 비교[79]대표적인 문제점은 북한에 환상을 갖고 북한을 옹호하던 기존의 관점에서 추종하는 대상만 독재정부와 일본으로 바꾼 채로, 여전히 헛된 환상을 갖고 정치 양극화와 혐오를 가속한다는 점이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는 점도 지적되는데, 말로만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울 뿐, 남한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옹호로 얼룩져있다. 그리고 그 비교 대상이라고 가져오는 게 전세계적으로도 후진적인 북한 체제다.[80] 그러면서도 웃기는 게 북한처럼 전근대 조선 사회를 혐오하며 자신들의 숭배나 사상을 정당화한다. 시장 체제적으로 봐도 말로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현실은 매우 진영 논리에 치우친 이중적인 행보를 보여준다.[81]
게다가 정보화 시대에 맞추어 우파 유튜버를 통해 극단적인 방향으로 탈진실(Post-truth)을 퍼트리고 있는데, 역사쪽만 해도 자신들의 주장이 감정적이지 않고 합리적이라고 선동하지만 현실은 결국 '한국인의 민족성은 일본인보다 열등하다'라는 편파적인 주장으로 수렴되며[82] 그 끝은 국개론과 좌파진영을 공격하는 정치적 발언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은 사회 발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거나 헌정 질서를 지키거나, 국가와 민주주의의 존재 가치를 어필하거나,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보다 민주사회에 맞지 않은 독재정부 성역화, 자신들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사회의 저격, 반중, 대외 외교에서 자국과 상대진영 비난 등 소모적인 논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 행태가 본인들 딴엔 그토록 멸하고 싶어하는 극좌단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83] 학계의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오늘날 주류 뉴라이트는 상기되어있듯이 내로남불 행태로도 많은 비판을 받고, 보수를 자칭하면서 후술된 것과 같은 종일(從日) 행각도 저지르기 때문에 반대파들이 보수 인사들에게 친일 프레임을 쉽게 씌울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꼴이 되었다. 특히 뉴라이트의 편파적인 안티내셔널리즘적인 행보와 일본 민족주의자들과의 유착 덕분에 대일 문제를 잘 풀어보고 합의를 찾아보려고 하는 시도만 하면 친일파로 찍혀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마치 종북주의자들 때문에 남북관계를 건전하게 풀어보려는 시도에도 종북 딱지가 붙는 것과 같다.[84] 김대중이 연세대 사태를 주도한 한총련을 향해 "한총련은 민주세력과 건전한 통일세력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한총련은 이를 반성하고 자진해산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했듯이 # 뉴라이트는 건전한 한일관계 개선에 큰 장애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북한 인권문제 거론 쪽에서도 활발히 활동을 했기에 뉴라이트에 대한 반감에 힘입어 북한 인권문제 거론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까지 악화시켰다.[85] 또한 건국절 논란을 지피기 전에는 1948년에 건국했다고 하는 것이 큰 문제시 되진 않았다. #[86] 그동안 정부 수립과 건국이라는 용어가 혼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지배를 재평가하는 뉴라이트가 1948년을 건국절로 정하자고 주장하니까 결국 논란 이후로는 1919년 건국론에 동의하지 않거나 건국절 제정에 반대하더라도 1948년 건국이라고 주장하면 뉴라이트 딱지가 붙는 상황이 됐다.[87]
따라서 진보 성향은 말할 것도 없고[88] 보수 성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뉴라이트 세력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89] 한편 뉴라이트가 현실 정치권과 결탁하면서 뉴라이트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대화가 되는 보수'로 유명했던 김일영 교수는 뉴라이트의 정치화를 경계하면서 자신이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본인을 보수주의자라고 말한 역사학자 김기협도 사이비 뉴라이트가 이 땅의 보수를 죽인다고 한탄했다. #
아래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그동안 남겨온 어록들이다.
제국주의 역사상 식민피해 배상은 제기돼본 적도 없고, 실제 지급된 바도 없다
이영훈 #: 그러나 1959년 일본은 남베트남과의 전쟁 보상 협상 과정에서 "전쟁 중 많은 물자를 징발하는 바람에 베트남인 30만명이 아사했음은 인정한다."는 내용의 자료를 국회에 제출했다. 협상 결과 1960년 일본은 남베트남에 3,900만 달러의 전쟁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런 식으로 1955~1977년까지 일본은 전쟁보상금(준배상금 포함)으로 미얀마 등 11개국에 총 15억 달러를 지불했다. # 아울러 2013년 영국 정부는 1950년대 케냐에 대한 식민통치 가혹 행위에 대한 공개 사과와 배상을 발표했고 케냐인 피해자 5,200여명에게 2,150만 달러를 배상하겠다고 밝혔는데 이는 피해자 개인에게 약 4,000달러를 받게 되는 금액이다. 영국 정부는 케냐변호사협회에도 925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 2008년 이탈리아 정부도 30년간 식민 통치에 대한 배상으로 리비아에 50억 달러를 보상하기로 했으며 2011년 네덜란드 법원은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네덜란드 정부가 생존자 1명과 유가족 8명에게 총 20만 유로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2011년의 판결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첫 번째 판결이며 민간인 학살과 같은 ‘인도에 반하는 범죄’에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국제법의 원칙을 적용한 판례가 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항소하지 않고 배상금을 지급했으며 2013년 9월에는 64년 만에 공식 사죄를 했다. # 구글 검색 1분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을 이영훈이 정말로 몰라서 그런 말을 했는지[90], 아니면 알면서도 사실을 숨기려 일부러 거짓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기초적인 사실 왜곡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이영훈 #: 그러나 1959년 일본은 남베트남과의 전쟁 보상 협상 과정에서 "전쟁 중 많은 물자를 징발하는 바람에 베트남인 30만명이 아사했음은 인정한다."는 내용의 자료를 국회에 제출했다. 협상 결과 1960년 일본은 남베트남에 3,900만 달러의 전쟁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런 식으로 1955~1977년까지 일본은 전쟁보상금(준배상금 포함)으로 미얀마 등 11개국에 총 15억 달러를 지불했다. # 아울러 2013년 영국 정부는 1950년대 케냐에 대한 식민통치 가혹 행위에 대한 공개 사과와 배상을 발표했고 케냐인 피해자 5,200여명에게 2,150만 달러를 배상하겠다고 밝혔는데 이는 피해자 개인에게 약 4,000달러를 받게 되는 금액이다. 영국 정부는 케냐변호사협회에도 925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 2008년 이탈리아 정부도 30년간 식민 통치에 대한 배상으로 리비아에 50억 달러를 보상하기로 했으며 2011년 네덜란드 법원은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네덜란드 정부가 생존자 1명과 유가족 8명에게 총 20만 유로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2011년의 판결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첫 번째 판결이며 민간인 학살과 같은 ‘인도에 반하는 범죄’에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국제법의 원칙을 적용한 판례가 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항소하지 않고 배상금을 지급했으며 2013년 9월에는 64년 만에 공식 사죄를 했다. # 구글 검색 1분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을 이영훈이 정말로 몰라서 그런 말을 했는지[90], 아니면 알면서도 사실을 숨기려 일부러 거짓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기초적인 사실 왜곡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역사의 오류 문제는 수학의 그것과는 다르다. 누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오류가 될 수 있고 다른 시각이 될 수 있다. 새로운 해석이 될 수도 있다. 교학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건 오류가 아니다. 수능의 관점에서 본다면 교학사 교과서를 추가로 봐야 할 일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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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희 한국현대사학회 회장
이명희 한국현대사학회 회장
이승만의 16대 할아버지가
양녕대군이고 그 형제가
세종이라 그러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그 세종과 거의 맞먹는 DNA를 가졌다.
유영익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102]
유영익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102]
일제 식민지 시대라고 배웠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일제강점기란 용어로 대체됐다. 북한의 역사 인식은 대한민국이 일제 강점기를 지나 8.15 광복을 맞은 후 곧바로 미국 제국주의 강점기에 들어갔다고 여긴다.
종북좌파 세력은 대한민국을
미국 제국주의 식민지라며 노골적으로 떠드는데, 이는 북한의 역사 선전·선동과 정확히 일치한다. 일제강점기란 용어에는 미제 강점기란 북한식 프레임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국가적인 내용의 책들이 채택돼 교육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과서전쟁, 역사전쟁의 본질이다.
조전혁 명지대학교 교수 # #[104]
조전혁 명지대학교 교수 # #[104]
역사청산위원회라는 것들이 해서는 안 될 짓을 모두 했습니다.
제주 4.3사건,
광주 사건… 모든 것을 정부가 잘못했고 정부에 항거해서 일어난 소위 '민'이 국민이고, 그쪽이 헌법기관이다, 이따위 식의 조사보고서나 재판 결과들이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전복은 이미 그때부터 공공연하게 시작됐고, 정부가 거기 앞장을 서고 돈을 댔던 겁니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KBS 이사장)[105]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KBS 이사장)[105]
공산주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주의
부르주아 세력을 약화시켜야 되는데,
친일파 청산이 내세우기 가장 좋은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가
박헌영을 만나 '
소련과 손을 끊고 나와 손을 잡고 하자'고 제의했으나 박헌영이 거절했다"며 "그때 박헌영이 '친일파 청산부터 해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그건 결국 소련에서 내려온 지령 때문이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KBS 이사장) #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KBS 이사장) #
(조부-
이명세를 말한다-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일제 통치 체제하에서 타협하면서 사신 것이다. (조선유도연합회에) 취직을 하셨고, (일을) 맡아서 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KBS 이사장) #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KBS 이사장) #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했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는데 그것부터 바꿔야 한다.[107] 스탈린의 독재, 히틀러의 독재 등과 다르다.[108] 젊은이들에게 호소하고 독재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고 교육해야 한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 # #
이영훈 서울대 교수 # #
몇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국가예산으로 보상을 받고 나아가
공무원시험의 우대나 각종 특혜를 받고 있습니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민주화 운동가들이 그들의 후손에게까지 특권을 물려주는 것이 허용돼서는 안 됩니다.
이영훈 서울대 전 교수가 2019년 12월 일본 극우 잡지인 보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발언. 출처[109]
이영훈 서울대 전 교수가 2019년 12월 일본 극우 잡지인 보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발언. 출처[109]
여기에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사실상 국부)의 이미지로 부각하여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논란을 일으켰다. 끝장토론 대한민국의 국격을 위해 건국 대통령의 예우를 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많은 중국을 피폐로 몰아넣고 수백만 이상의 중국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마오쩌둥에 대해 등소평은 '과도 있지만 공이 더 많은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가하면서 초상화 교체를 거부했다."라며 문제를 희석하고 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둘 다 비판해야 정상인데 이승만을 높이기 위해 공산 독재자를 띄우면서까지 대놓고 친중짓을 한 것이다.
이런 재평가 움직임에 따른 대표적인 사업으로 이승만 기념관과 동상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4.19 혁명 중 군중에 의해 철거된 이승만 동상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는 광화문광장에 세우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승만 기념관을 세우겠다는 부지는 본래 왕실 소유 숲이었던 곳으로 이승만이 탄압한 황실을 상징하는 경복궁 바로 옆이며 이승만이 탄압한 불교 본산 바로 옆이다. 물론 여론이 원체 좋지 않아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참고. 역사학자 신용하 교수는 '뉴라이트는 일본 신식민주의 사관을 보유한 집단'이라고 대차게 비판했다.
2009년 7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자체적으로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까는 카툰을 만들어서 논란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무한도전의 자막이 편향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것에 선동되면 안 된다는 내용인데 오히려 역풍이 불어 뉴라이트 사이트는 마비되고 디시인사이드 무도갤은 들끓었다.
현대사 연구자 서중석 교수는 뉴라이트 세력의 활동에 대해 '민주화운동 폄훼해서 현대사 연구 성과를 무위로 돌리고 다시 수구냉전 시절로 복귀하려는 것이다. 이번 사설도 뉴라이트 교과서의 국사편찬위 심사에 맞춰 그걸 통과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쓴 혐의가 짙다. 지성과 양식, 양심 모두 내동댕이쳤다. 참담한 일'이라고 우려했다. #, #, #
뉴스 동영상 보기.
뉴라이트 단체 중 한 단체의 대표가 저소득층 지원 사업인 미소금융의 공금을 횡령한 사건이 발생했다. 2011년 12월 20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23억 여 원을 횡령한 혐의[110]로 뉴라이트 계열인 M단체 대표 김 모 씨를 구속했다. 김씨는 14억 6천 만 원 상당의 주택을 구입하는 데도 횡령한 자금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2009년 12월부터 공금을 횡령했으며 총 65차례에 걸처서 범행을 저질렀다. 김 모 씨가 대표로 활동하던 단체는 뉴라이트 계열로 별다른 경험 없이 2009년 미소금융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주변에서는 금융업에 경험이 없는 단체가 미소금융 사업에 선정되자 특혜를 받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였다. 뉴라이트 단체 대표, 20억대 횡령으로 구속기소.
안병직 뉴라이트 재단 이사장: 위안부 강제 연행 부정 |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한총련으로 대표되는 NLPDR 계열 출신이 많다 보니 말은 뉴라이트라느니 신자유주의라느니 하면서 거창하게 이야기하는데 정작 조직이 돌아는 꼴은 그야말로 한총련 시즌2 수준이다. 특히 북한인권운동의 학생 조직 쪽에서 이런 문제가 꽤 심각했다. 뉴라이트 학생운동의 본산인 전북대는 신입생을 합숙시키면서 세뇌 수준에 가까운 북한인권 동영상 자료 시청이라든가 강제적인 행사 참석, 심지어 일부 조직에서는 일 할 사람 필요하니 군대 늦게 보내는 행위도 서슴없이 벌였다. 2005~2006년 사이에 북한인권 진영에서 서울시내에 대대적으로 점조직 확장사업을 벌였지만 지지부진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한총련식 조직운영이 꺼려져서 학내 운동권과 거리를 두던 새내기들에게 한총련식 조직운영을 들이미니…
7. 조중동의 전폭적 지지
2008년 뉴라이트의 "자칭"[111] 대안교과서가 출판되었을 때 조중동 측에서 뉴라이트를 옹호, 미화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시대착오 좌파 역사교육 바로잡을 '대안교과서', 역사인식의 지평 넓힐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2010년대에도 조중동에서 뉴라이트를 주장, 옹호하는 사설이 올라오기도 하였다. 이런 식으로. # # #
8. 뉴라이트 용어의 모호성
언론으로부터 '뉴라이트'로 지칭되고 뉴라이트 단체가 생겨난 것은 2000년대 참여정부 무렵이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대중의 반발 때문인지 내부적인 실망으로 이탈자들이 많이 생겨서인지 이러한 운동과 단체는 여력을 많이 잃었다. 사실 뉴라이트라는 것은 2000년대 뉴레프트 운동에 자극받아서 문자 그대로 New Right에서 출발한 것이다. 기존의 보수가 지나치게 수구화된 것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위해서 새로운 보수 정풍운동 차원에서 뉴라이트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그 결과는 이념적 편향성과 권력과 유착된 경향을 보이게 된다.이 때문에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했던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뉴라이트 운동은 죽었다라고 선언하고 뉴라이트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뉴라이트는 죽었다, 종언 선언해야, 보수지식인 김일영 교수 주장.", '뉴라이트'를 넘어 '프로콘'으로 김일영 교수는 사상적 빈곤을 앓고 있는 보수, 낡은 보수의 틀을 깨고 현실권력과는 거리를 두고 사상적, 학문적, 정책적으로 보수의 새로운 기치를 닦고자 했지만 자신이 보았던 뉴라이트는 이와 달리 권력과 상당히 유착하는 관계를 보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뉴라이트라고 하는 용어가 주홍글씨화되어서 이것이 마치 극보수 일각에서 '종북', '빨갱이' 식으로 진보진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좌파 버전의 매카시즘 용어가 된 경향도 나타났다. 실제로 성향만 보수일 뿐 뉴라이트 단체에 참여하지 않거나 뉴라이트와는 관련 없는 인사도 뉴라이트로 공격, 매도, 조롱되는가 하면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했더라도 일제강점기 문제엔 부정적엔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도 도매금으로 친일파로 공격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오용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뉴라이트라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고 정치권에서도 2010년대 중반까지는 친일파라고 까면 깠지 딱히 뉴라이트라는 단어로 상대방을 까진 않았지만 2019년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발간되면서 뉴라이트라는 단어가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2022년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회자되면서 정치적 용어로 부활했다. 인터넷에선 이들을 토착왜구라고 까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어감상 정치권에서 쓸 만한 단어는 아닌지라 뉴라이트라는 말이 재차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9. 기타
사실 뉴라이트 운동의 막장성은 한국 뉴라이트 운동에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해 왔던 뉴라이트 재단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영훈, 안병직이 자초한 면도 크다. 예를 들어 안병직은 위안부는 강제동원이 아니라는 식으로 마치 자발적 창녀인 냥 주장했고 이영훈도 "정신대 관련 일본 자료를 보면 정신대 범죄행위는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었다" 며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 업소 주인들이고 그 명단이 있다" 고 주장했다. # 그런데 정작 이영훈 본인은 또 다른 인터뷰에선 말을 바꿔서 2004년 9월 5일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저는 구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여성을 강제 동원하고 감금하여 병사들에게 성적 위안을 강제한 행위는 국제사회가 협약으로 금하고 있는 성노예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라고 했고 심지어 이후엔 직접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아가서 큰절까지 하며 사과했다. # 그러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자신의 유튜브 방송인 이승만 TV나 새 저서인 반일 종족주의에선 위안부에 대한 강제동원이 없었다고 정반대의 입장으로 선회했는데 위안부의 대다수는 채무관계로 인해 생겨났다는 입장으로 " 채무관계는 강제동원과는 다르다"는 아리송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kakaotv(8735749)]
이들은 기존 교과서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서술에 불만이 있었는지 2000년대부터 교과서포럼[112]을 통해 '근현대사 대안교과서(뉴라이트 역사교과서)'를 만들려는 시도도 하였다. 참고로 이건 '교과서'가 아니며 현재 교과서가 이렇게 바뀌면 좋지 않을까라는 의미의 자칭 '대안'교과서다. 당연히 이걸 교과서로 채택한 고등학교도 없기에 이 책으로 역사를 배운 사람도 없다. 근데 종종 이 책 내용을 들고 와서 '요즘 애들이 배우는 역사' 류의 낚시글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데 이건 그냥 이름만 '교과서'일 뿐 교육과 전혀 무관한 서적이다.[113]
뉴라이트가 펴낸 자칭 역사교과서를 보면 일제강점기를 '시장경제 기반의 구축',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무역의 성장', '근대적 경제성장', '농업의 개발' 따위 용어로 식민지 근대화론에 기초해서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는 근대화이고 수탈 등은 없었다며 조선총독부의 토지 약탈은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서술하기도 하고[114] 위안부 강제동원을 제외하면서 악랄한 정도가 덜한 '여자 근로 정신대' 사례만 일부 삽입하기도 했다.
뉴라이트 저서에 참여했던 바른사회시민회의는 '과거 친일행위자들은 피해자 겸 희생자'라고 규정짓기도 했다. #
홈페이지에서 가수 김장훈의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에 기부금을 내지 않겠다는 발언에 난데없는 비난을 하여 네티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이 되는 임나일본부설은 주장하지 않고 있다.[115] 사실 뉴라이트의 대다수가 역사학 전공이 아닌 것을 고려하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역관광 당하기 딱 좋은 소재가 고대사기 때문이다.
"배신, 배반자들을 척결하기 위해서라면 극우처럼 몰고 가는 게 좌빨들의 기본 전략" #이랍시고 네이버 블로그나 지식인 따위에 이런 식으로 종북, 좌빨몰이로 반발하는 글을 쓰기도 한다. 극우처럼 몰고 간다고 화를 내면서 정작 본인은 좌빨 운운을 시전하는게 개그 포인트다.
사실 뉴라이트 운동 자체가 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사람이 참가하고 언론에 오르내려서 이 문서의 내용이 길어졌지만 뉴라이트의 정체성은 사실상 이런저런 미사여구로 포장한 친독재 국까, 일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 본질은 그저 노예근성과 일방적인 자국 혐오에 불과해[116] 사실 "우익"이나 "운동"이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한 수준인데[117] 진짜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매니악한 곳에서 유사역사학 덕후들끼리나 소비될 담론이 이른바 극소수의 교수급 비전공 학자가 동참한 나름 그럴듯한 권위 혹은 오류를 등에 업고,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선동하면서 정치와 결탁하니 황당하게도 먹힌 것이다.
더팩트의 보도에 따르면 안병직은 2023년 10월 18일 김일성이 이승만에게 70만 군대를 지원해줬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 이 난해한 발언에 대해 이승만학당의 관계자는 "김일성이 남침을 할때 우리나라가 군대가 약했다. 6.25전쟁 이후에 군대가 70만이 되고, 이런 경험을 하면서 국방 체제가 강해진 거 아닌가. 그것을 김일성한테 고맙다 이런 뜻으로 말씀한 건 아닐까 싶다"고 해석했다.
10. 해외의 유사 사례
사실 뉴라이트처럼 식민지 시절 내지 자국이 당한 전쟁범죄를 미화하는 사람들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권위주의적인 독립운동가와 식민통치와 그 부역자들을 동시에 미화하면서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친기득권인 경우는 세계사적으로 드물다. 예를 들어 만모한 싱 전 인도 총리도 2005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식근론 + 독립운동가 비하 비스무리한 내용을 담은 연설을 한 게 알려지면서 인도에서 논란이 된 바 있었다.[118] 인터넷 기사에 싱의 발언을 옹호하거나 '영국의 지배가 오래 지속되었으면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이자 G7이 되었을 것'이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 그러나 만모한 싱은중화권의 예를 들면 중국판 일뽕인 징르(精日, '정신적 일본인'의 약자다)들은 난징대학살을 옹호하고 일본군 코스프레를 하는 등 그 스케일에서 한국의 뉴라이트는 가볍게 쌈싸먹는 짓거리들을 저지른다고 한다. 그러나 징르들은 최소한 마오쩌둥 등 자국의 (좌파 성향) 독재자들이나 권위주의를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뉴라이트보다는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중화권인 대만에서도 일부 일본에 유화적인 사람들이 일뽕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일본 전쟁범죄에 대해 비교적 덜 부정적인 민진당은 자국의 민족주의 성향 독재자인 장제스에 대해 적대적이며 위의 만모한 싱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점에서 뉴라이트와는 성향이 다르다.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와 공산당 모두와 싸우던 장제스를 국부로 모시면서 친중정책을 동시에 펴는 국민당 지지자들이 뉴라이트와 비슷한 모순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120]
그 외 레바논에서는 프랑스에 위임통치를 맡겨야 한다는 여론이 나온다거나, 짐바브웨에서는 국민 3/4가 영국 식민지 시절이 더 낫다고 여긴다거나 하는 등의 사례가 있지만 이들은 현재 국가 상황이 워낙 막장인지라 차라리 식민지 시절이 더 낫다는 푸념에 더 가깝지 실제 식민지를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121] 덤으로 나치 독일에게 가장 먼저 얻어맞은 국가인 폴란드에서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내지 네오나치가 버젓이 활동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122]
마크 로빈슨이라는 트럼프 지지자인 흑인 정치인은 노예제를 옹호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빨갱이라고 비난하기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네오나치는 아니지만 폴란드의 여당을 지내기도 한 법과 정의는 나치의 학살 피해에서 폴란드인의 피해를 유난히 강조하면서 유대인의 피해를 축소한 것으로 논란을 빚었다. 참고로 법과 정의는 홀로코스트에 폴란드인이 가담한 것을 인정하는 것을 범죄화하는 법률을 만들기도 했는데 한국으로 치면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일제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비판하면 처벌하는 셈이다. 다만 이쪽은 폴란드인은 절대적으로 피해자이기만 하고 가해자가 아니다며 독일만 악마화하는 것이기에 뉴라이트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며[123] 오히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124][125] 또한 구한말의 신념형 친일개화파들이나 일진회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뉴라이트와 달리 상기한 친외세 진보, 반기득권세력이었던 측면이 있어 동일시하기 어려우며, 서구권의 대안우파 및 극우파들은 자국이나 백인 내셔널리즘을 옹호하고, 본인 입장에서 외세 침략자인 외국이나 타민족의 내셔널리즘에는 비판적이라 때문에 완전히 다르다.
즉 현재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그 추종자들만큼이나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불합리하고 모순된 권위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노예근성과 이념을 가진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일제를 두둔하면서도 동시에 극렬 혐일이던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 운운하며 우상화하면서도 그런 이승만의 주장은 철저히 외면하는 것부터가 코미디도 저런 코미디가 없지만.[126]
11. 관련 인물(가나다순)
링크 참조
- 권용목 #: 1987년 현대엔진 노조를 결성하여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된 인물로서 노동운동계의 스타로 이름을 날렸고 1995년에는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에 취임한 바 있었지만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 참여를 둘러싸고 민주노총과 갈등을 겪다가 노동운동계를 은퇴한 뒤 야인으로 지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녹색연대21, 새시대개혁연대, 국민통합21 등을 전전하다 2006년부터 뉴라이트로 전향해 '뉴라이트신노동연합'을 조직한 바 있으며 2009년 2월 13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 권희영
-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을 지내며 국가보훈위원회 위원, 방송문화진흥회 이사(2012~2018), 독립기념관 이사 등을 거쳐 2022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까지 됐고 2008년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 집필진에 참여하는 등 뉴라이트 활동도 했다. #
- 김낙년
- 김영호(1959): 제43대 통일부장관. '뉴라이트싱크넷'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뉴라이트 계열 학자로 알려졌으며, # '교과서포럼'에도 참여해 대안 교과서 집필에 기여했다. # '뉴라이트 지식인 100인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려 이회창의 대선 출마를 비판했다. #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 북 콘서트에 참여,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비난했다. #
- 김용삼: 극우 성향의 책을 많이 냈다.
- 김진홍
-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전향 운동권 출신.[127] 다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오히려 정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128] 뉴라이트면서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특이한 케이스. 특이하다기보단 비주류라고 보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 민경우: 대한민국의 NL 운동권 출신 정치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 남측본부의 사무처장 역임, 통일연대 사무처장 역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 역임.
- 박종운
-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명예교수, 前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
-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 안병직 #
- 윤서인
- 호밀밭의 우원재 #
- 윤기중: 윤석열 대통령의 아버지. 뉴라이트 운동에 서명한 적이 있지만 동시에 윤봉길 의사를 존경한다고 밝혀서 여기 서술된 사람들 중에서는 애매한 축에 속한다.[129]
- 이동관
- 이명희
- 이영훈
- 이주천
-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영훈과 이승만학당 강연을 하는 등 동업자다.
- 진명행 - 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 저자. 이전부터 독립운동 폄하, 민주화운동 폄하로 인터넷상에서 유명한 극우 성향의 역사가로 평가된다.
- 최홍재
- 하태경: 열린북한방송 시기에 뉴라이트 행적을 보인 바 있다. 다만 지금은 뉴라이트가 아닌 개혁보수 노선이라고 주장한다.
- 한오섭
- 허동현
- 허현준
- 홍금우[130]: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광주은행 상임감사위원
-
뉴라이트 지식인 100인 선언 명단 (가나다 순) - <총 113명>[131]
강신천(공주대 교수), 강용구(공주대 교수), 강호칠(변호사), 경만호(의사), 계승균(부산대 교수), 공재열(부경대 교수), 구교천(동서대 교수), 권요한(창원대 교수), 김경중(의사), 김기민(창원대 교수), 김문찬(울산대 교수), 김민식(부산디지털대 교수), 김배균(뉴라이트폴리젠 조직위원장), 김성열(경남대 교수), 김영기(경인교대 교수), 김영호(성신여대 교수), 김용주(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김용직(성신여대 교수), 김정필(한의사), 김종천(영파의료재단 원장), 김철(의사), 김태준(동덕여대 교수), 김태황(명지대 교수), 김태효(성균관대 교수), 김현(의사), 김혜준(행복뿌리 대표), 김호섭(중앙대 교수), 나현(의사), 남궁호삼(의사), 노봉호(동명대 교수), 류병운(홍익대 교수), 박기성(성신여대 교수), 박상헌(기업인), 박연아(명지대 교수), 박영근(창원대 교수), 박정환(부산대 교수), 박종우(기업인), 박종원(한국예슬종합학교 교수), 박중환(동명대 교수), 박창하(울산대 교수), 박한성(의사), 박효종(서울대 교수), 배호순(서울여대 교수), 백경원(동의과학대 교수), 서국웅(부산대 교수), 서태열(고려대 교수), 송근존(미국 변호사), 송호열(서원대 교수), 신성철(경상대 교수), 신지호(자유주의연대 대표), 심규철(공주대 교수), 심용식(의사), 안광무(의사), 안세영(서강대 교수), 양기창(의사), 양염승(의사), 양왕용(부산대 교수), 양운철(세종연구소), 양윤석(을지의대 교수), 오상근(동아대 교수), 우봉식(의료와사회포럼 대표), 유용식(우송대 교수), 윤기훈(상명대 교수), 윤창현(서울시립대 교수), 이강길(변호사), 이달원(경림 R&C연구소 소장), 이대영(중앙대 교수), 이두아(변호사), 이명희(공주대 교수), 이보성(자유주의연대 울산포럼 대표), 이성훈(변호사), 이언호(부산외대 교수), 이영훈(서울대 교수), 이웅희(한양대 교수), 이재교(인하대 교수), 이지수(명지대 교수), 이춘근(자유기업원 부원장), 이한석(변호사), 이호선(국민대 교수), 이홍종(부경대 교수), 임구일(의사), 임종찬(부산대 교수), 장현재(의사), 전우현(명지대 교수), 전홍찬(부산대 교수), 정근(의사), 정승연(인하대 교수), 정우석(의사), 정진영(경희대 교수), 조경근(경상대 교수), 조성환(경기대 교수), 조전혁(인천대 교수), 조희문(인하대 교수), 차기환(변호사), 차인준(인제의대 교수), 채희율(경기대 교수), 최영재(시대정신 편집장), 최창규(명지대 교수), 최해진(동의대 교수), 최홍재(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 하태경(열린북한방송 대표), 한보명(동서대 교수), 한상만(성균관대 교수), 허정임(부산교대 교수), 현진권(아주대 교수), 홍성걸(국민대 교수), 홍성기(아주대 교수), 홍성이(자유주의연대 정책위원), 홍성주(의사), 홍진표(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홍후조(고려대 교수), 황홍섭(부산교대 교수)
12. 관련 단체
- 기파랑 출판사 #[132]
- 나라사랑기도회 - 2007년 5월에 창립된 뉴라이트 천주교 지부로 물론 비인준 단체다. 천주교 단체인데도 정작 광고를 내는 곳은 조중동뿐이라서 천주교 언론 쪽에서는 고깝게 보고 있다. 게다가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인준단체)의 이름을 무단으로 가져다 쓴 적도 있어서 천주교에서의 인식도 상당히 안 좋다. 주된 활동은 대척점에 서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까기다. 유사품으로 ' 뜻있는 천주교 평신도 모임',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등이 있다.
- 백년동안 - 박정희, 이승만을 숭배하거나 5.18 민주화운동과 제주 4.3 사건을 폄하하는 책을 많이 출판한다. 반일 종족주의로 유명한 이영훈 작가도 이 출판사를 통해 책을 많이 낸다.
- 낙성대경제연구소: 모든 연구원이 뉴라이트 계열은 아니지만 주요 인물인 안병직, 이영훈 등은 모두 뉴라이트 계열이다.
- 뉴데일리
- 데일리안
- 미래한국
- 미디어펜
- 바른민주개혁시민회의
- 바른사회시민회의
- 시대정신
- 이클린연대
12.1. 뉴라이트 사관의 영향을 받은 인물 및 단체
- 남정욱 - 교보문고 저자 소개 그의 저서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가 좌파들에 의해 왜곡되었고 그로 인해 이승만, 박정희의 업적이 폄하되었다고 주장한다.
- 대한민국 엄마 부대
- 우남위키
- 윤석열: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당선 시점까지만 해도 딱히 뉴라이트 색채를 보이진 않았으나[133] 취임 후 논란이 있는 우파 유튜버를 비롯하여 뉴라이트 계열 인사를 행정부에 대거 채용하거나 가까이 하여 우려를 낳기 시작했고 이런 인사 정책은 결국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등을 일으켰다. 본인도 대통령 취임 후 삼일절 기념사와 광복절 기념사마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에 관한 언급은 없이 일본은 파트너라는 점만 강조하며 뜬금없이 '광복 운동은 건국 운동'이었다는 뉴라이트 계열이 주장하는 시각을 내비췄다. # 자세한 내용은 윤석열 정부의 뉴라이트 기조 논란 문서 참조.
- 이명박 - 2008년에 잠깐 건국절을 추진했다가 여론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철회한 바 있다. 다만 본인의 성향 자체는 오사카 출신이나 지곤조기 논란 등으로 친일 인상도 있고 6.3 항쟁에 가담한 대학생 시절이나 정권 말기 독도 방문, 일왕 사과 발언으로 반일 인상도 있는 등 왔다갔다 한 편이다. 그와 별개로 본인을 지지하던 뉴라이트 세력을 대거 정계에 진출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에 오늘날엔 만악의 근원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 이병태
- 자유기업원
- 자유대학생연합: 연세대학교를 베이스로 삼는 학생운동 단체 겸 법인격 영리단체다. 법인은 "프리덤세이버"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 자유민주당(2021년)
- 전국학생수호연합, 한국성평화연대 # # #
- 전희경
- 주동식 # # #[134]
-
한국자유회의
#
# : 2017년 1월 출범한 보수단체로,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 등 130여명이 주도하여 창립하였다. 핵심 발기인에는
노재봉 전 국무총리,
이동복 전 의원,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와 뉴라이트 성향의
이영훈,
류석춘,
조갑제[135],
이명희,
윤창현 등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 "한국자유회의" 출신 인사들이 주요 공직에 임명[136]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윤석열 정부의 이념적 기조와 "한국자유회의"의 사상적 연관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 # - 한국현대사학회
13. 관련 사건
14. 관련 문서
15. 출처
- NL현대사: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 박찬수 저. 인물과사상사. 2017. p312~326.
[1]
군사정권에 대해선 후술되어있듯이 뉴라이트 내부에서도 평가가 꽤 나뉜다. 초기 인사들은 출신 자체가 군사정권에 대항하던 운동권 출신 전향 인사들이 많았으므로 섞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심지어 신지호 등 일부 원년 멤버는 이승만도 비판하면서
김영삼을 개혁보수적 뉴라이트의 원조로 보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물론 이들은 오늘날 뉴라이트의 주류가 아니다.
[2]
연세대나 고려대 출신 주사파는 은근슬쩍 주체사상을 버리거나 더 이상 주장하지 않으면서 자기혐오 때문인지 사회운동을 접거나 일부는 민주당계로 돌아서기도 했으며 현재 주사파의 주류이자 이미 극소수 비주류 세력이 된 경기동부연합은 외대 용인캠퍼스가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다.
[3]
운동권 출신으로
6.3 항쟁에도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고초를 겪은 후, 현대에 입사하면서 샐러리맨으로 활약하다가 YS픽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안티들에겐 부패와 더불어 뉴라이트 세력을 대거 정계에 입문시킨 만악의 원흉처럼 까이지만, 정작 본인이 주도적으로 뉴라이트를 이끌진 않았다.
[4]
운동권 전체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지만 김대중은 운동권 중에서도 극단화된 세력의 정치 진입에 있어선 '군사정권에 반대하다가 그들 자신도 군사정권과 비슷해진 안타까운 사람들'이란 입장을 견지했다. 이후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은 뉴라이트로, 좌익에 눌러앉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활동을 전전하다가 민주노동당을 통해 정계에 들어오게 된다.
[5]
2004년 자유주의연대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자는 명분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거론했으나 보수로부터 '위장 전향' 의심을 받으면서 취소한 사례도 있었다.
[6]
그래서인지 2000년대 한 민족주의 우파 인사는 이들에게 뉴라이트가 아닌 뉴레프트 운동이나 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
[7]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근대화론은 본인들이 운동권 시절 추종했던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 방식을 기반으로 주장하고 있다.
#
[8]
과거에는 안 그랬는데 진보 정부 시기에서 높아졌다고 주장했다. 말로는 학문의 영역에서 토론하자고 하면서 이미 대놓고 정치적 레토릭을 구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9]
그 주장대로면 본인도 한국인이니 자기 말이 모순이 된다. 게다가 뉴라이트 단체도 보수정권 당시 횡령 사건으로 징역까지 산 적이 있으니 뉴라이트야말로 거짓말을 잘하고 이익에만 눈 먼 집단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10]
디시인사이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마이너 갤러리,
역사 갤러리와
일베저장소가 이 사관의 영향을 받았다. 사실 이들은 민족주의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우익도 아니고 그저 사이비 우익에 불과하다. 실제 오프라인에서 이런 논리를 설파하는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다. 다만 제식갤은 이승만, 박정희의 권위주의 독재를 비난하면서 그 반례를 일본을 내세우기 때문에 뉴라이트보다는 일관성 있는 혐한이다.
[11]
세종도 전근대적 군주인 만큼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비판할 점은 있다. 이는 전세계 어떤 군주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영훈의 주장이 가진 문제점은 전근대적 군주를 현대적 시각에서 평가하며 비판하면서 정작 현대의 독재자들에겐 당시 시대상황 운운하며 시답잖은 옹호를 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점은 세종 항목에서도 있듯이 학계에서 얼마든지 반론 가능한 주장들이 많음에도, 이런 반박은 알지도 못하고 제멋대로 해석한 세종을 그대로 흡수한 해외의 넷우익 등이 한국을 비하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12]
노동운동가 출신. 전향파 1세대로 이후 박찬수 저서 <NL 현대사>에서 북한 주도 현대사에는 반대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에도 반대했다. 친일적 뉴라이트 행보에도 부정적인 편으로 보인다.
[13]
강철서신으로 불리며 주사파 대부로 군림하다가 전향한 김영환은 2010년대 인터뷰에서 소련식 공산주의가 아닌 북유럽식 사민주의를 지향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를 보아 오늘날에도 딱히 보수로 전향하진 않고 이 성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4]
하지만 북한을 경제적, 군사적으로 압박해 무너뜨리자는 보수 우익의 주장은 뉴라이트도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였고 현재는 양자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점은 없다.
[15]
이 시기에 그림으로 그린 듯한 뉴라이트라고 하면 단연 신지호가 꼽혔다. PD 계열 출신으로,
노회찬과 함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을 거쳐서 진보정당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유턴해서 일본 유학을 다녀오더니
삼성경제연구소와
한국개발연구원을 거쳐서
한나라당에 입당한 후
박근혜 지지파를 구 우파, 자신들을 신 우파로 지칭하면서 뉴라이트 선언을 한 것이 바로 그였다. 그러다보니 친박계에 찍혀 친박이 당권을 잡자 공천에서 탈락했다.
[16]
어느 목사는 두레라는 단체를 만들어 빈민구제 자원봉사로 알아주던 김진홍이 사실 이렇다면서 비꼬는 글을 쓴 적이 있고 개신교가 극소수인
일본을 찬양하는 목사가 무슨 목사냐는 보수적 목사들의 반발까지 불렀다고 한다. 2001년 경향신문의 주목할 만한 인물이 2004년 뉴라이트로 바뀌고 천막교회가 79억짜리로 바뀌면서 강남에 지부가 세워지고 빈민구제와 피라미드 사업 피의자까지 극에서 극으로의 전형에 가깝다. 그런 시점에서 본다면 개신교계에서는 서경석과 더불어 정치권의
김문수,
이재오에 맞먹는 거물로 취급 받는다.
[17]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뉴라이트 계열 허 모 씨는 1980년대에 "코카콜라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음료수이니 안 마신다."고 말했던 반미 성향 운동권 출신이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경기동부연합으로 대표되는 주사파 내부의 주도권 다툼에서 밀려난 세력이 뉴라이트의 주축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18]
뉴라이트 입장에선 본인들이 숭상하는 가치들에 조금의 비판만 있으면 모두 좌파로 분류된다.
[19]
그렇지만 이들은 경제학도일 때부터 좌파 마르크스 사상을 추종했기 때문에 동족혐오 혹은 심리 투영에 불과하다.
[20]
대표적으로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실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인 추태지만 사상적인 기반은 공산주의 이전의 역사와의 단절이었다.
[21]
사실 일본제국 또한 정치, 경제 체제에서 전근대적 특징들이 적지 않았고 이런 부분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의 독재정권까지 잔존했기 때문에 위의 논증 또한 반론의 여지가 크다. 그러나 뉴라이트는 본인들이 추종하는 대상들의 전근대적 특징들을 아예 외면한다.
[22]
뉴라이트 사관의 조선,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족주의 폄하와 경쟁만능주의 주장.
[23]
일제(2차대전 이전), 미국(2차대전 이후 및 냉전), 권위주의 독재자(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다만 논란의 주 대상은 일제와 독재자에 맞춰져 있다.
[24]
어떤 방식으로건 일제의 통치를 옹호하는 것과 미국의 반공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비판적인 숭배. 미국의 진보주의적 사상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점에선 극우적 사고 방식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상기했듯이 신자유주의도 말로만 신자유주의를 떠들 뿐, 현실은 친대기업적 관치경제 옹호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결국 미국 우파의 논리를 차용하는 것 또한 권위주의 독재자들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
[25]
국수주의인
북한도 이와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북한이 이러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매도하여 현재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으로, 조선을 봉건사회라고 비난하여 자칭 '어버이 수령'과 현세의 위인인 김정은의 권위주의를
영웅주의로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26]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오히려
일천즉천을 시행한 세조 때부터 노비가 폭증했다. 애초에 뉴라이트들의 생각과는 달리 노비종모법은 일천즉천과 관계가 전혀 없다.
[27]
심지어 보도연맹을 만든 사상 검사인
오제도조차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정부가 피해자들한테 사과해야 하는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28]
어떻게 보면 박정희보다 더 안 좋은 사례로, 박정희는 성장기 자체가 일본식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 요소가 부족한 환경이었지만, 이승만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몸소 경험하고 귀국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세계사의 독재자 중에서도 (1900년대 초 동아시아인이 프린스턴
박사 학위를 땄을 정도로) 최상위권 엘리트에 속하니 이승만의 행보는 머리로 배운 것과 본인의 권력 욕심이 이반되어 나타난 전형적인 타락상으로 볼 수 있다.
[29]
한 예로 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가 참석한 문화자유행동 창립기념식 당시 최범 공동대표의 발언이 이런 시각을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당시 그는 "한국 좌파는 반근대화 세력(?)이고 성격은
종족주의, 세종과 이순신을 그냥 위대한 조상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는 근대국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며 마치 자신만 깨어있다는듯이 뉴라이트 사관에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는데, 여기에 더해 광화문의 조선시대 인물인 세종대왕, 이순신 동상을 치우고 민주 공화국의 새로운 상징물을 세우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
# 물론 그 새로운 상징물이 독재자일 확률이 높다는게 아이러니지만. 논란이 되자 최범은 "개돼지들에게는 어려운 얘기"라고 반응했다.
#
[30]
미국에 대해서도 사대에 가까운 모습을 취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지만, 사실 친미 기조는 한국에서 개별 사안에 대한 온도차는 있을지언정 주류 세력들은 좌우 구분없이 취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부각되진 않는다. 게다가 미국의 리버럴한 정책들은 무시하거나 심지어 반미 성향의 디스도 하기 때문에 마냥 사대라고 보기도 뭐하다.
[31]
사대 자체는 정도는 덜할 지언정 일본도 명나라나 조선에 사대한 적도 있고, 유교와 성리학을 통치에 써먹은 부분도 있다. 그리고 일본 제국 또한 유교성리학적 관념을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에 활용해 자유주의 세력에게 패배하는 추태를 보여줬다.
[32]
박정희도 생전에 이승만을 민권과 자유를 짓밟은 독재자라고 대놓고 깠다.
# 애초에 박정희는 이승만 정부 시절
남로당 관련해서
사형 선고를 받은
원한도 있어서 그랬는지 이승만 정부 시기부터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준비했지만
4.19 혁명이 먼저 일어나는 바람에 연기해서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것이었다.
#
[33]
단적으로 2000년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이승만이
인터넷 밈이 되고 희화화되더라도 이승만 후손들이나 발작했지, 대중의 조직적 비판은 없었다.
[34]
2006년 11월에
4.19 혁명을 학생운동,
5.16 군사정변을 군사혁명으로 표현한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 시안'이 공개되자 파문이 일었고, 동월 30일 서울대 교과서포럼 심포지엄에서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시민사회와 민주화 토대로 해석하는 식으로 발언하자 4.19 관련 단체 회원 50여 명이 해당 발언에 항의하며 단상을 점거해 회의가 중단되기도 했다.
[35]
이 부분도 비판을 하는 학자들에게는, 이미 미군정기 시절부터 시작되어 역사적 흐름을 돌릴 수가 없는 대다수 여론이 반영된 건데 무슨 이승만이 당시 여론을 거스르면서 혼자 혜안을 발휘해서 시작된 것처럼 과대평가를 하느냐고 얘기한다. 심지어 임시정부 때부터도 헌법상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바 있다.
[36]
이승만이 기독교 신자이다 보니, 평소 보수적인 인상이 있는 기독교계와도 얽혀 좀 더 빠른 성역화 과정이 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당연하지만 종교적 성역화가 이뤄지면 이성적인 논리는 잘 먹히지 않는다.
[37]
YS는 말년까지도 독재를 강하게 비판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국민 통합이란 명분 아래 박정희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하자 "인권 탄압으로 냉엄한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의 기념관을 정부 주도로 짓겠다는 김대중은 정신나간 사람이다."라고 비난했으며, 말년인 2009년에도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고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38]
과거
대만을 '자유중국',
남베트남을 '자유월남'이라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39]
참고로 일제의 근대 시기 정체성은 서양 문명권의 민주주의나 개인주의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대일본제국 헌법 참조.
[40]
학계에서도 논쟁은 있는 주제지만, 여러 자료를 근거로 과장이 아니란 반박도 나온다.
영상
[41]
산미증식계획의 수탈론과 별개로 일제강점기 시기 싼값에 토지를 매입한 조선, 일본 지주들에 의해 조선 인구의
소작농의 비율은 80%로 확대되었고 소작료가 50%~70%에 육박했다. 이는 당시 조선이 전형적인
재식농법 경제구조를 지녔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기다 30년대부터 시작된 공출은 사실상 착취였다.
[42]
물론 반론 측에선 이미지와 달리 6.25 전쟁으로 모든 기간이 파괴된 건 아니고 일본 유학생 등 인적 지원도 유무형의 영향이 있었을 거라는 얘기하지만, 이런 부분은 수치화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고 사실 6.25 전쟁으로 당시 농업국가가 될 운명이던 일본도 다시 경제강국으로 부활한 점이 있어서 서로 영향을 받았다는게 좀 더 정확하긴 하다.
[43]
물론 6.25 전쟁 중 다수가 파괴되긴 했다.
[44]
사실 뉴라이트의 근원을 생각하면 딱히 모순되는 행동도 아니다.
[45]
다만
안티내셔널리즘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 이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일제강점기에 대한 수정주의, 민주화 이전 한국의 독재정권에 대한 긍정적 평가 등은
탈민족주의의 주류 담론과는 거리가 멀다.
[46]
마이어스는 이승만, 박정희와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을 구별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인지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의 독재와 친일파 문제에 대해 비판할 수는 있지만 1948년 건국절은 지지하는 입장이다. 또한 국기에 대한 맹세에 있어 민족주의적 색채를 약화시킨 노무현 정부를 칭찬하기도 했다.
[47]
사실 당연하다.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는 일본의 민족주의로 한국을 침략하는 것을 방어하는 모습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민족주의를 혐오한다면 적어도 일본을 먼저 옹호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때문에
아나키스트같은 사상도 일제의 민족주의적 억압을 먼저 벗어나기 위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48]
물론 친일파들을 그것은 일본 그 자체에 우호적인 태도가 아니라, 일제에 협력하기 이전에 어쨌든 조선인이었다는 데 촛점을 맞추어 "비록 한때는 일본에 협력하기 이전에 조선인이였으니, 이제는 새로운 조국에 복무하라"는 입장에 가까웠다.(물론 이 역시 비판의 여지가 없는건 전혀 아니지만.) 당연히 반민특위 해산이 이루어지던 당시에도 이승만 정부가 미군정 하 일본이나 조선 내 일본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가 구한 말 황실 일원들과 대부분의 조선귀족 출신 친일파들은 누구보다 앞서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 밑에서 호의호식했는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방해만 되는 자들일 뿐이라며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고 한반도 입국을 영구 불허시켰다. 또한 이승만 초기 내각 역시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독립운동가 위주로 구성되었고, 친일파들은 살아남는데 성공했어도, 별도의 처벌을 받았거나 고위 관리직에 대부분 오르지 못하는 쪽에 그쳤다.
[49]
같은 독립운동가라도 일본 정계와 사이가 비교적 원만했던
여운형이나 현실적인 이유로 일본과의 관계 회복을 주장한
신익희와 달리 이승만의 반일은 독보적이었다.
[50]
뉴라이트를 포함한 21세기 한국의 보수진영은 북한(과 좀 더 넓게 보면 중국)에 맞서야 하기 때문에 일본에 우호적이어야 하고 뉴라이트를 포함한 극단적 진영의 경우 일본 제국주의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런데 이 논리를 북한에 침략까지 당했던 이승만이 떡하니 부정하고 있는 것.
[51]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윤서인으로
윤서인 독립운동가 비하 논란으로 욕을 먹자 해명이랍시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승만이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살았던 독립운동가"라며 이승만만큼은
노골적으로 감싸고 돌았다.
#
[52]
이 또한 "진정한 독립운동은 김일성의 무장 독립운동 하나밖에 없다", "전적으로 김일성의 무장 독립운동 덕분에 한반도가 독립했다"고 주장하며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린 북한 세력과 너무나 유사하다. 뉴라이트와 종북의 유유상종스런 연계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 셈. 다만 이를 유유상종 취급만 하는건 오판일 수 있는게, 종북 세력은 엄연히 대한민국에서 처벌까지 가능하고 절대다수 국민들에게 비웃음거리로만 취급당하는 철저한 비주류 세력이지만, 뉴라이트는 입밖으로 표출해도 이른바 표현의 자유로 아무 문제가 안되는, 심지어 일부는 정치권과 결탁해 주류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53]
이승만의 행보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을 혐오하는 건 물론이고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통해 전향한 사람들까지 학살하였으며,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매우 혐오하였다. 참고로 뉴라이트는 둘 다 해당한다.
[54]
이승만 내각은 6.25 전쟁 이후 친일파를 많이 기용했다. 그렇기에 이승만이 친일파를 기용한 것은 한국이
군국주의화를 밟게 된 것과도 연장선에 있다.
[55]
1954년 7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부장관이 한일협정을 요구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거세게 반발해서 회담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려 회담이 결렬될 정도였다.
[56]
여기서 이승만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류석춘이다.
[57]
친일파라고 하면, 자기 일신의 영달만을 위하여 매국노 부역행위를 하는 기회주의적 이미지가 강하고 실제로 그런 악질적인 부류도 많았지만, 개화파나 민족계몽운동가 중에서도 일본의 힘을 빌려서 개화를 달성하려 한 친일 성향을 가진 인물들도 있었으며, 친일파도 다양한 유형과 부류가 있었다.
[58]
정확히 말하자면 뉴라이트가 본인들이 추종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따르는 것을 사대주의로 몰아 탄압하기도 했다.
[59]
장면 내각 시절부터 한일국교정상화가 논의되고 있었다.
[60]
이 기준대로라면 일본의 민족주의도 왕과 귀족에 횡포에 저항하는 자유시민이 아닌 군벌귀족들의 공동체에서 나왔다고 비판할 수 있다.
[61]
그러나 한국사에서 중국에 대해 자주적인 모습을 보인 사례들은 무시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혐중조차 아니다.
[62]
일례로 뉴라이트로 분류된
김영호 통일부장관을 보면 인권 문제로 북한을 압박해 자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수차례 해왔으며, “김정은 정권이 타도되고 북한 자유화가 이루어져서 남북한 정치체제가 ‘1체제’가 되었을 때 통일의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된다”고 했다. 또한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흔들림 없이 지속해나간다면 북한도 변화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
#
[63]
올드라이트들이 추종하는 군사정권 시절, 남북의 독재 세력들은 겉으론 싸우는 척 하면서도 내부적으론 편지 등을 보내며 이를 내부 정치에 교묘히 이용하는 유유상종스런 행태를 보였다.
[64]
사실 햇볕정책의 원래 의도를 보면 오히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더 위하는 정책이긴 하다. 말로만 욕하고 결국 아무것도 못해주는 것보단 차라리 구슬려서 밥이라도 주고 대화라도 시도해보는게 북한 하층민들 입장에선 훨 낫기 때문. 이 점은 오히려 뉴라이트와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그 지원이 북한 주민이 아닌 정권으로 흘러가는거 아니냐 혹은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혹은 아예 통일 자체를 반대하거나 왜 내 돈으로 북한 주민들 도와주냐 힘든 나부터 좀 도와줘라 같은 점이 오히려 반발 사항으로 지적된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정부 당시엔 남북정상회담까지 했으면서도 직접적 지원은 하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65]
조선은 농본경제를 중시했고 이는 조선뿐만 아니라 동시기 동서양 국가들의 주된 이념이었다. 애초에 중세, 전근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국가를 19세기 말에 나온 사상으로 평가하려는 게 삼류코미디에 불과할 뿐이다.
[66]
굳이 뉴라이트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경쟁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관점만 가지고 있는데 초기에는 경쟁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건 사실이지만 중반부만 넘어가면 경쟁에서 우위에 선 기업들이 카르텔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한국은 정부가 그런 카르텔이나 담합에 엄격하지 못해서 경쟁을 저해한다.
[67]
사실 박정희 정부는 경쟁에서 도태되어야 할 기업들을
불법적인 방법까지 쓰면서 살려주었으며 전두환 정부는 정치자금을 내지 않은 기업을 반강제로 해체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68]
사실 하이에크까지 아니더라도 밀턴 프리드먼이나 애덤 스미스 또한 국가가 기업을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도 국가가 기업을 위해 기업과 결탁하여 시장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뉴라이트 관점에서는 진정한 근대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들이야말로 좌파인 셈.
[69]
어찌보면 종북주의자들이 북한 김씨정권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 3대 세습 등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맞지 않는 모순을 옹호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김일성을 비판하는 것을 반동으로 모는 것과 비슷한 작태라고 볼 수 있다.
[70]
근데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도 유교 경전을 공부하거나
* 일부 유학자들이 상업 활동을 긍정하는 등 단순하고 일원적으로 판단하기엔 반례들이 너무 많다.
[71]
농본주의 사회와 현재 한국을 1:1로 매칭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72]
농민들에게 땅을 주어 자국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73]
이건
장면 내각 시절 이미 짜여진 계획이긴 했다.
[74]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참가해서 만든 국정 교과서가 무수한 오류 투성이여서 많은 사람들한테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는 소위 뉴라이트 사관을 만든 당시 학자 그룹에 역사학 전공은 전무했고, 특정 집단이나 인물에 긍정적으로만 쓰려는 목적을 가지고 썼기 때문이다.
[75]
문화적 자유주의, 검열 문제 등
[76]
물론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윤근수가 전한 말을 그대로 따라서 안시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 표기했고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도 안시성의 성주는 양만춘이라고 서술되었지만 이들은 모두 후기 사람이며 안시성 전투가 벌어진 지 대략 1200년에서 1400년 후 사람이다. 즉,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77]
성결교 목사 박현명(1900~?)의 아들로, 서울대 문리대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 대학원 교회사를 전공했다. 1967년에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세계교회협의회(WCC) 간사가 된 후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총무로 일하며 1970~80년대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숨은 조역이기도 했다. 이후 참여연대 공동대표,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78]
물론 여긴 민주당 진영에서 활동하다 넘어온 다수의 윤석열 세력과 극우 세력이 결합한 정치적으로 좀 특이한 결합이긴 하다. 때문에 변희재 등 반윤석열 아스팔트 보수 세력 일부와 개혁보수를 표방하던 이준석계 등이 비주류화되었다.
[79]
진보 성향 만평 작가
박건웅의 작품이다. 참고로 만평 말미에서 일본 극우들도 뉴라이트를 조센징이라고 경멸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일본 극우들은 뉴라이트들이 숭배하는 이승만을 역대 한국 대통령 중 제일 증오한다. 오죽하면 한국이 '반일 세뇌교육'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승만의 학살 은폐라고 주장할 정도.
[80]
재미있는 것은 일인독재보단 나은 일당독재 속에서 경제 성장까지 이룬 중공 체제는 잘 비판한다. 심지어 사회적 자유도도 징병이나 두발, 미니스커트 규제 따위 없고 해외 여행도 가능한 등 오늘날 중국이 과거 군사정권 시절보다 자유로움에도. 그들 말대로면 중공도 미국이란 안보 불안이 있으니 이해해줘야 되는 체제가 된다.
[81]
예를 들어
한일 무역 분쟁 당시 아베 신조 내각이 자유무역 원칙에 위배될 뿐더러 명분도 부족한 보복성 제재를 했음에도
낙성대경제연구소 관련자들은 그 원인을
문재인 정부 탓으로 돌리며 징용문제가
강제노동이 아니라고 역사를 왜곡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의
직구 규제 또한 헌법위법 소지는 물론 반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임에도 자유주의자로서 누구보다 반대해야 함에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82]
이들의 주장을 대표적으로 집약한
반일종족주의에는 "한국인의 명예훼손에 대한 기소율이 일본보다 높으므로 한국인은 거짓말을 많이 하는 도덕성이 결여된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구절도 있다.
[83]
다만 현실에선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게, 일단 한국에서 종북주의적 발언은 국보법에 의해 처벌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한 비주류이다. 그러나 종일적 발언은 그런 것이 없으며, 심지어 정치 세력과 결탁해 주류화하려는 시도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국보법 폐지론자들조차 그렇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싶으면 종일주의자들도 같이 처벌해야 공평한 거 아니냐고 할 정도이다.
[84]
이를 두고서 뉴라이트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서방권의 날조라고 주장하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찬양하는
아르메니아인, 종북은
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에서 노골적으로 아제르바이잔 편을 들고
아제르바이잔의 독재자를 찬양하는 아르메니아인 포지션이라고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85]
어떤 사회적 문제도 정치와 결탁하는 순간, 진영 논리가 개입되어 변질되기 쉽다. 때문에 사회 운동은 무소속으로 하는 게 오히려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정부 차원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최초로 신경쓰기 시작한 대통령은 바로 뉴라이트가 빨갱이 취급하는
김대중이었다. 게다가 김대중은
일본 문화 개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일본에 우호적인 모습도 제법 보였으니, 오히려 뉴라이트의 성향대로라면 김대중을 숭배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86]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게, 이전에도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은 분명했다. 다만 건국절 논란이 없던 시절이니 '건국=정부 수립' 정도로 대중들도 큰 인식 없이 두루뭉실하게 넘어간 것이었는데, 이게 건국절 논란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된 것이다. 이승만이 1919년 건국절을 주장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1919년 임시정부에서 시작되어 1948년 정부수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있는 건데 건국절 논란 이전까진 전부 다 포괄하는 정도로 인식되던 문제가 1948년만 강조하기 시작하니 역으로 반발이 나온 것이다.
[87]
김문수의 "일제시대에 우리는 일본 국민이었다." 발언 논란이 왜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근데 이 말도 시각에 따라 틀리는 게, 정확히 따지면 당시 조선인은 일본인들이 가지는 선거권 등이 없는 여러 제약을 받는 2등 시민이었다. 일본도 조선인들을 일본인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동시기 뉴라이트 사관에 동조하는
우파 유튜버들이 이를 옹호하고 나섰다.
[88]
진보+반북 성향 네티즌들은 뉴라이트의 원류가 주사파였다는 것과
건국절 논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단절을 통해 오히려 한국 정부의 완벽한 정통성을 악화시킨다는 것을 들며 '사실 이들이야말로 진짜 북한 공작원이다!'라고 비꼬기도 한다.
[89]
비판 받는 부분 중 하나는 뉴라이트 측에서 우상화라도 하듯이 떠받드는
이승만이 항일독립운동가의 지도자인 만큼 역대 대통령들 중 반일 성향이 가장 심했는데, 정작 그 사실을 간과하고 이 와중에 이승만의 독립운동이 독립운동의 전부인 것처럼 주장하는 모순투성이 모습만 보인다는 점이다.
[90]
정말 몰랐을 수도 있다. 일단 이영훈은 엄연히 경제학 전공이지 역사학 전공이 아니고 그가 하는 말들도 잘 보면 대부분 한국의 보수 우익-반민족주의적인
이글루스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에 떠돌던 거짓된 내용의 게시물들(예: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 지배 국가들에 대해 어떠한 사과나 배상도 하지 않았다.)에서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91]
말이 안 되는 주장인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강경한 반일을 외친 기득권자는 뉴라이트가 '건국 대통령'이라며 그토록
우상화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었다. 반면 뉴라이트가 종북 좌파라고 증오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한일관계 개선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심지어 혐한 성향이 강한
일본어 위키백과에서조차 김대중 문서에 대놓고 "일본인으로부터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를 대폭 상승시켰다.", "한일관계를
김영삼이 파괴했지만 수습은 김대중이 했다."라고 노골적으로 칭찬할 정도이다. 즉, 이들은 자기들이 그토록 떠받는 우상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얼굴에 먹칠을 한 셈이다.
[92]
반전주의가 기득권의 주장이니까 나쁘다는 뜻인데 이 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려면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좋다는 격언을 떠올려보라.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난다면 최소한 수백만에서 수천만의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것이고 미국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1994년 북한 폭격을 검토하다가 끝내 취소하였다.
[93]
안병직 이외에도 뉴라이트 인물 대부분이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부정한다. 그런데 뉴라이트의 주장대로면 그들이 열렬히 존경하는 이승만은 한국 땅도 아닌 독도를 지키려고 해군을 동원해서 4천 명의 일본인 어부들을 강제로 체포해서 그 중 40명을 죽게 한 불법 폭력을 저지른 극악무도한 살인마가 되어버린다. 실제로 일본 극우들이 이승만을 증오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승만 라인이기도 하다. 반일민족주의를 무조건 까려다가 오히려 그들의 세계관이 가진 모순만 드러낸 셈이다. 자세한 내용은
평화선 문서 참조.
[94]
다만 이쪽은 언론이 기사를 자극적으로 뽑은 감이 있는데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이영훈의 정확한 견해는 군과 정부에 의한 직접적인 위안부 징집은 없되 군이 중개업자들에게 모집 위탁을 맡기어 위탁모집 과정 도중에 중개업자들에 의한 취업 사기나 폭행, 납치, 인신매매 등이 일어났고 당시 총독부가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에 들어가게 된 사람은 분명히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시 공창제 같이 군부대 내의 윤락소처럼 운영했으되 모집 경로를 비롯하여 해방 직후의 여러 시대적인 상황에 의해 피해를 입은 것도 분명하므로 이들의 치료와 처우 개선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이미 저서나 대담을 통해 여러 차례 밝혔다. 이영훈은 스승인 안병직과 이에 대해 토론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도 잘 나온다. 다만, 여기서
한일협정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한 개인적인 보상과 복지의 길을 박정희 치하 당시 한국 정부가 사실상 막아 놨기 때문에 보상책임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한국 정부에게 있다는 게 이영훈의 주장이다. 문제가 된 영상은
#1,
#2,
#3 참조. 유튜브 채널이 그 악명 높은
정규재TV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95]
국제법학자. 참고로 제성호는 뉴라이트 소속으로 '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원회' 편찬위원 11명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96]
이 사람은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해서 1심 재판에서 3000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물었고, 항소했는데 또 패소했다.
#
[97]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바 있다.
[98]
1차 인혁당을 가리킨다. 2차 인혁당이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극우 중에서도
지만원 같은 사람을 제외하면 정말 없다시피하다.
[99]
이런 주장의 근거로 드는 것이 '김영춘 남파간첩'설인데 실제로 김영춘은 북파간첩이었다.
# 여기에 제1차 인혁당 사건도 마찬가지로 당시 이 사건에서 대한민국 검찰은 '기소할 가치를 못 느낀다'면서 검사들이 양심에 찔려 사직서까지 냈을 정도로 애초부터 명백한 간첩 조작 사건이었다. 연관되어 있었던 인물들 가운데 우홍선은
6.25 전쟁 때 학도의용군 자원입대자로 무공훈장까지 탄 대한민국 육군 대위 출신이었다. 따라서 안병직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당장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였을 때 선거 기간에 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베 신조가 서울대 교수의 글을 인용해 침략의 정당성에 대해 연설한 적 있었는데 그 '서울대 교수'가 바로 뉴라이트 안병직을 가리킨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야 한국의 보수단체에서 나온 글이니 당연히 인용할 명분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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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뉴라이트를 비롯한 '자칭' 보수 진영은 '친일청산 행위' 및 '친일진상규명' 같은 활동 자체를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며 건국인사들을 폄훼했다'는 등의 주장을 펼친다. 한국은 반민특위에서 '일제 콜라보'를 처벌하고자 조사했던 명단은 7,000명 정도였으며 반민특위가 처벌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국가 운영에 필요했던 공무원, 법조인 같은 실무 부역자들은 물론, 일제 찬양이 강압으로 인한 것인지 자발적인지 애매했던 예술가, 언론인들까지 빼고는 중추원 참의, 조선귀족 같은 조선총독부 공인 친일파나 독립운동가들을 대놓고 탄압한 고문경찰/밀정, 일제에게 거액을 헌납한 자본가, 당시 기준으로도 딱 봐도 자발적이라는 게 훤히 보일 정도로 일제를 찬양한 문인 등이었다. 한 마디로 당시 기준으로도 국가 발전을 위해서 살려둘 가치가 전혀 없었던 악질들만 거르고 걸러낸 것이었다.
[101]
구체적 근거가 없는
뇌피셜일 뿐이며, 시장경쟁에서 밀리는 쪽이 흔히 하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102]
이게 얼마나 한국사에 무지한 발언이냐면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 연산군조차 저리가라 할 정도로, 반인륜적인 패륜아에 가까운 언행을 지속적으로 일삼아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버지인 태종으로부터 도저히 안 되겠다는 평을 받아서 세자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런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만이 애초에 부계로부터 갈라진 세종과 맞먹는 DNA를 가졌다? 엄연한 양녕대군 미화를 넘어서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다. 정작 양녕대군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일 정도로 인성은 좋았던
효령대군의 18대손인
이기붕은 현대사를 좀 먹은 인물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발언이다.
[103]
그런 식이면 한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이 일본인보다 도덕적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아니면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한 것은 일본인들의 도덕적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 된다. 미국의 전설적 외교관인
헨리 키신저는 국제 사회에서는 도덕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힘의 질서만 있다고 말한 바 있다.
[104]
이 발언은 2014년 3월 1일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교학사 교과서 판매 집회에서 나왔다.
[105]
이 발언부터 왜곡인데, 일단
제주 4.3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민간인 대량 희생을 인정한 것이지, 빨치산 세력을 재평가한 적 없다. 기본적인 사실부터 왜곡됐다.
[106]
애초에 한국사를 약간만 알았더라도 기본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전신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으로서,
항일운동과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를 통해,
카이로 회담에서 대한민국 독립에 대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했기에 대한민국 공로자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독립에 대한 반대 또한 실상은
길고 긴 시간 끝에
광복으로 다시 자신들의 땅을 되찾았음에도,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시 갈라져버리려고 하니 단일(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반대했을 뿐이다.
[107]
정작 이승만 집권기를 살아온 박정희 본인부터 1962년에 발표한 책인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이승만을 가리켜 세 번이나 독재자라고 강조했다.
# 아울러 박정희는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와 가진 자리에서 이승만을 가리켜 "그(이승만)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연 없소. 12년이나 해 먹었으면 그만이지 四選(사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라고 강도높게 비판한 바 있다. 출처: 대통령들의 초상/ 이병주 지음/ 서당/ 1991년 9월 1일 출간
#
[108]
모든 독재 체제가 하나로 같을 수는 없다. 당장 차우셰스쿠와 김일성의 독재도 히틀러와 스탈린과 같은 점, 다른 점이 있다. 탈북한 황장엽조차 김일성과 김정일은 다르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라는 점에서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들도 독재자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나온 일종의
정신승리식 표현으로, 국내외 독재자 추종자들이 흔하게 써먹는 이야기이다.
[109]
이영훈 본인이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멸시를 드러낸 것인데, 이영훈의 주장대로라면 "어떠한 명분으로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때 전사한 국가유공자들의 후손에게까지 특권(공무원시험의 우대나 취업의 혜택 등)을 물려주는 것이 허용돼서는 안 될 것"이다.
[110]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
[111]
실제 일선 학교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단지 교과서란 이름을 제목에 붙인 일반 서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112]
뉴라이트 계열 단체다. 묘하게 일본에도
새역모라는 비슷한 류의 역사 수정주의 왜곡 단체가 있다.
[113]
뉴스후 '부활하는 친일'.
[114]
근데 이영훈 본인도 10% 정도는 뺏겼다고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주류 사학계도 토지에 관한 소위 '4할 수탈론'은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토지조사사업 문서 참조. 쌀 수탈론의 배경과 맥락에 관하여는
산미증식계획 문서 참조. 뉴라이트 진영은 조선총독부의 자료를 인용하며 일본 덕분에 토지가 늘어났다고 하는데 원래 있던 농지가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등재된 것일 뿐이다. 결국 자기들의 정치적 논거를 강화시키기 위해 학계에 맡겨야 될 정반합적 흐름조차 무시하고 극단화되어 있는 셈이다.
[115]
그와 별개로 이영훈 등은
화랑세기를 옹호하며 신라를 은근 띄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물론 신라와 일본이 사이가 나빴던 적이 더 많았던 걸 생각해 보면 이것도 모순적인 행동이다.
[116]
사실 제일 비판받아야 할 자국 지도자들은 추앙한다는 점에서 일관성 있는 자국혐오조차 아니다.
[117]
그나마 국보법 해체까지 주장하던 초창기 뉴라이트까진 시장보수와 북한인권운동으로 볼 여지라도 있었다.
[118]
그럼에도 싱은 이 연설로 큰 정치적 위기를 겪지 않은 채 재선에 성공했는데, 당시 인도에서 인터넷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인구의 1/40도 되지 않았을 정도로 인터넷이 덜 대중화되었던 시절이기도 하고, 반대로 만모한 싱이 거물급 정치인이라 논란에도 버텼다고 볼 수도 있다.
[119]
오히려 네루의 것이 기반이 된 인도 경제정책의 기반을 뒤엎은 사람이 만모한 싱이다. 물론
나렌드라 모디 현 인도 총리가 네루 탓을 한 발언에 대해 비난한 적이 있는 것을 보면 네루에 대한 존경심이 있을 가능성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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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그러나 국민당 진영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축소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뉴라이트보다는 일관성이 있다.
[121]
사실 뉴라이트의 정치노선을
짐바브웨에 비유하자면
독재자가 된 독립운동가인
로버트 무가베와
영국의 식민지배를 동시에(...) 찬양하는 셈이다.
[122]
그런데 러시아는 본인 국가들도 네오 나치가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주제에 우크라이나를 탈나치화 시킬 걸 표방하는 등 앞뒤가 안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23]
법과 정의의 나치 부역자 두둔을 친일파 미화론에 대입하면 친일파를 '일제의 강요에 의해 친일 행위를 했던 또 다른 피해자'로 보는 거에 더 가깝다.(...) 한국에서도 극우 인사
조갑제도 '친일파들의 친일 행각도 알고 보면 일제강점기의 시대상 속에서 사실상 강요된 거나 다를 바 없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가 욕을 엄청 먹은 바가 있다.
#
[124]
가령 한국의 민족주의자 '일부'도 같은 한민족 독립운동가나 민중을 탄압한 친일파 청산에 열을 올리면서도 도쿄 전범재판 등을 거쳐 전범으로 분류된 (그러나 한민족에게 직접적 피해를 준 적은 없는) 소위 '조선인 전범'은 일제에 의한 피해자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링크 이를 뉴라이트라고 보긴 어렵다.
[125]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제에 대입하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도 같은 한민족이자 일제에게 조종당해 악행을 저지른 또 다른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격인데, 뉴라이트는 친일반민족행위 자체가 옳다고 옹호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얘기이다. 이런 의견은 차라리 한국이나 타국의 민족주의 세력에 가깝다.
[126]
기본 사상 속에
모순이 무려 2개나 있다.
[127]
정확히는 주사파는 아니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봉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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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2004년에는 "독립을 위해 총살이나 폭탄 사건 등을 주도한
김구 선생은 테러리스트인가?"라고 묻기도 했으며
# 2016년에도 "대한민국은 건국 초기부터, 아니 임시정부 시절부터 우리 내부의 다양한 종교와 이념을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었다."고 말하며 임시정부의 의의를 인정하고 있고,
# 2019년에는
토착왜구라는 용어를 비판하면서도 "우리는 항일의 숭고한 정신을 한시도 잊으면 안 된다. 그 정신은 약육강식의 정글 세상에서, 그것도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의 한반도에 있어서 반드시 가져야 할 생존정신이다.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겠다는 자유인의 당연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고 밝히기도 했다.
#
[129]
다만 이영훈이나 윤서인 등도 일단은 몇몇 독립운동가 존경 드립을 친거 보면, 실상은 자세히 파 볼 필요는 있다.
[130]
이 사람의 딸 중 한 명이 바로 유명 트로트 가수
홍진영이다. 홍진영 언니는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 지지 현장에 있기도 했다. 다만 홍진영 본인은 일단 화합 등을 말하며 정치적 발언은 삼가고 있다.
[131]
참여단체: 뉴라이트싱크넷, 뉴라이트재단, 의료와사회포럼,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자유주의연대. 참고로 이들 중에선 현재는 뉴라이트 성향이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실제 뉴라이트가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는 인물도 있다. 당시 뉴라이트 성향이 아닌데도 단순히 이름만 올린 이들도 일부 존재한다.
[132]
뉴라이트 계열 도서 출판사다. 뉴라이트 세력들이 펴낸 책들은 거의 이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133]
2021년 위안부 할머니 찾아가서도 일본의 사과를 꼭 받아내겠다고 말했지만 취임 후엔 상반된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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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두 번째와 세 번째 링크는 그가 편집인으로 활동하는 '제3의길'의 기사 목록이다.
[135]
그나마 이쪽은 건국절 등 뉴라이트 사관의 영향을 일부 받긴 했어도 일제의 악행까지 미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식근론에 대해서도 '근대화를 강요당한 치욕의 시대'라고 비판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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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2023년 9월 기준, 윤석열 정부 주요 공직에 "한국자유회의" 출신
김영호 통일부장관,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박인환 국무총리 직속 경찰제도발전위원회 위원장,
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위원장,
차기환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정승윤 국민권익위 부위원장, 강규형 국가기록관리위원장, 박주희 대통령직속 지방시대위원,
임헌조 전 대통령실 시민소통비서관, 김근태 한국항공우주산업 사외이사, 김구회 자유총연맹 부총재 등 11명이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