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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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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
영어 57
김종인
독어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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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어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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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 63
민동석
노어 73
양인집
일어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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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대한민국 제24대 보건사회부장관
김종인
金鍾仁 | Kim Chong-in
파일:KJI_SDA.jpg
출생 1940년 7월 11일 ([age(1940-07-11)]세)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現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등록기준지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길 160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본관 울산 김씨[1]
현직 사단법인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
재단법인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 고문
재임기간 제24대 보건사회부장관
1989년 7월 19일 ~ 1990년 3월 19일
노태우 정부 제3대 경제수석비서관
1990년 3월 17일 ~ 1992년 3월 30일
서명
파일:김종인 서명.svg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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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부모 아버지 김재열 (1913 ~ 1944)
어머니 이필기 (1916 ~ 2015)[2]
형제자매 누나 김종은, 김종현
배우자 김미경 (1945년생)
자녀 슬하 1녀[3]
친인척 할아버지 김병로[4]
매형 박봉환
조카 박현정
학력 서울덕수국민학교 ( 전학)
광주서석국민학교[5][6] ( 졸업)
광주서중학교 ( 전학)
중앙중학교[7] ( 졸업)
중앙고등학교 (49회 /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외국어학부 ( 독일어과 / 학사)
뮌스터 대학교 대학원 ( 경제학[8] / 석사 · 박사)[9]
병역 대한민국 육군 제20보병사단 상병 귀휴전역[10][11][12]
( 1960년 2월 15일 ~ 1962년 2월 15일)
종교 개신교 ( 장로회) 천주교 ( 세례명: 알렉산데르)
신체 178cm[13]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의원 선수 5[14]
의원 대수 11, 12, 14[15], 17, 20[16]
약력 서강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교수
제11대 국회의원 (전국구 49번 / 민주정의당)
제12대 국회의원 (전국구 32번 /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직취임준비위원회 준비위원
국민은행 이사장
제24대 보건사회부장관 ( 노태우 정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노태우 정부)
제14대 국회의원 (전국구 11번 / 민주자유당)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석좌교수
제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2번 /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민주정책연구원 이사장
제20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2번 /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개혁공동정부준비위원장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여의도연구원 이사장
살리는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거대책위원장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
개혁신당 공천관리위원장
개혁신당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
}}}}}}}}}

1. 개요2. 생애3. 평가4. 비판 및 논란5. 선거 이력6. 소속 정당7. 저서
7.1.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2012, 2017)7.2.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2020)7.3.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2022)7.4. 독일은 어떻게 1등 국가가 되었나(2023)
8. 여담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kim_jong_in__.jpg
대한민국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정치 디렉터[17]. 전 개혁신당 상임고문이다.

제24대 보건사회부장관과 제11·12·14·17·20대 국회의원(모두 전국구· 비례대표)을 지냈으며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이라는 거대 양당 모두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한 원로 정치인이며[18]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손자다.[19]

2010년대 들어 정치계에서는 보수정당 민주당계 정당 상관 없이 어려운 일이 불어닥치면 거의 해결사 혹은 킹메이커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 어려움이 있을 때 정치인들이 김종인을 찾아 도움을 구하고는 했다. 이른바 "정치권의 고액단타 과외선생".[20] 그가 승리를 이끌어낸 선거만 해도 새누리당 비대위원 시절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제18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 시절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미래통합당/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시절의 2021년 재보궐선거 등이 있다. 특히 2016년 20대 총선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참패하게 된 정당들[21]을 이미지를 변화시키고 승리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그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22]

그가 지나온 정치적 길목마다 중요한 순간과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여의도 포레스트 검프”라는 별명도 있다. 새누리당의 2012년 총선, 대선 승리로부터 시작하여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의 사실상 초대 당대표로서 당을 재건해냈고 그 바탕에서 두 정당은 각각 전국선거 4연승[23], 3연승[24]을 이뤄냈다. 하지만 박근혜, 문재인과는 대통령 당선 이후 의견이 맞지 않아 탈당했고, 이후 정치에 싫증이 생겼는지 나중에 미래통합당 황교안 전 대표가 김종인에게 선대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 했음에도 처음엔 완강히 거부했었다. 이후 김종인의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가 출간되었는데, 회고록에서 김종인은 두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뿐만 아니라 박근혜는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데다 자기 뜻대로 안 이루어지면 화를 내고, 동네 건달식 정치를 한다고 깠고, 문재인은 천하가 자기 것인 줄 알고 방자하게 굴고 겉과 속이 다르며 주변 인간관계가 복잡한 사람이라고 깠다. 아무래도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듯. 이 때문에 "내가 박 정권, 문 정권을 창출해 낸 바람에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줘 두 번 사과해야 한다"고 자조적인 셀프디스까지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경우도 결국 앞서 박근혜, 문재인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20대 대선 당시 윤석열에 대해서는 김종인 "후보는 연기만 좀 해달라" 발언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아예 대선 기간 내내 갈등의 골이 깊어졌으며, 이후 국민의힘 선대위 집단 사퇴 및 해산 사건이 일어나 둘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갔다. 결국,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실패하면 또 사과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자조섞인 발언을 했다. #

미국 독일의 주요 정치, 경제계 인사들과 인연은 물론, 친척들 역시 한국 경제계의 이곳저곳에서 활약 중이다. 미국의 공화당, 과거 서독 측 인사들과 연줄을 유지하고 있다. 레이건 때 국무장관 조지 P. 슐츠와 가깝다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 당시 연줄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던 한국 정계로서는 김종인의 역할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있었다.[25]

2. 생애

1940년 7월 11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서 태어났다. 김종인의 조부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이다. 또한 김종인의 아버지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김재열인데, 그는 김종인의 소년기에 요절하였다. 큰어머니 고귀현을 통해 동아일보 가문과 연결된다.

1950년 열린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을 찾아다녔을 정도로, 유년기부터 선거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26][27] 광주서중학교 재학 중 상경하여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49회, 1959년 졸업)을 거쳐 한국외국어대학 외국어학부 독어과에 입학했다. 1960년 2월 15일 육군에 입대하여 1962년 2월 15일 상병으로 귀휴전역하였고, 1963년 대학을 졸업했다.

그해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통합[28]을 주도하던 조부 김병로의 비서 역할로 정계와 연을 맺는다. 1964년에 조부 김병로가 사망한 뒤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 대학교에서 유학하여 이곳에서 1969년 경제학 석사 학위를, 1972년에는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세부전공분야는 재정학(공공경제학)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과 달리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한 독일에서 공부한 덕에 독일식 경제민주화에 대해 긍정적인 편이다.
파일:김종인 젊은시절.jpg
젊은 시절의 김종인

1973년 3월에 귀국, 불과 32세의 나이로 서강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조교수에 부임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강대학교 학부생 시절에 김종인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고 한다.[29] 이 때문에 서강학파로 분류되나 선성장 후분배, 재벌 육성을 중심으로 한 압축 성장을 주장해온 남덕우 등의 서강학파 선배들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2세대로 구분된다.( 관련기사) 유신 때부터 박정희 정부에서 정책자문역할로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해, 김재익과 함께 서독 부가가치세를 배우러 출장을 다녀와 연구보고서를 올렸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5세 때 김재익의 중매로 김미경(金美經) 교수[30]와 결혼했다. 서로 말이 잘 통했다고 한다. 장인은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이고, 처삼촌이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부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이다. 사촌 처남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 건설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이진설,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윤영철, 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택돈이 있다. 관련기사

1977년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신현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남재희 노동부장관 역시 김종인이 제안한 게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훗날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등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스스로 경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했으며, 이는 장기간 산업화를 추진하며 겪은 시행착오로 체득한 것이라 평했다.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자리에서 “이러고저러고 말이 많지만 그분이 오늘날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만큼은 누구도 부인을 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관련기사 김종인은 물론 그가 주장한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보수주의 경제이론이다.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전두환, 노태우 민주정의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31] 그 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7년 제6공화국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직접 작성해 관철시켰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 관악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평화민주당 이해찬 후보에게 패해 낙선[32]했다. 1989년 1월부터 1989년 7월까지 국민은행 이사장, 1989년 7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 1990년 3월부터 1992년 3월까지 2년간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했다. 경제수석으로서 기업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을 진두 지휘하는 한편, 재벌의 폭주를 견제하는 등 균형 잡힌 경제적 성과를 이뤄내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1993년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후 기소되어,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으로 유죄판결이 확정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당시 김종인을 구속기소한 주임검사가 후일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한 대검 중수부 함승희 검사였다. # #[33] 이 사건은 김종인의 정치인생에 있어 유일한 아킬레스건이다.[34] 현재도 김종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사건을 가지고 공격한다.[35]

그 후 대한발전전략연구원을 창립하고[36]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오랜 기간 동안 야인으로 있다가[37]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되어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38]

이후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김종인은 경제 정책에서 우클릭만 거듭한 채 끝난 참여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는데, '좌파신자유주의? 말장난하냐. 신자유주의는 실패한다. 노무현 정부가 무슨 좌파 정부냐? 기업한테 정부 기능을 기대하지 말라'고 인터뷰한 후 딱 두 달 만에 세계금융위기가 터졌다. 2008년에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다시 한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2011년 12월 중도 확장을 노리던 한나라당-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회에 영입돼 경제민주화 공약 설계를 맡기도 했다. 이준석은 한때 박근혜 정부 정도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이회창, 이한구 등으로부터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는 좌클릭,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당내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지만[39], 새누리당은 과반 152석을 차지하면서 총선에서 압승했다. #

그리고 2012년 9월부터는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경제민주화 의제와 공약은 2012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도움을 주었지만 # 박근혜가 집권하자마자 팽당하고 경제민주화 공약은 바로 폐기됐다. 이용만 당했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2014년 12월에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야인으로 지냈다. 대권 주자 안철수의 경제 멘토로 활동했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2016년 1월 자신은 그런 적이 없으며 언론에서 지어낸 얘기라고 확인했다. 2016년 1월 20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곧 비상대책위원회 대표[40]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추대돼 2월부터 더불어민주당의 수장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9년간 패배만 거듭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고,[41]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2015년 11월 말 문안박 연대를 거부하고 혁신 전당대회를 역제안해 내홍에 빠졌다. 결국은 국민의당으로 안철수 이하 소속의원 21명이 나갔다. 문재인 대표는 '친노패권주의' 때문에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었다. 그러나 김종인이 들어오자마자 사실상 탈당의 흐름은 끝이 났다. 당내 중도적 인사로 영향력이 컸던 박영선의 탈당을 막은게 결정적이었다.

비대위 초기에는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 박경미 홍익대 교수,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 등의 인재들을 영입하면서 어수선했던 당을 잘 정비하는 듯 했으며, '친노패권주의'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비대위, 선대위를 모두 거머쥐고 절대적인 공천권을 휘둘러 문제를 일으켰다. 이후 선거 공천 과정에서 특정계파의 의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공천 컷오프나 민주당이 우세한 지역에 측근을 공천했다가 경선에서 패배하는 등 문제점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해찬 정청래를 직권으로 공천 탈락시켰다. 친노의 손발을 자르고 자신은 비례 대표 2번에 공천하는 모습으로 큰 반발을 불렀다. 셀프 공천, 칸막이 공천으로 큰 욕을 먹었다. 선거 일주일을 남기고 각 당이나 언론은 새누리당의 과반 내지 180석,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의 역대급 참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이 100석만 가져와도 선전한 것이라 생각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

그러나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123석을 차지하며 원내 1당이 되는 깜짝 승리를 거두었다. # # 특히 수도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호남은 국민의당에게 의석 대부분을 내줬다. 대신 더불어민주당은 호남당이란 이미지를 벗고 전국 정당으로서 이미지를 얻었으며 부산, 경남에 발판을 마련한다. 2016년 5월 24일에는 대우조선해양 노조위원장을 만나 “대형 국영기업이나 대우조선해양처럼 1만 명 이상 고용하는 업체는 노동자가 경영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종국에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42]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

총선 후 그는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제기하면서, 추호선생[43], 전권노인네[44] 등의 별칭을 얻는 등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과 친문 성향 지지층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대표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데다가 반기문 추대설, 안희정 충남지사 탈당 권유설 등이 퍼지면서 급속히 당내에서 힘을 잃는다.( 김종인/2016년 참조) 2016년 8월 27일 새로 선출된 추미애 전 대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직에서 퇴임하였다. 이후, 페이스북 계정을 신설했다고 한다. 요즘 정치권의 SNS 대세에 본인도 동참하기로 한 듯하다.

2017년 3월 27일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했고, 2017년 4월 5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대선 목적은 내각제 개헌과 자신의 정치 활동의 최종 목표인 경제민주화임을 밝혔다. # 그러나 일주일 뒤인 12일. 국민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출마를 선언하게 되었다. 2017년 4월 30일, 대선 레이스의 종반부에서 갑작스럽게 김종인은 내각구성권을 약속받고, 안철수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다. 이후 국민의당 개혁공동정부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대선 후보중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 후보를 모아 '반문재인 연대'를 구성하려는 모습으로 보였지만 3명 다 서로와의 연대를 거부했고 대선 결과는 문재인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이 2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대세에 변화를 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대선이 끝난 뒤에는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것도 박주선이 선출되면서 소문으로 끝났다. 경제민주화라는 만화 출판 행사 때 안철수가 방문하여 김종인을 만난 것을 볼 때, 국민의당과의 끈은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2020년 3월, 미래통합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감과, 본인이 문재인 정부 탄생의 기틀을 마련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크다고 한다. # 그러나 이미 공천이 완료된 뒤 선거일을 고작 2주 앞두고 영입된지라 민주당으로 기운 대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은 개표 결과 103석으로 개헌저지선을 겨우 넘기며 역대급 참패를 하고 말았다. 다만 선거 2주 전에서야 겨우 합류하여 선거전략가로서의 면모보다는 선거운동원으로서의 역할이 더 컸다는 점에서, 김종인의 책임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45]

총선 후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일갈하며 1970년대생 가운데 경제 전문가가 보수의 대권주자로 나서야 한다고 하며 40대 기수론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밖에도 계속 파격적인 이슈를 꺼내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진보 의제로 꼽히는 기본소득제를 꺼내들었고 박근혜 탄핵. 구속 및 이명박 구속에 대한 대국민 사과 검토와 호남 구애, 장외투쟁 자제 등 이전의 자유한국당이나 김종인 체제 이전의 미래통합당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를 높이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리얼미터의 지지율 집계에서 박근혜 탄핵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종인 체제의 중도 구애 및 좌클릭, 강경투쟁 노선 배격이 성과를 보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2020년 9월 2일, 김종인 비대위는 미래통합당의 당명을 국민의힘으로 변경했다. 2021년 재보궐선거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국민의힘 후보군이 빈약한 상황이었지만, 김종인은 단일화를 하더라도 국민의힘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오세훈이 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고, 우여곡절 끝에 22년 대선에서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한 윤석열이 당선됨으로써 김종인은 그가 재건한 정당은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는 공식을 또 한번 증명해냈다.[46]

2.1. 정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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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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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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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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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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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2022년

1월 초, 윤석열 후보가 계속적으로 지지율을 떨어트리는 발언을 하면서 2030세대에서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면서 이재명 후보와 지지율 격차가 13.1%p까지 뒤쳐진 여론조사가 나온다. KBS-한국리서치 1월1차 여론조사

그제서야 위기감을 느낀 국민의힘 측과 윤석열은 킹메이커 김종인에게 전권을 주는 조치를 하고 이에 김종인은 선대위 해체 후 재구성이라는 극단처방을 내린다. 바로 이대남의 실망을 준 영입인 신지예와 새시대 위원회와 김한길 위원장을 쳐내고 친윤들마저 전부 내친 뒤 윤석열 후보의 대선까지 비서실장을 자처하며 윤석열 후보의 재정비를 위해 일정을 전부 중단시킨다.[47] 그러나 이 처방이 윤석열 후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속전속결로 이뤄진 것, 김종인만 남은 것에 대해 윤 후보는 매우 불쾌해하며 "이건 나에 대한 쿠데타"라며 조수진을 옹호하던 때와 다르게 화를 내었고 김종인을 되려 배제하겠다는 인터뷰를 하고 하룻동안 장고에 들어간다.

5일 오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 해촉 예정이 발표되었다. 김종인의 윤석열 선대위 전면 쇄신 조치에 대한 윤석열의 조치인 듯. 5일 오전 김종인은 선대위원장 해촉 소식에 내 발로 나가겠다며 인터뷰 함으로써 사실상 김종인은 윤석열 캠프와 결별수순을 밟았다. 결국 이번 대선은 윤석열 주도로 운영하게 되었다. 한편, 이준석 대표의 경우 윤석열 및 친윤 의원들과 갈등을 빚은 점에서 김종인과 공통점을 공유하는데, 김종인이 주도한 선대위 개편안이 이준석과 논의된 것이기도 하고 김종인이 선대위원장에서 해촉되었듯이 이준석 또한 당대표 사퇴 압박을 받았으나 이후 윤석열과 극적으로 화해했다.

사실상 윤석열에게 ‘경질’당한 뒤 1월 5일에 그 동안의 일을 설명하면서 “그 정도 정치적 판단 능력이면 더 이상 나하고 뜻을 같이할 수가 없다”고 윤 후보를 작심하고 비판했다. 그는 격한 어조로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윤석열 당선’을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이 나뿐이었다”며 “내가 무슨 목적으로 쿠데타를 하겠느냐”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중 윤석열을 윤씨라고 지칭하다가 곧바로 '윤 후보'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 부진인 반면 윤석열은 이준석과 갈등 봉합 이후 청년층을 공략하며 이재명의 지지율을 뛰어넘거나 0.1%까지 따라잡는 조사가 나오며 위험해지자 더불어민주당 측에서 김종인에게 러브콜을 하고 있다. 1월 26일 즈음에 김종인은 이재명 후보가 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만날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었고 1월 31일 김종인 측은 이야기는 안 했으나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송영길은 김종인과 만나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김종인도 이재명 후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며 인터뷰했다.

2월 6일 김종인의 사무실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과 만남을 가졌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 김종인은 회동과 관련해 "사람 한번 만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관심이 많으냐"며 "특별한 얘기 한 것도 아닌데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재명 캠프 합류설에 선을 그은 것으로 해석된다. # 2월 10일 저서 '대통령은 왜 실패하는가'의 출판기념 청년 포럼 중 "어차피 양당 후보 가운데 한 명이 당선될 텐데 누가 되더라도 나라의 앞날이 암울하다"며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모두를 비판했다. 김종인은 "한쪽 후보가 당선되면 문재인 정부보다 더욱 폭주할 것이 명백하다"고도 했다. #

이후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었다. 결과적으로 윤석열 캠프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김종인의 선대위 해체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윤석열이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필수조건이었다.[48] 이준석의 재합류를 기점으로 이재명 후보에게 크게 밀리던 지지율이 급반등하기 시작했다. 불과 2주가 안 되어서 윤석열의 지지율이 이재명의 지지율을 역전하였다.[49] 김종인은 예상치 못했겠지만, 결과적으로 대선 승리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50] 결국, 퇴출된 모양새가 되었지만, 지지율 저하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던 '윤핵관'과의 갈등은 소멸되었다.

윤석열의 당선에 어느정도 일조를 한 것은 분명하다.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이재명 후보에게 큰 폭으로 뒤쳐지던 와중 김종인의 독단적인 선대위 해체가 지지율 상승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윤석열 지지율 하락의 주범인, 이준석을 비롯한 지도부와 윤석열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은 김종인의 선대위 해체를 기점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내부 갈등 소멸을 두고 김종인이 총대 매고 윤석열 계열 인사를 정리한 것이 원인이라는 시각과, 김종인과는 별개로 윤석열이 이준석과 화해하며 내부 갈등을 수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 원인이라는 시각이 갈린다.

이후 김종인은 이준석계 인사들과 함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배제되었다. 몇달 전까지 자신이 중심축으로서 활동했던 선대위의 또다른 뼈대인 김한길, 김병준이 임명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윤석열의 최측근이자 대선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충돌해왔던 장제원 등의 친윤에 의해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국민의힘 당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윤석열이 당선된 이상 친윤에게 계속해서 견제받을 가능성이 높다.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 윤석열 당선인에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짤막한 전화가 왔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스스로도 대선 이후로 중앙정치와 거리를 두면서 특별히 견제받을 일도 없다고 말하였고, 정치 평론 관련 방송에만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 국민의힘은 뿌리가 대통령만 바라보는 집단"
지선 이후 국민의힘 내부에서 당권투쟁이 발발하자 친윤과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이준석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하면서 개혁을 지지하였다. 6월 말에는 윤핵관의 대표 격인 장제원 의원이 주최하는 '대한민국 미래혁신포럼'에 참석해 강연하는 시간을 가지며 친윤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으나, 본인은 그냥 가서 한마디 했을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강연 내용도 국민의힘은 뿌리가 대통령만 쳐다보는 집단 발언을 하는 등 당과 정권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 이 자리에서 장제원, 권성동, 정진석 등의 윤핵관들은 김종인을 정권교체의 1등 공신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 #

7월 들어서 정부와 당 지지율이 하락하자 쓴소리의 강도가 그에 반비례해서 높아지는 중이다. 지지율 하락에 대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우려하거나 도어스테핑을 두고 "그게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논평하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51]

화제가 되고 있는 이준석 대표 징계건에 대해서는 이번 사태로 당이 치명상을 입었다면서 지지율이 상당히 많이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실제로 윤석열의 지지율이 24%까지 하락했다. 이준석에게도 지난 일은 잊어버리는게 좋다고 조언했는데, 당초 법적대응을 준비하던 이준석이 그 말을 따르더니 알아서 주가가 올라가면서 지지자들 사이에서 김종인의 안목이 재평가 되고 있다.
그는 “나는 그 당(국민의힘)의 본질을 잘 안다. 내가 더 있기 싫은 정당”이라며 “지난해 4·7 재보궐선거 이후 당을 나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슨 놈의 집권당이 이러냐"고도 말했다.
국민의힘이 대통령의 뒷담화 사건으로 뿌리채 흔들리자 강하게 비판했다. # 당이 비대위 체제로 돌입할 무렵 당 실세인 장제원, 정진석과 회동을 가졌다는 소식이 있어서 또 김종인 스카우트설이 돌았으나, 이후로 아무 언급도 없으면서 그냥 만나자고 하길래 만나주는 걸로 끝났다. 비대위 만들어서 뭘 하겠냐는 언급도 있어서 제안이 왔어도 거절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2.1.6. 2023년

3지대로 나와 신당 창당을 추진하는 금태섭을 뒤에서 지원하고 있다. 탈당과 신당 창당을 추진하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김종인을 찾아오자 금태섭과 연결시켜 주며 3지대를 적극 푸쉬하는 행보를 보였다.

국민의힘에서 강서 재보궐선거 참패 후 통합을 외치며 출범한 인요한 혁신위원회가 여러 여권 인사들을 회유하려는 가운데, 2023년 11월 7일 오후에 인요한 위원장과 회담을 나눴다. 회담 이후 인요한 위원장이 "김 전 위원장이 '당신 의사 아니냐'며 '처방은 참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와 "환자가 약을 안 먹으면 어떻게 할거냐. 환자가 약을 먹어야 하고 실제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며 민생을 비롯한 여러가지 조언을 받았다며 밝혔다. #

이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은 김종인에게 "그 환자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냐?"며 윤석열 대통령을 저격한 것 아니냐는 의도의 질문이었지만 김종인은 "내가 환자라고 한 것은 국민의힘이다."라며 선을 그었다. 환자라고 지칭한 이유에 대해서도 "강서구 보궐선거에서 참패 이후 이를 반성 하겠다고 혁신위를 출범시켜놓고 혁신위가 내놓은 안에 대해서 친윤계 의원들이 반응을 했냐"며 최근 인요한 혁신위가 친윤계들을 향해 험지출마를 요구했으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 김기현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친윤계들을 비판했다. #

11월 30일,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가 이재명과 친명계를 연일 비판하며 신당 창당설을 부인하지 않은 가운데 김종인과 독대했다는 사실이 발표되면서 다시 한번 눈길을 끌고 있다.

2.1.7. 2024년

1월 2일, YTN 뉴스와이드에 출연하여 " 이준석 전 대표를 품지 않는 것도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 부진의 큰 이유이다"라 밝혔다. #

그렇게도 엮어주려 했던 이준석과 금태섭이 3지대 통합으로 마침내 함께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개혁신당 영입설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개혁신당에서 김종인 영입을 진지하게 논의하면서 이낙연, 그리고 금태섭, 이준석과 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일단 본인은 이낙연과 이준석 합당은 생리적으로 맞지 않다면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이낙연이 합당 열흘 만에 이탈하면서 영입설은 끊이지 않고 있다.

2월 13일, 개혁신당의 공천관리위원장에는 전혀 관심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2월 23일, 개혁신당의 공천관리위원장직을 수락했다. 본인도 가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개혁신당의 지지율도 답보 상태라 잘못하면 마지막[52] 정치 커리어에 흠집을 낼 수도 있지만, 수락한 이유에 대해서는 대체로 김종인 본인이 금태섭과 이준석에게 제3지대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만큼 본인도 현재 개혁신당의 어려움에 대한 책임감과 안타까움이 영향을 끼쳤으리라 보고 있다. 본인도 안타까워서 도와줬다고 밝혔다.

3월 22일 공천관리위원장에서 물러났고, # 이후 상임고문을 맡았다. 개혁신당에서 노려볼 만한 자리가 비례 상위권이 전부라 비례순번을 두고 큰 분란이 일어날 뻔했는데, 김종인이 전권을 위임받아 직접 작성한 리스트라 불만이 직접적인 내홍으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3월 28일에는 이준석 대표를 두고 "2006년 보궐선거(서울 성북을) 때 (구 민주당) 조순형 씨를 공천해서 내가 선대위원장을 했다. 당시 등록한 날 여론조사에선 조순형 씨가 12%로 꼴찌였다. 그 12%를 가지고 2주 만에 승리를 가져온 적이 있다. 조순형 씨가 48대 12도 뒤집어 당선된 적이 있는데 지금 격차는 20% 정도밖에 안 된다"라며 정치적 제자인 이준석 대표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는데 # 정말로 이준석이 3자 구도 가운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당선되어 아직 정치 감각이 여전하단 걸 과시했다.

4월 10일, 2번 천하람을 공천한 게 대성공을 거둬 이준석과 천하람 모두 국회의원 당선이 됐다. 또한 여담으로 지금은 다른 당이지만 김종인 키즈라고 할 수 있는 김재섭이 도봉갑에서 깜짝 당선되면서 젊은 인재를 보는 안목도 뛰어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마자 상임고문직에서 사퇴했다. 원래는 개혁신당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는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심정으로 이준석을 도와주기 위해서 참여했다는 것과 개혁신당이 새로운미래와 합당하면서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 치명적이라고 평가했다.[53]

그리고 22대 총선에서 참패한 현 여당 국민의힘에 대해서도 평가했는데, 현재 국민의힘은 자유한국당 시절[54]로 돌아간 것과 같기 때문에 총선에서 참패당한 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

개혁신당 제1차 전당대회에서 허은아의 후원회장을 맡았는데, 허은아가 이기인을 꺾고 당선됨에 따라 또 맞혔다는 반응이 나왔다.

8월 22일 넘어졌다가 이마가 깨졌는데, 2024년 의료 대란으로 의사가 없어서 무려 22곳의 응급실에서 퇴짜를 맞는 소위 '응급실 뺑뺑이'를 했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유력 인사인 김종인마저 이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으며,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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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판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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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191919><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3764><rowbgcolor=#00376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 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5,776,624 (35.6%) 당선 (49번) 초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7,040,477 (35.2%) 당선 (32번) 재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34,752 (27.12%) 낙선 (2위) [55]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7,923,718 (38.5%) 당선 (11번) 3선[56]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510,178 (7.1%) 당선 (2번) 4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6,069,744 (25.5%) 5선[57]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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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7대 비례 민주당.jpg
13대 총선 ( 서울 관악구 을) 17대 총선 (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2번) }}}}}}}}}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민정당|
파일:민정당 글자.svg
]]
1963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63 탈당


[[국민의당(1963년)|]]
1963 - 1964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64 - 1973 탈당


[[민주공화당|
파일:139.png
]]
1973 - 1980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80 - 1981 정당 해산


1981 - 1988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88 - 1992 탈당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2 - 1993 입당[60]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3 - 2004 탈당[61]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4 - 2005 입당
정계 복귀


[[민주당(2005년)|
파일:민주당(2005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5 - 2007 당명 변경


2007 합당[62]


[[민주당(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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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 2008 당명 변경


[[통합민주당(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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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합당[63]


[[민주당(2008년)|
파일: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8 - 2011 탈당


2011 - 2012 입당[64]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3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3 - 2016 탈당

2016 - 2017 입당[65]


[[무소속(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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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탈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7 무소속 합류[66]


[[무소속(정치)|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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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2020 선대위 해산


[[미래통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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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입당[67]


2020 - 2021 당명 변경


[[무소속(정치)|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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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탈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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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2022 무소속 합류[68]


[[무소속(정치)|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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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2024 선대위 해산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24 무소속 합류[69]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24 - 현재 선대위 해산

7. 저서

7.1.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2012, 2017)

파일: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jpg
파일:결국 다시 경제민주화다.jpg
▲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2012년) ▲ 『결국 다시 경제민주화다』 (2017년)

2012년에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라는 책을 썼고 2017년에 이를 다시 수정, 재출간하여 『결국 다시 경제민주화다』가 나왔다. 경제에 관한 책인데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쉬운 편이다. 저자가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재정학을 전공한 경제학박사이고 경제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한 경험도 있으나 정치인 활동이 길어서 그런지 경제학 학술서 같은 느낌은 아니다. 특히, 이 책에는 의료 보험, 재형 저축, 부가가치세 등의 도입 과정과 저자가 평생을 걸쳐 세 번이나 시도한 노사 관계 재정립을 위한 노동법 개정 등의 얘기가 담겨져 있다.

이 책을 통하여 저자의 경제민주화는 독일식 사회자유주의인 '질서자유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거대 경제 세력에 대한 정치의 견제 기능을 강조하는데 이는 시장가격기구를 신뢰하면서도 공정한 시장을 지키기 위해 국가 질서의 원칙을 강조하는 질서자유주의와 유사하다.

7.2.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2020)

파일:영원한 권력은 없다.jpg
▲ 『영원한 권력은 없다』 (2020년)
2020년에는 회고록을 집필했다. 박정희 정부에서부터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에서의 경험과 평가를 담고 있다. 주로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적인 내용이다. 특히 노태우 정부 시절의 이야기가 풍부히 담겨있으며, 상술하다시피 본인의 손을 거친 두 대통령, 박근혜 문재인을 비판한 대목이 주목받기도 했다.

7.3.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2022)

파일: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jpg
▲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 (2022년)
킹메이커 김종인의 저서. 2022년 대선 기간에 출판된 도서이며, 당시의 역대 대통령들인 이승만~ 문재인의 빛과 그림자를 살핀다. 김종인이 대통령제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비판하지 않은 대통령이 없다.

7.4. 독일은 어떻게 1등 국가가 되었나(2023)

파일:독일은 어떻게 1등 국가가 되었나.jpg
2023년 8월에 출간한 저서. 독일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독일의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져왔고, 극단의 대립만 계속하는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가 독일 모델을 참고하여 변화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어떻게 독일 제2차 세계 대전 전범국에서 세계적인 모범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를 조망한다. 무엇보다 대화와 타협, 합의가 제도화되어있는 독일 정치 제도와 문화를 소개하며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언한다. 다만, 2024년인 현시점에서 독일은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어졌다.

8. 여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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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평가
비판과 논란 비판 및 논란 ( "후보는 연기만 좀 해달라" 발언 논란)
가족 할아버지 김병로 · 아버지 김재열 · 매형 박봉환
관련 단체 새누리당 · 더불어민주당 · 미래통합당 · 국민의힘 · 개혁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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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0A84E9> 나웅배 조순 이승윤 최각규
국토통일원장관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이홍구 홍성철 최호중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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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부장관 이상희 이춘구 이한동 김태호 안응모 이상연 이동호 백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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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61석
이재형 나길조 김종경 이용훈
김기철 ~~~~ 송지영 ~~~~ 정희택 박동진
정원민 김정호 윤석순 김종호
최상업 황병준 류근환 김용수
박태준 박경석 ---- 이우재 이춘구
김현자 ~~~~ 정순덕 배성동 김사용
이건호 신상초 ---- 오제도 김윤환
정희채 김춘수 박현태 이양우
박종관 고귀남 ~~~~ 나웅배 김집
지갑종 허청일 이상선 손춘호
정시채 안교덕 최낙철 김모임
~~~~ 이헌기 이윤자 이민섭 이영희
김종인 박원탁 이상희 이영일
이경숙 조남조 ~~~~ 김행자 이낙훈
김영구 황설 하순봉 곽정현
전병우 정창화 문용주 김유상
장경우 유수환 김지호 ~~~~ 이성재
강창희 이성배
민주한국당
24석
~~~~ 유옥우 이태구 김문석 황산성
양재권 정규헌 손태곤 신재휴
이정빈 김진기 이중희 연제원
최수환 서종렬 손정혁 김노식
이의영 조주형 강원채 이윤기
윤기대 이홍배 김형래 김덕규
이용곤
한국국민당
7석
김영광 이필우 노차태 조정구
김한선 김유복 강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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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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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식 황인성 ---- 박동진 이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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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자 배성동 현홍주 이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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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순 홍종욱 정창화 김종인
김영구 최병렬 강용식 송용식
지연태 임두빈 정현경 진치범
최영덕 임영득 김집 지갑종
최명헌 ~~~~ 이종률 조경목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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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희갑 ~~~~ 김양배 정휘동 김장숙
---- 박혜경 이철우 안영화 최상진
이성호 이진 정호근 김중위
박성태 김정균 김태수 홍희표
김문기 정동윤 심국무 김종열
신한민주당
17석
신달수 임춘원 고한준 김형경
정재문 한석봉 윤영탁 신병렬
박종률 조영수 김병수 김동욱
이길범 김용오 장충준 최훈
신경설
민주한국당
9석
이태구 박해충 신재휴 손태곤
정상구 최운지 신동준 황대봉
송현섭
한국국민당
5석
---- 김종철 정시봉 문병하 김규원
최재구 조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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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33석
김영삼 박태준 김재광 노재봉
권익현 이만섭 정석모 안무혁
이원조 최병렬 김종인 김광수
박재홍 강선영 정시채 최운지
강용식 김영수 김영진 강신옥
서상목 윤태균 박구일 곽영달
이명박 이환의 강인섭 김동근
최상용 주양자 이현수 노인도
구천서 조용직 구창림 박근호
유성환 이재명 정옥순 김찬두
김사성 이연석 이민헌 이수담
배길랑 김정숙 김현배 박승웅
진경탁 허세욱
민주당
22석
김대중 <colbgcolor=#009d68> 이기택 <colbgcolor=#009d68> 강창성 <colbgcolor=#009A44> 장재식
이우정 나병선 신진욱 김옥천
장준익 이동근 국종남 김충현
강희찬 박정훈 박일 김옥두
박은태 장기욱 김말룡 양문희
박지원 이장희 남궁진 배기선
최병욱 장정곤 김유진 서호석
장광근 박명서 한원석 김용덕
정양숙 고홍길
통일국민당
7석
문창모 양순직 정주영 조윤형
최영한 이건영 정장현 강부자
이용준
15대
}}}
}}}}}}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비례대표 제17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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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23석
장향숙 <colbgcolor=#419639> 홍창선 <colbgcolor=#419639> 김명자 <colbgcolor=#606060> 김혁규
이경숙 박찬석 홍미영 조성태
박영선 정의용 김현미 박명광
김영주 조성래 강혜숙 정덕구
이은영 민병두 윤원호 박홍수
유승희 장복심 김재홍 서혜석
신명 김영대
한나라당
21석
김애실 박세일 박찬숙 윤건영
송영선 황진하 전여옥 정화원
이계경 박재완 나경원 이주호
김영숙 유승민 고경화 이군현
진수희 배일도 안명옥 서상기
박순자 이성구 문희
민주노동당
8석
심상정 단병호 이영순 천영세
최순영 강기갑 현애자 노회찬
새천년민주당
4석
손봉숙 김종인 이승희 김홍일
김송자
18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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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svg 비례대표 제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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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17석
송희경 <colbgcolor=#ef426f> 이종명 <colbgcolor=#ef426f> 임이자 <colbgcolor=#ef426f> 문진국
최연혜 김규환 신보라 김성태
전희경 김종석 김승희 유민봉
윤종필 조훈현 김순례 강효상
김현아
국민의당
13석
신용현 오세정 박주현 이상돈
박선숙 채이배 김수민 이태규
김삼화 김중로 장정숙 이동섭
최도자 임재훈
더불어민주당
13석
박경미 김종인 송옥주 최운열
이재정 김현권 문미옥 이철희
제윤경 김성수 권미혁 이용득
정춘숙 심기준 이수혁 정은혜
허윤정
정의당
4석
이정미 김종대 추혜선 윤소하
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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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봉두완 이세기 권영우 김정례
홍성우 윤길중 남재희 최명헌 이찬혁
조종호 임철순 이태섭 정남 왕상은
곽정출 구용현 김진재 이흥수 장성만
김숙현 이병직 오세응 홍우준 윤국노
신능순 김영선 정동성 이자헌 이용호
이한동 홍종욱 김용대 김정남 이범준
정재철 심명보 정종택 이해원 박유재
안갑준 남재두 이재환 정선호 천영성
정석모 이상익 최창규 김현욱 임방현
고판남 문병량 황인성 양창식 진의종
조상래 박윤종 최영철 김재호 유경현
나석호 이대순 김식 조기상 한병채
김용태 이치호 이진우 박권흠 정휘동
권정달 박재홍 오한구 김종기 김중권
염길정 채문식 조정제 고원준 안병규
배명국 이효익 유상호 신상식 이재우
박익주 권익현 현경대 이재형 나길조
이용훈 김기철 박동진 정원민 김정호
윤석순 김종호 최상업 황병준 류근환
김용수 박태준 박경석 이춘구 김현자
배성동 김사용 이건호 신상초 김윤환
정희채 김춘수 박현태 이양우 박종관
고귀남 김집 지갑종 허청일 이상선
손춘호 정시채 안교덕 최낙철 김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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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이영일 이경숙 조남조 이낙훈
김영구 황설 하순봉 곽정훈 전병우
정창화 문용주 김유상 장경우 류수환
김지호 강창희 이성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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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9세 종(鍾) 구(九) 식(湜) 항렬. [2] 무려 아들 김종인이 75세이던 2015년에 사망했다. 상주 명단에 아들 김종인, 며느리 김미경, 큰딸 김종은의 명단만 있는 것으로 보아 작은딸 김종현은 어머니보다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 평균 자녀가 셋인 1940년대생임에도 자녀가 딸 한명밖에 없다. 그의 딸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자녀가 아들 한명밖에 없으며 # 아들은 2024년 기준 대학교 1학년(2005년생)이다. 외손자 역시 외할아버지를 따라 개혁신당에 입당했다. [4] 초대 대법원장이다. [5] 現 광주서석초등학교 [6] 6.25 전쟁 발발 후 광주로 피난가서 졸업했다. [7] 광주서중학교에 진학해 1년 반을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전학했다. [8] 공공경제학 전공 [9] 독일에서 8년 만에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였다. [10] 출처: 병무청공고제2016-35호(공직자 등의 병역사항 공개) [11] 제20보병사단에서 복무했다. 대위 전역이라는 말도 있고, 위키백과나 일부 블로그, 일부 자료에서는 상병 만기제대라고도 하나, 2016년 6월 8일(수)에 공개된 병역사항에 따르면, 상병 귀휴전역이 맞다. [12] 원래는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군면제 대상이었지만 "남자라면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할아버지 김병로의 말에 따라 군복무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군대는 나름 일찍 가서 군 복무 중에 4.19 혁명을 겪었다고 한다. [13] 언론사 인터뷰에서 젊은시절엔 키가 185cm였는데 현재는 키가 줄어 178cm 라고 언급했다. # 자세가 구부정 한 탓인지 이보다는 작은 174~175cm 정도로 보인다. [14] 5선 모두 비례대표(전국구) 국회의원으로만 활동했다. [15] 1994년 9월 9일 뇌물수수로 인한 의원직 상실. [16] 2017년 3월 8일 탈당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 [17] 비상대책위원장 및 총괄선거대책위원장 [18] 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 기여, 안철수의 초기 조력자, 2016년 더불어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원내 제1당 확보 및 여소야대 정국 형성, 2021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재보궐선거 승리, 그리고 20대 총선에서의 최고령 당선인(만 75세)이다. [19] 상단 사진의 액자에 걸려있는 사진도 김병로 전 대법원장의 사진이다. [20] 뉴스톱 김준일 대표의 평이다. [21] 더불어민주당은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계파 싸움으로 인한 안철수와 동교동계 의원들의 탈당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웠고, 국민의힘은 전신 미래통합당이 탄핵 여파가 있었던 7회 지방선거의 참패와,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당대표를 비롯한 태극기 집회의 결과는 결국 180석으로 끝난 21대 총선에서의 역사적인 참패로 인해 개헌저지선만 지킬 정도로 오늘내일 하는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이었다. [22] 여야를 가리지 않고 해결사 역할을 하다보니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일례로 2020년 총선 이언주 후보 지지 유세에서 옷 색깔만 바꾼 기호 2번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3]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선, 2020년 총선. [24] 4.7 재보선(2021년), 2022년 대선, 2022년 지선. [25] 당장 트럼프 캠프에서 대외정책 자문역을 도맡은 헤리티지 측 인사, 2017 CPAC에서 공화당의 고보수주의가 부활했다고 선언한 키노트 연사만 하더라도 김종인과 인연이 있다. 진보와 보수를 흑백으로 놓고 보다 보면 이런 김종인과 미국 보수와의 관계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김종인의 세계관은 미국의 고전 리버럴, 고전 보수주의와 맞닿은 측면이 상당히 많다. [26] (해당 인터뷰 부분) [27] 달리 말하면 제2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스물 한 번을 다 지켜보았다는 소리. [28] 그 결과 민정당, 민우당, 신정당이 통합하여 국민의당(1963년)이 탄생한다. [29] 다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서강대 성적증명서를 보면 1973년에 경제학 과목을 수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30]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 [31] 후일, 이 점 때문에 전두환 정권의 부역자 취급을 받고 진보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재미있는 점은 보수인사들 역시 국보위 인사를 용인한다면서 김종인과 더불어민주당을 싸잡아 비난하고 내로남불을 운운했다는 것 [32] 2016년 김종인이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을 맡던 당시 이해찬이 공천에서 탈락하며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는데, 항간에서는 이때의 앙금을 잊지 않고 공천을 떨어뜨렸다는 얘기도 있다. [33] 홍준표는 "당시 함승희 주임검사의 요청으로 김종인을 취조해 자백을 이끌어냈다" # #고 했는데, 함승희는 이를 부인했다. #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비대위원이었던 김종인이 당시 홍준표의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구 을을 거론하면서 당 대표를 사퇴한 사람에게 공천을 주면 안 된다고 발언한 바 있다. [34]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이 없었다면 90년대 후반에 국회 지도부( 국회의장, 국회부의장)나 거대 정당지도부( 총재, 의장, 대표 등)에 선출될만한 커리어였다. 2004년, 새천년민주당 소속 비례의원으로 4선 의원에 당선되지만, 이전과 같이 정치의 중심에 서거나 별다른 영향력은 없었다. 그가 소위 킹메이커로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2012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김종인에게는 잃어버린 20년을 가져다 준 악몽과도 같은 사건이다. [35] 2020년 김종인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거론되자, 홍준표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제 그만 공적 생활을 정리 하시고 정계에 기웃거리지 말라. 그만 하면 오래했다"고 김종인을 비판했다. # [36] 명칭은 거창하게 연구원이고 본인도 이사장 직함을 쓰고 있지만 사실 세종연구소처럼 예산을 두고 연구를 하는 싱크탱크라기 보다는 개인 사무실이라고 보면 된다. [37] 사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경제부총리 자리를 제시받았으나 본인이 전권을 가지지 못한다고 고사했고(당시 경제 몫은 자민련의 것이었기에 전권을 받지 못했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김종인을 국무총리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 적이 있지만, 막상 당선 후 없던 일이 됐다. 그래도 청와대로 불러 미안하다고 말은 했다고 한다. 본인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38] 그냥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정동영의 대선 후보 등록 회견 때부터 손잡고 옆에 서 있었다. # [39] 이회창 "보수정당이라는 새누리당이 좌클릭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복지포퓰리즘을 두고 민주통합당과 경쟁하느라 혼이 빠지고 있다.” #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정체불명의 경제민주화니 포퓰리즘 경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 [40] 처음엔 비상대책위원장이었지만 이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직함을 바꿨다. 선거 기간에는 위원장이 너무 여럿이라 헷갈린다는 이유였다. [41]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예외적으로 승리했긴 하지만 원래 지방선거란 여당의 무덤이라... [42] 사실 이는 김종인이 과거부터 이야기해온 '경제 민주화'와 관련이 깊은 제도다. 더 정확히 말해, 원래 궁극적 경제 민주화는 노동자가 경영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지만 단기간에 체계를 만드는 데 사회적 저항이 있는 관계로,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이전 과도기 단계로 노동자의 경영 직접 감시권 보장을 이룩하는 제도를 주장해 왔다. [43] "~을/를 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고 했다가 말을 여러 차례 뒤집은 데서 유래. [44] 항상 전권을 달라는 주장에서 비롯. [45] 20대 총선 국면 때 총선 3개월 전 일찌감치 문재인 당시 대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공천을 휘둘렀을 때와는 위상이 천양지차다. [46] 2012년 총선에서 김종인은 새누리당 비대위의 좌장으로서 승리를 거두었고, 2012년 대선은 김종인이 재건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6년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으로서 승리를 거두었고, 2017년 대선은 김종인이 재건한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국민의힘의 비대위원장으로서 승리를 거두었고, 2022년 대선은 김종인이 재건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었다. [47] 반 김종인 기류가 있는 가세연과 같은 극우 유튜버들은 집토끼들보다 중도를 포섭하는 김종인의 행보와 과거를 안 좋아하다보니 다 이긴 대선 졌다며 현실부정에 빠졌다. 일부 중도층도 꼭두각시화 아니냐는 인상을 받았다. [48] 이준석이 상임선대위원장직을 사퇴하고 나서 계속 주장한 것이 선대위 해체였다. # # [49] 제20대 대통령 선거/여론조사/후보 확정 후 문서 참고 [50]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는 22년 8월 17일 기자회견 중 "1월 초, 김종인의 해체급 선대위 재개편이 없었다면 대선 승리는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 # # [51] 단적인 예시로 김종인은 "국민들이 왜 정권교체를 지지해 줬는지 돌아봐야 한다" 진단했지만, 윤석열은 "작년 4월에도 지지율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 원인을 잘 알면 어느 정부나 잘 해결했겠죠"로 대응하고 있다. [52] 현재 나이가 83세로, 진작에 정계 은퇴를 하고 자기가 지내던 당에서 상임고문이나 하면서 원로로 지낼 나이다. [53] 김종인은 합당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이낙연하고 합당해서는 안 된다. 합당하면 너 끝나."라고 조언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열흘 뒤에 이준석이 찾아와서 (이낙연하고) 같이 못 가겠으니 도와달라고 하자 "하지 말라는 짓을 해놓고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하느냐"라면서 거절했다가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도 준 것이라고 한다. # [54] 도로자한당이라고도 부른다. [55] 그가 치렀던 선거 중 유일한 지역구 출마이자 유일한 낙선. 상대가 공교롭게도 이해찬이었다. [56] 1994.9.9. 의원직 상실(뇌물수수). [57] 2017년 3월 8일 탈당으로 인해 의원직 상실. [58] 김종인 외에는 이동원 전 외무부장관이 지역구 당선 경력 없이 순수하게 전국구/유정회로만 4선을 지냈다. [59] 선거 당시 민주당계 정당이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져 있긴 했으나 관악구 을이 민주당계 정당 강세 지역이고 거주민들 중 호남 지역 출신이 많음을 감안하면 4% 차이 패배는 나름 선전한 편이긴 하다. 다만 13대 총선이 관권에다 혼탁으로 개판 오분전 총선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게다가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이 새마을운동협회 중앙본부 회장을 맡은 것 때문에 노태우 지지율은 처음으로 20%대를 찍었고 여당인 민주정의당 지지율 또한 20% 초반을 기고 있었다. [60]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로 영입 [61] 뇌물죄로 당선 무효 확정 후 탈당 [62]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 [63]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 [64] 비상대책위원으로 영입 [65]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 [66] 19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당 공동개혁정부준비위원장직을 맡았으나 입당하지는 않았다. # [67] 21대 총선 총괄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 [68] 20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직을 맡았으나 복당하지는 않았다. [69] 개혁신당 22대 총선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았으나 입당하지는 않았다. # [70]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선거인단만 고용하고 대중들 앞에 나서지 않았다. [71] 나이가 들면서 근육 등이 감소하면서, 체구가 줄어드는게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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