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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2:55:40

고승덕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 서울 서초구 을)
제13-17대
김덕룡
제18대
고승덕
제19대
강석훈
<colbgcolor=#808080><colcolor=#fff>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고승덕
高承德 | Ko Seung-deok
파일:external/image.tvdaily.co.kr/1401063146_703501.jpg
출생 1957년 11월 12일 ([age(1957-11-12)]세)
전라남도 광주시 월산동
(現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1]
본관 제주 고씨 (濟州 髙氏) 영곡공파
부모 아버지 고익태[2], 어머니 윤순엽[3]
형제자매 2남 2녀 중 셋째
배우자 전 아내 박유아[4] (1984 결혼 ~ 2002 이혼), 현 아내 이무경 (1967년생)
자녀 슬하 1남 1녀[5]
친척 외조부 윤국현[6]
외조모 김운진[7]
외숙부 윤일영
외사촌 윤태식[8]
종교 개신교 ( 감리회)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8
학력 광주대성초등학교 (졸업)
무등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 졸업 / 72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 법학 / 학사)[수석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 법학 / 석사[10])
예일 대학교 로스쿨 (법학 / LL.M.)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법학 / LL.M.)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 (법학 / J.D.)
경력 제20회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
제23회 행정고시 수석 합격
제13회 외무고시 차석 합격
제12기 사법연수원 수료
수원지방법원 판사
서울특별시 법률고문
이화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겸임교수
서울사이버대학교 청소년복지전공 석좌교수
제18대 국회의원 ( 서울 서초구 을 / 한나라당)
병역 면제 ( 제2국민역)

1. 개요2. 생애
2.1. 고시 3관왕2.2. 전성기: 방송인, 주식 전문가, 국회의원2.3. 교육감 선거 출마와 낙선, 이후 근황
3. 가족 관계4. 비판 및 논란5. 약력6. 선거 이력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법조인, 방송인, 정치인.

2. 생애

1957년 11월 12일 전라남도 광주시 월산동(현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에서 의사였던 아버지 고익태(高翊台)와 어머니 윤순엽(尹淳葉)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1. 고시 3관왕

자타공인 대한민국 역사상 수험 공부를 가장 잘한 사람이다. 고시 3과 합격, 원조 공부의 신[11]으로 유명하다.

광주대성초등학교, 무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1976년 경기고등학교(72회)[12]를 졸업했다. 무등중 시절에는 상위권이었으나 당대 최고 명문고였던 경기고에 가서 성적이 곤두박칠치고 서남 방언 탓에 놀림을 받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노력으로 극복하여 고3 때 결국 전교 1등이 됐다고 한다. 당시 고교 동기로 이종걸, 황교안, 노회찬, 김기준, 정두언, 김용덕 대법관이 있다. 졸업 후 같은 해에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며, 1976년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1977년 2월까지 사법시험을 준비한 지 단 3개월 만에 1차를 합격하는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1년 후인 1978년 3월(3학년) 사법시험 2차까지 합격하며 당시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만 20세)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이 당시만 해도 사법시험 합격인원은 겨우 수십 명대였으며, 뽑는 인원이 수백명 단위로 늘어난 1980년대 이후 최연소 기록( 우병우 등)과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같은 해 9월 행정고시 1차를 합격하였으며, 이듬해인 1979년 (4학년) 봄에 외무고시 1, 2차를 차석으로 합격하고 그해 11월 행정고시 2차까지 수석으로 합격했다. 고시 3관왕의 탄생이었다.

고시 3관왕이라는 타이틀은 어딜 가서도 내세울 만하기도 하지만 특히나 고시계에서 고승덕 이름 석 자는 그야말로 전설이다. 지금에 와서는 고시 3관왕을 기록한 인물이 10명 남짓 되지만 합격자 숫자가 바닥을 기던 당시에는... 참고로 역대 첫 번째는 장덕진 전 농수부장관.

2.2. 전성기: 방송인, 주식 전문가, 국회의원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미국에 유학했다가 박태준의 딸과 결혼하고 귀국하여 잠시 판사로 임용되어 수원지방법원에서 근무했으나, 그만두고 다시 미국으로 가서 뉴욕 주 변호사 자격을 따고 1990년 귀국했다.

이후 변호사로서보다는 방송 활동으로 유명해졌다. 고시 3관왕이라는 타이틀을 바탕으로 전문 방송인 수준으로 많은 방송에 출연했으며, 특히 1995년 SBS의 <코미디전망대>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때 유행어로 밀었던 멘트가 '안녕하십니까? 못 먹어도 고'. 그리고 아역 배우로 꽁트를 통해 잘 나가던 인병국과 아버지와 아들 기믹도 만들고, 실제로 인병국의 어머니 역할 꽁트를 했던 김미화와도 살짝 부부 기믹 상황극을 하기도 하며 방송에서도 잘 나가게 된다. 이 김미화와의 인연으로 2000년대에 같은 방송을 진행하게 되기도 하며, 고승덕 혼자 진행하던 프로그램에 김미화가 나온 적도 있다. 이는 당시 변호사가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최초의 사례였다고 한다. 1998년에는 KBS 2TV <생생경제연구소> 프로그램의 MC가 되었는데 이는 당시 변호사가 TV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맡은 최초의 사례였다고 알려져 있다.[13]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변호사를 꼽으면 어린이부터 80세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누구나 고승덕이라고 말할 만큼[14] 잘 나갔고, 특히 연예인 이미지까지 가지고 있는 변호사는 그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서울대 법대 출신 고시 3관왕이라는 엘리트 이미지를 바탕에 깔고도 친숙한 옆집 아저씨 이미지를 같이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유형의 독보적인 유명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99년 4월 1일, 1999년 재보궐선거 공천을 받기 위해 당시 김대중 정부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 당사를 방문하여 정균환 사무총장에게 이력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공천이 불투명해지자, 한 달도 지나지 않은 4월 26일 한나라당 김덕룡 부총재의 후원회 행사에 참석하여 "지연은 국민회의(광주 출생), 혈연은 자민련과 맺어져 있으나(장인 박태준)[15], 정치는 한나라당에서 하겠다"라며 입당을 선언하였고 홍준표의 의원직 사퇴[16]로 자리가 난 송파구 갑 공천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장인이었던 박태준이 당시 김대중 정부의 연립 여당이던 자유민주연합의 대표를 맡고 있었기에 출마를 포기하고 탈당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출마 포기 선언을 자민련 당사에서 했기 때문에, 정계 입문은 국민회의에서, 공천은 한나라당에서, 출마 포기는 자민련에서 했다는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이후 해당 지역구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직접 출마하였고, 이회창은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되었다.[17]

이후 2000년에는 한국경제TV에서 '천재 고 변호사의 증권고시패스' 진행을 맡았으며, 2002년부터 SBS 솔로몬의 선택에 고정 출연하며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 프로그램은 법률적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을 재연으로 보여주고 고승덕, 김병준, 진형혜, 신은정 등의 변호사가 그에 대해 판단하여 법률적으로 설명하는 틀로 가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고승덕은 몇몇 특집 때에는 재연 배우 역할까지 했다. 특정 회차의 재연 장면에서의 취객 연기는 후에 다른 방송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에 나올 만큼 화제가 되었다. 연기력 자체가 연예인들만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18], 변호사가 그런 연기를 한 사실 자체가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다.. 주정을 부리는 장면 이후 경찰과 주변인들이 법적 처분에 관해 의견 다툼을 하는데, 뒤에서 만취한 역할의 고승덕이 혼자 바닥에 누워 자면서 뒹굴거리고 있는 장면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2003년에 일반자산운용전문인력 자격을 취득하고 2002년에서 2005년 사이에 주식 관련 서적을 5권 정도 펴냈는데, 기술적 분석에 치중하여 저술하였다. 2006년에는 로드투자자문을 설립했는데, 수익률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 당시는 국내 증시 역사상 최대의 활황으로 2007년에는 코스피 시장이 50.5%나 상승했지만 고승덕의 펀드는 15.8%의 수익률을 거두는 데 그쳤다. 기사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캠프에 합류하여 BBK 주가조작 사건에서 이명박 측 변호인으로 나섰으며, 이때 기자회견에서의 추태로 양념 승덕이라는 멸칭을 얻기도 했다. 이명박이 당선된 후 2008년 서초구 을 지역구에 현역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김덕룡[19]을 밀어내고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의원으로서는 별다른 존재감 없이 지내다가, 2012년 1월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 폭로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고승덕의 폭로로, 금품 살포자로 지목된 박희태 당시 국회의장이 의장직을 사퇴하고 결국 유죄판결을 받아 정계를 은퇴했다.[20]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이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해당 프로그램이 주목받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2012년 총선에서는 컷오프되어 출마하지 않았으며, 강북권 전략공천 떡밥이 돌았으나 결국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2013년 MBN에서 '고승덕의 집중분석', 한국경제TV에서 '고승덕의 인생2막 행복포트폴리오'를 진행했다.

2.3. 교육감 선거 출마와 낙선, 이후 근황

새누리당을 탈당하고[21]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교육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최악의 악재를 만나 낙선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문서로.

2014년 9월 24일 " 서울사이버대학교 석좌 교수로서 이번 학기에 청소년역량개발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 2015년 3월 즈음부터는 경기도 의사회 법제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고 있다. #

2017년 11월 파출소 이전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용산구 이촌동 이촌역 인근 토지를 2007년에 매입하고는, 이 토지에 위치해 있는 이촌파출소 건물의 철거를 요구한 것이다. # 2018년 7월 4일 1심 법원에서 승소했다. 관련기사 이후 파출소로 인한 부지 사용 제한 사항은 매입자가 책임진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이 밝혀지기도 했으나, 소송에서 이겼으므로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 일로 정치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평판이 깎여나갔고 이를 고승덕이 모를 리는 없으므로 정계 복귀 계획은 없는 것으로 짐작된다.

2020년부터는 종편 시사 프로그램에 종종 출연하고 있다.

2023년부터는 뜬금없게도 법률신문 건강 정보 관련 오피니언을 기고하고 있다.

3. 가족 관계

종로에서 '고 피부과 의원'을 운영한 아버지 고익태[22]와 어머니 윤순엽 슬하 2남 2녀 중 셋째로서 위로는 누나 2명이 있다. 2번의 결혼과 1번의 이혼을 하였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 1녀가 있다. 아들의 이중국적(한국 + 미국)으로 큰 비판을 받기도 했다. #[23]


외척으론 외삼촌 윤일영 제7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외사촌동생 윤태식 판사가 있다.

1984년 포스코(포항제철) 창립자인 박태준의 차녀 박유아[24]와 결혼했다. 둘 다 유학생 신분인 상태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나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장녀 1987년생, 장남 1991년생)를 두었으나 2002년에 이혼했다.[25] 박유아는 자녀들을 데리고 1998년 미국으로 가 있던 상태라, 당시 두 사람은 이미 별거 상태였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하는 말이 다르다고는 해도 고승덕의 정계입문이 부부 갈등의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04년 지인인 왕종근 아나운서의 중매로 재혼했다. 새 아내 이무경은 10살 연하로서, 경향신문 기자 출신이다.

2014년 교육감 선거에서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무관심과 아버지의 과거 발언들을 폭로[26]하여 선거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던 딸 캔디 고(고희경)는 뉴욕의 포덤대 로스쿨에서 지적재산권을 전공해 졸업한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변호사가 아닌 화가로서 생활하고 있다. #

4. 비판 및 논란

4.1.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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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공부법과 자기개발서, 교육감 선거 관련

고승덕은 고시 삼관왕이라는 전설적인 이력을 바탕으로 2003년부터 공부법 관련한 자기개발서를 쓰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라는 책으로 고시 3관왕 및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 쓴 책이다. 사실 자기계발서라기보다는 절반 이상이 자전적 에세이에 가깝다. 하지만 고시 3관왕이라는 것이 아무나 해낼 수 없는 것이고 이에 대해 자신이 치열하게 노력했던 바를 솔직하게 담은 탓에 인기를 끌었다. 외모에 대한 극도의 컴플렉스 및 고시 3관왕을 했을때의 치열했던 공부 방법 등등이 잘 알려진 까닭도 이 책 때문이다. 수험생이라면 고승덕 모드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봤을텐데, 이 책에 수록된 그의 고시생 시절 공부에서 비롯된 말이다.

책에 따르면 고승덕은 하루 7시간을 수면하고 17시간을 벼락치기하듯 초긴장 초집중해서 공부했다. 밥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씹는 시간을 줄이고 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고기를 아주 잘게 썰어서 만든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서 공부했으며, 천장 전등에 끈을 매달아놓고 하루 17시간을 초집중해서 자기 전에 전등끈을 당길 에너지만 남겨놓았다고 했지만 시험 직전 1~2주 동안에 체력 떨어져서, 다양한 자세로 누워서 공부했을 때만 그랬었다.

책 읽어보면 나오지만, 비빔밥 먹으면서 17시간 공부한 건, 행시 2차 직전에 마무리 8~9일 뿐이다. 평소에는 소화 잘 되는 음식 위주로 식사했고, 식사 후 TV시청도 해서, 1시간 정도 걸렸다니, 잠 7시간, 식사 2시간 빼면, 1일 최대 15시간 공부였으며 출석 체크가 거의 없던 70년대 법대 다녔지만, 그래도 휴학 없이 학교 다니느라, 사람도 만나고, 수강 신청 하고, 강의 듣고, 시험 치고, 교련을 들어야 했었다. 즉, 방학 이외에는 1일 15시간도 불가능이었다.

심지어 외무고시 2차 7~8주 전까지는 시간 남으면 해이해진다고, 주 4일 x 4~5시간 고등학생 영어 과외를 일부러 했었다.

학교 수업, 불어 알리앙스, 과외를 병행하면서, 사시 1차 준비한 겨울 방학 2~3개월 동안에 일찍 자고 01시 일어나서, 조용한 새벽 시간부터 공부했었고, 평소에도 걸을 때는 암기하고, 버스에 앉아서 책 읽으면서 공부한 집중력과 시간관리법이 더 대단하다.

단순히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친밀하고 순박한 이미지의 변호사에서 처절한 독종의 이미지를 추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의 영향이 컸다. 그의 화려한 스펙과 고시 3관왕 커리어, 대학입시의 경쟁을 뚫고 우뚝 선 것 등은 학부모들에게 완벽한 롤 모델이 되었고 그가 교육감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교육감 출마는 비판의 목소리도 컸지만, 반면에 초유의 사건 이전까지는 그의 지지율이 선두인 굉장히 모순적인 양상을 나타내기도 했다. 다만 후보자의 정당 가입이 금지되어 있고 동시에 진행되는 지자체장 선거에 비하여 관심을 받기 어려운 교육감 선거의 경우는 준깜깜이 선거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초기 고승덕의 높은 지지율은 후보자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아서라기보다는 단순히 인지도가 높아서라는 평가도 많았다. 실제로 고승덕의 지지율은 학부모 세대인 30~40대가 아닌 어릴 때 < 솔로몬의 선택>을 보고 자란 20대 청년 세대에서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의 공부 방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공부 방법은 한국의 기형적인 교육 현실에나 먹히는 것이지, 그 공부법 자체는 대단히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의 뒤틀린 교육 현실을 일개 개인이 뒤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가 권하는 이런 공부 방법은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긴 하다. 고승덕 본인이 EBS의 한 육아 프로그램에 나와서 방학이 기회이므로 아이를 6시간 재우고 나머지는 전부 공부를 시키라는 강의를 한 적이 있어 나중에는 이러한 공부법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정작 고승덕 본인도 고시 준비를 할 때에는 2차 시험 보는 며칠을 제외하면 최소 7시간, 최대 피로가 풀리고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잤으며, 고시생들에게는 충분히 잠을 잘 것을 강조했다.

고승덕의 공부 방법은 콩나물 공부법, 고승덕 공부법이라고 검색하면 나온다. 그의 책을 요약하면 책 1권을 7번~10번 반복해서 읽으면 나중엔 빨리 읽게 된다라는 것, 남들보다 더 높은 성적을 받고 싶으면 남들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라는 것, 2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말은 쉽지만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더 많이 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수면 리듬 깨가면서 자기 스케줄대로 공부하기, 밥 빨리 먹고 공부하기, T1T2 판단법을[27] 통해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것을 나중에도 할 수 있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공부 시간 늘리기, 7번 읽기 위해 책의 페이지 수를 계산한 다음 계획한 대로 공부하라는 것 등을 제시한다.

다만 이 공부 방법은 고시를 1년만에 붙고 재학 중에 고시 3관왕을 한 사람의 이야기이니 의지력이 고승덕 급이 아니라면 걸러 들어야 한다.

5. 약력

6.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성향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초 을

48,224 (60.26%) 당선 (1위) 초선
201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교육감 [[보수주의|
보수
]]
1,117,060 (24.25%) 낙선 (3위) [28]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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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승덕(교육감).jpg
18대 총선 (서울 서초구 을) 6회 지선 (서울특별시교육감) }}}}}}}}}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제18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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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덕 이종구 공석 박영아 유일호
송파 병 강동 갑 강동 을
김성순 김충환 윤석용
* 중 나경원 사퇴 (2011.9.28.)
* 동대문 갑 장광근 의원직 상실 (2012.3.15)
* 성북 을 김효재 사퇴 (2011.8.24.)
* 노원 갑 현경병 의원직 상실 (2011.6.10.)
* 은평 을 문국현 의원직 상실 (2009.10.22.)
* 강남 을 공성진 의원직 상실 (20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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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석 이상득 정수성 이철우 김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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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일 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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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피부과 전문의였다. [3] 尹淳葉, 1931. 3. 16 ~ (93세) [4]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차녀. [5] 모두 전 아내에게서 얻었으며 딸 고희경은 1987년생이고 아들은 1991년생이다. 이중 아들은 본인과 같은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본인이 병역면제를 받은 것과 달리 아들은 국방부 본청 소속 육군 장교( 중위 만기 전역)로 병역 의무를 수행하였다. 대학 재학 도중에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합격하여 기획재정부에서 소속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2024년 8월 기준 미국으로 출장을 갔으며 미국 재무부에서 해외 대사 파견직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2017년에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 및 같은 학번의 여학우(1991년생으로, 부잣집 출신의 엄청난 금수저이다.)와 연애하고 결혼하여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1차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하며, 슬하 1남 1녀가 있다. [6] 尹國鉉, 1906. 11. 7 ~ 1936. 2. 22 (향년 29세) [7] 金雲眞, 1908. 12. 8 ~ 1998. 10. 1 (향년 89세). 김기선(金基宣)의 딸이다. [8] 尹泰植, 1965. 3. 22 ~ (59세). 현재 부산지방법원 부정판사로 일하고 있다. [수석졸업] [10] 석사 학위 논문: 公共福利에 관한 硏究 : 그 槪念 및 基本權과의 關係를 中心으로 (1982, 지도교수 김철수) [11] '공부의 신' 자체가 00년대 들어 강성태가 유행시킨 용어로, 공신이란 말이 유행하자 "그러면 현역 고시 3관왕인 고승덕은 뭐지?"하는 세간의 인식에 붙여진 별명이다. 고승덕 이전에도 장덕진을 비롯 공부의 신이라 불릴 만한 인물들이 있긴 했으나 활동 시기의 차이로 원조 공부의 신이란 별명을 얻진 못했다. [12] 72회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시행 전 마지막 기수로 졸업 동기 720명 중 450여 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 [13] 모든 TV 프로그램을 통틀어 최초는 아니다. 1990년 신기남 변호사가 KBS 교양 프로그램 <여의도 법정>을 진행한 적 있으며, 1994년 오세훈•배금자 변호사가 MBC <생방송 오변호사 배변호사>를 진행했다. 두 변호사의 후임으로 신 변호사가 등판해 <생방송 신변호사>가 다음 해까지 방송됐고, 오 변호사도 이후 1996년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 진행을 맡았다. [14] 90년대에는 앙케이트 프로그램이 많았고 실제로 이 소재로 방송을 한 적도 있었으며, 진짜로 고승덕이 1위였다. 방송 인터뷰에서 길거리의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고승덕의 이름을 말할 정도의 압도적 인기였다. [15] 엄밀히 따지면 혼인에 의한 관계는 혈연이 아니라 인척에 해당한다. [16] 사퇴 후 다음 날에 대법원 판결에 따라 피선거권을 잃는다. 워싱턴으로 유학을 간 홍준표가 재기하는 것은 피선거권을 회복한 2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17] 이후 16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가 통폐합되면서 이회창은 전국구 1번으로 옮기게 된다. 특이하게도 이회창은 전국구 의원직을 대선을 위해 사퇴했다가 1년 반만에 같은 대수에서 재보궐선거를 통해 지역구 의원으로 복귀하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2번 당선되었지만 초선인 셈. [18] 하지만 극중에서도 대부분 변호사 연기를 했던 다른 회차와 달리, 개그맨들만 한다는 코믹 진상 연기를 한 것이라 오히려 과거 연기보다는 난이도 있는 연기를 잘 소화한 편이었다. [19] 내리 5선을 할 정도로 지역기반이 강한 상도동계 중진 출신이다. 심지어 대선 당시에 이명박을 도왔을 정도였는데도 공천을 못받았다. [20] 보수 진영에서 '전라도 뒤통수론'이 그 당시에는 더욱 팽배했는데 이 사건은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 지역주의가 뿌리박히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1] 교육감 후보로 나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후보 등록 1년 전부터 당적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22] 1948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문부 졸업.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가 서울의대로 통합되면서 전문학교 출신은 학제를 맞추기 위해 전문부 과정에 임시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경성제대 출신들과의 차별이 심해서, 당시 대학 측에서 부족한 학제 연차만큼 더 공부를 하면 의학사 학위를 주겠다고 제안했는데도 대부분 거부했었다고 전해진다. [23] 다만 아들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재학 도중에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합격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병역의무를 수행했기에 이중국적 논란은 곧바로 묻혀졌다. 2024년 8월 기준 현재는 미국으로 출장을 가서 미국 재무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24] 굉장한 미녀였다고 하며 2024년 8월 기준 현재도 미노년임을 자랑할 정도로 외모가 굉장히 예쁘다. [25] 이혼 원인에 대해서는 전처 박유아와 고승덕의 말이 다르다. 고승덕은 1999년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공천을 받았다. 원래는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을 받으려고 했으나 당내 반발로 인해 공천이 어렵게 되자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장인어른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공동 여당인 자유민주연합의 총재였으니 노발대발할 수밖에. 박태준은 고승덕의 부모를 만나 “장인이 여당(당시 김대중 정부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공동정부여서, 자유민주연합 역시 공동여당이었다.) 총재인데 사위가 야당후보로 출마하는 것은 집안 망신”이라고 설득했고, 결국 고승덕은 자민련 당사를 찾아가 박태준에게 사과하고 “이번 일로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송구스럽다”, “양가 부모님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면서 공천을 반납하겠다고 발표했다. # “문은 국민회의에서 두드리고 공천은 한나라당에서 받고 사퇴는 자민련에서 했다”는 우스개소리도 나왔다. 장인의 의지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한 셈. 그 후로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처 박유아 씨는 이를 부인했다. 부친은 자식이나 사위의 의사를 존중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간섭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반대했다고 한다. 반대 이유는 이미 변호사를 잘 하고 있는데 정치계에 입문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정치를 시작하면 자신과 가족들의 사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등 희생할 게 많아서 절대적으로 말렸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고승덕이 정치 입문 의사를 굽히지 않자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6] "고승덕이 과거 공직생활을 역임할 때 왜 폭로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에 대해 답하였는데, "다른 공직생활이면 상관이 없지만 교육에 관련된 공직이나 일은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27] 쉽게 말해, '지금(T1) 안 하더라도 나중(T2)에도 할 수 있는 일'(예: 연애, 학생운동)과 '지금 안 하면 나중에는 할 수 없는 일'(예: 고시공부)이 있다면 아무리 전자가 좋아 보여도 후자부터 하고 전자는 미루라는 이야기이다. 고승덕을 직접 겨냥하여 한 말은 아니지만, 김두식은 《헌법의 풍경》에서 '그러나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않는 법이다'라고 저러한 판단법(?)의 맹점을 꼬집은 바 있다. [28] 교육감 선거 후보자는 당적을 가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