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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4:03:04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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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871년 1월 4일 ( 메이지 4년)
해체 1945년 9월 2일 ( 쇼와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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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colcolor=#b0313f> 본부 <colbgcolor=white,#191919> 육군성 : 도쿄도 우시고메구(현 신주쿠구)
해군성 : 도쿄도 고지마치구(현 치요다구)
통수권자
및 대원수
메이지 천황 (1871~1912)
다이쇼 천황 (1912~1926)
쇼와 천황 (1926~1945)
육군대신 오야마 이와오(초대)
시모무라 사다무(말대)
해군대신 사이고 주도(초대)
요나이 미츠마사(말대)
참모총장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초대)
우메즈 요시지로(말대)
군령부총장 니레 카게노리(초대)
도요다 소에무(말대)
주요 지휘관 이토 스케유키, 도고 헤이하치로
야마구치 다몬, 야마모토 이소로쿠
나구모 주이치, 나가노 오사미
겐다 미노루, 오자와 지사부로
이노우에 시게요시, 요나이 미쓰마사, 도조 히데키, 야마시타 토모유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마쓰이 이와네, 스기야마 하지메, 하타 슌로쿠
다니 히사오, 이시이 시로, 이토 스케유키
}}}}}}}}}

1. 개요2. 역사3. 최고 통수권자4. 지도부5. 계급6. 편제7. 군복8. 병과9. 문제점10. 근대화의 선봉11. 보급
11.1. 외양11.2. 실상11.3. 민간인 수탈
12. 조선의 일본군
12.1. 한반도 남만주의 일본군 만행
13. 대중매체
13.1. 대한민국13.2. 중화권
13.2.1. 중국
13.2.1.1. 홍콩
13.2.2. 대만
13.3. 미국, 유럽 등 서구권13.4. 일본
14. 일본군의 재건 가능성15. 관련 학설16. 관련 전투 및 사건17. 참고 서적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 군대이자, 현 자위대의 실질적 전신이다.

현대 일본국의 방위를 책임지는 단체인 자위대는 비록 조직도 역할도 사실상 군대이지만 법적으로는 군대가 아니라 준군사조직이기 때문에 '일본군'이란 칭호는 자위대가 아니라 그 이전, 1945년 9월 2일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완전히 해산하기 이전 일본 제국의 군대를 의미한다. 종종 그 일제의 군대는 옛 일본의 군대라 해서 '구 일본군'이라고도 하지만, 상기한 대로 자위대는 정식적인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일본군'이라고 해도 구 일본군을 지칭하므로 문제가 없고, 따라서 일본 제국의 군대는 보통은 그냥 '일본군'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표현이다. 당시 그들이 자칭하던 정식 명칭은 ' 대일본제국 육군', ' 대일본제국 해군'이었지만 일본 내부에서도 보통 칭할 때는 이렇게까지 길게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서는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기 전 일본 제국의 군대에 대하여 서술한다.

물론 현대 자위대가 정식 군대가 된다면 '일본군'이라는 명칭은 현대의 자위대가 갖게 될 것이고 일본 제국의 군대는 '구 일본군'이나 '일본제국군'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될 것이다.[3]

아니면 '황군(皇軍)'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 천황의 군대'라는 뜻이다. 그 앞에 '무적'이라는 수식어는 꼭 붙였는데, 참고로 황군이라는 표현은 1930년대 초에도 생소했다. 그 이전에는 더 예스러운 표현인 황사([ruby(皇師, ruby=こうし)]: 황제의 군대)가 더 자주 쓰였다. 중국인들은 누리 황(蝗)자를 써서 황군(), 즉 ' 메뚜기 떼 같은 군대'라는 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카미카제 반자이 돌격과 같은 형편없는 모습도 보였지만, 해체되기 직전까지 아시아 최강의 군대였다.[4]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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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고 통수권자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르면 일본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천황이다.

즉,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이는 대일본제국 헌법 원조 독일 제국 헌법과 같았다. 심지어 오늘날 영국 통수권 자체는 국왕이 쥐는만큼, 군주제 하에서 이 조항만은 오늘날에도 의외로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촉진하는데 기여한 조항으로 볼 수 있는데 내각총리대신 이하 민간 정부가 육해군에 대해 지나치게 간섭하면 '통수권 간범'이라는 명목으로 디스를 할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메이지 천황 치세 당시의 제국의회는 그저 원로와 웅번 출신 정계 거물들의 과두정에 가까웠는 바 이 조항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이 시절에는 군정계의 거물들이 이전에 한솥밥을 먹던 처지라 나름 일치단결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니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10년대~ 1920년대에 이르면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거물들이 자연사했고 원로나 거물 정치인 군인 네트워크가 끊기면서 문제는 불거졌다.[5]

당장 워싱턴 조약, 런던 조약 당시 해군력 제한으로 타격을 받은 해군이 민간 정부를 이러한 명목으로 공격했다. 덕분에 민간의 영향력은 꽤 약했으며 오히려 전현직 장성들이 이러한 영향력을 이용해 총리대신이나 각 성청의 대신[6]을 해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민간정부에서 군을 통제하는 시늉만 해도 바로 육군대신과 해군대신들이 나가버려서 내각을 붕괴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나중에는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 암살할 정도로 막나갔다.

거기에 최고 통수권자가 천황이라고 해서 천황의 통제를 받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물론 천황의 상징성과 권위는 인정했고 실제로도 복종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실제 정책 추진에서는 천황이 군부에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굽신거리면서 '폐하, 이 전투(또는 전쟁)는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면 천황이 마지못해 재가하는 식.[7] 내각에 대해서는 '이래가지고는 부하 장교들을 통제 못한다. 2.26 사건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는 식으로 협박하면서 강경 정책을 밀어붙였다.

도조 히데키는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특기할 수 있는데 본인이 육군 내에서 상당한 거물이었고, 각종 대신을 본인이 겸임한 체제 하에서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는데 이러한 영향력은 심지어 대일본제국 헌법에 명시된 천황의 통수권마저 위협할 정도로 강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도조 히데키 사이판 전투 패배로 사퇴 후에도 여전히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만, 그 도조 히데키 해군은 어찌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역사로 말미암아 현행 일본국 헌법 하 자위대법에서 통수권은 내각총리대신에게 있음을 규정했다.

4. 지도부

파일:쇼와 천황.jpg
천황 명목상 통수권자
히로히토 천황

파일:도죠 히데키 프로필.jpg
실질적 통수권자
육군대신 겸직
도조 히데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sami_Nagano.jpg
일본 제국 해군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파일:시마다.jpg
시마다 시게타로

파일:attachment/스기야마 하지메/1.jpg
육군 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

파일:야마모토 이소로쿠.png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1941년, 진주만 공습 당시 기준이다.

5. 계급

메이지 유신 때 각 계급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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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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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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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병과

일본 제국 육군의 병과 보병, 기병, 전차병, 야포병, 산포병, 야전중포병, 공병, 철도병, 고사포병, 비행병, 통신병, 선박병, 치중병, 항기병, 병기병, 헌병 등이었다. 일본 해군의 병과는 수병, 정비병, 기관병, 공작병, 목공병, 위생병, 주계병 등이었다.

그 중 일본군에 대해 별도로 설명이 되어 있는 문서들은 다음과 같다.

9.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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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근대화의 선봉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저지른 오만 비인간적인 구시대적 악행들이 익히 알려진지라 유명하지는 않지만, 일본의 개화기의 최선봉에 선 게 바로 일본군이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일본 뿐만 아니라 전면적인 근대화를 거친 모든 국가들이 다들 거친 과정이기도 한데, 사람을 부품처럼 틀에 딱딱 맞게 규격화시키고 육성하는 사회체제 중에서는 군국주의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국민개병제가 실시되고 대륙 단위 제국주의가 굴러가던 19세기 유럽 꼬라지를 생각하면 된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그 절차를 반세기쯤 늦게 따라가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니 같은 현상이 안 일어나면 그게 이상하다.

비록 보신전쟁에서 최신식 문물이 들어왔지만 보신전쟁의 신식 문물은 주로 신식 총기 같은 무기류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은 대부분 무사 출신의 사족들이라서 일반 백성들에겐 신식 문물 전파와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창설되고 대대적으로 징병제가 실시되기 시작하자 백성들에게도 전체적인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육식을 거의 하지 않고 채식 어류만 즐겨먹던 일본인에게 일본군은 육류를 배급하여 제대 후에도 고기를 찾는 사람이 대폭 늘어나게 하였고[8] 의상 면에서는 게다짝이나 짚신을 신던 사람들에게 구두 운동화, 하이힐 등도 지급했으며, 기모노만 입던 사람들에게 최초로 서양식 옷을 입게 해 주었다.

또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이 처음으로 기차를 타게 된 이유가 군대 입영 때문이었으며, 굉장히 낮았던 성관계 시작 연령도 군대 입영 검사 이후까지 늦추게 되었다.[9] 그리고 일단 군대에서 군인으로 쓰려면 일단 글자는 알아야 했으므로 기초적인 교육을 실시해주기도 했다.[10]

또 아무리 무지렁이라도 하사관이나 상등병을 달고 제대하게 되면[11] 시골에서도 한자리를 꿰찰 수 있게 되는 등 나름대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따지고 보면 마냥 무지렁이들이 군대에서 적응 잘 해서 상등병 진급을 하고 오장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일본군도 알게 모르게 능력지상주의 같은 것이 있었는데, 대체로 구제중학교 중퇴나 졸업 정도로 어느 정도 배운 학력에, 체력 괜찮고 눈치 빠르고 센스와 재치를 겸비하고 있으면서 단체생활을 적응 잘 하는 인원이면 상등병이나 하사관 되는 것쯤이야 삶은 호박에 침 놓기였다고 한다.

<일본의 군대>란 을 보면 " 러일전쟁 이후의 시기가 되면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계층이 지역민 가운데 천황제 이데올로기 침투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계층에 속하게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실제로 위의 책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심상소학교[12] 수료 정도의 인원과 고등소학교 졸업[13] 정도의 인원, 그리고 소학교 중퇴 정도의 인원과 무학의 인원들 사이에서 상등병 이상으로의 진급 비율은 엄청나게 유의미한 차이가 났다고 한다. 애시당초 고등소학교 졸업 정도의 인원이면 시골에서는 소지주나 부농급 집안의 자제들로써 경제상태나 영양상태가[14] 동네의 다른 또래 청년들에 비하자면 군입대 전부터 더 좋았던 인원들이 많았고, 실제로도 시골에서 어느 정도 먹고 사는 인원들이 저렇게 진급도 하고 전역 후 동네에서 한 자리 차지도 하고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헌병 병과에서는 시험을 봐서 상등병부터 시작하는 코스도 있었고, 타 부대에서도 일정 학력 이상의 인원은 훈련 후 시험으로 상등병이나 오장(하사) 계급부터 군생활이 가능했다. 그러니 같은 조건이면 구제중학교 정도는 다녔었던 적이 있던 인원이 더 인정받기는 쉬웠다. 다만 아무리 구제중학교 졸업 등의 고학력자라도 체력이 심하게 약골이고 군대 문화에 적응 못 하는 경우 병신 취급받고 일등병으로 중간에 전역했다. 이런 것은 일반인들이 알던 일본군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한편 일본인은 문맹, 무학자도 글자를 가르쳐가며 군복무를 수행했으나, 일자무식에 완전 무지렁이라면 군대에서 인정받기는 어려웠다.[16]

11. 보급

11.1. 외양

일본 육군에서는 1920년대부터 개선이 시작되어 1927년에 드디어 취사병이 채용되어 1930년대부터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17] 이러한 개선으로 인해 군대에 대한 지원율이 높아질 수 있었다. 해군은 진작부터 제대로 된 대우를 했고 그 덕분에 병력을 지원제로 채우는 위엄을 보일수 있었다.

그 이후로부터 중일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의 일본군은 서류상에서는 제대로인 주둔지에 있다면 보급 복지 수준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식사는 다양한 종류의 고기 채소, 생선, 간식 등이 매 끼에 있었고 그 양도 결코 적지 않았다.[18] 간식으로는 사이다 양갱, 찹쌀떡 등이 나왔다. 또한 서양의 커다란 건빵을 현재 한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먹고 보관하기 좋은 모양으로 개량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 그리고 일부 건빵에 별사탕이 들어가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도 일본 육군이다.[19]

최정예라 불리며 일본의 수도 도쿄 일본 황거를 지키는 근위사단의 시설은 준수한 편에 속했다. 내무실은 전부 침대형에 2층짜리 건물에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28년에 준공한 보병 제3연대의 병사가 대표적으로,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 4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당시로는 최신식 엘리베이터 4대와 리프트 2개가 있었고 화장실은 모두 수세식, 난방은 모두 증기 난방을 채용하고 있다. 다만 입대해서 사용하는 병사들은 시골 출신자가 많은 탓에 수세식 화장실의 고장이나 엘리베이터의 고장이 속출하여 속을 썩였다고 한다(<陸軍建立史>, <<銀星>>, 제6권, 1973).
파일:external/p2.la-img.com/8136629_1_l.jpg
현대 군대들이 자주 사용하는 반합을 당시 일본군도 사용하고 있었다. 1932년에 제정된 92식 반합을 주로 사용했다. 이 반합은 M31로도 불린, 독일이 1931년에 제정한 코흐게쉬어 31형 반합(Kochgeschirr 31)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야마토급 전함의 경우 여전히 해먹을 쓰던 당대의 해군 함선들과 비교할 때 초호화급인 침대를 두어 야마토 호텔이라고 불렸으며 실제로 야마토와 무사시의 사관 식당은 전쟁 전 일본의 해운회사들이 운영하던 호화여객선의 식당에서 일하던 실력좋은 요리사들을 장교들이 급여를 십시일반해 고용해서 운영했다.

게다가 공간 절약이 생명 잠수함도 승조원 대비 침상 비율이 1:1이었을 정도다. 미 해군 잠수함이 1.5~1.75:1 정도였으며 소형 잠수정 크릭스마리네 U보트는 2:1의 비율을 보인 것에 비해 엄청난 비율이다. 대신 반대급부로 일본 해군 잠수함들이 싣고 다닌 어뢰는 1척당 6~10발이 다였다. 그것도 수상배수량 3천 톤이 넘는 이호형 잠수함들이 그랬다. 2천 톤 대의 미국 잠수함들이 어뢰를 24발씩 탑재했고 배수량이 1천 톤도 안되는 독일 해군의 7형 U보트들도 14발의 어뢰를 챙겼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적은 수량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보급선이 닿는 한, 본토의 국민들이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군인부터 먹이고 봤다. 패전 직전의 야마토 승조원의 증언 중에는 '매운 카레라이스 사과 바나나, 마카로니가 들어간 사라다가 맛있었으며, 내가 이러한 것을 먹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일본 해군은 육군보다 그나마 상식적이었데다 전시 이전엔 지원으로만 수병을 뽑았기에 보급에 좀 더 신경 쓴 점도 있다.[20] 그러나 육군 역시 기본적으로는 해군과 마찬가지로 주둔지에서는 해군보단 좀 떨어지지만 민간 서민 식사 이상으로 좋은 급식을 받았다.

11.2. 실상

파일:attachment/일본군/JPrison02.jpg 파일:attachment/ejs19459-water_fall.jpg
일본군의 보급이 정상적이었을 때에 잡힌 일본 육군 포로 일본군의 보급이 끊어진 후에 라바울에서 잡힌 기아 상태의 일본 해군 포로들
輜重輸卒が兵隊ならば蝶々トンボも鳥のうち 焼いた魚が泳ぎだし 絵に描くダルマにゃ手足出て 電信柱に花が咲く
치중수졸이 군인이라면 나비 잠자리일 것이고, 구운 물고기 수영을 하고, 그림 속의 달마에 손발이 돋고, 전봇대이 필 것이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에서 유행하던 노래. 단순히 병참, 군수, 수송 병과에 소속된 전투근무지원부대원을 비하하는 노래이다.[21] 구체적으로는 보급을 담당하는 보급수송대를 우습게 보는 노래인데, 구일본군 리즈 시절(?)이라고 자랑하던 러일전쟁 때 벌써 인식이 이따위였으니, 본격적으로 막장행각이 시작된 중일전쟁 이후에는 훨씬 더 심해졌다는 뜻이다.

타 병과를 장난으로 놀리는건 어느 나라 군대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일본군의 보급병 천시는 국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다르다. 먼저 메이지 유신 이후 설립된 일본육군사관학교에는 1899년까지 치중병과가 없었다. 또한 참모 장교를 육성하기 위해 1883년 개교한 일본 육군대학교에도 다른 병과 장교와 달리 치중병과 장교는 입시 자격조차 주지 않았다. 1887년부터는 치중병과 장교도 육군대학교 입시자격이 주어졌지만 정원은 매년 1명에 불과했다.(드물게 2~3명을 받는 년도도 있기는 했다) 그래서 일본 육군대학교는 1945년 2차대전 종전시까지 총 3,00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지만 이 중에 치중병과 출신은 겨우 46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일본은 시스템상으로도 보급 병과를 대놓고 차별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도 보급 병과 장교가 필요하긴 하니까 이들의 보충은 보병과, 기병과, 포병과, 공병과에서 전입한 장교들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 입장에서 유능하고 성실한 부하를 타 병과로 전입보낼리 없으니 치중병과에 전입보내는 장교들은 무능한 저능아거나, 사고 친 문제아 장교일 수 밖에 없다. 치중병과에 대한 인식이 이 모양 이꼴이었으니 우수한 인재가 치중병과를 지원할 턱이 없고,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으니 제대로된 장교가 육성되기도 힘들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막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왕국식 군사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당시로는 우수한 병참체계를 가진 프로이센과는 달리 이처럼 보급병과를 홀대한 것은 전통의 영향이었다. 원래 일본은 센고쿠 시대에도 보급병이라는 것이 없었다. 전투는 하급 무사인 아시가루가 맡았지만 보급은 민간인을 징발해서 부역에 동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근대화 이전 일본에서 병참이란 민간인 아무나 징발해서 부역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근대화 되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보급병과를 중요한 병과로 여기는 발상이 생겨날리가 없던 것이다. 이제 위 노래에서 '치중병과가 무슨 군인이냐?'고 보는 일본군의 인식이 이해가 될 것이다. 서양에서는 고대로마 시절부터 병참을 담당한 군단 감독관(Praefectus Castrorum)이 로마군 군단 서열 3위이던 로마 제국이나, 초한전쟁에서 보급과 지원을 담당한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정한 중국 한나라와는 분명히 달랐다.

일본군의 보급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나 특정 부대나 주둔지 등 특수한 곳에서만 정상적이었고, 전장 등 나머지 장소에서는 기본적인 보급 상태가 굉장히 열악했다. 오죽했으면 미군으로부터 노획 전투식량으로 연명한 부대의 영양상태가 통상의 부대보다 더 좋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제2차 세계 대전기까지도 야전취사 장비를 구비하는 데 이상하게 소극적이어서, 전장에서 제대로 을 먹으려면 지급받은 반찬으로 밥과 을 만들든가, 민가에서 징발해야만 했다. 게다가 식량은 보급하면서 "식량을 조리할 연료는 알아서 구해다 조리하라"는 식으로 일체 보급이 없어, 개개인이 문자 그대로 알아서 연료를 찾아다녀야 했다.

다만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초반까지는 모든 군대가 비슷했다. 1차대전 초반 이전의 모든 군대는 식량을 던져주면 사병 개개인이 알아서 조리해먹는, 즉 재료만 던져주는 식이었고 삼삼오오 모여 당번을 정하든 혼자 해먹든 알아서 조리해 먹었다. 그러던 것이 1차대전 초반 이후 참호전으로 인하여 대군이 좁은 전역에 고착되어 연료가 부족하고[22] 더구나 연료가 있어도 조리 과정에서 발생한 연기로 인해 포격받기 일쑤인 상황이 되자[23] 후방에서 조리하여 전방으로 추진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1차대전 당시 영국군의 취사 모습을 재연한 영상. 그 이전에는 취사병이라는 병과 자체가 군의 정식 편제에 없었다. 취사병과가 보편화되고 그에 따른 야전취사 장비를 적절히 보급하는 게 일반화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저 모양이었다는 것은 일본군의 수준을 바닥까지 보이는 것이다. '군대는 먹어야 진군한다' 말을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게다가 일본군은 사방팔방에서 다수의 인원이 을 피우고 조리를 하였기 때문에 대량의 연기 불꽃으로 인해 부대의 위치가 더더욱 쉽게 노출되었고, 덕분에 나무가 무성한 정글에서조차 미군의 정찰에 쉽게 발각되어 탈탈 털리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구나 전문적으로 조리를 익힌 취사병들이 소량의 연료만 써서 대량으로 취사하는 것과, 소규모 단위로 전투병들이 사방팔방에 불을 피우고 찔끔찔끔 조리하는 것은, 시간의 활용과 연료 소모와 음식의 품질 면에서 효율성의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전문 취사병들에게 맡기면 다른 부대원들은 전투 임무에 더 효율적으로 투입되며, 조리 시간의 제약과 취사의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재료만 던져준 것은 바보짓 그 자체였다.

더구나 다수의 인원이 연료를 구해 조리하는 과정은 주변 민가에 엄청난 민폐를 끼쳤고, 결국 군인들이 점령지의 식량만 약탈한 게 아니라 땔감으로 쓰려고 멀쩡한 문짝이나 가구 같은 것도 거뒀을 정도로 철저하게 수탈했고, 이는 현지 주민들에게 반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군은 약탈만 한 게 아니라 미군에게 협력했다는 죄목이나 기타 대단하지 않은 명목으로 수시로 민간인 살해하거나 혐의자가 1명만 있어도 해당 마을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식으로 잔혹한 지배 정책을 펴서, 태평양 전쟁 전역에 미군과 협력하는 수많은 게릴라가 나오게 된다.

게다가 전쟁 중에 병사의 수가 급속히 팽창하여 수백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게 되자, 복지는 어느새 뒤켠으로 밀려나 버렸다. 게다가 연합군의 공격으로 결국 보급마저 끊겨 태평양 등지에서는 몇 달을 굶은 병사들이 마침내 포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사건도 자주 목격되어 연합군과 일본 양측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게다가 배고파서 먹은 건 그나마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지 그냥 재미로 먹은 막장스런 경우도 존재하는데, 미국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 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이것 때문에 죽을 뻔했다.( 치치지마 식인 사건 항목 참고) 중국 등에 주둔한 부대들도 민간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이 주요 업무들 중 하나였고 당연하게도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식량 보급의 중요한 부분을 그런 조달에 의존하는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부터 거대한 규모로 팽창한 군대를 유지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일본군은 아예 전선 후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조달하는 둔전 부대를 따로 운영했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교전지 근방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약탈로 일관했다.[24]

장교 사병의 차이도 심각했다. 초기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쌀만을 지급하고 부식을 살 돈을 따로 줬다. 그래서 가난한 병사들은 부식비를 모았다가 월급에 보태 송금했는데, 이러한 탓에 쌀밥만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결국 반찬 없이 백미로만 밥을 먹으니 영양 불균형으로 각기병이 유행했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이 각기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 종전까지 병사들은 장교의 잔반이 사병 식사보다 낫다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장교들은 다른 반찬들이 잘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 없었다. 또 장교가 사병의 식단을 착복한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사병들의 식단은 장교들의 식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영양 문제는 위에서 나온 각기병이 유명하지만, 이러한 비타민 문제를 빼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영양학적으로 쌀이 밀보다 영양의 균형이 좋고 생각보다 단백질이 많은 편이지만 쌀과 밀 둘 다 필수 아미노산이 적다는 문제가 있다. 동양 식단에서 이걸 보완해주는 게 , 그 가운데서도 간장이나 된장 종류다.[25] 각기병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이러한 부식이 없는 식생활을 했더라면 나중에라도 단백질 결핍 등의 문제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나마 해군은 백미 외의 다른 부식류를 충실히 하면 각기병 발병율이 낮아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던 반면, 육군은 '각기병은 영양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병이 아니라 미생물 전염병'이라면서 그냥 쌀밥을 먹였다. 당시 육군 군의총감(軍醫總監)이었으며 일본의 대문호이기도 한 필명인 모리 오가이로 잘 알려진 모리 린타로 장군 때문인데, 그는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저명한 의학박사였지만, 각기병 미생물 원인론을 신봉했던 것이 문제였다. 당시는 각기병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나 당장 일본에서 각기병을 부자병, 에도병 등으로 불렀으며 이 에도병 증상이 나타날 경우 메밀국수[26]를 먹으면 증세가 나아지더라 하는 경험적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든 민간요법이 무턱대고 따라할 치료법은 아니지만, 효과가 있음이 알려진 방법임에도 단순히 독일 의학계에서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무시한 모리 오가이의 책임은 크다.

결과적으로 육군은 한 상비사단 분에 해당하는 병력인 1만여 명이 각기병에 걸려서 사망하거나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반면, 해군은 각기병 발병자가 없었다. 이는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B 부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1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해결책으로 제안된 현미 보리 혼식이 당시의 서민층 식사여서 병사들이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27]는 의견이 컸고, 또한 야전취사에서 현미 및 보리가 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군 역시 한국 전쟁 당시 야전취사를 할 때는 조리에 시간이 걸리는 보리를 빼버리는 일이 많았다. 특히 집단 취사가 거의 배제된 일본군의 특성상 보리는 줘봤자 제대로 조리할 여건 자체가 안 나온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말은 그냥 쌀만 주고 밥은 각자가 해먹으라는 소리로, 주둔지와 야전에서의 식사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이미 18세기~ 19세기부터 온세계를 누비며 전쟁을 해와 노하우도 쌓일 대로 쌓였고 나름 경제 규모도 뒷받침되는 영미와 달리 그동안 만주, 중국, 서태평양에서나 놀던 그냥 패권을 노려보는 지역강국일 뿐인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의 한계다.[물론]

이러한 영양학적 문제는 1943년 이후 갑자기 상대적으로 나아졌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보급 체계가 붕괴되면서 아무거나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상대한 미군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보급은 매우 풍족한 편이었다. <영웅 김영옥>에서 김영옥의 회고에 따르면 유럽 전장에서 식량 배급은 말할 것도 없이 초콜릿, 담배와 같은 기호식품조차 충분히 보급되었고, 미8군 사령관이었던 벤 플리트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이스크림과 같은 특식도 자주 나왔다고 한다. 태평양 함대는 한 때 보급 받은 전투식량이 너무 많아 고생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이 노획한 전투식량이 매일 전원에게 줄 정도로 풍족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일본군의 보급이 얼마나 빈약한지 짐작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사실 처음부터 일본군의 기본적인 보급 자체가 다른 군대와 크게 차이가 났다. 주적 미군은 1인당 4톤의 보급물자를 지원받는 반면에, 일본군은 1인당 0.9kg(2파운드) 정도만 받았다. 0.9톤을 잘못 쓴 게 아니라 진짜로 0.9kg이다. 차이가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물론 미군이 제법 많이 받는 것도 있고, 기본적으로 동양인 서양인의 체급 차이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일본군의 보급량은 독보적으로 처절하다.

사실 일본군의 급양체계는 태평양전쟁이 심화되기 전에는 좋은 편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경양식이라 부르는 돈까스, 카레라이스 등은 일본군 짬밥에서 유래된것들이 많고, 매 끼마다 고기나 생선에 후식도 나왔었다.

한국군에서 "군대가 밥먹으러 가는 곳이냐, 군인이 무슨 비싼 밥을 먹냐"고 하는 인식들이 과거에 많이 있었는데, 이는 일제 말기 급양체계가 부실화된 시점부터 조선인들이 대거 입대하기 시작하여 그런 것만 보고 배웠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사실 일본이 이런 문제점을 보였다고 해서 정말 일본군이 의식 레벨에서 보급을 경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보급을 경시했다면 왜 본토의 일본인이나 조선인, 대만인을 수탈해가면서 모든 물자지원의 우선순위를 군인에 할당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기 이탈리아군이나 막장 군대라는 면에서 일본군의 후배격인 조선인민군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애초에 군인은 잘 먹어야 하고 옷이나 의료물자 등 각종 분야에서 상당한 투자를 요한다는 점은 상식이다. 다만, 일본은 군대 규모도 수백만에 이를 정도로 팽창해나가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역에서 전투를 수행할 정도로 전비 부담이 극심해가는 반면 현지 부대가 처한 상황은 북의 만주, 키스가로부터 남으로는 호주, 서로는 중국과 미얀마로부터 동으로는 미드웨이, 과달카날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인데다 전쟁 상황 역시 극히 불안정했기 때문에 가장 물자를 필요로 해야 하는 최전방 야전부대에 정작 필요한 물자는 제때 보내지 못해 병사들이 시체라도 뜯어먹어야 했던 반면, 그나마 여력이 있는 일본 본토[29]나 제대로 된 기지가 있는 곳이나 최신식 함선에서는 위와 같은 호텔스러운 생활이 가능했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열강의 후발주자로서 가장 국력이 부족한 일본이 엄청난 보급소요를 요하는 정글과 섬에서 잠재된 국력을 다시 일깨워 엄청난 생산력을 갖추기에 이르는 미국과 맞붙은 순간 기존의 보급계획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다.

11.3. 민간인 수탈

태평양 전쟁 후기 일본 민간인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는데, 당시 일본 민간인들의 1인당 하루 식량 배급량은 규정상 매일 1인당 약 20g의 쌀, 100g의 과일 야채, 50g의 밀가루, 설탕, 조미료, 해조류 등이 포함된 300g 정도였는데, 보통 사람은 최소 하루에 600g 정도의 식자재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양조차도 모자란 배급 식량에는 나와야 할 쌀이 나오기는커녕 콩이나 고구마조차도 없었고, 전쟁 이전에는 돼지들 사료로나 주던 콩껍질이나 고구마 줄기 같은 게 잔뜩 섞여 있었다.

여기에 4인 가족 기준으로 단백질을 공급해 줄 정어리가 2마리 배급[30]되었고, 규정상 15세 이하 어린이와 60세 이상 노인에 한해 1달에 딱 1번 과자가 배급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어린 시절 태평양 전쟁을 체험한 노인들의 증언으로는 그런 건 없었다고 한다. 물자가 부족한 것도 있었지만 군인과 관리들의 부패가 심해 민간인들에게 가야할 물자를 횡령한 탓이 크다.

양도 질도 엉망인 무언가를 배급 식량이랍시고 받은 당시 일본인들은 소위 '천장죽'이라 부르는 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죽이 어찌나 맹물처럼 맑은지 천장이 다 비쳐보인다"는 씁쓸한 농담에서 '천장죽'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그나마 일본 민간인들은 배급식량이라도 받았지만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사람들이 흙까지 파먹을 정도로 물자수탈이 심했다.

12. 조선의 일본군

1910~ 1945년 사이의 한반도( 조선)에 있던 일본군에 대해서는 조선군 문서를 참고할 것.

조선 군인이란 신분도 있었는데, 이들은 1907년에 해산당한 대한제국군 가운데 잔류해 일본군에 편입된 이들이다. 그 밖에 일본군에 편입이 아니라 입대한 인원은 일본군/조선인을 참고할 것.

12.1. 한반도 남만주[31]의 일본군 만행

13. 대중매체

13.1. 대한민국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대중매체에선 빠짐없이 등장한다. 한국산 매체에 등장하는 일본군은 헌병을 필두로 한 육군이 대다수다.[32]

1920년부터 시작된 문화 통치기 이후를 배경으로 할 경우엔 일본군(대부분 헌병)의 부정적 묘사가 순사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 경찰로 넘어가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해군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 육군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동학농민혁명, 명성황후 살해에 군이 동조한 을미사변 등을 통해 이미 구한말부터 조선에 강한 물리력을 행사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위안부를 위시로 갖은 징용[33]을 일삼았기 때문에 묘사는 제각각이어도 확실히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는 절대 없다. 조선인들에게 동조하는 일본인 캐릭터[34]가 아주 극소수 가량 출연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 중 일본군 캐릭터는 그냥 없다고 보면 된다.

자막이 제공되기에 최근 들어 진짜 일본인 배우들을 캐스팅하기 시작한 영화 및 드라마와는 달리 연극은 그런 기능이 없으므로 여전히 한국인 배우들이 일본군 역할을 맡는다.

특이한 것은 상술한 것처럼 악랄한 묘사와는 별개로 굉장히 멍청하고 무능한 집단으로만 나오는네, 졸병들은 물론이고 좌관(영관)급 장교들까지 전략이나 전술이 없는 단순 포악한들처럼 묘사된다. 전투력 역시 매우 형편 없는 것처럼 그려지며, 독립운동가들이 총을 난사하면 거기에 당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일이 부지기수. 당연히 일본군들은 적병 하나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온다. 악랄한데다가 종래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라이들의 군대처럼 묘사되는 미국과 중국의 창작물 속 일본군과는 매우 다르다.
물론, 예외적으로 일본군을 쏘면 추풍낙엽 처럼 쓰러지는게 아니라 광복군을 막아내며 식민지 한국인들을 죽이기도 하는 악랄한 점을 부각시키기도 하고, 오히려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예도 영화 귀향의 경우에 있기는 하다.

13.2. 중화권

13.2.1. 중국

중일관계에서 중국과 가장 잔인하게 충돌했던 조직이므로 당연히 인식이나 묘사가 매우 나쁘다. 특히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각종 전쟁범죄[35]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절대 미화할 수가 없는 환경이다.[36]

다만 일본군에 대한 이런 적개심과는 별개로 고증은 그닥인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제작비가 저렴한 드라마 부문에서 그러했다.[37]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제작되는 저질의 양산형 항일 드라마를 중국에선 항일신극(抗日神剧)이라고 부르며 별개의 장르처럼 구분해 비웃을 정도였다. 지금은 중일전쟁 드라마 자체가 예전에 비해 줄었고, 공산당도 막장 드라마들을 슬슬 규제를 걸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보기 힘들어졌다. 반면 스케일이 큰 전쟁 영화에선 꽤 괜찮게 나온다.

중국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일본군은 크게 두 가지 타입이 있는데, 하나는 한국 미디어에서 나오는 것처럼 전략도 전술도 없는 주제에 잔인하기는 또 엄청 잔인한 미개인 머저리 집단들이고[38], 다른 하나는 온갖 기괴한 술수를 사용하고 죽음도 불사하는 사무라이와 닌자들의 제국주의 군대다.

일본군이 등장하는 매체는 다음과 같다.
13.2.1.1. 홍콩
홍콩도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이미지가 안 좋으며, 홍콩 영화들의 일본군 대부분은 악역이다. 물론 무조건 악랄한 건 아니고 일부 장교는 주인공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13.2.2. 대만

사실 이쪽도 위의 중국과 다를 게 없다. 애초에 중국국민당이 전쟁의 주력이었고 본성인들이나 대만 원주민들도 일부 일본에 호감을 가지는 이들만 제외하면 일본군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안 좋다. 대만 원주민들은 일본군의 이간질과 초토화에 의해 상당수가 몰살 당했고 본성인들 또한 일본군에 의해 상당히 억압당했다. 국민당군으로서 싸운 외성인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으며, 당연히 현재 일부 대만 정치가들은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일본군을 절대 미화시키지 않는다. 괜히 <시디크 발레>라는 영화에서 일본군의 악랄함을 보여 주는 게 아니다.

13.3. 미국, 유럽 등 서구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미국의 적이었기 때문에 일본군도 당연히 악역으로 나온다.[46]

뽀빠이, Tokio Jokio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인데, 진짜 일본과 전쟁하던 시대에 만들어졌기에 일본군들을 사정없이 조롱한다. 일본인들 특징도 클리셰 수준이다.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이질적인 두 문화권이 충돌한 전쟁인데다가, 해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전투가 태평양의 고립되고 열악한 도서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미군을 상대로 한 일본군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면이 묘사된다. 당연히 미군도 거기에 온갖 쌍욕을 퍼부으며 거칠게 맞붙는다.

드라마 더 퍼시픽에선 건조하게 일본군을 조명했다. 오키나와의 민간인들에게 폭탄을 들려 미군과 동귀어진을 시키는 장면 등이 그대로 묘사되며, 비단 이 외에도 죽기 직전에 수류탄으로 미군과 자폭하는 일본군 병사, 화염방사기를 맞고 불타는 벙커에서 탈출하다가 미군 병사들에게 사살되는 일본군 병사들은 사실상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 매체들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와패니즈스러운 시각에서 동경하는 경우도 소수나마 있다.[47] 이런 경우는 일본이 사무라이와 닌자로 대표되는 이미지도 있거니와, 총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칼을 빼들고 돌격한다든가 죽음을 불사하고 자폭 공격도 과감히 행한다든가 하는 이유로 신비롭게 여기는 것이다.[48]

동정적인 묘사를 하는 매체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린호넷 케이토 같은 경우 일본군이었지만 난징 대학살을 목격하고 분노하여 같은 부대원들을 죽이고 탈영했다는 식의 뒷설정도 들어갔다. 다만 작품의 기초적인 설정 자체가 각이 딱 잡혀 있지 않아서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 설정이 바뀌는 때가 있다. 심지어 코믹스 중 가장 후기 시간대를 다루는 코믹스에서 케이토는 히로인 포지션의 여성이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에서 제작된 창작물들의 경우, 동양에서 악의 제국 같은 것이 튀어나온다면 높은 확률로 그 군대는 중공군 아니면 일본군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49] 1984 동아시아나 게임 홈프론트의 '대조선련방'[50], 폴아웃 시리즈 중국이 그렇다.

13.4. 일본

사실 일본군의 막장스런 실태는 일본인들도 꽤 잘 아니, 주로 반전(反戰)을 주제로 하는 작품에서 일본군 내부의 부조리나 사건사고가 곧잘 나온다. 반면 유명한 사카이 사부로를 비롯,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적과 싸우며 좋은 성과를 거둔 몇몇 인물들을 영웅담의 소재로 곧잘 쓰기도 한다. 물론 한편으로는 상당히 미화시켜 보여주기도 하나, 의외로 이쪽이 더 마이너하며 크게 인기도 없다. 애초에 보통 과거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다.

일반적으로 일본 매체 내에서 일본군 내의 가혹행위나 부조리는 반전소설에서도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독일과 매우 대조적인데, 독일의 여러 영화들은 2차대전을 묘사할 때, 나치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클리셰처럼 나치 독일의 군사조직들, 즉 악랄함의 대명사인 슈츠슈타펠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멀쩡했던 독일 국방군까지도 각종 만행이나 사악함을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독일에서 만든 영화 특전 U보트(Das Boot)는 잠수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런 면이 잘 안 나타났기 때문에, 독일 내에서 "나치 시절의 군인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일본 매체가 일본군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게게게의 키타로로 유명한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 중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만화들이 있는데, 거리낌 없이 묘사하는 당시 일본군의 막장 행태가 나오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 전원 옥쇄하라!"다. 작가 미즈키는 지옥과 같은 동남아시아 전선에 갔었고 왼팔도 잃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으니, 어설픈 동경이나 자기합리화가 아닌 생생한 당사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일품이다. 작가는 "전쟁을 미화하려는 세력때문에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일본 영화에서는 그런 거 없다는 점. 그러니 일본의 2차대전 영화들은 1950년대부터 제작되었지만, 대부분 일본군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미화하며, 스스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버마의 하프>나 <호타루> 같이 극우와 거리가 먼 반전 영화도 마찬가지며, 전쟁의 비극은 그리되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잠시 구타나 일본군의 육해군 갈등이 묘사된다. 다만 완전히 없다고 보긴 애매하고, 우익 논란은 있으나 영원의 제로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도 일본군의 폭력성 및 육해군 갈등은 잘 드러난다.

그렇다고 공통적으로 일본 군부가 고의로 전쟁을 일으켰다거나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의 막장 군대다운 면모는 보통 안 보여준다. 이에 대해 자국민에게 '자국군이 악당이었다.'고 생으로 들이밀면 당연히 기분 나빠할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얘기하는 의견도 있지만, 일본 사회가 과거사의 반성을 제대로 안했다는 뜻이다. 몇몇 부분 한정으로는 나타내기도 한다.

2003년에 방영한 <사탕수수밭의 노래>의 경우 방공호에서 아기가 울자 뺏으려는 일본군 본토 병사를 오키나와인 교사가 말리자 "이래서 오키나와인이 나약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다. 이번 전쟁에서 지면 너희 오키나와 놈들 때문이다."라면서 으로 사살하려고 하거나, 오키나와인 출신으로 징집된 아버지가 찾아낸 부상당한 미군 파일럿을 포로 대우고 뭐고 사살하려고 하는 일본군 장교가 나온다. 다만 이 경우는 오키나와 전투가 일본 우익들도 빼도 박도 못하게 일본군이 자국민에게 저지른 막장짓도 있고, 오키나와 도민들도 기억하기 때문에, 일본군에 대한 전적인 미화가 힘들다.

가끔 일본산 가공전기 등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도 있다. 그래서 일본산 가공전기지만. 게다가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해군은 미국과 동급으로 나온다. 일단 일본 해군의 진주만 공습은 항공모함 다수를 적극적으로 운용해 적에게 공습을 가한 최초의 사례로서 항공모함의 진가를 세계에 일깨운 전투였고, 직후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진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시종일관 우세하긴 했다. 산호해 해전에서부터 경항공모함을 너무 앞에 세워뒀다가 날려먹거나, 적 항모전단의 위치를 알려줘도 무시하고 엉뚱한 곳의 유조선을 격침하는 등 삽질을 하는 바람에 미군에게 전략적 패배를 당하는 등 불안요소가 쌓이더니 미드웨이에서 잔뜩 허세를 부리다가 작살났지만.

오시이 마모루 작품에서는 일본군은 그리 안 나오지만 군대가 되려는 자위대가 자주 나오는 편으로, 일단 작품상의 자위대는 까이는지 안 까이는 건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세력으로 나오는데, 일단은 전반적으로는 약해보이게 나온다. 일설에 따르자면, 오시이는 운동권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계엄령이 떨어져서 자위대 소속 치안군이 도쿄에 주둔하게 되는 패트레이버 2번째 극장판에서 여러가지 추태를 보이는데, 그 중 걸작인 것이 비행선이 추락하면서 가스가 누출되자 집단으로 패닉에 빠져서 멈춰있는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다가 전부 떨어지거나 하는 등의 추태를 보인다. 이 가스는 후에 착색가스로 밝혀졌다.

코드 기어스 시리즈에선 2차 세계대전 같은게 없었기에 여전히 일본군이 존재하는 세계관이다. 그러나 여기선 침략과 학살을 일삼는 막장스런 존재가 아닌 그냥 여느 국가의 군대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집단이다. 무기체계도 현실의 자위대와 유사해보인다. 하지만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일본에 침공을 감행하면서 브리타니아군에 맞서지만 신형로봇병기인 나이트메어 프레임 군단에 연패를 거듭하면서 항복한다.

14. 일본군의 재건 가능성

일본 극우세력의 염원이 평화헌법 개정[51]을 통한 군대의 보유 즉 일본군 재건이다. 현행 자위대를 선전포고권과 교전권을 가진 정식 군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군사력 팽창과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반감으로 2000년대 이후 일본내에서 평화헌법 개정에 대한 여론이 조금씩 높아져 가고 있다.[52] 미국 또한 미-일 군사동맹을 아시아태평양 지역 패권 유지의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53] 일본의 군사력을 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기를 암묵적으로 원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의 재무장 항목 참조.

15. 관련 학설

16. 관련 전투 및 사건

16.1. 메이지 시대

16.2. 다이쇼 시대

16.3. 쇼와 시대

17. 참고 서적



[1] 1868년 1월 3일~ 1873년 1월 9일 [2] 1873년 1월 10일~ 1945년 9월 2일 [3] 자위대가 정규군이 됐을 때의 명칭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은 ' 일본 국방군(日本国防軍)'이다. 국내 언론에선 자위군(自衛軍)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미디어 매체에서 주로 등장하는 표현이라 실제 일본 내에서 고려되는 명칭은 아니다. [4]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시아에 일본군을 막아내고 있던 세력은 중화민국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떨어졌던 공업력과 군벌로 인한 혼란기 때문에 초반에 일본군에 의해 엄청난 피를 흘려야 했고, 전쟁 내내 소모전으로 싸우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겨우 승리를 얻었다.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어 식민지를 관리할 상황이 아니었으며, 소련 독소전쟁으로 일본을 막을 여력이 없었고, 미국도 동남아의 거점인 필리핀을 상실하며 초반에는 불리한 상황에 처했었다. 심지어 호주까지 일본군에게 노려졌다. [5] 마침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도 대일본제국과 유사하게 민간정부가 군인을 통제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이루어졌다. 독일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1860년대~1870년대에 근대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6] 육군대신, 해군대신 외에 군과는 직접 관계 없는 부서들, 예를 들어 아라키 사다오 전 육군대신은 예편 후 문부대신을 했다. [7] 사실 이건 실제로 군부를 막을 힘이 전혀 없다기보단, 자기가 나서서 책임지기 싫어한 것에 가깝다. [8] 당장 1980년대 ~ 1990년대에 우리나라 경양식점서 팔던 돈가스 함박스테이크, 카레라이스, 오므라이스, 파스타, 햄버거, 같은 수많은 화양식 메뉴들도 원래는 일본군 짬밥에서 유래했거나 군대에서 주로 배급되거나 한 메뉴들이여서 저 시기에 군복무를 한 사람들은 저런 것들을 제법 먹어보고 전역했다. [9] 그런데 입영 검사 후에 매음굴로 달려가서 성병 옮아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고 한다. [10] 무기만 들면 괜찮았던 시절은 아주 오래전 중세시대 정도까지에나 일이고, 기본적으로 은 다룰 줄 알아야 하니 아무리 까막눈이라도 그림책에 나오는 기본적인 글이라도 읽을 수 있게 교육은 하였다. 게다가 일본군 시대 일본어는 지금 일본어에 비해 한자가 훨씬 많고 딱딱한 문어체가 주로 쓰였던 시절이다. [11] 병장 중일전쟁 중인 1940년에 생김. [12] 4년제부터 6년제까지... [13] 심상소학교 수료 후 2년. [14] 그리고 영양상태와 큰 관련이 있는 체격이나 체력 같은 것. [15] 당시 중학교는 구제중학교라 하여 지금의 중학교와는 달랐다. 지금의 중학교는 3년제이지만, 구제중학교는 5년제의 남자 중등교육기관으로, 중학교+고등학교 통합과정이라 보면 된다. 참고로 여자 중등교육기관은 고등여학교. 당시 일본 본토에서도 중졸자는 고급인력 축에는 들었다. 한편 당시의 고등학교는 지금의 전문대학 과정에 준한다. [16] 조선인 일본군을 특별지원병으로 모병할 때는 4년제 심상소학교 수료 이상의 학력을 모집했다. 참고로 한국군 건군기에는 문맹자도 일부 징병했으나, 현대에는 중졸 이하는 징병하지 않지만, 병역 상황이 좀 이상해서 말이 좀 바뀌고 있다. [17] 엄밀히 말하면 이전의 일본군도 마냥 개판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정비되며 계속 좋아지고는 있었던 것이다. [18] 1930년 전후의 일본군 식단을 대충 보자면 '밥, 카레, 우메보시, 미소된장국', '밥, 생선구이, 단무지, 어묵국', '밥, 돈가스...' 이런 식. 거기다 병사들의 사기떨어진다는 이유로 각기병에도 불구하고 보리밥 혼식을 안 하고 쌀밥을 줬을 정도인데, 1930년대 조선은 고사하고 일본 기준으로도 매일같이 이렇게 먹으면 잘사는 축에 들었고, 지금 기준으로도 괜찮은 메뉴가 된다. 카레라이스 니쿠쟈가니 돈가스니 하는 소위 화양식이란 음식들의 기원이 대체로 군대 짬밥 메뉴들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시골 출신이거나 도시 빈민 출신 병사들에게는 군대 짬밥이 대단한 별식이었다. [19] 혹한지에서의 열량보충용으로 단당류를 추가한 것이다. 건빵 항목 참조. [20] 이오지마 같은 격오지에서도 해군의 급양이 훨씬 좋아서 지휘관인 구리바야시 장군이 해군 지휘관과 협조, 육해군 급양을 통일하게 하기도 했다. [21] 비전투병에 대한 비하는 다른 나라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가령 ' 공익이 군인이면 파리가 새'라던지, 미국 드라마 제너레이션 킬에서 미 해병대 수색대원들이 해병군수지원단의 트럭병들을 보면서 POG( 땡보)라고 멸시하는 등 아주 흔한 사례이다. [22] 비만 오면 진창이 되는 곳에서 마른 장작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해 보라. 더욱이 대규모 병력이 한 곳에 죽치고 대치 상황을 벌이고 있는데, 연료가 남아나겠는가? [23]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병사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 중에는 "고체 알코올 좀 보내달라"는 편지도 있다. 연기가 나지 않기에 포병으로부터 안전하고, 그나마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 [24] 중세 유럽군대의 미칠듯이 느린 진군속도의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보급문제였는데, 당시 기술로는 이동수단이 마땅찮기도 했고, 더군다나 한번에 많은 수의 보급품을 보낼 수 없으니 현지조달하느라 밍기적거리면 시간다까먹고 진군 속도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25] 단순히 만으로는 안 된다. 흡수율이 낮고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기 때문. 발효를 거쳐 미생물을 섞어 먹어야 약간이나마 채울 수 있다. [26] 당시에는 도정과정이 완벽치 않아 메밀국수에 메밀껍질이 그대로 들어가 있었는데, 도정되지 않은 메밀 껍질 부분에 비타민 B가 포함되어 있어 실제로 각기병에 효과가 있었다. [27] 지금은 쌀밥이 흔한 밥 취급받고 콩밥 등의 혼식이 신경 쓴 건강식이라며 주목받지만, 생산량이 떨어졌던 전근대까지만 해도 100% 쌀로만 지은 쌀밥은 부의 상징이였고 혼식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오죽하면 윗동네의 목표인 지상락원 이팝(쌀밥)에 고깃국 먹는 것일 정도니. [물론] 아시아 최강국가였던건 동양인 누구도 부정 못하지만, 애초에 앞마당격인 만주조차도 주로 남부에서나 영향력을 행사했지, 북만주는 소련 만주사변 직후 중동철도를 일본에 매각하면서 겨우 접수했다. [29] 특히 육군 근위사단 [30] 정어리는 그리 큰 생선이 아니다. 정어리 2마리 정도면 현재 대형마트 등지에서 파는 통조림 1캔 정도의 분량인데 이게 80g 정도이다. 80g의 생선으로 하루 4인 가족의 단백질을 보충하라는 것이다. [31] 독립군의 주 활동 무대이기도 했으며,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세력권이었다. [32] 다만 육군기와 해군기를 구분하지 못해 육군인데도 해군기를 쓰는 식의 고증 오류를 저지르기도 한다. [33] 징용이란 단어 자체가 강제로 노동을 시킨다는 뜻이다. [34] 민간인들이야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보를 반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기 쉽고, 일본 제국 경찰에 종사하는 경우엔 최소한 조선인들과 접점을 만들기가 쉽다. 그러나 군대의 경우는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민간사회와 엮일 일이 없기 때문에 적대적으로 묘사될 수 밖에 없다. [35] 난징 대학살, 충칭 대공습, 신멸작전, 731 부대 등. [36] 중국의 한 일본군 전문 배우는 " 악당은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며 일본군의 역할을 표현했다. # [37]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군 고증보다 중국군 고증이 훨씬 개판이었다. 중국어를 쓰는 일본군이야 예산 문제로 일본인 배우를 캐스팅하기 힘들 수 있으니 넘어가고, 싼티나는 허접한 소품과 복식도 그냥저냥 이해할 수는 있다지만 중국군 묘사는 이걸 고증 오류라고 부를 수는 있는건지, 그러면 대체 어디서부터 짚어야 하는지 그야말로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는 그 무언가에 가까웠다. 대표적인게 수류탄으로 일본군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장면. 이건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자세한 것은 중국 드라마/문제점 항목의 4번 문단 참조. 중국의 막장 드라마는 한국의 그것과도 가히 비교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38] 드라마에서 보통 이렇게 나온다. [39] 원래는 중국 군인과 같이 일종의 더블 주인공 체제로 기획되었으나, 영화를 제작 중 많은 검열을 거치며 중국 군인의 분량이 확 줄었다. [40] 분량은 적지만 중국군의 셰진위안 연대장과 라이벌 구도처럼 묘사된다. 여담으로 배우가 난징! 난징!의 주인공 카도카와를 연기한 나카이즈미 히데오다. [41] 육군과 달리 세일러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확실히 구분된다. 사실 해군 육전대는 1933년에 이미 별개의 육전복을 채용한 상태였으나, 상하이 전투에 투입된 육전대원들은 세일러복을 입었다. [42] 특이한 것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원래 일본 육군과 해군은 사실상 원수였는데, 여기서는 양쪽 군인들이 같이 배구를 하고 있다. [43] 처음에 창고로 병력들을 무작정 밀어넣었다가 대판 깨지자 곧바로 독가스를 살포해버리고 매복에서 살아남은 병사가 역으로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중국군 병사와 동귀어진 한다. 하수도에 권총과 총검으로 무장한 결사대를 보내거나 야간에 건물 뒤에서 사다리를 동원해 침투하고, 굴착기를 동원해 창고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거나 방패와 폭탄으로 무장한 공병을 보내 돌파를 시도한다. [44] 상하이 사변, 루거우차오 사건 [45] 물론 공식 사이트에서는 '침략자 일본 도적떼(日寇)'로 칭해지긴 하지만, 게임 내에서 직접적으로 자위대를 멸칭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46]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처럼 일본군 시각에서 전개되는 작품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47] 일본은 여전히 강대국이자 경제대국인 나라이며, 한 때는 세계 2위까지 오른 적이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영향력이 큰 것도 사실이지만, 일본 정부에서 세계를 상대로 공작을 벌였다는 근거는 없다. [48] 이런 시각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다. 극 중 배경의 모티브가 된 세이난 전쟁에선 반군이라고 할 수 있는 사쓰마군 역시 서양식 볼트액션 소총으로 무장하고 근대화된 일본군과 싸웠는데, 그냥 100% 냉병기로만 싸우는 전근대 무사들처럼 묘사했다. [49] 당연하지만 병기나 산업 부문이 아니라 군인들의 정신전력과 정체성 등이 대단히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기반했다는 뜻이다. [50] 이쪽은 아예 조선판 대동아공영권을 완성한 뒤 미국을 침공한다. [51] 보통 일본의 우익들은 "보통국가화"라고 부른다. [52] 다만 요새 북핵 문제는 아베 신조 정권이 정권에 불리한 사건을 덮음과 동시에 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내세우는 공안정국용 소재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 점점 강해지고 있고, 북풍 문서에도 해당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또한 한일 무역 분쟁도 " 선거를 의식해 정권에게 불리한 사건 덮기용+지지율 끌어올리기를 위해 한국 때리기를 선택했다"며 한국이나 외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비판이 거세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한국이 북한에 전략물자를 수출하는 제재 위반을 하여 전략물자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는 어불성설을 늘어놓았는데, 조사 결과 오히려 일본이 제재를 위반한 사례가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53]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안보전략에서 대서양 유럽 방위를 위한 제1 동맹국은 영국이고, 태평양 동아시아 방위의 제1 동맹국은 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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