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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수 大元帥 |
[[메이지 덴노|
1871년 메이지 천황]][[다이쇼 덴노|
1912년 다이쇼 천황]][[쇼와 덴노|
1926년 쇼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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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원수 陸軍元帥 |
1872년
사이고 다카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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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육군대장 元帥陸軍大將 |
1898년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1898년
야마가타 아리토모1898년
오야마 이와오1915년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1915년
하세가와 요시미치1916년
데라우치 마사타케1919년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1929년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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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히사이치1943년
스기야마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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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해군대장 元帥海軍大將 |
1898년
사이고 주도1913년
도고 헤이하치로1922년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1923년
가토 도모사부로 †1932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1943년
나가노 오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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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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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대 연합함대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 東郷平八郎 | Tōgō Heihachir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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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출생 | 1848년 1월 27일 | ||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카지야초 (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카지야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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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4년 5월 30일 (향년 86세) | ||
도쿄부
도쿄시 코지마치구 반초 (현 도쿄도 치요다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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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타마레이엔(多磨霊園)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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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본명 | 사네요시(実良) | |
통칭 | 헤이하치로(平八郎) | ||
신체 | 153cm | ||
최종 작위 | 후작 | ||
서훈 내역 |
서보장(瑞宝章)(3,5,6급) 욱일장(旭日章)(1,4급) 금치훈장(金鵄勲章)(1,4급) 대훈위 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 대훈위 국화장경식(大勲位菊花章頸飾) 한국병합기념장(韓国併合記念章) 로열 빅토리아 훈장(영국) 메리트 훈장(영국)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 훈장(프랑스) 폴란드 재건국 훈장 대십자장(폴란드 제2공화국) 오드로제니아 폴스키 훈장 대십자장(폴란드 제2공화국) 성녀 안 훈장 1등급 (러시아 제국) 레오폴트 대훈장(벨기에) 산티 마우리치오 에 라자로 훈장(이탈리아 왕국) 해군공훈장 대십자장(스페인)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대한제국)[1] 순종황제 남서순행기념장(대한제국) |
||
군사 경력 | |||
복무 | 일본 제국 해군 | ||
1863년 ~ 1913년 | |||
최종 계급 | 원수[2] | ||
주요 보직 |
사세보진수부사령장관 상비함대사령장관 마이즈루진수부사령장관 연합함대사령장관 해군군령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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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
사쓰에이 전쟁 보신 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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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해군 제독. 러일전쟁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다.2. 생애
1877년 유럽 유학 당시 찍은 사진
규슈 사쓰마번에서 태어났으며[3] 원래 어렸을 때 이름은 '쥬고로(仲五郎)'였으나, 성인이 되면서 '헤이하치로'로 이름을 바꿨다. 집안은 13세기부터 무사 집안이었으며, 이런 전통의 영향으로 도고 헤이하치로도 무예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에게서 '반항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반항이 잦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가고시마현 중에서도 사쓰마의 사무라이 아들이였다고 한다.[4]
도고 헤이하치로는 이후 자신의 능력을 더는 반항으로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발휘하려고 대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워서 사쓰마 지역의 다이묘인 시마즈 타다요시의 휘하 사무라이가 되었다. 사쓰에이 전쟁에도 사쓰마 번의 해안 포대 포술장으로서 참전했었던 전력이 있다. 그러던 중 1863년 어느 날, "앞으로 있을 외세의 침략에서 조국 일본을 수호하려면 먼저 막강한 해군력을 육성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해군 사관으로 임관해 1871년부터 1878년까지 동료 11명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8년간의 유학 생활에서 돌아온 1878년 7월에 중위, 12월에 대위, 그 다음해 12월에 소좌가 되는 등 빠르게 승진을 계속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나니와급 방호순양함 네임쉽 나니와의 함장을 맡아 풍도 해전, 황해 해전, 웨이하이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그 후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에 올라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제국이 자랑하는 발트 함대를 함선의 성능과 진형, 그리고 러시아 함대의 약점을 정확히 찔러서 완전히 박살냄으로써 사기 측면에서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 가던 전세를 완전히 굳혔고, 승전 이후 국가적 영웅으로 등극한다.
3. 일화
해군 사관 예복을 입고, 황태자 신분으로 육군 및 해군 대좌이던 시절의 쇼와 덴노와 함께 찍은 사진.[5]
도고는 몇 안 되는 진짜 군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뤼순 요새를 봉쇄하다가 후지급 전함 야시마와 시키시마급 전함 하츠세가 기뢰에 접촉하는 바람에 폭침되는 대참사 후에 함장들이 보고하러 와서 눈치만 살피자 오히려 따스하게 격려를 했다거나, 발트 함대 격파 이후에는 부상당하고 포로가 된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직접 문병을 가는 등, 부하나 패자에게 너그러웠다. 이런 고매한 인품과 행동으로 생전에 전 일본 국민으로부터 추앙받았다.
1933년 사진(86세) |
게다가 본인이 의도한 결과야 아니었겠지만, 해군 복제 개선을 막음으로서 일본 해군 장교들이 당시 미 해군 근무복을 참고해 만든, 목이 꽉 조여 시대에 뒤떨어지고 불편한 1종 군장(동근무복 겸 동정복)을 입고 싸우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1920년대에 해군 장교 동계 피복을 당시의 영국 및 미국처럼 목이 트인 더블 버튼에 셔츠와 넥타이를 안에 착용하는 보다 국제표준에 가까운 것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도고에게 의견을 묻자 도고는 딱 잘라서 "이 옷은 쓰시마 해전 승리의 정수다."라는 말로 반대 의견을 밝혀 무산시켰다. 위 히로히토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입은 동예복은 그나마 타국 해군의 피복과 유사한 형태다.[6]
노기 장군 사후, 그의 뒤를 이어 히로히토의 황태자 전담 교사를 맡았는데, 히로히토는 노기 장군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겼으나 도고 제독은 박하게 평했다고 한다.
장남 도고 효는 군대에 가지 않고[7] 관료로 살다가 1969년에 사망, 차남 도고 미노루 제독은 해군 장교가 되어 소장까지 진급, 태평양 전쟁을 겪고 1962년에 죽었다.
4. 가족
아버지: 도고 사네토모어머니: 도고 마사코
첫째형: 도고 사네나가
누나: (요절)
둘째형: 도고 히로유키(요절)
셋째형: 오구라 소쿠로(양자)
남동생: 도고 사네타케
장남: 도고 효 - 손녀: 도고 료코
차남: 도고 미노루
장녀: 도고 야치요
차녀: 도고 치요코 = 사위: 소노다 미노루
5. 여담
- 성격은 좀 예민했는지 저 시기에 어느 신문기자가 가족 인터뷰를 할 때 부인이 "내가 부업을 좀 해서 살림에 보태야 했다"라고 웃으며 농담을 하자 난 내 가족 굶긴 적 없어!라면서 버럭 화를 내서 기자를 겁먹게 한 일화도 있다.
-
무려 89세까지 장수를 누린[8] 어머니 도고 마사코 東郷益子.
- 일반적으로 과묵하고 위엄있는 인상이지만 한없이 가벼운 모습도 종종 보였다. 말년에 가쿠슈인에 초대되었을 때 강연 중에 학생들에게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고 한 질문에 "군인이 되고 싶다."고 대답한 학생에 "군인이 되면 죽는거야.", "정 되고 싶다면 육군 말고 해군에 넣어. 해군에 들어오면 죽지 않는다." 라고 발언하여 육군 대장이자 철혈장군으로 명성이 높았던 노기 마레스케를 격노케 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나이로도 기수로도 선배인 도고를 깔 수 있을 리가… 게다가, 러일전쟁때 노기가 갈아먹은 일본육군을 세자면 노기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9]
- 쓰시마 해전 당시 도고 제독의 함대에서는 그의 전술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한명의 사관후보생이 있었다. 그가 바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당시 야마모토는 대포를 조작하던 도중 두 손가락을 잃었다고 한다. 사실 야마모토가 받은 감명은 어쩌면 전술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도고의 사후, 그의 이름을 딴 신사가 지어지자 "성가신 일(군축조약)을 해준 대가로 신이 되었으니, 가서 절을 해주면 뭔가 얻을 일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며 비웃었다는 말이 있다. 야마모토는 그의 동료가 추방당한 일도 있고, 군축조약체결의 책임자가 도고였던 까닭에 감정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야마모토 사후 신사가 지어지려는 움직임을 지인들이 막아선 것도 그래서였다.
- 쓰시마 해전 당시 한 훈시인 "황국의 흥망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 인원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皇国の興廃この一戦にあり。各員一層奮励努力せよ)는 그를 대표하는 명언이다.
- 쓰시마 해전이 벌어진 1904년에 창업한 어느 사케 양조회사는 이 승리를 기념해 회사 이름을 아예 '도고 주조'로 지었다.
- 쓰시마 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가 황거에서 열렸을 때 일본에는 미 해군의 전함 오하이오[10]가 정박 중이었다. 일본 측에서는 이 미 해군 장교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는데, 당시 선임 장교들은 자기들끼리 노느라 제의를 거절하고 미국해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장교후보생[11] 몇명을 보냈다. 도고는 이들을 환대했고 이들 중 한 장교후보생은 도고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돌아간다. 그 인물은 바로 체스터 니미츠였다.[12]
- 핀란드에서는 '도고 맥주'가 판매되고 있다. "Amiraali[13]맥주"라는 전 세계 명제독들의 초상이 레이블 된 맥주 중의 하나다. 어찌됐든 그 덕분에 일본에서 많이 수입해 간다고 한다.
- 영국 유학 당시 먹었던 비프 스튜의 맛을 못 잊어서 함선 조리 장에게 비슷한 요리를 만든게 한 것이 전후 민간에 퍼져 니쿠쟈가로 변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웹상에 유독 괴상한 메뉴들이 떠돌아다녀서 그렇지, 영국요리 중에는 생각보다 맛있거나, 전세계에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요리들도 많다.[14]
-
그의 묘지는 일본 도쿄의 명사들이 다수 안장되어 있는 타마레이엔(多磨霊園)에 있다. 바로 옆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진주만 공습을 지휘했으며 도고 제독을 존경했다고 알려진 야마모토 제독이 나란히 묻혀 있다. 좋은 의미로 유명한 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서, 임팔 전투 패전의 원흉 무타구치 렌야 장군 등도 묻혀 있다.
- 쓰시마 해전의 대승을 전해들은 서양 기자들이 동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란 별명을 그에게 붙여줬다고 한다.
- 러시아 제국과 철천지원수 지간이었던 오스만 제국은 러일전쟁에서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가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오스만 제국 국민들이 크게 열광했고 도고 제독에 대한 인지도와 인기가 급상승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소설가이자 여성 운동가인 할리데 에딥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도고 헤이하치로에서 따 와 '토고(Togo)'라고 지었다.
- 이순신을 존경한다는 일화가 국내에 널리 퍼져있으나 사실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평가 문서 참고 바람. 다만 낭설과는 별개로 당시 일본에서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좋았던 건 사실이다.[15]
- 죽기 바로 전 날, 도고 제독의 작위가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격되었고 이에 따라 자동으로 일본 제국 귀족원의 정식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사망함으로써 일본 국회 역대 최단기간 의원 재임 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현대에 들어서도 깨지지 않고 있다.
6. 창작물에서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는 와타리 테츠야가 연기했다.문명 6에서는 위대한 제독으로 등장한다.
도고 헤이하치로도 후손들의 모에화를 피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출간된, 《여체화!! 세계장군열전~20세기편~(にょたいか!!世界の将軍列伝~20世紀編~)》에서 도고 헤이하치로를 충격의 미소녀로 모에화했다. 링크
[1]
대한제국 최고 훈장
[2]
정식명칭은 원수 해군대장이다. 호칭은 원수이지만 계급은 대장으로 일종의 명예계급이다. 계급으로서의 원수는 육해군 통틀어 동향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일하다.
[3]
그래서 가고시마시 기온노스에 기념 공원이 있다.
[4]
드와이트 존 짐머만.역사를 들썩인 전쟁 244장면.현암사.2011.pp.293
[5]
쇼와 덴노의 키는 165cm로 당대 일본인의 평균 신장보다 다소 큰 편이었다.
[6]
사실 영국식 해군 정복보다는
독일 제국 해군 예복과 더 비슷하다.
[7]
딱히 징병을 기피한 건 아니고, 메이지 정부 시절엔 징병제 도입 초기라 징집 제외 대상이 매우 많았는데, 집안의 장남 역시 가문의 대를 잇는 존재로 여겨지던 때라 징병 대상에서 제외됐었다.
[8]
1812~1901년으로 지금 시각으로 봐도 꽤나 장수한 편이다.
[9]
그러나 노기 항목에도 일부 나와 있듯이 그 당시엔 누구라도 노기가 한 행동(포격 이후 기관총 진지로 보병 일제 돌격)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러일 전쟁이 1차대전 당시의 참호전 고기분쇄기의 프리퀄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노기가 비판받아야 한다면 1차대전 당시 기술 부족으로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일제 포격 이후 일제 돌격이라는 선택지 밖에 쓸 수 없던 동맹국, 협상국 장성 모두들이 다 비판받아야 한다.
[10]
메인급 전함 3번함으로 이 이름은 나중에 페이퍼 플랜이 된
몬태나급의 2번함 (BB-67)로 계승된다
[11]
이 신분은 준사관 계급에 상당하는 위치인데,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준사관으로 2년쯤 복무하다가 소위 임관시험을 통과해야 정식 장교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했다.
[12]
미카사 함의 보존을 강력 주장한 인물 역시 니미츠 제독이었다.
[13]
핀란드어로 '제독'
[14]
한 예시로 당장 영국인들의 괴식이라며 돌아다니는
정어리 파이(stargazy pie)는
콘월 항구마을에서만 먹던 토속요리였지. 인터넷으로 밈으로 접하기 전에 해당 음식에 대해 모르는 영국인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정어리 파이가 시각적으로 괴상망측해보이는건 사실이지만 먹어본 사람들 이야기론 먹을만하다는게 중론
[15]
다만 여기에는 제국주의적 야망과 꼭 맞아떨어지는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려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밑에서 임진왜란을 수행했던 장군들를 띄워주던 분위기도 한몫 했는데 그 히데요시의 야망을 틀어막은게 이순신이다보니 이순신을 띄워주어야 그들이 진 것이 합리화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순신을 띄워주는 분위기는 해군에서 강했는데 제해권을 장악하여 조선을 승전으로 이끈 이순신을 사례로 들어 그걸 이유로 해군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