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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24 시즌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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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 쇼헤이 닛폰햄 / 투수, 외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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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내야수 |
모리 토모야 세이부 / 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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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외야수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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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016년 퍼시픽 리그 다승왕 |
2016년 퍼시픽 리그 승률왕 |
2010 퍼시픽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21번 | ||||
타나카 소지 (2000~2002) |
→ |
와다 츠요시 (2003~2011) |
→ |
센가 코다이 (2012) |
시카고 컵스 등번호 67번 | ||||
결번 | → |
와다 츠요시 (2014) |
→ |
덕 다센조 (2017~2018) |
시카고 컵스 등번호 18번 | ||||
크리스 러신 (2012~2014) |
→ |
와다 츠요시 (2015) |
→ |
벤 조브리스트 (2016~2019)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21번 | ||||
이와사키 쇼 (2013~2015) |
→ |
와다 츠요시 (2016~) |
→ | 현역 |
}}} ||
|
|
<colbgcolor=#fcc800><colcolor=#0000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No.21 | |
와다 츠요시 [ruby(和田, ruby=わだ)] [ruby(毅, ruby=つよし)] | Tsuyoshi Wada |
|
출생 | 1981년 2월 21일 ([age(1981-02-21)]세) |
시마네현 이즈모시[1]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하마다고등학교(시마네) - 와세다대학 |
신체 | 180cm | 81kg | O형 |
포지션 | 선발 투수, 중간 계투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 입단 | 2002년 드래프트 자유획득범위[2] |
소속팀 |
후쿠오카 다이에-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3~2011)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마이너 (2012~2013) 시카고 컵스 (2014~2015)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6~) |
연봉 | 2024 / ¥200,000,000 |
| |
1. 개요2. 피칭 스타일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경력3.2. 프로 경력
4. 연도별 성적5. 여담6. 관련 문서[clearfix]
1. 개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좌완 선발 투수로, 2012년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하여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마이너리그, 시카고 컵스에서 뛰다 2016년 호크스로 복귀하여 현재까지 뛰고 있다.2022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 다이에 호크스 재적 경험이 있는 유일한 프로야구 선수이다.
2. 피칭 스타일
|
2003년 데뷔시즌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만들어낸 7차전 완투승의 마지막 공 |
|
145km/h 패스트볼 |
|
정면에서 본 투구폼[3] |
|
측면에서 본 투구폼 |
|
2009~2022년 투구 구사표 |
2023년 기준 평균 143km/h, 최고 147km/h[4]의, 구속만 보면 전형적인 좌완 기교파 투수일 것 같지만 독특한 투구폼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동시에, MLB 평균인 2200rpm을 상회하는 2350rpm 패스트볼을 스트라이크존에 우겨넣는 파워피쳐형 스타일이다.[5] 그리고 구속에 비해 공에 회전이 많이 걸리다보니 탈삼진율이 높은편으로 이절벽 선생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다. 다만 구속이 낮다보니 홈런을 좀 맞는 편.[6] [7] 특히, 국제대회에서 와다는 통산 8실점을 하였는데, 그 중 무려 7실점을 홈런으로 내줬을 정도로 은근히 홈런을 잘 맞는 편이다.
즉, 한일전에서 만큼은 한국 타자들을 경계해 철저한 바깥쪽 로케이션과 변화구 무브먼트를 앞세워 승부했다는 것. 적어도, 한일전에서 그의 모습은 '기교파 투수' 혹은 '제구파 투수'스러웠다. 실제 그를 베이징 올림픽에서 상대해 본 이대호도 "와다 선수 컨트롤이 워낙 좋아서 치기 어려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리그내에서는 스트라이크 존에 패스트볼을 꽂아 넣는 파워피처스러운 면모를 보여주지만, 한국전에서는 제구와 변화구 무브먼트만으로 승부하는 모습을 보여준 셈. 실제 한일전 경기에서 그의 피칭을 자세히 살펴보면, 리그에서와는 달리 굉장히 조심스럽게 스트라이크 존에 제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리그에서처럼 빠른 승부를 하지도 않고 철저하게 바깥쪽 패스트볼 로케이션과 변화구 낚시 일변도로 한국 타자들을 상대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와다가 한국 타자들의 장타력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일한 예외가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한국전에서 4회말 한국의 주포 김동주를 상대로 2-1 카운트에서 스트라이크존 가운데 높은 코스로 속구를 던져 빠른 승부를 해 삼진을 잡아냈던 것. 사실 이는 당시 포수 조지마 겐지와 와다 두 배터리의 합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바깥쪽 패스트볼 로케이션과 변화구 낚시 일변도로 승부하다 변칙적으로 볼배합을 바꿨기 때문.
그리고 2008 베이징 예선 한일전에서 이대호에게 내준 홈런을 파워 피처 스럽게 대놓고 스트라이크 잡으려다가 헌납한 홈런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당시 타석에서 0-2 카운트까지 잘 잡아놓고 연속으로 바깥쪽으로 속구를 던졌는데, 이대호가 그 공들을 계속 커트하고 변화구 유인구들은 잘 걸러내 2-2 카운트까지 만들었다. 이대호가 아웃당하지 않고 성가시게 굴자, 이번에는 포수가 몸쪽 공을 요구해 허를 찌르려했으나 와다가 힘이 빠져 있던터라 그만 실투를 던져 가운데와 바깥쪽 사이 높은 공을 던져버렸던 것. 즉, 이대호에게 헌납한 홈런은 파워피처스럽게 대놓고 속구로 삼진잡으려고 한복판에 던졌다가 맞아버린게 아니라 철저한 바깥쪽 로케이션과 변화구 유인구를 던지던 와중, 볼배합을 바꿔 허를 찌르려다가 실투가 나와 맞았던 것이다.
애초에 큰 것 한 방을 경계하여 본인도 본인의 속구를 과감하게 스트라이크 존에 아무렇게나 던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제구 능력과 변화구 무브먼트를 앞세워 승부를 한것이므로, 이대호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싶은 욕망때문에 일부러 가운데 스트라이크에 공을 집어 넣었을 확률도 낮다.
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경력
|
와세다대학 시절 |
고등학교 졸업 후 와세다대학으로 진학해 투구폼을 바꾸더니 구속이 늘어나면서 가뜩이나 많은 회전으로 인해 치기 어려운 와다의 공이 더 치기 힘들어졌고 이로 인해 탈삼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통산 476탈삼진을 기록, 에가와 스구루가 가지고 있던 도쿄 6대학 리그 최다 탈삼진 기록을 경신했고 4학년 때는 와세다대학의 역사상 첫 리그 4연패를 이끌면서 많은 프로구단들의 관심을 받았다. 대학 시절 통산 성적은 62시합 등판, 27승 13패, 평균자책점 1.35, 476탈삼진으로 상술했듯이 탈삼진은 리그 역대 1위이며 통산 27승은 와세다대학 좌완투수 통산 최다승 기록이다.
릿쿄대학의 타다노 카즈히토 등과 함께 대학 투수 최대어로 평가받았고 2002년 드래프트에서 자유획득 범위를 통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입단을 선택하며 프로에 발을 들였다. 호크스에 들어간 이유는 대외적으론 아키야마 코지의 은퇴식 때 감명을 받았고 호크스 팬들의 응원이 흡사 소케이센을 연상시켜서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은 학생 시절부터 물밑에서 다이에 스카우트진의 밀착 마크와 금전을 동반한 스카우트 공세가 있었을 거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다.[9]
3.2. 프로 경력
3.2.1. 호크스 1기(2003~2011)
데뷔 시즌인 2003년부터 스기우치 토시야, 그리고 기존에 있었으나 드디어 포텐이 터진 사이토 가즈미[10], 아라카키 나기사와 함께 선발진을 형성하여 14승 5패를 기록하면서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의 큰 기여를 했다. 신인 자격으로 일본시리즈 7차전에서 완투승을 기록하는 등 큰 무대에서도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으며[11] 이 활약을 바탕으로 국내에선 삿포로 참사로 유명한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겸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의 한일전 선발투수로도 나와 5.1이닝 무실점 호투를 거두고 올림픽 본선 멤버로도 뽑혀 동메달을 수상했다. 그러나 2004년 정규 시즌에선 본인이 소포모어 징크스는 없다고 외쳤음에도 피홈런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낮은 피안타율에도 불구하고 평균자책점이 4.35(12위)[12]로 치솟으며 부진을 겪었다. 그나마 10승 6패로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 기록엔 성공했다.
팀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바뀐 2005년에는 소프트뱅크 호크스 최초의 개막전 선발투수로 등판하여 이기더니 팀에서는 거의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데뷔 후 첫 3년 연속 10승 투수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 활약을 바탕으로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기록을 갈아치운 4년차 최고 연봉을 기록했다. 그리고 2006년과 2007년에도 꾸준히 10승+씩 달성하면서 팀의 기록을 계속 달성했다.~ 2008년에는 올스타전 직전까지 8승을 달성하는 등 이번에도 10승+를 기록하는가 했으나 8승에 머물고 말았다. 2009년에도 개막시리즈에서 완봉승을 거두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나 이번엔 팔꿈치 통증으로 팀에서 빠졌다.
그리고 2010년 지난 시즌 못 던진 한을 푸는 듯이 올스타 선정, 개인 최다 탈삼진 기록, 개인 최다승을 기록했고 그 기록으로 퍼시픽 리그 베스트 나인과 퍼시픽 리그 MVP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13] 다만 팀은 저주에 걸렸는지 지바 롯데에 일본시리즈 진출 기회를 내줬다. 어쨋든 이 활약을 바탕으로 2011년 개막전 선발을 다시 차지했다. 그리고 스기우치 도시야, 데니스 홀튼, 셋츠 타다시와 함께 선발진을 형성했고 팀은 8년 만에 일본시리즈를 우승했다. 그리고 FA를 행사해 메이저리그로 진출했고 아시안 수집에 열을 올리던 댄 듀켓 단장의 눈에 들어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등번호는 대학시절에 달던 18번.
3.2.2. MLB 시절(2012~2015)
그러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입단하자 스프링캠프에서 팔꿈치에 통증을 호소했다. 그리고 시즌이 들어가서 한 경기 등판을 하고 다시 통증이 다른 위치에 발생했고 토미 존 서저리 판정이 나서 1년을 통째로 날려먹었다. 그리고 2013년에도 마이너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시즌 후에 방출이 되었다. 와다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오리올스에 입단한 NPB 출신 선수가 바로 천웨이인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와다가 먹튀(...)한 몫까지 활약했다.
이후에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했다. 마이너 계약이다보니 등번호도 67번. 그리고 2014년 마이너에서 좋은 활약을 하면서 40인 로스터에 들더니 제프 사마자 트레이드로 선발진에 공백이 생기면서 콜업, 미국 진출 3년만에 드디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되었다. 2014년 8월 19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 5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가운데 비로 인해 메이저리그 커리어 첫 완봉승을 따낼 뻔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항의로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바뀌면서 무산. 승리투수 요건은 갖춰져 있는 상태였고 경기가 2:1로 시카고 컵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2014시즌 최종 성적은 13경기 4승 4패 평균자책점 3.25로, 빅리그 첫 시즌을 무난히 잘 보냈다.
하지만 2015시즌에는 작년처럼 잘 하던 중 부상으로 인해 8경기 등판에 그쳤고, 결국 2015년 11월 3일, 컵스에서 전력 외로 판정받아 방출되어 소프트뱅크와 다년 계약 합의했다는 기사가 났다.
MLB통산 2시즌 21경기 20선발 101.2이닝 5승 5패 방어율 3.36 88탈삼진 bWAR 2.0. 일단 나오면 꽤 안정적으로 잘 던져주었는데, 30줄이 다 되어 진출해 가뜩이나 나이도 많은데 가자마자 부상이 내리 겹치며 나오질 못했고, 좀 나아서 잘 던지나 싶더니 다시 부상으로 MLB생활을 접어야 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선수.
3.2.3. 호크스 2기(2016~)
3.2.3.1. 2016 시즌
친정팀으로 복귀하면서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았다. 돌아온 에이스의 모습을 보이며, 163이닝동안 15승 5패 ERA 3.04의 성적을 거두며 복귀 첫 해에 다승왕, 승률왕을 차지하면서 그 실력 어디 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22피홈런으로 피홈런왕에 오르기는 했지만 나이와 구장의 변화한 환경을 생각하면 명불허전의 실력을 보여준 것. 하지만 시즌 막판 팔꿈치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정작 포스트 시즌에는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지만 호크스가 시즌 막판 닛폰햄에게 리그 우승을 뺏기고 포스트시즌에서도 탈락한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3.2.3.2. 2017 시즌
2017년에는 개막전 선발투수를 맡았지만, 팔꿈치 통증으로 인해 로테이션을 지키지 못했고 결국 5월에 수술을 받으며 전반기 대부분을 날려 8월 중순에야 복귀했다. 8경기 47이닝만을 던졌지만, 4승 무패 2.49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기량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8월 27일 롯데전에서 통산 1500 탈삼진을 달성했다.3.2.3.3. 2018 시즌
결국 2018년 들어서 팔꿈치 통증이 제대로 탈이 나 단 한차례도 등판하지 못했다. 당연히 연봉 역시 4억엔에서 1억엔+옵션으로 보장 액수만 75% 삭감되었다. 다만 본인은 3년의 계약 기간중 사실상 제대로 뛴게 1년 뿐이라 1억엔에 옵션까지 넣어준것 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밝혔다.3.2.3.4. 2019 시즌
2019년에도 많이 등판을 하진 못했지만 일본시리즈 4차전에서 5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내 팀의 3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3.2.3.5. 2020 시즌
2020년에도 16경기 8승 1패 ERA 2.94로 나이를 잊은 활약을 했다. 이러한 공헌을 높이 사 소프트뱅크는 와다에게 2년 계약을 안겼다.3.2.3.6. 2021 시즌
2021년엔 천하의 와다도 나이 40이 되니 노쇠화가 찾아왔는지 18경기 방어율 4.48, 5승 6패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3.2.3.7. 2022 시즌
그래도 소프트뱅크 측은 그를 신뢰하며 1억 5천만엔에서 1500만엔 오른 1억 6500만엔에 재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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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판일지 |
그러나 2022년에는 7승 4패 방어율 2.78을 기록하며 전년도의 부진을 떨쳐내고 베테랑의 관록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시즌 후 열린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파이널 스테이지 오릭스와의 4차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와다는 2022년 정규시즌 오릭스 전 5번의 등판에서 5경기 0승 3패 ERA 5.03이라는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고, 상대 오릭스의 전반적인 전력이 소프트뱅크에 비해 우세로 여겨졌기에 와다의 등판에 팬들의 기대치는 상당히 낮은 분위기다.
하지만 힘들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본 경기에서 꽤나 선방해주었다. 특히, 2회까지는 퍼펙트 3회까지는 무안타로 오릭스 타선을 꽤나 잘 억제했다. 그러나, 문제가 터진 것은 4회. 4회말 요시다 마사타카에게 선제 투런 홈런을 헌납하고 만다. 상대 투수인 야마오카 타이스케도 여러차례 삼자범퇴[14]를 포함, 무실점으로 소프트뱅크 타선을 잘 막아내 스코어 0-2로 소프트뱅크가 오릭스에 뒤지게 된다. 5회 다시 올라온 와다가 선두 타자를 출루시켰지만 후속 타자 와카츠키의 번트 타구를 곧장 2루로 송구해 1루 주자를 아웃시키는 좋은 수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송구 이후 통증을 호소하며 마운드에서 곧장 강판되었다.
이후, 경기는 알프레도 데스파이네가 7회초 동점 투런 홈런을 쏘아 올려 두 팀은 스코어 2-2로 동점이 되어 와다는 ND 기록. 소프트뱅크가 나름 잘 따라붙었지만, 9회말 나카가와의 끝내기 안타로 스코어 3-2 오릭스의 승으로 끝났고 오릭스의 일본 시리즈 진출이 확정되었다. 자연스레, 소프트뱅크는 패퇴의 쓴잔을 맛봐야 했다.
이번 시리즈에 패함으로써 2년 연속 퍼시픽 리그 왕좌 자리를 오릭스에 내준 꼴이 되었고, 소프트뱅크가 오릭스에게 왕조 자리를 바통 터치했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소프트뱅크의 2010년대 중후반 왕조가 그 명맥을 2020년 대까지 잇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그 구성원인 와다도 베테랑으로서 같은 아픔을 맞이해야했다. 어찌 보면, 2003년 와다는 프로 초년병으로서 혜성처럼 등장해 정규 시즌 좋은 스텟을 쌓음과 동시에 팀의 일본 시리즈 석권까지 함께하며 21세기 후쿠오카 야구 팀[15]의 새 역사를 썼고, 메이저에서 복귀한 이후에는 왕조를 함께한, 그야말로 후쿠오카 프로 야구 팀 전성기의 산증인인 셈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와다는 선수생활 말년에 왕조의 쇠퇴기까지 함께 자리하게 되며 팀의 부흥과 절정 그리고 쇠퇴까지 함께한, 후쿠오카 야구 팀의 희노애락을 명징(明徵)하는 선수가 되었다.
동년도를 마지막으로 팀메이트인 아카시 켄지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다이에 소속 경력이 있는 유일한 NPB 선수가 되었다. 또한 2022시즌을 마지막으로 후쿠도메 고스케가 은퇴하며, 일본 프로야구 현역 중 유일하게 아테네 올림픽 일본 대표팀을 경험해 본 선수가 되었다. 또한, 후쿠도메의 은퇴로 아테네 올림픽 전년도(2003년)에 열린 올림픽 예선을 겸한 대회인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한 유일한 현역 선수가 되었다. 여담으로, 이 대회는 대한민국에는 삿포로 참사로도 유명한 대회로, 당시 한국 대표팀의 선수들은 모두 현역에서 현재 은퇴한 상태다. 무려 20년 전 대회였다는 점과 한일 양국 통틀어 와다만이 선수 생활을 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와다의 자기관리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16][17]
추가로 후쿠도메가 은퇴함으로써, 2006 WBC 금메달을 획득한 일본 대표팀 일원 중 아오키 노리치카와 더불어 현역으로 활동 중인 유이한 선수가 되었다. 참고로, 2006 WBC의 대한민국 대표팀은 2022년 7월 3일 박용택의 정식 은퇴[18]를 끝으로 오승환을 제외한 모든 선수가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오승환의 경우 2023년에도 현역을 연장한다고 천명한 상태이기에 아마 당분간은 2006 WBC를 경험해 본 선수가 현역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한일 양국 모두 볼 수 있을 듯 하다.
3.2.3.8. 2023 시즌
시즌 최종 성적은 21경기 전 경기 선발 등판해서 100이닝, 8승6패, 평균자책점 3.24를 기록, 7년만에 100이닝을 던지며 나이를 거꾸로 먹는듯한 활약을 했다. 경기 수가 좀 부족하고 ERA도 살짝 높긴 하지만 42세임을 감안하면 훌륭한 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적이 반등했다보니 연봉도 상승해서 2억엔에 계약을 맺었다.그런데 연봉계약후 정말로 충격적인 소식이 와다랑 일본야구팬들을 기다렸으니...
3.2.3.8.1. 보상선수 지명 소동
2024년 1월 11일자 닛칸스포츠발 기사로 야마카와 호타카의 보상선수로 지명되었다라는 충격과 공포의 기사가 떠 기사가 뜬 이후 오전 내내 엄청난 반응들이 오갔었다. 그러나 당일 오후에 발표된 보상선수는 카이노 히로시였는데 # 이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지만 정설로 추측되는건 이와세 히토키의 보상선수 지명 소동[19]과 똑같은 상황이 이번에는 와다 츠요시에게 전개되었다는 것이다.추측의 가장 큰 베이스가 되는 건 이와세 히토키 사태를 보도했었던 도쿄스포츠마냥 닛칸스포츠가 이름값이 밀리거나 찌라시를 날리는 3류 언론사도 아닐뿐더러[20] 그러한 언론사가 와다의 보상선수 지명소식을 인터넷 기사처럼 한 번 쓰고 수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신문 지면 1면에 떡하니 띄워놨다는 점, 그와 더불어 야마카와의 보상선수 발표가 평소 NPB의 보상선수 발표보다 느린 오후 5시 반에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을 하 듯 오후에 나온 카이노 히로시의 보상선수 관련 TV 니시닛폰[21]발 기사나 # 와다의 보상선수 지명을 최초보도한 닛칸의 후속기사 #에 나온 '세이부가 10일까지는 와다를 고려했었다'라는 발언을 봤을 때 양 구단 사이에서 자체적인 협의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라는 것이 유력하다.
실제로 보상선수로 팀을 떠나게 된 카이노 히로시도 평균 구속이 155에 달하며 23시즌에도 소프트뱅크 불펜의 일원으로 활약한 꽤나 중요한 자원이다. 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와다가 나가는 사태를 막았다는 것에 가려져서 그렇지 카이노의 유출도 소프트뱅크 입장에서는 꽤나 타격이 있는 편. 이 때문에 협의 과정에서 와다의 지명을 철회하는 대신 그 대가로 카이노를 데려가겠다는 딜을 제시한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3.2.3.9. 2024 시즌
나이로 인한 에이징 커브가 찾아온 것인지 7월 기준 5경기에서 2승2패 ERA 4.01로 매우 좋지 못하다.[22] 7월 5일 경기에서 4이닝 4실점 후 1군에서 말소되었다.3.2.4. 국가대표 경력
한국에서도 한국 킬러로 유명할 정도로 한국전에 매우 강했다. 이뿐 아니라, 다른 국가와의 경기에서도 종종 호투하였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 2006년 WBC 초대 대회 우승 등 국가대표 커리어도 꽤나 화려한 편. 와다의 경우 플레이 스타일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독특한 투구폼 때문에 타자들이 타이밍 잡기가 쉽지 않은 타입이다. 이때문에, 단판으로만 만나는 국제대회에서 상당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3.2.4.1.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먼저, 와다 츠요시의 프로 첫 국가대표 커리어는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대만과의 경기는 각각 우에하라 고지와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선발로 등판하였고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한일전에 와다가 선발 투수로 등판한다. 당해 와다는 페넌트 레이스에서 준수한 성적[23]으로 신인왕을 차지하였고 일본시리즈에서도 7차전 완투승을 기록하는 등 신인이지만 물이 오를대로 올라있던 상황이었다. 경기 전, 한국에서는 큰 국제 경기 경험이 부족할 것이라 판단하여 빠르게 공략하여 선발을 무너트려야한다고 언론에서 떠들어 댔지만 와다를 만만히 본 것은 큰 오산이었다.* 한국전에 선발 등판한 와다는 엄청난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국타자들을 꽁꽁 묶었다. 1회 말 일본의 수비에서 선두 타자 이진영을 1루 땅볼, 2번 타자 김종국과 이승엽은 각각 바깥쪽 체인지업과 직구로 삼진을 잡아 삼자범퇴로 이닝을 처리한다. 2회말 선두타자 김동주에게 높은 직구를 던졌는데, 이를 김동주가 맞받아쳐 우측 담장을 향하는 굉장히 큰 타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우익수 후쿠도메 고스케가 담장에 부딪히면서 하이점프 캐치로 타구를 캐치해내어 장타를 막아냈다. 이 호수비는 굉장히 컸다. 바로 다음타자 박재홍의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가 터졌기 때문. 후쿠도메의 호수비가 아니었다면 선취점을 빼앗기는 동시에 무사 2루의 위기 상황이 되었겠지만, 후쿠도메의 호수비로 실점없이 1사 2루의 상황이 된 것. 박재홍의 다음타자 정성훈이 우익수 플라이 아웃, 장성호를 바깥쪽 직구로 삼진 처리하며 위기를 무사히 넘긴다. 일본 타자들이 선취점을 뽑아줘 1:0으로 앞선 상황 3회말에 다시 마운드에 등판한 와다는 선두타자 조인성을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삼진 처리, 박진만을 바깥쪽 직구로 삼진, 이진영도 바깥쪽 직구로 삼진 잡아내며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4회말, 선두 타자 김종국에게 가운데 높게 형성되는 커브로 좌전안타를 맞아 선두타자 출루를 허용하게 된다. 후속 타자 이승엽을 풀카운트 접전 끝에 2루 땅볼 처리하여 1사 2루로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놓이게 된다. 후속 타자이자 한국의 주포 4번타자 김동주는 높은 직구로 헛스윙 삼진 잡아낸다. 2사 2루 상황에서 후속타자 박재홍이 유격수 내야 안타로 2사 1,3루의 위기가 계속된다. 거기다가 후속타자 정성훈을 데드볼로 맞춰 2사 만루의 위기가 도래한다. 후속 타자는 장성호. 장성호는 타석에 들어 설 때부터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고, 끝내 와다가 바깥쪽 체인지업으로 헛스윙 삼진 처리하며 실점없이 위기를 넘겼다. 5회초에는 1점을 타자들이 더 보태주었고, 2:0 앞선채로 5회말에 와다는 마운드에 다시 등판하였다. 선두타자 조인성을 바깥쪽에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삼진 처리한다. 후속 타자 박진만 - 이진영은 각각 좌익수 플라이 아웃, 1루 땅볼 처리하며 삼자 범퇴로 이닝을 깔끔하게 막았다. 6회말에 다시 올라온 와다는 선두타자 김종국은 중견수 플라이 아웃 처리 하였다. 하지만 이승엽에게 키스톤 콤비 사이를 빠져나가는 중전 안타를 맞았고, 이후 김동주를 볼 넷으로 내보내며 1사 1,2루 위기를 맞는다. 와다의 역할은 여기까지였고, 구로다 히로키로 투수가 교체되었다. 구로다는 박재홍을 1루 파울 플라이로 뜬공, 정성훈은 8구까지 가는 끈질긴 승부끝에 좌익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며 승계주자 득점 허용 없이 이닝을 무실점으로 마무리 지었다. 와다도 이 덕에 경기를 무실점으로 마무리했고, 팀도 이어 올라온 투수들[24]이 무실점 호투하며 경기는 2:0으로 종료됐다. 그리고 와다는 국제전 첫 경기에서부터 승리 투수가 되는 기쁨을 맛봤다.
한국 언론의 예상과는 달리, 와다는 국제 무대 경험이 없어도 막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특유의 칼제구와 상술된 특유의 투구폼 때문에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아, 타자들은 와다의 포심을 그대로 지켜 보다 삼진 당하거나 직구에 타이밍이 늦어 헛스윙 하였다. 여기에 뛰어난 무브먼트의 변화구때문에 연신 헛스윙하는 등 와다에게 완벽히 막힌다. 실제로, 와다는 리그 내에서는 전형적인 파워 피처 같은 피칭을 한다. 본인은 "나의 생명선은 스트레이트다."라고 말할 정도로 직구를 거침없이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유리한 카운트를 만든 후 변화구로 타자를 공략하거나 공격적으로 다시 직구를 넣어 타자를 처리하는 스타일의 피칭을 펼치는 것이 주이다. 즉, NPB 리그 내에서는 직구로 정면승부하거나 욱여넣는 전형적인 파워피처.
하지만, 이 날은 그간의 피칭과는 달랐다. 제구를 신경쓰지 않고 직구를 과감하게 스트라이크 존에 내다 꽂기보다는 장타를 의식한 탓인지, 공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다뤄 로케이션 능력으로 타자를 상대했다. 특유의 제구력을 바탕으로 하여, 타자가 치기 까다로운 구석으로 공을 몰아 넣거나 체인지업 낚시로 헛스윙을 유도하거나 땅볼을 양산해냈다. 대표적으로, 바깥쪽 꽉찬 직구로 이승엽을 룩킹 삼진 처리하기도 했으며 이외에도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유도하거나 많은 땅볼과 플라이볼을 양산해냈다. 이 날의 피칭은 영락없는 '기교파 투수' 그 자체였다. 칼같은 제구로 '제구파 투수'같은 면모를 보이며 한국 타자들로 하여금 상대하기 곤란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체인지업까지 더해져 기교까지 부리니 한국 타자들이 수싸움에서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리그에서 직구를 팍팍 꽂는 모습과는 달리 직구를 바깥쪽 꽉차게 제구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와다가 한국 타자들의 장타력을 얼마나 의식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경기를 자세히 보면, 그를 상대로 찬스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와다는 위기 상황에서 그 특유의 제구력과 변화구 무브먼트로 위기를 벗어났다.[25] 결과적으로, 5와 3분의 1이닝 동안 4피안타 9탈삼진 2사사구[26] 무실점을 기록했고 한국 타자들이 제대로 공략을 못하자 이 경기를 기점으로 와다는 한국 킬러로 떠오르게 된다.
3.2.4.2.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상술된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예선을 겸한 대회였는데, 일본은 3승 무패로 예선을 통과해 아테네 올림픽 본선을 진출한다. 와다 츠요시 개인은 2004년에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으며 부진[27]하였지만, 전년도 국제대회에서 한국 타자들을 틀어막는 모습과 그 경험을 이유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발탁된다. 와다는 해당 대회에서 캐나다전만을 출전하였고, 두 번의 캐나다 전에서 선발로 등판한다.-
와다의 첫 등판은 예선
캐나다전이었다. 팀 타선이 1회부터 5회까지 매 이닝 점수를 득점하며 5회까지만 해도 8점을 획득해줘 와다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와다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7이닝 3피안타 7탈삼진 3볼넷 무실점을 기록하며 국제용 투수로서의 위용을 보여주며 승리 투수가 된다. 팀은 이 날 9회까지 캐나다 타선을 단 한 점으로 틀어막았고 타자들은 8회에 1점을 더 추가해 9:1로 가볍게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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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와다는 4강전까지 출전하지 못하다가 일본이
4강에서 호주에 1:0 팀 영봉패로 진 후, 메달 획득 여부를 결정하는
동메달 결정전 캐나다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무거운 중책을 맡게 된다. 이 경기에서, 일본의 팀 타자들은 전 경기 영봉패의 설움을 씻어버리기라도 하듯, 1회부터 맹타[28]를 퍼부우며 4회까지 7점을 득점해주어 와다를 든든하게 지원해줬다. 하지만, 3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막던 와다는 4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4회에 연속 안타로 1점을 내줬고 5회에는 제레미 웨어에게 솔로 홈런을 내주며 총 2실점을 하게 된다. 이후, 5회 이후부터는
쿠로다 히로키로 교체되었고 팀은 더 이상 실점하지 않은채 타자들이 8회에 4점까지 추가해주어 최종 스코어 11:2로 이기게 되었고 동메달을 획득한다. 이날 와다는 5이닝 4피안타 6탈삼진 3사사구(2볼넷 1사구) 2실점으로 예선전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럭저럭 좋은 피칭을 보여 승리투수가 되며 일본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한다.
3.2.4.3. 2006 WBC
2006년에는 초대 WBC 대회에 일본 국가대표팀 일원으로서 참가한다. 하지만, 왕정치감독은 선발로 우완인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우에하라 고지, 그리고 언더인 와타나베 슌스케등을 중용하고 좌완 투수들은 선발에서 배제하였다. 와다 츠요시는 대회 직전년도에 3년 연속 두자리수 승수에 방어율도 데뷔 이래 가장 좋은 기록을 남겼을 정도였고 대회 직전까지도 컨디션이 좋아 한국 팀의 경계대상 1호였다. 애초에,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와다에게 크게 데였던 기억이 있었기에 경계를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한국의 4번타자 김동주의 경계. 하지만, 왕정치 감독은 예상과 다르게 1라운드 아시아 시리즈에서 3일 중국전에 우에하라-시미즈, 4일 대만전은 마쓰자카-와다, 5일 한국전은 와타나베 슌스케- 스기우치 도시야 등 경기당 2명씩의 선발급 투수들을 투입하겠다는 구상을 밝히며 한국전에 와다를 투입시키지 않을 방침을 내비쳤다. 그러나, 와다는 그 대만전도 던지지 못하게 되는데 왼쪽 어깨가 붓는 바람에 1라운드 아시아시리즈를 모조리 결장하게 된다. 심지어는 2라운드 직전에 미국에서 일본 대표팀은 3월 10일 텍사스와 평가전을 가지게 되는데 여기서 와다는 2이닝 동안 3실점을 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아직 컨디션이 다 회복되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출처 이처럼 와다 본인은 실전 경기 감각도 떨어져있고 아직 부상 위험도 있는데다가 같은 좌완인 후지타 소이치가 당시 대회에서 컨디션이 무척 좋았고 전년도 어마무시한 성적을 기록하며 사와무라 상을 수상한데다가 1라운드 한국전에 2이닝 퍼펙트로 완벽투를 선보인 스기우치 도시야에 밀려 핵심 좌완 불펜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이전 대회들과는 다르게 2006 WBC에서는 중요도가 떨어지는
멕시코와의 경기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이 경기에서는 2이닝 1피안타 1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2라운드 직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3.2.4.4. 2008 베이징 올림픽
2008년 전반기 17경기 116과 3분의 2이닝 동안 83탈삼진 ERA 3.78로 애매한 성적[29]을 기록 중이던 와다를 국제대회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근거로 당시 일본 대표팀 감독 호시노에 의해 발탁된다.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한 와다는 2006년 WBC 대회와는 다르게 중요한 경기에서 선발 중책을 맡았다.-
와다는
한국과의 예선 경기에서 처음으로 등판하였다. 이 경기에서 와다는 6회까지 무실점으로 엄청난 호투를 보여주며 한국 킬러의 명성에 걸맞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1회초 한국의 공격에 선두타자 이종욱을 바깥쪽 직구로, 2번타자 이택근을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삼진 처리하였고, 3번 정근우를 3루 땅볼 처리하며 무난하게 이닝을 삼자범퇴 처리했다. 2회초에는 이승엽을 초구만에 중견수 플라이 아웃, 김동주를 2구만에 유격수 땅볼 아웃, 이대호를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삼진 처리[30]하며 2이닝 퍼펙트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3회 초에는 선두 타자 이진영에게 가운데 몰리는 공으로 중전 안타를 허용했다. 이후 진갑용이 희생 번트를 시도했지만, 투수 정면으로 볼이 빠르게 흘러 와다가 빠르게 2루에 던져 선행 주자 이진영을 포스 아웃 처리하여 원아웃 1루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늘렸다. 후속 타자 김민재를 삼진 처리하며 2아웃 1루 상황. 이종욱이 초구 몸쪽 높은 직구를 받아쳐 좌전 안타를 만들며 2아웃 1,2루의 위기를 맞는다. 여기서 와다가 던진 바깥쪽 직구를 후속 타자 이택근이 잘 맞받아쳤냈다. 하지만 중견수 아오키가 빠르게 첫발을 끊어 타구를 낚아챘고 중견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며 실점없이 위기를 넘겼다.[31]
이후 맞이한 4회초에도 위기 상황을 맞는다. 선두 타자 정근우를 2루수 플라이 아웃[32], 이승엽을 바깥쪽 꽉찬 직구로 삼진을 잡아냈으나 김동주와 이대호에게 연속 안타를 맞아 3회와 같은 2사 1,2루의 위기를 다시 맞는다. 전 타석에도 중견수 방향 안타를 쳐냈던 이진영이 와다가 던진 직구를 잘 받아 쳐내 다시 중견수 방면으로 타구를 보냈으나, 중견수 아오키가 빠르게 스타트를 끊어 아웃 처리 시켰고[33] 와다는 다시 위기를 잘 넘긴다.[34] 5회초에는 진갑용을 1루 땅볼, 김민재를 2루수 플라이, 이종욱을 바깥쪽 꽉찬 직구로 삼진 돌려세우며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한다. 5회말, 일본 타자들도 상대 선발 김광현에게 막혀 득점을 하지 못했고[35] 팽팽한 0의 행진이 계속 되었다. 6회초에는 이택근, 정근우, 이승엽[36]을 모조리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냈다. 이 지루한 0의 행진 속에서 6회말에 김광현을 뒤이어 등판한 윤석민이 아라이 다카히로에게 좌측 담장을 넘기는 투런 홈런을 내주었고 2:0으로 한국은 일본에 뒤지게 된다. 이렇게, 2점의 리드를 안고 7회초에 와다는 다시 등판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6회까지 많은 공을 던지며 지쳐있던 와다는 7회에 무리하게 등판하였고, 선두 타자 김동주에게 볼 넷을 내주며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방문하여 교체해주는가 싶더니[37] 힘이 빠진 와다를 계속 기용하기로 강행. 결국 다음 타자 이대호에게 좌측 담장을 넘기는 큼지막한 투런 홈런을 내주며 한국을 상대로 지켜오던 통산 무실점 기록이 깨졌다. 1볼 투스트라이크 카운트에서 이대호는 바깥쪽 제구되는 와다의 공을 계속 커트해냈고, 2회처럼 체인지업을 낮게 떨어트렸으나 이대호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38]
2-2카운트에서 바깥쪽은 다 커트해내고 떨어지는 변화구와 유인구들은 다 골라내니, 결국 포수는 이번에는 반대 코스로 의표를 찌르기 위해 몸쪽 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와다가 던진 직구는 가운데에서 바깥쪽 사이 높은 코스로 몰렸고 이대호는 이 실투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잡아당겨 강타자의 진면목을 보여줬다.[39] 이로써, 스코어는 2:2 동점이 되었다. 사실, 호시노가 지친 와다를 6회까지만 던지게 해주고, 7회 전에 내렸다면 이대호에게 피홈런은 없었을 것이고 와다는 한국을 상대로 영영 무실점일뻔 했다. 당시 한국 해설이던 조성민도 " 호시노 감독이 (와다가 지쳤으니) 바꿔줄만 한데, 안바꿔 준다. 이러다 우리 이대호 선수한테 큰거 하나 맞을 수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40]
이대호에게 홈런을 맞긴 했으나, 이진영을 몸쪽 슬라이더로 삼진 처리하고 진갑용을 유격수 땅볼 처리해 7회 2아웃까지 잡아내었고 동점 승계 주자 없는 상황에 마운드에서 와다는 내려왔다. 결론적으로는 노디시전. 경기가 끝난 이후에 와다도 "내 탓이다. 홈런은 컨트롤 미스였다. 다음에 다시 만나고 싶다"[41]라고 말하며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이날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6.2이닝 5피안타 10탈삼진 1볼넷 2자책점을 기록했다. 경기는 와다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팀의 마무리로 등판한 이와세의 방화로 인해 팀은 5:3 스코어로 패배하였다.
이 날 경기도 삿포로 참사 한일전 경기 때와 마찬가지로 와다의 컨트롤이 돋보인 경기였다. [42] 특유의 칼제구로 바깥쪽 꽉차게 제구하여 직구로 룩킹 삼진을 많이 뺐어냈다. 거기다가 체인지업까지 더해 한국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해냈다. 하지만, 결국 7회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실투가 나와버렸고 이대호에게 투런을 맞았다.[43] 칼제구를 보여주던 그도 힘이 빠진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 이대호도 상대(와다)가 힘이 빠져 칠수 있었다고 그 날의 홈런 장면을 회상했다. 와다는 리그 내에서는 직구를 과감하게 스트라이크 존에 욱여넣는 파워 피처에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제구를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의 두 차례 경기에서 보여줬던 모습 처럼 장타를 경계해 더욱 제구를 신경써 로케이션 능력으로 승부보는 '기교파 투수' 혹은 '제구파 투수'같은 피칭도 가능하다. 이러한 직구 칼제구와 변화구 무브먼트를 위주로 한 피칭으로 효과를 톡톡히 봤지만, 하필이면 한국과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 마지막 이닝에 호시노 감독의 욕심[44]과 그로 인한 실투로 한국전 첫 실점을 맛보고 승리 투수 요건도 날라가는 씁쓸함을 맛봐야 했다.
* 이후, 와다는
결승전 선발을 대비하고자 4강전까지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다가 일본이
4강전에서 한국에게 완패를 당하며 3,4위 결정전으로 밀려났을 때
동메달 결정전에 선발로 등판하게 된다.[45][46] 하지만, 기대와 달리 와다는 의외로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예선 한국과의 경기에서 보여주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며 2.2이닝 만에 4실점하며 조기 강판된다.당시 게임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한 순간에 무너졌다. 와다는 2회에 미국의 맷 라포타에게 솔로 홈런을 내주긴 했으나 1회에 터진
아라키 마사히로의 솔로 홈런과 3회에 터진
아오키 노리치카의 스리런 홈런 덕에 4:1 스코어로 앞선 채 3회를 맞이한다. 이 3회에 저 부진한 성적이 그나마 정상 참작되는 사유가 발생한다. 바로
G.G.사토의 기행 때문. 3회 선두타자에게 와다가 던진 공을 쳐낸 타자의 타구가 유격수와 좌익수 사이에 얕은 플라이 공으로 떴다. 하지만,
G.G.사토가 유격수인
나카지마 히로유키가 타구를 처리하려고 자리까지 다 잡고 대기하는 뜬공을 자기가 잡겠다고
무리하게 덤벼들다가 둘 다 놓쳤기 때문에 무난하게 1아웃에 주자가 없어야 될 상황이 그 기행 때문에 노아웃에 2루가 되었다. 당시는 동메달 결정전이었으므로 한점 한점이 아쉬운 상황이었다.그런 상황에,
G.G.사토의 무리한 행동때문에 타자 주자가 단숨에 스코어링 포지션에 위치하게 되었고 투수인 와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이후 와다는 멘탈이 흔들렸는지 후속타자에게 볼넷을 내주었다. 하지만, 다시 멘탈을 고쳐잡고 그 다음타자를 삼진으로 잘 처리하며 1아웃 1,2루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다음 타자 맷 브라운[47]에게 던진 공이 가운데로 제구되었고 타자가 그 실투를 놓치지 않으며 스리런 홈런을 내주었다.[48] 이후, 후속 타자 네이트 슈어홀츠[49]를 유격수 땅볼로 잘 처리 하였으나, 곧바로 그 다음 타자 맷 라포타[50]에게 안타를 내주며 3회를 채우지 못한 채 조기 강판되었다. 노디시전이기는 했으나 마운드를 이어받은
카와카미 켄신이 4실점하며 일본은 8:4의 더블스코어로 패하였고 노메달의 굴욕을 맛본다.이 경기에서 와다의 성적은 2.2이닝 3피안타(2피홈런) 3탈삼진 3볼넷 4실점(3자책점)을 기록하며 매우 부진하였다. 그나마 정상 참작 될만한 것은 수비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멘탈이 흔들렸을만 했다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야만없이므로
G.G.사토의 실책이 없었더라도 이미 홈런 급의 장타를 2번이나 내준 상황에다가 3볼넷을 내줄 정도로 평소 칼제구의 그다운 모습이 온데 간데 없었으므로 핵심 귀책 사유는 와다 본인에게 있는 셈이다. 즉,
G.G.사토의 실책의 영향이 있기는 했으나 같은 팀 야수의 수비 실책 탓을 하기에는 당일 와다의 컨디션도 굉장히 별로였기에 남탓할 기록은 아닌 셈이다.
여담으로, 와다는 대회가 끝나 리그에 복귀해 ERA 3.18을 기록하며 전반기 대비 반등에 성공했으나, 당시 소프트뱅크는 퍼시픽 리그 꼴지를 기록할 만큼 당해 팀 전력이 말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본인은 잘 던져줬지만 승운이 따라주지 않아 베이징 이후 리그에서 0승 4패를 기록[53]하며 윤석민상을 수상받아야할 정도가 되기도 했다.
와다는 프로 선수로 참여한 국제 대회에서 통산 6경기 3승 0패 28과 3분의 2이닝 동안 20피안타 36탈삼진 10볼넷 2사구 8실점(7자책) ERA 2.20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제 몫을 다했다. 특히 한국전에서 매우 강했는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의 호투 뿐 아니라, 베이징 올림픽 예선 한일전에서도 선발 투수로서 호투하고 여전히 한국 킬러다운 면모를 보이며 그의 커리어에서 대 한국전 통산 2경기 12이닝 19탈삼진 2실점 ERA1.5이라는 어마 무시한 성적을 남겼다. 여러모로, 한국 킬러라는 칭호에 걸맞은 성적을 남긴 그이지만, 최근에는 그렇게 불리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은퇴 근처의 선수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한국인들에게는 와다가 이대호에게 홈런을 허용한 기억이 선명해 기록[54]에 비해 임팩트는 약할 것이며 오타니 등의 신흥 킬러들이 더 뛰어난 임팩트를 선사했기 때문일 것이다.[55]
와다는 한국전 뿐 아니라 캐나다 멕시코 같은 북남미 팀에게도 강했는데 하필이면 국대 커리어 마지막 경기인 미국전에 무너지며 동메달 결정전에서 2.2이닝 4실점 조기 강판[56]이라는 기록으로 인해 그 전까지 훌륭했던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에 주홍글씨가 생겨버렸다. 국제용 같던 그간의 모습과 그 기대에 못미치게 실망스럽게 무너진 이 경기 때문에 일본 언론에서 노메달의 주된 원인[57]으로 꼽히는 굴욕을 맛봤다.[58]
여담으로, 일본의 베이징 올림픽 대회 기간 팀 방어율은 2.54로 그를 상회하는 이와세 히토키(대회 기간 동안 ERA 13.75), 다르빗슈 유(ERA 5.14), 카와카미 겐신(ERA 4.70) 그리고 와다(ERA 4.82)까지 모조리 강도높은 비판을 받았다. 이 대회에서 일본이 내준 실점이 총 28점이고 그 중 이 네명이 내준 실점은 24점이다. 총 10명의 투수 중 4명이 86%의 실점을 담당한 셈. 이 네 선수가 소화한 이닝은 총 28.2이닝으로 일본 팀의 베이징 총 이닝 수인 78이닝의 비율로는 36% 가량이다. 즉, 등판 횟수의 36%밖에 차지하지 않았으나 실점은 86%나 내준 셈. 반대로 얘기하면 나머지 6명의 투수들은 64%나 마운드를 책임지고 고작 14%의 실점밖에 하지 않았다[59]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넷이 비교적 강팀들과의 경기에서 주로 등판했다는 것도 감안은 해야한다. 하지만, 중요한 경기 라이벌 국가와의 경기에서 성과를 원하는 라이트 팬에게 그러한 이해를 바라기는 쉽지 않다.
특히 이와세는 2ch 등에서 イ・ワセ라는 한국어 표기로 그의 이름이 작성되기도 하며 "일본인도 아니다"는 제일 강한 비판도 맛봤다. 와다가 베이징에서 못던진 것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경기에서 조기 강판 되었다 보니 그 임팩트 때문에 주된 비판 대상이 된 모양.
실제로도,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 마지막 경기인 미국전의 성적을 제외하면 26이닝 17피안타 33탈삼진 7볼넷 4실점 ERA 1.38이라는 엄청난 성적이 된다. 와다 본인 입장에서는 마지막 경기 난조가 매우 분할듯 하다. 여담으로, 와다가 출전한 국제대회를 통틀어 통산 4 홈런을 맞았는데 같은 좌완인 스기우치 도시야가 프로 선수로서 참가한 국제대회에서 피홈런이 없는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 특히, 와다는 홈런만으로 7실점[60]을 하는데 그의 국제대회 통산 8실점 중 무려 7실점이나 홈런으로 내준 셈.
4. 연도별 성적
4.1. NPB
- 볼드체는 1위 입상 성적.
와다 츠요시의 NPB 통산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2003 | 다이에-소프트뱅크 | 26 | 14 | 5 | 0 | 0 | 189 | 3.38 | 165 | 26 | 61 | 1 | 195 | 1.20 |
2004 | 19 | 10 | 6 | 0 | 0 | 128⅓ | 4.35 | 110 | 23 | 38 | 3 | 115 | 1.15 | |
2005 | 25 | 12 | 8 | 0 | 0 | 181⅔ | 3.27 | 154 | 17 | 57 | 2 | 167 | 1.16 | |
2006 | 24 | 14 | 6 | 0 | 0 | 163⅓ | 2.98 | 137 | 18 | 42 | 1 | 136 | 1.10 | |
2007 | 26 | 12 | 10 | 0 | 0 | 182 | 2.82 | 168 | 15 | 42 | 5 | 169 | 1.15 | |
2008 | 23 | 8 | 8 | 0 | 0 | 162 | 3.61 | 167 | 12 | 36 | 3 | 123 | 1.25 | |
2009 | 15 | 4 | 5 | 0 | 0 | 84⅓ | 4.06 | 72 | 13 | 24 | 1 | 87 | 1.14 | |
2010 | 26 | 17 | 8 | 0 | 0 | 169.1 | 3.14 | 145 | 11 | 55 | 1 | 169 | 1.18 | |
2011 | 26 | 16 | 5 | 0 | 0 | 184⅔ | 1.51 | 145 | 7 | 40 | 4 | 168 | 1.00 | |
2016 | 24 | 15 | 5 | 0 | 0 | 163 | 3.04 | 138 | 22 | 38 | 5 | 157 | 1.08 | |
2017 | 8 | 4 | 0 | 0 | 0 | 47 | 2.49 | 34 | 1 | 8 | 0 | 34 | 0.89 | |
2018 | 1군 기록 없음 | |||||||||||||
2019 | 12 | 4 | 4 | 0 | 0 | 57⅔ | 3.90 | 56 | 11 | 14 | 2 | 45 | 1.21 | |
2020 | 16 | 8 | 1 | 0 | 0 | 85⅔ | 2.94 | 66 | 7 | 31 | 1 | 75 | 1.13 | |
2021 | 18 | 5 | 6 | 0 | 0 | 94⅓ | 4.48 | 95 | 14 | 27 | 3 | 83 | 1.29 | |
2022 | 17 | 7 | 4 | 0 | 0 | 81 | 2.78 | 64 | 3 | 22 | 1 | 75 | 1.06 | |
2023 | 21 | 8 | 6 | 0 | 0 | 100 | 3.24 | 89 | 10 | 29 | 3 | 85 | 1.18 | |
2024 | 8 | 2 | 2 | 0 | 3 | 26⅓ | 3.76 | 27 | 2 | 4 | 2 | 18 | 1.18 | |
NPB 통산 (17시즌) |
334 | 160 | 89 | 0 | 3 | 2099⅔ | 3.18 | 1832 | 212 | 568 | 38 | 1901 | 1.14 |
4.2. MLB
통산 기록(MLB)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WHIP |
2014 | CHC | 13 | 4 | 4 | 0 | 0 | 69.1 | 3.25 | 67 | 7 | 22 | 57 | 1.24 |
2015 | 8 | 1 | 1 | 0 | 0 | 32.1 | 3.62 | 30 | 5 | 12 | 31 | 1.27 | |
MLB 통산 (2시즌) |
21 | 5 | 5 | 0 | 0 | 101.2 | 3.36 | 127 | 12 | 34 | 88 | 1.25 |
5. 여담
- 일본 내에선 팬들의 애칭은 와치(わっち)라고 한다.
-
야구 내외적으로 뛰어난 선수로
와세다대학 시절에는
아오키 노리치카,
토리타니 타카시 등 現 프로선수들이 와다의 훈련 자세를 보고 배우기도 했다.
- 2005년부터 투구수X10개[61]의 백신을 JCV에 기부하고 있다.[62] 그리고 본인의 고향인 이즈모시에 300만엔씩 기부하고 있으며 사비로 야구대회도 열어 우승팀은 홈구장 개막전에 초대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피해를 받은 후쿠시마 현에 버스를 기부하기도 했다.
- 야구 내외적으로도 좋은 선수고 일본 내에서도 커리어가 나쁘지 않은 선수고, 한국전에서 잘 던져서 한국 킬러라는 명성으로 국내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은 선수이며, 미국에서의 커리어도 더 망한 선수가 있음에도 한때 같은 팀이자 더블에이스였던 스기우치 토시야보다 항목 작성이 한참 늦어졌다. 실제로 이 항목은 항목이 만들어진 날 류현진과 매치업을 가진 덕분에 항목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 자신이 신인 시절이던 다이에 호크스 시절 다이에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승리 투수이기도 하다. 이후 소프트뱅크(2005년)로 팀명이 바뀐다.
6. 관련 문서
[1]
실제 출생지는 외가가 있는
야마가타현.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아이치현 고난시에서 자라다 시마네로 이주, 야구를 처음 접한 것도 아이치에 살던 시절부터다.
[2]
2001년부터 역지명 제도의 이름이 바뀌면서 사용된 명칭. 대졸-사회인 선수를 대상으로 하며 최대 2명의 선수가 드래프트에서 원하는 구단을 선택해서 입단할 수 있었다. 이후 이치바 사건이 터지고 나서 인원이 1명으로 축소된 희망입단범위로 개편되었지만 여전히 뒷돈 문제가 성행하는건 변함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세이부 구단이 2명의 선수를 대상으로 뒷돈을 지급한 사례가 발각되면서 2007년 드래프트부터 전격 폐지되었다.
[3]
디셉션이 매우 좋은편이라 슬로우모션임을 감안해도 팔꿈치가 나오는 순간까지 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4]
자신의 최고 구속 기록인 149km/h를 만 41세인 2022년에 기록하였다. 종전까지의 최고 기록은 2014년 컵스 시절 기록한 92.4mph(148.7km/h).
[5]
대 베테랑이 된 2020년에도 일본프로야구 선발투수 중 가장 존 한가운데에 들어가는 공 비중이 높았던(투구 중 7.07%) 투수가 와다였다. 그 중 포심 비중은 59.4%에 육박하니 그야말로 칠 테면 쳐봐라 마인드인 것이다.
[6]
그 중 가장 유명한 홈런이 바로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풀리그 라운드에서
이대호에게 맞았던 장외홈런.
[7]
2007 시즌 이승엽에게도 홈런을 허용한 적이 있다. 이승엽의 시즌 12호 홈런. 다만 이 때 구종은 패스트볼이 아닌 슬라이더였다.
출처
[8]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최후의 감독이었던
나시다 마사타카의 모교이기도 하다.
[9]
참고로 아마추어 선수들 대상으로 "영양비"라는 은어로 불리는 소소한 용돈이 동반된 이런 드러나지 않는 탬퍼링 행위는 12개 구단 모두가 다 하면서 서로 눈감아주고 있었고,
요미우리 등의 빅클럽이 드래프트 개최 전부터
돈지랄을 통해 대형 유망주들을 독점해 오던 것이 당시 일본야구의 현실이었다. 이러한 관행이 지속되면서 신인선수 영입을 둘러싼 부정부패가 곪아오다가 결국 2004년
메이지대학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던
이치바 야스히로에게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 4개 구단이 과다하게 뒷돈을 챙겨준 것이 발각되어 관련자 사퇴, 각 구단에 벌칙 부과 등의 후폭풍이 일었던 이치바 사건으로 그 실상이 만천하에 고발되었고, 결국 공정한 선수 선발이 이뤄져야 할 드래프트의 빅클럽
머니게임으로의 변질, 프로 구단의 유망주들에 대한 뒷돈 제공 등 부정 스카우트 행위들이 문제시되면서 결국 2007년 드래프트부터 희망입단 제도가 폐지되었다.
[10]
2003년 20승 3패를 기록하며
이가와 케이와 함께
사와무라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11]
그러나 그해 일본시리즈 MVP는 2승을 거뒀던
스기우치 토시야가 가져갔다.
[12]
사실 이 해 와다의 정규시즌 소화
이닝 수는
규정이닝(133이닝, 본래는 135이닝이어야 하나 시즌 도중
선수회 파업으로 2경기가 취소되며 2이닝 삭감)에 미달하는 128.1이닝이라 본래는 순위권에 미달한다. 그러나 이 해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올림픽 출전 때문에 리그 공백기가 생긴 선수들을 위해 양대리그 차원에서 올림픽 출전 선수들에게 규정타석/이닝 기준이 되는 리그 규정 경기 수에서 올림픽 기간 동안 진행된 소속팀의 경기 수를 제외하는 특례를 주면서 와다도 이 혜택에 따라 올림픽 기간 도중 다이에가 치렀던 21경기를 제외하여
규정이닝이 112이닝으로 삭감되면서 2년 연속 규정이닝에 도달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도 출전 선수들에게 동일한 특례가 적용되었다.
[13]
사와무라 상은
웬 하위권팀의 에이스가 가져갔다.
[14]
야마오카는 3회까지 3이닝 퍼펙트로 후쿠오카 타선을 막아냈다.
[15]
정확히는, 2003년 당시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였다. 참고로, 이 우승은 다이에 호크스의 21세기 유일한 우승이자 소프트뱅크로 팀 명이 바뀌기 전 다이에 호크스의 마지막 우승이다. 다이에 호크스는 1999년과 2003년에 총 2번의 우승을 하였다. 사족으로, 훗날 2010년대 후반 일본 시리즈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소프트 뱅크의 감독
쿠도 키미야스가 1999년 다이에 호크스의 우승에 상당한 일조를 했다. 다만, 1999년 당시
쿠도 키미야스는 우수 선수상에 만족해야했고 일본 시리즈 MVP는 뛰어난 타격을 보여준
아키야마 코지가 수상했다. 참고로, 2003년 일본 시리즈 MVP는
스기우치 도시야.
[16]
다만, 다른 선수와 달리 와다의 경우 연차에 비해 많은 이닝을 소화한 편은 아니다. 와다는 2022년까지 NPB에서 통산 15년 동안 1973.1 이닝 소화, MLB에서 통산 2년간 101.2 이닝 소화하여 총 17년 간 2075 이닝을 소화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동시대를 함께 뛴 같은 좌완
스기우치 도시야의 경우 통산 NPB 14시즌 동안 2091.1 이닝으로 오히려 와다보다도 더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물론, 트리플 A에서 기록한 이닝까지 고려하면 와다는 20시즌 동안 2479 이닝 소화로 볼륨 자체는 많아지지만, 연당 이닝 소화는
스기우치 도시야는 물론, 19시즌 동안 2460 이닝을 소화한
이와쿠마 히사시, 통산 17년간 2789.1이닝을 소화한
다르빗슈 유에 현저하게 밀린다. 하지만, 와다의 경우 숱한 부상과 부진을 이겨내고 20년 넘게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데다가, 2022년에는 불혹의 나이에도 다시 부활한 점 등을 참작한다면 이닝소화력이 다른 최고 투수들에 비해 밀린다고 할 수는 있어도 그의 자기관리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7]
언급된 네 선수 중 굳이 우위를 나누자면, 와다와 스기우치는 200이닝을 넘겨본 적이 없으므로 더 이닝이터다운 선수들은 이와쿠마와 다르빗슈 유이며 특히 와다는 190이닝 이상 조차 소화한 시즌이 없으므로 롱런한 것에 비해 다소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있다.
[18]
박용택의 경우, 2021년에 거행된
김태균의 은퇴경기처럼 플레이볼 선언과 동시에 다른 선수로 교체되었으므로 사실상 은퇴는 2020년에 이루어진 셈이다. 2020년
김태균과 박용택의 은퇴를 끝으로 2006 WBC 4강 신화를 이룩한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은 팬들의 기억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19]
다만 항목을 보면 알듯이 이와세 건은 신빙성이 다소 의심되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20]
일본 최초의 스포츠신문이라는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아사히 신문 계열이기도 하다. 다만 많은 역사를 지닌 언론사들이 다 그렇듯이 유명한 오보도 엄청나게 많이 저지른 편이다.
[21]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연고지인
후쿠오카현을 대표하는 민영방송사다.
[22]
올 시즌 일본프로야구는 역대급 투고타저라 ERA가 4점대만 넘어도 거의 폐급 취급을 받는 수준이다.
[23]
189이닝 동안 14승 5패 195탈삼진 ERA 3.38
[24]
구로다 히로키,
이와세 히토키, 고바야시 마사히데
[25]
대표적으로 4회말 2사 만루 위기에서
장성호를 상대로 삼진을 잡아내는 체인지업은 일품.
[26]
1볼넷 1사구
[27]
2004년도 올림픽 직전까지 107과 3분의 1이닝 동안 96탈삼진 ERA 3.77 기록.
[28]
1회부터
조지마 겐지의 투런 홈런이 터졌다.
[29]
실제, 2008년은 와다에게 시련의 해였다. 베이징에서의 악몽같은 마무리와 굴욕적인 노메달 뿐 아니라, 와다는 NPB 리그내에서도 전년도만 못한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고 팀은 퍼시픽리그 리그 꼴지를 기록했다.
[30]
이때, 이대호에게 집요하게 바깥쪽으로 로케이션되는 공만 던지며 유리한 카운트를 이끌었고, 마지막 결정구인 체인지업을 참지 못한 이대호는 삼진당하고 말았다.
[31]
상대 선발
김광현은 3이닝 퍼펙트로 일본 타선을 막아냈다.
[32]
정근우의 타구가 절묘하게 수비수들이 잡기 힘든 코스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아라키가 집중력있게 넘어지면서 플라이 아웃처리했다.
[33]
3회 4회 1사 1,2루 상황 모두 아오키의 빠른 타구 판단과 빠른 발이 돋보이는 수비 장면이었다.
[34]
상대 선발
김광현도 2사 1,3루 위기 상황을 삼진으로 이겨냈다.
[35]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G.G.사토가 김광현의 커브를 잡아당겨 2루타를 만들었으나 사토자키 토모야를 3루수 땅볼 처리하며 위기를 넘겼다.
[36]
이승엽을 삼진으로 잡아낸 공은 한가운데 직구였는데, 이승엽이 반응을 하지 못하며 룩킹 삼진을 뺏어냈다.
[37]
불펜에는 같은 좌완
나루세 요시히사가 몸을 풀고 있던 중이었다.
[38]
2회
이대호를 삼진 잡아냈던 패턴인 연신 바깥쪽 공으로 카운트 우위 점하기-카운트 우위 상황에서 가운데 떨어지는 체인지업 패턴을 구사했으나
이대호는 두번은 당하지 않았다. 결국 유인구를 참아낸 이대호는 홈런을 만들어냈다.
[39]
사실 와다 입장에서 변호해주자면, 어느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당장에 같은 이닝에 힘이 빠지고 제구가 흔들리며
김동주를 볼넷으로 내보내기도 했지만, 전 이닝인 6회초에
이택근과
이승엽을 삼진 잡아낸 공 모두 가운데로 몰린 공들로, 이미 6회부터 제구가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실점은 투수가 했으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도 그대로 기용하다 실점을 했으니 감독의 책임이 더 크다해도 무리가 없을 법한 상황.
[40]
경기가 끝난 이후에
호시노도 와다를 일찍 내리는게 나았겠다는 투로 인터뷰를 했었다.
당시 호시노의 인터뷰
[41]
당시 인터뷰
[42]
상대 팀 타자
이대호도 인터뷰에서 상대 선발 와다의
컨트롤이 워낙 좋아 공략하기 힘들었다고 평했다.
[43]
와다가 한국을 상대로 내준 통산 유일한 실점 장면이기도 하다.
[44]
6회까지 많은 공을 던지고 있던 와다를 이후 대회에서의 투수 운용을 용이하기 위해 7회에도 굴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로 인해 동점 홈런을 내주고 말았고 경기가 끝난 직후에도 와다를 6회까지만 던지게 하고
내렸어야 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45]
이는 호시노의 욕심이었다. 결승전에 올라가지도 않고
와다 츠요시,
우에하라 고지,
다르빗슈 유 등의 투수를 아끼다가 한국전에서 6:2로 완패를 당했으니. 게다가 4강전
이전에 쿠바를 피하기 위해
져주기 게임을 한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어 자국에서 비판 여론이 형성되어 호시노는 상당히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도 졌다. 심지어 결승 생각하다 준결승전에서 투수들 아끼려다가 졌다. 꼴 좋다.
[46]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스기우치 도시야대신
와다 츠요시를 준결승전에 투입하고 스기우치를 결승전에 투입하는 것이 나을 뻔 했다. 와다는 이 대회 예선전에서도 보여줬지만, 본래 한국전에 매우 강한 모습을 보였고 스기우치는 서양 타자들에게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
[47]
예선 한국전에
윤석민을 상대로 9회에 역전 2타점 적시타를 친 그 선수가 맞다.
[48]
당시에, 배트에 공이 맞는 순간 와다는 고개를 숙였다. 맞자마자 홈런임을 직감하였던 듯.
[49]
예선전에서
정대현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한 선수이다.
[50]
2회에 와다에게 솔로 홈런을 기록한 타자이다.
[51]
2008년은 와다에게 시련의 해였다. 베이징에서의 악몽같은 마무리와 굴욕적인 노메달 뿐 아니라, 와다는 NPB 리그내에서도 전년도만 못한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고 팀은 퍼시픽리그 리그 꼴지를 기록했다. 2008 베이징에서의 안좋은 마무리와 리그내에서 전만 못한 부진 때문인지 와다는
2009 WBC에 국가의 부름을 받지 못한다.
[52]
17경기 116과 3분의 2이닝 동안 83탈삼진 ERA 3.78. 성적에 비해 승운은 잘 따라줘 8승 4패를 기록 중이었다.
[53]
당해년도는 결국 전반기 8승 4패와 후반기 0승 4패를 합해 8승 8패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54]
통산 대 한국전 2경기 12이닝 2실점 ERA 1.5
[55]
실제 오타니는 한국을 상대로 두 경기 동안 단 3안타만을 허용하고 13이닝 21탈삼진 무실점으로 완벽하게 한국 타자들을 틀어막았다.
[56]
와다가 국제대회 내내 실점한 8실점 중 무려 절반인 4실점은 한 경기, 그것도 2.2이닝만에 기록한 것. 와다가 국제대회 마지막 경기에서 얼마나 부진했던 것인지 더욱 체감이 된다.
[57]
실제, 일본은 베이징 올림픽 대회 후 특별기획 프로까지 편성해 일본의 참패 원인을 분석하고 여러 야구인들의 의견을 듣는 등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58]
사실 그 경기에서 일본 투수 중 4실점 한건 와다만이 아니다.
카와카미 겐신도 4실점을 하며 패전 투수가 됐는데, 이쪽은 와다와 달리 4실점이 모조리 4자책이다. 이쪽도 와다처럼 대회 내내 호투하다 마지막 경기를 망치는 바람에
카와카미 겐신도 일본 야구 팬들에게 꽤나 비판받았다. 그렇지만, 선발로서 4실점하며 실망스럽게 무너진 와다도 그 못지 않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59]
나머지 4점의 실점은
스기우치 도시야가 1실점,
후지카와 큐지가 1실점,
와쿠이 히데아키가 2실점했다. 이 후지카와의 실점은 그 유명한
이진영의 동점타이다.
[60]
2004 아테네에서 제레미 웨어에게 솔로 홈런,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이대호에게 투런 홈런, 미국의 맷 라포타와 맷 브라운에게 각각 솔로 홈런과 스리런 홈런을 맞았다.
[61]
승리일 땐 20개 추가 완봉승일 땐 30개 추가.
[62]
이때의 모습을 바탕으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의 공익광고협의회인
AC 재팬이 지정한 백신 지원 캠페인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2007년의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