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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모토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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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후쿠모토 유타카 (福本 豊)
출생 1947년 11월 7일 ([age(1947-11-07)]세)
오사카부 오사카시 이쿠노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다이테츠 고등학교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경력 한큐 브레이브스 (1969~1988)
지도자 경력 오릭스 블루웨이브 타격,주루코치 (1989)
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감독 (1990 ~ 1991)
한신 타이거스 타격코치 (1998)
한신 타이거스 외야수비, 주루코치 (1999)
파일:nipponseriesflag2000.png 1976년 일본시리즈 최고 수훈 선수( MVP)
1975년
야마구치 타카시
( 한큐 브레이브스)
후쿠모토 유타카
( 한큐 브레이브스)
1977년
야마다 히사시
( 한큐 브레이브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72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선수( MVP)
1971년
나가이케 토쿠지
( 한큐 브레이브스)
후쿠모토 유타카
( 한큐 브레이브스
)
1973년
노무라 카츠야
( 난카이 호크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70~1982년 퍼시픽리그 최다 도루
1969년
사카모토 토시조
( 한큐 브레이브스)
47도루
후쿠모토 유타카[1]
( 한큐 브레이브스)
1983년
오오이시 다이지로
( 킨테츠 버팔로즈)
60도루
연도별 최다 도루 기록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1976년
75도루 67도루 106도루[2] 95도루 94도루 63도루 62도루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61도루 70도루 60도루 54도루 54도루 54도루

1. 개요2. 프로 입문 전3. 프로 시절
3.1. 주요 활약들3.2. 타 구단들의 공략 시도3.3. 은퇴
4. 은퇴 이후5. 플레이 스타일6. 이모저모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現 야구 해설가.

2. 프로 입문 전

오사카 오오테츠(大鉄)고등학교[3] 3학년 때 고시엔 본선에 참가했으나, 자신의 실책성 수비로 인해 아키타고와의 1회전에서 패한 흑역사가 있다.

고교 졸업 이 후 마쓰시타 전기 경식 야구부[4]에 입사, 입사 3년차인 1968년 도시대항야구대회에 지역 라이벌 후지제철 히로하타공장 야구부의 보강선수[5]로 출전해 후지제철 히로하타공장의 전국대회 우승에 기여하고 본인도 대회 베스트 나인에 뽑혔다.

3. 프로 시절

196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 7위[6]로 지명되어 프로에 입문한다. 이 때의 입단동기로 야마다 히사시(1위), 가토 히데지(2위)[7] 가 있는데, 후쿠모토를 포함한 세 명이 명구회에 가입할 정도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3.1. 주요 활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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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모토의 타격 모습)

첫 해에는 대주자, 대타 등으로 주로 나오는데 만족했으나, 입단 2년차인 1970년에 타격에 눈을 뜨면서[8] 2할 7푼 4리의 타율에 75도루를 기록하며 생애 첫 도루왕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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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72년 9월 26일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한 시즌 최다 도루 신기록인 105도루를 달성한 장면


그리고 그는 도루 관련 각종 신기록을 세우고, 한큐를 일본시리즈 3연패로 이끌면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선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 화려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한편으로 도루 관련 신기록도 계속 써나갔는데, 1977년 7월 6일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 개인통산 597번째 도루를 성공하면서 난카이 호크스 히로세 요시노리의 종전 일본기록을 깼고[16], 1983년 6월 3일 세이부 라이온즈 전에서는 939번째 도루를 성공하며 루 브록의 메이저리그 기록(938개)을 깼으며, 그후 계속해서 도루 수를 늘린 끝에 1984년 8월 7일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 마침내 세계 최초로 개인통산 1,000도루를 달성했다. 다만 현역 시절 많은 도루를 한 만큼 도루사도 299번으로 NPB 통산 1위다. 그렇지만 통산 도루성공률은 78%로 세이버메트릭스상으로 확실히 이득을 본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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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1,000도루 성공을 기념하는 모습)

3.2. 타 구단들의 공략 시도

당대 최고의 도루왕이었기 때문에, 각 구단마다 그의 도루를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다음은 다른 팀에서 연구한 후쿠모토의 도루 저지 방법들이다.
한큐와 같은 퍼시픽리그 소속팀으로서, 후쿠모토의 도루는 난카이에게 매우 현실적인 골칫거리였다. 당시 난카이의 감독 겸 주전 포수였던 노무라 카츠야는 후쿠모토의 도루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현대 야구에서 널리 투수에 사용되는 슬라이드 스텝[17] 을 고안하여 야구를 한 단계 진화시켰다. 그 이전에도 노무라는 후쿠모토를 다음 이닝의 선두 타자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생각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9번타자에 주로기용되는 투수에게 볼넷을 내준 다음 1번타자를 주로 맡은 후쿠모토와 승부했다.[18]

후쿠모토가 2루 도루를 시도할 때 홈에서 2루에 송구를 일부러 원바운드로 던져 다리에 부딪히게 하는 것도 생각했다. 최초 시도는 성공했지만, 2번째 시도에서는 목적이 발각되어,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인 니시모토 유키오가 투수에게 도루를 지시했다. 다리에 일부러 공을 던져 부상을 입히려는 시도는 실제로는 공이 후쿠모토의 허리를 때리는 바람에 난감해졌다.
센트럴리그였고, 당시에는 리그간 교류전도 없어서 정규 시즌에는 한큐와 직접 상대할 일이 없었다. 때문에 위에 나온 난카이에 비해서는 후쿠모토의 도루가 현실적인 위협은 아니었다. 대신 일본시리즈에서 한큐와 대결하는 것을 상정하고, 투수가 1루 견제 시 일부러 악송구를 던지고 1루 쪽 펜스에 맞고 나오는 볼을 2루에 던져 후쿠모토를 아웃시키는 걸 연습했으나 실전에서는 실행되지 않았다.

주전 포수 모리 마사히코는 1971년 일본시리즈 직전 2루 베이스에 도루 저지 송구를 던져 맞히는 연습을 반복했다. 모리 자신이 투수에서 받은 공을 2루 베이스로 겨냥해 송구하고 2루수가 2루 베이스에서 포구 한 곳에 후쿠모토의 다리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형태로 보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전략은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성공했다. 후쿠모토는 일본시리즈에서 도루를 많이 하지 못한 것은 당시 요미우리의 에이스였던 호리우치 츠네오의 존재가 컸다고 회고 하고 있다. 한큐와 같은 퍼시픽리그 소속팀으로서, 난카이 못지 않게 후쿠모토의 도루가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주전 포수 나시다 마사타카는 2루 송구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후쿠모토가 출루하면 오른 발을 반 보 내려두고 있었다고 한다. 한큐와 긴테쓰의 게임 전에 후쿠모토와 나시다 어느 쪽이 이기는가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후쿠모토는 알려진 습관이 없는 투수에게도 습관을 알아채는 데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문에 강한 어깨를 가진 나시다에게도 후쿠모토가 이긴 적이 많았다. 후쿠모토는 "도루를 허용하는 것은 투수의 책임이 70%, 포수가 30%"라고 말하고 있다.
역시 같은 퍼시픽리그 팀인지라 위협적이었다. 당시 이나오 카즈히사 감독은 후쿠모토 유카타 한명 막으려고 1루 베이스 주변에 물을 잔뜩 뿌리는 방법을 썼었다고 이하라 하루키가 회고했다.

3.3. 은퇴

그러나 이 기록의 사나이도 나이는 속일 수 없었는지 만으로 40세가 된 1987년에 불과 6도루에 그치더니,[19] 이듬해인 1988년에는 데뷔 이래 가장 적은 3도루에 그쳤다. 이렇게 입지가 좁아지던 도중 구단이 한큐에서 오릭스로 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의 말실수가 그를 은퇴로 내몰았다.

한큐 브레이브스의 이름으로 치르는 마지막 홈경기이자 해단식이 있는 1988년 10월 23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시합에서, 경기를 마치고서 우에다 감독이 감사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떠나는 야마다(히사시), 그리고 남아있을 후쿠모토"라고 말해야 되는 것을 "떠나는 야마다, 그리고 후쿠모토"라고 잘못 말했고, 이 발언이 선수단, 팬들과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퍼져나가며 엄청난 논란이 되어버리면서 결국 후쿠모토는 "감독님(우에다)께서 그렇게 말했다면 은퇴하겠다."고 말하며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접는다.

다만 은퇴 후 후쿠모토가 인터뷰에서 본인의 은퇴에 대해 말한 걸 보면 우에다의 말실수만으로 은퇴를 정한 건 아닌데, 말년에 기량 저하로 인해 주루실력이 감퇴하면서 출루하더라도 벤치에서 "도루하지 말고 기다려라" 라고 지시하면서 도루수가 급감한 것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게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결정적으로 우에다의 말실수 이전에 지인들에게 "올해(1988년)를 끝으로 은퇴하겠다" 말했다는 증언도 나온 걸 보면 이미 본인이 은퇴를 확실하게 결정했던 것 같다.[20] 우에다의 말실수는 후쿠모토의 결심에 쐐기를 박은 셈이다.[21]

아무튼 그렇게 은퇴선언을 한 뒤, 한큐에서 오릭스로 구단이 바뀐 이듬해인 1989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오픈전에서 오랫동안 한큐에서 함께 뛰어온 동료 야마다 히사시와 합동 은퇴식을 치르며 영광의 선수생활의 막을 내렸다.[22][23]

은퇴할 때까지 그가 기록한 도루는 총 1,065개였다. 이 기록은 그가 은퇴한 4년 후인 1992년 6월 16일, 리키 헨더슨에 의해 깨졌으며 후쿠모토는 헨더슨이 자신의 기록을 넘어선 경기에 등장해 시구식을 하였다. 그날 헨더슨이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자 후쿠모토는 축하 메시지를 전하며 금색 스파이크를 선물했고, 이에 헨더슨은 보답으로 그에게 기록경신 때 훔친 2루 베이스를 주었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 상단 각주에 적힌 것처럼 오릭스의 1군 타격코치 겸 주루코치로 임명되어 오릭스를 1989시즌 팀 타율 1위로 올려놓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후 1990~1991년엔 2군 감독을 맡았으며 이후 오릭스를 떠난다.

이 후 야구해설가로 일하다가 1998년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로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이후 이듬해인 1999년엔 외야수비, 주루 코치로 보직을 옮겼으나 "안타를 못 치면 주전이 될 수 없고, 주전이 될 수 없으면 출루도 할 수 없고, 출루를 할 수 없으면 도루도 할 수 없다."라는 지론에 따라 선수들의 타격에 간섭하는 바람에 노무라 카츠야 감독의 분노를 사면서 결국 시즌 종료 후 해임되었다.

현재는 아사히 방송의 야구해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2년에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해설자로서는 헤드 슬라이딩과, 견제구 때 손부터 귀루하는 것 등에 대해 "부상의 위험성이 크다" 며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플레이로 유명했던 아카호시 노리히로에 대해 "잘하는 수비수는 점프 안하고 낙하지점에서 그냥 잡는다", "부상 위험성이 높아진다" 등으로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24] 근데 정말, 후쿠모토의 말대로 아카호시는 다이빙 캐치 중 당한 치명적인 목, 척추 부상으로 엄청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되고 만다..

그 외에도 나가시마 시게오 마냥 기상천외한 의성어를 말하는 것이나 우스갯소리를 자주 하는 것 등으로도 유명하다. 아예 일본 위키백과의 후쿠모토 항목엔 "후쿠모토 어록" 이 따로 만들어져 있을 정도다.

5. 플레이 스타일

13년 연속 도루왕, 일본프로야구 유일의 한 시즌 세자릿수 도루, 세계 최초의 1,000도루[25]를 기록하며 현역 시절 도루 관련 일본, 세계기록을 독식한 리드오프로써, 입단동기였던 야마다 히사시와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기를 상징하던 선수. 이 둘은 한큐의 마지막과 선수 은퇴도 함께했다.

똑같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통산 기록을 돌파하고도 인정받지 못했던 홈런왕 오 사다하루와는 달리, 후쿠모토는 훗날 리키 헨더슨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인정하는 '세계의 도루왕'으로 남았다. 방망이의 재질, 구장 크기 등의 변수에 영향을 받는 홈런과는 달리, 야구 경기장의 루상 거리는 세계 어디든지 27.432미터(90피트)다.

워낙 통산 도루 1위의 임팩트가 커서 대부분 시대를 풍미한 대도 정도로 유명하지만, 후년대의 리키 헨더슨처럼 공격, 수비, 주루 3박자를 모두 갖췄던 선수이기도 하다. 선수생활 내내 중견수를 보며 역대 최다이자 12년 연속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할 만큼의 뛰어난 수비력에, 타격에서도 20년 동안 1만 번이 넘는 타석에 서며 통산 OPS 8할과 120이 넘는 Wrc+를 기록했다. 여기에 통산 208홈런을 쳤을 정도로 장타력도 준수하고, 선구안도 준수해서 타율-출루율 격차도 9푼에 육박했다. 이런 유형의 호타준족 선수는 투수들이 정말 루에 보내기 싫어해서 볼넷을 주느니 차라리 안타를 맞겠단 생각으로 피해가는 투구를 거의 안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만큼 빼어난 선구안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6. 이모저모


[1] 무려 13년 동안이나 도루왕을 지켰다. 이는 수상 횟수, 연속 수상이라는 의미에서 둘 다 세계기록이다. [2]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다 시즌 도루 기록이자 유일한 시즌 100도루 기록 [3] 현 한난대학 부속고등학교(阪南大学高校). 강타자 도이 마사히로가 그의 고교 선배다. [4] 현재는 파나소닉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 이름은 마쓰시타 전기였다. 현재의 팀명은 2008년부터 사용. [5] 도시대항야구대회 본선진출팀이 지역예선 탈락팀들 가운데 필요로 하는 선수를 본선기간 동안 임대선수로 쓰는 제도. 올림픽의 와일드 카드제 생각하면 이해가 갈듯 싶다. [6] 요즘이라면 최종순위 지명도 될 수 있을만한 순위이지만 이 해 한큐는 무려 15순위까지 선수를 지명했고 그 중 9명이 입단을 거부했다. 입단을 거부한 선수들 중 12순위로 지명된 카도타 히로미츠가 있었는데, 카도타는 다음 해 2위로 난카이 호크스에 지명되어 프로 선수가 된다. [7] 1948년생으로 한큐 브레이브스의 1루를 오래 지켰다. 1969~1987년 선수생활을 하였으며 타율 0.297, 347홈런, 2,055안타, 1,268타점을 기록하였다. 재직한 팀들은 한큐(1969~1982), 히로시마(1983), 킨테츠(1984~1985), 거인(1986), 그리고 난카이(1987)였다. 1975년에는 퍼시픽리그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8] 입단 당시만 해도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주루센스가 워낙 형편 없었기에 땅볼을 치고 내야안타를 만들겠다는 타격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당대의 타격 이론가이자 철권통치의 대명사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매를 벌었으나, 1970년 스프링캠프에서 동료로부터 빌린 일명 ' 타이 콥 배트'로 프리배팅을 하다가 라인드라이브성 장타를 치고서는 타격폼을 수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20-20클럽에도 가입을 한적이 있고, 통산홈런갯수가 200개가 넘는다. 슬래시라인도 .291/.379/.440 OPS .819로 리드오프로서는 아주 더할나위 없는 타자였다. [9] 13년 연속수상 또한 역대 1위 기록이며, 이 기록은 1983년 긴테츠 버팔로즈 오이시 다이지로가 60개의 도루를 기록해 도루왕을 차지하며 멈췄다. 그리고 후쿠모토는 이후 다시는 도루왕을 수상하지 못했다. [10] 1회(초/말 공통)에 1번 타자, 즉 팀에서 맨 먼저 타석에 서는 선두타자로 나와서 친 홈런을 말한다. [11] 위에 나오듯 이 해 세운 NPB 최초의 한 시즌 세자릿수 도루인 106도루의 기록은 앞으로도 깨질 가능성이 요원한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도루 기록. [12] 골든글러브란 명칭은 1986년부터 사용 [13] 후쿠모토의 현역생활 당시엔 130시합 제도였으니 규정타석은 130시합 × 3.1 = 403타석이 된다. [14] 당시엔 연맹표창이 없었다. 1994년부터 표창. [15] 수비를 평가하는 골든글러브와 달리 이쪽은 타격 성적을 주로 평가한다. [16] 심지어 히로세는 이때까지 멀쩡히 현역으로 뛰던 상황이었다. 히로세는 이 해를 끝으로 은퇴한 후 영 좋지 않은 사정으로 해임된 노무라 카츠야의 후임으로 난카이 감독에 부임한다. [17] 퀵모션은 콩글리시이다. [18] 당시 퍼시픽리그는 아직 지명 타자 제도 도입 전이었다. [19] 이 해 386타석만 기록하며 1970년부터 17년이나 이어지던 규정타석 연속 만족도 끝나게 되고 말았다. [20] 한큐 구단이 오릭스에게 매각된다는 소식이 보도된 후, 최종전 전날 구단 프런트에게 코치 전임을 제안받았는데, 본인은 자유계약으로 방출시켜 주거나 플레잉 코치로 뛰게 해주길 바랬지만 거절당하고 임의탈퇴 처리될 상황까지 되자, 어차피 한큐 구단도 없어지고 지인의 조언도 있어서 그냥 은퇴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21] 덤으로 본인은 "체력적으론 3년 정도는 더 뛸만 했지만, 은퇴번복을 하기 귀찮았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밑에 아내와의 일화를 보면 귀차니즘이 강하다. [22] 이 때 둘이 함께 한큐 유니폼을 입고 은퇴 퍼포먼스를 한 뒤, 오릭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코치를 보는 독특한 상황을 만들었다. 야마다 히사시의 마지막 삼진 허용타자는 같은팀 동료였던 미노다 고지였다. 미노다는 같은 해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대역전 우승의 주역이 되면서 이듬해에 은퇴했다. [23] 이날 요미우리의 선발투수 고다 이사오는 오릭스의 용병 거포 부머 웰즈에게 난타당했지만, 그해 일본시리즈에서는 혼자 2승을 차지해 팀의 대역전 우승에 기여하였다. [24] 물론 아카호시가 싫어서 그랬던건 전혀 아니다. 한신코치시절 엄청나게 총애하던 선수였기 때문에 돌직구를 거침없이 날릴수 있었다. [25] 전 세계의 프로야구리그를 통틀어서 1,000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후쿠모토 유타카와 리키 헨더슨 2명 뿐이다. 심지어 둘은 루 브록의 기존 세계 1위 도루 기록을 경신할 때도 똑같이 3루 베이스를 훔쳤다! [26] 작중에서 데니스 존슨은 육상선수 출신으로 수비에 능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입단 초기의 후쿠모토 유타카의 수비가 이랬다고 한다. 물론 이 만화는 아예 야구선수 자체를 안해 본 미국 흑인 육상선수를 일본프로야구팀이 달리기만 시키려고 순수 대주자용 용병으로 데려왔다는 터무니없는 설정이라 현실성이 지극히 낮다. [27] 이후 기아 타이거즈의 투수코치였던 그 칸베 토시오 맞다 [28] 그리고 후쿠모토의 1억엔 보험 가입 소식을 접한 최동원의 부친은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최동원에게 어깨 상해보험을 들게 했다. 최동원의 부친은 당시 일본 방송을 수신할 수 있던 부산의 사정도 있고 해서 일본 야구에 관심이 많았고 호리우치 츠네오의 드롭커브를 모티브로 최동원의 커브를 단련시키기도 했다. [29] 메이저에서 주전 2루수로 5년 가까이 뛰었기에 4년 4억엔 보장( 부머 웰즈가 연봉 2500만엔이었다.)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단하였고 1년차 때는 12홈런-20도루에 2할대 중후반 타율과 8할 즈음의 OPS를 보여준 훌륭한 공격형 2루수가 되었다. 그러나 2년차에 먹튀가 됐고 시즌 중인 8월 귀국하였으며 시즌 후 입단 시 보장받았던 남은 2년치 연봉의 절반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자진퇴단하였다. 당시 똑같이 일본프로야구 용병선수 출신으로 은퇴 후에 일본에 눌러앉았던 로베르토 바르본의 말에 의하면 선수로서의 자기관리(work ethic) 자세가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일본 야구를 무시하고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으며 미국에 돌아갈 생각만 해 댔다고. 근데 경기 내적으로는 나름 최선을 다했는지 일본에서의 플레이는 호평을 받았고, 먹튀가 된 2년차 때도 범프가 있었으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을텐데.. 라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자기관리는 형편없었지만 실력만큼은 뛰어났던 듯. 사실 지금도 차이나지만 그 당시에는 미국과 일본의 야구실력 차이가 더더욱 엄청났기에 워크에식은 안 좋아도 성적이 좋은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30] 하지만 이벤트 당시 어느 프런트 직원이 미노다 고지를 설사유망주라고 조롱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미노다는 불참했고 결국 87시즌 직후 미노다 고지가 원한 고향팀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아닌 당시 최신형 신칸센 300계 차량 기준으로도 고베에서도 3시간 넘게 걸리는 도쿄에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내쫓아버렸다. 미노다는 대신 도쿄돔 개장경기인 한신전 시범경기때 1번타자로 선발출장해서 홈런을 날렸다. 이후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의 우승에 일조한 후 은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