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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5 07:17:02

모토키 다이스케

모토키 다이스케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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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fcc800><tablebgcolor=#fcc800>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엠블럼.svg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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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난카이 호크스 ]
{{{#555555,#aaaaaa
<tablewidth=100%>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마키 켄지로 (1)
(牧憲二郎)
우에다 타쿠조
(上田卓三)
나카무라 유키야스
(中村之保)
후지와라 마코토 (6)
(藤原真)
토미타 마사루
(富田勝)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사토 미치오
(佐藤道郎)
시마모토 코헤이
(島本講平)
노자키 츠네오
(野崎恒男)
이시카와 카츠마사 (6)
(石川勝正)
후지타 마나부
(藤田学)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하세가와 츠토무
(長谷川勉)
모리구치 마사미츠
(森口益光)
무토 카즈쿠니 (6)
(武藤一邦)
나카데 켄지
(中出謙二)
타카야나기 히데키 (1)
(高柳秀樹)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나토리 카즈히코 (1)
(名取和彦)
야마우치 카즈히로
(山内和宏)
카네시로 노부오
(金城信夫)
하타야마 히토시
(畠山準)
카토 신이치 (1)
(加藤伸一)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1]
타구치 류지 (1)
(田口竜二)
나시카와 요시아키 (1)
(西川佳明)
타지마 토시오 (2)
(田島俊雄)
요시다 토요히코 (1)
(吉田豊彦)
시노다 쥰
(篠田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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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000000 {{{#!folding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555555,#aaaaaa
1989년 ~ 2004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모토키 다이스케 (1) (6)
(元木大介)
키무라 케이지
(木村恵二)
와카타베 켄이치 (2)
(若田部健一)
오오코시 모토이 (1)
(大越基)
카토 타카야스 (3)
(加藤高康)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조지마 켄지
(城島健司)
사이토 카즈미
(斉藤和巳)
이구치 타다히토 (3)
(井口資仁)
나가이 토모히로 (3)
(永井智浩)
요시모토 료 (1)
(吉本亮)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타나카 소지 (3)
(田中総司)
야마무라 미치나오 (3)
(山村路直)
테라하라 하야토 (2)
(寺原隼人)
와다 츠요시 (3)
(和田毅)
마하라 타카히로
(馬原孝浩)
아라카키 나기사 (3)
(新垣渚)
2004년
에가와 토모아키
(江川智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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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000000 {{{#!folding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555555,#aaaaaa
2005년 ~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아라카와 유타 (1) (4)
(荒川雄太)
후쿠다 슈헤이 (1) (4)
(福田秀平)
이와사키 쇼 (1) (4)
(岩嵜翔)
타츠미 신고 (1)
(巽真悟)
이마미야 켄타
(今宮健太)
마츠다 노부히로 (3) (5)
(松田宣浩)
오토나리 켄지 (3) (5)
(大隣憲司)
오오바 쇼타 (1) (5)
(大場翔太)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야마시타 아야츠구 (1)
(山下斐紹)
타케다 쇼타
(武田翔太)
히가시하마 나오 (2)
(東浜巨)
카지야 렌 (1)
(加治屋蓮)
마츠모토 유키
(松本裕樹)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타카하시 쥰페이 (2)
(髙橋純平)
타나카 세이기 (2)
(田中正義)
요시즈미 하루토 (1)
(吉住晴斗)
카이노 히로시 (1)
(甲斐野央)
사토 나오키 (1)
(佐藤直樹)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이노우에 토모야 (1)
(井上朋也)
카자마 큐타
(風間球打)
이히네 이츠아
(イヒネイツア)
마에다 유고 (1) (2)
(前田悠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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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중복 지명 당첨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4) 고교생 드래프트
(5)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6) 지명 후 미입단
[1] 시즌은 난카이로 치렀지만, 드래프트 지명 당시에는 다이에로 매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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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480><tablebordercolor=#221815><tablebgcolor=#221815>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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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F49C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49C00 {{{#!folding [ 쇼와 시대 ]
{{{#555555,#aaaaaa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호리우치 츠네오 야마시타 츠카사 (1) 츠치타 마코토 타카다 시게루 시마노 오사무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코사카 토시히코 유구치 토시히코 요코야마 타다오 나카이 야스유키 코바야시 히데카즈 (5)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사다오카 쇼지 시노즈카 카즈노리 후지시로 카즈유키 야마쿠라 카즈히로 불참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하야시 야스히로 (1) 하라 다쓰노리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 (1) 미즈노 카츠히토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우에다 카즈아키 (1) 쿠와타 마스미 키다 마사오 (1) 하시모토 키요시 요시다 쇼지 (1)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49C00 {{{#!folding [ 헤이세이 시대 ]
{{{#555555,#aaaaaa
1989년 ~ 201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오오모리 타케시 모토키 다이스케 타니구치 코이치 (1) 마쓰이 히데키 미노 카츠히로 (2)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카와하라 준이치 (2) 하라 슌스케 (1) 이리키 유사쿠 (2) 타카하시 요시노부 (2) 우에하라 고지 (2)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타카하시 히사노리 (2) 아베 신노스케 (2) 사나다 히로키 (1) 기사누키 히로시 (2)
쿠보 유야 (2)
우츠미 테츠야 (2)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노마구치 타카히코 (2)
미키 히토시 (2)
츠지우치 타카노부 (3)
후쿠다 사토시 (2) (4)
사카모토 하야토 (1) (3)
카네토 노리히토 (2) (4)
후지무라 다이스케 (1) (3)
무라타 토오루 (1) (4)
오오타 타이시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초노 히사요시 사와무라 히로카즈 마츠모토 류야 (1) 스가노 토모유키 고바야시 세이지 (1)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오카모토 카즈마 사쿠라이 토시키 요시카와 나오키 (1) 쿠와하라 타쿠야 (1) 타카하시 유우키 (1)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49C00 {{{#!folding [ 레이와 시대 ]
{{{#555555,#aaaaaa
2019년 ~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홋타 켄신 (1) 헤이나이 류타 (1) 오타 타이세이 (1) 아사노 쇼고 (3) 니시다테 유우히
(西舘勇陽)
}}}}}}}}}}}} ||
(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3) 고교생 드래프트, (4)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5) 지명 후 미입단: 현재는 1973년도 코바야시 히데카즈가 유일하다.
}}}}}}}}} ||

파일:8C358F70-5B48-43A6-8B10-D74DB915D6C4.jpg
모토키 다이스케
元木大介 | Daisuke Motoki
생년월일 1971년 12월 30일 ([age(1971-12-30)]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오사카부 토요나카시
학력 우에노미야고등학교
신체 180cm, 83kg
포지션 유틸리티 플레이어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신인 드래프트 1순위(다이에, 지명 거부)
1990년 신인 드래프트 1순위(요미우리)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0~2005)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내야수비 겸 타격코치 (2019)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20~2021)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겸 공격 치프코치 (2022)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작전코치 겸 공격 내야 수비코치 (2023)
소속사 아워송 크리에이티브
1. 개요2. 플레이 스타일3. 여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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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前 탤런트이다.

2. 플레이 스타일

내야 전 포지션과 외야 모두 맡을수 있을 정도의 유틸리티 플레이어였고 어느 포지션에 가도 평균이상 수비를 보여주어 타격에서 아쉬움이 있었지만 백업이나 준주전으로써는 쓰임새가 다양했다. 다만 3루수로써는 수비율이 950. 정도로 실책이 제법 있었다는게 흠. 2루수나 유격수로써는 수비율도 꽤 높고 준수한 편이었다.

타격에서는 컨택이나 장타력 양쪽 모두 애매하다는 평가였다. 준주전 & 백업 사이를 오가다 보니 출장타석수가 적어서 시즌 최다 홈런이 9개로 4시즌동안 9개를 기록한적이 있었는데 타석수만 좀더 많았다면 10개 이상도 가능했을것이다. 선구안은 썩 좋지 못해서 사사구가 50개를 넘긴적이 단 한번이며 전시즌 볼넷 & 사구보다 삼진이 많았던 배드볼 히터 성향의 선수였다.

그러나 이 모토키의 내야수로써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2.1. 히든 볼 트릭

바로 모토키가 2루수로 수비에 나설때 다른 센트럴리그 팀들이 모두 모토키의 기만술인 숨김공으로 인해 주자가 눈뜨고 아웃당하는 사태가 많이 벌어져서 다른 5개팀에게 모토키의 숨김공은 이가 갈리는 수준이었다. 물론 숨김공 플레이가 메이저리그나 한국 프로야구 에서도 꽤 나오긴 했지만 모토키의 주자속임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으로 워낙 모토키가 성격이 천연덕스럽기도 했고 주자가 2루에 오면 공을 다시 투수한테 던지는척 하고 천연덕스럽게 수비준비하는 척하다 주자가 조금이라도 베이스를 벗어나면 글러브에 공숨기고 있다가 광속으로 터치해서 아웃시켰고 이렇게 희생당한 주자가 모토키의 현역내내 속출했어서 타구단 입장에선 다른 의미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유튜브 에서도 모토키 다이스케의 플레이를 검색하면 바로 이 숨김공으로 주자들을 학살(?) 하는 플레이가 영상모음으로 나온다.(...) 물론 야구 규정이 개정되고 발전되면서 주자가 진루하고 난뒤 양손을 들어 더 뛸 의사가 없다고 제스처를 해주면 인플레이가 아니게 돼서 이런 숨김공 플레이는 이제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이 트릭의 또 다른 이름은 '은닉구'.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의 특수능력에도 포함돼있다.

그래도 이런 지능적인 플레이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BQ가 좋았던 선수.

3. 여담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절친에 선수시절 죽이 착착맞는 충실한 꼬붕이었다. 나카타 쇼 스기야 겐시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유순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인성적으로는 썩 좋은 평가는 듣지 못해서 자기보다 선배이거나 센사람 & 기요하라 에게는 아주 좋은 후배이자 동료였으나 딱 봐고 약해보이고 순하며 어리숙해 보이는 후배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였다. 특히 기요하라와 듀엣으로 오다 코헤이를 집중적으로 괴롭힌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일로 일본사회의 이지메 문화를 보여주는 예시로도 꼽힌다.

방송으로 찍고 있는중에도 기요하라는 오다를 암바에 목조르기, 똥침으로 괴롭혀대고 모토키는 안보이는데서 오다에게 악질적인 장난을 쳤는데 한번은 오다의 사인볼을 한번 보자고 하더니 갑자기 멀리 집어던지고 오다에게 한번 주워와보라고 하며 기요하라와 킬킬거린 일도 있었고 기요하라가 부상으로 2군에 가있으면 집중적으로 오다를 괴롭히고 엿먹였다. 심지어 기요하라가 2군에서 모토키에게 전화를 걸면 모토키가 오다에게 형님이 널 보고 싶어하신다 이것이 반쵸의 전언이라고 전령노릇까지 했다.

이런 일화가 있음에도 일본사회는 워낙 이지메조차도 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이는게 강한데다 이걸 개그프로에서 소재로 써먹는등 관대한 분위기라 모토키가 그후 요미우리에서 코치를 하거나 탤런트를 하는등 사회적인 커리어를 잇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오다 코헤이가 워낙 인성이 좋기로 유명하고 일본 사회 특유의 혼네 다테마에의 영향으로 은퇴한지 꽤 오래된 시점에서도 기요하라의 유튜브에 오다가 출연하고 서로 연락도 하는걸 보면 사이가 나쁜건 아닌듯. 아니면 오다가 사회적인 처신을 잘하는 것일지도. 여담으로 기요하라, 모토키, 오다 셋 모두 간사이 출신이다.

탤런트 시절에 원피스의 주제가를 부른 적이 있었다. 426~458화까지 사용되었던 12번째 오프닝 風をさがして(바람을 찾아서)가 바로 그것. 당시 출연하고 있었던 헥사곤 원피스 제작진이 서로 교류를 가지던 사이였기에[1] 콜라보 계획이 진행되어 야구치 마리와 모토키 등 헥사곤 출연진들이 음반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작사를 맡았던 시마다 신스케원피스를 전혀 읽지 않고 노래를 만드는 바람에 하필 원피스 작중 내에서 가장 어두운 분위기의 내용인 정상전쟁이 방영되던 시기에 작중 전개와 하나도 맞지 않는 밝은 분위기의 오프닝이 나와 버리면서 팬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곡 자체는 후에 괜찮다고 재평가되긴 했으나 작중 분위기와 정반대로 나온 탓에 흑역사가 되 버린 셈.

팬 서비스가 아주 좋다. 오재원처럼 츤데레면서도 해줄 사인은 다 해준다(...). 그리고 해설자, 탤런트로 활동하며 퀴즈 헥사곤에서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 바보 캐릭터로 인기를 얻는 와중에도[2] 야구장, 중계부스에서는 언제나 넥타이를 착용하는 등 야구에 있어서는 진지했다고 한다.

코시엔 대회에서 스타였고 어렸을 때부터 쿄진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기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드래프트 지명 받기를 바랬지만,(요미우리 이외에는 지명해도 안간다 선언) 하필 그 해 케이오대학의 오모리라는 선수가(akb48 아이돌 오모리의 아버지다) 고교생보다 아래 지명이라면 안간다. 1지명 아니면 요미우리도 안 간다. 이런 식으로 선언을 했고 당시 오모리는 도쿄 6대학에 3관왕을 하는등의 거물신인이었기에 요미우리는 모토키 대신 오모리를 지명했고, 다이에가 모토키를 강행지명했다. 1989년도 드래프트로 노모히데오 8구단 지명을 받았던 그 드래프트다(지금도 최다기록이다) 노모히데오 드래프트라고 불린다.

코시엔의 스타였던 기요하라랑 좀 비슷한 경우였는데, 기요하라는 세이부에 들어갔지만, 모토키는 자신을 지명하지 않았던 요미우리에 눈물을 흘렸지만 1년간 야구유학이라는 명목으로 하와이에서 유학 1년후(공백의 1일 사건으로 유명한 에가와가 먼저 이런식으로 비슷하게 1년을 보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차지명을 받게 된다. 야구유학이라는 식으로 해외에 나간건 매스컴에 시선을 피하고 싶었던 것도 있고, 대학이나 사회인야구에 가면 몇년이후에나 지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난카이 호크스 팬이었다고 한다. 오사다하루를 어렸을 때 만났는데 프로가 되면 쿄진군에 와라 라는 이야기를 직접 듣고 쿄진팬이 되었다고, 쿄진에서 방출되자 마자 바로 은퇴선언을 했다. 자기는 이 팀에 외에는 뛸 생각이 없고 이팀에서 나가라고 하면 미련없이 은퇴할 생각이었다고

모토키 대신 지명을 받은 오모리 다케시는 2군에서는 여러번 홈런왕을 하는등 2군의 제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2군 본즈였지만, 1군에서는 부상등 이렇다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은퇴를 하였다. 부상도 많았고 1군 성적도 안 좋았지만 당시 요미우리에는 오모리의 포지션이었던 1루수나 외야수에 좋은 선수가 너무 많은 포화상태였다.

4. 관련 문서



[1] 이 둘은 같은 후지TV 계열 방송에, 루피의 성우였던 타나카 마유미가 헥사곤의 나레이션을 맡고 있었다. [2] 이 때문에 요미우리의 코치로 돌아올 당시 신조 츠요시가 닛폰햄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와 비슷한 평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