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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카키 나기사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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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퍼시픽리그 최다 탈삼진 | |||||||||||||||||||||||||||||||||||||||||||||||||||||||||||||||||||||||||||||||||||||||||||||||||||||||||||||||||||||||||||||||||||||||||||||||||||||||||||||
2003년 마츠자카 다이스케 ( 세이부 라이온즈) 215탈삼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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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카키 나기사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77탈삼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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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마츠자카 다이스케 ( 세이부 라이온즈) 226탈삼진 |
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2003 |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18번 | ||||
마츠 노부유시 (1999~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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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카키 나기사 (2003~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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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자카 다이스케 (2015~2017) |
{{{#fff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번호 66번}}} | ||||
사나다 히로키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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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카키 나기사 (2014~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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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츠 쇼이츠 (2017~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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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카키 나기사 新垣渚 | Nagisa Araka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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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80년 5월 9일 ([age(1980-05-09)]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오키나와현 나하시 |
학력 | 오키나와 현립 오키나와 수산 고교 (오키나와) - 큐슈 공립 대학 |
신체 | 190cm, 83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입단 | 2002년 드래프트 자유획득제 (다이에) |
소속팀 |
후쿠오카 다이에-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3~2014)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14~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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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오키나와 수산 고교 시절부터 150km/h가 넘는 강속구로 주목을 받았던 선수로 팀을 봄-여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에 진출시켰으나 모두 1회전에서 탈락했다. 이 때의 인상 깊은 활약으로 1998년 드래프트 당시 요코하마 고교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더불어 최대어로 손꼽혔다. 그리고 드래프트 당일, 아라카키를 놓고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가 경합했는데 여기서 오릭스가 교섭권을 얻게 된다. 사실 아라카키는 이전부터 호크스가 아니라면 대학에 가겠다고 공언해놓은 상태였지만, 아라카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오릭스가 지명을 강행한 것. 이후 오릭스 구단은 스카우트 부장 미와타 카츠토시[1]에게 아라카키와의 협상을 맡기며 "네가 책임지고 데려와라"이라고 압박을 줬는데, 아라카키는 그 집을 방문한 미와타를 만나보지도 않고 돌려보내는 등 오릭스에 입단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한 미와타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2] 결국 구단의 무리한 강행지명이 비극을 부른 셈인데, 이 일로 오릭스 구단은 대차게 욕을 먹었고 본의 아니게 한 사람의 죽음과 엮이게 된 아라카키 역시 심리적으로 큰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3]이후 큐슈 공립 대학에 진학한 아라카키는 대학에서도 정상급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2002년 드래프트에서 역지명 제도[4]를 이용해 원하던 호크스 입단에 성공했다.
2.2. 다이에/소프트뱅크 시절
입단 첫 해인 2003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해 강력한 구위로 주목을 받았고 2003년 일본시리즈에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2년차인 2004년에는 11승을 거둠과 동시에 177탈삼진을 기록하며 퍼시픽리그 탈삼진왕에 올랐다. 이후 2006년까지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올리며 호크스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이 때부터 제구 불안이 서서히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2007년에는 NPB 단일시즌 최다인 25 폭투를 기록했으며, 2008년 8월 20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전에서는 1이닝 3폭투[5]를 포함해 1경기 5폭투[6]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 때문에 일본 야구 팬들은 폭투 자체를 ARAKAKI라 부르기에 이른다.[7]이후 부진을 거듭하며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고, 2010년과 2011년에는 부상과 부진으로 아예 1군 마운드에 서질 못했다. 2012년에는 오랜만에 1군에 돌아와 완투승을 거두기도 했지만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2014년 7월 20일, 2:2 트레이드를 통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한다.
2.3. 야쿠르트 시절
이적 후 두 번째 선발 등판 경기였던 2014년 8월 16일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서 또다시 4폭투를 기록, 양대리그 모두에서 1경기 4폭투를 기록해본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결국 3경기 등판 2패 평균자책점 7.88이라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2015년에는 모처럼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지만 불안한 투구로 패만 적립했고, 15경기 3승 10패 평균자책점 4.64의 좋지 않은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2016년 5월 10일 히로시마전에서 통산 1000탈삼진을 기록했으나, 같은달 17일 히로시마전에서 4회 말 1사 3루의 상황에서 폭투를 기록하여 NPB 역사상 3번째로 100폭투를 기록하였다.(아예 기념 티셔츠까지 나올 정도라고 한다)[8] 2016년 성적은 6경기 등판해서 6.67 1승 2패 29 2/3이닝 33피안타 4피홈런 23탈삼진 15사사구 4폭투를 기록하였다. 10월 1일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고 방출 후 현역 은퇴, 친정팀 소프트뱅크의 야구진흥부 직원으로 새출발.
통산 성적은 172경기 등판 1077.1이닝 64승 64패 1010탈삼진 평균자책점 3.99이다.
3.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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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km/h 포심 패스트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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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km/h 투심 패스트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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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km/h 포크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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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km/h 종슬라이더 |
장신에서 내리꽂는 투구폼을 가졌으며, 스리쿼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평균 147km/h, 최고 속도 156km/h(프로에서 기록한 최고 속도는 155km/h)의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포크가 주무기에 투심 패스트볼, 커터, 커브를 가미하여 던지는 우완 파워피쳐 투수였으며, 통산 K/9가 8.85를 기록할 정도로 삼진을 많이 잡아내던 투수. 특히 언론에서 Vanish Ball(vanish=실종)이라 이름 붙인 종슬라이더가 좋은 투수였다. 하지만 제구가 워낙 불안하여 다양한 폭투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2007년에 기록한 시즌 폭투 25개(NPB 최고 기록)가 대표적.
4. 기타
- 친할아버지가 미국 출신이다.
- 2009년 12월 스기우치 토시야의 처제와 결혼했다.
- 2003년 다이에 호크스의 선발진은 사이토 가즈미, 와다 츠요시, 스기우치 토시야, 아라카키 나기사라는 4대천왕급 투수로 구성됐다. 하지만 막상 4명이 모두 한꺼번에 활약한 시즌은 얼마 되지 않는다.[9]
- 이승엽의 일본프로야구 진출 후 공식전 첫 홈런을 맞은 투수이다. 2004년 4월 4일 치바 마린 스타디움 경기의 4회말에 때려낸 홈런이었는데 역풍이 불고 외벽이 높은 마린 스타디움에서는 드문 장외홈런이었다.
- 이 선수의 성씨인 新垣는 읽는 법이 다양해서 아라카키 외에도 아라가키, 니이가키, 신가키 등으로 읽을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아라가키라고 잘못 읽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네이버 뉴스에 완전일치 검색으로 검색해 보면 이 선수의 성씨를 아라카키라고 제대로 쓴 기사보다 아라가키라고 잘못 쓴 기사가 더 많다.
5. 같이 보기
[1]
스즈키 이치로를 발굴한 스카우트로 유명했다.
[2]
아라카키의 면담 방문차 체류하고 있던 오키나와 나하의 맨션에서 유서 없이 투신 자살하였다.
[3]
실제로 야구를 그만두는 것도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와타의 아내가 아라카키에게 '당신 책임이 아니니까 앞으로도 열심해 해달라'는 격려를 해주면서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4]
자신을 원하는 팀의 지명을 거부하고 사회인야구에서 3시즌을 뛰거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희망 구단으로 갈 수 있는 제도가 있었으나 폐지됐다.
[5]
NPB 최다기록 타이.
[6]
NPB 1경기 최다폭투 신기록.
[7]
참고로
KBO 리그에서는 2011년 시범경기에서
고효준이 1이닝 3폭투를 기록한 적이 있는데, 시범경기라 비공식 기록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2015년
kt wiz의
심재민이 1이닝 4폭투를 기록, 한 이닝 최다폭투 아시아신기록을 작성했다.
[8]
통산 폭투 1위
무라타 쵸지가 3331.1이닝 동안 148폭투, 2위
이시이 가즈히사가 2153.1이닝 동안 115폭투를 기록한 데 반해 1077이닝만에 101폭투를 기록했으니 대단한 기록인 건 사실이다.
[9]
냉정하게 따지면 한 시즌도 없다. 아라카키는 04년에 포텐이 터지는데, 나머지 투수들은 04년에 전부 말아먹는다.(사이토는 어깨부상, 와다는 소포모어 징크스, 스기우치는 분에 못 이겨 셀프골절). 05년에는 3인방의 성적이 회복되니 아라카키가 부진했고, 06년에는 다 잘 하는 줄 알았더니만 스기우치가 뻗어버린다. 07년부터는 사이토의 어깨 부상이 심해지고 아라카키의 제구가 망가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