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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00:10:13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4번 타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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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ffffff
<rowcolor=#f49c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파일:일본 국기.svg 나가사와 후지오
(永沢富士雄)
파일:일본 국기.svg 이토 켄타로
(伊藤健太郎)
파일:일본 국기.svg 나카지마 하루야스
(中島治康)
파일:일본 국기.svg 츠츠이 오사무
(筒井修)
파일:일본 국기.svg 마에카와 하치로
(前川八郎)
1936夏 1936夏-1943 1936夏-1948 1936秋 1937秋
<rowcolor=#f49c00>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파일:일본 국기.svg 미즈하라 시게루
(水原茂)
파일:일본 국기.svg 카와카미 테츠하루
(川上哲治)
파일:일본 국기.svg 아오타 노보루
(青田昇)
파일:일본 국기.svg 키구레 리쿠조
(木暮力三)
파일:일본 국기.svg 나카무라 마사미
(中村政美)
1937秋 1939-1958 1943-1952 1943 1943-1944
<rowcolor=#f49c00>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스다 히로시
(須田博)
파일:일본 국기.svg 콘도 사다오
(近藤貞雄)
파일:일본 국기.svg 카와바타 히로시
(川畑博)
파일:일본 국기.svg 쿠로사와 토시오
(黒沢俊夫)
파일:일본 국기.svg 코마츠바라 히로키
(小松原博喜)
1944 1944 1944 1946 1947
<rowcolor=#f49c00>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파일:일본 국기.svg 히라야마 키쿠지
(平山菊二)
파일:일본 국기.svg 우노 미츠오
(宇野光雄)
파일:일본 국기.svg 미나미무라 후카시
(南村不可止)
파일:일본 국기.svg 테즈카 아키하루
(手塚明治)
파일:미국 국기.svg 미야모토 토시오
(宮本敏雄)
1948 1951-1953 1951-1952 1953-1954 1955-1961
<rowcolor=#f49c00>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파일:일본 국기.svg 히가사 카즈오
(樋笠一夫)
파일:일본 국기.svg 후지오 시게루
(藤尾茂)
파일:일본 국기.svg 카시와에다 분지
(柏枝文治)
파일:일본 국기.svg 요나미네 카나메
(与那嶺要)
파일:일본 국기.svg 나가시마 시게오
(長嶋茂雄)
1955 1955-1961 1955 1958 1958-1974
<rowcolor=#f49c00>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파일:일본 국기.svg 사카자키 카즈히코
(坂崎一彦)
파일:일본 국기.svg 쿠니마츠 아키라
(国松彰)
파일:대만 국기.svg 오 사다하루
(王貞治)
파일:일본 국기.svg 이케자와 요시유키
(池沢義行)
파일:일본 국기.svg 모리 마사아키
(森昌彦)
1959-1962 1960-1968 1962-1980 1963 1964-1965
<rowcolor=#f49c00>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
파일:일본 국기.svg 아이바 요시히로
(相羽欣厚)
파일:일본 국기.svg 요시다 카츠토요
(吉田勝豊)
파일:일본 국기.svg 타나카 쿠스오
(田中久寿男)
파일:일본 국기.svg 타카쿠라 테루유키
(高倉照幸)
파일:일본 국기.svg 모리나가 카츠야
(森永勝也)
1965 1965 1967 1967 1967
<rowcolor=#f49c00> 제36대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파일:일본 국기.svg 시바타 이사오
(柴田勲)
파일:일본 국기.svg 스에츠구 토시미츠
(末次利光)
파일:일본 국기.svg 야나기다 마사히로
(柳田真宏)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하리모토 이사오
(張本勲)
파일:일본 국기.svg 아와구치 켄지
(淡口憲治)
1969 1970-1975 1974 1976-1979 1976
<rowcolor=#f49c00>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제45대
파일:미국 국기.svg 데이비 존슨
(ジョンソン)
파일:미국 국기.svg 존 시핀
(シピン)
파일:일본 국기.svg 야마모토 코지 파일:미국 국기.svg 로이 화이트
(ホワイト)
파일:일본 국기.svg 나카하타 키요시
(中畑清)
1976 1978-1979 1979-1980 1980-1982 1981-1988
<rowcolor=#f49c00> 제46대 제47대 제48대 제49대 제50대
파일:미국 국기.svg 게리 토마슨
(トマソン)
파일:일본 국기.svg 마츠바라 마코토
(松原誠)
파일:일본 국기.svg 하라 타츠노리
(原辰徳)
파일:미국 국기.svg 레지 스미스
(スミス)
파일:미국 국기.svg 워렌 크로마티
(クロマティ)
1981 1981 1982-1995 1983-1984 1984-1990
<rowcolor=#f49c00> 제51대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파일:대만 국기.svg 루밍쑤
(呂明賜)
파일:일본 국기.svg 코마다 노리히로
(駒田徳広)
파일:일본 국기.svg 요시무라 사다아키
(吉村禎章)
파일:미국 국기.svg 마이크 브라운
(ブラウン)
파일:미국 국기.svg 필 브래들리
(ブラッドリー)
1988 1988-1992 1990-1998 1990 1991
<rowcolor=#f49c00> 제56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파일:미국 국기.svg 로이드 모즈비
(モスビー)
파일:미국 국기.svg 제시 바필드
(バーフィールド)
파일:일본 국기.svg 오카자키 카오루
(岡崎郁)
파일:일본 국기.svg 오쿠보 히로모토
(大久保博元)
파일:일본 국기.svg 오치아이 히로미츠
(落合博満)
1992-1993 1993 1993 1993 1994-1996
<rowcolor=#f49c00>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제65대
파일:일본 국기.svg 히로사와 카츠미
(広沢克実)
파일:일본 국기.svg 마츠이 히데키
(松井秀喜)
파일:미국 국기.svg 셰인 맥
(マック)
파일:일본 국기.svg 키요하라 카즈히로
(清原和博)
파일:일본 국기.svg 이시이 히로오
(石井浩郎)
1995-1998 1995-2002 1996 1997-2005 1997-1999
<rowcolor=#f49c00> 제66대 제67대 제68대 제69대 제70대
파일:일본 국기.svg 타카하시 요시노부
(高橋由伸)
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도밍고 마르티네스
(マルティネス)
파일:베네수엘라 국기.svg 로베르토 페타지니
(ペタジーニ)
파일:일본 국기.svg 코쿠보 히로키
(小久保裕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승엽
(李承燁)
1999-2014 1999 2003-2004 2004-2006 2006-2008
<rowcolor=#f49c00>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74대 제75대
파일:일본 국기.svg 니오카 토모히로
(二岡智宏)
파일:일본 국기.svg 아베 신노스케
(阿部慎之助)
파일:일본 국기.svg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小笠原道大)
파일:일본 국기.svg 알렉스 라미레스
(ラミレス)
파일:일본 국기.svg 초노 히사요시
(長野久義)
2006 2007-2019 2007 2008-2011 2011-2016
<rowcolor=#f49c00> 제76대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파일:일본 국기.svg 무라타 슈이치
(村田修一)
파일:베네수엘라 국기.svg 호세 로페스
(ロペス)
파일:미국 국기.svg 존 보우커
(ボウカー)
파일:멕시코 국기.svg 레슬리 앤더슨
(アンダーソン)
파일:쿠바 국기.svg 프레데릭 세페다
(セペダ)
2012-2017 2013-2014 2013 2014-2015 2014
<rowcolor=#f49c00>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제85대
파일:일본 국기.svg 오오타 타이시
(大田泰示)
파일:일본 국기.svg 사카모토 하야토
(坂本勇人)
파일:일본 국기.svg 나카이 다이스케
(中井大介)
파일:일본 국기.svg 카메이 요시유키
(亀井善行)
파일:미국 국기.svg 개럿 존스
(ジョーンズ)
2014-2015 2015~ 2015 2015 2016
<rowcolor=#f49c00> 제86대 제87대 제88대 제89대 제90대
파일:멕시코 국기.svg 루이스 크루즈
(クルーズ)
파일:미국 국기.svg 케이시 맥기
(マギー)
파일:아이티 국기.svg 알렉스 게레로
(ゲレーロ)
파일:일본 국기.svg 오카모토 카즈마
(岡本和真)
파일:일본 국기.svg 마루 요시히로
(丸佳浩)
2016 2017-2018 2018 2018~ 2020
<rowcolor=#f49c00> 제91대
파일:일본 국기.svg 나카타 쇼
(中田翔)
2022
1) 연도는 해당 선수가 4번 타자로 1경기 이상 출장한 해.
2) 볼드체 일본야구전당 헌액자.
}}}}}}}}}}}} ||

파일:2006 닛폰햄.png 파일:09giants.png 파일:12 giants.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6 2009 2012

파일: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반지}}}
2006 2009

파일:2004 아테네 올림픽 로고.svg
2004 아테네 올림픽
{{{#bd5c24 동메달}}}
2004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스기우치 도시야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다르빗슈 유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후쿠도메 코스케
( 주니치 드래곤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요미우리 자이언츠)
알렉스 라미레스
(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필 클라크
( 킨테츠 버팔로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닛폰햄 파이터즈)
마쓰나카 노부히코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마쓰나카 노부히코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닛폰햄 파이터즈)
알렉스 카브레라
(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3~2004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나카무라 노리히로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닛폰햄-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이마에 토시아키
( 치바 롯데 마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훌리오 줄레타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알렉스 카브레라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이와무라 아키노리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요미우리 자이언츠)
무라타 슈이치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9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무라타 슈이치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요미우리 자이언츠)
모리노 마사히코
(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9년~2002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
타카기 다이세이
( 세이부 라이온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닛폰햄 파이터즈)
후쿠우라 카즈야
( 치바 롯데 마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3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
나카무라 노리히로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닛폰햄 파이터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
후쿠우라 카즈야
( 치바 롯데 마린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후쿠우라 카즈야
( 치바 롯데 마린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2, 2003 퍼시픽 리그 수위타자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6 퍼시픽 리그 최다 홈런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6 퍼시픽 리그 최다 타점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0, 2001 퍼시픽 리그 최다 안타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3 퍼시픽 리그 최고 출루율

보유 기록(NPB)
연속 경기 득점 17경기

닛폰햄-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2번
스즈키 요시히로
(1989~1996)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1997~2006)
타카하시 신지
(2008~2011)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2번}}}
코사카 마코토
(2006)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2007~2013)
이바타 히로카즈
(2014~2015)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36번}}}
타니 테츠야
(2008~2013)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2014~2015)
이시오카 류타
(2016~2019)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82번}}}
서용빈
(2014)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2016~2019)
마르크
(2020)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81번
요시이 마사토
(2016~2018)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2020~2021)
타테야마 요시노리
(2023~)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72번}}}
타카하시 노부오
(2021)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2022)
아와노 히데유키
(2022~2023)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00번}}}
안도 츠요시
(2022)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2023)
결번
}}} ||
파일:오가사와라미치히로.jpg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小笠原道大 | Michihiro Ogasawara
생년월일 1973년 10월 25일 ([age(1973-10-25)]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치바현 치바시 미하마구
학력 교세이 국제 고교 (치바)
신체 178cm, 84kg
포지션 1루수, 3루수, 포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6년 드래프트 3라운드 (전체 34번, 닛폰햄)
소속팀 닛폰햄-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997~2006)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7~2013)
주니치 드래곤즈 (2014~2015)
지도자 주니치 드래곤즈 2군 감독 (2016~2019)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수석·타격코치 (2020~2021)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22)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타격코치 (2023)
등장곡 Paul Oakenfold - Switch On
응원가 닛폰햄 시절[1][2]
요미우리 시절[3]
주니치 시절[4]

1. 개요2. 선수 경력
2.1. 프로 데뷔 이전2.2.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2.3.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2.4. 2011년 이후2.5. 은퇴 이후2.6. 연도별 기록
3. 플레이 스타일4. 여담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 야구 선수. 선수 시절 등번호는 닛폰햄 파이터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엔 2번,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엔 36번을 달았다.

타격 준비 자세에서 검객이 칼을 뽑듯 배트를 쭉 뻗어주는 특유의 타격 준비 자세와 호쾌한 스윙, 거기에 수염을 휘날리던 외모까지 합쳐져 '검객' 혹은 '미스터 풀스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갓츠'(Guts)로 불리는 근성 넘치는 플레이로도 명성이 높았다. 이승엽과 같은 팀에서 활약한 덕택에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 선수 중 하나다.

2. 선수 경력

2.1. 프로 데뷔 이전

고교 시절[5]엔 주로 포수, 2루수를 보았고 현내 코시엔 예선대회 결승까지 진출한 적은 있었지만 코시엔 진출은 단 1번도 없었던, 무명에 가까운 선수였다. 졸업 후 NTT 칸토에 입사해 팀 내 사회인 야구팀에서 주전 포수 겸 중심타자로 활약했으며, 1996년 도시대항 야구대회에 신일본제철 키미츠 측의 보강선수로 출장하기도 했다. 그 후 1996년 드래프트 3위로 닛폰햄 파이터즈에 지명받으며 프로에 데뷔한다.

2.2.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ee9759af.jpg
당시 도쿄돔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던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한 오가사와라는 데뷔 후 첫 2년간은 포수로 활동했지만 출장기회를 많이 잡지는 못했는데, 1999년부터 전년도에 은퇴한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1루수로 전향하면서 타격 포텐이 폭발. 이해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함과 동시에 타율 .285, 25홈런 83타점을 기록하면서 단숨에 주전 자리를 확보하며 닛폰햄의 중심타자로 정착한다. 1999~2000년에는 2번 타자로, 2001년에는 1~3번을 오가며 최다 안타 1위(2000~2001년)와 20-20(2000년) 등을 달성했다.

2002년 주전 3루수이자 붙박이 3번 타자이던 카타오카 아츠시가 FA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면서 오가사와라는 3번 타순에 정착하여 타율 0.340로 수위타자에 올랐다. 3루수로 전향한 2003년, 타율 0.360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수위타자를 차지하는 동시에 골든글러브를 수상.

팀이 홋카이도로 연고지를 옮긴 2004년에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했고, 2006년에는 3월 WBC 초대 챔피언에 오른 이후 정규시즌에 돌입하여 홈런왕, 타점왕, 리그 MVP까지 차지하면서, 팀에 44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6]을 안겨주었다.

2.3.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2006년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하자 닛폰햄으로부터 잔류 요청을,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인기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고[7] 검토 끝에[8]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

파일:external/www.sponichi.co.jp/2.jpg
요미우리에 입단하면서 수염도 깔끔하게 면도를 하게 되는데, 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 선수는 수염을 기를 수 없다'는 구단의 규정 때문. 사실 당시 오가사와라를 애타게 원하던 요미우리는 " 특별 케이스로 수염 안 깎아도 좋으니 우리팀과 계약하시죠"이라고 했으나, 오가사와라는 이왕 요미우리의 일원이 된 이상 자신이 팀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스스로 면도를 했다고 한다. 허나 이건 반쯤 언플이고 요미우리 구단은 수염 기르는것조차 허락 안하는 구단이라 한명을 예외로 봐주면 나중에 다른 선수들도 그런 요구를 할게 뻔하기 때문에 결국은 깎게 했을 것이다.[9]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정작 계약 체결되자마자 당장 수염 깎으라 했다고.

그런 팀의 기대에 부응하듯 이적 첫 해인 2007년, 요미우리의 리그 우승에 공헌하며 2년 연속으로 MVP를 수상했다. 이로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두번째로 양대리그 MVP를 차지한 선수가 되었다.[10]

2008~2010년에도 3할-30홈런을 기록하며 2009년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주로 3루수를 맡았지만 1루수로도 자주 기용됐다. 3루 405경기, 1루 206경기.

이러한 뛰어난 활약에 힘업어 2006년 초대 대회에 이어 2009 WBC에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대회 내내 주전 1루수로 활약하였고,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도 대회 창설 이후 두 대회 연속 석권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적 후 성공적인 4년[11]을 마무리하고 오가사와라는 FA 권리를 재취득할 수 있게 되었으나 행사하지 않고 요미우리에 잔류, 이에 구단도 최고 수준의 연봉인 4억3000만엔에 2년 계약으로 화답했다.

2.4. 2011년 이후

2011년부터는 붙박이 1루수로 확정되었다. 오가사와라의 수비부담도 덜어주는 한편 고졸 3년차 거포 유망주 오타 다이시의 3루 주전 정착을 위한 포석이였다. 그러나 오가사와라는 부진에 빠지며 6번, 7번, 8번 타순에 배치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8월에 들어선 그나마 타격감을 올리며 3번 타순을 되찾기도 했지만, 최종 성적은 타율 0.242, 5홈런. 부진 속에서 명구회 가입 기준이 되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34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타율 0.152, 0홈런의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나이도 39세에 2년 계약 종료시점이라 은퇴 가능성도 점쳐졌지만 오가사와라는 현역 생활 연장을 선언했고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연봉 최대 삭감(3억 6천만엔 삭감)을 감수하며 재계약에 성공했다. #

2013년 6월에는 깜짝 기용으로 굿바이 쓰리런 홈런을 쳐내기도 했다.[12] 하지만 이 홈런 이후로 다시 침체기에 빠져들었으며, 이 홈런이 그의 2013시즌 처음이자 마지막 홈런이 되고 말았다. 이후 FA를 선언했다.[13]

2013년 11월 26일 계약기간 1년 연봉 3000만엔에 주니치 드래곤즈와 계약했다. 주니치와 계약하자마자 수염을 다시 길렀다. 그리고 2014년에는 나이 때문에 선발출장보다는 주로 대타나 경기 도중 교체 식으로 출장하며 83타수 25안타(타율 0.301)를 기록했다. 비록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고 작년에 이어 1년에 홈런이 1개밖에 안 나오는 등 노쇠화로 인해 장타력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아쉬운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당시 일본프로야구의 무시무시한 투고타저에도 불구하고 4년만에 3할에 복귀하며 대타요원으로 그럭저럭 쏠쏠한 활약을 해 2015년 재계약에 청신호를 켰다.

2015년에도 대타요원으로서 활약. 장타는 거의 때려내지 못했지만(홈런 없이 2루타만 3개) 시즌 초에는 타율이 3할 9푼(!)까지 오르는 등 최종적으로 51타수 15안타(타율 0.294)로 대타요원 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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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1일 요미우리전에서 현역 은퇴경기를 치뤘다. 4회 내야안타로 마지막 안타를 쳤고, 7회 프로 마지막 타석에서 좌익수 플라이 아웃. 그리고 경기 종료 후 전 소속팀이었던 요미우리와 현 소속팀인 주니치 양팀 선수단 모두에게 헹가레를 받는 인상적인 은퇴식을 끝으로 현역생활에서 은퇴했다. 은퇴 소감을 이야기 할 때 본인의 프로 데뷔 첫 안타가 내야안타였는데 마지막 안타도 내야안타로 기록하게 되어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프로 통산 성적은 1992경기 출장, 6828타수 2120안타, 378홈런 1169타점 63도루, 타/출/장 .310/.389/.540 OPS .932

2.5. 은퇴 이후

은퇴하자마자 2016년부터 곧바로 주니치 드래곤즈 2군 감독으로 부임,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6년 팀이 암흑기에 빠지며 타니시게 감독이 중도경질, 오가사와라도 감독 후보 중 하나로 꼽혔으나 아직 젊은데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오가사와라에게는 짐이 무겁다는 판단으로 모리 시게카즈 수석코치가 뒷수습을 위해 감독대행으로 부임하며 잔여 시즌을 소화했다. 시즌 후 모리 수석코치와 함께 주니치의 차기 감독 후보로 예상되었으나, 그대로 모리 대행이 정식 감독으로 취임해 버리며 오가사와라는 일단 좀 더 기다리게 되었다.

여튼 아직 나이도 40대 중반으로 젊은데다 2군 감독인 만큼 지도자 경력을 조금 더 쌓아 향후 주니치의 감독 후보 중 하나로 주목받았고, 2018년 모리 감독의 계약이 끝나며 다음 감독 1순위로 꼽혔는데, 팀은 뜬금없이 라쿠텐 골든이글스 투수코치인 요다 츠요시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며 다시 한번 물을 먹었다. 요다 감독도 주니치 프랜차이즈 출신에 16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서 오가사와라와 코치 짬밥은 동기인데, 주니치에서 은퇴 후 쭉 지도자 커리어를 쌓은 오가사와라가 아닌 비록 예전 주니치 출신 신인왕이었다지만 주니치를 떠난 지 20년이 넘었고 선수시절 커리어도 오가사와라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요다를 감독으로 앉힌 건 예상 외의 결과였다는 평.

결국 주니치에서는 감독이 되기 힘들 거라고 판단했는지 2019년 시즌 종료 후 주니치 2군 감독에서 물러나며 팀을 떠났고, 친정 팀 닛폰햄의 코칭스태프로 영입되면서 13년 만에 친정팀으로 돌아왔다. 2020 시즌부터 닛폰햄에서는 수석코치와 1군 타격코치를 겸직하고 있다. 하지만 2021년 시즌 나카타 쇼 문제[14]와 2년 연속 B클래스인 성적부진, 팀의 전반적인 타격부진에 대한 책임으로 쿠리야마 감독이랑 함께 시즌 종료후 경질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고 10월 28일 구단 측에서 계약 만료에 따른 퇴단을 발표하였다.

이후 거취는 전성기를 보냈던 교진으로 2022년엔 교진 2군 타격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 오가사와라는 교진 순혈이 아니라 감독이 될 수 없으므로 일단 감독직에서는 1보 후퇴한 상태. 사실 지금은 감독이 문제가 아니라 닛폰햄에서 일단 모양새는 계약만료지만 사실상 선수단 관리실패와 성적부진의 책임을 물어 경질에 가까운지라 일단 재취업자리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보여서 닛폰햄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고 능력을 입증해서 짤리지 않고, 코치로서 잃어버린 신용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2023년에는 3군 타격코치로 강등되었다. 오가사와라가 코치를 한 지도 6~7년 가까이 되어 꽤 경력이 쌓였는데, 진짜 능력있는 코치라면 슬슬 하나쯤 터트렸어야 할 때다. 코치로서 성공작은 하나도 없는데 나카타 쇼 사건 및 주니치 2군 감독 시절부터 이어온 전반적인 성적부진으로 인해 코치로서 능력을 의심받는 상황으로, 감독 자리와는 상당히 멀어진 상태. 지도자를 2군 감독으로 시작했음에도 이후 1군 수석/타격코치-2군 타코-3군 타코로 계속 보직이 강등되며 어느새 짤리기 직전까지 왔다. 무언가 반전이 없다면 이대로 초라하게 지도자 생활을 접어야 할 판. 결국, 2023년을 끝으로 퇴단하며 지도자 생활을 마감하였다.

2.6. 연도별 기록

파일:NPB 로고.svg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역대 NP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1997 닛폰
44 98 21 10 2 0 7 7 1 3 10 .223 .245 .372 .672 0
1998 71 98 26 5 0 1 7 9 1 11 17 .302 .378 .395 .773 0.2
1999 135 607 156 34 4 25 90 83 3 56 84 .285 .349 .499 .848 3.7
2000 135 635 182 23 4 31 126 102 24 74 91 .329 .406 .552 .959 6
2001 140 643 195 40 2 32 108 86 1 63 102 .339 .407 .582 .989 5.9
2002 135 574 165 27 2 32 77 81 8 76 77 .340 .430 .601 1.031 7.3
2003 128 546 160 34 1 31 83 100 8 93 65 .360 .473 .649 1.122 7.7
2004 101 452 130 19 2 18 78 70 3 70 70 .345 .449 .549 .998 4.8
2005 133 580 145 27 2 37 91 92 2 61 114 .282 .362 .558 .920 5.6
2006 135 579 155 31 1 32 77 100 4 73 85 .313 .397 .573 .970 6.9
<rowcolor=#ffffff>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07 요미
우리
142 617 177 33 1 31 95 88 4 43 98 .313 .363 .539 .902 6.1
2008 144 589 161 27 1 36 93 96 0 56 105 .310 .381 .573 .954 5.4
2009 139 580 159 25 1 31 78 107 2 60 107 .309 .384 .543 .927 5.9
2010 137 591 157 24 1 34 83 90 1 73 101 .308 .394 .559 .953 6
2011 83 314 68 12 0 5 21 20 1 27 66 .242 .315 .338 .653 1.1
2012 34 99 14 3 0 0 4 4 0 5 22 .152 .194 .185 .379 -0.7
2013 22 40 9 2 0 1 2 8 0 2 7 .250 .300 .389 .689 -0.1
<rowcolor=#ffffff>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14 주니
81 99 25 6 0 1 4 18 0 14 16 .301 .404 .410 .814 0.8
2015 53 59 15 3 0 0 2 8 0 7 10 .294 .373 .353 .726 0.2
NPB 통산
(19시즌)
1992 7800 2120 385 24 378 1126 1189 63 867 1247 .310 .389 .540 .929 72.9

3. 플레이 스타일

파일:오가사와라끝내기.gif
정면에서 본 타격폼[15]
파일:오가사와라슬로우.gif
측면에서 본 타격폼

일본인 타자치고는 스윙이 큰 편인데, 치기엔 좋지 않은 공도 잡아당겨 장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배트 컨트롤이 일품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프로야구계의 대표적인 배드볼 히터로 분류되지만, 일단 방망이부터 내고보는 프리스윙어는 아니고 선구안도 좋아 나쁜 공에는 거의 배트를 내지 않아 통산 출루율이 .390에 달한다. 그냥 남들 보다 뱃 컨트롤을 더 뛰어나서 칠 수 있는 공의 범위가 넓은 것에 가까웠다.

신체 사이즈는 슬러거 치고는 그닥 크지 않은 체격[16]이라 타고난 파워 자체는 대단하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고교 시절 통산 홈런은 0개였는데, 데뷔 이후엔 특유의 방망이를 세운 자세에서 나오는 강렬한 풀스윙의 원심력으로 파워를 보태 상대적으로 왜소한 피지컬 문제를 극복했다. 이렇게 스윙이 크면 정확도가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단련된 팔근육에서 나오는 엄청난 배트스피드와 피나는 연습으로 얻은 배트 컨트롤을 바탕으로 2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할 정도로 웬만한 교타자보다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여기에 뛰어난 선구안이 더해서 NPB 역사에 남을 강타자가 될 수 있었다.

선천적인 힘이 뛰어나지 않아 홈런 비거리는 짧은 편이었다. 2004~2006년 삿포로 돔을 홈으로 쓴 것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의 거의 대부분 홈구장이 도쿄돔이었는데 상승기류로 타구 비거리가 뻥튀기되기 쉽고 마름모꼴의 구장 형태 때문에 돔런이라고 불리는 홈런이 많은 도쿄돔을 홈으로 쓰면서도 펜스를 겨우 넘기는 홈런이 많았다. 거기에 2011년 저반발구 공인구가 도입되면서 단순한 노쇠화만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장타력이 급격하게 폭락하여 결국 은퇴에 이르게 되었다. 30홈런을 밥먹듯 치던 타자가 한 시즌만에 5홈런도 넘기기 버거워졌을 정도로 그의 성적 하락은 정상적인 기량 하락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급작스러웠는데, 노쇠화 때문이라기보다는 저반발구 때문에 안 그래도 짧은 비거리가 더 짧아져서 기존 래빗볼이었으면 홈런이 되었을 공들이 죄다 외야 플라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외야가 넓어서 수비가 힘든 나고야돔으로 옮기게 되자 도쿄돔에서라면 플라이가 되었을 공들이 안타가 되며 성적이 다소 회복된 것. 실제로 커리어 말년을 보낸 주니치에서 대타요원으로 3할 전후의 타율과 타율보다 1할 가까이 높은 출루율을 기록할 정도로 선구안과 컨택은 살아있었으니, 저반발 공인구 도입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할 만하다.

이렇듯 전형적인 슬러거 체격도 아니었고 이러한 체격 조건에 맞지 않는 타격을 했으나 결국에는 좋은 성적을 기록한,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의 선수.

일본 최고의 타자치고는 메이저 리그 진출 떡밥이 거의 없었는데, 사회인 야구에서 5년을 거쳐 입단하다 보니[17] 이미 06 WBC시점에 33세로 나이가 너무 많은 점도 있었고, 코너야수인데도 선천적인 파워가 부족하다는게 치명적이었다. 당시 일본은 이치로와 마쓰이의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진출 후 메이저리그 진출 붐이 일기 시작한 시점이라 오가사와라 본인도 MLB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2차례의 WBC에 참가해서 똑딱질은 잘했지만 정작 홈런을 하나도 치지 못해서 우승팀의 주전 1루수였음에도 올스타에 들지 못했고[18] WBC 유망주 랭킹 순위에 들지 못했다. 오가사와라 본인도 메이저리그 공인구는 멀리 뻗지 않는다는 짤막한 소감을 끝으로 도전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다. 실제로 이 당시 일본 공인구는 메이저리그 공인구 보다 반발력이 좋았고 상술했듯 오가사와라의 홈런은 이 반발력 좋은 공인구와 펜스가 짧고 상승기류가 있는 홈구장 등 외부 환경의 덕을 봤기 때문에 MLB 진출에 성공했더라도 일본 시절과 같은 홈런 타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베테랑 타자답게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평가를 내린 것.

비교적 날렵한 체형답게 주력도 준수한 편으로 2000년 시즌에는 31홈런-24도루를 기록했을 정도로 수준급의 주루 능력을 보여줬으나, 팀의 주포였기 때문에 부상을 우려한 탓인지 이후로는 도루를 많이 줄여 10도루 이상을 기록한 시즌은 이 시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나 주루 플레이를 보면 확실히 도루만 안할 뿐이지 발이 느린 것은 아니다.

수비는 본래 포수로 입단했으나, 미숙한 수비와 적은 주전 기회가 맞물려 타격을 살리기 위해 내야수로 전향했다. 주로 1, 3루 수비를 보았는데, 처음에는 1년 정도 1루수로 뛰었다가 3루의 공백으로 인해 3루수로 포지션을 번경, 그렇게 3루수로 정착했다. 그러나 1루도 부포지션으로 자주 출장했으며, 나이가 들고 나서는 다시 1루수로 돌아왔다. 수비력은 3루수 골든글러브를 한 차례 수상한 적도 있는 등 전체적으로 준수한 편이었다. 특히 베이스라인을 타고 흐르는 타구의 처리가 좋았다. 다만 나이가 들며 급격히 수비 범위가 줄어들었고, 이후 때맞춰 입단한 3루수 무라타 슈이치의 입단으로 1루수로 다시 전향했다. 요미우리 말년~주니치 시절에는 거의 대타로 나왔고 수비는 거의 1루 대수비로 들어갔다. 일단 골든글러브는 3루수 시절에 탔기에 3루수로 볼 수 있지만 출장 기록만으로 보면 1-3루를 거의 동일하게 보았다고 봐도 되는 수준.

오가사와라 하면 흔히 교진 3번으로서의 거포 이미지가 강해서 묻히기 쉽지만 수위타자, 홈런왕, 타점왕, 출루율왕, 장타율왕, 골든글러브를 다 한 번씩 수상한 경험이 있고 20도루를 넘긴 시즌도 있기 때문에 충분히 5툴 플레이어로 불릴 만한 선수.

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온 게 아니라 사회인야구에서 5년을 활동하다가 왔기 때문에 프로 입단이 좀 늦은 편이었는데도 통산 홈런이 378개인 것을 보면 정말 꾸준하게, 매년 많은 홈런을 쳤던 뛰어난 선수라고 할 수 있겠다.

4. 여담

5. 관련 문서



[1] 전주:小笠原村には海がある 小笠原村にはイルカがいる 小笠原村には夢がある 毎日サバイバル(오가사와라무라에는 바다가 있다 오가사와라무라에는 돌고래가있다 오가사와라무라에는 꿈이 있다 매일 서바이벌) [2] 立ち上がれ小笠原 この世のために 島国が生んだ 和製大砲(일어나라 오가사와라 이 세상을 위해서 섬나라가 낳은 일제 대포) [3] 飛び立とう高く 絆共にして 明日を照らす道広げ 放て君よ今(날아오르자 높이 인연을 함께해 내일을 비추는 길을 펼쳐줘 그대여 지금) [4] 闘志をこめた そのフルスイング 一振りで放てよ 誰より強く(투지를 담은 그 풀스윙 한번에 날려버려 누구보다 강하게) [5] 고교 시절 통산 홈런 갯수가 0개였을 정도로 동기들보다 현저히 실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껴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고 한다. [6] 이 팀의 전신인 도에이 플라이어스 시절인 1962년에 우승하고 44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 62년에 도에이를 우승시키며 리그 MVP를 차지했던 선수가 바로 장훈이었다. [7] 도쿄돔 시절의 닛폰햄 파이터즈가 비인기팀이었던 탓에 오가사와라 역시 그 시절까지는 성적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닛폰햄 파이터즈가 연고지 이전 후 처음으로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했던 2006년 시즌의 맹활약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8] 당시 닛폰햄은 3년 계약을, 요미우리는 4년 계약을 제시했다. 4년 16억엔 내외로 추정. 오가사와라는 요미우리와의 협상에서 4년 계약을 제시받자마자 구단측의 성의에 감격, 곧바로 입단 의향을 밝혔다고 한다. [9] 역사상 예외가 아예 없던 건 아니다. 90년대부터 명문화된 규정이라 그 이전 선수들은 많지는 않아도 장발과 수염을 기르는 선수가 가끔씩 있었다. 물론 이 규정을 품위 유지 조항으로 계약서에 박아넣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얄짤없다. 이후 이 품위유지조항을 깬 선수가 2021년 입단한 에릭 테임즈. 수염은 깎았지만 문신은 어쩔 수가 없어서 문신 금지 조항을 특별히 면제해 주었다. 무려 87년만의 특별 케이스. [10] 첫 번째 양리그 MVP 수상자는 에나츠 유타카이며 1979년 히로시마 카프, 1981년 닛폰햄 파이터즈 소속으로 수상한 바 있다. [11] 4년간 평균 140경기 타율 .310 33홈런 95타점 OPS 9할 WAR 5의 성적을 꾸준히 찍어주면서 지금까지도 요미우리의 외부FA 영입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게다가 해당 4년이 34~37세 시즌이라는걸 감안하면 더욱 높게 평가받을만하다. [12] 이 이전에 니코니코 동화에서 오가사와라의 굿바이 쓰리런 홈런을 예언한 MAD가 있어서 잠시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히메카와 유키 항목 참고. [13] 당시 오가사와라는 출전 기회가 적어진 요미우리를 떠나 새로운 팀에서 도전하고 싶다고 했지만 전성기가 지난 40살 선수를 받아줄 팀이 있을지는 의문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주니치 드래곤즈와 계약에 성공했다. [14] 올림픽 브레이크 도중 팀내 후배인 이구치 카즈토모를 폭행해 뇌진탕까지 만들었다. 이로인해 나카타는 무상 트레이드되면서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15] 2013년 6월 5일 닛폰햄전 끝내기 쓰리런. [16] 김하성과 체격이 거의 비슷하다. [17] 고졸 사회인은 사실 3년만 뛰어도 프로에 갈 수 있다. 성장 속도가 느렸거나, 본인이 사회인야구에 남고 싶었거나 등의 이유로 2년을 더 끈 것. [18] 2006 WBC에서는 이승엽, 2009 WBC에서는 김태균이 각각 올스타로 뽑혔다. [19] 70년대 한큐 브레이브스 왕조를 이끈 강타자 1루수로, 통산 2055안타 347홈런 1268타점의 화려한 누적 기록에 MVP 1회, 타격왕 2회, 타점왕 3회 등을 수상했다. [20] 이 시기 닛폰햄 응원가에는 가족이 운영하던 야키니쿠 집의 위치를 알려주는 모리모토 히초리의 응원가를 비롯해 좀 이상한 방향의 PR이 들어간 것들이 더러 있었다. 한신에서 트레이드로 온 츠보이 토모치카의 응원가엔 학력과 출신 사회인 야구팀, 데뷔팀 한신을 읇는 특이한 전주가 붙어있기도 했다. [21] 애당초 오가사와라는 자신이 재일 출신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 게다가 오가사와라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이후 여러 차례 일본 대표팀에 선발된 선수다. 만약 루머대로 오가사와라가 원래 재일 출신이었다면 아테네 올림픽 전에 일본으로 귀화를 했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일본의 관보에 고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관보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로 추정되는 1973년 10월 25일생 치바현 출신 남성이 귀화했다는 내용이 고시된 적이 없다. [22] 그동안 정식 감독 경험이 없었던 모리 시게카즈 감독은 63세에 감독 데뷔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령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