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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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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wiki style="margin: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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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est Britain Monarch
※ 2012년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여론조사업체 ICM에 의뢰해 영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TOP 5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 헨리 8세 헨리 5세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파일:1200px-Encyclopædia_Britannica.svg.png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wiki style="margin: 0 -10px -5px"
{{{#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앙겔라 메르켈 베나지르 부토 예카테리나 2세 캐시 프리먼 서태후
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에이다 러브레이스 어밀리아 에어하트 바버라 매클린톡 캐롤라인 허셜 도러시 호지킨
엘리자베스 블랙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히파티아 제인 구달 캐서린 존슨
리제 마이트너 마거릿 미드 마리아 미첼 마리 퀴리 마리암 미르자하니
레이첼 카슨 로잘린드 프랭클린 사카자위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예술가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코코 샤넬 도로시아 랭 프리다 칼로 카라 워커
메리 카사트 쿠사마 야요이 자하 하디드
사회운동가들
앨리스 워커 앤절라 데이비스 앤 로이페 아얀 히르시 알리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레타 툰베리 제인 폰다 주디 시카고 리마 보위
나오미 클라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수잔 팔루디 타우왁쿨 카르만 와리스 디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마거릿 생어 마리아 몬테소리 해리엇 터브먼 캐롤리 슈니먼
로자 파크스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에멀린 팽크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작가들
에밀리 디킨슨 제인 오스틴 사포 버지니아 울프 마거릿 애트우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헬렌 켈러 J. K. 롤링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무라사키 시키부
시몬 드 보부아르 안네 프랑크 토니 모리슨
운동선수들
베이브 디드릭슨 빌리 진 킹 파니 블랑커스쿤 재키 조이너커시 미아 햄
나디아 코마네치 세레나 윌리엄스
퍼포머들
비욘세 엘라 피츠제럴드 캐서린 헵번 마돈나 메릴 스트립
미리엄 마케바 오프라 윈프리 사라 베르나르 움 쿨숨
정치인들
에이미 클로버샤 바바라 조던 캐롤 모즐리 브라운 엘리자베스 워런 프랜시스 퍼킨스
제럴딘 페라로 해티 캐러웨이 힐러리 클린턴 저넷 랭킨 매들린 올브라이트
낸시 펠로시 넬리 테일로 로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셜리 치점 빅토리아 우드훌
참정권주의자들
앨리스 폴 앨리스 스톤 블랙웰 캐리 채프먼 카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 도리아 샤픽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프랜시스 하퍼 프랜시스 윌러드 해리엇 스탠턴 블래치 헤르타 아일톤
후다 샤아라위 아이다 벨 웰스 제인 애덤스 줄리아 워드 하우 케이트 셰퍼드
루크레티아 모트 루시 번스 루시 스톤 메리 처치 테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이 라이트 슈 밀리센트 포셋 소저너 트루스 수전 앤서니 버지니아 루이자 마이너
출처 }}}}}}}}}}}}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제5대 국왕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파일:Queen Elizabeth.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출생 1533년 9월 7일
잉글랜드 왕국 그리니치 플라센티아 궁전[1]
사망 1603년 3월 24일 (향년 69세)
잉글랜드 왕국 서리 리치몬드 궁전[2]
재위기간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여왕
1558년 11월 17일 ~ 1603년 3월 24일
서명 파일:엘리자베스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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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신장 175cm
아버지 헨리 8세
어머니 앤 불린
장례식 1603년 4월 28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종교 성공회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
2.1.1. 성장 배경2.1.2. 잉글랜드의 입장2.1.3. 혼담을 거절하다
2.2. 여왕 즉위 후
2.2.1. 결혼을 거부하다2.2.2. 엘리자베스 빈민법2.2.3. 후계자 문제
3. 여담
3.1. 총신들3.2.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의 관계3.3.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과의 관계3.4. 사자처럼 불 같은 성격3.5. 뛰어난 학식과 재능3.6. 인상과 건강3.7. 기타
4. 평가
4.1. 내정4.2. 국방4.3. 경제4.4. 문화4.5. 종교4.6. 총평
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여왕.

헨리 8세의 적차녀이며 어머니는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이다.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이자 메리 1세의 이복 여동생으로, 1557년 메리 1세가 자식을 남기지 않고 사망함에 따라 엘리자베스가 헨리 8세의 자식 중 마지막 생존자로서 왕위를 물려 받았다. 그녀 또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국왕으로 남게 되었고, 그녀의 사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하며 스튜어트 왕조를 개창했다.

평생 미혼이었기 때문에 처녀 여왕(Virgin Queen)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다. 그녀의 치세를 의미하는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 era)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이 이끈 영국 희곡의 번영기이자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선봉으로 스페인 제국 무적함대를 완전히 격파하는 위용을 떨치던 시대로 기억되고 있다. 그밖에 동인도회사 설립 등 여러 치적을 남겨 훗날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 받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영국 사학계가 이러한 평가에 많은 수정을 가해온 결과 지금은 과거만큼 미화되고 있진 않지만, 근대 초기 잉글랜드의 강국화를 상징하며 남긴 업적도 큰 인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기에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

2.1. 즉위 전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에서 헨리 8세와 그의 제1계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그녀는 생존 자체가 위험했다. 앤 불린은 3주 만에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남아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 뒤 엘리자베스는 궁중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복 언니 메리 공주가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하였으며, 부왕인 헨리 8세마저 그녀를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했기 때문이다.

2.1.1. 성장 배경

어릴 적엔 첫자식이자 무사히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라 총애받았던 언니 메리 1세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로 태어나 사랑받았던 남동생 에드워드 6세처럼 엘리자베스도 한동안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나 믿었던 앤 불린이 아들을 낳지 못한단 사실[3] 헨리 8세는 크게 실망하고, 점점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녀 자신은 아버지에 대해 가족으로서의 애정은 없었지만 군주로서의 롤 모델로는 존경했던 듯하다고.

거기다 생모 앤 불린은 말하자면 불륜, 신분도 (공주 출신인 카탈리나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상간녀'이미지로서 백성들의 지지도 별로 받지 못했다.[4] 결국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앤 불린이 참수형에 처해지는 슬픔을 겪게 되고, 과거 자신의 입지를 위해 이복언니 메리 1세가 공주작위와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사생아로 전락했던 것처럼 자신도 작위와 계승권을 잃고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5]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서도 엘리자베스는 총명하며 공부를 좋아했고, 교양인이었던 헨리 8세의 6번째 왕비이자 의붓 어머니인 캐서린 파 아래에서 열심히 교양을 습득했다. 당시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여아들도 남자 못지 않게 교육시키는 풍토가 있어 엘리자베스 역시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사사해 각종 학문을 배웠다.

1547년에 부왕인 헨리 8세 사망하자 의붓어머니인 캐서린 파와 잠시 함께 살았다. 파는 헨리 8세와 사별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그의 3번째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의 오빠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했기에 엘리자베스는 시모어와도 함께 살게 됐다. 그런데 야심만만한 시모어가 왕위 계승권을 가진 엘리자베스에게 추근대는 일이 생겼다. 이를 곧 눈치 챈 파는 그 즉시 엘리자베스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자칫하면 왕위계승권자로서의 명예를 크게 훼손당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추문이었으나 그때 엘리자베스는 고작 14세의 소녀에 불과했으며, 캐서린 파가 엘리자베스를 진심으로 걱정해 조언해 주었기에 엘리자베스가 시모어와 절연함으로써 이 추문은 한때의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6]

4살 차이가 나는 이복 남동생 에드워드 6세와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이복언니 메리 1세와도 어린 시절에는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앤 불린의 딸임에도 동생에게 애정을 쏟았지만 점차 정치적 입장과 종교의 차이로 인해 사이가 벌어졌다.[7] 메리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모반 혐의로 런던 탑에 감금당하며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인한데다 다행히 증거가 없어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메리 1세는 엘리자베스와 애증어린 줄다리기를 했으나 결국 죽음을 눈 앞에 두자 할 수 없이 헨리 8세의 마지막 남은 후손인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8]

2.1.2. 잉글랜드의 입장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당시 잉글랜드는 여러 모로 불안한 상태였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세운 수장령에 의해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국교회[9]로 독립했으나, 언니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로마 교회로 복귀하여 가톨릭 국가로 되돌아선 바 있었다.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펠리페 2세 가톨릭교회의 맏딸로 불릴 만큼 골수 가톨릭인 에스파냐의 왕이었고, 프랑스 또한 종교적으로 분열되긴 했으나 왕가가 있는 파리 중심은 골수 가톨릭 신앙으로 역시 개신교인 위그노들을 탄압했기에 종교적으로 긴장관계였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공통의 적을 가진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어왔는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는 프랑스왕의 장자 도팽[10]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하여 동군연합이 될 예정이라 잉글랜드를 적대 하고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외가가 프랑스 왕가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골수 가톨릭 기즈 가문[11]으로 이들 역시 가톨릭 신자였기때문에 가톨릭계는 헨리 8세의 이혼을 무효로, 앤 불린은 그의 첩이며 그사이에서 낳은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라고 주장해서 엘리자베스를 인정하지 않고, 메리 스튜어트야말로 진정한 잉글랜드의 여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열강의 틈새에서 정치적 격변에 시달리는 잉글랜드의 지위는 여러 모로 불안정했다. 더군다나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아직도 종교적으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은 메리 여왕이 교황청에 잉글랜드 교회를 조공으로 바친 상황에서 다시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대륙의 개혁 신앙이 뿌리내리길 바랐고 가톨릭 교도들은 종교적으로 별로 열성적이지 않은 엘리자베스를 가톨릭 가문과 결혼시켜 잉글랜드의 가톨릭의 입장을 약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런 탓에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의 신랑감으로 여러 명문가의 사람을 고려하고 있었고, 또한 엘리자베스에겐 많은 구혼이 들어왔다.

2.1.3. 혼담을 거절하다

맨 처음에 들어온 건 펠리페 2세와의 혼담이었다. 먼 훗날 국운을 걸고 전쟁을 벌이게 되는 사이답게 묘한 인연으로 얽혀 있었는데, 펠리페 2세는 영국에서 메리 1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처제인 엘리자베스에게 오히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12] 그래서 메리가 엘리자베스를 제거하려 할 때마다 이를 배후에서 열심히 막아준 것도 펠리페였다. 펠리페 2세는 전략적인 이유로, 그리고 어쩌면 개인적인 호감을 더하여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했지만 여왕은 거절했다. 잉글랜드에서의 그의 평판이 나빴고, 무엇보다 종교적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에 들어온 혼담의 경우 당시 잉글랜드의 상황 때문에 바로 깨지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들어온 대표적인 혼담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막내아들 카를 대공[13],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4],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신교도 귀족 로버트 더들리 경, 신교도 국가인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 등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혼담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이유로 질질 끌다가 흐지부지되었다.

혼담 가운데에선 같은 시대를 살던 루스 차르국의 뇌제 이반 4세도 있었다. 물론 그의 악명을 잘 알던 그녀는 루스 차르국 사신에게 한마디로 거부했다. 사신은 돌아가면 죽는 거 아닌가 걱정했지만 이반 4세는 기분 나쁜 얼굴을 했어도 사신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인지 여왕의 시녀였던 레이디 메리 헤이스팅스에게 청혼을 했다. 잉글랜드와의 교류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지만 레이디 메리는 '미개한 야만인의 나라[15] 먼 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떨었다. 여왕도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으나, 레이디 메리에게는 '러시아의 차리나'[16]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2.2. 여왕 즉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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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때인 1559년 즉위 이듬해의 초상화.

2.2.1. 결혼을 거부하다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1세[17]

실제로 그녀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이 붙여준 별명은 버진 퀸.[18]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야사나 설이 존재한다. 성적으로 흥분하면 강력한 협착증이 찾아와 남성의 성기 박살내버린다든가, 생식기가 기형이라거나 하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것은 주로 가톨릭 국가들의 악의에 찬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녀가 생식이 불가능하다=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소문이 있어 에스파냐 대사가 특별히 조사를 해 보았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녀의 생식 능력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결론만 나왔다.

사실은 결혼하지 않았을 뿐 이미 수십 명의 남자를 침대로 끌여들였다는 등의 악질적인 소문도 존재했다. 대부분은 정적들이 퍼트린 험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증명됐지만, 이후로도 소문은 종종 살아남아서 몇몇 인물이 여왕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남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와 같은 시대 인물인 셰익스피어마저 그녀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할 지경이었다.

본인이 예전에, 메리 1세가 추진하던 자신의 정략결혼에 반대하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위와 같은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19] 일단 헨리 8세가 국교를 성공회로 갈아치운 후에도 왕족들이 정통 기독교 국가의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는 문제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는데, 엘리자베스 1세는 혼인 제의가 들어와도 임하는 척하면서 성사시키지 않는 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결혼한 여왕"이란 예찬 분위기가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인이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사가들 사이에선 크게 부군과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20]와 성장하면서 안 좋은 결혼 관계를 많이 봐 왔기 때문에[21] 결혼을 싫어하게 된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실상 그녀의 결혼은 문제가 많았다. 신교 국가인 북유럽을 포함해서 그녀 자신과 비슷한 신분을 지닌 외국의 왕족은 대부분 가톨릭 교도였기에, 이들 중에서 남편을 택할 경우 잉글랜드 국교회가 흔들릴 것이며 외세의 간섭 또한 심해질 것이었다. 실제로 메리 1세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인기를 잃은 이유 중 하나는 이 때문이었다.[22] 자국의 신하와 결혼하는 것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음이 명백했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명백한 예였다.[23] 그러나 당시의 관념상 여성이, 그것도 한 나라의 여왕이 결혼하지 않고 후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혼은 두고 두고 문젯거리가 되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외세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에서 미혼이라는 그녀의 신분이 가장 큰 자산이었기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24] 혼담 진행 과정을 보면 혼담이 들어올 때마다 대부분 반가워하며,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 진전이 이뤄지면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25] 파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각각 근거가 있는 주장이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말한 적이 없으므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나중에는 성녀처럼 공경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조차 두지 않은 탓에 국내에서는 계속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여왕이 갑자기 사망하기라도 할 경우 왕위를 둘러싼 혼란은 불 보듯 뻔하거니와 최악의 경우 가톨릭 국가가 지지하는 가톨릭교도가 왕위에 오르게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신하들에겐 골칫거리였고 신하들은 그녀에게 제발 결혼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여왕은 언제나 결혼할 듯 하면서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이 40살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신하들도 여왕의 혼담에 대해서 찬성보다 반대 입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노산으로 인한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출산하다 사망하는 여인이 드물지 않은데, 노산이 예상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하들은 결국 여왕 폐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단 한번 약혼까지 한 적이 있는데 상대는 프랑스의 앙리 2세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막내아들인 앙주 공작 프랑수아 왕자였다. 이 때는 여왕의 나이가 이미 46세로 후사를 볼 가능성이 없어 후계가 꼬일 가능성이 없기도 했고, 당시 22세였던 프랑수아가 청혼을 위해 직접 잉글랜드에 찾아오자 아들벌인 이 젊은이를 매우 마음에 들어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여왕은 신하에게 "앙주 공작이 못생겼다고 들었는데[26] 직접 보니 괜찮다"고 말했고 이내 '나의 개구리'라는 애칭까지 붙여주면서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와의 결혼도 불발되었는데, 네덜란드의 국가원수로 초빙되어 갔던 프랑수아가 안트베르펜에서 반대 세력에게 대패하고 쫓겨나자 자신의 평판에 흠이 갈 것을 염려했던 엘리자베스 여왕 측이 파혼한 것이다. 자신이 다스릴 예정이었던 나라와 결혼하게 될 여왕까지 모두 잃은 프랑수아는 1년 뒤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2.2.2. 엘리자베스 빈민법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였던 헨리 8세는 1번째 아내로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있었다. 당시에 헨리 8세는 왕실의 후계 문제로 아들을 원하고 있었지만 카탈리나가 낳은 첫째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망했고 자식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는 여아인 메리 1세 뿐인데 카탈리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였다. 이로 인해 헨리 8세는 자신의 아들을 낳아줄 아내를 물색하다가 카탈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에게 빠져 그녀와의 결혼을 희망했다. 이를 위해 로마 교황에게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수용해 주길 원했지만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캐서린의 조카였던 카를 5세를 두려워해 이를 불허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포기하지 않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강행하고 자신을 지지했던 크랜머를 잉글랜드 교회의 대주교로 임명했다. 크랜머 대주교는 국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캐서린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해 버리고 이에 교황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이유로 헨리 8세를 파문해 버렸다. 결국 이 일로 인해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은 이제부터 바티칸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내용의 수장령을 반포했다. 이후 로마 교황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잉글랜드 내에 있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도서 재정을 통해 로마 교황청과 분리의 길을 걸었다.

수장령으로 문제가 된 것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부각된 문제가 부랑민 등 빈민을 어떻게 구호해야 하는가였다. 당시 인클로저 운동[27] 등으로 부랑민이 많았기 때문에 교회의 구호 활동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권한을 잉글랜드 왕실이 가져갔기 때문에 왕실은 빈민들을 구호해야 할 책임이 생겼고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들어서 엘리자베스 빈민법을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로 일어난 백년 전쟁과 바로 이어진 장미 전쟁 등 오랫동안 전쟁이 이어지면서 잉글랜드는 피폐해져 빈민이 생겼다. 노동 능력의 유무와 의지에 따라 구분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이 법안이 사회 복지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초수급권, 조건부 수급권과 같은 의미의 복지 서비스를 왕조 시대의 17세기에 이미 기초가 되는 법안을 만들어 시행했다는 것.

2.2.3. 후계자 문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후계에 대한 말에 몹시 민감해서, 누군가 그에 대한 진언을 올리기라도 하면 몹시 격노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후계에 대해서 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후계를 정하는 순간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여성이었고 당시의 가치관으로써는 여성은 남성의 부속적인 존재로, 왕위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걱정한 점은 바로 그런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이 남성이라면 그를 옹립하기 위해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서 퇴위하라는 압박을 받을 것이 뻔했다. 설령 후계자 후보가 같은 여성이어도 엘리자베스보다 나이가 젊을테니 언제 그녀의 자리를 노릴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왕위 계승권을 지닌 왕가의 여성들(특히 아들이 있는 경우)은 언제나 엘리자베스의 경계를 받았다. 실제로 그녀가 즉위하기 전 제인 그레이의 예도 있었다.

그러나 여왕도 알고 신하들은 더 잘(?) 알고 있었지만 후계감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밖에 없다는 건 명확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미혼이라 이미 튜더 왕조가 단절이 예정된 상태에서 헨리 8세의 후손들은 남지 않았다. 결국 헨리 7세의 여계 후손 중에서 후계감을 골라야 했고, 가장 최우선 순위는 헨리 7세의 장녀이며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었다. 마거릿 튜더는 앞서 스코틀랜드로 시집가서 제임스 4세와 결혼했고, 제임스 6세는 헨리 7세의 현손자이며 마거릿의 증손자였기에 혈통면에서도 최우선 순위였고, 엘리자베스의 항렬상 손자뻘인 6촌으로 나이도 적절했다.

스코틀랜드 역시 종교개혁으로 장로회파 개신교 국가가 되었기에, 복음주의 성향 신하들과 로마 가톨릭에 치를 떠는 국교회 교도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후계자감이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는 전임 메리 스튜어트 시절 어그로를 끈 것과 달리, 잉글랜드의 대외 정책과 크게 마찰을 빚지도 않았고 제임스 6세마저 칼뱅파 교리에 따라 교육을 받았었다. 1603년 임종이 가까워졌을때 여왕이 자리에 드러눕자 신하들이 ( 다 알면서도 혹시나)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냐 물어봤고 여왕은 이렇게 답했다.
"왕의 자리는 왕의 후손이 물려받아야지 농부의 자식이 물려받을 수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대답하니 신하들은 그게 누구인지 잘 생각나지 않아서 힌트를 달라고 청원했다. 그러자 여왕은 벌컥 화를 내면서
" 스코틀랜드에 사는 친척밖에 더 있겠느냐!"
라고 일갈했다. 실제론 여왕이 임종 전 비몽사몽할 때 재빠른 신하들은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오는 제임스 왕을 환영하러 나가서 온갖 아부를 떨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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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 말년에는 충신이었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28]가 1601년 런던에서 봉기를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처형당하여 고령의 여왕은 심신이 지쳐갔고, 결국 1603년 3월 24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옆자리는 애증의 대상이던 언니 메리 1세가 안장되어 있다. 두 사람의 묘에 가보면, 두 자매의 애증이 드러나면서도 뭔가 초월한 것 같은 비문을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사후에 제임스 1세가 세우도록 한 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Regno consortes et urna, hic obdormimus Elizabetha et Maria sorores, in spe resurrectionis
왕권과 무덤을 함께 공유한, 엘리자베스와 메리 두 자매가 여기 부활의 희망 속에 잠들었노라
여담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곳의 지명을 버지니아라고 부르도록 했다.[29] 그러나 처음 버지니아로 이주시킨 로어노크 식민지의 남자 85명과 여자 17명이 모두 풍토병으로 죽어버려서, 1607년 새로 건설된 제임스타운 식민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아메리카 대륙 개발이 이루어졌다.[30]

3. 여담

3.1. 총신들

엘리자베스 1세는 젊고 유능한 남자들을 총애하여 곁에 두기로 유명했다. 여왕의 총애를 받은 총아들 중 특히 유명한 사람은 여왕의 평생의 친우이자 연인이었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36], 월터 롤리 경[37], 뛰어난 시인이자 자처해서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뛰어들어 잉글랜드 원정군을 지휘하다 전장에서 전사한 필립 시드니 경[38], 유럽 최초로 조직적인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평 받으며 무적함대의 침략을 비롯한 수많은 외교적, 군사적 위기에서 슬기로운 대처를 한 프랜시스 월싱엄, 해적 출신으로 사실상 엘리자베스 1세의 전투력이자 오른팔인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 마찬가지로 해적이자 주요 해군 제공세력이었던 존 호킨스, 여왕의 오촌 숙부로[39] 왕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당대 대프랑스 외교의 중심에 있던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 당대의 명재상이자 잉글랜드의 위대한 정치가였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40],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던 마운트조이 남작 찰스 블라운트 경, 로버트 더들리의 양자이자[41] 여왕이 말년에 특히 총애했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42] 등 많은 청년들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또한 여왕은 프랑스의 앙주와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43]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44]

이렇게 기나긴 여왕의 남자(...)들의 목록을 늘어 놓으니 은근히 막장 삘이 나기도 하다. 그러나 야사나 아침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부분은 접어두고 이렇게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주위에 두고도, 그 권력의 핵심을 항상 쥐고 있었다는게 엘리자베스식 리더십의 성공적인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시대 잉글랜드의 정책 결정 과정은 주로 국무재상이자 왕실 내각의 수장이었던 벌리 남작이 큰 외교적 틀을 세우고, 프랜시스 월싱엄 경 휘하의 마드리드에서 모스크바까지 전 유럽에 포진해 있던 정보와 외교 네트워크가 실무를 집행하면, 사적으로 여왕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레스터 백작이 애교스런 연인의 속삭임(...)으로 여왕을 설득하고 이러한 중신들이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확실하게 무게를 실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스템이 그렇게 안정적인 것도 아니다. 이렇게 대신들이 알아서 일 처리를 하고 군왕은 결정적인 대목에서만 개입하는 시스템은 권력의 핵심이 흩어지고, 대신들 몇몇 중심으로 왕실 내 계파가 형성되는 역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이런 시스템의 취약함이 드러난 경우가 파리에 주재한 잉글랜드 대사 에드워드 스테포드가 스페인 정부에게 뇌물을 먹고, 벌리 남작과 프랜시스 월싱엄 사이의 미묘하게 껄끄러운 관계를 이용해 스페인을 위한 이중 첩자질을 한 경우가 있었다.[45]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와 봉건적 귀족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하루도 왕권이 안정적인 날이 없었던 16~17세기 유럽 왕실에서 이렇게 걸출한 신하들을 밑에 두고 이러한 인재들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신뢰를 주면서도, 또 그 잘난 대신들이 왕권을 날로 먹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런 저런 가십거리와 막연한 낭만주의적 역사관 속에 어느 정도 묻힌 감이 있는 군왕이자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 1세의 역사적 위대함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46]

3.2.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의 관계

야사에 의하면 애인들은 몇 명 있었고, 사학자들도 엘리자베스에게 애인이 아예 없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분위기. 과연 엘리자베스 1세의 애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차고 넘치는데, 대표적인 애인 후보로 어렸을 때부터 친했고 나중엔 그녀의 심복이 된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1532~1588)경이 있다.

야사가 아닌 정사에도 그녀와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었음이 드러나 있다. 아직 공주였을 때 형부인 펠리페 2세가 '엘리자베스는 로버트(더들리)와 결혼하지 않으면 처녀로 늙어죽지 싶어.'라고 말했을 정도. 또 엘리자베스의 어릴 적 친구이기도 했던 더들리 경은 그녀가 어릴 때 이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곧잘 말했다 한다. 엘리자베스는 어디를 가든 더들리 경의 거처가 자신의 거처와 바로 옆에 붙어 있도록 했다. 20년 넘도록 외국에 나가기는 커녕 곁에서 잠시 떨어지지도 못하게 눈치를 주었으며, 심지어 더들리의 첫째 부인이던 에이미 롭사르트(1532~1560)를 청부살인했다는 의혹에 휘말리기도 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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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 롭사르트(Amy Robsart)의 상상화 에이미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
에이미 롭사르트는 지방 귀족이던 존 롭사르트 준남작의 딸인데 아버지부터 이복동생인 아서 롭사르트, 사촌 오빠인 스펜서 롭사르트에게 보낸 편지를 봐도 남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서 "독살을 염려하여 음식을 늘 개에게 먼저 먹이고 나서 먹는다. 남편은 날 언제 죽일지 모른다. 불안해서 잠도 못 잔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존 롭사르트와 스펜서 롭사르트는 기겁하여 손수 부하들과 함께 에이미의 곁을 지키면서 감시했는데, 결국 에이미는 1560년 9월 8일 일요일 오전에 계단에서 넘어져서 목뼈가 부려져 죽고 말았다. 일요일이라서 곁을 지키던 가족들과 호위병들이 예배를 드리고자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갑자기 죽고 만 것이었다.

당연히 아버지 존 롭사르트 준남작, 이복동생 아서, 사촌 오빠 스펜서는 에이미가 결국 살해당했다고 절규하며 평생동안 로버트 더들리를 증오했다. 무엇보다 딱 2개뿐인 계단에서 넘어져 목뼈가 부러졌다는 게 이상하고, 그녀는 늘 조심성 있게 다녔으며 죽음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이렇게 어이없게 사고사했다는 걸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1561년 8월 1일에 사건 현장을 조사한 검시관들은 사고사라고 결론을 내렸으나 사람들은 더 믿지 않았다. 사건이 터진 지 11달이나 지나서야 조사해 봐야 뭔 짓이냐는 반발도 있었다.

실상 에이미 롭사르트의 사인이 조사 결과대로 사고사였는지 아니면 정말 타살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후대의 학자들이 에이미의 관을 파내 열어 보았으나 이미 안에는 먼지만 가득했다고 한다. 어떤 의미로는 에이미가 죽을 경우 가장 의심받을 사람은 더들리였으니, 그가 대놓고 아내를 죽인 용의자로 눈총 받을 만한 바보짓을 할 리가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어찌됐건 당시의 조사로는 더들리가 무고하다고 증명되긴 했으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에이미의 죽음으로 더들리는 두고두고 뒷손가락질을 받았고 정적들은 틈만 나면 이 사건을 들어 그를 공격했다. 하필이면 일요일이어서 예배를 보느라 아버지를 비롯한 친정 식구들과 부하들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이전부터 남편에게 살해당할 걸 두려워하던 에이미가 시녀들도 없이 무턱대고 밖으로 홀로 나갔다는 말을 더 믿지 못했다.

결국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엘리자베스는 더들리를 좋아했지만 남편으로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청혼을 받아줄 듯 말 듯 어장 관리를 하면서 결코 결혼만큼은 하지 않았다. 혹은 엘리자베스가 국왕의 신분이다 보니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자신보다 신분 낮은 남편을 맞아봤자 이로울 것이 없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사실 더들리 경을 견제하는 대부분의 다른 귀족들이 거품을 물고 반대했다. 이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일단 더들리는 반역자인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48]의 아들이었고, 더군다나 더들리 자신도 오만한 인물이였던지라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고 인기도 없었다. 이로 인해 모두들 엘리자베스가 더들리 경과 결혼하는 것은 제 발로 왕관을 내버리는 짓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1세를 지지한 충신들이나 친척들도 더들리만큼은 질색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는 사람들조차, 워낙에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 더들리를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여왕에게 절대 좋을 게 없다고 대놓고 간언할 정도였다.

게다가 전 유럽에 로버트 더들리와 엘리자베스 1세가 서로 짜고 에이미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는 점도 두 사람이 결혼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스페인, 프랑스, 러시아에 주재하던 잉글랜드 대사들이 "여기 사람들이 대놓고 '당신네 여왕이 신하와 결혼하려고 신하의 죄 없는 아내를 사고로 위장해 죽였다면서요?', '여왕이 참으로 사랑에 미치셨나 봅니다? 유부남을 사랑하여 죄없는 유부녀를 죽이니 말이죠?'란 말을 대놓고 해서 마음이 편치않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며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더들리와 결혼한다면 그야말로 온 유럽에서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빈정거리며 손가락질 할 게 뻔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다가 거부당한 일로 이를 갈던 러시아 이반 4세는 이 소문을 듣고 "자기 신하와 결혼하고 싶어서 짐을 거부했구나." 라고 입만 열면 그녀를 헐뜯고 빈정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와 더들리가 정말로 결혼한다면 잉글랜드의 국가적 위상이나 외교적 입지에도 큰 타격이 될 판국이었다. 여왕을 지지하는 충신들도 우리 영국의 위신을 그야말로 바닥까지 추락시킨다며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더불어 에이미의 아버지 존 롭사르트 준남작은 지방의 작은 귀족이었지만 딸의 죽음을 결코 그냥 넘기지 않고 런던에까지 와서 딸이 살해당했다고 상소문을 왕실에 올리며 하소연했다. 이렇다 보니 엘리자베스 1세의 반대파인 고위 귀족들이 롭사르트 준남작을 돕는다는 소문까지 자자했다. 아무리 여왕이라고 해도 고위 귀족들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법이고, 그렇다고 준남작을 처형하거나 추방한다면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인상을 주어 역효과가 날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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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더들리의 후처 레티스 놀리스(Lettice Knollys)
어쨌든 더들리는 에이마가 죽은 뒤에도 18년 동안 재혼하지 않고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하기를 기다렸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엘리자베스의 외가쪽 친척인 레티스 놀리스[49]와 재혼했다. 이 결혼 후 엘리자베스 1세는 곧바로 분노하여 레티스를 궁중에서 쫓아냈고 더들리도 평생 증오했다. 물론 한참 후엔 다시 더들리를 용서하고 그토록 원했던 네덜란드 파견군 사령관에도 임명했다. 더들리 경은 인품이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나 평생 여왕에게 헌신하며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고, 나중에 더들리 경이 급사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다고 한다.[50]

3.3.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과의 관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여왕은 엘리자베스의 오촌 조카로[51],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메리가 잉글랜드로 망명했을 당시 그녀는 보스웰 백작과 간통하고 남편 단리 경을 살해한 혐의로 폐위당한 상태였고, 스코틀랜드의 왕위에는 메리와 단리 경의 아들 제임스 왕자가 즉위한 상황이였다.[52] 그 이전에 메리는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2세와 혼인해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로도 제위하고 있었지만, 프랑수아 2세가 메리와의 사이에서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두번째 남편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에 원래 메리의 친절한 언니를 자처하던 엘리자베스가 메리의 남편으로 다루기 쉬운 남자였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를 권한 바 있었다. 그러면서 더들리와 결혼해 낳은 후사에게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준다는 조건도 함께 제시했다.[53] 하지만 더들리가 공공연히 엘리자베스의 연인으로 알려진데다가 반역자의 후손이고 왕가와 혈연으로 이어지지도 않은 평범한 귀족에 불과했기에, 메리는 물론 그녀의 신하들인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까지도 엘리자베스의 저 제안을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저 제안은 성사되지 못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도 진지하게 권유한건 아니라고 하지만...

이후 메리 여왕이 풍채가 좋다는 이유로[54] 고른 두번째 남편은 당시 잉글랜드 궁정에 있었던 헨리 스튜어트(일명 '단리 경')이었다. 하지만 단리 경 또한 혈통상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55] 이 결혼으로 엘리자베스의 메리에 대한 감정이 더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단리 경이 결혼 직후부터 술주정으로 아내를 학대했기 때문에 사이가 단단히 틀어져, 메리로서는 엘리자베스를 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사생활 측면에서도 최악의 패를 뽑고 만 셈.

보스웰 백작과의 간통과 단리 경의 살해 혐의로 폐위당하고 감금되어 있던 메리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여 잉글랜드로 망명했으나 위에도 언급된 그녀가 가진 잠재적인 위협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일단 그녀의 망명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유폐시킨 후 감시자를 붙였다.[56]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의 사이는 매우 미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안부를 주고받을 때마다 외교관에게 '나와 그녀를 비교하면 누가 더 매력적인가' 묻기도 했으며, 평생 열등감과 우월감이 교차되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메리는 태어나자마자 여왕이었고, 한 때는 프랑스의 왕비였으며 왕족으로서 평생 대접받았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어머니 앤 불린이 생전에 평판이 좋지 못했고, 어머니의 사후 사생아로 격하당하여 어린 시절을 상당히 불우하게 보냈다. 그러나 후에는 상황이 뒤바뀌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나라에서 지지받는 국왕이었지만 메리는 평판이 나빴고 이 당시엔 아예 자기가 다스리던 나라에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적으로는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가 가지지 못했던 외모와 교양, 귀족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친구도 많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히스테릭하여 친구를 쉽게 만들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학문을 가까이 하고[57] 각종 국내외 현안들에 통달한 반면 메리는 어려운 학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데다[58] 어린 시절 내내 프랑스에서 살다 보니 스코트어 스코틀랜드 게일어는 당연히 못했고 영어도 성인이 되어서야 배우기 시작했다.[59] 엘리자베스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때로 국사를 위해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절제하기도 했으나 메리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자신의 의견이 신하에게 반대 당하면 한나절을 사실(私室)에 틀어박혀 지칠 때까지 울거나 드러눕곤 했다.

헨리 8세 앤 불린의 사후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를 사생아로 격하시키고 왕위 계승권을 박탈해 버렸다. 후에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와 메리의 왕위 계승권을 복권시켰으나, 적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왕위 계승권은 인정이 되었기 때문에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지만 가톨릭쪽으로부터 가톨릭 교도인 메리 여왕에게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있다는 주장으로 인해 재위기간 내내 왕위를 위협받았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스튜어트와의 약혼이 깨진 뒤 분통을 터뜨린 헨리 8세가 누이 마거릿의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해버렸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당시 엘리자베스 1세를 제외하면 가장 신분이 높은 왕위 계승권자는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였다.

어찌되었건 메리가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잉글랜드에 머물게 되기까지, 그녀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내내 스코틀랜드와의 사이는 불편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마냥 불편한 사이만은 아니었는데,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일생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였고, 엘리자베스가 메리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같은 여성 군주로서의 공감 의식과 따뜻한 언사가 드러난다. 그들은 한때 회동을 가지기로 한 적도 있었으나 무산되고 말았고, 결국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60]

결국 메리는 스코틀랜드 본토에서 벌리, 월싱엄 등 잉글랜드 내 강경 개신교 세력의 사주를 받은 반프랑스 칼뱅파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잉글랜드로 망명을 오게 된다. 그런데 이전까지 메리를 견제하던 엘리자베스 1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며 잉글랜드로 망명하러 오자 나름 혈족이자 같은 군왕으로서의 유대감을 느꼈는지, 메리를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밀어붙히는 벌리와 월싱엄의 주장을 물리치고 계속 거절하며 무려 18년의 세월을 유폐된 것 치고 나름 안락한 생활을 메리에게 보장해 주었다.[61] 벌리 경이나 월싱엄이나 이 시기를 전후로 초상화에서 늙은 점이 확 드러나며, 특히 벌리는 이 대목에서 "여왕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미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치적인 면에서 해석하자면 엘리자베스 1세 또한 막강한 신하들을 거느린 군왕의 입장에 서있었던 만큼, 아무리 위협이 된다 한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군왕을 폐위하고 죽이려고 한다'라는 발상 자체를 굉장히 불쾌하게 여겼다는 해석이 있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 사후 그녀만큼의 통솔력을 가지지 못한 스튜어트 가의 왕들이 제위하게 되고, 의회와의 반목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잉글랜드 내전 찰스 1세의 사형이 일어나면서 엘리자베스의 예감은 제대로 들어 맞았다.

결국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란을 도모한 혐의로 사형당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가 훗날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왕위를 잇게 되었다.

3.4. 사자처럼 불 같은 성격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부친 헨리 8세를 닮았는지 무척이나 불 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보수적 시대상이 원하지 않던 강인한 성격으로, 그녀가 격노하면 신하들이 벌벌 떨 정도였다. 심지어는 회의 중에 격노한 나머지 옥좌를 박차고 나가거나 국무대신의 을 치거나 슬리퍼를 집어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오랫동안 꽁해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잘못한 후에는 빠르게 고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이런 점은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 중에 두고두고 발목을 잡던 친척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의 중요한 차이다. 메리 여왕은 국무회의 중에 중신들에게 반박을 당하기만 해도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서, 자기 방에서 틀어박혀 내내 울어댈 정도로 유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모습이 평상시의 분별없는 행동과 더불어 그녀의 앞길에 내내 방해가 되었으며, 끝내 스코틀랜드 왕위도 잃고 잉글랜드에서 자기 친척인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결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반면 엘리자베스의 신하이자 친구였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는 "다른 군주들의 폭풍과도 같은 분노에 비하면 폐하는 일시적 돌풍에 지나지 않으니 감사할 따름"이라는 편지를 쓴 적도 있었다. 아마 화가 나면 그 자리에서 풀어 버리고 끝내는 성격이었나 보다. 한마디로 불 같지만 뒤끝은 없는 타입. 게다가 체격도 컸으니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그녀의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여왕의 키가 170cm가 넘었다고 전하는데, 당시 남성들의 평균 키도 170cm가 안 되던 시절이다.[62]

말년에도 그 성정은 여전해, 에식스 백작의 반란 사건 때 연루되어 변명을 하러 온 해링턴 경에게 무시무시한 분노를 퍼부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과연 헨리 8세의 딸"이라는 말이 나왔다.

자신이 여자라는 점 때문에 신하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싶으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내가 남자였다면 그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소리질렀다. 자신이 암사자는 아니라도 사자의 새끼인 것은 확실하다고 했으며,[63] 스페인과의 전쟁 당시 포고문에서는 "나의 몸은 여인의 것이나 나의 심장은 잉글랜드 국왕의 것이다."라고 언명하기도 했다.

여왕이 즉위했을 때 여성에 대한 편견[64]에 가득 찬 신하들은 처음에는 여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으나 곧 그녀의 남다른 판단력과 정치력에 감복하여 여왕을 칭송하였다.

육체적으로도 강인해서 승마 사냥을 즐겼으며 매일 강도 높은 운동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궁전의 회랑이나 정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 특히 갤리어드(춤곡의 일종)를 즐겨 추었고 사망하던 해에 이르기까지 코란토 춤을 시연해 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신경질적인 면도 많았고 무척 까다로운 성품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신중함이 너무나 지나쳐서, 중대한 일은 일단 무조건 결정을 미루었다. 결혼에 대한 문제도 워낙 이런 식으로 결단을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 성사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더러 있다. 엘리자베스의 신하이자 유능한 정치가였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65]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잠재적 반역자였던 메리 여왕의 처형을 주장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매번 그 결정을 미루기만 하자 진저리를 치며 "여왕 폐하의 우유부단함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고 말하기도 했다.[66]

3.5. 뛰어난 학식과 재능

어려서부터 학업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공부벌레로도 유명했다. 하루에 3시간씩 독서를 즐겼으며,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역사가인 타키투스 플루타르코스의 고전을 번역하는 것을 소일로 삼았다. 특히 그녀는 라틴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한 면모를 보이는 등[67] 언어 쪽의 재능이 출중했다고 전한다.

특히, 로마와 그리스어를 능통하게 말하며 쓰고 원전을 읽고 번역까지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장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 제국 상류층들조차도, 그리스어를 배우기 힘들어서 따로 그리스인 출신 가정교사까지 고용해가면서 빡세게 공부했고, 일반적으로 쓰던 라틴어도 후대 사람들이 읽고 쓰기를 익히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현대처럼 무슨 파파고가 있던 시절도 아닌 그 당시에 문헌과 자기 자신의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번역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단순히 언어뿐 아니라 그 언어가 사용된 문헌에 대한 배경과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않고서는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지식인들 뺨치는 수준의 교양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외교관의 딸로 태어났던 생모 앤 불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귀족 여성들도 남성 못지 않게 열심히 교육시키는 풍조 덕분에 그녀 역시 어렸을 적부터 방대한 지식을 쌓아나갔으며, 여왕이 되어서도 각종 국내외 현안에 통달하여 즉위 초기 그녀를 여성이라 얕잡아보고 있던 고문관들을 감탄시키기까지 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궁정 방마다 책을 가득 채워 놓아 혹자는 '잉글랜드 궁정에 처음 들어가 본 사람은 왕궁이 아니라 대학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여왕의 시녀들도 식견이 넓어야 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전을 번역하거나 성서를 읽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는 여왕을 위해 난해한 학술서를 큰 소리로 낭독하는 것이었다.

재위 말년의 일이다. 폴란드 대사가 방문하여 엘리자베스의 어전에서 무례하게도 의전을 무시하고 라틴어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68] 감히 여왕에게 있을 수 없는 위협적인 표정과 태도에 모두가 기가 막혀했으나 여왕은 즉시 옥좌를 박차고 일어나 유창한 라틴어로 대사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여왕이 "맙소사, 경들. 오늘 하도 안 쓴 지 오래되어 녹슬어 있던 라틴어를 본의 아니게 연습해 보았소!"고 외치자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3.6. 인상과 건강

참고로 현재 남은 초상화를 보면 어머니보다는 아버지 쪽을 더 많이 닮았으며 아름답다기보다는 잘생긴 여장부이었다 전해진다. 아버지에게서 붉은 빛이 도는 금발과 매부리코를, 어머니에게서 검은 눈과 가무잡잡한 피부를 물려받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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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전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후에 천연두를 앓았기에 얼굴에 다소 흉터가 생겼지만 흉한 정도는 아니었고, 어머니 앤 불린을 닮아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아름다운 손이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존 헤이워드 경에 따르면 '호리호리하고 자세가 곧았다. 머리카락은 연한 금발에 가까웠고, 이마가 넓고 매끈했으며, 눈은 근시였으나 생기가 넘치며 상냥했고, 코는 약간 매부리코였다. 얼굴형은 좀 길었으나 감탄할 만한 미모를 자랑했고, 위엄이 조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키가 175cm로 당시에는 물론 현재 기준으로도 여성치곤 키가 상당히 컸다. 그 시대에는 군주의 키가 곧 군주의 위엄이라고 인식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큰 키를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다. 여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역시 미모와 장신으로 유명했던 메리 여왕과 관련된 일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자신과 메리 스튜어트 중에 누가 더 아름다운지를 물었다. 메리가 훨씬 더 미인이라는 세간의 평이었지만, 주관적인 질문인데다가 굳이 엘리자베스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사신은 "엘리자베스 여왕님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우시고, 메리 여왕님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우십니다."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이번에는 키가 큰가를 물었다. 이번엔 객관적인 질문을 받고서는 사신이 정직하게 "우리 여왕께서 더 크십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는 놀라워하며 " 그럼 너무 크군. 내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말일세."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메리 스튜어트의 키가 엄청 컸던 건 사실로, 무려 180cm가 넘었다. 성인 남자의 평균키도 160cm 중반 밖에 안 되었던 16세기의 여자인데도!

승마와 사냥 등 운동을 즐기는가 하면, 당시 귀족 사회에 유행하던 과식 풍조와는 달리 식사시간을 따로 정해두지 않고 배고플 때마다 허기를 잊을 정도로만 조금씩 먹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달콤한 것을 많이 먹으면 입냄새 또한 달콤해질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음식을 매우 좋아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내내 치통으로 고생을 했다. 1578년에는 끔찍한 치통에 시달렸음에도 ' 외과적 수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버텼다.[69] 이때 런던 주교인 에일러가 용감히 나서서 그렇게 끔찍한 치료가 아니라며, 여왕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충치 하나를 먼저 뽑겠다고 제안했다. 1578년 12월 그가 치료받는 모습을 본 여왕은 9개월 간의 고통 끝에 드디어 자신의 치아를 뽑아도 좋다고 윤허했다. 그 이후 치아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의 앞에서는 금기가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가 충치를 남김없이 뽑은 다음 죽만 먹고 산다는 소문이 들리자, 여왕은 절대로 더는 이를 뽑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 때문에 평생 치통과 잇몸병에 시달렸으며 그로 인해 얼굴과 목에 신경통이 생겼다. 당시 자료를 보면 뺨이 부풀었다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종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훗날 한 외국 사절은 말년의 그녀를 보고 "치아가 매우 누렇고 고르지 못하며 대부분 빠져 있었다."고 했지만,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아 전부를 잃지는 않았다. 다만 합죽이가 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천을 두껍게 접어서 입술 밑에 끼우고 다녔다고.

달걀 흰자, 달걀껍질 가루, 명반, 붕사, 양귀비 씨 등을 섞어 만든 로션을 발라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마조람[70] 또는 장미수를 향수로 썼다. 머리카락은 나뭇재와 물을 섞은 잿물로 감았다고 한다. 또한 피부의 탄력과 미백을 위해 수은을 발랐다고 한다. 안색이 창백했던 건 위의 로션보다는 수은 탓이었을 것이다. 수은이 혈액의 공급을 일시적으로 방해하여 피부를 창백하고 탄력있게 만들어주기 때문. 이 때문에 부작용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3.7. 기타

4. 평가

4.1. 내정

여왕은 아버지인 선왕 헨리 8세 이후로 빈곤했던 나라의 재정을 꾸려가기 위해 왕궁 살림을 최소 한도로 줄이고 검약을 실천했으며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로 동인도 주식회사를 통한 식민지 확장으로 재정이 늘었음에도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덕분에 당시 빈곤하던 왕실과 잉글랜드의 재정을 많이 살릴 수 있었고 빚도 상당히 줄였으며 이렇게 건실해진 왕실은 귀족들에게 손을 벌릴 이유가 없었기에 귀족들은 왕실에 압박을 넣을 명분이 없었고 그 영향력도 줄어들면서 왕권이 강화되었다. 물론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왕실 관리들의 임금은 한 푼도 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검약은 왕실 재산을 최대한 매각하고, 영지나 궁전을 귀족들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그녀는 보석 컬렉션과 드레스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서 살아있던 당시 이미 수천 벌의 가운을 소유했으며 방대한 보석 컬렉션은 교황마저도 탐을 냈을 정도라고 한다.[71][72] 특히 진주를 많이 수집했는데 당시 진주는 아주 귀한 보석이라서 어지간한 왕족이나 귀족도 갖기 힘든 것이었으나 엘리자베스 1세는 그걸 대량으로 수집했다. 초상화에도 진주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아무래도 화려함을 과시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치품들을 수집했다는 해석도 있다.

귀족들이 원하던 왕과 국회의 관계 개혁이나, 당대 내정에서 가장 민감한 세금 문제에 대해서 비판을 많이 받는데, 내정에 관해서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던 왕"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신하들이 왕명을 받기 전에는 물러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더 이상 말하기 싫다고 자리를 떠나버리기도 했다.[73]

모든 문제의 결정을 임시적으로 신하들한테 미루고 문제가 생기면 그들에게 죄를 물어 숙청하는 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이는 무난하게 국정을 운영했던 왕 치고는 죽기 전까지 끊임 없이 반란에 시달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이 세금 문제는 후계자인 제임스 1세가 뒤집어 써야 했고[74] 그의 아들인 찰스 1세가 신하들에 의해 목이 잘리기에 이르는 원인이 된다.

당시 정치의 풍조상 궁정 내에는 여러 파벌이 있었으나, 위에서 말했다시피 엘리자베스는 때로 변덕을 부리거나 은전을 내림으로써 이러한 파벌들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견제했다. 하지만 통치 말년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애를 먹었다.

4.2. 국방

엘리자베스는 당시 초강대국 스페인의 군주 펠리페와 연을 맺은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만큼 스페인과의 외교는 매우 안좋을 수 밖에 없었고 영국이 대외로 나오려면 스페인과의 전쟁은 필수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당시 약소국이였기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네덜란드의 독립활동을 비밀리에 지원하면서 해군의 신무기이자 스페인 해군이 운용하는 함포보다 사정거리가 더 긴 캘버린포를 설계 및 양산하였고 잉글랜드는 어차피 상륙을 허가한다면 그냥 게임 끝이라고 생각, 도버 해협을 지킬수 있던 해군이 가장 중요하다며 육군보다 군함을 적극적으로 건조하고 전쟁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약소국이던 잉글랜드가 별다른 대외 전쟁을 벌일수 없었고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금은보화가 탐나던 상황에서 이 스페인으로 가는 금은보화라도 얻기 위해 사략사업[75] 즉, 해적업을 장려하며 스페인이 마야나 아즈텍 등 중남미에서 약탈한 수많은 황금과 재화를 적재한 스페인 함선을 공격하며 이득을 보았다.

스페인은 계속 당하니까 영국 사략함대의 대표 인물이자 해적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참수하라고 요구했으나 잉글랜드는 이를 거절, 당연히 스페인이 아득바득 이를 갈던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가톨릭교 신도이자 친척인 메리 스튜어트를 참수하는 일이 발생, 이에 스페인은 가톨릭 교도 보호를 전쟁 명분으로 삼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전쟁이 터지자 가장 전투경험이 많은 드레이크를 해군 총 지휘관으로 임명하였고 잉글랜드 해군 - 네덜란드 독립파 해군이 연합한 해군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맞서 칼레해전을 통해 대승을 거둔다. 그렇게 참패를 겪은 스페인은 불구가 되어 재건하는 1년동안은 영국은 대외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다시 함대를 재건중이라는 첩보를 듣고 승리한 지 단 1년 만에 드레이크와 노리스 장군을 다시 스페인으로 보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으나 일격은 실패하고 되려 이 패전을 통해 스페인 해군이 다시 부활한다.

사실상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지만 스페인을 상대하기 위해 차근차근히 육성한 해군들은 추후 식민지를 늘리는데 유용하게 쓰였고 엘리자베스 1세의 재임 기간에는 잉글랜드가 세계를 주름잡는 원동력이 되었다.

4.3. 경제

엘리자베스 1세는 왕권은 돈에 나온다는 인식때문에 돈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던 군주였기에 그녀의 전성기 때는 국고 수입을 늘리기 위해 백성들의 돈주머니를 풍족하게 하기 위한 정책을 많이 시행하였다.

이를 위해 유능한 인재가 필요했기에 추밀원을 통해 유능한 정치가를 등용했고 정치는 성실청, 종교는 특설고등법원을 창설해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뒤 본격적으로 경제진흥 정책을 차질없이 진행하였는데 첫 단추가 양모를 이용한 모직물 산업 장려였다. 이덕에 농민들은 농작지를 조금 줄여서라도 양을 키우는 목축지를 병행하면서 모직물을 만들면서 수입이 급속히 늘었고 그 덕에 농민들의 생활수준도 매우 높아졌는데 장점만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단점으로는 돈을 더 벌기 위해 목축지를 급격히 확대하다 보니 일부 농민들은 땅을 빼앗겨 떠돌이 신세가 되어 빈민층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치안이 안 좋아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을 일을 시켜 다시 돈을 벌 수 있는 구빈법을 제정하며 일자리를 줌으로써 해결하였다.

이후에는 해상교역도 스페인과의 전쟁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를 만들어 식민지 확장과 교역에 집중하면서 국가 수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요인이 되었다. 이때문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전성기 시절에는 민중으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th)로 불릴 정도로 경제를 잘 살려냈으나 문제는 말년서부터 터지기 시작한다. 엘리자베스1세가 죽기 7년전에는 흉년과 네덜란드의 대두로 무역 쇠퇴로 이어지면서 물가 폭등과 실업자 대량으로 터지기도 하였다.

4.4. 문화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 국민들은 잉글랜드라는 결속과 일체감이 생겨났음을 인지하자 마침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문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 결과 영국에서도 최고의 문학인으로 손 꼽히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철학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등장하는 성과를 얻게 되었고 민중들도 집안에 기본적으로 악기가 있을 정도로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었다. 이 영향 덕분에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간 이들이 여왕이 처녀라는 사실과 여왕을 기리기 위해 버지니아 라는 이름을 따서 붙일 정도로 사랑받는 군주였다.

4.5.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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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메리 1세에 관한 평가와 결코 분리하여 볼 수 없기에, 메리 1세 항목도 같이 참조하는 것을 추천한다.
엘리자베스는 프로테스탄트로서,[76] 종교 정책이 언니인 메리와는 방향이 정반대일 뿐 강경함에서는 거의 언니를 빼다박았다.[77]
Elizabeth I, the 25-year-old daughter of Henry VIII and Anne Boleyn, ascended her throne on 17 November 1558. At first her emphasis was on a religious settlement. Her personal credo remains elusive, but she may originally have aimed to revive her father’s religious legislation, to re-establish her own royal supremacy and the break with Rome, and to permit communion in both kinds (bread and wine) after the reformed fashion, but nothing else. ... And yet, while the Settlement meant that England became officially Protestant, a huge missionary effort to win the hearts and minds of parishioners (especially those in remoter counties and borderlands) lay ahead. Outside London and the towns, the South-East, and East Anglia, Catholicism still predominated: the bishops and most parochial incumbents were Marians, and committed Protestants were a minority. Whereas Elizabeth and Cecil inherited all the negative and destructive elements of Henrician antipapalism and Edwardian Protestantism, they had inadequate resources to build the reformed Church, though it is false to see their task purely in confessional terms.
헨리 8세 앤 불린의 딸인 25세의 엘리자베스 1세가 1558년 11월 17일에 즉위했다. 먼저 그녀가 강조한 것은 종교적 결정이었다. 그녀의 개인적 신앙고백은 애매모호하지만, 그녀는 부친의 종교 법령들을 목표한 것으로 보인다. 곧 지상권을 재확립하고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개신교에 따라서 양형성찬(빵과 포도주)을 하되 그 외의 것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 그러나 종교적인 결정으로 잉글랜드가 공식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교사들은 교구민들(특히 먼 지역과 국경의 교구민들)의 마음과 생각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런던, 사우스이스트, 이스트앙글리아 바깥에서는 가톨릭이 여전히 다수였다: 주교들과 대부분의 교구 사제들은 메리 시대의 사람이었고, 헌신적인 프로테스탄트는 소수였다. 반면 엘리자베스와 세슬은 헨리의 반교황주의와 에드워드의 개신교에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요소들을 상속 받았다. 비록 순전히 교파적인 용어들로 보는 것은 잘못이겠으나, 엘리자베스와 세슬은 개혁된 교회를 건설할 자원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했다.
Kenneth O. Morgan 편집, 《The Oxford History of Britain》,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ebook]
물론 '이론상으론' 종교적 적대자들을 '반역죄'로 처형하였기에 '종교 때문에 죽은 사람의 공식적인 숫자'는 메리보다 확연히 적다. 메리 시대 5년 간 개신교도 284명 처형, 34명 옥사인데 비하여 엘리자베스 시대는 재위 기간이 45년임에도 9명 처형, 9명이 옥사한 것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피터 마셜(Peter Marshall)이 그의 저서 「종교개혁」에서 지적하듯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도덕적 우위를 호소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들을 '이단 혐의'가 아니라 '반역 혐의'로 처형하였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몇 명이 이단 혐의로 죽었는지를 가지고 군주의 광신성을 논하는 것은 어렵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다만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신교도들의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단'보다는 '반역죄'를 공식적인 처형 이유로 들곤 했다.
피터 마셜(Peter Marshall), 「종교개혁」, 이재만 옮김, 교유서가, 2017, [ebook][78]
'공식적인' 희생자 숫자의 논리를 그대로 쓴다면, Ronald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공식적으로'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오히러 Hutton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처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대다수는 단지 가톨릭 신앙을 지속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음을 지적한다.[79]

오히려 엘리자베스는 반란과 엮여 있는 건수를 제외하고, 순수 가톨릭 신심 행위만으로 200명을 처형했다. 여기에 다른 비성공회 개신교에 대한 박해까지 추가하면 더 늘어난다.
The regimes of Henry VIII, Edward VI, Elizabeth and James I all put Protestants to death as well, for beliefs that were more radical than those permitted by the established Church of the time. In addition, Elizabeth executed almost 200 Catholics, in theory for treason but actually just for attempting to practise their religion. The executions that followed the rebellion of the northern earls add another couple of hundred to that figure.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모두 개신교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당대 국교회가 허용하던 것보다 더 급진적인 믿음을 이유로.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2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이론상으론 반역죄이지만 실제로는 단지 가톨릭 신심 행위를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별개로 북부 백작들의 반란에 이어 일어난 처형 건수 수백명이 있다.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2010, [ebook]
오히려 엘리자베스는 초기 치세에 언니인 메리보다 종교 정책에서의 더욱 낮은 지지를 잉글랜드인들로부터 받았다..[80]
The total import of the evidence of both rebellion and will-making is that Mary's Catholicism attracted more spontaneous support from the English than Edwardian Protestantism or that of the early reign of Elizabeth.
전체적인 반란과 유언서들의 증거들을 종합해볼때 메리의 가톨릭 신앙은 에드워드의 개신교 신앙이나 엘리자베스 치세 초기의 그것보다 더욱 자발적인 지원을 잉글랜드인들로부터 이끌어내었다.[81]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2010, [ebook]
the overall conclusion must still be that it was Mary’s Catholic Church that was the most popular among the English as a whole, and that had she reigned for even half as long as Elizabeth did – let alone had she ruled for as long, and produced a Catholic heir – then England would have been a Roman Catholic nation ever since.
전체적인 결론은, 잉글랜드인에게 전체적으로 가장 인기 있던 건 메리의 가톨릭 교회라는 것이며, 만약 그녀가 엘리자베스의 절반 기간만 다스렸어도 ㅡ 그녀가 치세 동안 가톨릭 상속자를 낳았을지를 논외로 하더라도 ㅡ 잉글랜드는 계속해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남았으리라는 것이다.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2010, [ebook]
게다가 재위 10년쯤이 넘었을때, 가톨릭 세가 강했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엘리자베스는 대대적인 학살로 답한다.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과 그 지지자들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그 지역 민중들에게까지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700명 이상이 처형당했고, 당시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교수형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엘리자베스가 메리보다 종교적 이유로 사형을 덜 시켰다."는 주장은 이런 학살의 희생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주장이다.[82] 또한 엘리자베스는 라틴어 미사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척장분지형을 허가하고, 가톨릭 사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요크의 가톨릭 신자 여성의 허리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등[83][84] 처형의 잔인성 면에서는 메리 시대의 화형보다 하등 나을게 없었다.

물론 엘리자베스가 근대 초의 유럽 군주 중 특별하게 엄청나게 잔혹했다거나 하면서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이는 (언니인 메리 1세에게서도 보듯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한 근대 초 유럽 군주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잔혹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잔혹성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특별히 예외로 취급하여, 휘그 사관의 재미있는 문학적 내러티브를 위해 사실을 끼워맞추는 것은 분명히 지양되어야 할 태도이다. 엘리자베스는 다른 유럽 군주들이 그러하듯이 잔혹함과 개인적인 종교적 호오가 결합된 초기 근대 유럽 군주로 봐야 할 것이다.

4.6. 총평

비록 과거 휘그 사관(Whig history)이 묘사한 극단적 미화는 오늘날 영국 사학계에서 밀려났으나, 40년 넘게 재위하며 이후의 영국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거대한 군주임은 부정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는 여성차별 의식이 팽배했던 시기였던데다 사생아라는 논란 때문에 입지적으로는 불안했으나 끝까지 왕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백성들과 접촉하기를 즐겨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 내를 여러 번 연례 순행하기도 했다. 이는 백성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군주에 대한 신뢰감과 존경심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과 인플레이션, 실업으로 백성들의 삶 자체는 1300년대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도 있었고, 실제로 전쟁 중인 1595 ~ 1597년엔 여러 차례 식량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의 검소한 태도와 여러차례의 순행은 그런 흉흉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는 평이 있을 정도. 하지만 뒤의 스튜어트 왕가가 잉글랜드 내전을 비롯한 각종 정치적 풍파에 시달린 나머지 해가 갈수록 엘리자베스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게 되었다.[85]

무엇보다 비단 엘리자베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헨리 7세의 시절 부터 잉글랜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집중화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순수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생산하는 건 쥐뿔도 없는 주제에 지출은 엄청나게 먹어대는 왕실 내각과 휘하의 관료 조직의 비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네덜란드 독립 전쟁 지원과 대 스페인 전쟁 등의 적극적인 팽창 정책으로 인해 엘리자베스 시절 이러한 왕실 조직의 비대화는 엄청나게 커지게 된다.

물론 비단 엘리자베스의 책임만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결국 엘리자베스 시절 감당 못하게 커진 왕실 조직과 이에 대해 튜더 왕조 초기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의회와 지방 귀족과 젠트리 세력의 반발은 결국 훗날 잉글랜드 내전이라는 격란의 원인이 된다.[86]
History is properly read forwards, and the issue of the ‘success’ or ‘failure’ of Elizabethan government would be overtaken during the Personal Rule of Charles I by the more significant (perceived) threat to Protestantism and the internal security of the British Isles and Ireland that was represented by the policies of the king and Archbishop Laud. And yet, the late Elizabethan legacy of meagre public revenue and governmental malaise was in the end reversible only by the events and experiences of Civil War and Interregnum.
역사는 적절하게도 엘리자베스 정부의 성공 혹은 실패가 찰스 1세의 개인 통치때 전복되었다고 읽어낸다. 이는 찰스 1세와 Laud 대주교에 의해 대표되는 개신교와 브리튼 제도(諸島) 및 아일랜드의 안보에 대한 중대한(이라고 인지된) 위협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후기 엘리자베스 시대의 유산인 미약한 재정과 정책적 문제점들은 오직 내전과 공위시대의 여러 사건과 경험들을 통해서야 극복될 수 있었다.
《The Oxford History of Britain》 Kenneth O. Morgan

사실 엘리자베스 본인의 치세만 하더라도 내부 가톨릭 파벌과 메리 스튜어트를 기반으로 한 수많은 반역 음모, 봉건적 자치권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북부 귀족들의 반란 등 내적으로도 충분히 굴곡이 많은 시대였다. 여기서 엘리자베스는 반란과 무관하게 단지 신심 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하는 등, 현대적인 관용과는 거리가 먼 정책을 펼쳤으나, 아무튼 간에 이러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버텨내고 40년을 재위하고 이후 영국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거대한 군주임에는 틀림없다.

아버지에 못지않을 만큼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남기기도 했다. 사생활에 관련된 이런 저런 여담들과 무적함대 국교회 성립이니 하는 단발적 사건들 때문에 진지한 그 치세의 역사적 의미가 묻히는 감이 있는 것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겠고(...)

사회복지의 역사에 반드시 나오는 왕이 엘리자베스 1세라는것도 눈여겨봐야하는 점이다. 엘리자베스 구빈법이라 일컬어지는 이 법은 1601년에 시행되어 많은 빈민을 살렸다. 노동 능력의 유무와 의지에 따라 구분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이 법안이 사회복지의 시초가 되었다는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초수급권, 조건부수급권과 같은 의미의 복지 서비스를 왕조 시대의 17세기에 이미 기초가 되는 법안을 만들어 시행했다는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

파일:external/players-shakespeare.com/Queen-Elizabeth-I.jpg
본작에서는 007 시리즈의 M으로 유명한 주디 덴치가 연기했는데, 1세가 아니라 2세 같은데? 조연이지만 상당히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했다. 이 연기로 인해 주디 덴치는 1998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97]
파일:external/www.thetimes.co.uk/114146662_Costume_345000b.jpg
소꿉친구였던 로버트 더들리 경과 사랑에 빠지나 메리 1세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여왕으로 즉위해 원하지 않는 이별을 하고 여러 고난 끝에 역경을 딛고 점차 진정한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거듭나는 엘리자베스의 일생을 그려낸것이 1998년도 작의 내용.
당초 케이트 블란쳇이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게되자 웬 듣보잡이 저런 중요한 역을 맡냐면서 사람들은 흥행 실패를 예상하였지만, 3,00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서 8,200만 달러를 벌어들여 '대박'까진 아니지만 '중박' 정도의 흥행엔 성공했고, # 뭣보다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이 '대박'이었고, 블란쳇은 바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화려하게 데뷔한다.[98]
9년 뒤 블란쳇은 세자르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춰《골든 에이지》에서 다시 한번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는다. 2007년 작의 주된 배경은 칼레 해전이며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엘리자베스 1세의 불꽃튀는 대결이 주요 내용.
재미있는 점은 1998년 작에서 로버트 더들리 경과 사랑에 빠졌던 엘리자베스가 2007년에는 잉글랜드 사략선 선장 월터 롤리 경과 연애 플래그가 선다. 칼레 해전이라면 흔히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떠올리는 이들에게는 생소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월터 롤리 경은 서구권에서는 대단히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다. 잘해봐야 탐험가 내지는 사략선장인 드레이크에 비해, 롤리는 탐험가이자 군인이면서 동시에 학자, 역사가로 이름 높은 인물로 결코 드레이크에게 밀리지 않는다. 더욱이 북아메리카에 처음 정착을 시도하고 그 지역을 엘리자베스와 관련이 높은 이름인 '버지니아'로 명명한 게 롤리 경임을 생각하면 결코 듣보잡을 내세운 것이 아닌 것. 참고로 오늘날까지 해양력의 가치를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곧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을 한 주인공도 롤리 경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칼레 해전에서는 잉글랜드가 화공으로 아르마다를 물리치지만 실제로 아르마다가 패배한 이유는 악천후에 휘말려서 아일랜드 쪽으로 빙 돌아서 본토로 퇴각하려다 박살난 것이다. 실제로 전투로 격침된 배는 5척도 되지 않으며 잉글랜드의 피해도 그리 치명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펠리페 2세는 아르마다의 전멸 소식을 듣고도 별로 실망하지 않았으며 곧 비슷한 규모의 함대를 재건한다. 나라를 파산상태로 몰고 가긴 했지만
2007년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 중기, 여왕 엘리자베스는 처녀의 몸을 지킬 것을 표명하며 결혼에 사실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런 여왕을 못마땅해한 주교들과 신하들은 여왕에게 후사를 위해 결혼을 하시라며 끈질기게 간청을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난 불가능한 쪽에 흥미를 느낀다"라며 무심하게 대꾸하여 자신은 결혼 생각이 없음을 강하게 피력해 신하들을 데꿀멍시킨다. 공적인 자리에서 결혼 얘기를 꺼낸 신하의 뒷통수를 후려 갈기기도 하는데 어지간히도 거슬리게 했던 모양.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잉글랜드로 도망왔다가 엘리자베스에 의해 유폐된 메리 여왕는 엘리자베스를 처치하고 자신이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와도 연결창구를 만들어 순조롭게 계획을 진행시켜 나가는 듯 보였으나... 문제는 메리의 계획이 오래 전부터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엘리자베스의 신하들에 의해 뒷조사 당해 간파당해버렸다.
당연히(...) 엘리자베스를 노렸던 암살 계획은 실패했고, 메리 여왕을 비롯한 음모자들은 전부 반역죄로 목이 잘린다.
메리의 처형은 잉글랜드를 침공할 구실이 없던 펠리페 2세에게 좋은 떡밥이 되었고, 펠리페는 온 유럽에 명성이 자자하던 아르마다를 잉글랜드 정복을 위해 출진시킨다.[99] 한편 엘리자베스는 사략선 선장 월터 롤리 경에게 푹 빠져 연애 감정까지 느꼈으나, 문제는 롤리가 엘리자베스에게는 별로 호감이 없었고 그녀의 시녀였던 베스에게 접근해 사랑에 빠지고 결국 임신까지 시켜버리고 만다. 여왕의 시녀가 여왕의 승인 없이 결혼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했고, 더군다나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이 가장 아꼈던 시녀에게 NTR당한 엘리자베스는 분노로 눈이 뒤집혀 롤리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그 시각, 아르마다는 도버 해협인근까지 접근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고 잉글랜드 본토에 상륙할 기회를 노린다. 그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의 백년 전쟁 이후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아서 군사력이 시망상태였고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그나마 해군쪽은 선왕인 헨리 8세가 신경을 써둔 덕분에 사정이 좀 나았으나, 육군의 상태는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의 상태였다. 스페인 아르마다의 병력 1만 + 펠리페의 친구인 프랑스 파르마 공작의 휘하 병력 1만 5천을 합한 총합 2만 5천 대군에 맞서야 하는 잉글랜드의 병력은 꼴랑 3천명. 이런 압도적인 전력차에서 스페인군이 상륙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잉글랜드는 끝장이었다. 상륙을 허용하면 육군이 순식간에 박살이 날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상륙을 막기 위해서는 바다에서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롤리를 석방하여 스페인과의 전투를 이끌게 한다.
해군을 출전시킨 후 엘리자베스는 농부들과 죄수들까지 풀어 무장시키고 몸소 갑옷을 입고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굳힌다. 한편 바다에서 잉글랜드 해군은 아르마다에게 말 그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있었고 전멸의 위기에 몰려있었다. 스페인군의 잉글랜드 상륙이 임박한 최악의 상황에서 롤리는 고심 끝에 화공 전술을 시전하여 악천후에 오밀조밀하게 뭉쳐있던 아르마다에 폭격.
좁은 해협에 밀집해 있던 아르마다는 닻줄을 끊고 튀려고 하나 오히려 자기네들끼리 뒤엉켜 모조리 불타 개발살이 났고 펠리페는 수만에 달하는 군대를 말아먹은 패배에 정신줄을 놓고 리타이어해버린다. 이후 대례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지도위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맺는다.[100]
TV미니시리즈라 정보가 드물지만 한글 번역 자막도 있으니 감상할 것을 추천한다. 케이트 블란쳇의 영화 엘리자베스 캐릭터와 대조적인데 서사적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영웅적인 면모와 드라마적인 부분을 강조했다면 헬렌 미렌의 엘리자베스는 중년으로 접어든 현실적인 여왕의 모습과 인간적인 모습을 재해석한 연기가 포인트다.[102] 이 미니시리즈는 골든 글러브와 에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여우주연상, 조연상등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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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베스 타이틀롤을 연기한 히라노 아야 (2017년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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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하나후사베스2.jpg
레이디 베스 타이틀롤을 연기한 하나후사 마리 (2017년 공연)
2013년 11월 18일에 공개되었던 초연 프로모션 비디오
제목대로 아직 공주(프린세스)시절의 엘리자베스 이야기를 진행한 작품답게 드라마 튜더스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1세가 굉장히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나오고 있고, 작중 베스, 레이디 엘리자베스로 불린다. 이야기의 시간대는 아직 이복언니인 메리 1세[111]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중이던 1553년과 1558년 사이인 16세기. 헨리 8세의 차녀로 태어났지만, 모친 앤 불린이 반역죄로 처형 당하면서 서자로 격하당한 후 가정교사 로저 애스컴[112]과 양육 담당자인 캣 애슐리[113]와 함께 하트퍼드셔에서 생활하다가 가공인물이자 음유 시인 로빈 브레이크[114]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제2대 국왕 헨리 8세는 에스파냐의 공주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혼인하여 장녀 메리를 얻는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새로운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앤 불린. 헨리8세는 앤 불린을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비로 맞이하기 위해 카톨릭의 묵주를 던지며 국교를 카톨릭에서 성공회 프로테스탄트로 바꾸고, 동시에 카탈리나와 그녀의 딸 메리 역시 완전히 버림받는다.[115]헨리 8세가 앤 불린을 왕비로 맞이한 후 베스가 태어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앤 불린도 죄목을 받아 런던 탑에 감금당하면서 베스가 아주 어린 나이에 이별하게 되고, 베스는 캣 애슐리가 양육하게 된다. 베스가 3살이 되었을 때 앤 불린은 참수형에 쳐해진다. 헨리8세는 비록 앤 불린을 처형했지만, 베스에게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교리로 만든 성경책을 선물하게 된다.[116] 헨리8세 사후 6년 뒤 메리 1세가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한다.[117] 메리가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자마자 부친 헨리가 바꿔놓은 국교를 카톨릭으로 되돌리기 위해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탄압했으며, 그로인해 백성들로부터 "블러디 메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로저 애스컴은 성장한 베스를 보며 자신이 베스의 가정교사를 맡고있고 별의 관측을 보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베스의 운명을 언급한다. 여기까지가 프롤로그의 내용이다.
성인이 된 베스는 어릴때부터 공부와 책읽기를 즐거워하며 지금도 부친에게 선물로 받은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성서를 읽고 있다. 그때 로저 애스컴이 들어오면서 베스가 읽은 책을 보자마자 "그 책은 메리 여왕이 금서로 지정하고 있으니 숨기는 것이 좋다"고 말하며 캣 애슐리에게 건네준다. 그러자, 베스가 그 책은 그냥 다른 책이 아니라며 아바마마로부터 받은 선물이고, 언니인 메리도 자신을 심문하진 않을 거라고 말한다.
베스: 이건 그냥 다른 책이 아니에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아바바마와 같은 잉글랜드의 거울이죠. 언니인 메리도 저에게 뭐라하진 않을거에요. 아바마마의 애독서이니 괜찮습니다. 신약성서인 작은 책. 아바바마로부터 물려받은 책. 편안함과 번쩍임이 있는 소중한 책이에요.
그러다가, 메리 튜더 여왕의 측근인 카톨릭 교주 스티븐 가드너[118]가 베스의 방에 난입하며 방을 뒤지더니, 베스가 부친에게 받은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성경서를 발견하고 베스에게 "음탕한 요부 앤 불린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모욕을 주고, 이에 베스는 화를 겨우 참아가며 "무례하다!"[119]라고 소리치고 성경책을 돌려달라하지만, 가드너 주교는 떠나버린다. 가드너의 모욕을 받은 베스는 치를 떨며 말한다.
베스: 제가 왜 어미 때문에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합니까?

모욕 때문에 화가 나버린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직접 이복언니인 메리 여왕에게 편지를 쓰겠다며, 가드너 주교를 따라가 신약성서를 찾아오기 위한 마차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첫 솔로곡 "나의 아버지는 왕"이 시작되면서 베스는 자신은 의 딸이라며 신념과 긍지만큼은 반드시 지켜냄과 동시에 절망의 틈 속에서도 자신은 승리를 할 것이고, 거침없이 모두 이겨내며 두려움도, 분노도, 눈물도, 모두 삼키고 모든 시련 이겨내리라고 외친다. #하나후사 마리Ver #히라노 아야Ver
베스가 마차를 타고 가드너 대주교를 뒤쫓던 도중 그만 숲에서 마차가 고장나게 된다. 마차가 수리되는 동안 베스가 잠시 나와 음유시인이자 방랑자이면서 메리 튜더의 정책에 반발하는 일반 백성인 로빈 브레이크와 처음 만나게 된다.
베스: 안녕?
로빈: 안녕...근데, 당신은 뭔데?
베스: ...'베스'라고 해!
로빈: 베스라고 하는구나. 숲에서 뭔일 있었어?
베스: 내가 타던 마차가 고장이 났어.
로빈: 마차가? 헤에! 부자구만~~!
베스: 당신의 마차를 빌려줄 수 있어?
로빈: 내 마차를? 날 부자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베스: 그럼, 넌 무엇을 하는 사람인데?
음유시인 로빈 브레이크는 "나는 집도 없고, 부자도 아니고, 의무도 없지. 자유롭게 살고있다구. 이 아름다운 세상의 전부는 내꺼야!! 난 노래도 창작하고, 책도 만들 줄 아는 특별한 가수야!"라며 베스에게 자기 소개를 한다. 류트를 연주하며 우스꽝스런 움직임을 보여가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베스는 그런 로빈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웃기도 한다. 로빈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보조하는 신하가 달려와 로빈의 친구 3인방이 마차를 고쳐줬다면서 베스가 매우 기뻐하며 답례로 그들에게 금화를 선물해준다. 보조하는 신하의 입에서 "레이디 엘리자베스"라는 호칭이 나오자 로빈과 그의 친구 3인방은 화들짝 놀란 표정까지 보이며 반응하지만, 베스는 신하에게 곧바로 답한다.
베스: 이 이상 마차를 타고 가드너를 뒤쫓는 건 무리군요. 여왕 폐하에게 성경책을 돌려달라는 편지만이라도 보내야겠습니다.
거기 더하여 베스는 로빈이 자신의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자기소개 했던 것에 개의치 않고 웃으면서[120] 로빈에게 건강히 지내라며 말한 후 물러나면서 다시 마차에 탑승하여 돌아간다.[121]
한편, 스티븐 가드너 대주교가 심장약을 복용 후 메리 여왕의 궁에 알현하러 오고[122], 메리 튜더 여왕이 베스에게 편지를 받았다며 그 내용을 읽고는 비웃으면서 얘기한다.
메리 튜더 여왕 : 베스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드 주교 : 호오~~! 여왕 폐하께 편지를 보냈단 말입니까?
메리 튜더 여왕 : 그렇습니다. 예하에 대해선 무례한 자라며 있을 수 없는 취급을 했다고 써져 있군요. 당신이 언제나 명을 어겼으니 엄벌에 처했으면 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가드너 주교는 베스에 대해 어이없어하면서 메리 여왕에게 아부를 떨듯이 무례를 용서해달라 하지만, 메리는 가드너에게 상관없어 하면서 베스가 태어나자마자 자신과 자신의 생모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그에게 모든 걸 얘기하며 곧바로 메리를 광대들이 앤 불린의 모습이 그려진 흉상 초상화를 가져와 그녀를 향해 "사악한 여자"라며 광대가 가져온 다트를 던지기까지 한다.
메리 튜더 여왕 : 나쁜 것은 전부 저 사악한 앤 불린! 아바마마를 유혹했고, 규범을 어기기까지 했습니다. 악마의 자식을 잉태했죠. 하지만, 베스에겐 승산 같은 게 없지요!

메리 여왕의 말을 들은 가드너 주교는 베스는 메리 여왕에게 역모를 꾸미는 게 틀림없고, 백성들의 선망을 받고 있다고 얘기까지 한다. 스티븐 가드너 주교는 카톨릭에 반박하는 이단자는 처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베스를 사형을 부탁하려 하지만, 메리 튜더 여왕은 베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라며[123] 시녀 수잔을 불러 베스에게 자신의 궁에 들르라는 편지를 보내라 시킨다.
작중 대표적인 베스의 넘버는 2017년 재연판을 기준으로 1막에서 자신이 부친에게 물려받은 성공회 신약성서를 마구 모욕적인 말을 던지면서 뺏아버린 가드너 주교에게 화가 나서 부르는 나의 아버지는 왕(我が父は王, My father was a king)과 1막 마지막에서 이복언니 메리여왕에게 반란혐의를 받자 자신이 누명까지 받게 되는 상황에 절망하면서 자신의 신념과 믿음, 굳건함을 담은 내 안에 간직하는 마음(秘めた想い, The feelings I hide), 2막에서 런던 탑에 감금되어 자신도 모친처럼 누명을 씌워져가면서 유죄 판결과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제야 자신은 전혀 특별한 인간이 아닌, 모두와 똑같은 인간이란 걸 알게 되어 죽음 앞에서 두려하며 부르는 신에게 버림받고(神に見放されて, Fallen from grace)와 막판에서 모든 일이 무사히 해결되고, 펠리페 황태자가 에스페냐(스페인)로 돌아가면서 메리 1세 서거 후 어둠 속에서 헤매었던 자신의 소녀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을 키워주면서 바른 길로 이끌어준 사람[124]과 궁전 밖에 나와 처음으로 이성으로써 사랑하게 된 사람을 통해 자신에게 살아갈 용기를 전해 준 사람[125]을 언급하면서 어둠을 뚫고 나아가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퀸 엘리자베스(Queen Elizabeth)"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다짐하며 부르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闇を恐れずに, Afraid of the dark)가 있다. 이 외에도 2막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감금에서 베스가 상상임신과 건강악화로 죽어가는 메리 1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부친 헨리 8세에게 결국 버림받았던 것을 생각하며 그토록 자신을 증오해온[126] 이복언니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부르는 듀엣 사랑을 모르면서(愛を知らずに, I never knew love)와 2막 막판에서 베스가 자신의 운명[127]과 행복[128]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로빈과의 사랑을 잊지않겠다고 다짐하며 부르는 듀엣인 상처 입은 날개(傷ついた翼, Wings)도 명곡으로 꼽힌다.
파일:레이디베스무대!.jpg
레이디 베스의 프롤로그 장면[129]
파일:레디베스무대2.jpg
레이디 베스 1막 마지막에서 베스가 "내 안에 간직하는 마음(秘めた想い)"를 부르는 장면[130]
제목의 레이디 베스는 서자 시절의 호칭에서 유래했다. 어머니 앤 불린 헨리 8세에게 여러 누명을 받아가면서 결혼 무효화까지 선언받고 참수형 되면서, 당시 3살이 채 되지 않았던 딸 엘리자베스도 서자로 격하 되어 한동안 프린세스(공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131] 호칭에서 곤란한 상황이 된 엘리자베스의 시녀들은 프린세스 엘리자베스(Princess Elizabeth)에서 귀족 칭호인 레이디(Lady)로 바꿔 불러야했고, 뮤지컬에서도 이를 꽤 반영하고 있다. 거기 더해 다른 매체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처음부터 생모 앤 불린을 꽤 증오하는 모습도 보여주는데[132]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한 컴플렉스를 느끼기도 했으며, 거기 더하여 자신이 앤 불린의 딸이란 것을 매우 치욕스럽게 여겼다는 기록을 잘 재현하여 단순히 청순가련한 공주 캐릭터상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133] 거기 더하여 자신의 신념을 굳게 간직하겠다는 언급에서 실제 엘리자베스 1세의 자비로운 면과 여장부형의 성격도 작중 잘 반영하고 있음이 보여진다.
私の心が読めると言うの?(내 마음을 엿보려 한단 말인가?)
あなたとは違う (당신[134]과는 달라.)
読めはしない (엿보려 하지않아.)
濡れ衣着せられても (누명을 뒤집어 씌운다해도)
微笑み返す (미소를 지을테고)
潰されはしない (움추리지 않겠어.)
何をされても (무엇을 한다해도)
責められ罰せられても (책망받고 형벌을 받는다해도)
魂だけは自由 (내 영혼만은 자유이니.)
心はわたしのもの (내 마음은 내 것이야.)
窓なんてない (창문 따위는 없고)
覗けはしない (들여다 보지 않아.)
秘めた思いをあなたは知り得ない!(당신은 숨겨둔 내 마음을 알 수 없어!)
命令される (명령을 받는)
そのたびに (그때마다)
信念だけは護ってきた!(내 신념만은 지켜왔어!)
あなたと同じ考え方など無理よ!(당신같은 사고방식은 무리야!)
自分自身を裏切れないわ (내 자신을 배신하지 않아.)
閉じ込め (날 가두려하고)
脅されても (위협받는다 해도)
魂だけは自由 (내 영혼만은 자유.)
心はわたしのもの (내 마음은 나의 것)
窓なんてない (창문 따위는 없고)
覗けはしない (들여다보지 않아)
秘めた思いをあなたは知り得ない!(당신은 숨겨둔 내 마음을 알 수 없어!)

あなたが望むような人にはなれない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
信念を (합창 : 신념으로)
私の人生だもの (나의 인생인걸.)
勇気ある戦い挑む! (합창: 용기있게 싸워 헤쳐가리!)
私が支配者!(내가 지배자이니까!)
心はわたしのもの (내 마음은 내 것이야)
立ち上がり(합창: 일어서리라)
涙拭き(합창: 눈물을 닦고)
窓なんてない覗けはしない!(창문 따위는 없고 들여다 보지 않겠어!)
曇りない (합창: 흔들리지 않으리)
誇りを胸に秘め (합창: 긍지를 마음 안에 간직한)
秘めた思いを (숨겨놓은 내 마음을)
運命に立ち向かう!(합창: 운명에 맞서나가리!)
あなたは知り得ない!(당신은 알 수 없어!)
あなたは知り得ない!(당신은 알 수 없어!)
神の御加護を (합: 신의 가호를 빕니다.)
勇気あるレディ・ベス! (합: 용기있는 레이디 베스!)


~1막 마지막 베스의 넘버곡 "내 안에 간직하는 마음(秘めた想い, The feelings I hide)"~
레이디 베스는 일본 토호 뮤지컬계의 큰전환과 대극장 주역배우들의 세대교체를 명확히 알렸다는 것과 타이틀롤의 하나후사 마리 히라노 아야에게도 큰 의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나후사 마리는 다카라즈카판 엘리자벳 초연(설조, 1996)이랑 삼연(주조, 1998)때만해도 엘리자벳[135]에 대한 캐릭터 해석과 창법땜에 원작자 실베스터 르베이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레이디 베스 2014년 초연을 기점으로 인정받아 르베이의 지시하에서 2015년 신무대판 토호판 엘리자벳부터 하나후사 마리가 타이틀롤을 맡음으로써 다카라즈카 여역(娘役) 출신자 씨씨가 나오게 되었으며 하나후사 마리 역시 창법도 다카라즈카 여역 톱스타 시절보단 소폭이라도 개선되기도 한데다, 이치로 마키에 이어 르베이 작품에 활약할 일본 뮤지컬 여배우로 자리잡게 되었다.[136][137]
히라노 아야 역시 그 전엔 스즈미야 하루히같은 캐릭터만 연기하는 성우로만 인식되어왔고,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토호 인기 뮤지컬 레 미제라블 에포닌역을 맡았던 시절엔 "성우출신이 감히 뮤지컬계에 왔냐!!??"라는 식으로 성우시절때처럼 억지로 까임을 당했지만 레이디 베스 2014 초연을 통해 성우에서 뮤지컬 배우로서 전환하는데 성공한 계기가 레이디 베스 타이틀롤이다. 물론 2014 레이디 베스 초연땐 히라노 아야가 단순히 특정 극단출신[138]이 아닌 성우 출신이란 이유와 다카라젠느들의 전문역인 왕족역을 맡았단 이유로 "소시민이 왕족을 맡는다니 상상할 수 없다!", "다카라즈카 출신자가 아닌 소시민 전문가가 왕족 역을 맡는다는 건 (일본) 연극의 퀄리티 저하를 불러일으킨다!"란 식으로 억지주장에 가까운 까임을 받기도[139]했지만, 실베스터 르베이는 오디션때 히라노 아야가 모차르트!의 콘스단체의 넘버인 "나는 예술가의 아내(독일어: Irgendwo wird immer getanzt, 일본어: ダンスは止められない)"를 부를때부터 높이 평가했으며[140], 실베스터 르베이가 본격적으로 일본 비(非)다카라즈카 뮤지컬 여배우에게도 관심갖는 계기가 되기도했다. 거기다 일본내 비(非)다카라즈카 해외 뮤지컬 팬들과 엘리자베스 1세의 일대기를 알고있는 이들과 서양의 일본 뮤지컬 팬들은 청순가련하고 사랑스러운 프린세스 타입의 하나후사 마리 베스보다 당차고 결단력이 강하며 현실적인 여장부 타입의 히라노 아야 베스에 더 호평을 주는 경우가 많다. 또하나의 의미는 히라노 아야가 일본 무대계 최초로 서양 왕족(王族)캐릭터를 연기한 비(非)다카라즈카 여배우이기에 그 동안 서양 왕족역할은 다카라즈카 출신자만이 가능하다는 일본 무대계의 인식을 깨는 기점이 되었으며, 히라노 아야를 기점으로 성우 출신이 뮤지컬 배우가 되거나[141]뮤지컬 배우가 성우 활동에도 참여[142]하게 되는 다방면적인 길을 열기도 했다. 또, 실베스터 르베이는 레이디 베스 이후 토호판 모차르트! 2014년과 2018년 공연때 히라노 아야가 두번이나 콘스탄체역을 맡도록 지시했고, 2018년 토호 레베카 공연에서 이히(나, Ich)역에 배정하기도 했다.[143]
일본 전문지 뮤지컬(ミュージカル)에서는 레이디 베스를 2014년 뮤지컬 베스트텐 작품부문 1위에 선정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레이디 베스는 트라이스톤 소속 비(非)다카라즈카 뮤지컬 여배우 키노시타 하루카에게 있어 고등학생때 뮤지컬 배우로 확실히 진로를 결정짓게 된 계기를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키노시타 하루카는 로미오와 줄리엣 2017년 공연때인 데뷔 초에 인터뷰에서 2014년 후쿠오카 하카타좌에서 공연한 레이디 베스라고 봤다고 하며 베토벤 연습기간 당시 처음 같이 공연하게 되는 하나후사 마리와 만나서 하카타좌에서 상연한 레이디 베스를 4번이나 관람했다고 밝혔다. #[144] 또한 키노시타 하루카 동작곡가의 최신작인 베토벤의 일본 초연을 총막공까지 모두 마친 후 2014년 하카타좌에서 레이디 베스를 관람했던 인증사진을 보여줌과 동시에 본작의 악역인 스티븐 드 주교를 연기하고있던 이시카와 젠이 레이디 베스를 중심으로 진행한 뮤지컬 강좌에 갔던것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언급한 바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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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잉글랜드 런던 그리니치 [2] 영국 잉글랜드 런던 리치몬드어폰템스 [3] 의학 및 생물학적 지식이 약했던 전근대 시기에는 특정한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이유를 그 여성의 탓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현대 과학적 지식으로는 그러한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난임은 여러 가지의 요인이 작용하며, 특정 성의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는 증상은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현대에 들어 성별을 결정짓는 건 남자 쪽의 염색체라고 밝혀졌다. [4] 세간에서는 불합리한 처사를 당한 조강지처 아라곤의 카탈리나에 대한 동정 여론이 높았다. 그녀가 폐위되어 궁정 밖으로 쫓겨났을 때, 헨리 8세의 눈치를 보던 귀족들과는 달리 백성들은 연도에 모여 여전히 카탈리나를 '우리 왕비님'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이런 여론에는 앤의 고집 센 성격과 좋지 못한 대인관계도 한몫 했다. 이후 카탈리나가 사망했을 때 심장이 검게 변해있자 백성들 간에는 "앤 불린이 카탈리나 왕비를 독살한 거다!" 라는 주장까지 나왔을 정도(현대에는 심장에 암이 생겼던 것으로 보고 있다.) [5] 같은 처지였던 이복언니 메리 1세는 생모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메리 역시 백성들의 동정을 받았으나, 엘리자베스는 앤 불린이 참수당하자 백성들이 인과응보라며 비웃었을 정도로 생모에 대한 평판이 나빴기 때문에 그렇게 동정받지도 못했다. [6] 그러나 이 추문에 대해 엘리자베스도 잘 생긴 시모어에게 반했기 때문에 시모어가 자신을 희롱할 때 거절하지 않고 호응했다는 설도 있다. 게다가 이 추문이 났을 때 캐서린 파는 시모어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캐서린 파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신분에 따르는 책임과 예의 때문에 의붓딸과 남편의 추문을 묻어 두어야 했으나, 결국 아이를 출산하고 산욕열로 죽을 지경에 처해서야 자신의 고통을 모두 드러내며 두 사람에게 폭언과 저주를 퍼부었다는 일화도 있다. [7] 메리 1세는 공공연하게 엘리자베스가 헨리 8세의 친딸이 아닐 거라고 말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헨리 8세의 외모를 쏙 빼닮은 건 메리가 아닌 엘리자베스라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당장 헨리 8세의 초상화와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를 비교해 봐도, 붉은 머리 색깔부터 얼굴까지 헨리 8세를 쏙 닮은 걸 볼 수 있다. 참고로 메리 1세가 엘리자베스의 친부라고 믿은 사람은 앤 불린이 처형당할 때 같이 엮여 처형당한 사람 중 하나인 궁중악사 마크 스미턴(Mark Smeaton). [8]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는 아내인 메리 1세 사후에 처제인 엘리자베스와 재혼해 잉글랜드까지 통치하려는 펠리페 2세의 강한 의지가 작용했다는 말이 있다. [9] 성공회의 전신 [10] 왕세자를 이르는 말 [11] 기즈 가문은 로렌 가문의 방계로 프랑스 궁정에서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 부르봉 가문 등과 함께 준왕족 취급을 받고 왕가와 결혼이 가능한 통치가문 취급했다. 프랑스 위그노 전쟁 시 중심 인물이던 로렌 추기경과 기즈 공작 앙리는 메리 스튜어트의 삼촌들이다. [12] 엘리자베스는 메리 1세와 달리 스페인어도 잘했고, 펠리페 2세처럼 승마와 사냥을 잘했다. 그래서 펠리페 2세가 영국에서 체류했을 동안 가깝게 지낸 몇 안된 사람이었다. [13] 펠리페 2세의 사촌동생으로 아들인 페르디난트 2세 30년 전쟁이라는 초대형 삽질을 벌였으나 막상 본인은 반종교개혁을 시행하면서도 프로테스탄트에 관용을 보였다. [14] 마찬가지로 펠리페 2세의 친척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쪽은 외사촌 [15] 당시 잉글랜드가 보던 관점의 러시아는 그랬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막 몽골-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 성장해가는 약소국 정도였고 강대한 러시아 제국은 18세기 쯤에나 나타났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유럽'의 지도는 대부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끝나고 러시아는 그냥 모스크바에 방점 하나 찍은 다음 외형만 보면 차라리 오스만 제국이나 페르시아와 더 유사해 보이는 동방풍의 사람이랑 천막 하나 그려 놓고 치운 게 대부분이었다. 현재도 러시아는 유럽국가로 분류되긴 하지만 거의 따로된 문명권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마자 영국의 러시아 견제가 시작되어( 크림 전쟁, 러일전쟁 등) 냉전, 신냉전을 거치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16] 차르의 황후 [17] 그녀가 자신의 대관식 반지를 들어보이면서, "짐은 이미 잉글랜드를 남편으로 섬기고 있노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18] The Virgin Queen, 처녀 여왕이라는 뜻이다. [19] 브리태니커를 비롯한 각종 사전에서도 엘리자베스 1세의 결혼 추진 및 실패에 관련된 이야기는 상세히 다루고 있지만, 위와 같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20] 당시의 가부장적 가치관으로 인해 설령 여왕이라 해도 결혼하게 되면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다. 어디까지나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인 시대였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21] 친어머니 앤 불린의 불행한 결혼, 의붓어머니 캐서린 파의 불행한 결혼, 이복언니 메리 1세의 불운한 결혼 등 전례는 많았다. 게다가 귀족들 사이에서도 별거와 이혼이 비일비재했다. 이후의 일이긴 하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역시 결혼으로 인해 추문을 남긴 훌륭한(?) 전례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 유명한 헨리 8세의 딸이다. [22] 상세한 건 메리 1세 항목 참고. [23] 그녀는 원래 프랑스의 왕비였으나, 프랑스 왕 프랑수아 2세가 죽고 자국으로 돌아와 스코틀랜드 귀족인 단리 경과 결혼했다. 그러나 단리와 곧 사이가 나빠져 그에 의해 모반이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 이렇듯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와의 결혼은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킴과 동시에 왕위에도 위협적이었다. [24] 결혼 교섭이 진행될 여지가 있다면 각국에서 침략을 개시할 이유가 없다. [25] 종교, 비용, 영토 등 [26] 어렸을 적 앓은 천연두로 곰보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27] 인클로저 운동으로 목축지 중심으로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여 과거 소작농제로 일하던 임금 노동자 및 영세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돌게 되면서 부랑자들이 늘어났다. [28] 1565~1601. 1599년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파견되었으나, 6개월 만에 자원과 병력을 모두 소모하고 수치스러운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이로 인하여 여왕에게 버림을 받게되어, 1601년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아들인 로버트(1591~1646)는 제임스 1세 제위때 에식스 백작위를 받게된다. [29] 처녀의 땅이라는 뜻. 여왕의 총애를 받았던 월터 롤리 경이 제안했다고 한다. 월터 롤리 경은 엘리자베스가 지나갈 때 진흙탕이 있자 망토를 벗어서 깔았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30] 흔한 오해와는 달리, "청교도 106명이 메이플러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하는 것으로 미국이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메이플라워 호의 개척자들은 당시 국교회에 반발한 분리주의자들로서 플리머스에 정착했는데, 이는 비인가 식민지였으며 시기적으로 제임스타운보다 13년 뒤인 1620년에야 만들어졌다. 상업적 목적으로 개발된 버지니아는 빠르게 발전하여 미국 내전 전까지 오랜 기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게다가 플리머스 식민지는 곧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흡수되었는데, 이 식민지는 청교도 중심이기는 해도 왕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매사추세츠 만 회사를 통해 1629년 설립되었다. [31] 이 링크는 말 그대로 '설'을 사실로 단정하는 듯한 말투이기 때문에 걸러서 볼 필요가 있으니 주의. [32] 당장에 드라큘라 드라큘라 백작과 실존 모델 블라드 3세의 실제 역사 속 행적도 많이 다르다. [33] 사람들은 지루한 신부의 설교 대신 연극을 좋아했다. 하지만 엄숙함을 척도로 삼던 청교도 대신들은 연극이 사람들을 나태하게 한다고 여겨 연극을 폐지해야 한다고 내내 주장했다. [34] 여왕은 직접 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 극단은 '여왕의 사람들'이란 이름을 얻었다. [35] 여왕이 당시 셰익스피어의 최신작 '헨리 4세'에 등장하는 팔스타프를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그를 주연으로 한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원래 2부작인 '헨리 4세'의 남은 부분보다 먼저 써야 했다. [36] 헨리 7세 시절 징세관이던 에드먼드 더들리의 손자이며, 에드워드 6세 시절 후반 섭정으로 메리 1세를 제치고 제인 그레이를 옹립하려다 목이 날아간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아들이다. [37] 미국의 버지니아 주에 여왕이 처녀임을 기리기 위해 버지니아(처녀)라는 이름을 짓자고 제안한 인물이다. 이 외에도 각종 문학이나 과학 등에 자질이 있어 여왕의 후원을 받았지만 너무 오만한 탓에 사람들에게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한때 총애를 받았으며 여왕의 경호대인 젠틀맨 펜셔너(Gentlemen Pensioner)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여왕의 시녀 레이디 베스를 유혹하여 임신시키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고, 풀려난 이후로도 한동안 총애를 받지 못했다. 이후 다시 젠틀맨 펜셔너의 대장을 맡았지만 이전만큼은 총애받지 못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제임스 1세의 시대에 죄를 짓고 사형에 처해졌다. [38] 시인 겸 평론가로도 유명하다. [39] 어머니 앤 불린의 외사촌이다. [40] 적지 않은 수의 역사학자들이 실제로 "엘리자베스 시절 실제 권력은 벌리 남작에게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벌리 남작 작위는 왕실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왕이 수여한 작위로 원래는 젠틀맨 계급 출신이었다. 세실의 경우 엘리자베스 1세의 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인물로써,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 기간 사망할 때까지 여왕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세실에게 ' 스피리트'라는 별칭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별칭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여왕이 그를 매우 총애한다는 의미였다. 참고로 빅토리아 여왕 때 총리를 지낸 3대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이 이 사람의 직계후손이다. [41] 로버트 더들리의 후처 레티스 놀리스가 전남편인 에식스 백작 월터 데버루에게서 낳은 장남. 레티스와 그 아들은 더들리와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고 한다. [42] 그의 어머니인 레티스 놀리스는 메리 불린의 장녀 캐서린 캐리의 딸, 즉 엘리자베스 1세의 이모의 외손녀로서 오촌 조카이다. 따라서 레티스의 아들 로버트 데버루는 여왕의 6촌 조카손자가 된다. 에식스 백작은 엘리자베스 1세의 말년(즉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때)에 등장했으나 여왕과의 사이가 몹시 두터워 많은 이들이 여왕이 에식스를 사랑한다고 볼 정도였다. 그러나 에식스 백작은 이후 여왕의 총애가 멀어지자 반란을 일으켰고 처형당했다. [43] 앙리 2세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5남으로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의 남동생이다. [44] 실제로 혼담이 오가기도 했고 앙주 공작 프랑수아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자기가 직접 프랑수아가 아침에 먹을 야채 수프를 가져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앙주 공작이 잉글랜드 왕위보다는 네덜란드 왕위에 구미가 당겨서 그곳으로 떠나버렸고, 여왕도 그가 진실한 사랑이 아닌 여왕의 지원을 노리고 있음을 깨닫고 서서히 지원을 그만두었다. 이후 앙주 공작은 네덜란드와 에스파냐의 전쟁 통에 사망했다. [45] 당대에도 여러 정황을 통해 이중 첩자라는게 확실했으나 결정적인 물증이 없었고, 무엇보다 벌리 남작이 계속 쉴드를 쳐줘서 그냥 파리 대사직 이후 중직을 맡기지 않는 선에서 끝났다. 그러나 후대 역사학자들이 스페인 측의 첩보 기록을 분석해 본 결과 실제로 스페인을 위해 일한 이중 첩자였다는게 드러났다. [46] 대조적으로 신하들을 하나도 믿지 못하고 모든 사무를 공무원마냥 하나 하나 개인적으로 처리 했던 펠리페 2세는 권력 누수라는 쥐를 잡기 위해 공무의 원활한 소통이라는 초가삼간을 태운 격이 되어 버렸던 반면, 반대로 동시대 프랑스의 경우는 그 잘난 대신들의 힘이 너무 강해 왕이 있으나 없으나 한 종교 내전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앙리 4세가 수습 할 때까지... [47] 실제로 에이미가 죽을 때 당시 하인들이나 집사가 곁에 없었는데 집사이던 안소니라는 사내는 로버트 더들리에게 상당한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하인들도 사고로 죽었다고 말하면서 일절 모른 척하고 죄다 독립하여 가게를 차린다든지 제법 잘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는 당시 권세가였던 더들리 경을 두려워해서였는지 그다지 공공연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23년이 지난 1583년에서야 나온 책에서 언급되어 전해졌다. 이 책을 본 더들리 경은 비웃으면서 흥미 위주의 소설이라고 무시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도 그 책을 보았으나 무척 격노하여 이는 악마나 믿을 거짓말이라고 치부했다. 아무튼 더들리 경은 무척 적이 많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흑색 선전이나 비방은 넘쳐났다. 그를 감싸는 것은 여왕 뿐이었다. [48] 제인 그레이의 시아버지이자 그녀를 왕위에 옹립하려 한 인물. 제인 그레이 항목 참고. 결국 메리 1세가 런던에 입성하고 제인 그레이도 폐위되면서 처형당했다. [49] Lettice Knollys( 1543년~ 1634년). 엘리자베스에겐 이모 메리 불린의 외손녀로 오촌 조카가 된다. 에식스 백작 월터 데버루와 1563년 결혼했지만 1576년에 백작이 35살로 요절하여 과부가 되었다. 1578년에 로버트 더들리와 재혼하고 그도 결혼한 지 10년 만에 자신보다 먼저 죽자, 12살 연하의 장교 크리스토퍼 블런트와 3번째로 결혼했지만 그는 1601년 반역에 휘말려 처형당하고 만다. 게다가 첫번째 남편과의 장남 로버트 데버루가 크리스토퍼 블런트와 함께 처형당하고 그외 다른 아들들도 연이어 자신보다 먼저 죽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레티스 본인은 당시는 물론 현대에서도 장수인 91살까지 살았지만 손녀와 손자까지 먼저 병으로 죽는 걸 봐야했다. 그래도 전 남편들인 에식스 백작과 더들리의 많은 재산을 상속받고 경제적으로 유복하게 살았으며 증손자와 후손들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편히 사망했다. [50] 만약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지금의 윈저 왕조는 없고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51] 엘리자베스의 고모 마거릿 튜더의 친손녀. [52] 메리의 아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했을 당시에 고작 1살짜리 아기였다. [53]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엘리자베스 본인이 독신을 선언한 것도 있지만 여러 이유로 더들리와 결혼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사이인지라 더들리의 아이에게라도 왕위 계승권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자신의 연인인 더들리를 스코틀랜드로 보내 스코틀랜드를 통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듯하다. [54] 메리 스튜어트의 키는 180cm에 달했기에 웬만한 남자보다도 더 컸다. 그래서 자신보다 키 큰 남편을 원했다고. [55] 단리 경의 외할머니가 바로 엘리자베스의 고모 마거릿 튜더다. 메리는 마거릿 튜더의 친손녀였으니 메리와 단리 경은 사촌 사이였다. 단리 경 역시 제임스 1세의 아버지이자 헨리 7세의 자손이므로 당연히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56] 메리를 감시할 것을 명령받은 솔즈베리 백작은 메리가 이후 처형당하기까지의 수십년간을 이 과중한 임무에 시달려야 했다. [57] 무거운 그리스 서사시 라틴어로 쓰인 철학서 등을 즐겨 읽었다. [58] 롱사르의 연애시 등 가벼운 작품을 주로 선호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의 귀족 여성들에겐 흔한 경향이었다. 일국의 통치자인 여왕이라서 문제지 [59]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직후 신하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라틴어로 간신히 대화했을 정도였다. [60] 메리는 최후의 순간에 지인들에게 마지막 편지들을 남겼지만, 엘리자베스에 대해서는 뭐라 쓸 말이 없어서 결국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61]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가톨릭 국가를 마다하고 라이벌 격인 친척인 자신을 찾아온 것에 대해 감히 내칠 수 없는 그런 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62] 사실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출신이 아닌 영미권 남성들의 키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170cm이 조금 넘는 형편이고 6피트(183cm)가 넘어가면 큰 키에 속하는 정도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키가 컸던 대통령인데(193cm) 그가 생활하던 때가 1800년대였으니 당시 미국 남성들의 신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63] 원문: "Although I may not be a lioness, I am a lion’s cub, and inherit many of his qualities." (설령 짐이 암사자는 아닐지라도, 짐은 사자의 자식이며, 그의 자질을 많이 물려받았노라.) [64] 당시로서는 여성은 남성에 비하면 부족한 존재, 남성의 인도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편견이 팽배했다. 가정에서는 남자의 말에 순종하며 아이나 잘 낳아 기르는 것이 여자의 가장 중대한 사명이라고 생각된 시절이었다. 그것은 여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많은 신하들은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때만 해도 여왕이 곧 적절한 왕족과 결혼해서 왕자를 낳아 왕위를 물려주리라고 생각했다. 즉 남자로 왕위가 이어질 때까지의 일종의 징검다리라고 여긴 것이었다. 엘리자베스에게 추문이 돌거나 흉년이 들거나 해서 국가에 위기가 올 때면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긴다'는 어이상실한 비난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생각보다 오래 왕위에 있으면서 풍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잘 이끌자 그러한 비난도 사그라들어, 여왕의 사후에는 위대한 여왕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고 2002년 조사한 위대한 영국인 순위에선 영국 군주로는 가장 높은 7위를 기록했다. [65] William Cecil, 1520~1598/ 역사가 알란 고든 스미스(Alan Gordon Smith)의 견해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위대한 재상 윌리엄 세실의 뒤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한 군주에 불과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66] 사실 벌리 남작이 스코틀랜드의 메리를 과도하게 견제했던 이유도 결국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자식이 없었던 탓도 있었으니 이렇게 진저리를 칠 만했다. [67] 읽기는 물론 쓰고 번역까지 가능했다고 한다. [68] 이 당시 폴란드는 강대국이었다. 유명한 폴란드 기병대 윙드 후사르가 활약한 것도 이 시기였다. [69] 당시 유럽의 의학 기술은 고대나 중세식 의학 수준에 머물고 위생 상태까지 감안하면 정말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현대 사람들이 치과 분위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것 정도와 달리 저때는 정말 이 잘못 뽑아서 비명횡사하는 일도 심심찮게 나왔을 정도. [70] 꿀풀과의 허브 [71] 만화가 이원복은 자신의 저서인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 편에서 이를 후임자인 제임스 1세의 일화로 기록했으나, 이는 명백한 오류다. 외려 제임스 1세는 있던 보석도 팔아가면서 왕실의 재정을 확충하려고 애썼던 군주였다. [72] 안타깝게도 이 보석들은 여왕 사후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73] 단 엘리자베스 1세는 내정에만 소홀함이 있었지, 한 나라의 황제로서의 의무를 아예 안 한 만력제와는 다르다. [74] 단 그가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한 것도 엄연히 사실이다. [75] 사략선은 자국의 교역선을 공격하지 않는 대신에 타국의 함선을 언제든지 공격해 나포 및 약탈해도 된다는 허가 및 보호해주겠다는 조약을 맺고 국가가 공인한 해적이었다. [76] 정확히 말하면 모든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 우호책을 취한 게 아니며, 비(非) 성공회 프로테스탄트에게도 적대적인 탄압책을 폈다. [77] 이 부분을 읽는 유저들은 근래 역사학계의 시선이, 대중 역사서의 서술에 비해서 엘리자베스에게 너무나 비우호적이라 느낄 수 있는데, 이는 휘그 사관(Whig history)의 오류가 정정되면서 생긴 차이이다. 휘그 사관(Whig history)은 18 ~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중반까지 영국사 해석에 있어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역사관으로, 영국의 역사를 ㄱ.) 입헌군주제, ㄴ.) 의회민주주의, ㄷ.) 개인의 자유를 위한 발걸음으로 해석하는 목적론적(theological)이고 결정론적인 역사관이다. 휘그 사관은 여기서 이 목적을 위한 엔진으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를 꼽는다. 이러한 목적론적 역사관에 사실을 끼워맞추다보니 동시대의 두 여왕 자매가 거울에 비친 듯한 종교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메리 1세영국사의 흐름을 거스른 일탈 내지는 반동으로, 엘리자베스 1세는 휘그 사관에 부합하는 모범적 왕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휘그 사관은 엄청난 반박들에 부딪혔으며, 학계 다수설의 위치를 상실하였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휘그 사관이라는 말이 현재 학계에서 결정론적 역사관을 조롱하는 의미로까지 쓰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휘그 사관이 역사학적으로 그릇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문학적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소설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와 아동용 만화책 등에서는 여전히 즐겨 쓰인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문학적 내러티브는 깔끔하고 재미있으며 극적이지만, 그만큼이나 현대적 역사 서술에서는 피해야 할 태도이다. 사학자 Eamon Duffy가 괜히 학술서적도 아니고 대중서적인 《 울프 홀》을 자기 학술서에서 직접 언급하며 비판한 게 아니다. [78] 원서: Peter Marshall, 《the Reform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2009 [79]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London, 2010). [80] 엘리자베스 치세를 초기로 한정한 이유는 에드워드(6년)나 메리(5년)에 비해 훨씬 오래 재위(45년)하였기 때문이다. [81] 유언장을 조사한 이유가 의아할 수 있는데, 튜더 시대 잉글랜드는 소수의 열렬한 특정 교단 신자들과 대다수의 방관자들로 구성되어있기에 정확한 종교 통계를 위해선 당대인들이 남긴 유언장에 어떤 신심이 들어가있는지를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82] K. Kesserling, Northern Rebellion, 2007 [83] 이 여성의 집은 현재 '순교자의 집'으로 지정되어 있어, 요크에 갈 경우 방문이 가능하다. [84] 게다가 이 여성은 처형당할 때 임산부였다. [85] 흔히들 엘리자베스가 너무 통치를 잘해서 스튜어트 왕가의 평가가 상대적으로 나빠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상은 반대라는 이야기. 물론 엘리자베스 1세든, 스튜어트 왕가든 통치를 답이 없게 못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긴 하지만... 실제로 스튜어트 왕가도 제임스 1세 찰스 2세는 무난하게 통치했다. 단지 찰스 1세 제임스 2세가 통치를 못했을 뿐... 하다못해 제임스 2세도 불통이긴 했지만 통치를 못한 건 아니다. 그러니까 스튜어트 왕조에서 통치를 못한 건 찰스 1세 뿐이고 나머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해내긴 했다. 찰스 1세도 개인 통치 시기를 보면 통치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골이 깊게 파인 종파 갈등을 수습할 능력이 부족했고 엘리자베스1세 시기부터 누적된 국가 재정 문제가 그의 치세에 파탄에 달했을 뿐. [86] 물론 잉글랜드 내전이 후대의 프랑스 대혁명보다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국지적인 사건이기는 했지만, 왕의 목이 잘리고 왕정이 폐지되고 국가에 피바람을 일으킨 거대한 사건임은 틀림 없다. 이러한 내전에서 엘리자베스 체제가 요인이 되었다는 것. 위그노 전쟁이나 30년 전쟁 같은 근대 초 유럽의 종교전쟁과 비교하여 잉글랜드 내전어차피 일어나야 할 내전이었다고 엘리자베스 체제의 문제점을 희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ㄱ.) 잉글랜드를 기나긴 수렁으로 밀어넣은 아일랜드 정복 전쟁, ㄴ.)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세 왕국의 결합, ㄷ.) 소수 충신이 지배하는 정치, ㄹ.) 미약한 재정 등 구체적인 약점들을 스튜어트 왕가에 물려주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87] 참고로 이 내용은 소설판과 End Of Time 1부 초반에 언급되는데 닥터가 그녀와 결혼해놓고 튀었다고 한다. 처녀가 아니라고 언급될 정도니 화날 만도 하다. 잠깐, 쎾쓰는 타조랑 체스 두는 거랑 같다며? 한 번 해보니깐 느낌이 타조랑 체스 두는 것 같아서 질린 거겠지 [88] 앤이 처형당하기도 전에 엘리자베스를 쫒아내는 광경을 보다못한 한 시녀가 "불쌍한 공주님..."이라고 한탄하자 옆에 있던 시녀장이 바로 "저 아이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야. 사생아지."라고 일축한다. 물론 이 시녀장도 엘리자베스를 일부러 조롱하려던 게 아니고 그저 왕인 헨리 8세가 시키는 대로 엘리자베스를 궁에서 데리고 나가려던 것뿐이었으며, 내색만 안 할 뿐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조강지처 적장녀를 내치고 온갖 난리를 치며 재혼한 두 번째 왕비마저 같은 이유로 누명이나 다름없이 처형시키는 헨리 8세에게 진절머리를 친다. [89] 물론 여기에 대한 묘사도 오류가 많다. [90]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통틀어서 여왕 3부작이라 불리며, 그 중에서 마지막 시리즈 이다. [91] 엘리자베타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이탈리아어 발음이다. 메리 스튜어트 마리아 스투아르다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케이스. [92] 작중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에식스 백작에게 "경이 여왕으로써의 나를 배신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여자로써의 나를 배신하는 것은 용서치 않으리라."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93] 오페라에선 에식스 백작이 노팅엄 공작의 아내 사라와 바람피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이것은 당연히 픽션이다. 그러므로 둘은 서로 남남이다.(...) 엘리자베스 1세와 에식스 백작이 연인 관계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94]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는 에식스 백작을 처형한 이후로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95] 작중에서 엘리자베스가 먼저 메리에게 모욕을 던지고, 이에 참지 못한 메리 여왕가 엘리자베스 1세한테 "천박한 앤 불린의 딸(Figlia impura di bolena)"라고 언급할 때부터 본격적인 신경전 이중창이 펼쳐진다. [96] 이때 주인공 아인이 테레지아에게 엘리자베스를 소개해줄 때, 영국 최초의 여왕이 되는 사람'이라고 잘못 알려준다. [97] 작중 극이 끝나고 관객들이 다 환호하고 있는데 공연물 감독 관리들이 극장에 난입해 배우들과 작가 셰익스피어에게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너희를 체포한다!"고 하니까 관객석에서 박차고 일어나면서 "짐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지 마시오!"(더빙에서는 "그 이름 닳겠소이다!")라며 일갈한다. 참고로 왜 관객석에서 튀어나왔나면, 일반인 코스프레하고 수행원들이랑 같이 연극 보고 있었다. [98] 당시 수상자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 귀네스 팰트로이며,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99] 사실 펠리페가 메리의 사형을 유도했다는 암시가 극 중 곳곳에서 등장한다. 엘리자베스의 암살 시도에서 쥐어준 총에는 총알이 없었으며, 신하들 역시 메리의 처형 직후에 '펠리페에게 성전의 명분을 쥐어줬다'며 후회하는 장면도 있다.[145] 즉, 메리는 펠리페의 침공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100] 실제 역사에서 월터 롤리 경은 제임스 1세 재위 시기에 반역죄로 목이 잘려 끔살당했다(...) [101] 재미있게도 영화 더 퀸에서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먼 훗날의 다른 여왕을 열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02] 추밀원 회의에서 맘에드는 프랑스 귀족과 혼사를 추진하려던 여왕이 신하들과 논쟁하다 자신들의 입지와 영국의 미래를 위해서 열렬히 반대하니 탁상에 엎드려 오열하기도 한다. [103] 한국과 일본에서는 2019년 초에 개봉했다. [104] 케이트 블란쳇의 또다른 배역인 헬라 뺨치는 포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105] 일본 다카라즈카판 엘리자벳 초연(1996, 설조)때의 엘리자벳이며 98주조 공연에서도 같은 역을 맡은 전 다카 설조ㆍ주조 여역 톱스타로 다카 여톱 중 유일하게 여톱으로서 재임기간이 길었으며 무대계에 적극 지원비를 댔던 행적을 포함하여 다카라즈카의 여제(女帝)라 불리기도 했다. 또한 황족 분가인 다이고(醍醐)가문 출신으로 본명은 다이고 마리코(醍醐まりこ). 이 재력때문에 일본내에서는 다카라즈카에 입단한 시절부터 토호 뮤지컬계같은 외부에서도 엄청난 지원을 받고있고, 티켓파워도 엄청 난것으로도 유명한 일본 뮤지컬계의 '여제(女帝)' 혹은 ' 오고쇼(大御所)' 위치급의 여역 톱스타 젠느 출신자이다. 거기 더해서 1996년 다카라즈카 설조 공연과 1998년 다카라즈카 주조 공연에 이어 2015년 신(新)무대판 토호 엘리자벳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을 정도로 일본의 엘리자벳 대표 배우로 불린다. 그러나, 서양의 뮤지컬팬 입장에서는 하나후사 마리가 다카라즈카 시절부터 토호 뮤지컬에서도 재력을 이유로 지나치게 지원받고 있다는 것과 오디션 없이 특정 배역에 캐스트 될 수 있다는 위치라는 것에 대한 논란 및 모든 배역에 과도한 비극성과 가련함만을 강조한 연기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있으며, 이런 이유로 인해 레이디 베스는 히라노 아야,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사모토 레나, 엘리자벳은 마나키 레이카를 더 높게 쳐주는 경우가 많다. [106] 스즈미야 하루히의 하루히 성우이기도 하는 그 히라노 아야 맞다. 히라노 아야가 뮤지컬 배우로 데뷔한 것은 2011년 7월 아카사카 ACT 시어터 극장에서 상연한 폭풍의 언덕의 히로인 캐서린역부터이고, 2013년 레 미제라블 에포닌역으로 일본 대형 뮤지컬 극장인 제극무대에 데뷔했다. [107] 2023년 9월 30일부터 발생한  다카라즈카 내부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은폐를 시도 할 회의를 진행하려했다는 것과 다카라즈카 감독 및 일본 뮤지컬계 연출자로서도 갑질건이 보도 되고있어 논란 점화중인 상태의 일본 무대계 유명 감독이기도하다. 한국 EMK판 모차르트! 2016년 공연때 연출감독이 이 사람. [108] 2000년에 초연한 토호판 엘리자벳과 2006년에 초연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도쿄 제국극장에서 초연했다. [109] 하나후사 마리가 베스로 나오는 Flower Version과 히라노 아야가 베스를 연기하는 Sun Version으로 발매했으며 양쪽 모두 토호몰에서 2014년 초연 하일라이트 음반과 함께 구입이 가능하다. # [110] 스위스 잔트 갈렌 극장에서 2022년 2월부터 4월까지 상연했다. 현재로서 레이디 베스 첫 해외 라이센스 중 유일한 버전이며 이 때의 실황 음반이 출시되었다. [111] 본 뮤지컬에서는 메리 튜더로 불리며, 극단 시키(四季)출신 요시자와 리에와 다카라즈카 설조 남역 출신 미라이 유키(애칭:하마코)가 W캐스트 되어 각기 다른 메리 1세를 연기했다. 2017년 재연때도 동일하게 출연. [112] 실존인물로 당시 당연했던 잉글랜드 교육계의 체벌을 부정했으며, 여성 교육에 대한 이해 등, 엘리자베스 1세의 정신적 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113] 실존인물이며 엘리자베스 1세의 양육자이자 첫 번째로 친한 인물이기도 했다. 본 뮤지컬에서는 히무라 켄신의 성우로 유명한 전 다카라즈카 월조 톱스타 남역출신인 스즈카제 마요가 맡았다. [114]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모티브로 창작 된 가공인물. 배우는 전 모닝구 무스메 출신 아베 나츠미의 남편으로 유명한 야마자키 이쿠사부로 테니뮤 출신 카토 카즈키가 W캐스트로 출연했으며 2017년 재연때도 재출연했다. 여기서 야마자키 이쿠사부로는 2010년 토호판 모차르트!에서 르베이 뮤지컬과 인연을 쌓았고, 2015년 신무대 버전으로 올려진 토호판 엘리자벳에서 2019년까지 황후 암살자이자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를 연기하다가 2022년 10월에 엘리자벳을 뒤쫓는 토트(죽음)역을 맡아 전 세계 유래에도 없는 루케니에서 토트역으로 전환 된 기록을 세웠으며 이노우에 요시오와 함께 실베스터 르베이가 인정하는 일본 뮤지컬 배우 중 한명이다. [115] 이 뒤에 연출이 참 애처로운데 카탈리나가 버림받자마자, 딸 메리와 생이별까지 겪는 것도 나온다. 비록 묵역을 담당하는 앙상블과 아역이지만, 실제역사 이야기까지 생각하면 처절하다. [116] 이복언니인 메리와 마찬가지로 딸이란 이유로 부친에게 홀대받았지만,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의 교육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6살 때부터 로저 애스컴을 비롯한 당대 최고 학자들에게 교육받았다. 외국어는 물론, 철학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공부하며 내공을 쌓았는데, 이역시 헨리8세가 지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뮤지컬에서 베스가 헨리 8세에게 프로테스탄트 성서를 받은 것도 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17] 뮤지컬에선 안 나오지만, 메리 1세의 즉위 전까진 많은 일들이 있었다. 헨리 8세의 유일한 아들이자 메리 1세와 베스의 이복남동생 에드워드 6세의 즉위와 요절, 제인 그레이의 처형 등. [118] 실존인물 이다. 배우는 초연과 재연 모두 토호판 엘리자벳 구판무대 시절때 프란츠, 토호판 마리 앙투아네트 초연 루이 16세, 다윈 영의 악의 기원 토호 라이센스판에서 러너 영을 연기했던 이시카와 젠(石川禅). 실제로 스티븐 가드너 주교는 메리 1세의 측근이었으며 잉글랜드의 가톨릭화를 추진했고, 공공연히 "엘리자베스를 죽여야 된다"고 선동했던 인물이다. [119] "ひどいわ!"라고 소리치는데 "ひどい(히도이)"는 "너무하다"라는 뜻으로 대부분 번역되지만 "지독하다"와 "잔인하다"라는 뜻도 있으며, 작중 상황에서는 "무례하다"라고 외친것에 가깝다. 따라서 의역이더라도 "무례하다"라고 번역해도 적절한 편. [120] 실제 엘리자베스 1세가 뒤끝없는 면모를 보였다는 것을 잘 반영한 부분이며 특히 서양 쪽에서는 히라노 아야가 이를 설득있게 살렸다고 호평했던 장면 중 하나이다. [121] 이때, 로빈이 베스가 그냥 부잣집 아가씨가 아니란 것과 그 헨리 8세의 딸 '레이디 엘리자베스'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이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온갖 생쇼했다는 느낌으로 친구 3인방과 물러가는데, 특히 카토 카즈키가 연기한 로빈은 놀랄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멍해진 느낌의 표정을 보여주는 게 압권이다. 이는 2017년 재연 원반에서 확인할 수 있다. [122] 실제로 스티븐 가드너 주교는 만년에 심장이 약했다고 한다. 2막에서 스티븐 가드너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를 생각하면 일종의 복선. [123] 실제 역사의 메리 1세가 계모인 앤 불린을 매우 증오했지만, 이복 여동생 베스에 대해선 애증의 대상으로 여겼음을 잘 반영한 장면이다. [124] 가정교사 로저 애스컴과 보육자 캣 애슐리를 가리킨다. [125] 가공인물이자 음유시인 로빈을 말한다. [126] 사실은 애증에 가깝지만, 여기서 비다카라즈카 여배우 요시지와 리에가 연기한 메리와 다카라즈카 설조 남역출신 미라이 유키가 연기한 메리를 보면 베스를 대한 태도가 다르다. 요시자와 리에는 고증과 거의 가까운 모습과 분위기로 등장하며 이복여동생 베스에 대한 태도를 애증으로 표현한 반면, 미라이 유키가 연기한 메리는 첫 등장부터 블러디 메리의 인상을 풍기면서 베스를 대놓고 혐오하는 쪽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다. 고증을 생각하면 전자인 요시자와 리에가 표현한 메리 1세쪽이 더 적절한 쪽이다. [127] 여왕의 자리와 그에 대한 의무와 군주로서 국가의 대한 책임. [128] 사랑하는 사람과 어디론가 떠나면서 평범한 여인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129] 사진은 프롤로그에서 로저 애스컴의 설명 중 앤 불린이 죄목을 받고 사형되었다는 것을 연출하는 장면이다. [130] 사진 가운데에 베스는 히라노 아야다. [131] 프롤로그에서도 엘리자베스의 가정 교사 로저 애스컴의 설명에서 앤 불린이 누명을 받아가며 결혼 무효화 및 사형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심지어 연출로도 보여준다. 본 뮤지컬에서 앤 불린을 맡은 배우는 다카라즈카 주조 여역 출신 카즈네 미오(和音美桜), 베스의 가정교사 로져 애스컴은 2014년 초연 기준으로 극단 시키 출신 이시마루 칸지(石丸幹二)와 야마구치 유이치로(山口祐一郎) 여기서 야마구치 유이치로는 대한민국에서 부장토트로 알려진 그 사람 맞다. 그리고, 이시마루 칸지도 2010년과 2012 토호판 엘리자벳의 토트를 맡아서 토트(죽음)였던 두 배우가 엘리자베스의 가정교사가 되는 어마무시한 필모를 기록하게 되었다. [132] 작중 이복언니가 보여준 앤 불린의 초상화를 보며 울분을 터트려가면서 "어째서...왜!!! 왜 당신같은 여자가 나의 '어머니'인거야!!?? 당신 때문에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해!!? 난 왕의 딸인데...!!!!!!! 이 요부! 마녀!!!!!"라거나 앤 불린의 영혼을 보고 "지옥으로 떨어져!!"라고 저주하기까지한다. [133] 하나후사 마리가 연기한 베스의 캐릭터상이 가련한 아가씨 타입같아서 오인받기 쉽지만, 실제 르베이가 지향하는 쪽은 히라노 아야가 표현한 베스처럼 당차고 강단있는 여성상이다. 이는 2022년 스위스판에서 타이틀롤을 연기한 안나 랭너(Anna Langner)가 연기했던 실황음반을 들어봐도 확인 할 수 있다. # # 베스뿐만이 아니라 엘리자벳 모차르트!의 콘스탄체,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리와 마그리드도 해당되며 애초에 르베이는 엘리자벳부터 자신이 제작한 모든 뮤지컬의 여성캐릭터를 "절대로 프린세스처럼 표현하지 말고, 단 하나의 인간처럼 표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꼭 할 정도이다. [134] 이 가사에서는 이복언니인 메리 1세를 말한다. [135] 여담이지만, 엘리자베스 1세와 뮤지컬 엘리자벳의 주인공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황후 둘다 영어권 표기가 "엘리자베스(Elizabeth)"이며 이탈리아어로 "엘리자베타(Elisabetta)"이고, 히브리어로 "엘리셰바(אלישבע)"이며 독일어 표기로는 "엘리자베트(Elisabeth)"이다. 엘리자베스 항목의 인명부분을 참고. 이로인해 하나후사 마리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인물을 두명이나 연기했다는 평이 있으며, 모두 왕족에다 유명인물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136] 동시에 르베이 역시 하나후사 마리가 표현한 "사랑스러운 공주 베스"와 일본판 엘리자벳 기준으로 만든 "우아함과 비련의 황후 씨씨" 캐릭터상도 인정하게 되었다. 2015년 신연출ㆍ무대판 토호판 엘리자벳부터 다카라즈카 여역 출신자가 씨씨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르베이가 일본까지 방문하며 직접 토호판 엘리자벳을 관극하면서 토호판 엘리자벳 초연때 이치로 마키를 제외한 다카라즈카 남역(男役) 출신자의 씨씨를 보고 크게 만족한 쪽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37] 물론, 2015년과 2016년때 토호판 엘리자벳 신무대판 공연을 보러갔을때도 하나후사 마리가 연기한 씨씨에 대해선 나름 흡족했던것과는 달리 더블캐스트인 란노 하나에 대해선 당시 토트(죽음)를 연기하던 시로타 유와 함께 굉장히 심기불편한 얼굴을 보였다는 목격담이 있는데, 이는 란노 하나가 엘리자벳을 맡을때 실력이 굉장히 죽을 쑤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당시 란노 하나의 씨씨를 보고 트라우마라는 혹평이 상당수 나올정도. 이것때문에 르베이가 2018년 마나키 레이카의 퇴단공연을 이후로 당분간 다카라즈카판 엘리자벳의 상연허가도 주지 않고있다. 거기다 다카라즈카를 제외한 일본 뮤지컬 팬들에게 "초연때부터 이어져 온 다카라즈카 묶음(宝塚縛り)캐스트 그만둬라!!"라는 비판도 만만찮게 나오기도 했으며, 란노같은 경우 다카라즈카 젠느시절부터 안무 외엔 특별한 실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혜 받듯이 다카라즈카 화조 여톱이 된 것을 포함하여, 토호 뮤지컬 및 제국극장 무대에 스카웃 된 것에도 지적이 엄청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토호판 엘리자벳의 타이틀롤 캐스트 선정 논란 항목을 참조. 결국 란노 하나는 2016년 토호판 엘리자벳을 끝으로 그만두고, 뮤지컬계에서 강판당했다. 동시에 토트역을 맡고있던 시로타 유도 코이케 슈이치로 감독과의 토트 캐릭터 디자인과 해석과 움직임 관련 마찰마저 일으켜 2016 토호 엘리자벳 공연에서 완전 물러났다. 다행이다. 매우 트라우마라는 평이 상당했던 페어였으니. 대신, 란노 하나는 일본 무용쪽으로 진로를 다시 잡아 안무에서는 호평받고 있으니 비로소 자신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셈이 되었으나, 최근 다시 뮤지컬계에서 히로인역으로 자주 캐스트 되고 있어서 또 논란을 불지피는 중. [138] 다카라즈카 가극단이나 극단 사계(시키, 四季)에 입단하고 거기서부터 활약해온 배우들을 말한다. 특히, 일본 뮤지컬이나 미디어계에서는 여성배우가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이면 대우가 남다른 것으로 유명하며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특혜되듯이 캐스트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문에 토호 레미제라블의 팡틴이나 미스사이공의 킴이나 엘렌 역 오디션을 필수로 봐야 하는 작품에 참여한 젠느 출신자는 거의 없으며, 팡틴역에 참여한 젠느 출신자 역시 굉장히 극소수이다. [139] 특히 극도의 다카라즈카 광신도들과 뮤지컬을 연극성이나 분위기로만 보는 극보수적인 이들에게 성우시절의 필모를 빌미로 억지로 까임을 받았다. 주로 "소시민ㆍ잡초계가 기품을 요구하는 여왕 역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비하에 가까운 평이 있다던지. 이러한 비평은 커튼콜에서의 동작을 보고도 비하하는 경우도 많았다. [140] 레이디 베스의 넘버가 아닌 모차르트!의 콘스탄체가 부른 넘버를 불렀냐면 히라노 아야가 오디션을 봤을 당시 레이디 베스의 넘버곡이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4 토호판 모차르트의 콘스탄체로 먼저 배정되었고, 그 다음 레이디 베스의 타이틀롤로 배역이 정해지게 된 것이다. 거기다 오디션으로 보고 합격해서 레이디 베스역에 캐스트 된 것은 히라노 아야 뿐이었다. 반면, 더블캐스트인 하나후사 마리는 연출감독 코이케 슈이치로가 제극에 데려와 르베이와 쿤체에게 재소개하여 바로 캐스트 되었다. 이유인즉슨, 하나후사 마리가 다카라젠느라는 것과 일본 황족의 분가에서 태어난 다이고 가문의 딸이라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캐스트 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141] 대표적인 예로 미야노 마모루, 박로미를 꼽을 수 있다. 이중 박로미는 2019년 토호 레미제라블 공연때 마담 테나르디에 역으로 출연했다. [142] 이노우에 요시오 야마자키 이쿠사부로 카토 카즈키 역시 성우일에 참여한게 2014년 이후이다. [143] 다만, 히라노 아야가 토호판 엘리자벳의 타이틀롤역은 맡을 수 없었는데 이는 비엔나의 VBW쪽에서 전 세계 엘리자벳 프로덕션에다 규정한 타이틀롤역의 키 제한 때문이다. 비엔나에서는 172~175cm로 규정되어 있으며, 일본판은 다카라즈카판 토호판 모두 163cm에서 170cm의 여배우가 맡아야 하며, 헝가리판에서는 고증대로 172cm의 여배우만이 VBW에서 인정을 받아 씨씨를 연기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때문에 엘리자벳역은 신장묶음(身長縛り)이 심한 배역으로도 꼽을 정도. 안타깝게도 히라노 아야의 키는 157cm로 일본 여성의 평균 신장이지만, 신장제한때문에 엘리자벳 타이틀롤에 배정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 신장 제한은 비엔나 정부와 VBW에게 권한이 있으며 원작자인 르베이에겐 권한이 없다. 이유는 불명이나 엘리자벳을 포함한 자신이 제작하려는 뮤지컬 작품에 출연할 여성캐스트의 지나친 제약을 주는 것 때문에 실베스터 르베이가 더이상 비엔나에서 뮤지컬을 작곡하지 않고있으며 2006년 마리 앙투아네트 이후 일본 및 대한민국같은 아시아권에서 뮤지컬을 제작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르베이는 비엔나와 한국보다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헝가리 출신 작곡가다. [144] 키노시타 하루카 언급하길 상황의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선택한 베스에 큰 인상을 받아 자신 역시 망설임 없이 뮤지컬 배우의 길을 선택했으며, '전일본가창력선수권 가창왕'이라는 프로그램을 계기로 트라이스톤 사장과 다카라즈카 소속 무대감독 코이케 슈이치로에게 발탁되었고, 모차르트의 콘스탄체와 왕가의 문장 21년 공연때 히로인 캐롤 역으로 실베스터 르베이에게 인정받아 베토벤의 베티나역으로 캐스트 되어 토니역의 하나후사 마리와 시누이 관계로 공연하게 되었다. 덧붙여서 키노시타 하루카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로 꼽은게 프랑스 뮤지컬 우메다 라이센스판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알라딘 실사판의 쟈스민, 뮤지컬 팬텀의 크리스틴, 아나스타샤, 베토벤의 베티나와 함께 좋아하는 캐릭터가 레이디 베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