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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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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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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est Britain Monarch
※ 2012년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여론조사업체 ICM에 의뢰해 영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TOP 5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 헨리 8세 헨리 5세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제2대 국왕
헨리 8세
Henry VIII
파일:Workshop_of_Hans_Holbein_the_Younger_-_Portrait_of_Henry_VIII_-_Google_Art_Project.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헨리 8세
(Henry VIII)
출생 1491년 6월 28일
잉글랜드 왕국 켄트 그리니치 그리니치 궁전[1]
사망 1547년 1월 28일 (향년 55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화이트홀 궁전[2]
재위기간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왕
1509년 4월 22일 ~ 1547년 1월 28일
서명 파일:헨리 8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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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헨리 튜더
(Henry Tudor)
신장 188cm
배우자 아라곤의 카탈리나 (1509년 결혼 / 1533년 무효화)
앤 불린 (1533년 결혼 / 1536년 무효화)
제인 시모어 (1536년 결혼 / 1537년 사망)
클레베의 앤 (1540년 결혼 / 1540년 무효화)
캐서린 하워드 (1540년 결혼 / 1542년 사망)
캐서린 파 (1543년 결혼)
자녀 메리 1세, 헨리 피츠로이(사생아),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
아버지 헨리 7세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
형제자매 아서, 마거릿, 엘리자베스, 메리, 에드먼드
장례식 1547년 2월 16일
버크셔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종교 가톨릭 잉글랜드 국교회[3] }}}}}}}}}

1. 개요2. 생애
2.1. 초기 통치2.2. 이혼과 잉글랜드 종교 개혁
2.2.1. <수장령>2.2.2. 수도원 통폐합2.2.3. 반발과 반란2.2.4. 수도원 철폐
2.3. 후반 통치
3. 평가4. 기타5. 가족
5.1. 조상5.2. 왕비들5.3. 자녀
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절대군주이자 잉글랜드 해군의 아버지이다. 또한 두 번의 대승으로 북쪽의 숙적 스코틀랜드 왕국을 제압함으로서 훗날 브리튼 섬 통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잉글랜드 국교회를 성립시켜 이후 잉글랜드 역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단순히 호색한이나 난봉꾼 정도로 기억해서는 절대 안 될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 잉글랜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귀족들을 거의 절멸시킨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형 웨일스 공 아서의 죽음으로 왕좌에 올랐고, 적자녀 셋은 모두 왕이 되었으며,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간 문제적 인물이다.

장미 전쟁으로 완전히 도륙난 플랜태저넷 랭커스터 왕조 요크 왕조의 피를 모두 이어 받았다.[4] 스페인 트라스타마라 왕실 출신의 아라곤의 카탈리나과의 이혼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잉글랜드를 독립시켜, 잉글랜드 국교회[5]를 설립함으로써, 이후 잉글랜드는 물론 유럽 기독교권의 판도 자체에도 무시못할 영향력을 미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잉글랜드 종교개혁, 그와 관련해 국내외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 그리고 6번의 결혼 생활 중 2명의 왕비가 본인에 의해 처형당한 요란하기 그지없는 사생활 등, 재위 기간 (1509년 ~ 1547년) 동안 여러모로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가득하여 헨리 8세는 오늘날에도 곧잘 회자되고 여러 창작 매체 등에서 다뤄질 정도로 이래저래 인기가 많은 왕이다. "허세왕 할"(Bluff king HAL), "건장한 왕 해리"(Burly king Harry)[6]라는 애증 섞인 별명이 있을 정도이다.

2. 생애

2.1. 초기 통치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왕위 계승자인 형 아서가 15세에 요절하여 새로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509년 아버지 헨리 7세가 승하하면서 18세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전임인 헨리 7세가 가혹한 징세로 인기를 많이 깎아 먹었던 탓에 젊은 국왕 헨리 8세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헨리 8세도 그런 민심에 부응하여 헨리 7세 시절 악명이 높았던 징세관 에드먼드 더들리와 리처드 엠프슨을 체포하여, 런던 시내에 조리돌림을 한 후 처형하여 인기가 상승했다.

젊은 시절부터 사냥, 마상 창시합, 춤, 예능 같은 야외활동을 좋아했고, 심지어 정무를 보는 것보다 더 즐겼다. 여색도 엄청 밝혀 체념한 캐서린의 묵인하에 문란한 성생활을 일삼았다. 마상 창시합 등 스포츠나 무예에서 연승한 건 참여한 사람들이 왕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일부러 져준 것이었고, 젊어서는 놀기 바빠서 실제 정사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에게 일임했다. 그러니 치세 초반의 업적은 상당수가 울지 추기경의 공인 셈이다.

동시에 당시 왕족들 중에서 공부도 상당히 잘해 라틴어 스페인어, 프랑스어가 유창했고, 당대의 석학들과 천문학과 신학을 토론했다고 하며, 최고의 지성이었던 네덜란드 에라스뮈스조차 칭찬할 정도였다.

헨리 8세의 초기 치세때 이탈리아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교황 율리오 2세 교황령을 회복하기[7] 위해 전쟁을 벌였고, 풍요로운 이탈리아 내의 권리를 서로 주장한 프랑스 합스부르크가 격렬하게 이탈리아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때 헨리 8세는 교황에 맞선[8] 발루아 왕조 프랑스에게
"모든 기독교인 아버지이며, 신성하신 그 분에게 감히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
고 경고했다. 당연히 프랑스는 가뿐히 씹었다.

이에 헨리 8세는 교황청 및 합스부르크 왕조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막시밀리안 1세 치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통일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개막시킨 트라스타마라 왕가와 결혼을 통한 동맹중이었는데, 스페인은 프랑스와 단독강화하고, 언제든지 잉글랜드의 뒤통수를 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쳐 프랑스의 대서양 함대 기지인 브레스트에 함대를 파견하여 선제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헨리 8세가 직접 대륙으로 건너가 친정에 나서 막시밀리안 1세와 합류했는데 그의 꼬임에 넘어가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합해 프랑스와의 일전에서 선봉으로 나서 운좋게 이겼다. 그러나 전쟁 자체는 별 성과가 없었고, 잉글랜드의 재정만 엄청나게 탕진했다.

이 시절의 헨리 8세는 오히려 종교개혁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노선을 걸었다. 7성사를 옹호하고,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공격하는 내용이 골자인 《Assertio Septem Sacramentorum》의 출판과 함께 교황청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 라는 어마무시한 칭호를 받은 것이 이 시절의 이야기이다.

2.1.1. 플로든 전투

대륙에서의 원정은 실패했으나 국내에서 그 실책을 어느 정도 만회했다. 같은 브리튼 섬 국가인 켈트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국왕 제임스 4세는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와 결혼하여 헨리 8세의 매형이 되었지만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편을 들어서 잉글랜드와 전쟁 중이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국경지대인 플로든 평원에서 스코틀랜드군과의 혈전 끝에 매형이었던 제임스 4세와 스코틀랜드 귀족 상당수를 포함한 1만 명을 전사시키고 스코틀랜드군을 거의 전멸시키며, 수도 에든버러까지 약탈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 플로든 전투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9] 스코틀랜드 국내에서는 잉글랜드와의 국력 격차를 실감하며 ' 잉글랜드 적대-프랑스 우호' 정책에서 전환한 대(對) 잉글랜드 주화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정통성 위협에 시달려 헨리 8세가 플랜태저넷 혈통들을 많이 처형했다는 말이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을 오인한 면이 있다. 사실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들은 30년 동안의 장미 전쟁으로 거의 도륙나있었던 상태였기에, 이미 아버지대인 헨리 7세 때부터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혈통은 요크 왕조 말기인 리처드 3세 때, 10여 명 남은 부계 혈통 중 8명을 죽였고, 남은 서넛 명은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 때 처형당하거나 외국으로 도망갔다. 사실 랭커스터 왕조 요크 왕조 모두 시조인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의 작위명에서[10] 왕조의 이름이 유래됐을 뿐, 본가는 모두 플랜태저넷 왕조였으며 실제 성씨도 플랜태저넷이었다. 후대에 들어서면서 랭커스터와 요크로 구분하는 거지, 서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플랜태저넷이라고 싸운 것이 바로 장미 전쟁이었다.

이러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전은 에드워드 3세의 장손,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인 리처드 2세가 사촌 볼링브룩의 헨리에 의해[11] 폐위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폐위된 리처드 2세가 자식없이 죽으면서 플랜태저넷의 본가는 절손되었고, 이후 볼링브룩의 헨리가 헨리 4세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조를 개창했으며, 이후로도 헨리 4세의 아들인 헨리 5세와 손자인 헨리 6세가 연이어 즉위하면서 랭커스터 왕조가 계속 이어질 듯 했다. 하지만 제3대 요크 공작인 요크의 리처드가 정신병이 발병한 헨리 6세의 계속된 실정에 반발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며[12] 왕위를 요구하면서 장미 전쟁이 시작되었다.

요크의 리처드는 왕이 되기도 전에 전투에서 패배해 처형당했지만, 그의 장남 에드워드 4세가 다시 세력을 결집시켜 요크 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정신병으로 폐위된 헨리 6세의 외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전투 도중에 사망하고, 헨리 6세 역시 유폐되어 있다가 암살이 유력한 죽음을 맞으면서 랭커스터 본가의 계열도 대가 끊겼다. 이리하여 에드워드 4세의 치세가 이어지면서 요크 왕조가 번성할 듯 보였다. 숙청당한 랭커스터 왕조의 지지자들은 헨리 6세의 이부동생 에드먼드 튜더와 플랜태저넷(랭커스터)의 몇 안남은 후손 마거릿 보퍼트[13]의 아들 헨리 튜더를 지목했다. 마거릿 보퍼트는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로, 헨리 튜더는 모계로 에드워드 3세의 현손이며 초대 랭커스터 공작의 고손자가 되었다. 사실 랭커스터와 요크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라 튜더도 까마득하게 먼 방계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 덕에 랭커스터 가문이 절손되자 꿩 대신 닭 격으로 추대된 것이지만, 랭커스터 지지자들은 헨리 튜더를 마지막 희망으로 삼고 왕위에 추대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요크 왕조마저 점차 자기들끼리 내분으로 망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4세의 둘째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셋째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 4세 사후 그의 아들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리처드 3세로 즉위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 찬탈에 요크 왕조의 지지자들마저 분열하면서 헨리 튜더를 지지하고 이후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전사시킨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며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미약한 정통성을 보충했는데 이 두 사람의 아들이 바로 헨리 8세였다.

헨리 8세는 완전히 명맥이 끊긴 랭커스터 왕조의 혈통을 친할머니 마거릿 보퍼트에게서 물려받았고 요크 왕조의 혈통으로 봐도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아들이라 에드워드 4세의 외손자였다. 때문에 요크 왕조의 잔당들이 반란의 수괴로 내세운 워릭 백작(클라렌스 공작의 아들)과 존 드라폴[14]보다 정통성에서 더 앞서 있었다. 게다가 워릭 백작은 헨리 7세 때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성인이 돼서 탈옥하고 간수들을 매수하려다 처형당하고, 존 드라폴은 반란군을 이끌다가 전사해서 헨리 8세의 정통성을 위협할 만한 인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클라렌스 공작 조지 또한 형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하면서 덩달아 왕족으로 격상된 것이지 실제 계보는 에드워드 3세의 고손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미약한 건 매한가지였다. 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한 클라렌스 공작의 후손이나 에드워드 4세의 누이의 아들보다,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아들인 헨리 8세가 지닌 요크 혈통이 더 우선이었다. 그나마도 헨리 7세 시기에 요크 왕조의 잔당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남은 사람들마저 거의 대부분 헨리 8세가 숙청하면서 기존의 튜더 가문보다 까마득하게 먼 방계로 어설프게나마 왕조의 피를 이은 가문 몇개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헨리 8세의 숙청은 혈통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왕가 혈통이 섞이지 않은 전통 대귀족들도 대거 숙청했다. 그 결과 다음 다음 대인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잉글랜드의 전통 귀족 가문은 남작까지 합쳐야 수십 개 가문에 불과했고, 공작 가문은 장자 서리 백작이 처형당하고 손자도 훗날 처형당하는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 하나만 남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대륙에서는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가 즉위했다. 헨리 8세는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을 통치하며 프랑스와 대치중이던 젊은 황제 카를 5세를 지지했으며 여전히 프랑스 영토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만, 교황 레오 10세와 토마스 울지 추기경의 설득하에 일단 런던에서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후에 프랑수아 1세를 초청하여 칼레에서 연회를 열었다. 한편으로는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전쟁의 분수령이었던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를 캐바르고 프랑수아 1세를 사로잡는 등, 군사력이 날로 강해질 무렵 헨리 8세는 울지 추기경의 주도하에 모어 성에서 프랑스와 강화 조약을 맺었다.[15]

2.2. 이혼과 잉글랜드 종교 개혁

헨리 8세의 이혼과 종교개혁의 원인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16] 마침 헨리 8세 치세에는 종교개혁 열풍이 대륙에서 불고 있었는데, 헨리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시기 발표한 논문에 대한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기도 하는 등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며 교황의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다.[17] 이 공로로 1521년 8월에 헨리 8세는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Fidei Defensor)[18]라는 거창한 칭호를 받았다.[19]

훗날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국교회를 세웠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헨리 8세의 <수장령> 선포와 일련의 종교개혁 조치는 사실 교리, 교회 조직, 7성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2.2.1. <수장령>

헨리 8세의 <수장령>을 비롯한 일련의 조치는 잉글랜드의 왕과 법률 기관이 '교회의 자산 운용을 감찰할 권리와 성직자에 대한 형사 재판 권한이 있음'을 선언한 것뿐이었다.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교황)는 로마의 주교일 뿐, 관할권을 벗어난 초법적이며 불법적인 통치를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더 이상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에 불과했다. 교회의 방향이나 정체성과 관련된 신학적, 전례적, 교리적 논쟁은 계속해서 벌어졌다. 자세한 것은 성공회 문서 참고.

헨리 8세는 자기 형 아서 튜더의 약혼자였던 아라곤의 카탈리나과 결혼했다.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 아서가 결혼한 지 20주만에 병에 걸려 죽었지만 계속 잉글랜드에 남아있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구두쇠였던 시아버지 헨리 7세가 캐서린의 지참금 20만 두카토를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실에 반환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차남 헨리가 형 아서의 약혼자 캐서린과 결혼하는 것은 당시 윤리상으로도 문제가 있었는데, 교회법상으론 근친혼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럽 왕실들은 촌수로는 거의 죄다 근친혼이었지만 교황청에선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교 군주 사이 결합을 대의로 인정했기에 이번에도 교황의 관면이 뒤따랐다. 헨리 8세는 즉위한 지 2개월 만에 교황 율리오 2세에게 관면을 받아 결혼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줄줄히 요절이나 사산이 되었고, 딸인 메리 공주만 살아남고 캐서린이 더 이상 아이를 낳기 어려운 나이가 되자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메리 공주를 당시 풍속대로 외국 왕가에게 시집보내면 하나 남은 계승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셈이었고,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헨리 8세가 죽을 경우, 헨리 7세 치세 이전 근 30여 년간 벌어졌던 왕위 계승 다툼인 장미전쟁이 재현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단순히 아들을 보고 싶은 것뿐이었다면 정부를 두면 될 일이고, 실제로 1519년 정부(첩) 엘리자베스 블런트에게서 헨리 피츠로이라는 남자 사생아를 얻어 공작 작위 2개와 백작 작위 1개를 퍼주었다. 그러나 사생아는 사생아일 뿐 왕위 계승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고, 헨리 피츠로이도 요절했다.

중세 시절, 자식이 없어서 왕조가 끊기거나 아들 없이 딸만 있어서 가문의 영지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계 계승은 남자 계승자가 없을 경우 예외적으로 두는 수단이었고, 그나마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일단 대륙의 프랑크 왕국 계통의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은 < 살리카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남계가 절손되면 상위 군주에게 영지가 몰수되거나 아주 먼 친척에게 새로 분봉되었다. 프랑크 왕국 계통이 아닌 유럽 국가에서도, 딸에게 무사히 물려주는 경우보다 후계자가 어리거나 여성인 경우 무력으로 찬탈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와 아라곤과 같은 동군연합을 예로 들자면,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 통치자로 명목상 인정받긴 했지만 어떠한 권력도 누리지 못했다. 여기에 페르난도가 이사벨 1세 사후에 재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요절하여 외손자인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에게 계승권이 넘어간 것일뿐 당시 풍속에선 여성 승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만 봐도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결혼을 통해 러요시 2세 전사 후 정당한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으나, 이 경우에도 동부 에르데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헝가리 귀족들이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던데다가 오스만 제국의 간섭으로 인해 서부 일부만 가져올 수 있었고, 보헤미아 왕국에는 여러 이권과 자치권을 퍼줘야 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치한 발루아-부르고뉴 공작가만 보더라도 부르고뉴 전쟁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처참하게 전사하고,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만 남은 상태에서 여계 승계를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근거로 프랑스 왕이 상위 군주의 권한으로 영지 몰수를 시도하자 당시 부르고뉴 궁정에서 합스부르크 막시밀리안 1세에게 SOS를 쳐서 무력으로 저지한 것이지, 결혼으로 온전히 왕국이 상속되는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았다.[20] 더군다나 잉글랜드는 역사상 헨리 1세(노르만 왕조 제3대 왕)가 자신의 외동딸인 마틸다(잉글랜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음에도 여계 승계에 부정적인 신하들 덕에 쫓겨났고, 그 이후로도 당시 기준으로는 여왕이 없었다.[21]

30여 년에 걸쳐 왕위 계승을 두고 장미전쟁을 벌여 피를 흘린 역사적 경험 때문에, 헨리 8세의 아래에 있는 신하들도 하나 남은 왕위 계승권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사태를 극도로 염려했다. 메리 1세 같은 여자 임금은 남편에게 강력히 영향을 받는다고[22]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헨리 8세가 새 장가 들기에 찬성했다. 보통은 혼인무효를 교회에서 승인받으면 기존 자식들에게는 계승권을 인정하고 기존 왕비에게는 막대한 재산을 하사해서 좋게 내보내거나, 쫓아내더라도 수녀원으로 유폐하고 끝냈다. 헨리 8세처럼 무일푼으로 쫓아내거나 목을 쳐버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잉글랜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이미 국왕의 나라가 아니라 잉글랜드 자체로 국가 정체성이 뚜렷해진 상황이라, 외국인 왕이 들어앉아서 잉글랜드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폄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친정인 스페인 왕실[23]과 메리 공주의 지지 기반은 종교적으로 가톨릭 세력과 외세인 합스부르크 제국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메리에게 왕위가 넘어갈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과 결혼할 확률이 높았으며(실제로 그러했고) 그렇게 된다면 잉글랜드는 국익과 무관하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외정책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게 되는 형편이 되기에 잉글랜드 내부에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결국 헨리 8세는 중세 군주들이 이혼을 원할 때처럼 교황청에 혼인무효[24]를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청에선 헨리 8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명분으론 '전임 교황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친정 조카가 스페인 국왕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였기 때문이었다. 황제도 황제지만 이 시기는 사코 디 로마(로마 대약탈), 즉 황제군에 의해 로마가 잿더미가 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막대한 타격을 입으며 쇠락한 상태여서, 로마 교황이 도저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소송전으로 발전하여 헨리 8세는
"캐서린이 전 남편 아서와 부부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와의 결혼은 무효다!"
라고 주장했고, 캐서린은
"나는 아서와 부부관계를 맺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 결혼은 정당한 사유로 무효가 되었으며, 따라서 헨리와의 결혼 역시 적법하다."
라고 주장했다. 《구약성경》의 < 레위기>가 어쨌니 저쨌니 하는 지리한 재판 끝에, 교황청에선 결정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들어 재판을 무기한 연기하거나 로마에 와서 시비를 가리라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이는 합법적으로 이혼이 불가능해졌다는 걸 뜻했다.

1529년 8월, 혼인무효가 무산된 책임을 물어 재상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궁정에서 쫓아내 요크로 돌려보내고[25] 토머스 모어가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혼인무효에 이론적 근거[26]를 제공한 종교개혁 성향의 신하들을 총애하기 시작했는데 마침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망하자 대륙 신학을 공부하고 와서 교황청과의 단절을 주장한 토머스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27] 최후의 시도로 교황청에 영국 대사를 보내봤지만, 이미 클레멘스 7세 사코 디 로마로 카를 5세에게 사로잡혀 산탄젤로 성에 감금된 처지라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시도까지 빗나가자, 1534년 11월. 헨리 8세는 이미 잉글랜드 교회에서 싹튼 종교개혁 성향 성직자 귀족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수장령>(Acts of Supremacy, 首長令)을 선포했다.[28] 그리고 나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후속조치로 <수장령>에 이어 <반역법>(Treason Act)을 제정하여, 잉글랜드 통치자에게서 나온 처분을 외국에 상소함을 반역으로 선언했다. 더불어 이런 권한을 부인하는 것까지 반역으로 선언했다.

잉글랜드 교회 내부의 전통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은 일단 <수장령>에 몇몇 조건을 거는 정도로 반항시도를 하다가, 헨리 8세의 뜻이 워낙 강경했기에 <수장령>을 받아들였다. 이 당시까지도 독실한 가톨릭 성향 교도들은 '임금님이 교황과 적당히 싸우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 강했다. 중세 유럽 군주들도 일시적으로 난리치다가 교황청과 화해하던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 성향의 젠트리 계층은 헨리 8세의 조치를 완전히 환영했다.)

그러나 <수장령>을 죽어라고 거부한 신하들이 둘이나 있었다. 헨리 8세의 심복이자 대법관으로 대륙 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교도 성향의 신하들을 탄압하는데 등용했던 토머스 모어[29]와 존 피셔 주교[30]를 1535년에 처형하고 수도원을 파괴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38년 12월에 헨리 8세를 파문에 처했다.[31]

그런데 신앙의 수호자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 교황님에게 개기지 말라고 말해서 교황청으로부터 칭찬(?)까지 받은 헨리 8세가 왜 이리 갑자기 변하며 여자 하나에 빠져 교황에 뒷통수를 쳤나라는 의문점이 들 수 있다. 당연히 앤 불린보다 아들 낳기 염원이 큰 것이었고, 원래 헨리 8세 이전의 역대 잉글랜드 국왕과 로마 교황와의 사이는 그다지 사이가 원만한 편이 아니었다. 앙주(플랜태저넷) 왕조 시절인 존 왕 치세때도 수도원과 교회를 털고, 성직자들의 수입을 가로챘다가 파문당하기도 했고, 그 아버지인 헨리 2세 시기에는 토마스 베켓을 죽이고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막후 타협을 통해 대부분의 실리, 특히 성직자 처분권을 잉글랜드 왕이 가져갔으며, 에드워드 1세 시절에도 교회와 수도원 재산을 놓고 교황과 한바탕 싸웠다. 아비뇽 교황 시절에는 교황들을 프랑스 카페 왕실의 앞잡이로 생각하여 무시했으며, 백년전쟁 시기에는 실제로 아비뇽으로 대포를 끌고 가서 교황청을 협박해 돈을 뜯기도 했다. 또한 아비뇽-로마 교회의 대분열기에도 역시 대립교황들 사이에서 간을 보면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헨리 8세 또한 교황청에 그다지 고분고분한 편은 아니었다. 헨리 8세는 즉위 초부터 잉글랜드 교회를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했고, 재상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영국 내에서의 '교황청의 사절'로 인정해달라고 계속 주장했으나 번번히 거부당했다. 교황청에서 보기엔 울지를 교황청 사절로 인정하면 사실상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대리인이 되는 것인데, 울지는 헨리 8세의 충실한 신하이니 헨리 8세가 울지를 핑계삼아 잉글랜드 교회를 마음대로 다룰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1516년 라이벌인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교황군을 격파하고 볼로냐 화약을 통해 프랑스 교회에서의 실질적인 권한을 취득하자 고까운 탓도 있었다. 교황청에서 세세한 명분들을 얻은 대신 프랑스 내 9개 대주교 자리를 포함하여, 주교, 수도원장ㆍ수녀원장 등 600여 개 성직 임명권과 교회 수입을 프랑스 국왕에게 양도하는, 사실상 교황청의 완전한 항복에 가까운 조치였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결과인 잉글랜드 국교회(세계성공회의 모태)의 역사는 해당항목 성공회의 잉글랜드 교회의 역사 참조 바람.

2.2.2. 수도원 통폐합

이후 헨리 8세는 1535년 2월에 <수도원폐쇄령>(Act for the Dissolution of the Lesser Monasteries)을 의회에서 승인했다. 해당 법의 내용들을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참조1]
그 와중에 교회니 수도원에서 성혈이 발현되었다니 뭐니 하면서 순례자들을 꼬이던 곳의 비밀이 알고 보니, 모두 닭이나 염소피라는 게 낱낱이 폭로되면서 분노한 농민들까지 수도원을 때려 부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2.2.3. 반발과 반란

수도원의 통폐합이 집행될 무렵,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흉작과 그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여러가지 부작용이 야기되었다. 흉작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은 그나마 종교 행위로 심리적 위안을 얻고 있었는데 이를 방해받는 결과가 되었거나, 특히 환속 수녀들의 경우에는 새출발을 위한 지원금이 모자라는 상황이 생겼다.[38] 게다가 수도원의 통폐합은 오늘날로 치자면 복지 시스템을 대격변 수준으로 갈아엎은 셈이었는데, 본당 단위로 관리되는 새로운 구휼 체계가 1536년도에 의회에서 통과되었다고는 하지만[39] 배고프고 불안한 상황에 그러한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인클로저 운동의 여파도 이러한 불만을 부추기면 부추겼지 잠재우지는 않았다.

한편 수도원의 통폐합 그 자체는 물론이고, <An Act Concerning the Uses and Wills>를 통한 부동산 소득 제한은 기득권의 불만을 야기했다. 또한 여러 교구를 소유하던 주교들은 한 교구만 빼고 수입을 완전히 몰수하며, 기존 교구 수입의 10%를 또 바치라는 법률도 통과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여러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특히 1536년 10월의 은총의 순례로 그 절정을 찍게 되었다. 이때 지도자로 선임된 로버트 애스크(Robert Aske)는 정당성을 위해 나름대로 내부 규율을 엄격히 유지하고, 불만의 대상으로 국왕 헨리 8세 본인을 지목하는 것만은 철저히 막았다.[40] 그러자 헨리 8세도 타협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폰트프랙트 성[41]에서 협상 자리를 만든 다음, 24개의 요구사항을 접수한 뒤 '이번만은 사면해줄 테니 스스로 해산하라'고 명령하면서 애스크의 세력을 해산시켰다.

그런데 행정 처리 속도에 불만을 가진 프랜시스 비고드 경(Sir Francis Bigod)이 세력의 일부를 다시 규합해서 1537년 스카보로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비고드 경의 세력은 요크셔의 베벌리에서 야습을 당해 궤멸되었고 비고드 경, 로버트 애스크를 비롯한 '은총의 순례' 수뇌부들은 모두 반역죄로 검거돼서 사형당했다.

2.2.4. 수도원 철폐

헨리 8세는 뜬금없이 후속 조치로, 1538년에 죽은지 360년이 넘은 토마스 베켓(1118~1170)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모 혐의로 고발해 법정에 출두하도록 30일의 기간을 주었다. 물론 당연히 베켓은 나타날 리가 없었고, 이에 따라 베켓에게 유죄를 선고한 다음 켄터베리 대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을 부수고 유해를 불태운 뒤 무덤을 찾는 순례객들이 바친 막대한 보물을 몰수했다. 이는 헨리 8세가 가톨릭 신앙인이었을 때,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의 영향으로 성유물이나 성해 공경 전통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던 영향도 있었다.

또, 은총의 순례 반란의 진압 이후로는 수도자들이 자발적으로 수도회 자산을 바치고 환속하는 현상도 관찰된다.[참조2] 결국 1539년의 <An Act for the Dissolution of the Greater Monasteries>를 통해, 통폐합된 대형 수도원들마저 모두 국유화되었다.

2.3. 후반 통치

윌리엄 틴들과 마일스 코버데일의 영어 번역본 《성경》이 존 로저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후 재세례파 인사들도 반역죄 혐의로 처형시켰다.[43]

헨리 8세는 중년에 이르러서도 마상 창시합을 하다가 낙마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쳤고, 그로 인해 장애가 생기면서 예전과 달리 야외활동을 마음껏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긴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생활태도가 방종해졌고, 과식을 일삼으면서 고도 비만이 되어 버렸다.[44]

원래 다혈질적이고 충동적인 성미의 소유자였지만 다리를 다치기 전에는 기분이 좋을 때 그나마 너그럽고 호탕한 면모라도 있었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후로는 짜증을 잘 내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왕비를 둘이나 참수시키고 중용했던 관리들의 목까지 베어댔기 때문에, 신하들은 언제 헨리 8세의 심기를 거슬러 목이 날아갈까 두려움에 떨었다.[45] 정서적으로도 굉장히 불안정했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병으로 인해 앓아눕는 일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몸 곳곳에 종기와 수포가 자라 보기에 몹시 흉했으며 악취도 지독했다. 게다가 통풍을 심하게 앓았으며 낙마로 다친 다리의 상처는 크게 악화되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한편 카를 5세 프랑수아 1세가 다시 한 번 싸울 조짐을 보이자 마침 모어 성 조약에 따른 상납금을 받지 못하고 있던 참에, 카를 5세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다시 돌입했지만 여기서도 별 소득이나 이득은 없었다. 심지어 카를 5세가 멋대로 프랑수아 1세와 화해하고 마무리짓자[46] 전비만 잔뜩 탕진하여 헨리 8세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앤 불린 제인 시모어를 거쳐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볼 생각으로, 토마스 크롬웰의 추천 및 주선하에 클레베의 앤과 4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절반은 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데다 절반은 정치적 이유로[47] 크롬웰을 재판도 없이 처형해버렸다. 또한 클레베의 앤과의 결혼도 '첫날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서 무효화시켰다. 하지만 크롬웰은 <수장령>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심지어 재무에서도 독보적으로 유능했던 관료였던지라, 천하의 헨리 8세마저 크롬웰의 처형 후에야 그 공백을 느끼며 뼈저리게 후회했다.[48] 기껏 <수장령>으로 열심히 국유화한 교회 자산을 헐값에 처분하며 전비를 대다가 왕권이 기우는 단초가 본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헨리 8세가 말년에 들인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도 아내라기보다는 영 까다로운 환자가 되어버린 늙은 남편의 실질적인 간병인이었다. 지금에야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미화되기도 해서 드라마틱한 삶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의 재위 말년 즈음에는 튜더 궁정의 모두가 미친 왕이 빨리 죽기만을 기도했다고 한다.

3. 평가


이렇게 적고 보면 헨리 8세가 그냥 정신병자처럼 보이지만, 그 긴 치세 기간 동안 막장스러운 태도로만 일관했다면 잉글랜드 국민들로부터 해리 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나름대로 인망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다. 주변인들과 신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까놓고 말해서 귀족들 일은 알 바 아닌 백성들에게는 호탕하고 강력한 왕으로 여겨졌다.

헨리 8세의 치세는 평가가 많이 갈리지만 잉글랜드가 최초로 열강의 위치에 오른 시기로 통치에선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귀족들보다는 학식으로 무장한 신규 계층을 등용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호평도 받고 있다. 앞서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푸주간 백정의 아들이었고, 토머스 크롬웰은 대장장이의 아들이었으나 고등교육 하나로 재상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헨리 8세는 집안에서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카를 5세와의 연이은 충돌이나 아일랜드 원정을 비롯해,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오랜만에 출현한 대외정책과 외교에 굉장히 적극적인 왕이었다.[49] 위에서는 삽질의 연속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헨리 7세가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즉위하기까지 장미전쟁 요크 가문 출신 왕들의 불안정한 치세를 거치며 플랜태저넷 왕가내의 싸움으로 박터지던 기억이 남아있던 당시 잉글랜드 입장에서 보면, 헨리 8세의 저런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해 잉글랜드 또한 나름대로 국제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열강 대열에 합류했다는 깊은 인상을 받을 만도 했을 것이다. 비록 헨리 8세가 대륙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지만 튜더-스튜어트 왕조 시절의 잉글랜드는 이후에도 유럽 정세에 군사적•경제적으로 계속 관여하며 열강 행세를 해 유럽에서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는데 그 시초는 헨리 8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헨리 8세는 즉위 초부터 선왕 헨리 7세 시절부터 추진[50]되던 해군 증강 정책의 기조를 이어받아 조선 시설을 정비하는 등 해군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는 헨리 8세의 최대 치적으로 꼽힌다. 헨리 8세는 즉위 초 5년 만에 해군의 규모를 선왕 때보다 4배나 증강시켰고[51], 이를 발판으로 유럽에서 잉글랜드 왕국이 열강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1546년에는 해군청을 신설하여 영국이 해양강국으로 뻗어나가는데 필요한 정책적 발판도 만들어냈다.

이런 의도에서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한 강력한 전함[52]메리 로즈호를 만들었다. 이 전함을 건조한 목적은 헨리 8세가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심혈을 기울여 만든 메리 로즈호는 34년 간 전장에서 활약했지만 1545년 솔렌토 만 해전에서 제대로 공격 한 번 못 해보고, 헨리 8세가 보는 앞에서 홀라당 가라앉고 말았다.

훗날 수백년이 지나서야 인양에 성공했는데 인양해놓고 보니 실로 공을 들인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메리 로즈호의 대포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제일가는 대포장인에게 의뢰해 사정거리가 다른 대포보다 월등히 나은 것이었고, 배의 설계구조도 이전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시도해서 어느 배보다도 거대하고 초강력한 전함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내부에서 온전하게 장궁들이 출수되면서 영국 장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메리 로즈호의 선체와 유물들은 포츠머스 히스토릭 독야드에 전시되고 있다. 메리 로즈호와 그 유물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고하자.

메리 로즈호의 침몰은 솔렌토 만 해전 당시 대포 발사를 위해 열었던 포문을 닫지않아 열린 포문으로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서 선체가 중심을 잃고 침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대포 포문을 배 밑까지 설치하고, 이 대포가 너무 무거웠던 데다가 너무 많은 인원을 태운 탓도 침몰 원인으로 한 몫 했다. 전문가들은 메리 로즈호가 위력을 발휘했다면 엄청났을 거라고 추정한다. 무게 중심 불량은 카락선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으며 이 문제를 개선시키기 위해 갤리온으로 발전했다.

메리 로즈호는 홀라당 가라앉았지만 헨리 8세는 그외에도 재위기간 내내 전함 건조에 공을 들여서 헨리 8세가 승하할 때 50여척에 달하는 신규 전함을 건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당장 그와 같이 해군을 증강했던 헨리 8세의 목표는 결국 실현되지 못한 대륙 공격이었을런지 모르나 이런 해군력 증강과 조선시설의 기반 정비는 결과적으로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상대하는데,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훗날 세계최강으로 불리게 될 영국 해군의 전통 마련에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헨리 8세의 공은 상당히 큰데, 당시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가 우수한 화기의 운용으로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유럽 최강대국의 자리를 차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화기의 도입과 화기에 대한 대처 방안의 마련에 적극적이기도 했다.[53] 이 일환으로 신개념의 방어시설을 건축하기도 했는데 원형의 탑들을 두른 독특한 포대를 해안 방어용으로 만들기도 했다. 원형으로 탑을 만든 것은 적의 포격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군사적 중흥이 비록 프랑스 스페인 같은 대륙의 강적들을 상대할 때는 치세 중에 투자한 것에 비해 큰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르네상스의 기술적 진보에서 낙후돼 있었던 스코틀랜드를 상대할 때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1513년엔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전쟁 중인 틈을 타서 스코틀랜드에 뒷치기당했지만, 잉글랜드군은 (본인이 지휘한건 아니었지만) 플로든 전투에서 귀족들을 포함한 스코틀랜드의 병사 1만 명과 제임스 4세를 전사시키고, 수도 에든버러를 약탈했다. 제임스 4세는 헨리 8세의 누나 마거릿 튜더의 남편이었는데 헨리 8세가 자기 누나는 과부에 섭정으로, 조카 제임스 5세는 생후 18개월에 즉위하게 만들어 줘서, 너무 어린 왕에다가 섭정 문제를 놓고 마거릿과 귀족들간에 벌어진 격렬한 대립 등으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알아서 내부 권력다툼에 빠져 한동안 잉글랜드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대신 헨리 8세가 조카 제임스 5세에게는 스코틀랜드를 때려잡고 부왕을 죽인 철천지 원수 그 자체인 외삼촌으로 찍힌 건 당연했지만.

제임스 5세와 스코틀랜드가 여전히 반() 잉글랜드 - 친() 프랑스 정책을 펴자 1542년에 왕비 제인 시모어의 오빠를 파견하여 솔웨이 전투에서 겨우 병력 3천으로 5~6배 많은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제임스 5세는 병사했다매형, 조카 다 죽였다. 이로 인해 제임스 5세의 유일한 적자녀인 메리 스튜어트가 생후 9일 만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스코틀랜드는 또 한번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스코틀랜드가 또 대패한 이유는 여전히 각 클랜들을 소집하여 냉병기, 단병전, 닥돌 중심으로 돌아가는 중세적 인프라를 버리지 못한 탓도 있었다.

헨리 8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에든버러를 또 한번 약탈하여 싹 다 털어먹고는 스코틀랜드와의 화약에서 자기 아들 에드워드 튜더와 메리 스튜어트의 결혼을 강요했다. 그래서 이 전쟁을 '거친 구혼'이라는 뜻인 Rough Wooing이라고 부른다.

이 무식한 청혼에 갓난 메리 스튜어트는 외가인 기즈 가문이 있는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는데, 기즈 가문은 프랑스 궁정에서 준왕족 급이라 프랑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메리는 왕세자인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할 수 있었다. 거기다 기즈 가문은 골수 가톨릭이라 성공회 성향의 잉글랜드와는 견원지간이었다. 메리 스튜어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자랐기에 조약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2번에 걸쳐 스코틀랜드 병력을 싹싹 털어 먹었기 때문에 이때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완전 정복에 거의 성공할 뻔했다.

비록 프랑스의 개입으로 스코틀랜드를 복속시킨다는 전략적 목표 달성은 실패했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스코틀랜드인들은 더이상 자국이 잉글랜드와 1대1로 대결하기에는 국력의 차이가 너무나 벌어졌다는 걸 통감하게 되었다. 이는 종교개혁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쪽 모두 개신교로 이념적 동지가 되자 스코틀랜드 측에서 더이상 대립을 그만두고, 잉글랜드와 관계를 개선한 다음 결국 연합왕국으로 나아가는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1536년 웨일즈를 완전히 잉글랜드 왕국에 흡수시켰고, 1541년에는 대대로 아일랜드 총독을 독점하며 반 독립상태였던 킬데어 가문을 소환, 숙청하고 아일랜드 반란을 평정하면서 더블린 의회에서 '아일랜드의 왕' 칭호를 수여받았다. 사실상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을 평정하고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격이었다. 단, 스코틀랜드의 경우, 헨리 8세 본인 치세에 한해서는 반란에 반응했다는 모양새로 넘어갈 수는 있지만, 웨일즈와 아일랜드를 복속시키고 지배하는 과정에서는 그 악행 때문에 켈트계로부터 두고두고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을 사게 만드는 업보의 단초를 제공했다. 특히 튜더 왕가의 시조가 웨일즈계인 이상, 웨일즈의 잉글랜드에 대한 불신에 단단히 한 몫했다.

하지만 백년전쟁부터 내려오는 프랑스 영토에 대한 야욕,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와의 전쟁 등은 물론이고, 즉위 초기부터 궁전 건축, 연회, 예술 등에 쓰인 막대한 지출 등 왕권 과시는 국제적인 과시나 투사를 감안하더라도 국고에 과한 부담을 주었다. 특히 유럽 대륙을 상대로 한 군사 정책의 경우, 배를 띄우고 상륙이 강제되는 규모의 대규모 작전을 수행했으서도 얻어낸 건 별로 없었다. 이러한 규모의 과도한 지출은 부왕 헨리 7세가 재건한 건전 재정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 면세 혜택이나 교황이 하사한 특권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왔던 수도원을 잉글랜드에서 직접 관리하자'는 여론의 흐름을 타서, 국고를 채웠으면서도 의도를 의심당해도 할 말 없는 행동을 한 것도 사실이다. <수장령> 이후로 지속된 군사 활동은 물론 1537년 '은총의 순례' 세력의 주동자들을 소탕할 때 로버트 애스크도 처형했기 때문이다. 만약 비고드 경과 당시 군사 활동을 지휘한 일부만 정확히 골라 처형했으면 오히려 '대화로 해결하자는 것을 무력으로 해결하려 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본보기를 보여준' 예시로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럽 대륙을 상대로 또 소득없는 군사 활동을 벌여 지출을 키우고 특히 토마스 크롬웰이 처형당한 이후에는 근시안적으로 자산[54]을 매각하며 국고를 채우다가 왕권이 위협당하는 단초까지 제공했다.

젠트리 계층의 부상은 후대의 왕들의 국고 관리 난이도를 대폭 상승시켰다. 바로 젠트리를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된다는 중압감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는 왕실 토지나 국유 재산을 매각하는, 장기적으로는 왕권을 더욱 하락시키는 고육지책을 동원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후임인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도 본인이 검소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국고와 관련해서 의회와 두고두고 마찰을 빚었으며, 급기야 찰스 1세는 무리수를 두다가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이후 헨리 8세 때 성장한 신흥 계층 젠트리들은 일정 재산과 학식을 갖추고 대륙의 개혁 신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왕실의 자의적인 과세에 반발했기 때문에 헨리 8세 시절부터 이미 스튜어트 왕가 시절의 청교도들과의 갈등의 씨를 뿌렸다고 보면 된다.

4. 기타


5. 가족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헨리 8세
(Henry VIII)
<colbgcolor=#fff3e4,#331c00> 헨리 7세
(Henry VII)
<colbgcolor=#ffffe4,#323300>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오웬 튜더
(Owen Tudor)
발루아의 카트린[62]
(Catherine of Valois)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Lady Margaret Beaufort)
제1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
(John Beaufort,
1st Duke of Somerset)
블렛소의 마거릿 보챔프
(Margaret Beauchamp of Bletso)
요크의 엘리자베스
(Elizabeth of York)
에드워드 4세
(Edward IV)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Richard of York,
3rd Duke of York)
요크 공작부인 세실리 네빌
(Cecily Neville,
Duchess of York)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제1대 리버스 백작 리처드 우드빌
(Richard Woodville, 1st Earl Rivers)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Jacquetta of Luxembourg)

5.2. 왕비들

헨리 8세와 왕비들의 생애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다음 표를 삽입한다.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의 생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만이 유일하게 왕비로서 국왕의 죽음을 볼 수 있었다.[63] 1537년부터 1540년까지와 1541년부터 1543년까지 약 5년은 헨리 8세가 독신이었던 기간이다.
<rowcolor=#fff> 이름 키워드 생몰년도 (최종 연령) 재위 기간 (년) 재위 전
헨리 8세 국왕 1491 ~ 1547 (56) 1509 ~ 1547 (38) 왕위 계승자
<colcolor=#fff> 아라곤의 카탈리나 이혼 1485 ~ 1536 (51) 1509 ~ 1533 (24) 아서 튜더[64]의 부인
앤 불린 참수 1501[65] ~ 1536 (35)[66] 1533 ~ 1536 (3)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시녀
제인 시모어 죽음 1508 ~ 1537 (29) 1536 ~ 1537 (1) 앤 불린의 시녀
클레베의 앤 이혼 1515 ~ 1557 (42) 1540 ~ 1540 (0) -
캐서린 하워드 참수 1523 ~ 1542 (19) 1540 ~ 1541 (1) 클레베의 앤의 시녀
캐서린 파 생존 1512 ~ 1548 (36) 1543 ~ 1547 (4) -

5.3.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메리 1세
(Mary I)
1516년 2월 18일 1558년 11월 17일 펠리페 2세
2녀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1603년 3월 24일
1남 에드워드 6세
(Edward VI)
1537년 10월 12일 1553년 7월 6일
위의 적자녀 셋은 모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지만 비교적 천수를 누린 사람은 차녀 엘리자베스 1세밖에 없다. 게다가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모두 결혼하지 않은 채 죽었고, 적자녀 중 유일하게 결혼한 장녀 메리 1세도 자녀를 낳지 못하면서 헨리 8세의 직계는 끊어졌다.

6. 대중매체에서

6.1. 소설

6.2. 게임

6.3. 만화

파일:external/i3.ruliweb.com/155c2f8fff446c91a.jpg

6.4. 노래

6.5. 영화


파일:에릭 바나-헨리 8세.jpg

6.6.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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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chef.bbci.co.uk/p02gj54k.jpg

6.7. 기타



[1]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그리니치 [2]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시티 오브 웨스트민스터 [3] 성공회 체계의 모체가 되는 잉글랜드 국교회가 바로 이 사람 치세에 출범했다. [4] 친할머니 마거릿 보퍼트 쪽으로 랭커스터 왕조, 아버지 헨리 7세 쪽으로는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 어머니 엘리자베스 쪽으로 요크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 [5] 성공회의 전신 [6] 실제로 말년에 비만이 심해지기 이전에는 건장한 체격이었다. [7] 교회 대분열시기, 로마와 가까운 지역을 제외한 교황령은 거의 반독립 상태로 떨어져 나갔고, 로마로 교황이 귀환했어도 세금 내기를 거부하며, 프랑스나 합스부르크,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과 연맹하여 간섭도 거부했다. [8] 백년전쟁 참조. [9] 특히 플로든 전투 당시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4세가 4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고, 주요 귀족들이 참전했으며 이탈리아에서 갑주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귀족들과 병사들을 무장시키는 등,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했다. [10]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드워드 3세의 3남),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에드워드 3세의 4남). [11]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아들이다. [12] 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친할아버지인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3세의 4남으로, 에드워드 3세의 3남인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보다는 확실히 왕위 계승 순위가 낮았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의 2남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유일한 여계 후손이(라이오넬은 외동딸밖에 없었다) 3대 요크 공작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이를 통해 3대 요크 공작은 모계 혈통으로 보면 자신의 왕위 계승 순위가 랭커스터 왕조보다도 더 앞선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3대 요크 공작은 곤트의 존의 외손녀인 세실리 네빌과 결혼하면서, 그들의 자식들( 에드워드 4세, 클라렌스 공작 조지, 리처드 3세)은 요크 왕조에 이어 랭커스터 왕조의 혈통까지 이어받게 되었다. [13] 보퍼트 가문은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의 자식들이 창시한 가문이다. [14] 에드워드 4세의 누이 서포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아들. 리처드 3세가 왕비 앤 네빌과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가 죽자 일단 추정 상속자로 지명한 인물이다. [15] 1년에 상납금 2만 파운드를 받으며 메리 튜더의 빚을 청산하는 댓가로, 프랑수아 1세의 구조를 돕고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영토에 대한 야욕을 버리는 것이었다. [16]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유럽은 < 살리카 법>에 의하여 여성이나 여계 후손은 왕위를 이을 수가 없었는데,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카탈리나와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얻었지만 훗날 메리 1세가 되는 딸 하나만 남고 일찍 잃었다. 거기다 정부가 낳은 자식은 서자일 뿐 후계자가 되지 못해서 헨리 8세는 캐서린에게서 무조건 아들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당시 헨리 8세가 40세를 넘겼고, 그보다 여섯 살이나 연상인 캐서린도 더 이상 후사를 기대하기 힘들자 헨리는 새로운 왕비를 들여 아들을 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캐서린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헨리의 무관심과 바람기도 참아줄 만큼 남편에게 헌신한 왕비였는데 그녀를 왕비 자리에서 폐위한 것이었다. [17] 사실 논문은 잉글랜드 주교들이 쓴 것을 헨리 8세의 명의로 발표한 것이었다. 당시 풍속에선 발표자의 명의가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중요했기에 흔한 일이었다. [18] 영어로 'Defender of Faith' [19] 그리고 이 'Fidei Defensor'라는 칭호는 현재 찰스 3세에 이르기까지도 영국 국왕의 공식 타이틀로 유지되고 있다. [20] 그나마도 절반은 프랑스 발루아 왕조에 뜯겼고, 손자대인 카를 5세 시절까지도 전쟁 상태였다가 결국 카를 5세가 프랑수아 1세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북이탈리아 지배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몰수된 영토를 포기했다. [21] 다만, 마틸다가 폐위된 이유에는 그것보다는 세금 문제가 한몫하긴 했다. 그리고 프랑크족이 특수한 경우인 것이지, 다른 게르만족계들은 여왕이 종종 나오긴 했었다. 또한 그 이후에는 계승할만한 여성 후계자가 없었고. [22] 사실 메리 1세가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제2대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했을 당시, 펠리페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돈 카를로스가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물려받고, 메리 사이에서 적자가 태어날 경우, 그 아이가 저지대와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스페인 대제국으로 통합될 예정은 전혀 아니었다. [23] 다만 캐서린의 친정은 트라스타마라 왕조로, 압스부르고 왕조 이전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의 왕실이었다. [24] 가톨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혼(divorce)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몇 가지 경우에 '혼인무효'(annulment)라는 것은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 [25] 울지는 원래 요크 대주교였다. 추기경임에도 불구하고 캔터베리 대주교가 왜 못 되었냐면, 울지 이전에 취임한 캔터베리 대주교가 80세 넘게 장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엔 주교들이 임지에서 벗어나 여러 교구를 소유하며 빨대만 꽂고 다른 곳에서 수입만 차지하는 경우가 잦았다. [26] 단순 어거지가 아니라 이미 교회법상으로 명백하게 근친상간이었다. 이 때문에 결혼 당시에도 이런 의견이 없는 게 아니었다. 또 개혁 성향 개신교 신학자들은 당연히 교황의 권위를 인정치 않은데다가, 개신교 신학에선 '결혼은 교회에서 주관하는 성사와 상관없다'는 게 통설이었기 때문에 주저없이 주장한 것이다. (반면 가톨릭에서 결혼( 혼인성사)은 7성사 중 하나로 매우 중요시된다.) [27] 교황청은 헨리 8세가 막 나갈 걸 방지하려고 했는지, 예상 외로 크랜머에게 임명장까지 보내주었다. [28] 실제로는 의회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에 령(令)이 아니라 법(法)이라고 해야 올바른데 잘못 번역되었다. <수장법>으로 바꿔 불러야 하겠지만, 워낙 <수장령>으로 자주 쓰였고 널리 알려졌기에 보통 <수장령>으로 쓴다. [29] 헨리 8세는 절친 토마스 모어를 시켜서 대륙 신학에 영향받은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교수 40명을 체포하고 6명을 화형시켰다. 그런데 헨리 8세가 이혼을 밀어부치자 모어는 이에 반대하며 1532년 5월, 대법관에서 사임했다. [30] 교황청에서는 피셔 주교가 헨리 8세에 의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설마 추기경을 처형하랴 싶어서 옥중에서 추기경으로 임명했으나 헨리 8세는 개의치않고 피셔를 처형했다. [31] 관점을 완전히 돌린다면, 1천 년 이상 가톨릭 국가였던 잉글랜드를 한 순간에 반(反) 가톨릭 국가로 만든 국왕의 명령에 대해 단 2명(그것도 성직자는 오직 피셔 추기경 하나)만이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는 것은 또 다른 면을 시사한다. 그만큼 잉글랜드 내에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것이다. <튜더스> 같은 작품에서 <수장령>을 반대하는 신하가 둘 밖에 안 나오는데, 대표적인 인물 둘만 넣은 게 아니라, 정말로 둘밖에 없었다. [참조1] Henry Gee,'Documents Illustrative of English Church History' [33] 'ornaments, jewels, goods, chattels'도 언급된다. 즉 부동산이나 금융자산뿐만 아니라 십자가, 성상, 촛대 등 성물들까지 싸그리 긁어간다는 뜻이다. [영문1] 'use of his majesty without spoil, waste, or embezzling the same' [영문2] his highness shall satisfy, content, and pay all and singular such just and true of the debts which are owing to any person or persons by the chief governors of any the said religious houses, in as large and ample manner as the said chief governors should or ought to have done if this Act had never been made. [영문3] 'shall have their capacities, if they will, to live honestly and virtuously solved abroad, and some convenient charity disposed to them towards their living [영문4] it is ordained by the authority aforesaid, that the chief governors and convents of such honourable great monasteries shall take and accept them into their houses, from time to time, such number of the persons of the said convents as shall be assigned and appointed by the king's highness, and keep them religiously, during their lives, within their said monasteries. [38] '자립을 돕기 위해서는 경제 활동에 제약이 더 큰 쪽이 오히려 더 몫을 받아야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고방식이 얼마나 대단하고 기발한 것인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39] 빈민 기부를 위한 모금이나 물자는 본당의 모금함을 통해 모아야 하며, 구제를 받고 싶으면 이 모금함을 열 줄 아는 사람, 즉 동네 관리나 주임신부를 통해 빈민 기금을 받아가는 식이었다. [40] 수도원의 통폐합으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심하든간에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절대왕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헨리 8세를 비난하는 순간, '은총의 순례'에 가담한 사람들은 얄짤없이 반역죄로 목이 달아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41] 오늘날의 서요크셔에 있다. [참조2] 'Letters and Papers, Foreign and Domestic, Henry VIII, Volume 13 Part 1, January-July 1538' [43] 대놓고 이단 혐의로 순교하게 된 것은 가톨릭 복고 성향을 보인 메리 1세 치세에서의 이야기이다. [44] 특히 채소를 멀리하고 대신 독한 고기들을 마구잡이로 폭식하면서 비만이 더 심해졌다. 물론 당시 유럽 왕족 귀족들이 채소가 가난한 하층민들이나 먹는 저급한 식재료라며 싫어했고, 고기를 마음껏 먹는 식생활이야말로 고귀한 습관이라고 여겼던 문화적 배경도 작용했다. [45] 물론 그만큼 헨리 8세 때 잉글랜드 국왕의 왕권이 강력해졌으며, 정점에 달했다는 뜻도 된다. [46] 카를 5세는 종교 개혁으로 인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이반으로 동생에게 전담시키던 신성 로마 제국 문제도 신경써야했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도 있었기에 프랑스와 계속 싸울 수가 없었다. [47] 일단 클레베의 앤과의 결혼을 주선한 토마스 크롬웰에게 '배신감'을 느낀 듯한 정황이 있다. 또한 <수장령>에 반대하며 일으킨 반란이 제압당하면서 세력이 위축된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도 이 틈을 노려 하워드 가문을 중심으로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48] 이후 신하들이 크롬웰을 모함했다는 식으로 역정을 냈다는 일화도 있다 [49] 비단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체계적이고 법치에 기반한 관료제 중앙 정부 체제는 떠오른지 얼마 안 됐고, 여전히 정치는 나라를 가족이나 사람 신체에 비유하며, 국왕을 나라의 아버지이자 우두머리로 생각하고 국왕 개인의 카리스마와 능력과 상징성이 더 중요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 국왕들의 사치와 과시는 단순한 개인적 허영이 아니라 저런 권위와 통솔력을 발휘하는 통치 이데올로기 강화의 중요한 과정이었고, 이런 면에서는 아직 기사도적 가치관이 강렬하던 시기이니 헨리 8세처럼 대중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고 놀기 좋아하며 호탕하고 호방한 인물상이 크게 유리했다. 반면에 부왕인 헨리 7세는 수전노에다가 뒷공작을 좋아하며 내성적, 과시욕이 없는 사람이라 이런 면에서 국왕답지 않은 좀생이 같다는 혹평을 많이 들었다. [50] 다만 헨리 7세는 짠돌이였기 때문에 상설적으로 유지되는 해군 자체를 증강하기보다는, 유사시에 해군으로 징집할 수 있는 민간 선박의 건조 및 임대를 통한 수익 확보에 더 치중했다. 전투용 시설을 평시에는 철거하고 상선이나 수송선으로 쓰다가 전시에는 전투용 시설을 급히 설치해서 해군으로 징집하는 형식이었다. [51] 토머스 울지의 공이 컸다. [52] 카락선의 끝판왕 격이다. [53] 당시 잉글랜드는 아직까지도 화승총보다는 장궁을 무기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과는 별개로 헨리 8세 본인은 장궁을 가장 잉글랜드적이고, 나라의 상무정신을 상징하는 물건이라고 크게 평가하며 본인도 사냥과 활쏘기 시합을 통해 장궁술을 계속 연마했고, 병과에서 도태시키지 않았다. 기술적으로도 16세기 초중반이라면 여전히 우천이나 화승총으로 대응할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 등에서 여전히 활이 의미있는 보충 전력이 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54] 즉, < 수장령>으로 확보한 교회의 자산도 포함 [55] 현대인에겐 무슨 비아냥처럼 들리지만, 전근대에 왕과 같은 권력자의 배설물을 치우는 것은 농담이 아니라 아주 높으신 분들이나 맡을 수 있는 일이었다. 어의처럼 국왕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었는데, 이럴 수 있는 보직은 상당히 드물다! 또한 국왕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는고로 국왕과 왕실의 개인사와 비밀, 정치·행정 업무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으며(헨리 8세의 담당관도 무려 후작이다.), 거기에 국왕의 건강상태를 가장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자리이므로 왕이 그 사람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 되기에 누릴 수 있는 권세도 대단했다. 지도자의 건강상태는 주요한 국가기밀이거니와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므로, 결코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부왕 헨리 8세처럼 귀족에게 용변을 맡겼고, 헨리 8세의 이후 시대 인물인 루이 14세에도 그의 요강을 담당하는 일은 고위 귀족이 맡았다. 조선에서도 왕의 변을 내의원에서 맛보고 연구했을 정도. [56] 그것도 기름지며 단 음식을 매일 먹으니 비만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57] 이는 도끼로 참수형을 당한 앤 불린의 유언을 인용한 비아냥이었다. [58] 심지어 헨리 8세는 먹는 과일조차 당도가 매우 높은 달콤한 과일만 먹었다. 당도가 높은 과일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먹으면 당연히 몸에 좋지 않다. [59] 다만 당시 기준으로 50대는 충분히 사망할만한 나이이기는 하다. [60] 사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다. 왕을 이기면 왕에게 미운 털이 박혀 불이익 당할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시합이 격렬해지다가 실수로 왕이 죽는 일이라도 일어나면 그래도 시합중에 일어난 일이니 살인죄나 반역죄로 처벌되지는 않겠지만 불이익의 정도는 더욱 강할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있기도 하고. [61] 물론 이 괴물은 한국어에서 종종 쓰듯 대단하다는 경탄의 의미가 아니라 거의 순수하게 비판적인 의미에 가깝다. [62] 샤를 6세의 5녀이다. [63] 클레베의 앤 역시 헨리 8세의 사망 시점까지 살아있었지만, 폐위된 지 오래였다. [64] 헨리의 친형. [65] 앤 불린의 출생 연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507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66] 1507년생설 기준으로는 29세. [67] 사실 헨리 8세에게는 적장녀 메리 1세, 적차녀 엘리자베스 1세, 적장자 에드워드 6세를 제외하고도 많은 서자녀들이 있었지만 일단 제일 유명한 헨리 피츠로이만 기재한다. [68] 동명의 연극으로도 유명하다. 영화는 연극의 명성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작품. 시대극의 측면에서도 볼만하며 주인공의 연기가 일품. 1967년 아카데미 작품상 및 남우주연상 포함 6개 부문 수상. [69] 사실 실제 헨리 8세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많이 보였기에 이러한 점이 고증을 잘해낸 것이다. [70] 이때 신하들은 머리가 진흙 속에 박혀 다리를 버둥거리는 헨리 8세를 보고 재미있다고 깔깔 웃다가 뒤늦게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고 사색이 되어 뛰어간다. [71] 프랜시스 브라이언을 보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고 캐서린과 자신의 결혼이 무효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서류에 겨우겨우 서명했기 때문에 누그러진 점도 있었다. [72] 실제로 메리에게는 전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한 후에는 메리를 딸 대우도 안 해줬으며 결정적으로 혼사도 나몰라라 해서 혼기도 놓치게 만들어 버렸다. [73] 실제로도 헨리 8세는 엘리자베스에게도 메리에게 하는 것처럼 공주 작위와 계승권을 박탈하고 궁전에서 쫓아내며 죽을 때까지 엘리자베스를 보지 않을 정도로 박대했다. [74] 이 과보호가 도리어 에드워드 6세의 면역력을 떨어뜨렸다는 주장도 있다. [75] 얼굴은 배우 조너선 마이어스의 얼굴이므로 원본보다는 훨씬 슬림하게 그려졌다. 이보다 앞서 그렸던 초상화가 있는데 자신을 단순히 쇠약해진 노인의 모습으로만 묘사한 것에 못마땅해 하면서 다시 그리도록 명했던 것이다. 실제 역사대로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한스 홀바인으로 설정되었다. [76] 1536년 1월 24일 열린 마상시합에 참가했다가 낙마한 후 2시간이나 의식을 잃었다. 원체 대식가인지라, 운동으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 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된 후,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2시간이나 무의식 상태였다는 것은 뇌손상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의 성격이 이 사고로 인한 뇌손상으로 잔학무도해졌지 않을까 하는 설도 있다. 이 당시 왕비는 앤 불린이었는데 남편의 사고 소식을 들은 충격으로 유산했다. [77] 앤을 생각하면 욕망에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