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든 전투

1. 개요2. 배경3. 플로든 전역4. 플로든 전투

4.1. 제임스 4세의 오판4.2. 양군의 포진4.3. 포격전4.4. 잉글랜드군 우익의 위기4.5. 왕의 죽음

5. 플로든 전투의 결과6. 관련 문서

1. 개요

1513년 9월 9일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맞붙은 전투.[1]

모든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전쟁들을 통틀어 사상 최대의 병력[2]이 맞붙은 단일 회전이었다. 서리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제임스 4세가 친정하는 스코틀랜드군을 완파했고, 왕과 수많은 귀족들이 전사한 스코틀랜드는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2. 배경

1485년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헨리 튜더는 긴 내전으로 피폐해진 왕국을 재건해야 했고, 조심스러운 대외정책을 추구했다. 그 일환으로 1503년에는 장녀 마거릿 튜더를 전통적인 숙적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4세에게 시집보내며 오랜 북방전쟁을 멈추려 하였다.

하지만 1509년, 헨리 7세의 사후 즉위한 헨리 8세는 야심찬 젊은 군주였고, 전쟁을 꿈꾸고 있었다. 15세기 말 잃어버린 백년전쟁 시절 대륙영토에 눈독을 들인 왕은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을 꾀하였다.

헨리 8세의 야심은 매형 제임스 4세와의 관계를 경색되게 했는데,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는 1295년 이래 ‘오랜 동맹(Auld Alliance)’이라 부르는 긴밀한 동맹관계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는 이를 상기시키며 제임스 4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한편, 루이 12세의 프랑스 또한 나름의 팽창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프랑스군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는 주적 합스부르크 가문과 저지대와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이탈리아 전쟁들 중 1511년에 교황 율리오 2세는 프랑스와 맞설 신성동맹을 선포하게 되는데, 헨리 8세는 이 동맹을 대프랑스 전쟁을 벌여 영토를 넓힐 기회로 보고 가담했다.

제임스 4세는 처남에게 항의하며 동맹에서 이탈할 것을 요구했지만, 헨리 8세는 매형의 요구를 무시하고 1512년에 1만의 원정군을 대륙에 파병했다. 1차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헨리 8세는 이번에는 친정을 결심하고 1513년 5월 칼레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다. 제임스 4세는 재차 항의하며 헨리가 프랑스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잉글랜드를 공격할 것이라 협박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1512년에 동맹조약을 정식으로 갱신한 루이 12세는 제임스 4세의 개전을 꼬드겼다. 기실 헨리 8세의 영토적 야욕은 프랑스 쪽이지, 스코틀랜드 쪽은 아니었으므로 냉정히 따지면 스코틀랜드에게 손해인 제안이었다. 때문에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내부적 반발도 만만치 않았고, 루이 12세는 제임스 4세의 기사도적 이상에 어필하는 등 온갖 감언이설로 그를 꼬드겼다. 왕비인 안 드 브르타뉴더러 ‘자신의 기사님’이 되어 ‘잉글랜드 왕으로부터 구해달란’ 편지를 쓰게 할 정도로 별 수단을 다 들여 제임스 4세를 꼬드긴 루이 12세는 군자금과 군수지원 또한 제공했다. 화약, 총포, 그리고 수백 자루의 ‘ 란츠크네히트 파이크’들이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이중 5.5미터에 달하는 ‘란츠크네히트 파이크’는 스코틀랜드군 현대화의 시도로 제공된 장비였다. 제임스 4세와 루이 12세는 과거 쉴트론 방진을 잘 써먹은 스코틀랜드 창병들이 더 긴 장창으로 무장하면 대륙의 ‘란츠크네히트’ 싸움방식을 잘 써먹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쉴트론과 파이크 창벽은 유사해 보여도 꽤 다른 전술이었다. 직업용병이 아닌 징집병들이었던 스코틀랜드 보병의 대다수는 익숙한 창보다 훨씬 길고 거추장스러운 파이크를 다루는 훈련이 덜 되어 있었다.

그래도 제임스 4세의 군대 중 포병대는 우수했다. 최신 군사기술인 대포에 관심이 많던 그는 큰 군비를 들여가며 온갖 구경의 청동 대포들로 포병대를 만들었다. 후일 ‘일곱 자매’라고 불린 거포 7문과 세이커 4문, 서펜틴 6문을 비롯해 경포 수 문 등을 갖춘 스코틀랜드군 포병의 규모는 대륙의 프랑스군이나 스페인군에 비견될 만큼 우수했다.

1513년 7월, 헨리 8세는 제임스 4세의 최후통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프랑스 침공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에딘버러에서 군대의 소집령을 내렸다. 메디치 가문의 교황 레오 10세는 제임스 4세가 침공을 개시하면 그를 파문할 것이라 협박했지만, 이는 교황과 잉글랜드가 반프랑스 신성동맹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지 진지한 신학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교황을 무시하고 전쟁을 강행한 제임스 4세는 영국인 추기경 크리스토퍼 베인브리지에게 파문당했다.

3. 플로든 전역

스코틀랜드 침공군과 맞설 잉글랜드 북부군 사령관은 서리 백작 토마스 하워드 경이었다. 백작의 아버지, 노퍽 공작 존 하워드는 보스워스 전투 때 리처드 3세의 편을 들어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하워드 가문[3]은 튜더 왕조에게 단단히 찍혔다. 가주가 된 이후 헨리 7세와 헨리 8세에게 충성한 토마스 하워드는 노퍽 공작위의 복원을 꿈꾸고 있었지만, 1513년 초엽에 차남인 잉글랜드 해군 사령관 에드워드가 브레스트 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하며 헨리 8세의 침공계획을 어그러트렸다. 분노한 헨리 8세는 서리 백작을 원정군에 동참시키는 대신 북부 국경을 지키고 있으라며 북부군 사령관을 내맡겼는데, 좌천성 인사에 가까웠다.

때문에 왕의 눈밖에 난 서리 백작은 군대를 신중하게 움직였고, 북부군 전체를 섣불리 소집하는 대신 소집 준비령만 내리고, 본인은 소수 병력과 포병 정도만 인솔하며 폰테프락트에 주둔, 제임스 4세의 의도를 관찰했다. 북부군의 초반 움직임은 윌리엄 불머 경이 이끄는 200명의 기마 장궁병 선봉대를 국경에 보내어 국지전에 대비하는 정도였다.

침공이 임박한 1513년, 국경 너머 가축을 서리하는 약탈자(Reiver)들 사이 벌어지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의 국지전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스코틀랜드 이스트마치의 관리자(Warden), 홈 백작 알렉산더는 3천의 대병력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8월 13일, 홈의 약탈부대는 7개의 마을을 불지르고 수많은 가축 떼를 노획해 복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밀필드 평야 인근에 매복해 있던 불머의 잉글랜드 선봉대가 이들을 요격했다. 장궁 세례에 놀란 약탈자들은 노획품을 내버리고 무질서하게 도주했다. 500여명이 전사했고, 백작의 동생을 포함해 400여명이 포로로 잡힌 대패였다. 분노한 제임스 4세는 원정준비를 서둘리 마쳤다.

8월 22일, 제임스 4세는 4만 2천 군대를 이끌고 콜드스트림에서 트위드강을 건너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군대의 첫 목표는 잉글랜드의 국경요새들인 노럼 성(Norham Castle)[4]과 워크 성(Wark Castle)이었다. 도하한 스코틀랜드군은 두 부대로 나뉘어, 본대는 더 큰 노럼 성으로, 별동대는 워크 성으로 향했다. 아직 서리 백작이 잉글랜드 북부군을 소집하지 않았으므로 이들과 맞서 싸울 잉글랜드 야전군은 없었다. 전쟁은 노럼과 워크를 포위한 스코틀랜드 포병대의 포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8월 25일, 폰테프락트에 주둔하던 서리 백작은 제임스 4세의 침공소식을 전달받고 북부군에 소집령을 내렸다. 해외원정에서 제외된 트렌트강 북부의 병력이 서리의 소집령을 받고 모여들었다. 서리의 장남이자 잉글랜드 함대 사령관인 토마스 하워드 휘하 수병들, 잉글랜드 변경의 약탈자들도 북부군의 기치 아래 뉴캐슬로 모여들었다. 9월 1일 소집이 완료된 잉글랜드 북부군은 2만 5천에 달했다.

8월 28일, ‘심판의 날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 자랑하던 노럼 성은 스코틀랜드 포병대의 맹공에 백기를 올렸고, 스코틀랜드군은 더 작은 에탈 성(Etal Castle), 포드 성(Ford Castle)을 공격하기 위해 틸강 계곡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9월 1일, 포드 성을 함락한 제임스 4세는 더 남하하는 대신 포드 성을 사령부로 삼고 닷새간 늑장을 부렸다.[5]

한편, 서리 백작의 북부군은 9월 5일 스코틀랜드군과 20마일 거리인 글렌데일까지 북상하고, 행군을 잠시 멈춘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9월 9일, 서리는 전령관 토마스 홀리를 보내 제임스 4세에게 군대들끼리의 ‘전투 재판’을 제의하도록 했다. 구닥다리 관습이었지만, 기사도적 로망을 가진 제임스 4세에겐 안 그래도 회전을 바라던 차에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서리는 이를 통해 제임스 4세를 도발해 회전에 확실히 응하게 하려 했다.

플로든 에지에 포병진지를 구축하고 기다리던 제임스 4세는 회전 제의에 기꺼이 응하고, 9월 9일에 일전을 벌이자는 답신을 보냈다. 제임스 4세와 스코틀랜드군의 프랑스인 군사고문들은 과거 카스티용 전투 때처럼 잘 구축된 포병진지에 잉글랜드군의 정면공격을 끌어들여 격파하고자 했다.

회답을 받은 서리 백작은 북부군을 글렌데일에서 6마일 북쪽인 우울러 평야까지 진군시키고 스코틀랜드군의 남하를 기다렸지만, 곧 스코틀랜드군이 진지 뒤에서 꿈쩍도 안 할 생각이란 게 명백해졌다. 제임스 4세가 언덕 고지에 대포를 올려놓은 채 기다리고 있단 정찰보고를 받아든 서리는 당황했다. 그도 바보는 아닌지라 포병진지에 대한 정면공격은 자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9월 9일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대치만 하거나 물러나기라도 하면 제임스가 아닌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주군 헨리 8세는 하워드 가문에 더 분노할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뉴캐슬에서 북부군으로 이어진 보급로가 약탈자들에게 털리며 잉글랜드군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9월 7일, 서리 백작은 제임스 4세한테 요새에서 기다리는 건 비겁하다며 정정당당히 밀필드 평원에서 싸우자고, 휘하 지휘관들이 모두 서명한 연명서신을 보냈지만 당연히 씹혔다. 9월 8일, 잉글랜드 진영에는 백작 따위가 왕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말이 되냐는 답장만 날라왔다.

연명서신을 보내고 분위기가 침체된 9월 7일 저녁, 잉글랜드군 장교 중 하나[6]가 스코틀랜드군을 진지에서 끌어낼 방책을 제의했다. 남쪽을 향해 대포를 포진시켜 둔 플로든 진지의 남쪽에서 정면으로 들이박는 대신, 베릭 쪽으로 퇴각하는 척하다가 크게 우회기동을 시행, 플로든 에지 북쪽에 있는 브랜스턴 언덕을 점령해서 플로든 진지의 후방을 공격하자는 계책이었다.

계책을 채택한 서리 백작은 북부군에게 즉시 행군을 지시했다. 지레 겁먹어서 북동쪽 베릭으로 전장을 이탈하는 체하는 잉글랜드군을 본 제임스 4세는 크게 만족하며, 약속된 9월 9일까지 플로든에서 기다린 후 당당히 본국에 개선하겠다고 선언했다. 종일 폭우가 내렸다. 그나마 진지를 구축해둔 스코틀랜드군은 비를 피했지만, 잉글랜드군은 찬비를 맞아가며 행군했다.

9월 9일의 이른 아침, 지난밤에는 베릭으로 가는 길에 있던 바무어에서 숙영한 잉글랜드군은 돌연 진로를 꺾어 브랜스턴으로 강행군하기 시작했다. 북부군 대부분은 에탈성 북쪽의 히튼 밀 여울목에서 도하할 수 있었지만, 다리가 필요한 포병을 틸강 너머로 도하시키기 위해서는 더 북쪽인 트위젤 다리까지 빠르게 행군해야 했다. 서리 백작은 아들 토마스 하워드에게 전위대 1만 5천과 포병을 맡겨 트위젤을 도하하게끔 했고, 자신은 후위대 1만을 이끌고 여울목에서 도하하는 경로를 택했다. 잉글랜드군은 지속되는 폭우를 맞으며 행군했다.

4. 플로든 전투

4.1. 제임스 4세의 오판

9월 9일 오전, 잉글랜드 북부군이 회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제임스 4세는 위험을 인지하고, 플로든에 주둔하던 스코틀랜드군에게 브랜스턴 언덕을 점령하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남쪽에서의 공격에만 집중하던 군대 - 특히 포병이 북쪽을 향해 돌아서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보단 앞서서 브랜스턴 언덕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다.

늦은 오후, 언덕 능선에 포진한 스코틀랜드군은 언덕자락에 도착하는 잉글랜드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긴 경로를 택한 전위대 1만 5천이 먼저 전장에 도착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아버지의 후위대를 보지 못한 토마스 하워드는 패닉하기 시작했다. 브랜스턴 언덕의 선점에 실패한 이상, 둘로 갈라진데다 강행군으로 지친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토마스 하워드는 아버지에게 제발 빨리 와달라는 전령을 급파했다.

하지만 불가사의하게도 제임스 4세는 공격하지 않았다. 심지어 포병장 로버트 보스윅의 포격 요청도 거절했다. 이 시점까지도 언덕 위에서 가만히 기다리다가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걸 꿈꿨는지는 몰라도 심각한 오판이었다. 결국 스코틀랜드군은 서리 백작의 후위대가 합류해서 북부군 전체가 포진할 때까지 그냥 언덕 위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4.2. 양군의 포진

스코틀랜드군은 4개의 부대와 예비대로 전군을 나누어 포진했다. 좌익에는 홈 백작의 국경부대와 헌틀리 백작의 하이랜더들이, 좌익 중앙에는 스코틀랜드 중부에서 온 몬트로즈, 에롤, 크로퍼드 백작의 부대가, 우익 중앙에는 제임스 4세 본인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왕실군이, 우익에는 아가일과 레녹스 백작의 하이랜더들이 포진했다. 예비대는 보스웰 백작의 국경부대와 프랑스 고문단장 오시 백작의 프랑스군으로 구성되었다. 중앙 부대 2개는 5.5미터 길이의 장창으로 무장한 ‘독일식’ 부대들이었고, 앞 열의 병사들은 잉글랜드군의 장궁에 대비해 갑옷을 충실히 갖추고 있었다. 스코틀랜드군의 총 전력은 8월 22일 기준 4만 2천 병력으로, 좌익 - 1만, 좌익 중앙 - 7천, 우익 중앙 - 1만 5천, 우익 - 5천, 예비 - 5천에 달했다.[7]

잉글랜드 북부군도 이에 맞서 군대를 4개 부대로 나눴다. 서리의 삼남 에드먼드 하워드[8]가 우익을, 장남 토마스가 우익 중앙을, 마마듀크 콘스터블 경이 좌익 중앙을, 서리 백작 본인이 좌익을 지휘했다. 잉글랜드의 변경 사령관 토마스 데이커 경은 예비 기병대를 맡았다. 잉글랜드군의 총 전력은 대략 2만 5천 병력으로, 우익 - 3천, 우익 중앙 - 9천, 좌익 중앙 - 2천, 좌익 - 6천 5백, 예비 - 1천에 달했다. [9]

4.3. 포격전

늦은 오후, 양군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영국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포병 대 포병의 싸움은 급속히 잉글랜드군의 우세로 점쳐졌다. 공성전이면 모를까, 야전에서는 대구경인 스코틀랜드 대포들의 포격보다 소구경인 잉글랜드 대포들의 포격이 더 효과적이었고, 스코틀랜드군의 밀집대형은 좋은 표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스코틀랜드 포병대를 지휘하던 로버트 보스윅이 전투 극초반, 잉글랜드군 포격에 전사하며[10] 스코틀랜드 포병대는 무너졌다.

포격전의 지속된 손실에 견디지 못한 스코틀랜드군 좌익이 명령 없이[11] 언덕 아래로 돌격하며 전투의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다.

4.4. 잉글랜드군 우익의 위기

밀려오는 홈과 헌틀리의 좌익에 맞설 잉글랜드군 우익은 에드먼드 하워드가 지휘하는 3천 명 뿐이었다. 이들은 강행군으로 녹초가 되어 있었고, 본래 랭커셔와 체셔 출신인 병사들은 스탠리가 아닌 하워드 애송이에게 지휘받아 사기가 낮은데다, 독일식 장창이란 신무기도 이번 전투에서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잉글랜드군 우익은 빠르게 붕괴했다. 대다수는 줄행랑쳤고, 에드먼드 하워드와 직속 수행단의 몇몇만이 전장에 남아 군기를 둘러싸고 다급하게 싸워나갔다. 우익의 싸움이 그렇게 끝날 찰나, 에드먼드는 예비대에 배치된 존 헤런의 기마돌격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어서 예비 기병대 전체를 이끈 데이커가 승리감에 취한 스코틀랜드 좌익을 덮쳤다. 스코틀랜드군은 치열한 혈투 끝에 잠시 물러나 재정비했다.

좌익의 싸움이 유리하게 진행되는 걸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던 제임스 4세는 중앙 부대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본인도 말에서 내려 장창을 든 왕은 우익 중앙과 좌익 중앙의 장창방진들을 언덕 아래로 진격시켰다. 하지만 중앙의 언덕경사는 홈과 헌틀리가 돌격한 좌익 경사보다 가팔랐고, 언덕자락에는 진흙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긴 장창으로 무장한 스코틀랜드 중앙부대들은 가파른 경사와 무릎까지 올라오는 진흙탕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져가며 전진했다. 중갑을 입은 장창병들은 장궁 사격에는 거의 면역이었지만, 대포 포격에는 맨옷이나 다름없이 죽어나갔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더 짧은 빌과 할버드로 무장한 잉글랜드군 보병들이었다. 장창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적병들 사이의 틈새를 파고든 잉글랜드군은 장창병들을 무참히 도륙하기 시작했다. 앞 줄이 어이없게 죽어나가자, 장창을 양손으로 들어봐야 별 쓸모없다고 생각한 스코틀랜드군은 일제히 창을 버리고 칼이나 다른 부무장을 뽑아들기 시작했다.

몬트로즈, 에롤, 크로퍼드 백작들의 부대가 가장 위기에 처했다. 제임스 4세가 서리 백작과 맞붙기 위해 잉글랜드 좌익으로 향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군 좌익 중앙은 잉글랜드군 우익 중앙뿐만 아니라 좌익 중앙부대까지 혼자 맞서싸워야 했다.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겪는데다 수적으로 열세하기까지 한 스코틀랜드 좌익 중앙부대는 금방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집결한 스코틀랜드 좌익은 좌익 중앙을 도우러 가는 대신 멀뚱히 전투를 방관했다. 좌익 중앙은 결국 언덕 위로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4.5. 왕의 죽음

잉글랜드군 중앙부대는 밀리는 중인 서리의 좌익을 돕기 위해 왼쪽으로 틀어, 제임스 4세 부대의 좌측방을 공격했다. 이런 상황에 활약해야 했을 스코틀랜드군 예비대는 언덕을 내려가 잉글랜드군 중앙의 측면을 치는 대신 제임스 4세의 꼬리에 따라붙었다. 여태까지 움직이지 않은 아가일과 레녹스의 스코틀랜드 우익부대가 제임스 4세를 구원하러 출동할 때, 측방에서 새로운 부대가 출몰했다.

3천 5백 명과 함께 낙오해서 행방불명이었던 에드워드 스탠리 경이 갑작스럽게 스코틀랜드 우익의 우측방에서 나타난 것이다. 스탠리의 장궁병들은 즉시 하이랜더들에게 화살세례를 날려 수백을 살상했다. 스코틀랜드 우익은 패주했고, 제임스 4세의 부대는 전장에 홀로 고립되었다. 서리 백작을 잡아 전황을 역전하는 것을 노린 제임스 4세는 가장 신임하는 중갑 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돌격하여 잉글랜드군에 깊숙히 파고들었다. 하지만 끝내 서리 백작에게 닿지 못하고 오히려 패하고 포위되었으며 말에서 떨어진 제임스 4세는 기사들이랑 병사들과 함께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결국 잉글랜드군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왕의 군기가 쓰러지자 스코틀랜드군은 사기가 떨어져 전면적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데이커의 잉글랜드 기병대가 도망치는 스코틀랜드군을 추격했다. 홈과 헌틀리의 그나마 멀쩡한 부대를 주축으로 브랜스턴 언덕 위에 모인 스코틀랜드군 패잔병들은 언덕 위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다음날 국경으로 허겁지겁 도망쳤다. 다음날 전장을 시찰한 서리 백작은 그제서야 승리의 규모를 깨달았다. 브랜스턴 언덕 아래의 시체들 사이에는 왕 1명, 백작 9명, 주교 2명, 수도원장 2명[12], 영주 14명, 셀 수 없는 기사들, 그리고 1만에 달하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5. 플로든 전투의 결과

플로든 전투에서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귀족 가문의 가주들 다수가 전사했기에 스코틀랜드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다. 갓난아기로 즉위한 제임스 5세의 섭정을 맡게 된 왕비 마거릿 튜더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반감은 극심했고[13], 이는 마거릿 튜더가 1년만에 앵거스 백작과 재혼하며 배가 되었다.[14] 이에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프랑스군을 이끌고 돌아온 올버니 공작 존을 지지하며 정치적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역침공을 두려워했지만,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 땅에 별 관심이 없었다. 재위기간 내내 대륙영토에 집착하던 헨리 8세는 수년간 불로뉴에서 전쟁하다 별 소득 없이 복귀했다. 헨리 8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재개한 건 더 나중의 일이었는데, 아라곤의 캐서린이랑 이혼하겠다고 개종한 후 조카 제임스 5세가 개종하길 거부하며 자신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스코틀랜드에 전쟁을 걸었고 제임스 5세는 맞서 싸웠으나 역으로 패하고 만다. 이후 제임스 5세가 죽자 헨리 8세는 왕세자 에드워드 튜더랑 갓난아기로 즉위한 메리 여왕을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꿀꺽하겠다며 스코틀랜드와 전쟁하는데, 헨리 8세 사후까지 이어진 전쟁(일명 Rough Wooing)은 잉글랜드에겐 별 소득 없이 흐지부지 끝났다.

승리를 이끈 서리 백작은 노퍽 공작위의 복원으로 보상받았다. 하워드 가문은 헨리 8세의 통치 내내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자세한 건 토마스 하워드 항목 참조.[15] 헨리 8세는 승전보고에 대해 양가감정을 보였는데, 물론 승리와 북부의 안정 자체는 기쁜 일이지만 ‘군사적 위업’을 꿈꾸며 프랑스에 전쟁하러 간 본인은 별 소득이 없는데 본국에 박아둔, 냉대하던 신하가 자신보다 대단한 위업을 거두었단 데 반발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헨리 8세는 재위기 내내 긴가트 전투와 테루안느 함락, 투르네 함락[16]을 매해 성대히 기념했지만 플로든 전투의 기념식은 끝끝내 열지 않았다.

비록 승자인 헨리 8세는 플로든의 승리를 보잘 것 없는 승리로 보았지만 스코틀랜드 입장에서는 180도 달랐다. 국왕을 비롯해 귀족 대다수가 전사하는 충격적인 대패를 당한 스코틀랜드는 더이상 1대1로 대결하기에는 자국과 잉글랜드와의 국력 차가 너무나도 크게 벌어졌음을 뼈저리게 통감하게 된다. 이후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 역시 개신교로 개종하고 잉글랜드와 종교적으로 동지가 되면서 잉글랜드와의 대립을 그만두고 관계를 개선하면서 이후 잉글랜드와의 동군연합, 종국에는 연합왕국으로 나아가는 초석을 마련한다.

스코틀랜드 장창병들은 잉글랜드 폴암병들에게 분명 패배한 것이 사실이기에, 당대 잉글랜드 군사학계 일각[17]에선 이 전투를 예시로 들며 폴암이 파이크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플로든이 특수한 사례임을 무시한 논리라고 당대에도 비판받았고, 잉글랜드군이 이 승리로 파이크 전술을 무작정 평가절하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 전투는 브랜스턴 언덕에서 벌어졌지만, 18세기부터 플로든 전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일설로는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저항이라고 볼 수 있는 컬로든 전투[18]이랑 플로든이랑 발음이 비슷해서라고(...)

6. 관련 문서

[1] 엄밀히 말해서 전장은 브랜스턴 언덕이었지만 보통 플로든 전투라 칭한다. 이유는 후술. [2] 스코틀랜드군 3-4만, 잉글랜드군 2만 6천 명. [3] 후일 헨리 8세의 다섯째 왕비가 되는 캐서린 하워드의 가문으로, 서리 백작 토마스 하워드는 캐서린 하워드의 친조부였다. [4] 에드워드 1세가 처음으로 스코틀랜드 지배권을 주장한 역사적인 성이었고, 더럼 주교가 관리하는 대스코틀랜드 전선의 핵심 요충지 중 하나였다. 로버트 1세도 노럼 공성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 있었으며, 제임스 4세 본인도 예전에 노럼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난 적 있었다. [5] 일설로는 성을 지키던 성주 부인 엘리자베스 헤런과 불륜하느라(...) 그랬다고도 하지만, 강력한 포병대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포병진지를 구축하느라 시간을 끌었다는 설 또한 존재하기에 단순히 ‘멍청한 오판’ 치부하기엔 어려운 결정이다. 제임스 4세가 닷새 후에 포드 성을 떠날 때는 군사적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성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 또한 후자의 가설을 지지한다. [6] 전래에 따르면 존 헤런, 일명 ‘헤런의 사생아’. 국경에 접한 포드 성주의 사생아로 악명 높은 국경 약탈자였다. [7] 다만 당연히 공성전과 행군 과정에서 손실병력이 있었으므로 실제 병력은 3-4만이었을 것이다. [8] 캐서린 하워드의 아버지 [9] 다 합치면 2만 1천 5백밖에 안 되는데, 비는 3천 5백 병력을 지휘하는 에드워드 스탠리 경은 아직 전장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10] 전사했단 게 다수설이지만, 제임스 5세 시대 문헌에 기록이 있어 사실 살아있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11] 제임스 4세가 진격 명령을 내렸단 설도 존재한다. [12] 고위 성직자가 왜 전사자에 포함되냐면 중세 유럽에서는 성직자들도 전시에 무장을 하고 전투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13] 헨리 8세의 친누나였다. [14] 섭정위에 오르는 조건 중 재혼하지 않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를 대놓고 무시했기 때문. [15] 앤 불린, 캐서린 하워드 모두 하워드 가문의 혈연이었다. [16] 모두 프랑스 원정에서 승리한 전투들이다. [17] 존 스미스(John Smythe) 경 등 [18] Battle of Culloden.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도중 프랑스의 지원으로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을 일으킨 재커바이트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정부군이 1745년 인버네스 근교의 컬로든에서 벌인 전투로 재커바이트 봉기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이다. 정부군이 대승을 거두어 재커바이트 봉기가 종결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재커바이트는 완전히 끝장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