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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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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 - 현대 대한민국(기준은 6.25 전쟁 발발과 그 이후)에 대한 미국의 행보를 제국주의로 서술하려면 근거 신뢰성 순위 8위나 그 이상의 자료가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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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국주의
美國帝國主義 | American Imper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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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미국 제국주의, 미제국주의, 미제[1]
영어 American Imperialism, American Empire
일본어 アメリカ帝国主義, 米帝
중국어 美帝国主义, 美帝
러시아어 Американский империализм
스페인어 Imperialismo estadounid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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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استعمارية أمريكي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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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 제국주의 또는 미제라고도 한다. 미국이 역사적으로 패권주의적 행보를 펼치거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펼친 사례들을 지칭한다. 또, 미국의 영향력 등과 관련해 사용되는 사례에 있어서도 서술할 수 있다.

미국은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명백한 운명이라는 명목으로, 영토를 서부로 팽창시켰고 이후에는 태평양 등의 해양을 통해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카리브해 연안에 내정간섭 및 식민지를 확장하였다.

냉전이 시작되고, 탈식민지 시대에 접어들자 미국은 식민지가 아닌 해외에 엄청난 수의 군사기지를 건설하여 전 세계 어디든 자국의 군사력을 신속하게 투사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했으며 군사적 확장과 수없이 많은 군사작전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개입주의 노선을 펼치며 세계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며 계속해서 패권주의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2]
20세기 들어 미국은 신(新) 제국주의 정책을 펼친다. 표준화와 미군기지가 핵심 전략이었다. 표준을 제정한다는 건, 머나먼 땅에서도 식민 지배의 관행을 지킬 수 있다는 얘기다. 나사 같은 조그만 부품부터, 도로 표지판 색깔까지 미국은 국제표준을 무시하고 미국식 기준을 적용해 나머지 국가들이 따라 오도록 했다. 식민지를 점령하지 않고도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때부터 식민지화는 세계화로 대체됐다고 책은 설명한다.

미국의 또 다른 제국주의적 면모는 전 세계에 800개 넘게 설치된 미군기지에서 드러난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 미국을 제외한 국가가 보유한 해외기지는 모두 합해 봐야 30여개에 불과하다. 미국의 해외 기지 수는 그만큼 압도적이다. 미군 기지가 세계 곳곳 전략적 요충지마다 점처럼 퍼져 있다는 점에서 미군기지는 ‘점묘주의 제국(pointillist empire)’이라 불리기도 한다.
미국의 ‘아닌 척 제국주의’, 결국 미국 발목 잡는다
미국 제국주의는 매킨리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열정적인 지도 아래 구식민지가 제국 권력으로 바뀐 그 새로운 순간을 보여주었다. 1898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일반적인 애국주의적 제국주의가 고조되었던 시기는, 미국이 군사적인 형태로 정착을 확대하면서 인접한 영토들을 획득하고 동화하던 정책에서 유럽의 모델을 따라 해외의 식민지들을 직접 획득하고 통제하는 정책으로 이동했던 그런 시기였다. 1898년에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에스파냐의 잔존 식민지들을 거의 모두 접수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중 눈에 띄는 곳이 필리핀과 쿠바와 푸에르트리코이다. 이제 미국은 미국의 군사적 통치에 맞선 푸에르트리코의 저항, 그리고 필리핀에서 후크 게릴라에 의해 전개된 저항을 억압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1902년에 J. A. 홉슨이 이미 지적했듯이, 쿠바, 필리핀, 하와이는 더 성대한 연회를 위해 식욕을 돋게 하는 전채 요리에 불과했다.


오스터함멜은 미국은 거대 식민 제국을 갖지 않는 제국주의의 사례라고 주장했다. 그래도 미국은 몇몇 식민지들을 갖고 있었지만, 그 말은 역시 미국 제국주의의 일차적인 경제적 동기를 정확하게 특징짓고 있다. 그래서 미국 제국주의는 직접적인 식민 통치보다는 간접적으로 통치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형태를 더 선호했던 것이다. 식민 열강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에 독립은 부여하되 경제적 영향력이나 통제력은 계속 유지하면서 이 미국식 형태를 따라 자신들을 변모시키기 시작했을 때, 식민주의는 신식민주의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구식민 열강들은 단지 상대적인 자율성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미국 제국주의의 독특한 점은 그것인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J.C. 영, 김택현 역,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 박종철출판사, 2005, 87~89쪽.
“한국의 좌·우파 공히 미국을 너무 모른다.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다. 미국이 절대 악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세계가 결국 제국에 의해 운영된다면, 나는 그래도 중국보다는 미국이 낫다고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나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통해 자신들이 가는 길로 한국보고 오라는 게 아닌가. 철저히 이익을 중시하는 국가다.”
(신동아)“제국이 세계를 운영한다면 중국보다는 미국이 낫다”
대외정책에 관한 카터의 궤변이 어떠했든 간에,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내내 모종의 근본적인 원리가 작동됐다. 미국 기업들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규모로 전 세계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 이르면, 7대 은행을 비롯한 약 300개의 미국 기업이 순 이윤의 40%를 해외에서 벌어들였다. 이들 기업은 다국적기업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고위 중역의 98%가 미국인이었다. 이 다국적기업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미국과 소련 다음으로 세계 3위의 경제집단을 이루게 됐다.


이 세계적 규모의 기업들과 가난한 나라들 간의 관계는 오랫동안 착취의 관계였는데 미국 상무부의 수치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1950~1965년 사이에 유럽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이 81억 달러를 투자해 55억 달러의 이윤을 획득한 데 반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38억 달러를 투자, 112억 달러의 이윤을 획득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그 수치가 각각 52억 달러와 143억 달러였다.


이것은 고전적인 제국주의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천연자원을 보유한 지역이 그 자원을 강탈함으로써 권력을 갖게 된 강대국들의 희생양이 됐던 것이다. 미국 기업들은 다이아몬드, 커피, 백금, 수은, 천연고무, 코발트 등 천연자원의 100%를 가난한 나라들에 의존했다. 이들의 기업은 망간의 98%와 크롬과 알루미늄의 90%를 해외에서 얻었다. 그리고 일부 수입품(백금, 수은, 코발트, 크롬, 망간)은 20에서 40%를 아프리카에서 들여왔다. 백악관의 주인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간에, 대외정책의 또 다른 기본원리는 외국 군 장교들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미 육군은 파나마 운하지역에 미주군사학교를 설치, 라틴아메리카의 군 지도자 수천 명을 배출했다.
하워드 진, 유강은 옮김, 미국 민중사 2, 이후, 2008, 375쪽.

현대에 와서 다른 식민제국들은 모두 해체되거나 식민지의 대부분을 잃은 반면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며 아직도 패권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북한, 舊 공산권[3], 라틴 아메리카[4][5], 아랍 국가[6], 이란 반미 성향 국가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다. 미제 또는 미 제국이란 당연히 실제로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멸칭의 성격을 가지는 용어다.[7]

다만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미국의 지나친 팽창주의, 해외 정책들을 비판할 때 거론하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이를 자랑스러워하며 네오콘 등이 긍정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출처]

미제라는 말을 한국에서는 NLPDR만 쓴다는 편견이 있지만 그 외의 좌파들도 사용을 거부하지 않는 표현이다.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로 딱히 반미 민족주의 계열이 아니라도 사민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계열을 가릴 것 없이 미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미국의 팽창주의 패권의 전략적 지침들은 자유주의적 패권, 민주평화론, 개입주의다. 이는 전세계를 미국이 설계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도 아래에 놓고자 하는 것으로 전세계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최대한 널리 퍼트리고 필요하다면 전쟁을 통한 무력 행사로 폭력적인 정권교체도 불사했으며[9] 자유 무역을 기치로 타국들에 대한 시장 개방을 압박하고 세계무역기구 체제 구축하고 세계무역기구의 규칙을 따를 것을 강요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미국은 자신이 세운 새로운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전세계 다른 모든 국가들도 궁극적으로 함께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중국 등도 결국 중산층이 생기고 차츰 민주주의로 이행해 결국 미국이 내세운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될 것으로 확신했다.

2. 역사

2.1. 미국 식민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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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냉전

2.2.1. 대한민국, 북한

(1) 군정에 대하여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1위 기권 4,686명 98%
2위 위생 시설 96명 2%
(2)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1위 식량 정책 2,534명 53%
2위 산업 운영과 주택 관리 1,482명 31%
1946년 8월 11일 한국여론협회가 종로, 본정 입구, 노량진에서 통행인 4,7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본의 패전으로 독립한 한반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따라 현지인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한반도의 분단 및 정부 구성을 강행한 것이 미국 제국주의의 한 예로 꼽히곤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분단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으며, 독일과 같은 전쟁 책임국가도 아닌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이 결정된 것은 제국주의로 볼 여지가 있다. 또한 미국은 1945년 9월 9일 총독부의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낸 뒤,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확실히 표명했다. 특히 미군정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전면 부정하고 총독부 행정을 유지하는 한편, 친일파들을 그대로 요직에 두어서 민중들의 불만을 샀다.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시한 독립군 계열이 한반도 정세를 주도할 경우 우익 민족주의 성향은 파시즘으로[10], 좌익 민족주의 성향은 공산주의[11] 경도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물론 친일세력 재기용은 미국 본국의 입장이라기 보다는 맥아더와 하지가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에 더 가깝긴 하지만, 미군정 역시 미국 정부의 산하조직이었으므로 최종 책임주체가 미국에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제주 4.3 사건, 대구 10.1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등에서도, 평화적으로 해결될 여지가 있었던 일을 반란으로 키우고, 공산세력의 반란 진압으로 끝낼 수 있었던 일에서 민간인 학살과 같은 전쟁범죄를 직간접적으로 유도하는 등, 자국의 정치적 이해관계 관철을 위한 무력 투사를 주저하지 않았다.[12] 물론 경위야 어찌되었건 반란 진압 자체는 필요한 일이었고, 해방정국의 혼란상이나 공산주의의 위협 등을 감안할 때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완전히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친일청산 유예든 임시정부 부정이든 반란 진압이든, 한국인들 사이에 여론의 합의가 이루어진 뒤에 미국이 그 결정을 지원하는 구조가 되었으면 모를까, 미국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현지인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다른 나라의 정책을 결정한 것은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비록 소련이 북한에서 저지른 것과 같은 규모에 이른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미군도 남한에서 여러 종류의 약탈을 자행했다. 뿐만 아니라 미군 점령 3년 동안에 강간의 보고들은 계속 되었으며, 1945년에는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의 일부 건물이 미군의 병영으로 징발되어 그 결과로 도서관과 연구실에 많은 약탈과 파괴가 행해졌다. 또한 미군이 38도선을 넘어 오는 난민들의 금품을 몰수했다는 증거는 그것이 상습적이었음을 암시할 정도로 많다. 실제로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미군정 기간을 거치며 좌우 이념대립으로 대략 10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정 하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행위가 미군 점령의 일반적 성격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침소봉대지만, "미국이 점령할 명분이 마땅찮은 지역을 점령하면서" "현지인(한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적, 고압적 태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로 볼 여지가 있다. 비록 전쟁 중의 일이라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이러한 고압적인 태도는 한국 전쟁을 일으켜 적성국이 된 북한을 상대로 막대한 전략폭격을 실시하는 와중에, 동맹국이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입은 피해를 두고도 유감 표명은 커녕 무심했던 점에서도 드러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 문서를 참조.

2.2.2. 일본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을 점령통치하는 과정에서도 미국은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일본 본토에 미군이 주둔했으며, 더글러스 맥아더를 중심으로 GHQ가 창설됐는데, 이후엔 도쿄 군사재판도 열고 일부 전범들이 처벌받기도 했으나, 대다수 전범들은 살아남았다. 맥아더가 통치하는 미점령군은 극우 세력(자유당)과 자유주의 세력(민주당)이 연정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대적하도록 만들었고, CIA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은 민주당과 자유당이 함께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이 민주자유당이 바로 1955년 일본의 자유민주당 즉 자민당이 됐다.[13] 맥아더의 일본 점령에서 일본공산당을 포함한 잔존한 좌파 조직들은 반미투쟁을 전개했는데, 당연히 맥아더 정부에 의해 진압당했다. 이는 한때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조했던 이들이 이후 정치인이 된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었다.

2.2.3. 동남아시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필리핀에서 급진주의자들이 지지를 받자 미국은 이들의 시도를 분쇄했다. 소위 후크발라합으로 대표되는 필리핀의 좌파세력들은 일본에 맞서 싸웠지만, 맥아더의 필리핀 점령이 시작되자 탄압받았으며 미군정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결과 필리핀에는 마르코스로 대표되는 우익 독재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한때 자신들의 동맹[14]이었던 호치민의 요구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는 프랑스에게 전쟁 비용을 지원했다.[15] 한국전쟁이 시작되던 1950년 6월 베트남국의 수도 사이공에 소수의 미군사고문단이 입성했고, 트루먼 행정부는 시작부터 바오다이 꼭두각시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1,000만 달러를 원조했다. 이러한 미국의 원조는 1951년부터 지원을 시작하여 1954년에는 전비 80%를 지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량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베트민 기지를 폭격하고, 전술핵 3발을 투하하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었다. 베트남 공화국 공산주의자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을 세워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을 지지했고,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통일을 위한 총선을 실시해야 했으나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1949년 프랑스가 형식적으로나마 세운 꼭두각시 정부인 바오다이 정부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와 제네바 회담 당시에도 존재했었는데,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의 반공주의 정책은 대중성이 전혀 없는 친불 꼭두각시 정부인 바오다이 정부를 지원하는 것이었으며, 바오다이 정부로는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1954년 이후부터 미국에서 반공 가톨릭 인사들과 인맥을 형성한 응오딘지엠 정부를 지원하고, 또 친미정부를 세운 것이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초기에 대락 12,000명 이상을 처형했으며,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구금했다. 이러한 백색테러 적인 정책은 1960년대 케네디 정부에 와서 더 확장되었으며, 앞에서 언급된 그리스 내전 시기의 전술이 더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더 나아가 네이팜 폭격과 에이전트 오렌지로 대표되는 맹독성 고엽제를 무차별 살포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사실상 그 나라 민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빨갱이'로 설정해놓고, 작전으로서의 학살을 동반한 군사작전을 헬기와 장갑차 그리고 탱크와 항공기를 동원한 최신식 무기를 사용해가며 전개했다. 심지어 미군고문단 출신이자 역사학자인 제프리 레이스에 따르면, 응오딘지엠 정부 시절의 양민 학살은 초기 베트민이나 베트콩이 선별적으로 자행한 테러나 학살보다 규모나 잔인성 면에서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이런 양민학살 정책은 대다수 농촌 농민들(특히 메콩 델타 지역)이 베트민과 베트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1964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 통킹만 사건을 일으켰다는 조작[16]을 동반한 명목으로 베트남 전쟁을 확전하며 개입했으며, 대규모 미군부대가 투입된 시점에서 이러한 무차별 살상의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해 졌다. 1968년 3월 16일 5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4시간 동안 학살한 미라이 학살은 진상규명이 될 학살일 뿐, 1971년 초 기자들에게 여단 정도 크기의 모든 미군 부대는 어딘가에 각자의 미라이를 숨겨두고 있다고 얘기했을 정도다. 즉 이러한 학살행위는 소위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가 설정한 자유사격지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부터 1972년까지 미국은 북베트남을 대상으로 무차별 북폭을 전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 시기 호치민 사후 북베트남의 지도자가 된 레주언에 따르면, 북베트남을 대상으로 핵폭탄 투하 협박만, 최소 13번 이상 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던 1972년 라인배커 작전 때도 닉슨은 핵폭탄 투하를 공공연하게 헨리 키신저에게 주장했었다.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로버트 맥나마라 추산에 의하면 미국에 의해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죽었다.[17]

베트남 전쟁을 조작하고 개입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도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으며, 라오스에서는 35만 명이 사망했고, 캄보디아에서는 최소 40만에서 많게는 80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미국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투하한 폭탄의 양은 750만 톤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사용한 폭탄보다 3.5배나 많은 양이었다. 순수 폭발력으로만 따지면,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를 600개 이상 투하한 정도의 폭발력이다. 아무리 공산주의자를 잡는다는 명분이 있었다고 하지만,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국가들에게 이렇게나 많은 폭탄을 투하했다는 점에서 심히 그 도덕성이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캄보디아에서는 미국이 군사적인 침공을 감행하기도 했다. 1969년 닉슨은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베트남에서 단계적인 철군 절차를 따랐는데, 1970년 베트콩 소탕을 목적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캄보디아를 침공함으로써, 제3세계 노선을 추구하던 노로돔 시아누크 정부를 전복시키고, 친미성향의 군부 지도자인 론 놀을 중심으로 친미정부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에 무차별 폭격이 이어졌고, 수십만 명이 사망하자 대다수 캄보디아인들이 이후 킬링필드를 저지르게 될 주체인 폴포트와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게 되는 역효과를 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인도네시아에서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치공작 및 내정간섭 행위가 지속됐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인 수카르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에 맞서 무장투쟁 및 협상을 전개하여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쟁취했지만, 1955년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카르노가 제3세계 노선을 천명하면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제재와 정치공작을 자행했고, 1960년대 초반부터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반미정서가 강해졌다. 이렇게 되자 수카르노는 더더욱 반미적인 노선을 표명했는데, 그 결과 1965년 미국은 군부 장성중 하나인 수하르토를 통해서 쿠데타를 획책했다.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미국의 CIA는 수하르토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미국의 지원을 등에업은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대학살을 전개했다. 그 결과 최소 100만 명에서 많게는 300만 명의 민간인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다. 이 중 10~20만 명은 현재 제주도처럼 휴양을 위한 관광지인 발리에서 죽었다.

2.2.4. 남동유럽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는 나치의 지배를 받았었고, 당시 그리스 공산당 휘하에 있던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는 나치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1944년 나치가 물러난 이후 영국이 들어왔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대신해서 미국이 그리스 내전에 개입했다. 그리스 내전 당시 미국은 그리스 사회주의 세력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소위 왕당파들을 지원했고, 미국은 수백 명의 군사 고문단과 수만 톤의 전쟁물자를 이들에게 지원했으며, 초토화 작전, 네이팜 폭격, 노조파괴, 주민들 강제소개 등 이후 제주 4.3 사건과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하게 될 인권 유린 및 학살적인 전술을 그리스 내전에서 이용했다. 이에 따라 10~15만 명의 그리스 인이 사망했고, 80만 명이 난민이 됐으며, 1949년에 우익 독재정부가 그리스에 건설됐다. 우익 독재정권은 1974년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지속됐다.

1945년 알바니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이후 총선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민주전선으로 출마해 전 의석을 획득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온 선거 감시단은 이것이 공정한 선거였음을 마지못해 인정했지만, 물론 이 미국과 영국에서 온 선거 감시단이 선호한 알바니아 후보는 무솔리니 정권에 부역한 자였다. 이후 냉전 초기 영국과 미국은 비밀리에 엔베르 호자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영국의 경우 1946년부터 알바니아의 사회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실질적인 정치공작 행위를 실행한 것은 1949년부터였다. 미국의 CIA와 영국의 MI6는 과거 파시스트들에게 협력한 인사들을 알바니아에 침투시켰으며, 이 요원들의 경우 말타와 영국 그리고 서독에 있는 기지에서 훈련받았다. 그리고 이 작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지원한 이탈리아도 협력했다. 흥미롭게도 이 비밀작전의 대부분은 실패했으며, 1952년 봄이 돼서야 종결됐다. 대략 300명 이상의 MI6와 CIA가 침투시킨 요원이 사살됐고, 또 적잖은 요원들이 체포되어 알바니아 감옥에 수감됐다.

2.2.5.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냉전 시기 미국은 반공을 내세워 쿠바의 바티스타 군사정권의 지원을 시작으로[18]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비롯한 중남미의 군부 쿠데타를 지원해 친미 군사정권이 세워지게 한다. 1970년 칠레에서 세계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정권을 잡자 미국의 닉슨 정부는 이를 전복시키기 위해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도왔고, 그 결과 아옌데는 쿠데타 군대에 맞서 싸우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 칠레에는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서며 공산주의자 색출을 단행한 당일부터 수개월 기간 동안 경기장에서 최소 3,200명을 학살하며 시작했고, 피노체트가 집권한 군사독재 정부 기간 동안 최소 3만에서 6만 명이 그런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이후 중남미 국가들에서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된 이후, 많은 중남미 국가들이 친미 진영에서 반미 진영으로 돌아서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나 1970~8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칠레 6개국의 공동 공산주의 척결 운동인 콘도르 작전으로 5~10만명 정도 되는 남미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잔혹한 고문에 시달렸는데, 이것을 미국 CIA가 지원했다.

특히나 과테말라의 경우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친미 정부의 학살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1954년 아르벤스가 실각한 이후 친미정부가 들어서자 1960년부터 쿠바와 니카라과의 지원을 받은 좌파 반군들이 속속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1996년까지 자그마치 36년간이나 내전이 지속되었다.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는데, 이 보고어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이나 됐다.

엘살바도르 또한 미국이 지원한 우익들과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폭력과 학살을 경험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자국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을 게시했는데, 리오삼풀(Rio Sumpul)의 대규모 학살 사건의 경우,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군대가 벌인 이 학살로 최소 600명이 죽었다. 1981년 레이건 행정부로 넘어오면서 엘살바도르 친미 정부에 의한 인명 피해는 13,000명을 초과했으며, 친미정부 기간을 통틀어 백색테러와 학살로 최소 7만 명 이상의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50만 명에 가까운 엘살바도르 국민이 미국 이주를 시도했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아이티에서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뒤발리에 가문이 1950년부터 대략 30년간 독재를 했고 국가 자체가 황폐화되었다.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준 군사 조직인 통통 마쿠트는 미군에게 훈련을 받았고, 그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5~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학살당했다.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공포와 거짓으로 사회 내 반공 및 반민중 정서를 심화했다.

냉전 말기에는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그레나다 파나마를 침공( 그레나다 침공& 파나마 침공)하여 반미정부를 몰락시키고 친미정부로 교체했다.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소위 이란 이란-콘트라 사건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이란에게 무기를 팔고, 그 자금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콘트라 우익 반군을 지원했다.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을 통해 소모사 독재정권을 축출하고 니카라과에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카터 정부때부터 극우 성향의 군부를 지원했는데, 이들이 콘트라 반군이었고, 콘트라 반군은 로널드 레이건 정권기 CIA의 대대적인 도움을 받아 학살, 고문, 폭행, 강간, 사지절단 등과 같은 악행들을 저질렀으며, 수만 명이 콘트라 반군에 의해 학살당했다.[19] 당연히 로널드 레이건은 이들을 자유투사로 치켜세웠다. 1986년에는 카다피의 리비아 정권하고 갈등이 있자, 리비아를 공습하여 카다피를 암살하려 했었다.

2.2.6. 아프리카

이러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는 아프리카에서도 일어났다. 콩고는 1960년 파트리스 루뭄바와 같은 독립운동 세력들의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했는데, 미국은 루뭄바가 친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를 들어, 과거 루뭄바의 동료이자 전 벨기에군 부역자인 모부투를 내세워 벨기에와 함께 루뭄바를 제거했다. 아프리카의 모잠비크에서는 CIA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보안대가 조직한 레나모(Renamo)가 1980년 이래로 90만 명의 마을 사람들을 대량학살하고 굶어죽게 했으며, 이들의 목적은 모잠비크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독립된 국가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또한 CIA는 1975년에 일어난 앙골라 내전 당시 앙골라해방인민운동(MPLA)를 진압하기 위해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으로 불린 유니타(Unita)를 지원해 내전 기간을 통틀어 100만 명 이상의 앙골라인을 죽였다. 이때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벌이 조나스 사빔비였고, 사빔비는 1992년 선거에서 패배한 후 다시 파괴적인 전쟁을 지속했던 인물이었다.

2.3. 탈냉전

소련 해체되고, 거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개입하여 세르비아를 패배시켜 자신의 힘을 세계에 과시하였다.

결국 이어진 것은 빈번해지는 군사 활동이었다. 일례로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1998년에 수단 공화국 지역에 있는 제약공장에 미사일을 퍼부어서 때려부셔놓았다. 미국은 생화학무기 제조 시설이었기에 폭격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생화학무기는 커녕 그냥 제약공장이였고 분노한 수단에서 미국에게 보상을 요구하며 미국의 제약공장 공격 행위에 대해 유엔 안보리 조사를 촉구했다. # 이에 미국에서는 생화학 무기 생산 증거가 확고하다고 주장했으나 수단은 무슨 헛소리냐며 유엔이든 미국이든 누구라도 와서 조사하라고 목청을 높였고 아랍연맹은 제약공장 폭격은 침략의 만행이라고 규탄했으며 #, 수단주재 독일 대사 또한 미국의 생화학무기 생산 주장에 부정적 견해를 드러냈다. 미국 주요 언론지인 뉴욕타임즈도 미국 정부 당국자가 주장한 극비의 군산복합체가 아니라 의약품과 가축병 치료제를 생산하던 곳이라고 보도했다. 영국 외무부도 미국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

2.4. 테러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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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h and his advisers never quite grasped that the anti-Americanism coursing through the Islamic world was not a result of Arabs hating American values but a consequence of their resentment of American deeds—Washington’s support of repressive regimes, its embrace of Israel, its sanctions policy in Iraq, its military presences in Muslims’ Holy Land (Saudi Arabia), its quest for oil, and its hegemonic role in their neighborhood,” Leffler writes.
“부시와 그의 보좌관들은 이슬람 세계를 관통하는 반미주의가 아랍인들이 미국의 가치를 싫어한 결과가 아니라 미국의 행위에 대한 분노의 결과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라크에서의 정책, 이슬람교도의 성지(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군사 주둔, 석유 추구, 이웃 지역에서의 패권적 역할”이라고 Leffler는 썼습니다.
(foreign policy)The Lessons Not Learned From Iraq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이라크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켜 이라크의 바트당 정권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켰고 미국을 추종하는 친미 과도 정부를 수립했다.[20]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도 리비아 내전에 개입하여 공군력을 동반한 무차별 공습에 나섰고, 반미 정권인 카다피 정권을 전복시켰다. 그 결과 리비아가 회생불능 수준의 피해를 받은 것도 덤. 역으로 대다수 리비아인이 카다피를 그리워하며, 카다피 차남이 현 리비아 대선에 도전할 정도로 새 정부의 무능력을 방치했다. 지금도 미국은 미군을 많은 국가들에 주둔시키면서 세계 여러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2011년에서 2014년까지 끝내겠다는 공약을 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미군 병력을 증강했다. 2009년에서 2010년 사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미군 병력은 최소 10만 명을 돌파하기에 이르렀었다.

미국은 이란에게도 살인적인 제재와 압력을 넣고 있다. 이란 정권이 극단적으로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2020년 1월 솔레이마니를 대놓고 살해하여, 미국 이란간의 전쟁 위협을 조성했었고, 심지어 미국은 이란에 대한 제재 차원에서 코로나-19 유행 시기 자국민들을 위해 개발한 앱을 구글 앱스토어에서 삭제했다. 이 또한 미국 제재의 영향이었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실패했으며 중동은 그야말로 미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미국이 부당하게 일으킨 이라크 전쟁과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이 이라크 안정화에 실패하면서 발발한 이라크 내전과 내전으로 인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준동으로 인해 이라크는 20년 가까운 혼란에 휩쌓이면서 65만 명의 이라크인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은 아예 미국이 세운 친미 정부가 탈레반에 의해 멸망하면서 도로 탈레반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미군은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맺어가며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해야만 했다.

미국이 중동에서 일으킨 전쟁들의 부작용과 후폭풍은 미국의 동맹인 유럽국가들에게도 직접 영향을 미친다. 유럽 난민 사태가 발생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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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20년 전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는 명분으로 이라크를 포함한 중동지역의 민주주의 회복을 내세웠지만, 중동 국가 국민 가운데 그에 동의하는 비율은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중동지역 국가의 자결권을 존중하고 있느냐는 응답도 동의하는 비율이 평균 10% 내외에 머물렀다. 특히 이 지역 유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자, 미국 동맹인 튀르키예에서 미국이 자국의 자결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응답 비율이 높았다. 중동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최근 이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국일보>미국, '이라크 민심 잡기' 20년 전쟁에서 패배
미국이 일으킨 테러와의 전쟁과 그로 인한 후폭풍 및 부작용의 여파는 중동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기 때문에 심각한 재정적자에도 수십년간 중동에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가며 중동에 개입했으면서도 중동에서 미국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바닥을 기는 실정이다.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 20주년을 전후해 중동지역 15개국의 미국 대외정책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미국의 민주주의 정착, 미국의 중동국가들에 대한 주권 인정, 경제 기여도등은 전부 부정적 평가를 받았으며 심지어 미국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거나 받고있는 국가들조차도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이 미국이 공을 들인것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였다. 결국 갤럽은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이였던 이라크 전쟁에 대해, 결과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2.4.1. 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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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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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제1차 리비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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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핵폐기-후 보상'을 수용한 이후 리비아 내전에서 미국과 나토의 개입으로 인해 크게 타격을 받은 무아마르 카다피가 몰락하게 된다. #
리비아와 이라크의 두 가지 사례가 흥미로운 점은 대량살상 무기를 포기한 이후 정권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

리비아에서 일어난 시위를 시작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언론들은 카다피에 대한 근거가 불명확한 가짜뉴스들을 무분별하게 살포했으며, 정작 NATO군의 공습으로 수많은 인명이 죽은 것에 대해선 침묵했다.

결국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무아마르 카다피는 이라크와 함께 국제 핵확산 저지 움직임에 매우 안좋은 선례를 남겼는데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국가 정치인들이 이후로는 북한을 포함하여 핵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2.5. 남미

1998년 베네수엘라에서 좌파 성향의 지도자 우고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자, 베네수엘라 좌파 정부에 대한 경제제재와 색깔혁명을 통한 체제 전복 목적의 공작 행위를 주기적으로 행해왔다.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사후에도 미국의 경제제재가 지속됐다. 경제정책연구센터(Centre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8월부터 베네수엘라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제재로 인해 식료품과 의약품 접근성이 떨어져 약 4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러한 제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파나마 침공에서 주권국에 대한 내정불간섭원칙을 무시하여 논란이 됐다. #

2.5.1. 먼로 독트린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적극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자신의 몫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1823년 마침내 미국은 먼로독트린을 선언한다 어떻게 보면 이 선언은 미국이 자신의 이웃국가를 열강의 착취로부터 지켜주고자 하는 충정의발로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전개된 실상은 그와 정반대의 해석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쉽게 말해서 이제 아메리카 전대륙은 미국이 혼자 알아서 할 테니 유럽제국은 더 이상 신경 쓰지말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가 시작됨을 만천하에 알리는 서곡이었고 유럽제국에 대한 일종의 도전장이었다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역사적 관계와 문학적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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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불법 군사 쿠데타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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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이란-콘트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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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해 및 관련 사례

3.1. 앵글로아메리카

3.1.1. 아메리카 원주민

미국 제국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자세한 것은 앵글로아메리카 원주민 항목과 인디언 전쟁, 눈물의 길 항목 참조

3.2. 하와이 왕국

1887년 사탕수수 대농장을 경영하는 미국인 이주자들이 선거에 개입해 친영 내각이 무너지고 친미 내각이 수립됐다. 1893년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미국과의 합병을 강행하기 위해 헌정을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 미국은 군함과 수병을 보내 이 음모를 지원했다. 하와이의 왕정은 폐지되고 공화국 수립이 선언되었다. 이 때 영국, 미국에 이어 하와이에 가장 큰 이해 관계와 거류민을 갖고 있던 일본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하에 순양함을 보내 미국을 견제하려 했으나 영국의 불분명한 태도로 인하여 성과를 얻지 못했다.

1895년 절대 다수가 왕당파인 하와이 원주민들에 의한 반격이 단행되었으나 미국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한 공화국 정부는 계속해서 합병 공작을 벌여 결국 1898년 8월 12일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은 하와이의 미국령 편입을 선언해 하와이 준주로 삼았다. 미국 의회는 1993년 11월에야 하와이 병합 과정이 불법이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공식 사과하는 양원 합동 결의를 했다.
(출처)[MT교육 오늘의 역사] 1898년 오늘 하와이가 미국에 합병되어 멸망

미국에서 일방적으로 병합시켜서 멸망당했다.

3.3. 이란 제국

이란의 석유를 얻기 위해 이란의 황제 주도 친위 쿠테타를 사주하여 세속주의,자유주의적 중도좌파 성향의 모하메드 모사데크 정권을 축출했다.[21] 모사데크 축출 이후 이란의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슬람 근본주의의 토양이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3.4.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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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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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곤 페이퍼에 나온 것과 같이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프랑스의 식민주의를 지원하는 형태로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다. 항불전쟁 이후 남베트남에 친미반공국가를 유지하려는 그 과정에서 적잖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승리를 바라면서 남베트남을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했던 미 군사고문단 출신인 존 폴밴(John Paul Vann)마저, 남베트남 정부를 지지하는 대중적인 정치 기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 정부는 농촌주민 및 도시 하층주민의 착취를 지향하고 있다. 사실상 현 정부는 베트남 상류계층으로 프랑스인을 대치시킨 프랑스 시민정부체제의 연속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22]

3.5. 라오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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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라오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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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겠다고 미국에서 1964~73년 라오스에 선전포고조차도 하지 않고 비밀리에 무차별 폭탄을 투여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이때 미국이 저지른 공격을 ‘비밀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비밀전쟁 동안 58만 차례가 넘는 무차별 폭격을 퍼부어댔으며, 무려 총 2억7천만 발이나 되는 폭탄을 사용한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인해 라오스에서는 최소 5만 여명의 사상자와 민간인 대량 학살이 발생했으며, 미국이 이때 라오스를 공격하면서 쓴 폭탄들 중 불발탄이 아직도 남아서 라오스를 계속 괴롭혔다.[23]

수십년이 지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라오스를 방문했을 때 미국의 폭격에 라오스 민간인들이 죽어나갔음을 인정했다. (출처)

3.6.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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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필리핀 제1공화국을 무력으로 강제 점령하고 미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필리핀인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미국은 원주민 2천500여 명을 학살해놓고도 # 원주민들에게서 호의로 성당의 발랑기가의 종을 선물을 받았다고 정신나간 역사 왜곡을 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영국인 작가가 ‘개들을 교살하라(Hang The Dogs): 발랑기가 대학살 역사의 진실’을 통해 미국의 역사 왜곡을 폭로 #하면서 선물로 받은게 아닌 미국이 필리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전리품으로 발랑기가의 종을 강탈한 것임이 드러났다.

3.7. 이라크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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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바그다드 국제공항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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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미국이 주장하며 "이라크 전쟁의 명분"으로 꺼냈던 대량살상무기는 없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불법 침공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 미국 제국주의 및 팽창 정책에 대한 비판의 예시로 베트남 전쟁과 함께 자주 거론된다.

바그다드 국제공항 공습은 주권 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군사 작전으로 유엔에서 솔레이마니 사살에 대해 불법으로 규정했음에도 # 미국에서는 불법이 아니라고 우기며 적반하장으로 유엔에게 비난을 해댔다.

미국의 이라크전 수행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10만 명이 넘고, 이 가운데 3분의 2인 6만6000여 명이 민간인 #임에도 미군에서는 이를 은폐한다. 많게는 20만 명에서 65만 명의 이라크인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3.8. 멕시코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미국-멕시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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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멕시코의 관계 18초 요약
‘명백한 운명’속에 잠재되어있던 제국주의적 요소가 발현되면서 함께 나타난 최악의 부작용은 인종(차별)주의였다. 텍사스 정신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추앙받는 샘 휴스턴(Sam Houston)은 멕시코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한 연설에서“미국의 개척자들이 인디언 부족들을 무찌르고 텍사스에서 그들을 쫓아냄으로써 야만의 황야를 문명인의 터전으로 개조할 수 있었듯이,”“미국인은 이번에도 멕시코인들로부터 빼앗은 땅에서 문명인을 위한 행복과 번영을 일구어낼 것이다”라고 자부했다(Hietala 194쪽에서 재인용). 멕시코 정복을 프런티어 신화의 알짜 중의 하나로 보는 미국학자 리처드 슬랏킨(Richard Slotkin)은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보다 명쾌하게 정리한다.

19세기 미국의 파워 엘리트들은 멕시코 전쟁을“규모가 확대된 인디언 전쟁”(a grand-scale Indian war)으로 간주했고(181), “야만을 정복한 신세계에 민주주의와 경제 진보의 장을 건설하 는 일이 앵글로색슨족의 사명”이라고 못 박았다(175).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이 체결될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존 칼훈은 한술 더 떠서 “만약 멕시코가 합병되어 미국의 준주가 된다면 멕시코의 잡종 인구들이 인종 적으로 순혈인 미국인들과 평등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므로 결단코 거기까지 가서는 안 된다”(Hine and Faragher 211쪽에서 재인용)고 목청을 높였다. 다음장에서 논의하겠지만, 미국의 사병(私兵) 집단과‘명백한 운명’간의 연관성을 파헤치는 로버트 메이(Robert May)가 지적하듯이, “명백한 운명의 인종주의적 경향은 멕시코와의 정전 이후 중미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간 여러 군소 군사원정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다”(163)
국경의 틈새에서‘명백한 운명’을 욕망한 희생양과 사생아 —코맥 매카시의『핏빛 자오선』다시 읽기 #
1840년대 중반, 미국은 멕시코에게 캘리포니아를 매입하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제임스 폴크 대통령의 제안은 멕시코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멕시코 정부는 교섭을 거부했고 미국 외교관을 만나는 것 조차 거부했다. 협상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됐던 존 슬라이델은 폴크 대통령에게 평화적인 협상으로는 미국이 원하는 영토를 차지할 수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멕시코 정부가 계속해서 교섭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원하는 영토를 차지 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보다 강경한 정책만이, 멕시코를 협상으로 끌어 들일 수 있습니다. ”
[다시 듣는 이야기 미국사 96] 멕시코 전쟁

1846년 5월 13일 미국에서 영토 늘리기를 위해 일방적으로 멕시코에 선전포고하여 전쟁을 개시하고 승전을 이유로 영토를 강탈한다.

3.9. 캄보디아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호치민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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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와 마찬가지로 호치민 루트를 차단한답시고 무차별 폭격을 퍼부은 결과 캄보디아인 40만명이 사망했다. 1970년에는 론 놀의 쿠데타를 지원해 캄보디아 왕정을 축출하고 크메르 공화국이 세워지는데 일조했으나 5년만에 망해버리고 크메르 루주가 집권했다. 크메르 루주는 일명 킬링필드라는 학살로 악명을 떨치다가[24] 1979년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으로 베트남에 의해 축출되고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괴뢰정부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들어선다. 축출된 이후에도 크메르 루주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펼쳤는데 미국은 베트남을 견제한답시고 학살을 벌였던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3.10. 칠레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1973년 칠레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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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973년 칠레 쿠데타 지원으로 인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집권했으며 그 결과 칠레는 오랜 기간 독재에 시달려야 했다.

3.11. 아르헨티나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더러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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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과테말라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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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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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의 토지개혁에 당시 과테말라 전체 농지의 70%를 소유한 미국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반발했고 이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과테말라에 강제적인 정권 교체에 착수, 쿠데타를 지원해 아르벤스 정부를 무너트렸다. (출처:메일경제)

3.13. 콜롬비아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파나마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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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에서 파나마 운하는 약소국을 대상으로 한 미국 제국주의의 호전성과 착취의 단면을 드러내는 영토 약탈이며 국가적 불명예일 뿐이었다
'제국의 초상: 미국의 파나마 운하 건설과 파나마의 은폐' #

원래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일부 지역이였으나 미국에서 강제로 콜롬비아에게서 파나마를 떼어낸 후 독립시켜 버린다. 목적은 파나마 운하 지대.

3.14. 니카라과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이란-콘트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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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파나마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파나마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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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은 파나마 침공을 감행했으며 이에 유엔은 미국의 침공을 불법 행위로 규정했다. 당시 미국이 파나마를 공격하면서 300명가량의 파나마 군과 214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출처))

3.16. 조선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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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가쓰라-태프트 밀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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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으로 와서 약탈을 일삼은 제너럴 셔먼호가 침몰당한 것을 빌미로 일방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또한, 자신들의 필리핀 식민 지배를 위해 일본의 조선 합병을 합의봤다.

3.17. 리비아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제1차 리비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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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리비아 내전 당시 공습을 하여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를 발생시킨 다음 카다피 정부를 무너트렸고 리비아는 그 후 갑작스러운 정부의 붕괴로 인하여 2차 리비아 내전이 일어난다.
오바마 대통령은 10일(현지시간) 폭스뉴스 선데이 인터뷰에서 "리비아 사태에 개입하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 날(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를 위해 계획하지 않은 것이 아마도 최악의 실수"라고 말했다.

리비아에서는 '아랍의 봄' 여파로 2011년 10월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 정치적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권력공백 속에 최근에는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리비아를 새 거점으로 삼는 등 이슬람 극단주의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재임 중 최악의 실수는 리비아 사태 처리"(종합)
결국 이슬람 근본주의까지 득세하면서 카다피를 아무런 대책없이 제거한 후폭풍에 시달렸다. 2011년도 카다피 제거에 대해 "리비아 국민들의 길고 고통스러운 장이 끝난 것을 의미한다"며 "리비아 국민들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말했던 버락 오바마는 시간이 지나자 본인 입으로 사석에서 리비아의 상황에 대해 "'개판'(shit show)"라고 하며 상황이 악화됐음을 인정하고, 이후로는 아예 카다피 이후에 대한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제거했다는 것을 실토했다.

결국 대책없이 카다피를 죽이고 정권교체를 한 여파로 리비아는 엄청난 혼란에 휩쓸린다. 리비아에서 쓰인 무기들은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어갔으며 리비아를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 행렬은 난민 위기를 심화시켰다. #

3.18. 예멘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예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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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예멘 내전에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예멘 하디 정부와 아랍 연합군을 지원하는 식으로 간접개입했다. 아랍 연합군을 주도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민간인 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

3.19. 쿠바

(연합뉴스_유엔, 쿠바 금수 해제 촉구 31번째 결의…美·이스라엘 반대
(조선일보)유엔, 쿠바 금수 해제 촉구 31번째 결의…美·이스라엘만 반대
유엔, 미국의 쿠바 경제봉쇄 규탄 및 해제 촉구 결의

미국의 독단적인 제재로 인해 피해국으로 미국의 제재로 인해 심각한 물자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인 제재는 비인권적인 처사 #에 불과하며 제제할 명분이 전혀없다. 때문에 미국의 주요 우방인 영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조차도 쿠바 제재를 해체할 것을 투표했으며 2022년 단행된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조차도 핵심 지원국인 미국의 눈치를 봐야하는 처지임에도 쿠바 제재에 대해서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지 못하고 유일하게 기권을 선택해버릴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국제 사회의 여론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며 제재 해체를 거부하고 있다.

4. 같이 보기



[1] 또 '미제'는 북한이 미국을 부르는 명칭으로 유명하다. 미제라고 부르는 의도는 미국을 제국주의 시절로 비하하는 것이다. [2] 특히 중남미 국가들의 쿠데타가 미국의 지원 하에 일어나는 상황에 닥치기도 했다. 이는 중남미 국가에선 반미 정서가 심화된 주요 원인중 하나이기도 하다. [3] 물론 舊공산권 국가들은 공산주의 포기 이후 일부 , 현재 미중 패권 경쟁을 하고 있는 중국 정도를 제외하면 이제는 대부분 친미, 반러로 돌아섰다. 또 이제 허구한 날 미국을 미제승냥이 등 강력한 표현으로 비난하는 북한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러시아 중국 같은 주요 반미 국가들도 대놓고 미제 개썅놈들이라 비난하지는 않는다. 쿠바는 아직까지 공산주의를 유지하고 있으나, 버락 오바마 정부 시기 미국과 관계를 개선했다. 쿠바의 공산화 이전의 역사를 보자면 제일 미제로 피해를 가장 많이 본 피해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50년대까지 미국산 자본으로 인해 나라가 개판이 되었다. [4] 동아시아 국가들에서의 중국 위협론과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보면 된다. [5] 다만 이들은 대놓고 미국을 적대하면 국익에 피해가 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같이 반서방 진영으로 완전히 돌아선 게 아닌 이상 대놓고 미국을 적대하지는 않는다. 특히 2020년대부터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 이유들이 생기고 있다. [6] 대표적인 예가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다만 이라크와 레바논은 친미인지 반미인지 애매한 편이며 아랍 국가 중에는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친미 국가도 많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7] 그런데 , 미국령 사모아, 북마리아나 제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푸에르토리코같은 속령들은 실제로 보유하고 있긴 하다. [출처] 미국, 과연 제국인가, 238 | 국제평화 제`2`권 1호(2005. 6), 예종영 (고려대학교 동아시아교육연구단 연구교수) [9]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리비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중 이라크와 리비아는 성공, 아프가니스탄은 정권 교체에 끝내 실패해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단행했다. [10] 실제로 이범석 등 일부 인사들은 히틀러 유겐트를 찬양하는 등 파시즘에서 큰 인상을 받았고, 일민주의와 같은 사상도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고 여겨진다. 미국은 직전까지 '피해자 의식'을 강조하던 나치 독일과 세계대전을 치렀던 입장이었기에, 김구 이범석 등 우파 독립운동가들의 과격한 민족주의를 우려했다. [11] 박헌영이나 김일성처럼 대놓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던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좌익 민족주의 세력의 상당수는 현실적 이유로 팔로군 등 중국·만주 등지의 공산세력과 공조해 투쟁하던 입장이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기 어려웠다. [12] 대구 10.1 사건의 진압을 명령하고, 미군 탱크까지 투입한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다. 제주 4.3에서의 진압도 브라운 소령의 명령과 작전에 의한 것이고, 여순사건도 제임스 하우스만과 같은 미군사고문단이 개입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들에서의 미국 개입은 분명했고, 실제로 미군들이 세운 작전이 우익들이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진압하고 학살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3] 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당으로 합쳐진 자민당은 결국 거대 여당이 되어 일부 기간을 제외한 현재까지 정권을 잡게된다. [14] 호치민 베트민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에 맞서 싸웠다. [15]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프랑스가 미국을 오히려 협박한 점도 있다. 미국이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면 프랑스는 바로 소련과 손을 잡겠다고 협박한 것. [16] 통킹만 사건 자체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맞다. 없었던 2차 공격을 일어난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 [17] 로버트 맥나마라는 1995년 아메리칸 대학에서 이러한 자신의 추정치를 언급했고, 이후 베-미 수교 및 경협 과정에서 만난 통일 베트남측 인사들과의 대화에서도 롤링썬더 작전 3년 기간 동안 1년에 최소 10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사망했다고 말했다.(참고 자료는 올리버 스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와 <적과의 대화>) 또한 1995년 베트남 노동사회부에서 추정한 베트남 전쟁 사망자 추정치는 군인 100만 명과 민간인 400만 명이 죽었다고 추정했는데, 북베트남에서 200만 명 남베트남에서 200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추정했다. 만약 이 추정치가 사실이면 북베트남 민간인 200만 명은 8년간의 폭격 기간 동안 직접적인 사망과 간접적인 사망(부상 후 사망을 포함한 여러 요인으로 사망)을 합쳐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셈이다. [18] 결과적으로 이는 오히려 쿠바가 공산화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 이들이 학살을 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지가 니카라과가 아닌 온두라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20] 문제는 이 과도 정부가 너무 무능한데다, 결정적으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끝내지도 않았으면서 또 엉뚱한 곳을 치는 바람에 탈레반이 살아남았고, 결국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도 전에 2021년 탈레반 공세가 이뤄져 3개월도 안되어서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이 세운 친미 과도 정부가 멸망했다(...) [21] 미국 CIA와 영국 MI6가 합작했다. [22]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임채정(역), 『미국 대외정책론』, 일월서각, 1985, p.361 [23] 사실 5만 명이라는 숫자는 투하된 폭탄에 비해 너무 낮게 잡힌 수치다. 전쟁 전후 시점의 뉴욕타임스의 경우 이를 35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24] 210만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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