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히틀러가 되었다/개변된 역사
1. 개요
웹소설 히틀러가 되었다의 등장인물을 설명하는 문서.2. 목록
2.1. 독일
2.1.1. 나치당
-
아돌프 히틀러
주인공. 원래는 폰게임이 취미인 백수 한국인 이규태[1]였으나 강철의 심장이라는 게임을 플레이하려다 히틀러에 빙의하고 만다.너 나치된 거야기왕 빙의한 거 원래의 히틀러와 다른 건실한 삶을 살려고 처음에는 군대에 말뚝을 박고 원사까지 달았으나 독일에서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켜 내전이 터지고 폴란드가 쳐들어와서 맞서 싸우다 전사했고, 첫 번째 회귀에선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더니 독일에 이어 오스트리아에서도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탈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당 토벌 및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개입해 이탈리아군의 공습으로 죽고, 두 번째 회귀에선 스위스로 갔는데 신호를 무시한 트럭에 치이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죽고, 세 번째 회귀에선 트럭은 피했으나 그날 저녁 집에 들어온 강도와 몸싸움을 벌이다 경동맥을 찔렸고 과다출혈로 죽어가면서 게임 시작 시에 봤던 미션 문구를 떠올리고 회귀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총통이 되어 독일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네 번째 회귀에서 실제 히틀러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 라인란트를 재점령하고 오스트리아 합병, 주데텐란트를 양도받고 서프로이센과 포젠을 되찾았으나 갑자기 융커들이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베어 지하실에 감금되었고, 이들은 국민들에게 주인공이 중태에 빠졌다고 발표하고 SS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숙청을 감행했으나 SS가 저항하면서 내전으로 이어졌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이 끼어들어 소련군이 베를린에 입성하기 직전 지하실에서 끌려 나와 총살당했다. 결국 복수를 다짐한 채 상병 시절의 히틀러로 다시 회귀하게 된다.[2]
원 역사의 히틀러와 비슷한 길을 걸어가며, 연설 능력도 뛰어나지만[3] 성격은 훨씬 차분하고 측근들을 찍어누르는 대신 최대한 설득을 하려고 하며 유용하다 생각되는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또한 홀로코스트 같은 악행은 시도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맥주홀 연설에서와 같이 인종주의에 반하는 발언과 행동을 당당히 한다.[4] 이런 행보에 최측근들도 일부 감화되어 인종 문제에 대해 원 역사에 비해서는 누그러진 태도를 가지게 된다. 또한 6번이나 히틀러로서의 삶을 살고는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현대 한국인에 가깝다. 때문에 자신이 미션을 수행하고 나면 개변된 역사 속 한국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을 걱정해 대비하고자 하며,[5] 원 역사의 히틀러와는 달리 채식주의자가 아니며 꽤나 미식가이며 현대 한국인 시절의 기억을 살려 한식을 찾거나 현대적인 요리를 개발하기도 한다.[6] 취미생활도 미술관이나 오페라 관람을 즐기던 원 역사의 히틀러와는 달리 박물관이나 동물원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는지 겔리 라우발은 조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에바 브라운 같은 다른 여자랑 어울리는 장면도 일절 등장하지 않으며 자식도 두지 않았다.[7] 그나마 원래 히틀러와 비슷한 점은 지독한 금연주의자인 것이다.[8] 대체역사물을 많이 봤었는지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의 유진 킴이나 《 당신들의 조국》을 언급하기도 하고,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 나오는 3명이 쏘는 판처파우스트를 언급하기도 했다.
1918년 1차대전에서는 혼자서 람보 수준의 무쌍난무를 펼쳐 탕크게베어 M1918과 수류탄으로 MK 전차 두 대를 격파하고 참호로 돌격해 오는 영국군을 사살하고 노획한 리-엔필드와 MP18로 60여 명의 적들을 사살하여 참호를 지켜낸 공로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부터 1급 철십자 훈장을 수훈받았고 상병에서 하사로 2계급 진급을 했으며, 이 훈장 덕분에 종전 후 대대적인 군축에서도 하사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간기에 군대에서 나와 나치당에 가입하고 맥주홀 폭동을 일으킨 것까지는 원 역사와 똑같으나 원 역사와 달리 나의 투쟁을 비교적 차분한 어조와 시각으로 서술하고 미래에 대한 예측을 넣어 큰 명성을 얻었다.[9] 그리고 집권 후 반유대주의를 독일을 분열시키려는 공산당의 음모로 몰아 반유대주의를 공식적으로 배격하는 연설을 하고[10]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손기정과 남승룡, 그리고 제시 오언스를 환대하는 등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지난 회귀에서 중용하였음에도 자신을 배신한 검은 오케스트라 일원들을 미리 반역죄로 체포한 뒤 고통스럽게 사형시켜 복수를 하였다.
2차대전 전까지는 원 역사와 같은 길( 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 뮌헨 협정, 체코 합병)을 걸어갔지만 본인이 가진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나치 독일을 개혁함과 동시에 실제 역사보다 이른 시기에 전쟁 중~후반에서야 나온 무기들을 개발, 배치함으로서 독일군의 전투력을 상승시켜 2차대전이 발발하자 훨씬 적은 피해로 폴란드와 베네룩스, 프랑스, 이탈리아를 정복한다. 파리 방문 당시 미리 엘리베이터를 지키도록 지시해서 원 역사와 달리 에펠 탑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며, 앵발리드 참배 후에는 르 트랑 블루에서 여유롭게 식사까지 하고 떠난 것은 덤이다. 그렇게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을 평정함으로써 2차대전 유럽 전선을 조기에 종결시키고 내치에 집중하지만, 독일의 급격한 팽창은 역으로 소련을 자극하게 되고, 2차대전 발발 전까지 보여준 행동들은 처칠, 루스벨트 등 적수들이 히틀러의 말을 도통 믿어주지 않는 원인이 된다.[11]
소련과의 전쟁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장군들을 어르고 달래는 한편, 소련의 공격에 대비함과 동시에 소련과의 협상을 이어가지만 결국 스탈린의 선제공격 지시로 독소전쟁이 약 1년 늦게 터지고 만다. 하지만 소련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그동안 모은 동맹국, 괴뢰국들과 함께 소련을 향해 역공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원 역사의 나치가 저지른 실수를 담습하지 않기 위해 레벤스라움 계획은 폐기하고, 친독 괴뢰국들을 동유럽에 세우기로 방침을 잡는다.[12] 마침내 소련을 상대로 승리한 후엔 영국을 처리하기 위해 바다사자 작전을 시행하고, 미국이 선전포고하자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루스벨트가 자신의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며 내부 분열을 유도한다. 이후 영국을 상대로도 승리하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걸로 전쟁을 끝내려고 했으나 소련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생각을 바꿔 2차 독소전쟁을 일으키고, 마침내 우란프로옉트에 성공해 소련에 핵무기를 투하하며 항복을 받아낸다. 그 뒤 미국으로부터 대일전 참전 요청을 받자 이를 승낙,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극동에 병력을 파병한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마저 항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하고, 모스크바에서 전범재판을 열어 처칠, 스탈린 등 핵심 전범들을 사형에 처한다.
이 시점에서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도 해내지 못한 유럽 전체를 손에 넣었다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워 독일에서는 그야말로 신세계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전쟁이 끝나는 대로 은퇴할 생각이었으나 측근들의 결사반대로 은퇴가 미뤄진다.
냉전에 접어든 후 인도의 독립을 지원하고 미래를 대비해 수도를 재개발하는 한편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듀이와 정상회담을 가져 전 세계를 독일과 미국의 영역으로 양분하고 소아마비 백신을 공동 연구하기로 했다. 그 뒤 마침내 독립한 한국을 직접 보고 올 생각으로 아시아 순방을 떠나고, 중앙아시아, 인도, 티베트, 중국,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여 협력 관계를 맺었으며,[13] 메포어음으로 비대해진 경제를 점차 안정화시켜 원래 히틀러가 약속했던 국민차 프로젝트, 폭스바겐 비틀 배급을 실제로 이뤄낸다.
한편 독일에게 패배한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정국이 불안해지자 예의주시하다 내전이 터지자 그리스 정부의 요청으로 먼저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그 와중에 아르헨티나에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독일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 의사를 밝힌다. 그 뒤 이탈리아 정부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내전에도 개입하여 두 내전을 빠르게 끝낸다.
이후 스위스까지 중립을 포기하고 추축국에 가입하며 바티칸을 제외한 유럽 전체가 추축국에 가입하자 유럽연합을 창설한다. 그리고 원자폭탄을 넘어서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니체 프로옉트와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바그너 프로옉트를 진행한다. 이때 미국에게 미독 공동 우주 탐사와 핵무기 감축을 제안했지만 맥아더가 사실상 무시하자 단독으로 우주 탐사를 진행하고, 미국도 이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면서 본격적으로 우주 경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미국과 서로간에 정찰기를 보내고 있던 중 유럽 상공에서 U-2를 격추하고 조종사 게리 파워즈를 생포했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닷새 간의 회담을 통해 서로 정찰기를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게리 파워즈를 미국으로 송환하고, 제3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미독간 핫라인을 설치하고 군비 제한을 논의하였다.
이후 미국과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져 전략무기제한협정과 미독 우주 개발 상호협력을 결정하며 진정한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라이히스부르거를 통해 벌어들인 돈과 미국이 지원해준 돈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우주 개발에 투자한다. 그리고 달 착륙이 성공하는 걸 보고 난 후, 총통이 된지 32년 만에 괴링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를 선언한다.[14] 은퇴를 선언하자 말 그대로 모든 도시에서 모든 국민들이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지만 자신이 직접 이들을 진정시키며 은퇴 선언을 번복할 생각이 없음을 명확히 하였다.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지내며 여행도, 주변인들의 장례식도 자주 다니면서, 나의 투쟁을 쓸 때 빼놓았던 우주 탐사, 노트북과 스마트폰 같은 가정용 컴퓨터, 인터넷, 드론 같은 전자기기의 발달과 실용화를 담은, 나의 투쟁에 이은 두 번째 자서전 우리의 투쟁을 출간하고 그 수익금은 모두 국고로 보낸다. 그 뒤로도 미국, 아프리카 등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은퇴 후 여생을 즐기다가 1972년 4월 30일, 83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죽기 전 미래를 대비해 괴링과 그 후임 총통들에게 독일이 원 역사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당부하는 메모 한 장을 남겼고,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베를린의 1-2차 대전 전사자 묘지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다른 참배객들이 불편을 겪을 수 있다는 이유로 괴링에 의해 총통기념관이 건설되어 거기 매장되었다.
사망 후 마침내 회귀에서 탈출해 자신이 바꾼 역사 속의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가족이나 집까지 바뀌진 않았지만, 백수였던 과거와 달리 번듯한 직장인이 되었고, 군대에 갔던 것은 대학 등록금 마련 및 취직 혜택을 위해 단기사병으로 2년간 복무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후 현대까지 양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독일로 여행을 떠나 자신이 바꾼 역사를 살펴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무덤을 보며 미소를 짓는 것으로 끝난다.
-
헤르만 괴링
원 역사와 달리 맥주홀 폭동에서 고환에 총을 맞지 않게끔 히틀러가 일부러 대열의 후방에 배치, 결과적으로 괴링이 마약에 중독되는 것을 막아 훨씬 뛰어난 판단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원 역사와 달리 해군과도 제대로 된 협조를 하기도 한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의 2인자 역할을 맡고 있다. 마약 부작용으로 뚱뚱해진 실제 역사와 달리 작중의 괴링은 군살 하나 없는 미중년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공군 기지를 방문해 현역 시절처럼 전투기를 몬다고 한다. 덕분에 히틀러가 차기 총통으로 점찍어놓고 있다.
히틀러와 듀이의 독미 정상회담 직후 히틀러의 은퇴 의사를 듣고 나서 같이 들은 헤스와 함께 돌바닥에 머리를 찧어가며 결사반대하여 은퇴를 보류하게 만든다. 이때 자기는 준비가 덜 됐으니 최소 20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20년이 넘어서야 히틀러가 은퇴하면서 2대 총통이 된다. 히틀러가 은퇴하고 자신이 총통이 된 뒤에도 여전히 히틀러를 총통 각하라 부르는 등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한 모습을 보이며, 히틀러가 사망한 후 히틀러를 베를린의 전사자 묘지에 묻으면 다른 전사자 추모객들이 추모하기 힘들다며 총통기념관을 따로 건설해 매장했고, 히틀러가 말년을 보낸 집과 생가를 기념관으로 지정했으며,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을 아돌프 히틀러 국제공항으로 개명했다.
1974년 슈페어에게 총통직을 넘기고 은퇴하였으며, 3년 뒤 1977년 사망했다. 이후 자신이 히틀러의 이름을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붙였던 것처럼 뮌헨 국제공항에 그의 이름이 붙어 헤르만 괴링 국제공항으로 개명되었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원 역사처럼 연설기계로 활약하고 있으며 히틀러의 의중에 따라 평화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독소전쟁이 결국 터지자 심혈을 기울인 총력전 연설로 전 독일을 뒤흔든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여자를 밝혀서 히틀러가 자주 뒷목을 잡는 모양. 히틀러가 은퇴하자 같이 은퇴하였고, 늘그막에 여자를 밝히는 버릇을 고쳤는지 가족과 단란한 노년을 보내다 1984년 아내 마그다가 사망한 다음날 사망했다.
-
하인리히 힘러
믿음직한 개그캐. 오컬트에 심취한 것과 무능한 면모는 원 역사와 똑같아서 매번 히틀러에게 무장친위대로 깡패짓을 하자거나 레벤스보른 계획을 실행하자는 등 뻘소리를 늘어놓아 골치아프게 만들지만,[15] 히틀러에게 충성하는 건 확실하고[16] 굳이 내칠 이유도 없어 히틀러도 그런 미친 의견은 거부하거나 대폭 수정하면서 바로잡아가며 적당히 내버려두고 있다. 그래도 히틀러의 영향을 받아 폴란드 내 유대인으로 구성된 특수부대 ' 존더코만도'를 만들어 파르티잔을 소탕할 방안을 구상하거나, 인종주의를 배격하는 히틀러의 의견에 총통을 믿어보자면서 주변을 설득하여 충성파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는 등 원 역사에 비하면 좀 더 실리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중간에 하이드리히가 힘러가 탄 비행기에 폭탄을 배달해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사전에 이를 알아차린 히틀러가 폭탄을 되돌려보내 역으로 하이드리히가 폭사해 SS에서의 입지가 공고해진다. 감투 욕심을 부려 온갖 요직을 혼자 꿰찼으나 과로하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티베트를 아리아인의 기원으로 확신하고 원 역사처럼 조사단을 파견하는 것은 물론, 전후 2차 조사단을 보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지지하고 티베트군의 현대화를 돕는 등, 티베트와의 친선에도 기여한다. 그 대신 연구라는 핑계로 마음껏 오컬트 덕질을 하고 있지만[17] 히틀러도 어차피 전쟁도 끝났고 원 역사 같은 뻘짓도 안 했으니 내버려두고 있는 중. 이후 헤스와 함께 히틀러의 아시아 순방에도 동행해 티베트에 직접 방문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성공한 덕후가 되었다. 히틀러가 은퇴하자 같이 은퇴하였고, 이후 고고학자로써 명성을 떨치면서 동시에 시간도 남아돌겠다, 죽기 전까지 예수의 마지막 성배를 찾기 위해 탐사대까지 꾸리며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1978년 사망했는데, 사망 직전까지도 그걸 찾지 못해서 아쉬워했다고 한다.
-
루돌프 헤스
오컬트에 심취한 건 힘러와 똑같지만 힘러의 레벤스보른 계획을 정상적으로 다듬어서 독일 전체의 출산율을 끌어올리려는 정책을 제안하는 등 실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소련에서의 회담에서 도청당할 것을 우려하는 히틀러에게 역으로 역정보를 흘리는 제안을 하였고 이것이 실행된 결과 소련의 유능한 인재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엄청난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금강석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히틀러에게 수여받는다. 이후 힘러와 함께 히틀러의 아시아 순방에도 동행해 티베트에 직접 방문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성공한 덕후가 되었다. 히틀러가 은퇴하자 같이 은퇴하였고, 힘러를 따라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말년에는 농장에서 원예 일을 하며 관련 도서도 3권이나 출판하며 시간을 보내다 1995년 무려 101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다 사망한다.
-
안톤 드렉슬러
나치당의 초대 당수이지만 실권에선 배제된 채 당수직만 맡고 있는 처지였으나 원 역사와 달리 히틀러가 당을 장악한 후에도 계속 당수로서 예우해주었기에 히틀러와도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폴란드 침공 후 히틀러에 의해 폴란드 총독으로 임명된다. 실권은 프리치가 쥐고 있어 사실상 명예직이었지만 본인은 만족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건강이 안 좋아져 히틀러와 만나 마지막 이야기를 나눈 후 뮌헨의 자물쇠 수리공에서 폴란드의 총독까지 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눈을 감는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검은 오케스트라 일원들을 감시하다 그들이 반역을 꾸미는 증거를 찾아 그들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아프베어가 SD에 합병되며 독일 첩보망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특유의 꼼꼼한 성격과 미래를 아는 히틀러의 지식이 더해져 그가 이끄는 SD는 실제 역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공적을 세우고 있지만 정작 하이드리히 본인은 자기도 몰랐던 고급 정보를 히틀러가 알고 있자 의문을 가지고 히틀러 주변인들을 조사한다.[18] 이외에도 역사에서처럼 힘러를 내심 경멸하며 언젠가 그를 제거하고 자신이 슈츠슈타펠의 수장이 될 계획을 가지고 있다가 실행에 옮겼으나, 히틀러가 관련 보고를 듣고 제거를 결심하여 원래 힘러에게 갈 폭탄을 하이드리히의 비서를 통해 그의 집으로 보내 가족째로 날려버리며 사망한다.[19]
-
얄마르 샤흐트
나치 독일의 경제장관. 군비 지출로 독일 경제가 한계에 봉착하자 전쟁을 포기하고 군비 지출을 줄일 것을 청하나 거부당하자 사임 의사를 표하지만 히틀러의 설득으로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이후 경제 관련 문제에서 다방면에서 활약한다. 또한 독일군 미니어처 세트에 희귀 미니어처들과 히틀러의 친필 사인을 무작위로 집어넣어서 홍보하는, 그러니까 가챠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주인공의 로켓 개발 지원에 처음에는 핏대를 세우며 반발했으나 나중에 재정이 풍족해지자 꼭 필요한 거냐며 수위를 낮췄고, 또한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든다며 전함을 해체해야 한다고 했으나 주인공은 관광상품으로 쓰기 위해 퇴역 전함들을 해상 박물관으로 이용하자는 것과 다른 전함들은 일정 기간까진 유지하고 나중에 해체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 히틀러의 명으로 에티오피아로 가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현실 역사와 동일하게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그의 소망과 달리 소련은 독일을 공격했고, 소련의 대독 선전포고를 전하는 주독 소련대사 데카노조프에게 분노를 드러낸다. 히틀러가 은퇴하자 같이 은퇴하였고, 말년에 와인 산업에 뛰어들어 상당한 성과를 내고 1986년 사망했다. 사망한 뒤에도 그가 설립한 와인 브랜드 '리벤트로프'는 지금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고.
-
헤르만 크리벨
주중 독일 총영사.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장 대리를 맡은 경력도 있다. 히틀러의 지시로 장제스에게 장쉐량과 양후청이 시안 사건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달한다.
-
에밀 마우리스
히틀러의 보디가드 겸 운전수였던 인물. 원 역사에서는 겔리 라우발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히틀러의 불쾌감을 사서 좌천되었지만, 여기서는 겔리 라우발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3명이나 둔 채[20] 잘 살고 있다.[21] 무려 SS 제국지도자까지 진급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없는 명예직으로 뮌헨에서 소일거리나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전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2대 총독으로 임명된다.
-
에른스트 룀
SA 참모장이자 히틀러의 동료. 실제 역사에서처럼 장검의 밤 때 체포되어 옥에 갇힌 후 테오도어 아이케, 미하엘 리페르트로부터 자결을 권유받지만 이를 거부하고 사살당한다. 유언은 " 총리 각하..."
-
베르너 폰 브라운
히틀러 밑에서 로켓 연구를 한다. 이후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바그너 프로옉트를 진행해 성공시킨다.
-
알베르트 슈페어
나치 독일의 군수부 장관. 괴링의 뒤를 이어 3대 총통으로 취임한다. 재임 중 1981년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목숨은 건졌지만 더 이상 총통직을 유지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한창 급부상 중이던 파이퍼에게 총통직을 넘기고 은퇴하였다. 그 뒤 자택에서 요양하다 1983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
요아힘 파이퍼
하인리히 힘러 SS 제국 지도자의 부관. 프랑스 침공 당시 후방에서 안전히 근무하고 있었으나, 최전선에서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직접 자원해[23] 최전선에 배치되어 자유 폴란드군을 전멸시킨다. 이후 독소전에서도 최전선에 자원,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파이퍼 전투단을 이끌고 붉은 광장에 제일 먼저 진입하여 게오르기 주코프를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슈페어의 뒤를 이어 4대 총통으로 취임한다.
-
롤란트 프라이슬러
민족재판소장.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에서 판사를 맡는다. 대숙청 기간 당시 소련을 방문해 비신스키의 재판에 참석한 뒤 그를 롤모델로 삼았으나, 정작 비신스키가 원 역사와 반대로 전범재판의 피고가 되면서 자신의 롤모델을 심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다. 성질머리가 워낙 더러워서 히틀러가 전범재판에서는 얌전하게 있으라고 경고했는데, 얌전히 있는다는 게 30분에 한 번꼴로 쌍욕을 하는 수준이었다.[24] 그 탓에 재판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촬영하던 리펜슈탈이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
카를 버렌
뮌헨 자연사박물관장이자 고생물학자. 박물관 직원과 학자 중에서 유일하게 완장을 차고 있다.
-
쿠르트 발트하임
파이퍼의 뒤를 이어 5대 총통으로 취임한다. 레마르크의 금서 조치를 해제하는 등 어느 정도 부분적 개혁을 하였다.
-
헬무트 콜
발트하임의 뒤를 이어 6대 총통으로 취임한다.
-
올라프 숄츠
콜의 뒤를 이어 7대 총통으로 취임했으며, 현대 시점에 총통으로 재임 중이다.
2.1.2. 군부
-
파울 폰 힌덴부르크
1차대전 때 전장에서 활약하고 입원한 히틀러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하였다. 원 역사에서는 히틀러의 고향을 착각해 보헤미아 상병이라는 별명을 붙인 장본인이었으나 여기서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오해를 정정받았다. 이때 히틀러에게 아부를 듣고 그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 덕분에 대통령이 된 이후 파펜과 슐라이허를 건너뛰고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였다.[25] 이후 원 역사와 같은 날에 사망하였다. 유언은 "나의 황제 폐하, 나의 독일". 유서에는 빌헬름 2세를 복귀시켜달라고 했으나 주인공은 개인적으로는 힌덴부르크를 존경하나 융커들 때문에 죽었던 회차도 있던데다가 21세기면 군주제가 관광상품으로는 쓸모가 있겠지만 지금 시대에는 무슨 소용이 있냐고, 카이저가 한 일이라고는 나라를 파탄내고 중립국으로 도망간 것밖에 없으면서 자신이 이 자리에 오는 데 무슨 도움을 줬냐며 독일에 필요한 건 자신이라며 냉소적으로 여기며 그 유언을 무시했다.
-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히틀러에 광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것은 역사와 동일하나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퇴역 처분되었던 실제 역사와 다르게 그를 신뢰한 히틀러에 의해 자리를 지키나 정작 본인이 음주운전(...)을 하는 바람에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퇴원한 뒤 프랑스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이라는 사실상의 프랑스 총독으로 임명된다. 1953년 은퇴한다.
-
베르너 폰 프리치
게이라는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가 폴란드 침공 중에 전사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원 역사와 달리 히틀러의 신임으로 본래 자리를 보전 중이었으나 블롬베르크와 음주운전 사고에 휩쓸려 병원 신세를 진다. 블롬베르크보다 먼저 퇴원한 뒤 히틀러의 명령으로 폴란드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 실질적인 폴란드 총독에 임명된다. 실제 역사와 정반대로 운수대통한 상태. 드렉슬러가 사망한 후에는 2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
루트비히 베크
독일 국방군 육군 총참모장. 이전 회차에서는 쿠데타를 일으켜 히틀러를 감금하고 끝내 총살시켰다. 히틀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라인란트 진주와 안슐루스 등 거듭 이어진 성공에도 히틀러를 불신하고 제거하려 하나 선수를 친 히틀러에게 2차 장검의 밤 숙청 대상이 되어 반역죄로 체포당하고 군적박탈 후 교수형으로 고통스럽게 처형되었다.
-
빌헬름 카이텔
원 역사와 다르게 국방군최고사령부가 생기지 않고 국방부가 그대로 유지되어 국방장관의 직위에 올랐다. 계급은 역사와 동일하게 원수. 작중 소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히틀러에게 동원령 선포를 요청한다. 1953년 은퇴하였고 1970년대에 사망한다.
-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장. 히틀러의 지시로 원 역사와 달리 팔켄하우젠 본인이 명목상 건강 악화로 중국에 더 머무르는 형식으로 군사고문 역할을 지속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뒤에도 장제스의 요청으로 중국에 남는다. 방중한 히틀러에게 자신은 장제스의 몽골 정복 계획에 우려를 표했지만 장제스는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미국의 경고에도 장제스가 몽골 침공 계획을 강행하자 별수 없이 중국군을 이끌고 몽골을 침공하지만 우려한 대로 소련군을 당하지 못하고 철군한다. 1970년대에 사망한다.
-
에리히 레더
크릭스마리네 최고사령관. 현실적인 문제로 Z 계획을 축소하려는 히틀러에게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지만 서부전선에서 승전하고 프랑스, 이탈리아 해군으로부터 뜯어낸 각종 함선들을 크릭스마리네에 편입시켜 Z 계획의 목표치에 사실상 근접하는 업적을 세우자 감격한다. 본인 스스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정도. 이후 대영전에서 직접 전함들을 이끌고 출항하며 영국의 해안을 불태웠고, 런던 공방전에서는 무려 비스마르크, 티르피츠, 샤른호스트를 이끌고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런던을 직접 포격하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웠다. 전후 예산 문제로 해군 축소를 주장하는 샤흐트와 충돌한다. 대양함대를 지향하는 레더는 해군 전함들의 해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해군의 축소가 불가피했고, 결국 최소한의 전함 전력만 겨우 보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48년까지 일하다가 되니츠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은퇴하였고 1970년대에 사망한다.
-
에리히 폰 만슈타인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히틀러에게 일찌감치 기용되어 원 역사처럼 낫질 작전을 구상해 프랑스 침공을 성공시켜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리고 소련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히틀러에 의해 자기보다 연공서열이 높은 선배들을 제치고 동부전선 총사령관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되고, 두 번에 걸친 독소전쟁에서도 활약하며 독일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 1953년 국방장관이 된다.
-
하인츠 구데리안
기갑총감으로써 히틀러와 협력하며 뛰어난 성과를 올리게 된다. 원 역사와 달리 원수까지 진급했으며, 히틀러가 효율에만 집중하며 생산 라인을 최대한 단순화시키려 하고 반대로 구데리안이 어느 정도의 다각화를 주장하며 입장이 뒤바뀌게 된다. 그리고 70톤에 육박하는 중량 탓에 신뢰성이 문제가 됐던 티거 2를 50톤대의 크기와 판터급의 기동력을 갖춘 MBT로 만드는 업적을 세웠다. 1953년 은퇴하였고 원 역사처럼 자서전 한 군인의 회상을 출판해 인기를 얻었으며 1970년대에 식도정맥류 파열로 입원해 히틀러가 병문안을 온 다음날 사망한다.
-
발터 베버
실제 역사에선 1936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지만 여기서는 사고 자체가 일어나지 않아 중장에서 그쳤던 역사에 다르게 원수까지 진급했다. 숙원이었던 전략폭격기 개발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전략폭격기를 개발한다. 1970년대에 사망한다.
-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붉은 남작의 사촌동생이자 루프트바페의 장군.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좋아해 파리를 폭격해 불태워 진정한 빛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으나 프랑스가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실패하자 뭇내 아쉬워했으며, 대신 로마를 폭격해 불태우고 '로마는 불타고 있다.'는 짤막한 보고를 올린다. 전후 원 역사보다 4년을 더 살았지만 점차 건강이 안 좋아지다 결국에는 뇌졸중으로 병사하며 31년 전 서부전선 상공에서 전사한 사촌형의 옆자리에 안장된다.
-
미하엘 비트만
폴란드 침공 파트에서 등장. Sd.Kfz. 231을 타고 다녔던 실제 역사와 반대로 38(t)를 타고 등장한다. 프랑스 침공에서는 SS 소위로 진급하여 헤처로 프랑스군 전차들을 격파하고 다닌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6호 전차 티거의 전차장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한다. 그의 포수는 실제 역사에서도 비트만의 포수로 이름을 날린 발타자르 볼.
-
한스 울리히 루델
프랑스 침공 파트에서 등장.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공격기 조종사이자 황금금강석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의 유일한 수훈자. 폴란드 침공 때는 Fi 156 슈토르히를 타고 정찰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괴링과 시찰 온 히틀러가 그를 발견하고는 슈투카 조종사로 추천하며 원 역사보다 빨리 슈투카를 몰고 다니며 전적을 쌓는다.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2차 장검의 밤 사건에서 음모자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체포된 동료들을 옹호하여 조사를 받았으나, 히틀러가 단순히 불안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일 수 없어 살려줬다. 그러나 빌헬름 2세의 경호원으로 임명된 후 왕정복고를 시도하려 들자 더 이상 봐줄 수 없다고 판단한 히틀러에 의해 암살당한다.
-
오토 카리우스
원 역사처럼 보병으로 배속되었으나 히틀러가 부대 시찰 중 그를 만나 직접 기갑병과를 추천하여 기갑병이 되었고, 이후 독소전쟁이 벌어지자 참전하여 격파된 4호 전차의 포탑을 수동으로 움직여서 적 전차 소대를 잡아버리는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활약을 찍으며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고,[26] 이후 원 역사에서처럼 티거 1의 전차장이 된다.
-
헤르베르트 브루네거
4년 간의 의무복무를 마치고 고향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푼다. 민간인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며 살지 고민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고급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게 되지만,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히틀러가 내린 예비군 소집령으로 재입대하게 되어 절망한다... 전쟁 중 SS 중사까지 진급하고 원 역사에서는 받지 못한 1급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지만 종전 후 전역해 호텔에 복직한 후 객실부 지배인으로 진급한다.
-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
독소전쟁의 첫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지키기 위해 소련 공군과 접전을 펼친다. Bf 109를 타고 다녔던 실제 역사와 달리 역사의 변동으로 Fw 190을 타고 다니며 전투가 끝난 후 전우인 한스-아놀트 슈탈슈미트에게 '이제야 감을 좀 잡은 것 같다'고 말한다.
-
발터 모델
히틀러에 의해 고속승진하여 독소전쟁 시점엔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여 제9군 사령관이 되었다. 특유의 기동방어로 소련군을 학살하며, 소련군의 지휘관들을 12살짜리 애나 다름없다고 평하고 나였으면 저런 돌대가리 밑에서 굴려지느니 자살한다는 농담을 하였다.[27] 1953년 육군총사령관이 된다.
-
귄터 폰 클루게
독소전쟁에서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활약한다. 대영전에서 롬멜이 총을 맞는 바람에 후송되자 공석이 된 서부전선 부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블롬베르크가 은퇴한 후에는 프랑스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 역사와 달리 독소전쟁을 건너뛰고 곧바로 서부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북프랑스 해안가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때 기갑부대를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히틀러가 롬멜의 손을 들어주자 히틀러의 결정에 실망해서 폭음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해안 가까이 배치된 기갑부대가 적의 상륙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자 롬멜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1953년 은퇴하였고 1970년대에 사망한다.
-
에르빈 롬멜
프랑스 침공과 이탈리아 침공에서 활약한 후 원 역사와 달리 북아프리카 전역이 일어나지 않은 덕분에 곧바로 서부전선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북아프리카가 아닌 북프랑스에 배속, 해안가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때 룬트슈테트와 달리 기갑부대를 해안 가까이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히틀러가 롬멜의 손을 들어준 덕에 디에프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그러나 영국 본토 침공 중 피난민으로 위장한 영국군에게 총을 맞는 바람에 후송된다. 회복된 후 자청해서 극동 파병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일본군과 싸운다. 1953년 육군참모총장이 된다.
-
오토 스코르체니
프리덴탈 특수임무대를 이끌면서 원 역사와 달리 기사의 도약 작전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생포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대영전에도 투입되어 윈스턴 처칠을 생포해 독일로 압송한다. 이탈리아 내전이 터진 후 히틀러의 명령으로 무솔리니를 구출해 독일로 데려가는데 이때는 영관급이 아닌 장성이 된지라 이전과 달리 일선에서 교전을 벌이진 않았다.
-
카를 되니츠
유보트 함대 사령관으로서 미국이 영국에 물자를 지원하고, 영국 함대가 미국 선박으로 위장해 드나드는 꼴을 보다못해 빡쳐서 미국에 선전포고할 것을 주장하나 히틀러에 의해 거부당한다. 그러나 마침내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유보트들로 미국 상선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전후 레더의 뒤를 이어 크릭스마리네 최고사령관이 된다.
-
파울 하우서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히틀러에게 적극 기용되어 제7군 사령관을 거쳐 원 역사보다 일찍 최초로 무장친위대 출신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전후 힘러가 은퇴한 뒤에는 잠시나마 SS 수장직을 맡지만 얼마 안 가 본인도 고령으로 은퇴한다.
-
하인리히 하러
원 역사에서 히말라야 탐사 중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티베트로 탈출해 7년간 머무른 경험을 《티베트에서의 7년》이라는 책으로 낸 인물. 여기서는 히틀러가 위험하다고 말린 덕에 탐사를 나가지 않아 포로로 잡히지 않았고, 종전 후 티베트를 방문한 히틀러의 안내역을 맡았다.
-
에두아르트 디틀
산악 사단을 지휘하며 알프스 산맥에서 이탈리아군과 싸우고, 바다사자 작전에서 영국군과 싸우고, 캅카스 산맥으로 숨어든 소련군 잔당을 소탕하는 공을 세운다. 이후 그리스 내전에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파병된다.
-
발터 도른베르거
히틀러 밑에서 로켓 연구를 한다. 이후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바그너 프로옉트를 진행해 성공시킨다.
-
베른하르트 크라머
독일 공군 조종사.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가 되어 체펠린 1호를 타고 우주로 나가 '지구는 푸르다'는 말을 남겼다.
-
에두아르트 샬모저
독일 공군 조종사. 원 역사에서는 공중충돌만으로 3기를 격추시키고 자기 집 뒷마당에 불시착한 희대의 괴짜. 1966년 7월 21일,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다.
-
지그문트 얀
독일의 우주 비행사. 원 역사에서는 최초의 독일 출신 우주인. 1982년, 인류 최초로 화성에 발을 디딘다. 현대 시점에는 화성에 그의 이름을 딴 유인 우주 기지가 건설되고 있다.
2.1.3. 민간인
-
빌헬름 2세
초반에 패색이 짙어지자 원 역사대로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이후 왕정복고를 원하면서도 히틀러와 독일인들이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탄하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설득을 듣고 고민하지만 슈타우펜베르크가 암살당하고 경호원들이 모두 무장친위대로 교체되면서 사실상 감금 상태에 놓여 왕정복고는 꿈도 꿀 수 없다는 사실만 자각하게 된다. 이후 원 역사대로 1941년에 사망하였다고 언급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히틀러가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행보를 보이자 원 역사와 달리 독일에 머무른다. 그리고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하여 핵무기 연구를 한다. 마침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지만 핵무기가 가져올 결과에 겁을 먹고 히틀러에게 핵무기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28] 이후 죄책감에 훈장 수여식에 참석하지 않고,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니체 프로옉트에 참가를 거부한다.
-
존 라베
난징 대학살을 목도하고 귀국해서 히틀러에게 이를 폭로할 것을 청하였다. 히틀러는 아직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해 이는 거절하였으나 라베 본인이 중립국에 가서 폭로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허락을 받고 스위스에서 난징의 참상을 폭로하였다. 이후 히틀러의 방중 때 동행하여 난징에 돌아와 격한 환영을 받는다.
-
겔리 라우발
히틀러의 조카이자 원 역사에서 히틀러가 연인으로 생각하고 집착했던 여인. 하지만 주인공은 근친을 혐오했기에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덕분에 에밀 마우리스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3명이나 둔 채 잘 살고 있다. 여기서 요리치라는 묘사가 나오는데 본인은 요리치라는 자각이 없어서 주변에서 전용 요리사를 두자고 해도 주부가 됐으면 요리는 직접 해야 한다면서 한사코 거절하는 바람에 가족들이 몇 년 동안 고생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히틀러가 찾아왔을 때는 케이크를 태워먹어서 다들 주인공이 사온 케이크를 먹었다.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소설가. 실제 역사와 같이 1차 대전 서부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야전 병원에 수용되었는데, 그곳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히틀러에게 자신의 소시지를 양보한 이후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밝혔다.
그 뒤 원 역사에서 스위스로 망명한 것과 달리 계속 독일에 머무르며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출간하는 등 소설가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폴란드 침공 직전 반나치 발언을 하다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된다. 직후 독재자가 된 히틀러와 21년 만에 다시 한 번 만나게 되는데, 히틀러는 자신이 독재자임을 인정하며 레마르크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를 바로 석방시킨다. 그 역시 반전주의적 태도를 버리진 못하나 히틀러와의 옛 전우로서의 추억과 히틀러의 태도를 보고 현실 역사와는 다르게 그에게 행운을 빌며 얌전히 물러난다.
하지만 2차 독소전쟁이 발생하자 몰래 교류를 이어나가던 극소수의 반나치 성향의 인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전, 반나치 선전물을[29] 뿌리다 분노한 시민들에게 얻어맞고[30] 또다시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하고, 또다시 히틀러와 독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후[31] 고민하며 물러난다.[32] 그가 뿌린 전단지 중 한 장은 히틀러가 따로 챙겨서 책상에 보관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반나치 활동을 계속했고 이로 인해 독일에서 매국노로 낙인찍혔으며 괴링에 의해 그의 저작들은 금서로 지정되었다.[33] 이후 원 역사보다 5년 정도 더 살다가 1975년 6월 22일 사망했으며, 훗날 발트하임에 의해 금서 조치는 해제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저작들은 독일인에게 기피되고 있다고 한다.[34]
-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중앙당 소속으로, 원 역사에서는 나치에게 탄압당했지만 본작에서는 히틀러가 그의 능력을 높게 샀기에 포젠 시장 자리를 제안하였고 이를 수락하여 포젠을 재건시켰다.[35] 중앙당이 사실상 구색정당이 되었음에도 간간이 나치에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히틀러의 신임 덕분에 자리를 지켰고, 이후 히틀러의 수도 재개발 계획에 참가한다.
-
빌리 브란트
노르웨이에서 반나치 활동을 하다 체포된 뒤 사형당하였다. 현실에선 독일의 국제 위상을 끌어올린 위인이었지만 주인공의 역사 개변으로 인해 독일을 배신하고 외국에 협력한 매국노가 되고 말았다.
-
윌리엄 조이스
원 역사처럼 '독일이 부른다(Germany Calling)'라는 선전방송을 하지만, 반유대주의를 배제하고 찬드라 보스를 초대해 영국의 식민통치를 비난하고 처칠의 행적을 폭로해 처칠이 열폭을 터뜨리는 원인을 제공한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과 함께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해 세계 최초의 핵폭탄 발퀴레를 만들었다. 원폭에 중압감을 가진 아인슈타인과 달리 하이젤베르크는 독일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일로 여기고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인다.
-
레니 리펜슈탈
원 역사처럼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며,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촬영한다.
-
에른스트 프라이헤어 슈트로머 폰 라이헨바흐 남작
스피노사우루스 화석의 최초 발견자인 고생물학자. 원 역사에서 그가 발굴한 화석은 1944년 연합군의 뮌헨 공습으로 모조리 파괴되고, 세 아들 중 2명이 전사하고 1명은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1950년에야 독일로 돌아오는 등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여기서는 독일이 전쟁에서 이긴 덕분에 그가 발굴한 화석들도 멀쩡히 보존될 수 있었다.
-
하인츠 헤크
괴링과 힘러의 지원을 받아 오록스 복원 연구를 계속한 끝에 오록스와 현대 품종의 소가 섞인 키메라의 개발에 성공한다.
-
루츠 헤크
괴링과 힘러의 지원을 받아 오록스 복원 연구를 계속한 끝에 오록스와 현대 품종의 소가 섞인 키메라의 개발에 성공한다.
2.2. 영국
-
윈스턴 처칠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지 않으며 본인이 계획한 노르웨이 공격이 먼저 실행되었고 독일에 의해 노르웨이 전역에서 패전하자 책임을 체임벌린에게 떠넘기려 하였다. 그러나 격노한 체임벌린의 폭로로 지지를 받지 못해 총리가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샤를 드골과 접촉하는 등 음모를 꾸미고 있다. 결국 태평양 전쟁 개전 후 자신의 책임인 말레이 해전 참패는 감추고 패전의 책임을 핼리팩스에게 돌려 그를 사임시키고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소련을 경계하고 있음에도 더 큰 적인 독일을 상대하기 위해서 뒤에서 소련과 손을 잡고 독일이 IRA를 지원했다는 누명을 씌워 반독 여론을 고조시킨다. 이후 히틀러에게 자기가 구상한 연설문[36]을 베껴지는 굴욕을 당한다. 그래서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저거 내가 구상한 거라고 하지만 증거가 없어서 비서관도 처칠이 한심하다고 여긴다...
결국 불리한 상황에서도 독일의 IRA 지원을 명분으로 행복회로를 돌리며 기어코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쟁을 선포하자마자 런던이 V2에 의해 폭격당하며 벙커에 틀어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미쳐돌아가는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포르투갈하고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하자고 했다가 장군들에게 대차게 까이는 추태를 보여준다.여윽시 미스터 갈리폴리그 와중에도 독일과의 평화협정은 있을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자 런던에 남아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습으로 부상을 입는 바람에 반강제로 글래스고까지 후송되었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런던에 남겠다고 해놓고 혼자 도망간 꼴이 되어 이 일로 안 그래도 낮은 영국군의 사기가 더 떨어진다. 영국 본토 대부분이 점령당하는 와중에도 캐나다로 도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항전하다가 스코르체니한테 생포되어 독일로 이송되어 히틀러와 독대한다. 그리고 히틀러에게 농락당하고 영국이 갈가리 찢겨나갈 것이라는 히틀러의 말에 절규한다.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변론에서 자신은 무죄라고 강변하며 판검사들을 도발하지만 결국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당한다. 유언은 "대영제국 만세! 국왕폐하 만세! 신이시여, 영국을 보호하소서!".
-
에드워드 우드
일명 '핼리팩스 경'으로 불리는 영국의 외무장관. 원 역사와 달리 처칠 대신 본인이 총리가 되고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일본의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개전된 뒤에도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를 한심하게 여기지만, 처칠이 영국의 동방 식민지들이 점령당한 것을 핼리팩스의 탓으로 돌리며 선동하는 바람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
-
앨런 튜링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언급된다.
-
조지 6세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자 해외 도피를 거부하고 런던에 남기로 한다. 이후 버킹엄 궁전이 폭격당해 생사불명이 된다. 이후 궁전을 점령하고 수색한 독일군들에 의해 부인인 엘리자베스 왕비와 같이 시신으로 발견되나, 영국인들이 이를 알게 되면 결사항전으로 나올 것을 우려한 히틀러에 의해 은폐되었다가, 해리스의 런던 폭격 때 이 사실을 역이용한 히틀러에 의해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한 걸로 알려지게 된다.
-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자 군을 지휘해 맞서면서 원정군으로 파견된 패튼과 티격태격한다. 최후까지 항전을 이어나가다 독일군에게 사살당한다.
-
더글러스 베이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타고 독일 공군에 맞서지만 압도적인 전력 탓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 끝내 바다사자 작전으로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고, 부하와 동료들이 하나둘씩 하늘의 별이 되어가는 중에도 출격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세한 묘사는 없지만 정황상 그 또한 하늘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
아서 해리스
폭격기 해리스답게 독일에 대한 폭격을 이어간다. 그리고 독일군이 런던을 점령하자 런던에 톨보이 폭격을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국왕을 죽였다는 오명을 쓰게 되고, 최후까지 항전을 이어나가다 궁지에 몰리자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포로로 잡힌다.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당한다. 유언은 "나는 내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이제 하느님 곁으로 간다!".
-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이 독일에게 패배하자 캐나다로 도망쳐 영국 망명정부의 총리가 된다. 현실 역사와 다르게 인도 제국의 유지를 위해 발악하지만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인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듀이의 조언을 받아들여 인도에서 철군하는 대신 힌두교와 무슬림 간의 분열을 배후에서 유도한다.
-
오스왈드 모슬리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당수. 독일과의 화평을 주장한 탓에 구금되었지만 전쟁 중 혼란을 틈타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고 히틀러와의 접선에 성공한다. 이후 클라리지스 호텔에서 친독 방송을 하다가 아서 해리스의 톨보이 폭격 도중 충격파로 인한 파편에 관자놀이를 맞지만 무사히 살아남는다. 그리고 파시스트 영국의 총리가 된다.
-
에드워드 8세
파시스트 영국의 국왕으로 복위한다.
-
월리스 심프슨
남편이 다시 영국 국왕이 된 덕에 영국의 왕비가 되었다.
-
엘리자베스 2세
캐나다로 도피한 후 영국 망명정부의 국왕으로 즉위한다.
2.3. 프랑스
-
필리프 페탱
원 역사처럼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귀국하여 새 총리로 선출되고 독일에 항복하게 된다. 다행히 원 역사보다는 프랑스가 받은 처분이 관대하였기에 후대에 받을 원망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히틀러와의 약속대로 참전을 결심한다. 이후 대영전에도 참전하여 그 대가로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를 할양받게 되지만 막상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의 저항이 거세서 새 식민지는 차지하지도 못하고 되려 동남아시아 식민지가 독립하고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도 독립 여론이 일어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에게 사기당한 꼴이 되자 후회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어떻게든 남아있는 식민지라도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모든 식민지인들을 프랑스인들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마을마다 학교와 병원도 지어주고, 최대한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독립만 하지 않으면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하지만 이 선언 탓에 쿠데타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비록 반대파가 숙청되면서 본인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지만 이를 빌미로 독일의 간섭이 더 심해질 것을 내다보고 한탄하면서 앙리 지로의 사형만큼은 면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뒤 원 역사보다 2년을 더 살다가 낮잠을 자던 도중에 사망한다.
-
피에르 라발
페탱 밑에서 프랑스의 총리를 맡고 있다. 페탱보다 더 적극적인 친독 성향을 보이며,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페탱에게 독일을 감동시켜 프랑스에 대한 양보를 이끌어낼 좋은 기회라 주장하며 페탱에게 적극적으로 참전을 주장한다. 페탱이 사망한 후 국가원수 직위를 물려받자마자 반독 정치범들을 한꺼번에 처형시키며 독일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독재를 강화한다.
-
샤를 드골
낫질 작전을 시도하는 독일군에게 반격을 시도했으나 패배하고 도주하던 중 폭격을 맞아 생사불명이 되었다. 그러나 생존하여 원 역사처럼 영국에 망명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세웠다. 하지만 영국이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으며 입장이 난처해지고 푸대접을 받게 된다.[37] 그러나 처칠이 그와 접촉한 후 정권을 잡게 되면서 그에게 지원을 받게 되고, 처칠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기어코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자 너무 이르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샴페인을 터트린다. 이후 디에프 상륙 작전에 참가하나 작전의 대실패로 3년 만에 돌아온 프랑스 땅에서 다시 도망가야 했다. 이후 영국마저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영국 땅에서도 도망가야 했고, 캐나다에 도착한 뒤 이전보다도 더욱 푸대접을 받는 처지가 되어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거늘..."이라고 한숨을 쉰다.
-
앙리 지로
원 역사처럼 독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가 1942년에 탈출하는 대신 독일에 의해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다 페탱에게 핀잔을 듣고 권한이 축소되었지만, 기어코 페탱의 선언에 불만을 품고 식민지를 지키고 독일에 복수하기 위해 공산당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다. 하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체포되어 독일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페탱의 부탁으로 사형은 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고 자신이 수감되었던 쾨니히슈타인 요새에 재수감된다.
-
자크 뒤클로
프랑스 공산당의 2인자로 모리스 토레즈가 소련으로 도망친 후 프랑스에 남아 레지스탕스를 이끌며 독일에 저항했지만 소련이 독일에게 패배하고 시베리아로 물러나면서 당원들이 줄줄이 발을 빼는 바람에 입지가 좁아진다. 이에 상황을 타개하고 프랑스를 해방하기 위해 군부 소장파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다. 하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도망치다 궁지에 몰리자 독약을 먹고 자살한다.
-
프랑수아 미테랑
라발이 사망한 후 국가원수 직위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68운동을 연상케 하는 독재 완화 요구 시위가 일어나자 시위대의 요구를 즉시 받아들여 빠르게 시위를 해산시킨다. 시위대가 독재의 완화를 외치긴 했어도 반독을 외치진 않았고, 미테랑도 반독 성향은 보이지 않았기에 독일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
2.4. 이탈리아
-
베니토 무솔리니
원 역사에서는 그나마 독일의 존재 덕에 2차대전사에 이탈리아가 나름 이름이라도 남길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히틀러가 이탈리아 편을 안 드는 걸 넘어서서 아예 적으로 돌아서면서 원 역사보다 한층 꼬인 처지가 되고 만다. 그 결과 독일과 손잡는 대신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 일대를 공격하지만 여기서도 무솔리니의 공격은 독일 산악 사단에 막히고(...) 역공을 당해 밀라노, 제노바, 베네치아 등 북부 도시들이 폭격을 받으며 졸전 전설을 써내려 가는 중에도 매일같이 술과 마약, 여자에 빠져 살다 원 역사보다 일찍 총리직에서 잘린다. 이후 이탈리아는 로마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이 폭격을 당한 끝에 항복하게 되고 무솔리니는 자택에 연금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몇 년이 지나서야 풀려나게 되지만 이따금 산책이나 할 뿐 여전히 자택에 틀어박힌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뒷방 늙은이로 전락한다. 그래도 원 역사에서 어떤 꼴로 죽었는지를 생각하면 나름 수혜를 본 셈이 되었다.
그 뒤 내전이 터진 후 스위스로 도주하려다 실패하고 몇 안 남은 지지자들과 살로에서 발이 묶였다가 독일군에 의해 구출된다. 구출 후 히틀러와 만나 이탈리아 새 정부의 수장직을 제의받지만 국왕과 파시스트당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이탈리아 국민들은 더 이상 자신의 집권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 수락하면 이탈리아를 혼란에 빠트릴 뿐이고, 자신이 이제 애국하는 방법은 복수를 포기하고 조용히 살다 죽는 거라 말하며 거절한다.[38] 아이러니하게도 두체였을 때는 허황된 목표에 빠져 상황 파악을 못하다가 권력을 잃고 나서야 현명하게 상황을 판단한 인물.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무솔리니에게 묻혀서 그렇지 이쪽도 상당한 암군. 무솔리니를 자른 이후 보여주는 행보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자기들이 먼저 전쟁 벌여놓고 체통을 유지하고 싶었는지 배상금 한 푼 없이 트렌티노알토아디제만 넘겨주는 조건으로 휴전하라고 하여 바돌리오 총리의 뒷목을 잡게 하고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독일은 로마를 불바다로 만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에 분노한 이탈리아 국민들은 왕정 폐지를 부르짖었고 결국 이에 굴복한 비토리오는 그보다 더한 조건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는지 독일에게 배상금 탕감과 영국 식민지 할양을 대가로 자기들도 대영전에 참전하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히틀러에게 단칼에 거절당한다. 전후 경제가 갈수록 안 좋아지는 와중에도 반대 세력 탄압에만 급급하다가 결국 내전이 터지자 황급히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도주한다.
독일의 개입으로 인한 내전 종결 후에 히틀러의 종용과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기를 원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끊이질 않자 아들인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하고 퇴위한다.
-
움베르토 2세
부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퇴위로 국왕으로 즉위한다.
-
피에트로 바돌리오
현실 역사와 비슷하게 무솔리니가 국왕의 명령으로 실각한 후 이탈리아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며 협상을 방해하는 국왕 때문에 뒷목을 잡는다. 독일이 납득할 리 없는 조건이라고 반발하지만 국왕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독일에게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해보지만 당연히 독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피해만 더 커지고, 결국 에마누엘레 3세가 현실에 굴복하자 그제야 독일과의 강화에 돌입한다. 그리고 강화협상 마무리를 위해 만난 히틀러에게 하와이안 피자를 대접받았다.[39] 이후 처칠의 참전 제안을 피해 복구가 우선이라는 명목으로 단칼에 거절한다. 전후 디노 그란디에게 총리직을 넘기고 은퇴한다.
-
갈레아초 치아노
협상 자리에서 국왕이 내건 휴전 조건을 두고 리벤트로프에게 한껏 비웃음을 받는 수모를 당한다. 전후 내전이 터지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독일에 방문하였고 이때 리벤트로프에게 또다시 조롱당한다.
-
알치데 데 가스페리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 당수. 국왕과 파시스트당을 몰아내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혁명 실패가 확실시되고 독일군과 정부군의 진압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보노미를 따라 청산가리 알약을 깨물어 자살한다.
-
팔미로 톨리아티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 국왕과 파시스트당을 몰아내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자살한 가스페리, 보노미와 달리 당원들을 이끌고 프랑스로 탈출해 미국을 거쳐 소련으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체포당한 후 독일로 압송되어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당했다.
-
이바노에 보노미
전직 총리이자 이탈리아 민주사회당 당수. 공화정을 주장하는 가스페리, 톨리아티와 달리 왕정에 호의적인 남부의 반발을 의식해 왕정 자체는 유지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독일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혁명의 실패가 확실시되자 절망하여 권총 자살한다.
2.5. 오스트리아
-
엥겔베르트 돌푸스
원 역사처럼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중시하는 인물. 히틀러도 지난 회귀 때 오스트리아를 서서히 구워삶아 스스로 안슐루스를 청하게 만들었기에, 원 역사처럼 독일 주도의 강제적인 오스트리아 병합은 미뤄 두려 했다. 그리하여 일단 친독 국가나 동맹국으로 남겨 놓기 위해 히틀러가 뉘른베르크에서 회담을 할 때 독일 주도 오스트리아 병합에는 관심이 없다는 답변을 받고, 독일-오스트리아의 좋은 관계를 위해 오스트리아에 최신형 장비인 1호 전차와 2호 전차를 선물하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본국으로 돌아가 오스트리아의 평화를 지켜낸 총리로 인기를 누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상당히 싫어하던 오스트리아 공산당의 폭탄 테러에 휘말리며 사망한다. 같이 있던 쿠르트 슈슈니크도 폭탄 파편에 직격당해 중상을 입어 한쪽 다리를 잘리고, 머리를 다치는 등 치명상을 입었다.
회담을 가진지 얼마 되지도 않아 찾아온 예상치 못한 비보에 히틀러도 심히 당혹스러워하며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공산당 꼬드기거나 하면서 막나간 거 아니냐며 의심했으며, 이후 안타깝게 됐지만 걸림돌이 빠져버린 김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면서 오스트리아 병합이 일어난다. 작중 에피소드명도 ' 돌푸스는 행복할 수 없어'. 직전 회귀 때는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2.6. 벨기에
-
레옹 드그렐
히틀러에 의해 괴뢰정부의 지도자가 된다.
2.7. 네덜란드
-
안톤 뮈서르트
히틀러에 의해 괴뢰정부의 지도자가 된다.
2.8. 덴마크
-
크리스티안 10세
원 역사에서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지만 여기서는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면서 히틀러와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 다만 영국에게 자국민들이 무고하게 공격받았다는 사실에 워낙 충격을 받았는지 복수귀로 각성해서는 자국이 다 굴릴 수 있을지 모를 양의 무기를 요청해 히틀러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
닐스 보어
유대인 태생이라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웨덴,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도피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원 역사와 달리 역사 개변으로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해 독일의 핵무기 개발에 일조했다.
2.9. 노르웨이
-
비드쿤 크비슬링
노르웨이의 파시스트이자 전직 국방장관. 히틀러와 처음 만났을 때는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임을 밝히고 지원을 요청하지만 히틀러에게 현실성 없는 계획이라고 욕만 먹는다.[40] 나흘 후 다시 만났을 때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고 히틀러에게 영국이 노르웨이를 침공할 것이니 그때까지 조용히 있으면 그 후에 위상이 높아질 것이란 조언을 받는다. 이후 정말로 영국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순식간에 유명세를 얻어 노르웨이의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독소전 참전을 망설이는 호콘 7세에게 강력하게 참전을 주장하여 노르웨이의 참전을 이끌어낸다.
-
호콘 7세
영국이 독일과의 교역을 중단하라 협박하자 불쾌하게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때문에 영국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줄기차게 독일과의 동맹을 주장하던 크비슬링의 말이 결과적으로 맞았음을 인정하고 그가 아니라 자신이 광대였다며 한탄한다.
2.10. 유고슬라비아 → 세르비아
-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
원 역사처럼 페타르 2세에게 축출당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후 세르비아의 국왕인 파블레 1세로 즉위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에서 신 흑수단이 결성되어 유고슬라비아 시절로의 회귀를 외치며 활개치고 다니자 이들을 탄압하고 반독을 외치는 국민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다 결국 폭동이 터지자 황급히 루마니아로 도피하고, 독일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도움을 받아 폭동을 진압한다.
-
페타르 2세
원 역사처럼 파블레 왕자를 축출한 후 그리스를 끌어들여 알바니아를 침공하는 짓을 벌인다. 이에 독일이 당장 알바니아에서 손 떼라는 최후통첩을 날려오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려 했으나, 왜곡된 보도 탓에 다 이긴 전쟁이 독일 때문에 무위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시위대가 베오그라드의 독일 대사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 결국 유고슬라비아 침공이 시작되자 루마니아로 도피한 후 원 역사처럼 미국으로 망명한다.
-
요시프 브로즈 티토
원 역사처럼 파르티잔을 이끌고 저항하다 기사의 도약 작전으로 스코르체니에게 생포된다. 그리고 그가 세련된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아는 히틀러가 이를 역이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면서[41] 강제로 여장당해 사진을 찍힌 후 여장 취미가 있는 변태성욕자, 소아성애자로 몰리면서 이미지가 박살 나고 파르티잔은 사기가 떨어져 해산된다.[42]
2.11. 스페인
-
프란시스코 프랑코
원 역사처럼 스페인 내전을 거쳐 정권을 잡는다. 이후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지브롤터를 공격해 점령하고 그 대가로 영국령 서인도 제도를 할양받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거기까지 갈 방법이 없고 미국이 자기 앞마당에 추축국 식민지가 들어서는 걸 용납할 리 없어서 실제로 차지하지는 못하고 결과적으로 히틀러에게 사기당한 꼴이 된다. 그 뒤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일에게서 존더코만도와 형벌부대를 지원받아 이를 진압한다.
2.12. 포르투갈
-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독일의 압박에 굴복하여 군의 현대화를 대가로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조차하여 대서양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그 뒤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랬듯이 식민지에게 최대한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대신 독일에서 존더코만도까지 동원하며 저항세력들을 철저히 진압하여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한다.
2.13. 터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작중에서는 이미 고인. 매우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인물로, 무솔리니와 스탈린에 대해서는 원 역사와 똑같이 각각 '제나라 국민 손에 죽을 놈'과 '매우 음험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라고 평가했지만, 히틀러에 대해서는 보통의 독재자와 차원이 다른 인간이라며 제2의 비스마르크나 제2의 카이저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10년 안에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그 첫 목표가 폴란드일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도 전쟁에 뛰어들어 1914년이 반복될 것까지 예측했다.
-
이스메트 이뇌뉘
독소전쟁이 한창일 무렵 히틀러와 만나 캅카스를 대가로 참전할 것을 권유받지만 아직까지는 독일의 승리에 확신이 없었기에 거절하고 중립으로 남았다. 하지만 전세가 완전히 독일로 기울자 생각을 바꿔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키프로스를 점령한다.
2.14. 소련
-
이오시프 스탈린
독일이 프랑스를 패배시키자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히틀러가 보내는 우호적인 제스처도 불신하며 독일과 관계가 틀어진 일본과 협력하려고 한다. 그리고 히틀러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그를 모스크바로 초청하여 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소련 측이 숙소에 도청장치를 깔아둘 것을 예측한 히틀러가 흘린 역정보에 낚여 유능한 인재들을[43] 대거 숙청시켜버렸다. 그리고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는 편집증적인 믿음 때문에 결국 선제공격을 명령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독일군의 철통수비로 소련군의 진격이 지지부진한데 이어 역으로 본토가 공습까지 당하자 분노하여 책상을 뒤엎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44]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곤 몰로토프에게 영국의 참전 날짜를 알아내라고 닦달한다. 그러나 영국의 상륙 작전이 처참히 실패하자 독일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한다. 그러나 독일이 당초에 넘겨줄 생각이던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이상을 요구하자[45] 생각을 바꾼다.[46] 결국 본인의 뻘짓들[47]과 독일군의 미칠듯한 진격이 환장의 콜라보를 이루어내며 독일군이 모스크바 시내에 진입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본인은 찌질하게 연료가 없다와 몰락의 스탈린 버전을 찍으면서 모스크바를 탈출하고, 탈출하면서도 주코프에게 '모스크바는 불타고 있는가?'를 묻고는 뒷처리를 맡기면서 끝까지 주코프에게 엿을 먹이고 갔다.
1차 독소전쟁 패배 후 쿠이비셰프에서 힘을 비축해 모스크바 탈환을 시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2차 대숙청으로 세묜 티모셴코 등 그나마 남아있던 유능한 인재들마저 죽여 버리고, 소수민족 탄압을 강화하자 곳곳에서 분노한 소수민족들이 무장 봉기를 벌이는 데다[48] 숙청하려고 한 쿨리크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혼란이 심해지자 독일이 재침공을 벌이고, 쿠이비셰프마저 버리고 우파로 도망가나 우파에 핵이 떨어져 생사불명이 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살아있었으나 벙커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우파에 진입한 독일군에게 생포되어 독일로 끌려온다. 처칠처럼 히틀러에게 말로 농락당하며 부들거리다가 히틀러에게서 재판을 받고 그에 걸맞은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절망에 빠진다.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정하지만 쿨리크가 증인으로 출석하자 경악과 동시에 분노한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고 난 후, 히틀러와 마지막으로 독대하여 자신이 독일 스파이를 숙청했던 것이 사실은 히틀러의 낚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규한다. 이후 교수형으로 처형당한다. 유언은 남기지 않았다.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스탈린의 충실한 수족 역할을 하지만 독소전쟁이 터진 후 스탈린에게 매일같이 갈굼받고 영국과 미국에게 연료를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린다. 이후 독일에게 평화협상을 시도하지만 결렬되는데, 막상 협상이 결렬되었음에도 히틀러에게 환대를 받고 고급 시계까지 선물받는다. 사실 이것은 히틀러가 스탈린의 의심병을 키워 스탈린이 직접 몰로토프를 숙청하게 만들기 위한 수작이었고, 이후 아내 폴리나가 유대인 박해가 심해져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 것과 카가노비치와 술을 마시며 독일과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한 것이 NKVD의 귀에 들어가며 숙청되어버린다.
-
라브렌티 베리야
소련을 방문한 히틀러와 독일 사절단을 감청하여 스파이로 판정된 사람들을 체포하고 스탈린에게 보고하나 밝혀진 게 이 정도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한 스탈린에게 무능하다는 낙인이 씌여졌고 질책받게 된다. 종국에는 제대로 빡친 히틀러의 역공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숙청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에게 내쳐지면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
게오르기 주코프
히틀러의 역정보 희생양에 포함되었으나 본인이 아니라 친척에게 독일 스파이가 접촉했다는 내용이었던 점, 그리고 유능함이 증명된 인재라는 점들 덕분에 친족들만 잡혀가고 본인은 감시만 받는 선에서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라도 친족들과 자신이 숙청당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예스맨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권한 내에서 최대한 노력하며 전쟁의 방향을 바꿔보려 노력하지만 스탈린의 트롤링과 소련군 자체의 한계로 인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에는 모스크바에 남겨져 직접 총을 들고 싸우며 모스크바를 지키다 요아힘 파이퍼의 총에 미간을 맞고 전사한다.
-
세묜 티모셴코
독소전쟁 중 자신이 할 수 있는 권한 내에서 최대한 노력하며 전쟁의 방향을 바꿔보려 노력하지만 스탈린의 트롤링과 소련군 자체의 한계로 인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전후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숙청당한다.
-
그리고리 쿨리크
소련군의 발전을 방해하는 똥별. 독소전이 1941년에 발발하지 않아 본인이 밀던 A-43가 완성되자[49] T-34는 이제 필요가 없다며 생산중지를 스탈린에게 건의한다. 이외에도 기관단총, 53-K, ZiS-3도 불필요하니 모조리 생산중지하자고 건의해 승낙을 받아내는 등 소련군 역량을 스스로 깎아먹는 짓을 하고 있다. 이후 소련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패전의 책임을 돌릴 희생양을 찾으려는 스탈린에 의해 숙청 대상으로 지목되어 모스크바로 소환 명령을 받으나, 선수를 쳐서 체포조들을 전부 사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하지만 결국 보로실로프와 부됸니가 이끄는 진압군에게 밀려 소련의 각종 기밀정보들을 팔아먹는 조건으로 중국으로 망명한다. 하지만 망명 후 이전의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다 독일 측의 꼬드김에 전범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스탈린의 만행에 대해 증언한다.
-
라자르 카가노비치
소련 철도인민위원회 위원장직을 역임해 독일의 공습으로 파괴된 철도의 복구를 맡으나 연료 부족으로 지지부진한데다 어쩌다 복구해도 매번 독일의 공습으로 부서지는 탓에 스탈린에게 매일같이 갈굼받고 유대인 혈통이라는 점까지 겹쳐서 단단히 찍힌다. 그러다가 몰로토프와 술을 마시며 독일과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한 것이 NKVD의 귀에 들어가며 숙청되어버린다.
-
막심 리트비노프
몰로토프가 숙청된 후 외무장관으로 복직해 대미 외교통 역할을 한다. 2차 독소전쟁이 터지자 미국에 파견되어 지원을 구걸하지만 자기 측근들의 반대로 손을 쓸 수 없었던 월리스에게 거절당한다. 이후 우파에 핵이 떨어졌을 때 미국에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았고 귀국한 후 허망하게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
안드레이 예료멘코
독소전 중 모스크바에 남겨져 최후까지 싸우다 결국 항복하고 포로로 잡힌다.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 간신히 사형은 피하고 25년형을 선고받는다.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스탈린과의 친분 덕분에 대숙청에서도 살아남았고 쿨리크의 반란 진압을 맡는다. 이후 우파에 핵이 떨어졌을 때 시베리아에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았고 생존자들 중 가장 직책이 높고 나이도 많은 덕에 임시로 지도자 역할을 맡아 독일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정식으로 서기장이 되어 이르쿠츠크로 천도하고 껍데기만 남은 소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중국이 몽골을 침공하자 소련군을 보내 중국군을 격퇴한다.
-
세묜 부됸니
스탈린과의 친분 덕분에 대숙청에서도 살아남았고 쿨리크의 반란 진압을 맡는다. 이후 우파에 핵이 떨어졌을 때 시베리아에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중국이 몽골을 침공하자 소련군을 지휘해 중국군을 격퇴한다.
-
니키타 흐루쇼프
원 역사에선 스탈린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되지만 여기서는 스탈린에게 벌벌 떨며 갈굼당하는 신세다. 쿨리크가 반란을 일으킨 후 진압이 늦어지자 스탈린의 명을 받고 시베리아로 날아가 보로실로프와 부됸니에게 경고를 전달하는데, 이후 우파에 핵이 떨어졌을 때 시베리아에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
안드레이 비신스키
소련 검찰총장. 원 역사에서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수석 검사였으나 여기서는 반대로 2차 독소전쟁에서 패배하고 시베리아로 도망치려다 부하의 배신으로 독일군에 붙잡혀 자신이 피고 신세가 된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당한다. 유언은 "언젠가 네놈들도 나처럼 목이 매달리고 말 거다! 파쇼 돼지들아!".[50]
-
겐나디 주가노프
현대 시점의 소련 서기장. 독일과 자유 러시아 간의 회담을 비난한다.
2.15. 자유 러시아
-
안드레이 블라소프
독소전 중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독일에 항복한 뒤, 원 역사대로 자유 러시아군을 이끌고 소련과 맞서 싸운다. 전후 자유 러시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
만주국에서 생활하던 중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된 일본에 의해 러시아 파시스트당이 해산되자 지지자들과 함께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고생을 한 끝에 독일에 도착한다. 히틀러와 만나 러시아 파시스트당을 지원해주면 독소전쟁이 터졌을 때 러시아인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고 파시스트 국가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설명하는데, 히틀러는 그의 계획이 현실성 낮다는 것은 알지만 독일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이를 받아들인다. 전후 자유 러시아 공화국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다.
-
세르게이 타보리츠키
러시아인이지만 독일 시민권자에 나치당원인지라 예전부터 독일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로자예프스키의 러시아 파시스트당이 독일에 정착하자 러시아 파시스트당에도 들어갔다. 독일 시민권자 겸 나치당원이라는 점이 반영되어 전후 자유 러시아와 제3제국 간의 소통을 맡는다.
-
드미트리 웃킨
현대 시점의 자유 러시아 대통령. 소련과 국경에서 충돌하는 문제로 독일과 회담을 갖는다.
2.16. 미국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원 역사처럼 반독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진주만 공습을 경고하였음에도 무시하였다가 큰코다치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독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전쟁 중인 일본보다도 독일을 상대로 더 신경을 쏟으며 히틀러가 보내는 러브콜도 무시하고 뒤에서 영국, 소련을 지원한다. 하지만 독일의 뒷공작으로 원 역사의 영미 내의 소련 스파이들이 일찍 적발되면서 기존의 친소 행보로 말미암아 위기에 몰리게 되고 결국 소련 연료 지원안을 철회하며 소련이 독소전에서 궁지에 몰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반독 성향은 여전해서 중국에 지원하는 물자를 빼돌리는 식으로 계속해서 소련을 지원하고,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자 의회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설득한 끝에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대독 선전포고 결의안을 통과시키지만,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역풍을 맞게 되고, 전국적으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나고 오언스의 사망으로 흑인 파시스트 반군(BFR)이 결성되어 BFR과 KKK가 총격전을 벌이며 서로를 학살하는 등 준 내전 상태에 빠지자 버티지 못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소련 스파이 사건 후에도 소련을 지원했다는 폭로까지 이어져[51] 민심을 완전히 잃고 하야와 탄핵 여론이 들끓자 결국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되어 3선을 채 마치지 못하고 원 역사보다 빠르게 사망한다.
-
헨리 A. 월리스
루스벨트의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아 터스키기 사건과 오언스의 사망으로 분노한 흑인들을 달래고, BFR과 KKK를 강경 진압해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해나가지만 루스벨트 이상의 반독, 친소 성향을 가지고 있어 독일의 평화협정 제안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영국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지만, 점차 전황이 안 좋아지자 그제서야 영국, 독일과 평화협상을 시도하지만 결렬되고, 결국 영국이 패전하고 나서야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후 2차 독소전쟁이 터지자 소련을 지원할 생각을 하지만 모든 측근들이 결사반대하여 시도도 하지 못하고 소련이 망하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그 뒤 다가올 냉전에 대비해 독일처럼 핵무기 개발을 밀어붙이는 한편, 일본을 무너트리기 위해 고민하다 결국 그렇게 싫어하던 독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전쟁이 끝나고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여 백악관을 떠난다.
-
제시 오언스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고, 히틀러에게 원 역사보다 더 환대받는다. 이후 미국으로 귀국하여 자신과 흑인들을 무시하는 백악관을 비판하였다. 이후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 폭로로 인해 시작된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끌었으나 시위 진압대가 쏜 총에 심장을 맞아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이미 끓어올랐던 흑인들의 분노를 완전히 폭발시켜 준 2차 미국 내전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
코델 헐
전쟁 중인 일본보다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를 말린다. 독일과의 전쟁이 터진 후 영국이 독일에게 패배하자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얀마옌 섬을 구매하는 형식으로 차지하는 조건으로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 뒤 일본과의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독일군을 돈으로 사서 대일전에 끌어들이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
윌리엄 리히
전쟁 중인 일본보다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를 말리며 독일이 선전포고하지 않는 이상 대독전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못박는다. 그러나 기어코 독일과의 전쟁이 터진 후 미국이 준 내전 상태에 빠지자 독일과의 전쟁이 가망이 없으니 과감히 접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조지 C. 마셜
철저히 공사를 구분하는 강직한 성격으로 독일이 위협적인 상대임은 인정하면서도 일본과의 전쟁이 우선이기에 전쟁 중인 일본보다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를 말린다. 독일과의 전쟁이 터진 후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이은 폭로로 루스벨트가 몰락하고 유럽 전선에 파병된 원정군도 독일군에게 속절없이 밀리자 그조차도 내심 희망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유럽 전선 종결 후 패튼과 아놀드의 말을 듣고 독일의 무기에 대항할 신무기 개발을 주도한다. 이후 독일이 핵무기를 개발하자 월리스의 지시로 핵무기 개발의 뼈대를 잡는다. 전후 정권이 공화당으로 교체된 후 원 역사처럼 국무장관으로 추대되었고, 장제스에게 몽골 침공 계획을 포기하고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않으면 원조를 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
어니스트 킹
태평양 전쟁 개전 후 미 해군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싸운다. 하지만 전쟁 중인 일본보다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에게 불평한다.
-
헨리 아놀드
전쟁 중인 일본보다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를 말린다. 유럽 전선 종결 후 독일의 전투기보다 강한 전투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 원 역사처럼 부정맥이 일어났는데도 독일보다 뛰어난 전투기를 만들어야 한다며 은퇴를 거부하고 전투기 개발에만 집중한 결과 원 역사보다 3년 빨리 사망했지만 그 대가로 신형 전투기들이 원 역사보다 더 빨리 개발되었다.[52]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유럽 전선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아이슬란드에서 원정군을 지휘하지만 결국 패배한다.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본인은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 패배한 것은 사실이기에 패장으로 낙인찍혀 원 역사와 달리 대통령은커녕 정계 진출도 하지 못한다. 그 대신 대통령이 된 맥아더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된다.
-
조지 S. 패튼
유럽 전선에 파병되어 독일군은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몽고메리의 만류에도 공격이 최선이 방어라며 공세를 가하지만 처참하게 실패한다. 그제서야 독일군이 강군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방어전으로 돌입하나 결국 패배하여 아이슬란드로 도망친다. 이후 미국에 돌아와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독일의 전차들보다 강한 전차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결과 기동성은 내다버리고[53] 중장갑, 고화력에 집중한 초중전차에 가까운 괴상한 물건들이 탄생한다.[54]
본인은 유럽 전선에 이어 태평양 전선으로 파견되어 싸운 덕분에 패장 신세는 면했지만, 일본군은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아 매일같이 설욕을 꿈꾸다가 포클랜드 전쟁이 터지며 마침내 설욕의 기회가 주어지자 신나서 흥분해 날뛴다. 그리고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라질에 도착한 후에는 이전에 독일군에게 패배했던 경험을 살려 먼저 빠르게 아르헨티나군의 보급을 끊고, 적이 먼저 공세를 하도록 유도해서 함정을 파고 독일군을 벤치마킹해서 방어선 일대에 강력한 대전차전력을 배치해 적의 전력을 대거 깎아먹고, 그 뒤 본격적으로 공세를 가하여 아르헨티나군을 무더기로 포로로 잡으며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아르헨티나군이 버리고 간 판터 위에 올라가 입에 시가를 물고 오른손에는 아르헨티나군으로부터 노획한 독일제 StG45 소총을 들고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은 이오지마의 깃발 사진처럼 미국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각인된다.
-
더글러스 맥아더
탁월한 이미지 관리 능력에 더해 유럽 전선의 패배와 대비되는 태평양 전선의 승리로 미국에 승리를 가져다준 전쟁 영웅이 되어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독식하다시피 한다. 연합군 점령하 일본 최고사령관이 된 후 기회를 살려 정계에 진출해 대통령이 될 생각을 한다. 이 때문에 처음엔 원 역사처럼 히로히토를 살려서 꼭두각시로 쓸 생각을 했지만 정부와 국민들의 여론을 의식해 히로히토의 사형을 묵인한다.
듀이 정권이 끝나갈 때쯤 공화당에 영입되어 원 역사의 아이젠하워를 대신해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통해 본격적으로 독일에 대한 적대 기조를 드러낸 후 성조기 아래에서 하나된 미국을 주장하면서 매카시를 시작으로 인종차별주의자, 파시스트, 공산주의자들을 작정하고 때려잡고, 인종차별 성향이 강한 남부에서 일어난 시위들도 강경 진압한다. 시위대가 발포할 경우 이쪽도 발포하라는 명령은 덤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친독 성향 때문에 고깝게 여기던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고 몇 차례의 경고도 무시하자 먼저 브라질을 움직여 아르헨티나를 공격하고[55] 경제제재를 가하는 사이 군대를 소집해 본격적으로 아르헨티나를 털어버리고 철저한 미국의 사냥개로 만들어버린다. 한편으로는 적대 기조를 드러냈던 독일에게 중립을 요청하고, 히틀러에게서 미독 공동 우주 탐사와 핵무기 감축을 제안받자 히틀러의 의도가 무엇인지 고심하다가 결국 무시해버리지만, 독일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자 충격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DARPA와 NASA를 신설해 본격적으로 우주 경쟁에 뛰어든다. 그 뒤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하지만 뜻밖에도 독일이 지분을 주장하지 않자 정말로 히틀러가 공존을 원하는 것인지 고심한다.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무난하게 승리한 뒤, 이번엔 인도네시아에서 북보르네오와 뉴기니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살벌한 경고를 보내 전쟁을 막는다. 그러나 쿠바 혁명 탓에 지지율이 흔들리자 오히려 정면돌파로 솔직하게 사과하면서 바티스타 정권의 무능함을 부각시켜 되려 지지율을 올리고, 쿠바에 경제제재를 가한다.
그리고 독일과 서로간에 정찰기를 보내고 있던 중 유럽 상공에서 U-2가 격추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반쯤 절망하지만, 뜻밖에도 독일에게서 해당 문제의 해결과 양국의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해 정상회담을 제안받자 히틀러의 제안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에 응한다. 그리고 닷새 간의 회담을 통해 서로 정찰기를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게리 파워즈를 미국으로 송환하고, 제3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미독간 핫라인을 설치하고 군비 제한을 논의하였다.
독일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쿠바 침공을 결정, 순식간에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고 신정부를 세운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며 루스벨트에 이어 두 번째로 3선을 달성했고,[56] ICBM 개발에 성공했으며, 독일과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져 전략무기제한협정과 미독 우주 개발 상호협력을 결정하며 진정한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오는 업적을 세운다. 그 뒤 3선을 마치고 4선 출마를 거절하고 백악관을 떠난다.
-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루스벨트의 친소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묵인하고 있으며, 히틀러의 폭로 덕분에 백악관 내부의 소련 스파이를 잡아낸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기어코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했다가 히틀러에 의해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루스벨트가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루스벨트에게 이번 사건을 해결하면 종신 국장 임명과 이런저런 특권을 안겨주겠다는 회유를 받지만, 루스벨트가 이미 침몰하는 배라는 걸 꿰뚫어보고 오히려 루스벨트가 소련 스파이 사건 후에도 소련을 지원한 사실을 추가로 폭로하여 그를 몰락시키는데 일조한다. 이후 월리스, 듀이 정권하에서도 FBI 국장으로 남아 소아마비 연구를 위해 미국에 파견된 독일 과학자들을 감시한다. 그리고 맥아더가 집권한 후 마침내 종신 국장으로 임명되어 맥아더의 충실한 수족 노릇을 한다.
-
헨리 포드
원 역사에서도 친독 행보를 보였던 만큼 여기서도 친독 행보를 보인다.[57] 미국 구축함과 상선 격침 사건으로 미독관계가 냉각되자 미국과 독일의 우호를 위해 자신들을 독일로 보내달라고 성명문을 발표했으며, 미국이 결국 독일에 선전포고했을 때도 (독일 한정으로) 적극적인 반전운동을 벌인다.
-
찰스 린드버그
원 역사에서도 친독 행보를 보였던 만큼 여기서도 친독 행보를 보인다. 미국 구축함과 상선 격침 사건으로 미독관계가 냉각되자 미국과 독일의 우호를 위해 자신들을 독일로 보내달라고 성명문을 발표했으며, 미국이 결국 독일에 선전포고했을 때도 자신은 미국인이니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참전을 지지한다고 천명하고 입대하려던 원 역사와 달리 입대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독일 한정으로) 적극적인 반전운동을 벌인다.
-
토머스 E. 듀이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대통령 취임 직후 애틀리를 불러 인도를 포기할 것을 종용함과 동시에, 인도의 종교, 민족, 카스트 간의 갈등을 이용해 분열시키라 조언한다. 이후 히틀러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정상회담을 가지며 히틀러에게 전 세계를 미국과 독일의 영역으로 양분할 것을 제안한다.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무난하게 승리한 뒤, 중국이 몽골을 침공할 계획이라는 걸 눈치채고 중국에 경고하지만 중국이 기어코 몽골을 침공하자 열받아서 원조를 축소해버린다. 이후 독일의 수소폭탄 개발, 아이슬란드 내의 시위, 매카시즘 등으로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최대한 수습을 위해 노력한 뒤, 2선을 마치고 백악관을 떠난다.
-
조지프 매카시
반공, 반나치, 반유색인종 선동으로 매카시즘을 퍼트리며 같은 공화당인 듀이 정권까지 공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맥아더 집권 후 후버에 의해 역으로 자신에 대한 폭로가 이어지며 순식간에 몰락한다.
-
로버트 A. 태프트
루스벨트의 대독 선전포고 결의안에 극렬하게 반대한다. 공화당 경선에서 맥아더에게 패배한 대신 미국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다. 그리고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독일의 달 착륙에 자극받아 5년 안에 미국도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고 발표했고, 원 역사보다는 2년 늦었지만 끝내 유인 우주선 개발에 성공해 정말로 5년 안에 닐 암스트롱을 달로 보내며 약속을 지켰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무난하게 승리한 뒤,[58] 히틀러가 사망하자 베를린까지 직접 날아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
존 포스터 덜레스
맥아더 취임 후 원 역사처럼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포클랜드 전쟁이 터지자 영국, 아르헨티나와의 3자 회담을 열고, 독일에 비밀리에 파견되어 히틀러와 회담을 가진다.
-
해리 S. 트루먼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지만 낙선한다.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원 역사처럼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맥아더 집권 후 소련을 무너트리고 러시아 공화국을 재건할 꿈을 꾼다. 하지만 맥아더도 이게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반공을 내세우는 케렌스키를 탄압했다가는 역풍을 맞을 우려가 있어 고민하던 차에 마침 이 모습을 본 자유 러시아 쪽에서 협력하자고 제안한다. 본인은 아무리 소련이 싫다고 해도 나치도 싫은 건 마찬가지였기에 단호히 거부했지만, 케렌스키의 입을 막을 구실이 필요했던 FBI에게 이를 트집 잡혀 보호를 명분으로 사실상 감금당한다.
-
게리 파워즈
U-2를 타고 있다가 유럽 상공에서 격추당한다. 이후 자유 러시아의 오렌부르크 인근에 불시착, 독일에게 생포된다. 나중에 미독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
존 F. 케네디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지만 낙선한다.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암살당하는 일도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다행인 셈.
-
닐 암스트롱
원 역사보다는 2년 늦었지만 미국인 최초, 인류 세 번째로 달 착륙에 성공했다.
-
조 바이든
현대 시점의 미국 대통령. 멕시코 내전에 개입할 것이냐는 질문과 남미 각국에서 히틀러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말을 아낀다.
2.17. 중국
-
장제스
원 역사와 달리 중일전쟁 후에도 독일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히틀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중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귀띔을 받아 시안 사건을 피하고 장쉐량과 양후청을 숙청하였으며[59] 덕분에 제6차 초공작전을 예정대로 실시해 중국공산당 역시 박멸하였다. 소련이 국경을 닫는 바람에 독일과의 교류가 끊긴 후로도 미국에게 지원을 받아 일본에 대한 항전을 이어나갔고,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우방국들끼리 전쟁을 하는 꼴이 되어 양국에 중재를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그 뒤 영국이 패전하고 미국과 독일의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소련이 2차 독소전쟁에서 패전하여 중앙아시아 5국이 독립하면서 마침내 독일과의 육로가 다시 연결되어 교류가 재개되자 히틀러에게 검을 선물로 주고, 미국의 대일전 참전 요청을 전달한다.
일본이 항복하며 영토가 해방된 후 피해 복구에 힘쓰면서 군벌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한편, 사실상 독립국이 된 티베트에도 지배욕을 보이고 있었으나 독일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하면서 다른 국가들도 줄줄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바람에 티베트 합병은 시도도 하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고 초강대국이자 우호국인 독일과 척을 질 수는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지만, 영토 확장 야욕은 버리지 못해서 대신 몽골을 침공해 합병할 생각을 한다.
문제는 독일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티베트와 달리 몽골은 소련의 괴뢰국이라 미국은 몰라도 소련은 반드시 개입할 것이고, 아무리 소련의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중국도 그다지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 여전히 전쟁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고, 아직도 군벌들이 각지에서 날뛰고 있는데다, 중국국민당의 고질적 문제인 부정부패가 매우 심각해 미국의 지원으로 먹고 사는 처지인데도 얼마 안 되는 원조물자까지 횡령하는 탓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상황이다. 히틀러와 팔켄하우젠도 이런 이유로 우려를 표했지만 장제스는 듣지 않고 있다.
미국도 장제스의 계획을 눈치채고 마셜이 장제스에게 몽골 침공 계획을 포기하고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않으면 원조를 끊을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장제스는 이마저도 듣지 않고 기어코 몽골을 침공했으나 히틀러와 팔켄하우젠의 우려대로 중국군은 소련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되려 내몽골까지 밀려나지만 독일의 압박으로 소련군이 진군을 멈추며 간신히 내몽골은 지킬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에 감사의 표시로 판다와 노획한 소련제 무기를 보내주지만, 전쟁을 일으킨 것에 열받은 미국이 원조를 축소한데다 늦게나마 부정부패를 척결하려 하자 사실상의 패전도 모자라 밥줄까지 끊기게 생긴 군벌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것은 장제스의 계획이었고, 장제스는 몽골 침공 당시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일 때부터 진작에 군벌들을 의심하고 다이리를 시켜 각 군벌의 중심부에 남의사 요원들을 심어둔 뒤였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군벌들을 암살하여 반란을 진압, 부정부패 척결과 군벌들의 처리, 권력 강화까지 이뤄내고 본격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인다. 이를 통해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게 되었다.
-
다이리
남의사의 수장. 중일전쟁 중 독일에 파견되어 히틀러에게 지원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각 군벌의 중심부에 남의사 요원들을 심어둔 뒤,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이들을 시켜 군벌들을 암살한다.
-
장쉐량
원 역사에서처럼 시안 사건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의 개입으로 장제스에게 체포되어 숙청당한다. 그 결과 시안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제6차 초공작전이 예정대로 시행되어 중국공산당이 괴멸, 중국이 적화되지 않는 나비 효과로 이어졌다.
-
양후청
원 역사에서처럼 시안 사건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의 개입으로 장제스에게 체포되어 숙청당한다. 그 결과 시안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제6차 초공작전이 예정대로 시행되어 중국공산당이 괴멸, 중국이 적화되지 않는 나비 효과로 이어졌다.
2.18. 일본
-
도고 시게노리
주독 일본대사. 아내가 유대계 독일인이었기에 원 역사에서는 나치 독일에 부정적이었으나 본작에서는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를 배척했기에 그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외무대신이 된 후 독일에 평화협정 중재 요청을 전달하지만 오히려 독일이 일본에 선전포고하자 다가올 결과를 깨닫고 절망한다. 전후 독일 정부에 체포되어 미국에 점령당한 본국으로 송환된 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금고 20년을 선고받는다.
-
우다 신타로
야기-우다 안테나의 개발자. 지도교수인 야기 히데츠구에게 모든 공을 빼앗기고 부려먹히는 처지였으나 그를 눈여겨본 히틀러에 의해 고용되어 독일 레이더 기술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2차대전의 전개가 달라지며 원 역사와 달리 항공모함의 진가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 바람에 상부의 지시로 진주만 공습을 전함까지 투입해 3차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후소가 해안포에 격침당하며 3차 공습은 실패로 끝났다.
원 역사와 달리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아 전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육군이 폭주하여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주장하여 같이 회부되어 기소된 장군들이 광분한다. 결국 전쟁 이전부터 계속 대미개전을 반대해온 점과 반성하는 태도를 인정받아 금고 25년을 선고받는다.[60]
-
무타구치 렌야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긴 일본군 삼대오물 중 최고봉. 여기서도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중국을 포위하고 영국을 압박하기 위해 인도 대륙 공략 작전인 21호 작전, 일명 임팔 작전을 실행하게 된다.
허나 보급 문제와 전투력 차이로 처참히 실패했던 실제 역사와는 달리 인도 전역에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 때문에 영국군 대부분이 반란 진압에 차출되어 있었고, 거기에 임팔과 코히마 수비군 대부분이 경험도 사기도 떨어지는 신병 부대였기에 나름 정예사단이었던 일본군에게 패배하며 임팔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승전보가 올라오자 더더욱 기고만장해져 임팔과 코히마 공략이 끝나면 브라마푸트라 강으로 진군하고, 벵골 철도와 아삼 철도를 차지하며, 레도를 탈취하고, 마지막으로 델리까지 진격한다는 레벤스라움 뺨치는 계획을 짜게 되지만, 여기서도 보급 문제가 발목을 잡으며 그 이상 진격하는 것에는 실패하게 된다. 전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2년형을 선고받는다.
-
히로히토
2차대전에서 전세가 기울자 항복을 결정한다. 전후 미국에 의해 폐위된 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자 체포 대상에서 제외된 하급 장교들과 관료들이 천황 폐하를 보위하지 못했다며 스스로의 배를 가르고 맥아더에게 재판의 부당함과 천황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투서 수만 장이 날아왔고, 그를 대신해 천황이 된 동생 야스히토까지 히로히토를 살려달라고 탄원했지만, 미국은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치르는 전범재판보다 더욱 엄격한 전범재판을 치러서 정의로운 이미지를 챙길 필요가 있었고, 냉전에서 일본의 중요성이 낮아져 굳이 일본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가 사라졌기에 히로히토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고,[61] 한때 천황이었음에도 얄짤없이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당한다.[62]
-
야스히토
아키히토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전후 미국에 의해 히로히토를 대신해 천황이 된다. 맥아더에게 히로히토의 사형만큼은 면하게 해달라 부탁해보나 정부가 결정할 일이라고 거절당한다.
2.19. 한국
-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뒤 히틀러의 초대를 받고 놀라며 그의 융숭한 대접에 감동한다. 이후 히틀러의 방한 때 올림픽 시절의 일을 기억한 김구의 초대로 히틀러와 다시 만나며 감격해한다.
-
남승룡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뒤 히틀러의 초대를 받고 놀라며 그의 융숭한 대접에 감동한다. 이후 히틀러의 방한 때 올림픽 시절의 일을 기억한 김구의 초대로 히틀러와 다시 만나며 감격해한다.
-
이미륵
원 역사처럼 독일에서 거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 일본이 독일 대사를 추방하면서 벌어진 독일 내의 동양인 대상 인종차별로 인해 곤혹을 치렀으나 히틀러의 단호한 대처로 위기에서 벗어난 뒤, 인종차별 범죄를 저질렀다가 히틀러의 지시로 발가벗겨져 공개 망신을 당한 어린이들의 기사를 보며 히틀러는 독재자가 맞지만 여타의 독재자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며 그가 플라톤이 말한 철인이 맞는지를 고찰한다.
-
이승만
원 역사처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덕분에 해방된 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친미 성향 탓에 방한한 히틀러를 경계하면서도 이를 기회 삼아 독일에게 무기를 팔아달라고 부탁해 이를 경계한 미국이 무기를 비롯한 각종 지원을 하게 만들 생각을 한다. 히틀러가 예상보다 많은 무기를 지원해주자 놀라워하며, 해명을 요구하는 주한미국대사를 구워삶아 미국의 추가 지원을 얻어내는 신기를 보인다. 이후 독재자로 타락하는 일은 없었는지[63]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4.19 혁명이 일어나지 않아 12년의 임기를 마치고 무사히 퇴임하였다.
-
김구
원 역사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다가 해방된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취임한다. 히틀러의 군국주의적 정책과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히틀러의 방한은 긍정적으로 여긴다. 이승만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
프란체스카 도너
영부인. 히틀러가 이승만과 이야기할 때 히틀러의 통역을 맡는다. 히틀러와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 히틀러가 한국에 우호적인 이유가 영부인이 동향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돈다고 한다.
-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독일에 방문한 경험 덕분에 나치즘에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 히틀러의 방한을 반긴다. 김구의 뒤를 이어 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베를린을 참고해 서울을 재개발하였다.
2.20. 몽골
-
허를러깅 처이발상
몽골 인민공화국의 독재자. 소련의 괴뢰국 지도자이자 몽골의 스탈린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맹렬한 스탈린의 추종자였기에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수많은 국가들이 소련의 적으로 돌아선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소련을 지원한다. 이러한 기조는 소련이 유럽 영토 전부를 자유 러시아에 넘겨주고 물러나며 아시아 국가로 전락했을 때까지도 이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중국이 합병을 목적으로 몽골을 침공하자 다급히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여 소련군과 함께 중국군을 격퇴하고 몽골을 지켜낸다.
2.21. 티베트
-
달라이 라마 14세
티베트의 지도자. 독일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하면서[64] 다른 국가들도 줄줄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한 덕분에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되는 길을 피하면서 티베트의 지도자로 남을 수 있었다. 이후 독일을 방문한 히틀러를 맞이하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한다.
2.22. 베트남
-
호찌민
미국 OSS와 협력해 독립운동을 하였고 베트남 초대 주석으로 취임한다. 공산주의자임에도 미국과 죽이 잘 맞으며, 동시에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미국이 조금 자제했으면 좋겠다는 의사표현만 보냈음에도 즉시 자국 내 우익 인사들의 탄압을 중단하였다. 이후 쿠바가 지지를 요청했을 때도 이를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되려 이 사실을 미국에 알리기까지 했다.
2.23. 인도네시아
-
수카르노
미국에 의해 해방된 후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 뒤 북보르네오와 뉴기니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맥아더가 살벌한 경고를 보내자[65] 페론과 달리 이를 받아들여 물러난 덕분에 자리를 지킨다.[66]
2.24. 인도
-
찬드라 보스
인도의 독립을 위해 독일과 손을 잡았다가 핼리팩스 경이 집권한 후 영독강화가 이루어지며 한동안 활동을 중단했으나, 처칠 집권 후 독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독일이 부른다(Germany Calling)'라는 선전방송에 출연해 영국을 비난한다. 이후 독일에게 패배한 뒤에도 인도를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하는 영국에게 독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맞서 싸운 끝에 마침내 독립을 이룩하지만, 막상 인도가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어가자 어떻게든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간디의 암살 후 분열을 막기 위해 독일군을 끌어들이자고 제안하지만 네루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그리고 진나의 암살 후 내전이 터지자 수습을 위해 노력하고 내전이 종결된 후 인도의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인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영국에 의해 감옥에 갇힌다. 영국이 인도를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석방되지만, 막상 인도가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어가자 어떻게든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원 역사처럼 나투람 고드세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
자와할랄 네루
인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영국에 의해 감옥에 갇힌다. 영국이 인도를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석방되지만, 막상 인도가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어가자 어떻게든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간디의 암살 후 생각을 바꿔 독일의 개입을 거부하고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을 허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진나의 암살 후 내전이 터지자 수습을 위해 노력하고 내전이 종결된 후 인도의 총리로 취임한다.
-
무함마드 알리 진나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중 나투람 고드세가 속한 라시트리야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2.25. 에티오피아
-
하일레 셀라시에
리벤트로프를 직접 맞이해 히틀러의 의중을 설명받고 독일과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이탈리아에게 패배한 후 영국으로 망명하였으나,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에티오피아가 해방된 후 히틀러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독일 편을 들며 참전을 선언, 독일을 돕기 위해 유럽으로 병력을 파견한다. 이후 영국에서 망명 생활 중 푸대접을 받은 것 때문에 독일에게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공격하겠다고 제안하지만 히틀러가 이를 사양하고 대신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의 방어를 부탁하자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영국군을 방해한다.
-
메코넨 엔델카츄
에티오피아의 총리. 리벤트로프와의 회담 자리에 참여해 히틀러의 의중을 설명받는다.
2.26. 아르헨티나
-
후안 페론
전후 아내 에바 페론과 함께 독일에 방문해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하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지만, 히틀러가 사실상 거절하며 포기하라고 충고했는데도[67] 야심을 버리지 못해 기어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히틀러가 충고한 대로 연합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전을 목전에 두고 쿠데타가 일어나자 독일로 망명한다.
-
페드로 아람부루
패전을 목전에 두고 책임을 면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다. 도망친 페론을 대신해 정권을 잡은 직후 연합군에 항복하고 권력 유지를 위해 철저한 미국의 사냥개가 된다.
2.27. 쿠바
-
피델 카스트로
쿠바 혁명으로 바티스타를 축출하고 집권해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을 몰수한다. 하지만 이 일로 미국에게 밉보이면서 경제제재를 맞고 사실상 물러나라는 요구를 받자 국제사회에 지지를 호소했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미국의 침공을 받아 아바나가 함락되기 전 수류탄을 터트려 자폭한다.
-
체 게바라
쿠바 혁명으로 바티스타를 축출한다. 하지만 미국의 침공을 받고 포위되자 아이티로 망명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부하의 밀고로 생포될 위기에 처하자 청산가리 앰플을 깨물고 자살한다.
[1]
부산 출신이며
동래구에 거주하고 있고 병역은 육군 병장 만기 전역이다. 작가의 전작인 《대영제국의 폐급장교》의 주인공과 이름이 똑같다.
[2]
목표를 달성 못하고 죽을 때마다 시간이 더욱 더 뒤로 가는 페널티를 받는다. 처음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였으나 회귀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복무 중인 시간대까지 밀려나 전장에서 개고생을 한다.
[3]
일단 기본적인 연설 능력도 뛰어나긴 한데 실제 연설들을 베껴서 써먹는 짓도 자주 한다. 윈스턴 처칠의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를 베낀 게 대표적인 예시.
[4]
일본과 적대 관계가 되면서 독일에서 애꿎은 동양인들에 대한
증오 범죄가 일어나자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어록을 인용한 연설을 하며 증오 범죄는 강력히 처벌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럼에도 어린이들이 재미 삼아 네팔인을 벽돌로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자 이들을 봐주지 않고(이때 촉법소년을 거론하는데 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듯) 그 가정에서 치료비를 부담하게 하고 조리돌림을 명령하는 모습을 보였다.
[5]
《
내가 히틀러라니!》를 의식했는지 독일에 의해 한국이 해방되면 파시즘 정권이 들어설 확률이 높고, 그렇다고 내버려뒀다가 원 역사처럼 분단되거나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기에 한반도 전체가 미국에 의해 해방되어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6]
본인이 개발한 요리 중
치킨이나
티라미수(퓌러쿠헨)나
컵라면(퓌러누델) 같은 음식들은 인기를 끌었지만,
하와이안 피자나 김치 그라탕 같은 것들은 괴식 취급받았다. 그러나 김치 그라탕은 히틀러가 한식을 즐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현대에 와서야 인기를 끌게 되었다. 컵라면은 현대의 맛이 그리워져서 전투식량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만들게 했는데 본인은 그냥
라멘이라고 부르려고 했으나 측근이 제안했던 퓌러누델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7]
위키 편에서는 창녀촌에도 안 갔다고 나왔다.
[8]
실제로도 히틀러는 지독한 금연주의자였으며, 본인 주변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거나 대중교통에서 담배를 금지한 것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작중에서는 아예 흡연자인 군인에게 포상금과 휴가를 미끼로 금연서약서까지 받아내고, 이를 어기면 포상금 반납에 벌금, 영창까지 보내는 걸 보면 현대 한국인이었을 때도 담배를 매우 싫어한 듯하다. 해당 이야기가 언급된 폴란드 파르티잔 토벌 편에서 토벌대원들이 어째서 입 안을 소독해주는 담배가 나쁘다는 거냐며 불평하는 모습이 나온다.
[9]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를 바탕으로 최강대국이 되었으나 나중엔 그 식민지가 발목을 잡을 것이라거나, 앞으로는 전함보다 항공모함이 중요해질 것이라 했고, 특히 1929년의
대공황, 일본의 침략 행보와 중국의 비상을 예측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대공황 발생 이후 세계 곳곳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다만 인터넷이나 인공지능, 화성 탐사 같은 너무 먼 미래 이야기는 터무니없다고 여겨질 거라며 뺐다.
[10]
원래는 뒤에서 암암리에 배격하려 했으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받은 이후 일부러 독일의 여러 주 출신 인물들을 맨 앞 방청객으로 앉힌 후 자신도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앞에 앉은 이들도 전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았지만 우린 모두 독일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인종이 아닌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뭉치자고 연설하여 공식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배격하였다.
[11]
히틀러 입장에서는 그냥 정답지대로 한 것뿐이고 충분히 승리했으니 그 이상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었는데 되려 적수들이 히틀러를 안 믿어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히틀러도 어쩔 수 없이 반격한 끝에 승리하고,
그렇게 독일이 또다시 팽창하고, 적수들이 또다시 히틀러를 안 믿어주고...의 반복이 되어버렸다.
[12]
다만 국민들이 영토 확장을 바란다는 측근들의 발언에 벨라루스 서부, 갈리치아까지는 독일의 영토화하기로 했다.
[13]
주인공이 한반도를 의식하는 것을 두고 측근들은 그런 작은 나라에 왜 그렇게 신경을 쓰냐고 하고 카이텔은 시장 확보가 아니겠냐고 답한다.
[14]
은퇴 선언은
샤를 드골의 하야 연설을 표절했다.
[15]
레벤스보른을 주장하자 주인공은 삼류 포르노에나 나올 법하다며 깠고,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이탈리아 북부를 합병하자고 주장하자 주인공은 연구비를 압수해야 하냐고 독백한다.
[16]
전 회차에서도 군부가 히틀러를 체포하자 SS를 이끌고 히틀러를 구출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17]
히틀러는 이에 '전에는
지크프리트의
발뭉을 찾겠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 이번에는
현자의 돌이나
샴발라의 입구를 찾을 거냐'면서 속으로 힘러를 깠다.
[18]
측근들이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볼 때마다 히틀러는 측근들에게도 알려줄 수 없는 유능한 비밀 정보원들이 있다고만 답했다. 그러나 막상 하이드리히가 정보원으로 의심되는 측근들을 조사해봤으나 이들은 붙어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괴벨스는 그 정보원들이 투명인간이라도 되냐고 말했다.
[19]
하이드리히의 사망으로 히틀러의 정보의 출처를 캐내려는 사람이 없어진 덕분에 히틀러의 정체가 밝혀질 걱정도 없어진다.
[20]
장녀 마리아, 장남 아돌프(주인공과 이름이 같다), 차녀 앙겔라. 마리아는 BDM 단원으로 주인공이 찾아왔을 때는 합숙에 가있었다.
[21]
주인공은 한국에서도 못 들어본 할아버지 소리를 독일에서 먼저 듣게 되었다고 독백한다.
[22]
위험성 때문에 군의관에게 처방받아야만 쓸 수 있게 했다.
[23]
처음에는 사고를 쳐서 최전선으로 발령된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24]
근데 또 뭐라고 하지 못한 것이, 판사 중에서 프라이슬러가 가장 얌전했기 때문이다. 이게 뭔 소린고 하니, 재판을 담당한 판사들이 전부 영국과 소련에게 선전포고도 없이 선빵을 맞고 자국민이 학살당한 나라의 판사들이어서 재판 과정에서 피고들의 뻔뻔함에 분노하여 온갖 쌍욕을 날려댔기 때문(...).
[25]
이는 히틀러가 원 역사와 달리 대선에 출마하지 않아서 악감정이 생기지 않은 것 덕분이기도 하다.
[26]
아예 괴벨스의 입에서 "
지크프리트가 환생하면 이럴 것 같다."라는 찬사까지 나올 정도로 대단한 전과였다.
[27]
정작 원 역사에서는 본인이
돌대가리 밑에서 굴려지다가 자살한 게 개그 포인트다.
[28]
사실 히틀러도 핵무기의 사용이 가져올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을 주저했으나, 상대인 스탈린이 어린아이까지 자폭병으로 전선에 갈아넣으면서까지 발악을 하자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총대를 매었다. 이에 아인슈타인도 데꿀멍해서는 돌아가는 장면이 압권.
[29]
히틀러와 나치당은 승리가 머지않았다고 하나 이는 거짓이며, 나치의 행보는 독일을 파멸시킬 것이며 증오는 증오를 낳고, 욕심은 욕심을 낳으며, 자만은 파멸을 부를 뿐이라며 제국주의적 야욕은 영원히 사라져야 하며,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30]
본인도 맞아죽을 것을 각오하고 벌인 행동이었다. 지금 독일의 광기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독일인들은 허울뿐인 자유조차 사라지고 평생 목줄에 묶인 채로 자신이 노예인 줄도 모르는 노예로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31]
주인공에게 독재자라고 하며 민주적인 나라가 되어야 한다 했고, 주인공은 때가 되면 물러날 거라고 하나 레마르크는 후임자도 측근 중 한 명일 거라 항변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민주적으로 투표를 진행해도 결국 똑같을 것이고 국민들은 레마르크의 말을 듣지 않을 테니, 차라리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와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스스로 원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32]
이 소식을 의무병으로 복무하고 있는 원 역사에서
하얀 장미를 이끄는
한스 숄과 제5대 서독 총리인
헬무트 슈미트가 듣고는 삼류 소설가가 배은망덕하다고 깐다.
[33]
히틀러는 생전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자주 읽었다는 증언들이 있었고 현직에 있을 당시 이 책을 금지해야 한다는 측근들의 건의를 물리쳤다. 어찌 보면 괴링이 히틀러의 뜻을 어긴 셈이다.
[34]
결과적으로 그의 예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 되었다. 독일은 핵무기를 이용해 2차 독소전쟁에서도 승리하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자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해 현대까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이 되었지만, 동시에 히틀러가 일궈놓은 체제도 공고해지면서 부분적 개혁이 이뤄졌다고는 해도 현대까지 나치당의 독재가 공고히 자리 잡고 있으니, 독일은 히틀러와 나치당 덕분에 파멸하지 않고 승리했지만 히틀러와 나치당 때문에 그가 원하던 민주주의는 영영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35]
원 역사와 달리
홀로코스트도 없고
공산당과
사민당 외의 정당 해산도 없었기에 비교적 고분고분한 태도로 바뀌었다고.
[36]
처칠의 연설 중 가장 유명한 "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인 연설이다.
[37]
아예 내레이션에게 정부 호소인 집합소라고 까이는 처지다.
[38]
이 대답을 들은 히틀러는 하와이안 피자를 대접했던 바돌리오와는 달리 무솔리니에게 티라미수를 대접한다.
[39]
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음식에 마개조를 가하는 걸 싫어하니 이탈리아 정부수반에게 하와이안 피자를 대접하는 건 외교상 결례다. 사실상 능욕. 히틀러에게 아첨을 일삼는 카이텔도 이 접대만큼은 커버를 쳐주지 못했다.
[40]
주인공의 독백에서 어느 군소정당이 한미동맹을 파기하고 한중동맹이나 한러동맹을 맺겠다고 하는 격이라고 비유했다.
[41]
측근들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나 주인공은 그랬다간 순교자로 추앙될 거라며 기각했다.
[42]
진실을 알 만한 이들은 벌집이 되거나 옆방에 갇혀 있는 신세라고 한다.
[43]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키릴 메레츠코프 등의 장성들과
세르게이 코롤료프,
발렌틴 글루시코,
미하일 얀겔 등의 과학자들.
[44]
오죽했으면
정치장교가 '이 가증스러운 체제를 위해서 싸울 이유를 못 느끼겠다.'면서 소대를 이끌고 투항했을 정도였다. 이 정치장교는 후에 있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대위로 진급하여 자유 러시아군을 이끌고 있었다.
[45]
히틀러도 원래는 이 정도만 요구할 생각이었으나 측근들이 이 영토들은 이미 손에 넣은 것들이니 더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 약한 태도를 보였다가는 소련이 전황을 유리하게 해석할 우려가 있다는 점, 그리고 소련의 전쟁 수행능력을 더 깎아야 한다는 점들을 들어 반대하자 생각을 바꿨다.
[46]
다만 초반 밀릴 때의 전문을 보면 남러시아 전체를 넘겨줘야 할 거라 생각하긴 했다.
[47]
후퇴 금지, 작전 회의에 자기 멋대로 참여하기, 전선에 나와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히틀러에 열폭해서는 벤치마킹을 한다고 대역을 썼는데 제대로 된 안전장치도 없이 보냈다가 폭격을 맞고 대역이 사망함 등등 세기도 어려울 정도다. 애초에 히틀러는 전선에 나갈 때
티거 전차에 탑승하여 최대한 안전을 챙겼고, 주로 야전병원을 돌면서 시찰한 것에 반해 스탈린은 제공권이 넘어간 상황에서 꼴랑 경호원만 붙여서 대역을 포격과 폭격이 난무하는 인세지옥의 한복판인 모스크바 방어선 최외곽으로 보내버렸다(...). 이후 슈투카가 강림해서는 방공호(그것도 대충 만든 무개호)를 박살 내면서 대역은 머리만 빼고 고기죽이 되어버렸다.
[48]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더 심해졌는데, 원 역사의 나치 독일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러시아도 유서 깊은
반유대주의 국가인데 여기서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에게 호의적인 만큼 반대로 소련의 유대인 탄압이 더 심해져 소련 내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유대인 자치주로 강제 이주당하고 반발하는 이들은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원 역사에서 유대인 자치주로의 이주는 어디까지나 자원 형식으로 이뤄졌고 이주자에게 지원도 해줬던 걸 생각하면 사실상 소련판
홀로코스트로 변모한 셈이다. 그런데 쿨리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자치주의 유대인들이 이를 틈타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했다.
[49]
화력은 T-34와 동급, 기동성은 살짝 우세, 방호력 우세로 전차 자체의 성능은 T-34의 상위 호환이지만 생산성에서는 T-34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평을 받는다. 차체 중심이 전면에 쏠려있어 신뢰성도 T-34보다 떨어지는 것은 덤. 거기다 화력도 작중
88mm를 도입하고 있는 독일에 밀린다. 제식명은
T-43으로 변경되었다.
[50]
원 역사에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때 처형당했던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의 유언(언젠간 볼셰비키 놈들이 니들 목을 매달 거다!)의 오마주.
[51]
앞의 두 사건과 달리 히틀러의 짓이 아니었는데, 존 에드거 후버가 한 짓이라는 게 암시된다.
[52]
P-80 슈팅스타,
F-84 썬더제트,
F-86 세이버,
F2H 밴시,
F9F 팬서 등.
[53]
도로주행을 시험하는데 엔진이 얼마 못 가 과부하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54]
M46 패튼이 차체 장갑 150mm, 주포 190mm, 중량 50t의 중구축전차 비슷한 무언가로 개발되고, 그 외에도
차체 정면 150mm, 포탑 정면 300mm, 측면 200mm, T53 120mm 전차포를 탑재한 M29 중전차,
M1 240mm 곡사포를 탑재한 M92 자주포 등이 개발되었다.
[55]
헌데 브라질이 아르헨티나를 공격하나 무기 성능의 차이로 처참하게 패하고 만다.
[56]
루스벨트가 4선까지 가지 못하고 3선 임기 중 사망하여
미국 헌법에 대통령의 3선 금지가 명문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7]
다만 헨리 포드는 친독 인사였지만 동시에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독일이 반유대주의를 공식적으로 배격했음에도 친독 성향이 더 컸는지 친독 행보를 보인다.
[58]
이로 인해 공화당은 듀이(2선)+맥아더(3선)+태프트(2선)로 무려 28년을 집권하게 되었다.
[59]
사실 이들의 계획은 진작에 탄로 난 상태였고, 다이리가 장제스에게 알렸지만 장제스는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원 역사에서 시안 사건을 맞이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히틀러도 같은 말을 하자 장제스도 비로소 다이리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통해 대공황, 일본의 침략 행보와 중국의 비상을 예측하였기에 세계 각국에서 히틀러는 일종의 예언자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도 히틀러의 말을 믿었다.
[60]
태도가 다른 전범들과 같이 사형을 선고하게 되면 미국의 일방적인 보복으로 보이게 될 점을 우려한 면도 있다.
[61]
미군 전사자가 22만이라 그를 살려주자고 했다간 백악관이 불태워질 것이라고 한다.
[62]
히로히토가 처형당한 후 일본 각지에서 수천 명이 히로히토를 따라서 자살했다고 한다.
[63]
분단이 일어나지 않아
6.25 전쟁도 발생하지 않은 게 한몫한 듯하다.
[64]
여기에 SS가 티베트군의 현대화를 위한 원조를 하고, SS의 교관들이 티베트군의 훈련을 위해 군사고문단으로 파견되었다.
[65]
국경을 넘는 즉시 자카르타에 폭탄이 떨어질 것이고 원조도 모두 끊겨서 국민들이 기아로 죽을 것이라는
외교적 수사 따위는 집어치운 내용이었다.
[66]
이제 와서 말을 무를 수는 없어서 영유권 주장은 계속 했지만,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67]
페론은 영국이 약해졌으니 해볼 만하지 않냐고 했지만, 주인공은 C-라는 점수를 매기며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텐데 아무리 영국이 망명정부 신세로 전락했다고 해도 영연방 국가들은 여전히 건재한 데다 미국과 브라질까지 가세하면 그 격차는 더더욱 커지고, 설령 아르헨티나가 군사적 승리를 거둔다 해도 미국이 전쟁 대신 경제제재로 응수하면 아르헨티나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테니 버틸 수 있을 리가 없고, 아무리 포클랜드 제도가 영국 망명정부의 통치를 받는다고 해도 명목상 파시스트 영국 정부의 영토이기도 한데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면 독일로서는 우방국끼리 전쟁이 난 격이니 아르헨티나의 편을 들 수 없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