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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7 00:29:52

미하일 얀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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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쿠즈미치 얀겔
Михаи́л Кузьми́ч Я́нгель
Mikhail Kuzmich Yangel
파일:Mikhail_Yangel.jpg
<colcolor=#ffe400,#ffe300> 출생 1911년 11월 7일
러시아 제국 이르쿠츠크현 키렌스키구 지랴노바 마을[1]
(現 러시아 시베리아 연방관구 이르쿠츠크주 니즈네일림스키군)
사망 1971년 10월 25일 (향년 59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부모 아버지 쿠즈마 라브렌티예비치 얀겔
어머니 안겔리나 페트로브나 얀겔
자녀 아들 알렉산드르
딸 류드밀라
주요 서훈 레닌훈장 (4회)
사회주의노력영웅 (2회)


1. 개요2. 생애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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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로켓 공학자. 소련의 OKB-586 설계국(우크라이나 유즈노예 설계국)의 설립자이자 총책임자.

세르게이 코롤료프, 발렌틴 글루시코,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등과 함께 동료이자 선후배, 상사, 부하 관계로서 함께 소련의 로켓, 미사일을 개발을 주도했던 주요 공학자 중 한 명이다. 얀겔은 이 네 명 가운데 가장 불운한 인물이었다.

1960년대 소련의 주력 ICBM인 R-16, R-36 등을 설계했다.

2. 생애

제정 러시아 시절 시베리아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의 손자이자 아들로 태어났다. 얀겔은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주의 아주 작은 시골에서 12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얀겔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모두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이었다.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래도 자식들이 배우길 원했고, 얀겔은 가까스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으나 집이 워낙 시골이었고 학교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결국 학교에 다니기 위해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헤어져 할머니 집에서 자라야 했고, 방학 때만 집으로 돌아와 부모와 살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이모/고모(aunt)의 집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다.

어쨌든 얀겔은 학업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1926년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아 먼저 모스크바 광산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형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 먼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모스크바 인근 방직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방직기를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 공장은 당시 항공기 소재 관련 부품을 제작했고, 관련 일을 하면서 항공기 제작의 꿈을 관심을 갖게 된 그는 1931년 모스크바 항공 대학에 합격했다.

1937년 모스크바 항공 대학교를 졸업했고, 유명한 항공기 설계자 니콜라이 폴리카르포프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숙청 시기 말기였던 1938년 12월 그는 정치범이었던 아버지가 강제수용소( 굴라그)를 탈출한 것에 대해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5천 킬로미터 거리의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12월 한겨울에 교통로가 없는 시베리아를 통과하다가 죽을 뻔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후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그는 폴리카르포프에게 돌아가서 항공기 제작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 시기 그는 비행기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할 정도로 일에 매진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노력을 인정받아 1944년 그는 아르툠 미코얀의 설계국에서 수석 엔지니어로 일하게 되었다. 1946년에는 블라디미르 미야시쉬체프의 설계국의 수석 엔지니어가 되었다.

1950년 소련 항공산업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설계국의 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후 코롤료프 밑에서 R-5, 소련 최초의 ICBM인 R-7, R-11 로켓 개발에 참여했다.

로켓 설계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54년 코롤료프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설계국인 OKB-586 설계국을 만들어 책임자가 되었다.

1957년 소련 최초의 ICBM이었던 R-7 로켓이 완성되었지만 사실 R-7은 실전 배치하기에 곤란한 문제들이 있었는데. 크기가 너무 커서 탐지가 쉽게 된다는 점[2]과 로켓중에서도 희귀한 설계방식인 클러스터링 설계 때문에 타워형이나 사일로가 아닌 특유의 발사대가 필요하고. 연료도 상온에서 취급이 곤란한 등유(케로신)/액체 산소라서 신속발사가 사실상 불가능해서[3] ICBM으로는 부적합 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미하일 얀겔과 OKB-586 설계국은 실전 배치가 가능한 ICBM 설계를 주문을 받아 R-16 로켓 개발에 들어갔다.

하지만 R-16의 개발이 지지부진해지자 책임자인 네델린과 설계자인 얀겔은 기한을 맞추려 무리하다 보니 안전에는 소홀해졌고 결국에는 개발 도중인 1960년 미트로판 네델린 상원수 등 100여명이 사망한 네델린 참사라 불리는 대폭발 참사가 발생했고, 이 참사로 인해 그는 흐루쇼프로부터 질책을 받게 되었다.[4]

이 사건의 책임으로 그는 소련의 미사일/로켓 개발에서 많은 견제를 받게 되었고, 이후 얀겔의 후배인 또다른 천재 로켓 공학자 블라디미르 첼로메이가 흐루쇼프로부터 신임을 받아 소련의 주요 ICBM 개발을 주도해 나가게 되었다.

비록 대폭발 참사가 일어났지만 개발이 완료된 R-16은 성공적인 성능을 보였는데. 우선 등유/액체산소에서 폭발성이 강해서 네델린 참사의 원인이 될 정도였지만 상온에서 주입이 가능하고 장기보관이 가능한 적연질산/비대칭디메틸히드라진으로 바꾸고, 지상에 노출된 발사대에서 지하 사일로에서 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실전 배치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던 코롤료프의 R-7을 대신하여 실전 배치한 핵미사일이자 ICBM이 되었다.

대폭발 참사 이후 라이벌인 첼로메이가 기회를 잡아 UR 시리즈 로켓/미사일을 개발해 나갔고, 얀겔은 이전보다 정치권에서 많은 견제와 압력을 받게 되었지만 얀겔의 R-16가 성공적이었기에 이후 다시 기회를 얻어 R-36이라는 희대의 마스터피스를 탄생시켰다.

레닌 훈장, 소련 국가 훈장 등 수많은 훈장 및 영예를 얻었으나 60년대 후반 1971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3. 관련 문서



[1] 해당 마을은 현재 수몰되었다. [2] 대형급 ICBM인 R-36도 2미터 정도 작았다. [3] 산소는 반응성이 엄청나서 장기보관을 하면 탱크가 부식이 되고. 급하다고 액체산소를 들이부었다간 연소 확률을 증대시켜 아폴로 1호처럼 대참사가 일어난다. [4] 폭발하기 몇분 전에 담배 때문에 벙커로 들어갔는데 로켓이 갑자기 터져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폭발현장으로 온 흐루쇼프에게는 "동무는 왜 여기에 있소?"라는 갈굼을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