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colcolor=#fff> 한스울리히 루델 Hans-Ulrich Rud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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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6년 7월 2일 | |
독일 제국 슐레지엔 콘라츠발터[1] | ||
사망 | 1982년 12월 18일 (향년 66세)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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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독일 국방군 (1936~1945) 친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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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계급 |
공군
대령(Oberst) 친위대 돌격병(Sturmman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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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황금 금강석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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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스로 포기하기 전까진,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 "Verloren ist nur, wer sich selbst aufgi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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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독일 공군에 복무하며 급강하폭격기 Ju 87, 일명 슈투카를 타고 다시 없을 여러 기록들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후일의 행적을 보아 의심할 여지 없는 나치 추종자다.[3]
2. 생애
2.1. 전쟁 당시
2.1.1. 전적
혼자서 2-3개 전차사단과 1개 함대를 섬멸했다.- 519대의 전차 격파
- 700대의 트럭 격파
- 150대의 대공포와 포대 격파
- 100개 이상의 다리, 철도, 벙커 파괴
- 4량의 장갑열차 격파
- 소련군 강구트급 전함 마라 격침[4][5], 10월 혁명 반파
- 중순양함 페트로파블롭스크 격침[6][7]
- 민스크급 구축함 민스크 격침
- 70여척의 상륙용 함정 격침
- 적 항공기 11기 격추[8] - LaGG-3 2기 및 Il-2 등 격추
- 그외 비상착륙 등의 방법을 사용해 적진에서 고립된 12명의 아군과 6명의 슈투카 조종사들을 구출
이 기록은 교차검증까지 된 공식적인 전적이며, 총 출격횟수만 따져도 2,530회라는 대기록을 세웠다.[9]
공식적인 전차 격파수만 봐도 쿠르스크 전투 당시 프로호로프카 전투에서 소련군의 주력인 5근위전차단의 T-34 수량보다 많다.
2.1.2. 성격
성격은 독선적이라 독일 공군 동료들 중에서 루델을 싫어하는 자들이 많았다. 독일 공군 전투기 에이스인 귄터 랄의 인터뷰에 따르면[10], 루델은 자기 중심적이었고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절대 술을 마시지 않고 우유만 마시며 취미는 등산에 운동 뿐이어서 동료들과 어울릴 구석도 없었다고.하지만 의외로 남들이 자신을 뭐라 생각하든 간에 전우애는 상당히 깊었는지 피격당하여 적진에 불시착하거나 고립된 아군을 보면 내버려두지 못하고 자신 또한 비상착륙을 감행해 기체 사수석에 태우고 구출해오는 식으로 6명의 동료 슈투카 조종사들을 포함해 12명을 구출해 왔다고 한다.
2.1.3. 여담
어마어마한 전과를 올렸지만, 그만큼 당하기도 많이 당해서 30회 정도 격추당했고 5번 정도 부상당했으며 그 와중에 마지막 부상시 한 쪽 다리를 잃었다.[11] 당시 독일군 에이스들이 마음놓고 제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런 부상을 입고도 출격할 정도의 근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다리를 잃은 때로부터 겨우 6주만에 전선에 복귀한다.병원에서 출격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몰래 출격했는데 적 전차가 너무 많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루델이 몰래 출격한 것을 알아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일화 때문에 일부에선 루델의 지금 알려진 전공마저도 축소된게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12][13]
한쪽 다리를 잃고도 출격을 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근성과 정신력이 엄청났는지, 한번은 아군을 구출하려고 불시착했다가 포위 됐었는데 후방기총수 에르빈 헨첼 상사[14]와 함께 드네스트르강에 입수하여 포위망을 탈출했다. 안타깝게도 헨첼은 수영 도중 익사하고 루델만 혼자 살아남아 도보로 탈출을 이어갔는데, 운없이 적에게 발각되어 호신용 권총을 빼앗긴 나마지 어깨에 총을 맞고 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어떤 수를 썼는지 호송되던 도중 탈출에 성공했고, 어깨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맨발로 15km를 달려 아군 진영에 도달해 본대로 복귀한 적도 있다.[15]
한스울리히 루델에게 수여된 황금 금강석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은 원래 전사자 12명을 선정하여 수여될 예정이었으나 정작 생존자인 루델에게 1945년 1월 수여되었다. 수여자는 루델 단 한 명뿐이고, 제작한 훈장도 6개밖에 없다.
2.2. 전후의 행적
루델이 이끄는 제2지상공격항공단(SG 2)은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 8일, 오스트리아 및 체코슬로바키아 일대의 비행장에 주둔하며 소련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루델이 지휘하던 비행단 본부와 제2그루페는 뵈멘( 보헤미아) 북부의 쿰머 비행장에 위치했는데, 미군 제19전술항공사령부(당시 제9공군 예하부대)와 무전으로 연락을 취해 키칭겐 비행장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항복하기로 합의한다. 루델은 이날 오후 남아 있던 Ju 87 3대와, Fw 190 4대를 이끌고 쿰머를 출발, 무사히 키칭겐에 착륙한다[16]. 그리고 이곳에 주둔해 있던 미 육군 항공대[17] 제405전투비행단에게 항복했다.루델의 전후 처리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 루델처럼 동부전선에서 무훈이 특출난 장병들은 모두 소련이 어떻게든 전범으로 몰아 응징하려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미 육군 항공대에 직접 항복했던 것이 주효했다. 미 육군 항공대는 같은 파일럿의 처지를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강했으며, 루델이 전투를 수행한 것 외에 특별한 전범 행위가 없었다는 이유로 소련측에 신병을 넘겨주지 않았다. 이는 소속 전투기들을 모두 파괴하고 육로로 미군 제90보병사단에 항복한 제52전투비행단의 헤르만 그라프와 에리히 하르트만이 미-소간의 사전 합의대로 소련측에 넘겨져서 가혹한 포로생활에 시달린 것과 극명히 대조된다.[18] 루델은 미 육군 항공대에 소련군과의 교전 노하우를 전수하면서 포로생활을 하다 1년도 안 된 1946년 4월에 석방되었다.
루델은 이윽고 1948년에 나치들의 도피처였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간다. 당시 독일 사정에서 정상적인 경로로는 아르헨티나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육로로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넘어가, 이곳에서 위조여권을 이용해 항공편으로 아르헨티나로 넘어간다. 루델은 열렬한 나치주의자인데다 나치 독일의 최고 수훈자라는 상징성도 있었기 때문에 이내 히틀러에 동정적이던 후안 페론 대통령과도 친구가 된다. 여기서 그는 나치 전범들의 탈출, 정착을 돕는 전우협회(Kameradenwerk)를 설립하고 과거 친위대, 게슈타포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그밖에도 역시 나치 독일에 우호적이었던 라틴아메리카 여러 군인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그래서 훗날 쿠데타로 집권한 파라과이의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이 당시 남미 각국 군대의 자문역을 해주며 쌓아올린 인맥 덕에 나중에는 대전 중 군수기업이었던 서독 기업들의 해외영업을 도와주며 짭짤한 수입을 챙기기도 했다.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저서 Cat Shit One '80 Vol.2를 보면 루델이 뜻하지 않게 포클랜드 전쟁에도 약간의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포클랜드 전쟁시 해리어와 함재 레이더로 무장한 영국의 역습에 대해 아르헨티나 공군은 전투기의 엄호도 없이 달랑 대거나 스카이호크로 이루어진 공격편대를 보냈다. 비록 그들이 시해리어에게 많이 격파되긴 했지만 영국 함대에 타격을 주어 진군을 지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공격적인 항공기 운용 전술은 과거 루델이 아르헨티나 군사 고문으로 활약했을 때 전수해준 것으로 당시 아르헨티나 공군사령관이었던 공군 중장 바실로 라미 노소 장군도 루델의 수업을 받은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후 1953년에 루델은 다시 서독으로 귀국해서 노골적인 네오나치 활동을 벌였다. 그가 소속된 정당은 독일 국가당( Deutsche Reichspartei)이었는데, 이 정당은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가 1952년에 강제 해산시킨 극우 성향의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Sozialistische Reichspartei Deutschlands)의 주요 지도자와 대부분의 당원이 재결집한 당이었다. 루델은 독일 국가당 소속 후보로 1953년 총선에 출마했으나, 당선은 되지 못했다.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자기 중심적인 성격도 한몫했다. 성격이 워낙 독선적이어서 같은 극우세력 내에서도 인심을 얻기 어려웠다고 한다. 또한 정치 연설을 할 때마다 자신이 과거 대전기 전우들을 대표하고 있다고 외치며, 소련을 쳐부수는데 독일을 돕지 않았다고 서방 국가들을 맹비난하는 등 민감한 이야기를 돌직구로 쏟아내는 바람에 히틀러와 나치에 진저리치던 많은 전우들은 당연히 그에게 등을 돌렸다.
이후에도 1970년대까지 루델은 나치를 옹호하는 극우 인사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 보니 독일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서독 내 좌파 진영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아, 그가 서독 정부나 연방군이 주최하는 공식 행사에 초대받은 사실만으로도 큰 논란이 된 적이 여러 차례였다. 결국에는 1982년 12월 18일에 지병인 심장마비가 재발하여 4일 뒤인 22일에 사망하였다. 마지막 장례식에도 극우 성향의 조문객들이 운집하여 나치식 경례를 해대고, 당시 서독 공군 소속 F-4 팬텀 전투기 2대가 장례식장 위를 통과하며 추모비행을 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서독 공군 당국은 이것이 훈련비행 중 벌어진 우발적인 일이라고 해명했으나, 이전부터 루델과 날을 세워온 좌파 진영에서는 서독 연방군이 나치 독일군의 유산을 단절하지 못했다고 맹공격을 퍼부어 다시 한 번 큰 사회적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3. 평가
귀관이야말로 지금까지 독일이 낳은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고 위대한 군인이다.
― 아돌프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
루델 한 사람은 1개 사단 몫 이상이다.
― 페르디난트 쇠르너
― 페르디난트 쇠르너
한스 울리히 루델에 대한 군사적 공로, 평가는 독일군 중 황금 금강석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의 유일한 수훈자였다는 이 하나만으로 간단히 증명된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항공전 역사상 최고의 공격기 스페셜리스트, 지상공격, 근접항공지원에 전설이며 사상 최고의 파일럿을 꼽으라면 반드시 후보로 올라가는 사람이다. 다만 그의 엄청난 전과에도 불구하고 격추한 목표의 대부분이 지상에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인지 밀리터리 매니아 사이에서는 에이스로서의 입지는 좀 미묘하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유명한 에이스들이 하늘을 나는 비행기들을 쓰러트린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듯.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나치 행적과 더불어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는 목표물을 맞춘 것 뿐인데 너무 띄워주는거 아니냐고 비판한다. 또한 한 번 격추당하면 바다라서 생존하기 어려운 해군 조종사들과는 달리 몇번이고 격추당하며 올린 전과라는 것도 저평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비판을 위한 비판'에 불과하다. 지상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목표물을 공격하는게 그렇게 쉽다면, 추축국이나 연합군의 다른 지상공격 파일럿들은 왜 루델 대령만큼의 전공을 올리지 못했는가? 라는 간단한 질문 앞에 앞의 비판은 설 자리를 잃는다. 실제 공중전에서 사격 기회가 날 때는 도리어 지상공격보다 쉽다. 애초에 적기를 따라가며 꼬리에 붙을 경우인데(공중전에서 헤드온은 도박 오브 도박), 적기가 300km/h로 날아간다면 나는 보통 400km/h로 날기 때문에 100km/h차이만 극복하게 되지만 지상 목표물은 움직이고 있으며, 스쳐지나가는 속도도 내 전투기의 속도 그대로이기 때문에 도리어 정렬 시간이 짧아 사격이 더 어렵다. 게다가 지상공격이라고 상대방의 포화가 없는게 아니다. 오히려 지상공격시에는 여러 곳에서 올라오는 대공포화를 그대로 마주해야하기 때문에 공중전보다 더 위험하면 위험했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순수하게 조종사의 기량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공중전과 달리 지상공격은 재수없이 대공포화에 맞으면 아무리 실력이 좋은 조종사라도 그대로 황천행인데 루델은 2,500회나 출격하면서도 종전까지 살아남았다(물론 격추는 여러번 당했지만). 게다가 루델이 가장 많은 전과를 올렸던 1944년은 독일이 제공권을 상실했던 시점이었는데 적 전투기만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슈투카로 이만한 전과를 올렸다는 점만 봐도 절대 그를 낮게 평가할 수 없다. 그리고 대공포화가 있는 와중에도 전함을 단 한 발의 폭탄[20]으로 격침시킨다는 것은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전투기로 적기 격추도 11회나 했던 명실상부한 에이스였다.[21]
그리고 한 번 격추당하면 바다에 빠져 죽을 확률이 매우 높던 해군 조종사들과 달리 몇 번이고 격추당했다는 저평가 역시 별로 논리적이지 못한데, 루프트바페 최다 격추수를 기록한 전투기 에이스 에리히 하르트만과 아프리카의 별로 불린 전투기 에이스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 역시 처음에는 수차례 격추되었다. 일반적으로 수십 기씩 격파하는 전투기 슈퍼 에이스는 전선에서 밀리는 국가에서 주로 나오는데, 이는 전선에서 밀리지 않는다면 5기~10기쯤 격파한 에이스는 아까운 인재이므로 대개 교관이나 예비역으로 돌려버릴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치 독일에서는 100기 이상 격추한 괴물들이 쏟아져나오고, 똑같이 전선을 밀리던 일본 제국에서는 80기 선에서 그친 이와모토 테츠조가 전부다. 독일에서는 격추되어도 비상 탈출하거나 불시착해서 구조되거나 복귀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몇 번씩 격추되는 건 적기를 기본 백 기씩은 떨궈버리는 독일 에이스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또한 대전 중에 공격기 조종사로서 다시 없을 전설적인 전과를 올린 것 뿐만 아니라, 전후까지 골수 나치 행적을 이어가기도 해 숱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과거 서독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극우파에게는 절세의 전쟁 영웅으로, 좌파에게는 자기중심적인 수구꼴통이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이미지가 단단히 박혀 있다. 이런 이유로 현대 독일에서는 함부로 루델에 대해 언급하다가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4. 대중문화에서의 루델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독일이 정상국가화되면서 나치즘 색이 빠지고 원 역사처럼 하늘에서 맹활약하며 거기서도 마라는 또 침몰한다.
- 모에모에 2차 대전략 시리즈에 등장하는 루델은 위의 루델이 몰고다니던 Ju 87과 본인을 모에화 시킨 캐릭터다.
- 스트라이크 위치스 소설판에 이 사람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한나 U. 루델이 등장한다.
-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강철의 사신에서 미하엘 비트만이 노리던 목표물을 가로채 간다. 열받아서 주먹을 휘두르는 비트만을 보면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건 덤이다.
- 헛쯔모없는 개혁에서는 제4제국 소속으로 오토 스코르체니의 파트너로 나온다. 설정상 항공전을 펼치면서 일종의 초능력을 얻었다고 하며, 필살기는 슈투카의 급강하 폭격을 이미지한 노즈 다이브 봄버와 메서슈미트 슈발메.
-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틸 디비전 2에서 스트라흐비츠 기갑전투단 전용 에이스로 등장한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폴란드 침공 때는 Fi 156 슈토르히를 타고 정찰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괴링과 시찰 온 히틀러가 그를 발견하고는 슈투카 조종사로 추천하며 원 역사보다 빨리 슈투카를 몰고 다니며 전적을 쌓는다.
[1]
현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 콘트라토프
[2]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를 소련 인민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고, 10만 루블의 현상금을 걸었지만 그 현상금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
친위대에도 입대하여 돌격병(SS Sturmmann) 계급을 받았다.
[4]
그것도 폭탄 한방으로
[5]
전함 마라호는 1.4톤 철갑폭탄으로 완전 격침됐다고 여겨졌으나, 침몰 후에도 하필 항구에서 가라앉는 바람에 포탑 2기가 여전히 사용 가능했으므로, 응급복구를 거쳐 항구 바닷물에 떠 있는 해상포대로 운용 방식을 변경한 후 레닌그라드 해방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이후 마라의 공식 폐함은 1952년에 이뤄졌지만, 격침 당시 항해능력과 동력 및 사격관제능력을 루델의 공격으로 몽땅 상실한 상황이라 전함으로서의 능력은 몽땅 잃어버려 격침으로 인정되었다. 즉, 마라호가 전함의 능력을 상실하고 포대로서 독일군을 괴롭힌 것은 격침된 배를 포대로 끝까지 활용한 소련이 대단한거지 루델이 어중간하게 격침시킨 탓이 아니다. 에초에 수심이 깊은 바다였으면 빼도박도 못할 격침 후 침몰이다.
[6]
원래 독일이 건조한
아드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5번함이었으나(이때는 이름도 뤼초였다.) 전쟁 이전 소련에게 판매된 탓에 전쟁 내내 소련 해군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7]
단 이후 페트로파블롭스크는 견져올려진 뒤 전선에 복귀했다.
[8]
지상파괴가 아니라 격추임에 주목. 이것은 슈투카로 거둔 전과가 아닌데, 루델은 대지공격용
Fw 190 F8, D9을 타고 출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얻은 전과다. 참고로 항공전에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격추수 5기 이상이여야 에이스로 칭하는데 루델은 이미 공격기 조종사로서의 전과를 제외하고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전과만 보더라도 11기 격추이기 때문에 에이스로 분류된다.
[9]
당시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2,000회 출격 당시 전투 조종사용 전면부 비행 걸쇠를 전부
금으로 만들고 거기에
다이아몬드 수십개를 펜던트 모양으로 하여 숫자 2,000으로 세긴 것을 특별히 제작하여 루델에게 수여하였다.
[10]
애초에 같은 공군 소속이기도 했고, 쿠반지역이나 러시아남부 지역에서 같이 작전했으며 연합군에게 항복한 뒤 잠시동안 둘이 같은 감방을 쓴 적도 있었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증언한 것.
[11]
이때 다리 절단 수술이 집도된 곳이 그 유명한
동물원 대공포탑이다.
[12]
꼼꼼하게 전과를 조사했던 루프트바페의 성향 때문에 루프트바페 파일럿들은 격추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한 사례가 많다. 일례로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46,100 회의 공중전투가 있었고, 소련은 여기서 106,400 대의 항공기를 잃었다는 공식 기록이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선 그 숫자가 약간 다른데, 그 숫자는 88,300 대 가량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이에 반해, 당시 독일 공군이 집계한 격추댓수를 통합하면,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중 가장 수치가 떨어지는 77,000 대로 집계가 나온다. 이것은 독일 파일럿들의 격추 인정이 매우 까다롭고, 허풍으로 부풀린 과장된 전과 보고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며, 오히려 인정받지 못한 전과가 상당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13]
루프트바페 파일럿은 격추 보고를 할 때 세가지 보고서를 요했으며 격추 인정을 받으려면 건카메라 사진 증거 내지는 동료 증언, 지휘관 추천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는 전과를 뻥튀기한게 아닌지 의심하여 승인 거부를 때리곤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영국 항공전에서 뻥튀기된 보고로 작전을 말아먹는 데 일조했던 것이 빡쳤던 듯 하다. 게다가 괴링도 조종사 출신인지라 이런저런 이유로 발생하게 되는 전과 뻥튀기에 대해 잘 알았을 테고.
[14]
이 양반도 루델과 오랫동안 짝을 이뤄 슈투카에 탑승하여 동고동락한 결과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 받았다.
[15]
수영을 하기위해 걸리적거리던 자켓과 부츠를 벗어던졌는데 루델의 유일한 식량이던
쇼카콜라를 자켓안에 넣어둔 나머지 탈출하면서 무척 굶주렸다고 한다. 그나마 루마니아 노부부와 피난민 소녀로부터 빵과 물을 얻어먹었다고
[16]
제2지상공격항공단의 지상 병력은 따로 육로로 서방으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이 와중에 소련군 육군에게 박살난다.
[17]
당시에는 미국 공군이 없었고 육군 항공대 소속이었다.
[18]
같은 제52전투비행단 소속이지만 제2그루페는 루델과 마찬가지로 전투기를 몰고 미군 비행장으로 가서 항복하여, 그루페 지휘관
빌헬름 바츠는 짧은 미군 포로생활만 거치고 무사히 석방되어 독일연방군 공군 재건에 참여한다.
[19]
연합국판 루델이라고 칭송할 정도로 동일인과 맞먹은 인물이다.
[20]
당시
마라는 발트함대의 모항인 크론슈타트에 정박한 상태로, 1,000문 가까운 대공포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계속된 슈투카 공습에도 마라를 격침시키지 못하자 최고의 지상공격기 파일럿 루델을 불러내어 특수제작된 1,400kg 폭탄을 맡기고 작전에 투입했다. 폭탄은 전함 마라의 1번 주포탑의 탄약고에 명중하여 격침됐다.
[21]
일반적으로 5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하면 에이스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