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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5:58:56

이와모토 테츠조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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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116~139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비고
142위 하인리히 프린츠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 독일 83대
오토 베슬링 독일
144위 한스 그륀베르크 독일 82대
에밀 다르예스 독일
한스 괴츠 독일
헬무트 미스너 독일
148위 프란츠 바이어 독일 81대
후고 브로흐 독일 현재 생존 에이스 중 가장 격추 수가 많다.
빌리 네미츠 독일
빌헬름 필리프 독일
152위 이와모토 테츠조 일본 80대 비독일계 2위, 일본 1위, 해군 출신 1위
중일전쟁에서 14대 격추
헤르베르트 바흐니크 독일
154위 오토 뷔르펠 독일 79대
155위 게오르크-페터 에더 독일 78대
볼프강 에발트 독일
하인리히 크라프트 독일
막스-헤르만 뤼케 독일
요한-헤르만 마이어 독일
카를-고트프리트 노르트만 독일
알렉산더 프라인팔크 독일
162위 후베르투스 폰 보닌 독일 77대 스페인 내전에서 4대 격추
요제프 하이뵈크 독일
발터 올로게 독일
165위 한스-요아힘 크로신스키 독일 76대
막시밀리안 마이얼 독일
알프레트 토이머 독일
에트빈 틸 독일
169위 한스 빈트 핀란드 75대 핀란드 2위
요하네스 분체크 독일
구스타프 프릴링하우스 독일
헬무트 그롤무스 독일
클라우스 미투슈 독일
요한 피힐러 독일
한스 뢰링 독일
발데마르 제멜카 독일
요아힘 반델 독일
178위 오토 가이저 독일 74대
프리드리히 하스 독일
카를 하인츠 멜처 독일
▼ 181~22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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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143C><colcolor=#FFC224> 이와모토 테츠조
岩本徹三 | Tetsuzō Iwamoto
출생 1916년 6월 14일
일본 제국 가라후토청
(現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사할린주)
사망 1955년 5월 20일 (향년 38세)
복무 일본 제국 해군
1934년 ~ 1945년
최종 계급 중위 (일본 제국 해군)
주요 참전 제2차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태평양전쟁)
서훈 내역 욱일장(旭日章, 7등급)
금치훈장(金鵄勲章, 5등급)

1. 개요2. 생애
2.1. 태평양 전쟁2.2. 전쟁 이후
3. 파일럿으로서의 기록과 면모4. 기타5. 대중매체의 이와모토 테츠조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 해군 전투기 조종사.
"이와모토는 마치, 전투기를 타기 위해 태어난 듯한 남자였습니다."
岩本は、戦闘機乗りになるために生まれてきたような男でした
- 라바울 항공대 사령관 '시바타 타케오'-
"이렇게까지 해서, 내리막길인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 건가? 승산이 없는 상층부의 될 대로 되라 식의 마지막 발악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こうまでして、下り坂の戦争をやる必要があるのだろうか?勝算のない上層部のやぶれかぶれの最後のあがきとしか思えなかった。
44년에 제 2 항공전대에서 카미카제 특공대원을 모집하자 했던 말. [2]
"첫 출진에 탄을 날리지 마세요. 내가 먼저 적을 쓰러뜨릴테니 잘 따라와서 그것을 보고 있으면 됩니다. 처음부터 적을 잡겠다고 마음먹으면 자기 몫을 해내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착륙해서 살펴봤을 때 탄을 발사한 흔적이 있다면 나는 귀관을 경멸할겁니다."
初陣で弾を撃ってはいけません。私がまず敵を落として見せるから離れずついてきて見ていればいいです。最初から敵を落とそうなどと考えては一人前になれません。もし着陸してから調べてみて弾が出ているようなら私は貴方を軽蔑しますよ。
첫 출진을 앞두고 겁에 질려서 한 대도 격추하지 못하겠다는 부하 히지카타 토시오 중위[3]를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하는 말[4]

1916년 6월 14일 사할린 출생 ~ 1955년 5월 20일 사망했다. 최종 계급은 해군 중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사카이 사부로에 비해 유명하진 않지만 일본군 1위 에이스 조종사이며 8,000시간이 넘게 전투기에 탑승한 에이스 조종사이다. 미군 자료와의 교차검증과 미국 항공사 연구가들에 의하여 확실시된 단독 격추 수만 80기이며 본인이 남긴 수기에 의하면 202기이다. 때문에 실질적인 격추 수는 니시자와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 생애

학창시절 수학 계통의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꽃을 가꾸거나 독서 등 굉장히 얌전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취미와 달리 상당한 열혈남아에 운동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그 불같은 성격 탓인지 선생에게 대들기도 했다고 한다.

경찰관이였던 아버지는 첫째는 도시로 가고 둘째는 죽었었기에 셋째 아들인 테츠조가 집에 남기를 바랐지만 그는 '저는 막내로 태어났기에 조국을 위해 한 목숨 바치겠습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항공과에 들어갔다. 이후 35년에 항공모함 류조에 함상정비원으로써 배치되었으나, 조종사를 지망하여 다음해인 36년에 조종연습생으로 들어가 그해 말 사에키 해군항공대에 배치되게 된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첫 출진 당시 난창 상공에서 4기의 적기를 격추했으며[5] 최종적으로 14기로 해군 최다 공인 격추 기록을 세워 42년엔 훈장 5개를 받는다. 이 때 얻은 별명이 영전격추왕이다.

2.1. 태평양 전쟁

40년에 류조에 배치된 뒤 그는 맹훈련 끝에 즈이호의 전투기 부대로 이동해 후배들과 훈련에 힘썼고 그해 가을 쇼카쿠급 항공모함 두 척으로 구성된 5 항공전대가 구성된다. 그와 즈이호의 부대원들은 5항전의 창립 1기 멤버로 쇼카쿠와 즈이카쿠에 반으로 나눠 배치되었다.(후일 그는 이때의 맹훈련이 후일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다른 사람도 아닌 이런 특급 파일럿인 그가 열심히 키워낸 덕에 그나마 5 항공전대의 햇병아리들이 한사람 몫은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후 계속 편성이 변경되어 이 항모 저 항모를 옮겨다니게 되었고 진주만 공습 당시엔 즈이호의 파일럿으로 상공호위 임무만 전담해 전과가 없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이와모토의 첫 전과는 인도양에서 PBY 카탈리나 비행정을 격추한 것이 처음이었고 이후 그는 즈이카쿠 소속으로서 산호해 해전에 참여한다.

전투 당시 즈이카쿠는 선두기가 이륙이 늦어져 방공망이 흐트러져 있었는데, 이와모토가 이끄는 제로센 3기가 즈이카쿠를 노린 미 함재기 17기를 막아서서 F4F 와일드캣 한 기를 격추하고 SBD 돈틀리스들이 즈이카쿠를 공격하는 것을 막아냈다.[6][7] 이 공격 직후 즈이카쿠는 스콜 아래로 들어섰고 미군의 공격대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다음엔 쇼카쿠를 돕기 위해 스콜을 뚫고 이륙해 쇼카쿠를 노리는 미군의 함재기들과 싸워 결국 저승 문턱에 한 발을 들여놨던 쇼카쿠를 살리는데까지 성공한다. 이후 쇼카쿠의 정비팀이 급하게 갑판을 수리하여 이와모토는 쇼카쿠에 착함할 수 있었다.

결국 산호해 해전에서 5 항공전대는 공격대의 손실은 컸으나[8] 즈이카쿠의 승무원과 이와모토의 호위대의 손실은 전혀 없었고 즈이카쿠는 결국 단 한발의 피탄도 없이 살아 돌아온다.

전투 후엔 일본으로 귀환해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라바울로 파견되어 격렬한 전투를 연이어 치르게 된다. 이때 제로센으로 헬캣과 4:1로 싸워 적을 전부 격추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중폭격기를 격추하는 등 라바울에서도 상당한 전과를 쌓는다. 테츠조 부임 전엔 후에 라바울의 마왕이라 평가된 니시자와가 있었는데, 니시자와가 일본으로 귀환한 지 한 달만에 테츠조가 부임하였기 때문에 연합군은 우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희생자를 내야 했다.

그의 주력 기체는 종전까지도 제로센이었지만 악전고투에도 끝끝내 살아남았고 전쟁 말 전황이 악화되자 본토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온 후에는 다시 사카이처럼 병아리들을 훈련시키게 되었는데, 제자들에겐 "여러분의 훈련 가능 시간은 적습니다. 적기를 격추하려 욕심 부리기보단 제 비행술을 배우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주의를 놓치지 마십시오. 적을 먼저 찾아내고 적이 사선에 들어오는 순간 방아쇠를 당기면 됩니다. 그러면 격추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대공포화는 어쩔 수 없습니다. 피할 도리가 없으니까 그땐 깨끗히 포기하십시오." 라고 하거나 기후가 좋지 않아 비행을 포기하고 돌아온 제자 히지카타에게 "잘했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는 등 너그럽고 인자한 교관으로 받아들여졌다.

2.2. 전쟁 이후

종전 후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전범장교 색출에 두 번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이 때 공직 추방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탓에 일반 기업과 공장등에서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눈치를 보느라 그를 고용하지 않았다. 그 동안은 '진실은 이렇다'라는 반군국주의 라디오에 불려가 선전을 요구받았으며[9], 이후 낙향해서 일본 개척공사에 입사, 자신의 뉴스를 보고 연심을 품었던[10] 여인과 결혼했지만 3일만에 홋카이도 개척단으로 떠났다. 그러나 심장병으로 1년 반만에 돌아왔고 이와모토는 이때 부인의 얼굴을 잊었다고. 전후엔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에 찌들어 살아서 가족들을 곤란하게 했다. 그렇지만 정의감 강한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아서 이웃 결핵 환자의 시신을 전염이 무서워 아무도 건드리지 않자 콧구멍에 솜을 끼우고 들어가 혼자서 염을 하고 장사를 지내주었다. 손재주가 좋아 두 아이의 장난감을 손수 만들어줄 정도였다.

연합군 최고사령부 점령 통치 기간에 토목, 농사, 양계, 과자노점 등의 일을 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이후엔 간신히 방직공장에 입사하였지만 1년도 안돼서 충수염을 장염으로 오진받고 대수술을 받은 뒤 입원 중 허리 통증으로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늑골을 제거하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술을 받았으나, 패혈증으로 두 명의 어린 자식[11]을 남겨둔 채 1955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병상에서 했던 마지막 말은 '건강해지면 다시 비행기에 타고싶다(元気になったらまた飛行機に乗りたい)'였다.

3. 파일럿으로서의 기록과 면모

4. 기타

80기라는 격추수는 독일 국방군의 에이스 조종사들에 비해 밀려 보이지만, 그는 시작부터 종전까지 제로센[15] 탑승하였다. 에이스 조종사였기 때문에 분명 시덴카이 등 신형 기체들을 충분히 배정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 제로만으로 80기 이상의 적을 격추했으며 한번도 격추되지 않고 종전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파일럿으로서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6] 저 산호해 해전의 기록과 동료들에게 인정받은 기록 중 F6F 헬캣과 4:1로 싸워 이긴 기록 등 공식으로 인정받은 기록에 괴물 수준의 기록들이 있으니 말 다한 셈이다.[17] 게다가 80기의 격추 수가 사실 1944년 6월에 집계된 기록인 점 등을 고려하면 실제 그의 격추 수는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과 마찬가지로 100기가 훌쩍 넘는 슈퍼에이스일 확률도 충분하다.

여타 일본군 에이스 조종사들처럼 자살돌격 카미카제에 대해선 아주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술된 명언처럼 "죽으면 끝이다. 전투기에 오르는 건 몇 번이나 날아올라 적기를 떨어트리기 위해서다. 난 죽어도 이 전투기에서 싸우다 죽는다."라며 강하게 카미카제를 비판했다. 그것도 상관이 다른 부하를 카미카제로 보내려 하자 항의하면서 한 말이니 엄밀히 따지면 항명인 셈이다.

부하들과 정비병들은 물론 상관에게까지도 신뢰받는 인물이었다. 특히 탑승자와 정비병은 일체라는 '탑정일체'를 늘 강조했으며, 정비병들을 늘 우대해주었다. 전투에 관해 그가 남긴 말 중에 "5배나 10배의 적따위 두렵지 않다. 다만, 엔진 트러블 만은 어쩔 도리가 없다." 라는 말도 있다.[18] 그 덕이었는지 전쟁 말기 정비 불량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던 와중에도 그는 정비 불량으로 사고를 겪은 적이 없었다. 여러 모로 사람됨이 우수한 인물이다.

중일전쟁에서도 격추 1위를 기록하고 태평양 전쟁 동안에도 일본 내에서 톱 클래스의 격추수를 유지한 덕분에 일본 내의 에이스들 중에서도 손꼽게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탑승기에 대해선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있다. 수기에 의해 1943년 11월까지 제로센 21형을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지만, 그 이후의 기체들이 어떤 기종인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 선택할 수 있다면, 그의 전투 스타일상 더 속도가 나오는 기종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세가와에선 1944년 2월부터 그가 52형에 탑승한 것으로 가정하고, 1/72 스케일 제로센 52형 프라모델을 발매하며 이와모토 비조장 탑승기 데칼을 동봉시켰다.

평소에는 조용했고 체격도 왜소해 누가 봐도 그냥 평범한 아저씨였지만, 전투기에만 타면 갑자기 활력이 넘치는 성격으로 바뀌고 혹자는 살기마저 느꼈다고 한다.

5. 대중매체의 이와모토 테츠조



[1] 일본군은 삭발에 가까울 정도로 머리를 매우 짧게 깎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나 이와모토는 장발인데, 파일럿들은 예외로 두부 보호를 위해 장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4월경 카노야 기지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2] 영전격추왕 p.333 [3] 해군예비학생 13기 최종계급 대위 전후 생존 파일럿. '해군예비학생 영전공전기'란 수기를 집필. 2012.11.28 별세. [4] 처음부터 욕심내지 말고 에이스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얘기. [5] 4기 격추에 1기 격추 추정이기에 5기를 격추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이 경우 에이스의 조건인 5기 이상 격추 조건을 만족하기에 첫 출격에서 에이스라는 희귀한 사례가 된다. [6] 당시 급강하 폭격기 편대를 이끈 요크타운 폭격대 소속의 월레스 쇼트 대위는 '급강하 개시, 급강하 중, 그리고 끝났을 때마다 계속 제로센이 우리를 막아섰다.'라고 증언했다. [7] 글로 써 놓으니 한 줄로 끝이지만 실제로 이걸 하려면 일정 이상( 21형 기준 629.7km/h) 가속도가 붙으면 박살나는, 기골 강도가 약한 초기형 제로센으로 한계 가속도를 넘지 않고 칼같이 속도를 조절하며 급강하 폭격기를 쫓아가 방해했다는 이야기다. 말이야 쉽지 실제로는 어지간한 외계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수준이다. [8] 예상 외의 큰 손실에 이와모토는 '지금껏 이렇게 많은 전우를 한번에 잃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싸우다간 나중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후회고록 '영전격추왕' 중) [9] 이와모토는 군국주의자는 절대 아니었지만 파일럿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군인상이었기에 불명예스러운 딱지와 더불어 꼭두각시처럼 휘둘리는 것은 치욕이었다. [10] 학창시절 라바울에서 전공을 세우는 그의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짝사랑 했다고 한다. [11] 차남은 성인이 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항공자위대에 입대했다. [12] 이 때문에 밀리터리 마니아계에서는 뉴타입, 포스 센서티브 드립도 나온다. [13] 일정시간이 지난 후 폭파하도록 만든 장치. 던지고나서 몇 초 후에 터지는 수류탄을 생각하면 된다. 다만 그걸 몇백 미터 상공에서 몇백 킬로로 나는 항공기를 상대로 썼다는게 함정이다. -공대공 폭격-. [14] 비슷한 전술을 동시기 독일의 루프트 바페가 미육군 항공대의 중폭격기들을 대상으로 써먹기도 했다. 서로 방어기총의 사각을 커버해 줄 수 있는 상자 대형을 짜고 날아오는 폭격기들의 머리 위에 지연신관이 달린 폭탄을 떨궈 편대를 깨트리는데 써먹었다고... [15] 하야부사도 탄 적 있다는 이야기는 있으나 제로센이나 외양상으로는 비슷하다 보니 착각도 잘 되는 편이다. 실제로 연합군도 격추 기록을 보고할 때 하야부사를 잡고 제로센 잡았다고 보고한 것도 많으며, 제로센을 격추해놓고도 보고에는 하야부사를 격추했다고 할 정도로 전투 중에는 이 둘을 혼동할 요소들이 넘쳐났다. [16] 또한 독일 국방군의 에이스 파일럿들이 대부분 공군인데 반해 테츠조는 해군 파일럿이었다는 점도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독일 에이스 파일럿들은 오히려 자신이 격추를 당하고도 낙하산 탈출에 성공해 생환하여 다시 격추 기록을 늘려간 케이스도 많다. 예를 들어 총 138기를 격추한 루돌프 트렝켈은 단 10일간의 출격에서 5번이나 격추당했다. 반면에 테츠조는 해군이었기 때문에 격추된다면 탈출하더라도 바다나 외딴 섬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귀환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군 파일럿의 경우 미국이 제해권을 가지고 파일럿 수색에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의 경우 그 정도의 구조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17] 참고로 F6F 헬캣은 제로센을 상대로 일격이탈을 쓰건 선회전을 받아주던, 어떤 형태의 전투로도 제로센을 꺾을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천적이다. 그래서 P-38이나 F4U를 두고 '격투전에 끌어들이면 해 볼 만하다'고 말하는 역전의 제로센 에이스 조종사들조차 헬캣에 대해서는 '정말 어려운 상대였지만 이겨냈다'라기 보다는 무슨 천재지변 생존자 같은 투로 말할 정도였다. [18] 「5倍や10倍の敵など恐くはない。ただし、エンジントラブルだけはどうしようもない。」 [19] 독일, 영국, 미국, 네덜란드의 연합함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