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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2 incident of 1960(1960 U-2 incident)Уничтожение U-2 под Свердловском(Инцидент с U-2)
미 공군의 U-2 정찰기가 1960년 5월 1일에 소련 러시아 SFSR 스베르들롭스크주 아라밀 상공에서 소련 방공군의 S-75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된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미소정상회담이 취소되는 등 흐루쇼프 집권 이후 한동안 어느 정도 풀어지고 있던 냉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2. 상세
1960년 이전 소련이 고고도까지 도달하는 대공 미사일을 배치할 때까지 이 U-2 정찰기를 격추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눈 멀거니 뜨고 소련 영공에 제 집 드나들 듯 왕복하는 미 공군의 U-2를 바라보던 소련의 심정은 미치는 지경까지 도달했다.그러나 미국은 U-2를 배치하면서도 소련이 곧 기술을 발전시켜 이를 격추시키려 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CIA는 배치 시점에서 18개월에서 24개월 정도면 소련이 U-2를 위협할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레인보우라는 일종의 스텔스 개량 계획도 시도했으나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U-2는 그럭저럭 버텨냈으나 결국 1960년 5월 1일 소련 상공에서 격추당했다.
|
1960년 5월 가상의 NASA 마크가 붙어있는 U-2정찰기 |
1960년 5월은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의 정상회담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미국은 즉시 기상 관측용 비행기가 실종되었다고 위장용 성명을 NASA에게 발표하도록 시켰고 다른 기체보다 매우 얇고 가볍게 제작되어 있어 내구성이 약한 U-2의 기체 특성상 조종사는 100% 죽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조종사를 생포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로 회담 시기까지 기다렸다가 회담 직전, 격추된 U-2의 자료 및 조종사 생포 사실을 들이대면서 공식적으로 노발대발하며 "저딴 걸 하늘에 띄워서 더럽고 치사한 짓을 하고 있었으면서 한쪽으로는 정상회담을 하자고 했던 겁니까!"라고 화를 냈다. 그리고 당연히 정상회담은 취소되었다. 당연히 미국은 극구 부정했으나 조종사가 실토했으니 그야말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 막료들에게 "사임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2]
벤 R. 리치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미 공군이 소련의 탐지, 미사일 기술 등을 잘못 예상하고 운용하는 과정에서 실수한 것을 지적했다. 사실상 소련은 전 방공능력을 U-2 격추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몇 개월 전과 완전히 같은 침투 경로를 선택했다. 당시 미 공군 U-2 정찰기들은 파키스탄 페샤와르[3] 공군기지에서 이륙해 바이코누르 ICBM 기지와 플레세츠크 ICBM 기지를 정찰한 뒤 마야크 재처리 공장 상공을 비행해 소련의 핵생산 여부를 파악했으며 스베르들롭스크를 거쳐서 소련 해군의 핵심 시설인 무르만스크도 정찰한 뒤 노르웨이의 부더 공군기지에 착륙했다. 문제는 계속 같은 방식으로 비행하니까 소련 측에 쉽게 노출되었고 결국 격추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도 영공을 침투해 오는 U-2를 잡아 보겠다고 당시 소련 방공군의 최신예 전투기( MiG-19, MiG-21)들이 총동원되어 날아올라갔지만 정상 운항고도가 8만 피트(약 24 km)쯤 되는 물건에 무슨 재주로 접근을 하겠는가?[4] 사실 떨어진 이유도 엔진을 재시동하겠다고 고도를 낮춘 것과 미리 산맥 위에 매복해 둔 SA-2가 겹쳐서였다. 격추 자체는 SA-2 초탄이 명중하면서 이뤄졌지만 추락 중인 파편들이 SA-2의 레이더에 잡히면서 아직 U-2가 멀쩡히 날아가고 있다 오판하여 교전상황을 속행, 교전에 참여한 SA-2 포대 중 한 개 포대는 아예 포대가 보유한 SA-2 전탄(7발)을 다 발사하기도 했다.[5] 그 와중에 스크램블을 위해 교전지역으로 진입한 세르게이 사프로노프(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Сафро́нов, 1930~1960) 중위의 MiG-19 한 대가 SA-2의 오사로 격추되었고 사프로노프 중위는 비상탈출에 성공했지만 부상으로 사망하였다.[6] 교전 과정에서 총 14발의 SA-2 미사일이 소모되었다.
U-2는 속도가 느린 데다 극단적인 경량화를 택한 설계상 기체 강도가 매우 약했기 때문에 미사일이 일단 접근만 하면 격추는 당연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SA-2(S-75)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활약했듯 탄두 무게가 무려 200kg이었다.[7] 전술하였듯이 미국은 빠르든 늦든 U-2가 격추될 것이기에 더 이상은 U-2의 소련 영공 침입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8] 그래서 U-2 배치 직후에 이미 차세대 정찰기를 준비하고 있었고 곧이어 SR-71을 개발 중이었다. 그 이전에도 U-2 파일럿으로부터 전략 목표물 주변에 SAM 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고 해당 형태[9]를 발견하면 기존 항로에서 벗어나서 해당 목표를 정찰하란 임무까지 나오곤 했는데 당시는 아직 건설 중이었기 때문이다. 게리 파워즈의 비행이 마지막 혹은 몇 개월 이내로 임무 변경될 것이었으며 이후에는 소련 본토 정찰은 위성으로 대체하기로 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1959년에 첫 발사된 아제나 프로젝트도 정찰위성 개발이 메인이었지만 계속 실패했기 때문에 U-2 비행이 연장됐다.[10]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정찰 중이었던 U-2가 쿠바의 S-75에 의해 격추되었으며 대만군의 U-2 몇 대도 소련에서 수입 및 라이센스 생산한 중국의 S-75에 몇 대 격추되었다. 결국 U-2는 고고도 방공 미사일에 취약함이 드러났다.
결국 공개된 것도 "우린 그런 거 몰라요." 하고 발뺌하던 미국이 소련이 체포한 파일럿(의 자백과 공개 재판)과 격추된 잔해를 공개하고 그런 게 자기네 영공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라들까지 들고 일어나자 "이왕 들켜 버렸으니 별 수 없지" 하는 심정으로 공개한 것. 그 후속기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군용기인 SR-71 블랙버드가 등장했지만 정작 블랙버드가 퇴역한 후에도 여전히 U-2는 현역이다.
추락 사건 이후 소련에서는 추락한 U-2를 회수하여 역설계한 기종을 생산, 운영할 계획을 세웠다. 소련에는 Yak-25RW를 고고도 정찰기로서 사용하고 있었으나 도달 가능 고도가 U-2의 범위보다 낮았으며 이에 베리예프사의 창립자로 유명한 게오르기 베리예프를 주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프랫 & 휘트니 J75 엔진의 역설계 과정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 S-13이라는 명칭을 부여받고 5대를 주문하여 운용하려고 하였으나 개발의 난항과 효용성의 문제 등으로 1962년에 취소되었다. 출처 #
3. 사건 당시 U-2 조종사 게리 파워즈
하여간 1960년 5월에 격추될 시점까지 그 존재 자체가 비밀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격추당한 U-2의 조종사인 프랜시스 게리 파워즈(Francis Gary Powers) 공군 중위는 고국에 돌아와서[11] 비난을 받았지만 상원 군사 특별 위원회 앞으로 불려나가 질문에 답하고 이야기를 나눈 결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슬기롭게 대처한 남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명령을 위반한 적이 없으며 기밀 사항은 대부분 다 지켜냈기 때문에 조종사로서 해야할 일은 다 해냈다는 것이 위원회의 평가였다. 따라서 별다른 문책 없이 명예전역하였고 그 뒤 록히드사의 시험기 비행사로 취직하여 일하였다.
허나 그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냉대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1970년에 록히드에서 해고되었다. 그 해에 출판한 그의 회고록에서 CIA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게 이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방송국 헬기 조종사로 취업해서 일하다가 1977년 산타 바바라 카운티에서 발생한 산불을 취재하다가 돌아오던 중 연료 부족이라는 믿기 힘든 이유로 추락하여 사망했다. 사고 조사 보고서에는 그의 연료 관리 실수가 원인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아들이 밝히길 정비사가 연료 표시기의 오류를 파워즈에게 얘기하지 않고 고치는 바람에 남은 연료량을 잘못 판단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헬기를 불시착하려고 시도했으나 하필 그 자리에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바람에 방향을 바꾸다 추락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인생이 불운했던 사람이었다.[12] 그의 묘비에 'Capt US Air Force, Korea' 문구가 들어가 있어 주한미군에서도 근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단 파워즈가 복무하던 시기 U-2 조종사는 공군에서 전역한 다음 CIA로 들어가 임무를 맡았다.
원래 이런 경우를 예상하고 살아서 체포되면 엄청난 고문을 받을 테고 버텨 봐야 어차피 자백할 수밖에 없을 테니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살용으로 CIA가 독약(초기)과 독침까지 미리 지급했다. 다만 사용은 자유의사에 맡겼다. 한편 기체는 자폭하도록 지시했다.[13] 그리고 독약을 지급받긴 하였으나 말이야 쉽지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고 게다가 파워즈의 경우에는 이 비행이 거의 마지막 비행[14]에 가까웠다. 그래도 파워즈는 운이 좋았는데 이미 조종사를 생포했다고 발표한 이상 살려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15] 파워즈의 딸은 초등학생 시절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자기 듣는 앞에서 반 전체에게 아버지는 자살해야 했다고 공공연히 말하던 것을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도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열 받아서 학교 찾아가 뒤집어 놓으려고도 했으나 반역자의 가족이라고 욕만 들을 게 뻔해서 마음 고생만 했다.
[1]
지도의 초록색 선은 원래 예정된 경로를 표시해 놓은 것이다.
[2]
뚱한 표정으로 기자 회견을 하는 아이젠하워의 사진은
북한이나 일부 선전물에서 주장하듯
6.25 전쟁 휴전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 모습이 아니라 바로 이 사건 당시 찍은 모습이다.
[3]
냉전 시기에 파키스탄은 소련을 견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중요한 우방 중 하나였다.
[4]
MiG-19, MiG-21의 실용상승한도는 5만 7천 피트(약 17.5 km) 수준이다.
[5]
결과적으로 SA-2 포대들은 U-2가 격추당한 후 30분 동안 격추 여부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6]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U-2는 격추되어 추락 중이였으나 SA-2 포대들이 격추 여부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과 더불어 월별로 바뀌는
IFF 코드가 하필 5월 1일
노동절이 겹치면서 아직 전달이 안 된 덕분에 MiG-19를 적기로 오인해 격추하게 되었다.
[7]
대함미사일인
하푼에 버금가는 탄두 중량이다.
[8]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이 부분을 걱정했고 때문에 CIA에서는 아이젠하워를
스피디 곤잘레스라고 불렀다.
[9]
SAM은 레이더에서 방사형으로 배치하기 때문에 *모양처럼 나타난다.
[10]
그리고도 그 뒤로도 계속 실패했다. 첫 성공은 무려 13번째 발사인 1960년. 첫 사진 정찰 성공은 14번째 발사였다.
[11]
소련에서 간첩죄로 교도소 복역 3년을 포함한 구금형 10년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후 소련 스파이와 교환되었다. 이를 다룬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
[12]
헬기는 엔진이 멈춰도 충분한 고도와 속력이 있으면 활공하여 착륙할 수 있다. 로터 각도(콜렉티브 피치)를 -로 만들면 떨어지면서 받는 바람으로 로터를 바람개비처럼 돌릴 수 있으니까. 다만 수직으로 떨어지면 로터의 받음각이 너무 커져 비행기가 실속할 때처럼 로터 위로 와류가 생기면서 실속해 통제 불능이 되므로 비행기처럼 주로 전진하며 활공하듯 천천히 고도를 낮춘다. 이때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급격한 방향 변경은 어렵다. 과도한 사이클릭 피치 조작은 로터의 회전 속도를 떨어뜨리니까...... 엔진 정지 시 사이클릭이건 콜렉티브건 과도한 조작을 하는 경우는 불시착으로 땅에 닿기 직전에 남아 있는 로터의 회전력을 몽땅 양력으로 변환하기 위해 콜렉티브를 크게 치는 경우가 아니면,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방향을 트는 경우뿐이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엔진이 꺼지면서 남아 있는 유압이 핸들을 한 번 돌리거나 브레이크를 한 번 밟는 것밖에 없는데, 앞에 아이들이 있으며 브레이크를 밟아도 제 때 멈출 수 없다고 생각되어 핸들을 틀어 벽으로 돌진한 거다.
[13]
게리 파워즈도 당연히 규정대로 기체를 자폭시키려 하였으나 격추되는 와중에 기체 밖으로 튕겨나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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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말했지만 슬슬 소련의 방공망이 강화되고 있었으므로 이런 식으로 소련 영공을 무식하게 가로지르는 비행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며 어차피 정찰 비행 조종사 임무도 거의 끝물이여서 원래 부대로 돌아가거나 퇴역을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머피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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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비행 등을 수행하다가 붙잡힌 미국 파일럿들은 파워즈 말고도 많았으나 살아서 돌아온 건 파워즈 뿐이었다. 그 외에 공표되지 않고 생포된 조종사들은 대부분 굴라그로 끌려갔고 생사는 본인들밖에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