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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영어: 1956 Poznań protests (1956년 포즈난 시위) / Poznań June (포즈난의 6월)폴란드어: Poznański Czerwiec (포즈난의 6월)
러시아어: Познанский июнь (포즈난의 6월) / Познанское восстание 1956 года (1956년 포즈난 봉기)
포즈난 시위 당시의 사진. 플래카드에는 "우리는 빵을 원한다!"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1956년에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
시위대의 규모는 10만여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되며 폴란드군 장병 만여명과 400여대의 전차를 동원하여 무력해산되었고 적게는 57명에서 많게는 백수십명이 사망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첫 대규모 시위였고 동구권에서 유독 인민의 힘이 강하다고 평가된 폴란드에서도 간접적이게나마 정권교체로 이어진 시위다.
한국에서는 포즈난 항쟁이나 포즈난 봉기라는 명칭도 혼용되며 반공 성향이 강하던 냉전 시대에는 포즈난 의거와 같은 이름도 쓰였다.
2. 배경
2.1. 공산화된 폴란드
제2차 세계 대전 종반부, 소련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약 중이던 자유 폴란드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블린에서 친소파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구성했으며 임시정부 수립 전부터 폴란드 점령지에서 토지개혁, 생산수단 압류 및 노동자 평의회 수립 등을 통해 폴란드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해 왔다.비록 얄타 회담에서 소련은 폴란드에서의 자유 선거를 약속하였지만 1945년 1월 수립된 임시정부부터 좌익 인사들을 위주로 편성되었고 보안도 NKVD에 일임되는 등 분명한 친소 정권 수립을 위해 준비하였으며 종국에는 폴란드 농민당을 제외한 비-좌파 정치단체들은 모두 해산되거나 금지되었고 1945년에 모스크바에서 공개재판을 통해 귀국한 런던 폴란드 망명정부 인사들에 대한 재판을 열어 재판받은 16명 중 13명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1946년 국민투표에서 친소 폴란드 임시정부는 상원 철폐, 산업 국유화와 사회주의 경제체제 전환, 그리고 폴란드의 새 서부 국경 인정 여부를 부쳤고 공식적인 결과 발표에서는 세 안건 모두 과반을 넘겨 통과했지만 실제 결과에서는 첫 번째 안건은 겨우 27%, 그리고 두 번째 안건은 42%만 찬성하였고 세 번째 안건만 통과되었다.
1947년 총선도 공식적으로는 폴란드 통일노동당을 주축으로 한 민주 동맹이 압승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기표함 파기와 바꿔치기, 미리 채워두기 등 부정선거의 증거가 존재한다. 워낙 철저히 이뤄진지라 공정히 이뤄졌을 시의 선거 결과 자체는 불명이며 유일한 기록물은 키엘체 지역에서 폴란드 농민당이 54%의 표를 얻고 민주동맹은 44%의 표를 얻었던 것과 공정선거였다면 63%의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는 야당들의 주장뿐이다.
폴란드는 폴란드인들의 의사에 반해 공산화된 상태였으며 소련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단적인 예로 폴란드의 국방장관이었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는 아예 폴란드어도 어눌한 소련 국적자였고 폴란드에서 소련의 대리인 내지는 감시자로 기능했다. 로코솝스키와 함께 폴란드로 귀국한 7000여명의 폴란드계 소련인 장교들은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부터 복무해 온 고참 장교들과 반소 성향의 장교들을 숙군하고 대체했으며 폴란드인들의 증오를 받았는데 암살 시도도 두 차례나 있었을 정도다.
서기장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는 강경 스탈린주의자였고 집단농장, 3개년 계획과 같은 계획경제 정책들을 도입해 폴란드 농민들의 반감을 샀으며 시장경제를 부정했고 마셜 플랜도 거절하고 소련과 밀착을 추진하였다. 더군더나 폴란드에서 스탈린 개인숭배 정책까지 추진하여 폴란드 각지의 지명에 스탈린의 이름을 붙이는 등의 행위를 일삼아 폴란드인들의 반감을 쌓았다.
2.2. 스탈린이 죽었다!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최고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다.뒤이은 정쟁을 거쳐 최고지도자로 등극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6년 2월 25일 비밀 연설을 필두로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시작했고 공교롭게도 폴란드 서기장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도 비밀 연설 후 불과 며칠만에 사망했다. 비에루트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에 충격을 받아 사망하였다는 주장도 존재하는데 이는 비에루트도 비밀연설 당시 모스크바에서 소련 공산당 대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다.[1]
비에루트를 이어 서기장이 된 것은 에드바르트 오하프였는데 그는 친소 인사이자 비에루트 사망 이전부터 비에루트의 후임자로 낙점되었던 이였으며 모스크바의 탈스탈린화 기조를 따라 스탈린과 스탈린 시기 정책들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언론 검열을 완화했고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내용도 점차 폴란드 사회노동당뿐만 아니라 노동 조함 모임, 학생 연합 등의 폴란드 사회로 퍼져나갔고 폴란드 사회 내 변화의 요구를 강화했다.
수천명의 정치범들도 석방되었고 개혁주의 언론인 "포 프로스투"도 언론통제 완화 기조에 맞추어 개혁에 대한 주장을 펼쳐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이내 폴란드 내 반공주의자들도 폴란드의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이나 계획경제의 비효율성, 폴란드 서부군 참전자들의 탄압에 대해 의견을 내기 시작했고 지식인들과 작가연합도 스탈린만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정부 체제 자체가 스탈린과 같은 정부 체제를 불러온다며[2] 비판하는 등 1956년의 폴란드는 사회 변화를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폴란드의 계획경제, 스탈린주의, 반서방 정책들은 1956년의 폴란드인들이 단순한 개혁부터 폴란드의 서방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도입까지 정확한 이상향에서는 이견이 갈렸음에도 생활수준 향상, 경제문제 해결, 소련 의존 완화와 더 자유로운 정치에 대한 요구로 뭉치게 만들었다.
3. 전개
1956년 6월 포즈난에서는 일종의 국제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평시보다 더 많은 수의 외국인 방문객이 있던 상황이었고 포즈난의 개혁주의 시민들은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와 있는 이 시기가 시위를 일으키기 좋은 시기라고 판단하였다. 많은 해외 방문객이 와 있는 만큼 무력 진압의 가능성이 줄어들고 자신들의 주장을 더 널리 알리는 데 효과적이라고 여겼다. 불만 자체는 1955년부터 고조되고 있었다. 숙련공들에 대한 고세율과 상부의 미관관리적 간섭으로 인한 불만은 이전부터 존재했다.1956년 6월 28일 오전 6시 포즈난 최대규모 공단인 '이오시프 스탈린 금속산업체'의 노동자들[3]과 포즈난의 다른 공장 노동자들의 연대로 시 행정부 건물 앞과 구 황궁에서 시위하였고 이내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 시위자들은 봉급 인상, 식품 가격 인하와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시 정부는 이러한 요구들을 직접 들어줄 권한이 없다고 대답하였고 이에 시위자들은 폴란드 총리 유제프 치렌키에비치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오전 10시를 지나서는 시 경찰들도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시 정부와 면담하러 보낸 시위 대표들이 체포되었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 시점에 경찰들은 애초에 시민 통제를 할 수도, 하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시위 대표들이 수감되어 있다고 여겨진 포즈난 시 감옥을 습격하고 폴란드 공산당 사무실, 폴란드 공안부[4] 사무실, 그리고 포즈난 시의 방해전파 발신소[5]를 습격했다. 오전 11시 반 즈음에는 포즈난 감옥 수감자들이 풀려나고 시위대가 포즈난 감옥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기 시작했으며 시민 통제를 위해 포즈난 주둔지의 폴란드군 투입이 요청되었다. 오전 11시 초기 대응으로 전차 16대, 장갑차 2대와 30대의 다른 차량들이 동원되어 포즈난 시로 투입되었지만 장병들은 포즈난 시민 무력진압을 원치 않았던 만큼 이들은 시민들과 대치하되 그들과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고 일부는 아예 시위에 가담하는 등 진압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전차 두 대가 시위대에 가담하기까지 했다
이 시점에 소련군 원수이자 폴란드 국방장과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는 직접 사태 대처를 결정해 폴란드계 소련 장군 스타니슬라프 포플랍스키와 폴란드계 소련인 장교들을 필두로 1953년 동독 봉기의 진압과 같이 강경 대처를 주문했다. 오후 2시, 포플랍스키와 장교단이 지역에 도착한다. 포플랍스키는 포즈난 주둔군을 신뢰하지 않았고 인근 실레시아 군구와 북부 대폴란드에서 제10기갑사단, 제19기갑사단, 제4보병사단과 제5보병사단[6]을 진압군으로 편성했다.
로코솝스키, 포플랍스키와 폴란드 당국은 이 소요사태를 독일 잔당들의 짓이라고 선전했고 그 결과 8월 8일까지 746명이 구금되었다.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폴란드 국립추모연구소는 사망자를 57명, 부상자를 600여명으로 예상하나 얀코비아크를 비롯한 일부 사학자들은 사망자 수를 백여명 이상으로 본다.
4. 폴란드의 10월과 고무우카 해빙기
시위 자체는 강경하게 진압되었으나 개혁에 대한 시위대의 요구는 상당수 점진적으로 이뤄졌다.포즈난 항쟁은 헝가리에서와는 다르게 정권교체 자체보다는 개혁, 그것도 경제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성향이 강했으며 이는 폴란드 정부가 이 시위대와 폴란드인 다수의 요구와 소련의 레드라인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1956년 10월 비에루트 정권 시절 우파적 반동주의자로 지목되어 1954년까지 수감되었던 개혁주의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국가수반[7]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소련과 폴란드 인민 그 사이 어딘가 타협점을 찾던 폴란드 공산당에게 적임자였는데 확실한 공산주의자였고 폴란드에 공산주의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모스크바로부터 거리를 둬야 할 필요성과 폴란드 실정에 맞는 공산주의의 도입을 주장했다.
고무우카가 집권한 후 제일 먼저 한 것은 소련에 로코솝스키 원수를 송환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는데 고무우카는 소련 입장에서 미검증된 지도자고 소련 경제에 폴란드의 중요도는 지대했던 만큼 그에 대한 모스크바의 우려가 증폭되고 고무우카의 향후 행보를 알아낼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니키타 흐루쇼프 본인, 국가원수 아나스타스 미코얀, 정부수반 니콜라이 불가닌, 중앙위원회 서기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 합동군 총사령관 이반 코네프와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라자르 카가노비치로 이뤄진 사실상 소련 정부의 주요 인사들로 이뤄진 대표단을 파견했으며 소련은 주폴란드 소련군을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바르샤바에 천천히 진격시켜 중지 명령이 내려졌을 때는 바르샤바와 불과 100km 거리에 도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무우카는 소련 대표단과 흐루쇼프에게 폴란드가 친소 공산주의 국가로 남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소련도 중국을 비롯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폴란드의 개혁을 허용하라는 항의를 받고 헝가리에서의 사태가 격화되자 소련과 폴란드의 대치는 잦아들었다.
이 결과로 폴란드에서는 소련으로부터 어느 정도 양보를 받고 개혁을 이뤄냈다. 로코솝스키와 같은 폴란드 정부 내 폴란드계 소련인들은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폴란드인들로 대체되었으며 폴란드가 소련에 진 채무는 탕감되었고 폴란드의 집단농장화도 중단되었으며 문화 검열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도 경감되었다.
소련으로부터 일부 독립을 얻어내고 개혁을 이뤄낸 폴란드였지만 포즈난 항쟁은 1980년 그단스크 합의[8]가 이뤄질 때까지 검열되었다.
오늘날 포즈난 항쟁은 폴란드의 민주화 시도 중 하나로 기억되며 포즈난 항쟁 50주년인 2006년에 6월 28일이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1]
Fitzpatrick, S. (2017) On Stalin's team: The years of Living dangerously in Soviet politic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p.254
[2]
당대 폴란드 작가연합 회장이었던 안토니 슬로님스키가 1956년 4월 폴란드 문화예술회의에서 한 주장이다.
[3]
이 공장 노동자들의 80% 가량이 참여했다. 정부에서 보너스를 삭감하고 생산량 쿼터를 인상했기 때문이다.
[4]
비밀경찰 기관으로
동독의
슈타지와 비슷하다.
[5]
나라 한가운데에 서방국가의 월경지가 있어 통제가 불가능했던 동독을 제외하면 모든 동구권 국가들에는 국민들의 서방 방송 수신을 막기 위한 방해전파소가 존재했다.
[6]
총합 10,300명 규모다.
[7]
제1서기다.
[8]
폴란드 북부 노동자들의 파업에 따른 정부와 노동자들간 합의로 이후
솔리다르노시치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