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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2일 미국 양원 합동회의 석상에서의 트루먼 대통령 연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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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ruman Doctrine그리스 내전을 지원하던 영국 정부가 1947년 2월 21일에, 영국은 그리스에 대한 지원을 3월 31일 부로 그만둘테니, 미국이 대신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1947년 3월 12일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의회에서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대한 지원을 연설하였다. 트루먼은 미국의 전통적인 고립주의를 탈피하여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봉쇄정책을 실행하는 개입주의를 선언하였다. # 트루먼 행정부의 봉쇄정책은 이후 NSC-68로 이어진다.
2. 상세
쉽게 말하자면 미국이 전쟁으로 피폐화된 자본주의 나라들을 도와주겠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미국이 직접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론을 받아들이고 소련을 적으로 돌리는 냉전으로 접어들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세계적 관여, 구체적으로는 자유주의 패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외교정책 기득권층은 주로 어떤 논거를 사용하고 있는가?
1단계: 위협 부풀리기
야심찬 외교정책을 납득시키려고 예전부터 답습해온 방식은 외국의 위험을 과장하는 것이다. 만약 대중들이 이 나라가 해외로부터 임박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믿는다면 이 위협을 봉쇄하거나 퇴치하거나 약화시키거나 아니면 제거하겠다는 열정적인 노력을 지지할 가능성이 커진다.
위협 부풀리기는 미국 외교정책에서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특히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 리더십을 떠맡은 후에 한층 더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냉전 초기에 아서 반덴버그 상원 외교위원장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그리스와 터키에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논란이 많았던 원조 프로그램을 통과시키는 최선책이 "미국인들을 엄청 겁주는" 연설을 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트루먼은 바로 그렇게 했다. 그러자 미국인들은 "단일한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의 거대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현존위험위원회와 같은 강경파 옹호단체가 이런 공포를 과장했다. 소련의 역량과 의도를 우려스럽게 묘사했으며, 소련의 원자탄 획득이 자유진영 전체를 위협한다면서 미국이 방위력을 대폭 증강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시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정책 보고서인 NSC-68(1950년)과 같은 공식문서도 마찬가지로 공포를 과장했다.
1950년대 초가 되자 미국인들은 국제공산주의가 진격하고 있다고 믿었다.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국무부와 여타 핵심 미국 정부기관에 침투했다는 조지프 매카시의 주장도 받아들였다. 그 후 20년동안 미국 지도자들은 미국이 1960년대 말까지 미국이 명백하게 핵 분야에서 우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폭격기 격차와 미사일 격차, 그리고 (적의 역량에 비해 우리의 방어 역량이 부족한) 취약성의 창이 존재한다고 짜증을 냈다. 인도차이나반도 전쟁 시절 미국 지도자들은 만약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철수한다면 다른 도미노가 차례대로 넘어갈 것이고, 동맹국들로부터 신뢰를 잃어서 미국의 전 세계적인 지위가 무력해지고 "불쌍하고 무기력한 거인"이 될 것이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경고했다. 그러나 사이공이 함락되고 나서 14년이 지나자 역사의 잿더미가 된 것은 소련이었다.
요컨대 냉전기 내내 미국의 정책은 종종 직면한 위협에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추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산업화된 경제를 갖춘 강대국이었고, 소련의 방대한 재래식 전력과 핵무기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의 동맹국들을 실제로 위협했다. 소련 지도자들은 볼셰비즘에 따른 혁명 목표를 결코 공식적으로 폐기한 적이 없었고, 전 세계에 있는 수백 만 명의 동조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미국 지도자들이 이런 위험과 다른 위험을 과장했을지 몰라도, 이 위협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위협 부풀리기는 오늘날 더 심각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해외의 위험은 예전 시기만큼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 만약 미국인들이 사소한 문제가 실존적 위협이라고 정말로 확신한다면 상상 속의 괴물을 쫓으면서 엄청난 돈을 탕진할 것이다. 더 나쁜 상황으로는 정책 입안자들이 역효과만 낳는 예방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고 오히려 이 때문에 사소한 문제가 더 큰 문제로 변질될 수도 있다. 위협을 부풀리는 사람들이 해외에서의 더 많은 활동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수사적 수단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연은 패배를 뜻하고, 지금 행동에 나서면 승리가 보장된다"
위협을 부풀리는 사람들은 세계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불길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만약 자신들이 제시한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똑같은 위협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위협을 부풀리는 사람들은 세계를 아주 전형적으로 탄력적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만약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방식 전체가 위험해지겠지만, 강력하고 신속하게 대응한다면 적들을 격퇴시킬 것이고 수십 년간 오래 지속될 평화가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
NSC-68을 작성했던 폴 니체(Paul Nitze)는 이 유명한 보고서에서 "우리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즉, 주요한 군사력 증강) 우방국들은 우리에게 골칫거리가 될 것이고, 이들 때문에 소련의 힘이 더욱 증강될 것이다." 라고 밝혔다.
미국 외교의 대전략, 194~197p, 스티븐 월트
1단계: 위협 부풀리기
야심찬 외교정책을 납득시키려고 예전부터 답습해온 방식은 외국의 위험을 과장하는 것이다. 만약 대중들이 이 나라가 해외로부터 임박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믿는다면 이 위협을 봉쇄하거나 퇴치하거나 약화시키거나 아니면 제거하겠다는 열정적인 노력을 지지할 가능성이 커진다.
위협 부풀리기는 미국 외교정책에서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특히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 리더십을 떠맡은 후에 한층 더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냉전 초기에 아서 반덴버그 상원 외교위원장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그리스와 터키에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논란이 많았던 원조 프로그램을 통과시키는 최선책이 "미국인들을 엄청 겁주는" 연설을 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트루먼은 바로 그렇게 했다. 그러자 미국인들은 "단일한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의 거대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현존위험위원회와 같은 강경파 옹호단체가 이런 공포를 과장했다. 소련의 역량과 의도를 우려스럽게 묘사했으며, 소련의 원자탄 획득이 자유진영 전체를 위협한다면서 미국이 방위력을 대폭 증강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시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정책 보고서인 NSC-68(1950년)과 같은 공식문서도 마찬가지로 공포를 과장했다.
1950년대 초가 되자 미국인들은 국제공산주의가 진격하고 있다고 믿었다.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국무부와 여타 핵심 미국 정부기관에 침투했다는 조지프 매카시의 주장도 받아들였다. 그 후 20년동안 미국 지도자들은 미국이 1960년대 말까지 미국이 명백하게 핵 분야에서 우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폭격기 격차와 미사일 격차, 그리고 (적의 역량에 비해 우리의 방어 역량이 부족한) 취약성의 창이 존재한다고 짜증을 냈다. 인도차이나반도 전쟁 시절 미국 지도자들은 만약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철수한다면 다른 도미노가 차례대로 넘어갈 것이고, 동맹국들로부터 신뢰를 잃어서 미국의 전 세계적인 지위가 무력해지고 "불쌍하고 무기력한 거인"이 될 것이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경고했다. 그러나 사이공이 함락되고 나서 14년이 지나자 역사의 잿더미가 된 것은 소련이었다.
요컨대 냉전기 내내 미국의 정책은 종종 직면한 위협에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추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산업화된 경제를 갖춘 강대국이었고, 소련의 방대한 재래식 전력과 핵무기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의 동맹국들을 실제로 위협했다. 소련 지도자들은 볼셰비즘에 따른 혁명 목표를 결코 공식적으로 폐기한 적이 없었고, 전 세계에 있는 수백 만 명의 동조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미국 지도자들이 이런 위험과 다른 위험을 과장했을지 몰라도, 이 위협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위협 부풀리기는 오늘날 더 심각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해외의 위험은 예전 시기만큼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 만약 미국인들이 사소한 문제가 실존적 위협이라고 정말로 확신한다면 상상 속의 괴물을 쫓으면서 엄청난 돈을 탕진할 것이다. 더 나쁜 상황으로는 정책 입안자들이 역효과만 낳는 예방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고 오히려 이 때문에 사소한 문제가 더 큰 문제로 변질될 수도 있다. 위협을 부풀리는 사람들이 해외에서의 더 많은 활동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수사적 수단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연은 패배를 뜻하고, 지금 행동에 나서면 승리가 보장된다"
위협을 부풀리는 사람들은 세계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불길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만약 자신들이 제시한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똑같은 위협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위협을 부풀리는 사람들은 세계를 아주 전형적으로 탄력적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만약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방식 전체가 위험해지겠지만, 강력하고 신속하게 대응한다면 적들을 격퇴시킬 것이고 수십 년간 오래 지속될 평화가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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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C-68을 작성했던 폴 니체(Paul Nitze)는 이 유명한 보고서에서 "우리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즉, 주요한 군사력 증강) 우방국들은 우리에게 골칫거리가 될 것이고, 이들 때문에 소련의 힘이 더욱 증강될 것이다." 라고 밝혔다.
미국 외교의 대전략, 194~197p, 스티븐 월트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의 대소 외교 정책은 비교적 불명확한 편이었다. 주소련 미국 대사 조지 케넌의 '긴 전보(The Long Telegram)', 윈스턴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 등 소련을 견제하는 발언들이 나타났지만 미국에서는 소련이 미국과 양립할 정도의 막대한 힘을 가지진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우선 미소 양국은 기본 경제력부터 격차가 상당했고 미국은 무기대여법으로 소련에 상당한 채무를 지운 상황이었으며 소련도 독소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역량이 상당히 고갈되어 대외 정책이 상당히 수그러든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군사력 면에서도 미국의 손에는 이전에 없었던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미국 정계는 소련이 단기간에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던 상황이다.[1]
이것 때문에 미국은 유럽에서는 영국, 프랑스, 동아시아에서는 중화민국의 장제스 중국국민당 정권과 공조해서 소련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분할은 미·영·불·소의 4개국, 일본과 한반도의 분할은 미·영·중·소의 4개국 관할로 처리하는 식이었다.[2] 다만 영국과 중화민국은 당시 일본과 한반도 점령에 참여할 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일본은 미국의 단독점령, 한반도는 미/소 양자분할이 되었다. 하여튼 미국은 동아시아권에서 장제스 정권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여 거점으로 삼으려 하는 한편, 미국·영국·프랑스·중화민국·소련으로 구성된 UN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을 통해서 국제 문제를 조율하려고 시도했다.[3]
그러나 루스벨트 사후 대통령에 부임한 트루먼은 스탈린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유럽 전선이 마무리될 무렵부터 미소 간 신경전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한편으론 소련과 함께 UN을 창설하여 세계평화에 협조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세계에 막대한 경제원조를 제공해 공산주의 확장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과 극동의 제1세계 국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이 바로 이 트루먼 독트린이다.
트루먼 독트린 발표 이후에도 공산주의 확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49년 여름에는 소련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핵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에서 도리어 소련을 과대평가해 위기감을 느끼는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같은 해 국공내전에서 손쉽게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에 밀리기 시작했고 1949년 12월에는 대륙본토를 전부 뺏기고 타이완으로 도주했다. 이렇게 되자 당연히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까지 연달아 공산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급속히 커졌다.[4] 이것이 이란 문제, 동유럽과 그리스·터키의 공산화에 대한 우려 등을 증폭시키면서 1947년 개시된 트루먼 독트린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트루먼 독트린은 세계 정책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한 세기 넘게 미국 외교의 골자였던 먼로 독트린의 완전한 폐기를 전제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공룡의 역할을 하게 된 데에는 트루먼 독트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트루먼의 재임 시기와 맞물려져서 대통령의 정치 인생과 함께 독트린 자체의 효력도 끝나버리나 했지만, 트루먼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독트린은 그 효력을 계속 발휘하였으며 이러한 기조는 후대의 행정부에 계승되었다.
3. 결과물
3.1. 마셜 플랜
트루먼 독트린과 한 세트로 따라나오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다. 마셜 플랜의 특징은 바로 '(공산주의에 반한다면) 무차별적인 지원'. 따라서 당시 공산주의 소요로 혼란을 겪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 같은 국가들의 반공 정부에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원조를 했다. 그리고 이걸로 유럽은 2차 대전 피해에서 일찍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서독은 가장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분단국가인 데다 공산권과 가장 인접하여 위험성이 가장 높았던 독일의 특성상 일종의 '방어벽'의 개념으로 우선적으로 지원해 준 덕이 큰데 원조 총액은 133억 달러 정도였다.미국이 공산주의를 주적으로 삼고 마셜 플랜을 펼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기한 대로 유럽은 세계 대전 이후 쑥대밭이 되었고 유럽의 식민지 유지 능력이 떨어지자 식민지들이 하나 둘 독립했는데 갓 독립한 신생국들 역시 백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경제적 어려움은 당연히 찾아오게 되어 있고 이는 곧 공산주의의 침투를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모두가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한쪽은 '능력에 따라 당신에게 걸맞은 생활 수준을 보장해드립니다'라고 하고 한쪽은 '모두가 어려움 없이 평등히 먹고 사는 생활 수준을 보장해드립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느 쪽으로 더 잘 빠질지는 안 봐도 비디오. 그리고 그렇게 공산주의에 물들면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의 중심인 소련과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다.[5] 이는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줄어들게 만들 뿐 아니라 도미노 이론에 의해 언젠가 미국도 공산주의의 수렁에 잠식될 지 모른다는 우려감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직접적인 공산주의가 아니더라도 자체적인 경제력이 거의 바닥인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처음 선택하는 것은 대개 민족주의와 대중 동원을 통한 농공산업 육성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국가들이 직접 사회주의를 채택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적인 집단 생산 체제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6] 이러한 국가들이 사회주의 국가로 아예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선택한 길이 속되게 말하자면 '돈 뿌리기'였던 셈이다.
즉, 빨리 모든 국가들을 물질/정신적으로 풍족히 무장시켜서 공산주의로 대변되는 어찌보면 진짜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잠재적 라이벌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고 도움을 준 당사국인 미국과의 유대관계를 이끌어내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트루먼 독트린의 주요한 목적이였다. 미국내 다양한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한 인도주의+영향력 확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린 셈이다.
실제 트루먼 독트린에 대해 당시 미국의 여론은 양분되어 있었는데 찬성하는 쪽은 인도주의와 미국의 대외 영향력 확대가 주요 이유였고 고립주의자를 비롯한 트루먼 정권의 안티들은 마셜 플랜을 실제적인 효과 없이 미국의 혈세를 낭비하는 퍼주기 정책이라며 반대했다.[7]
다만 후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원은 당시 지원을 받은 서/남/북유럽 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과 미국간의 긍정적인 유대관계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여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발언권을 한층 더 강화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고 이 관계는 후일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창설로도 이어진다. 또 이후 미국은 세계 정세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본격적으로 소련과 냉전 구도를 이루게 된다.
트루먼 독트린은 먼로 독트린 이후 20세기 들어 약간 완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100여 년간 미국의 주요 기조 중 하나로 자리 잡아온 전통적인 미국의 고립주의를 뿌리부터 박살내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미국의 이러한 개입 정책은 직접적으로 유럽 국가들의 황폐화를 공인하여 유럽의 권위를 떨어트린, 말하자면 이제는 완전히 유럽의 제국주의가 침몰하고[8] 미국이 새 시대의 패자로 등장했음을 나타내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유럽은 세계적인 정치 권력을, 미국은 경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하면 이제는 정치/ 외교 권력의 주도권까지 완전하게 미국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식민지 국가들은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던 유럽 국가들이 침몰하여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상황을 보고 더욱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그리고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합세하여 말 안 듣는 이집트를 지난 수백 년간 말 안 듣는 다른 나라들에게 그래왔던 것처럼 회를 치려다가 자신들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회를 치일 판이 되어 굴욕적으로 철수하는 상황에 이르며 유럽의 패권이 완전히 과거의 영역이 되었음을 인증하고 만다.
3.2. 'Red Purge'
유럽에서는 이렇게 급한 불을 껐지만 정작 동아시아에서는 위기감만 더욱 커져 갔다. 중화민국이 단순히 밀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타이완 섬으로까지 쫓겨나 버린 것이다. 따라서 미국에게는 또 다른 거점이 필요했는데, 이 때 선택된 것이 바로 일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은 불과 몇년 전까지 주변국을 침략하고 미국과 전면전을 치른 추축국이었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데다 체급상 일본만으로 소련과 공산화된 중국을 견제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에도 일정한 힘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북한에서는 1946년 2월 전후로 소련의 간접통치 하에서 이후 이미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위한 작업을 독자적으로 밟아 나가고 있었고 여기에 자극받은 미국의 정책도 직접통치 하에서 점차 과격해져 갔다. 1946년 3월에는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고 잇달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이 터졌다. 공산화 확산을 막는 것을 가장 큰 원칙으로 내세우던 미군정이 압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일본에서도 GHQ는 우익 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해 좌익 세력을 온존시키고 평화헌법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우선 도입을 주창했지만 국내외적으로 공산주의에 의한 압력이 강해지던 상황이었다.[9]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은 일본에서 기존의 전범 척결과 일본에 대한 민주화, 비군사화 정책을 위해 좌익 세력을 일정 부분 용인하거나 지원해왔던 기존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Red Purge(빨갱이 숙청)'로 불리는 공직·군대로부터의 공산주의자의 색출과 퇴출 작업에 나서게 되며 사회주의 계통의 인사들은 탄압에 의해 지하화될 정도로 강한 압박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역코스 정책이라고 한다. 이후 한반도에 대한 단독 정부 수립 계획이 전면적으로 대두되게 되며 한국과 일본 두 국가는 ' 반공의 방파제'로서 육성된다. 다만 닥치고 반공만을 외치다 보니까 2차 대전에 책임이 있는 군국주의 극우 세력, 전쟁범죄자, 식민지 부역자들까지 당장 써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대거 돌아오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쪽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미국 본국의 매카시즘. 사실 동아시아에서 이랬으니 본토인 미국에서 더 심한 것은 당연했다. 어찌되었건 미국 본국에서도 공직에서 공산주의자가 대대적으로 색출되어 쫓겨나고 오히려 이것이 정치 도구로 이용되는 등 미국 정치사에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다.
3.3. 한국전쟁 참전
명목상으로는 UN군 이름 아래 참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군의 영향력이 매우 컸던 연합군이었기 때문에, UN군 참전 또한 미국의 외교 방향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트루먼 독트린이 세계의 공산화를 우려한 결과에서 나왔으니, 연장선상에서 적화통일을 부르짖으며 시작된 한국 전쟁에 미국이 참여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만약 미국이 이 시기 고립주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면 한국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거나, 개입하더라도 소련처럼 비공식적인 소극적 개입에 그쳤을 확률이 높았을테니 생각해보면 굉장히 중요한 담화였다.4. 한계
트루먼 독트린에 따른 적극적인 반공 지원 정책은 일단 1950년대까지 기본적인 미국의 정책 기조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재정 압박이었다. 마셜 플랜의 금액도 만만치 않았을 뿐더러, 6.25 전쟁 등으로 소요된 전비와 원조 금액이 막대했기 때문. 일례로 1945년부터 1964년까지 한국에 지원된 금액은 33억 9,000만 달러였는데, 마셜 플랜으로 지원받은 국가들의 평균 원조 액수가 4억 3,000만 달러 수준인 것을 생각하면 무척 막대한 것이다.결국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은 '원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에게만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이른바 로스토우 플랜을 내세우고 원조 감축 정책을 펼쳐 나간다. 마침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평화, 공존을 내세운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냉전에 온풍이 부는 호재가 나타났다. 이에 맞춰 미국은 1960년대 초반까지 비교적 간접적 군사력인 집단 방어 체제의 구축을 통해(예를 들어 동아시아에서 한·미·일의 상호 방위 체계) 국방 부담을 덜어나갔다.[10]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 끼어들면서, 미국이 원하던 구도는 완전히 박살났다. 베트남 전쟁에 끼어들면서 기껏 해체되나 싶었던 트루먼 독트린 구도가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 데다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잔뜩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존슨 행정부는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복지 중심의 경제 정책) 정책으로 재정 부담이 커진 데다가, 대외적으로도 브레튼 우즈 체제에 입각한 금본위제도가 어긋나기 시작했으며, 68운동 등 반전 운동이 확산되며 프랑스 등 서구 자본주의 선진국조차 반미를 내세운 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리처드 닉슨이 집권하면서, 미국은 국제 개입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후퇴하는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게 되고, 트루먼 독트린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11]
[1]
미국은 소련의 핵개발이 최소 1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측했으나 소련은 스파이를 통해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트리니티 실험으로부터 불과 4년 후인 1949년 핵개발에 성공했다.
[2]
이때의 중국은 당연히 장제스 국민당 정권, 즉 중화민국이다.
[3]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중에서 자본주의 진영이 미/영/불/중(장제스 정권) 4개국이니 충분히 소련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4]
도미노 이론 자체는 1954년에 나왔지만 중국 본토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시점에서 미국 정부는 아시아권 전체로 공산주의의 물결이 퍼질 것을 대단히 우려하고 있었다.
[5]
다만 유럽의 사민권은 원래 사회민주주의가 폭력적 방법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는 마르크시즘의 방법론이랑 결별하면서 나온거라 소련에 확 기울진 않는다.
[6]
예를 들어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집트나
자와할랄 네루의
인도 등이 사회주의적인 집단 생산 정책을 선택하여 경제 재건의 방안으로 삼았고 그럼에도 사회주의 국가로 직접 경도되지는 않으면서 소위
제3세계의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7]
심슨 가족에서
번즈가 "유럽으로 넘어갈 뻔한 1조 달러를 지켜냈다!"면서 자랑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게 바로 마셜 플랜으로 지원되어야 할 달러를 번즈가 빼돌려서 꿍쳐놓은 것이었다. 이 달러는 에피소드 후반에 번즈와 심슨, 스마더스가 자유를 찾아
쿠바로 망명했다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털리고 말았다.
[8]
마셜 플랜으로 인해 미국의 자본이 유럽으로 대량 유입되면서 그동안 북미를 은근히 한 수 아래로 보던 유럽이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를 거치며 사실상 미국 아래로 들어가는 상황 역전이 이뤄진다. 물론 이런 위기감과 배타적 민족주의로 인한 유럽 폭망이라는 실책을 다시 저지르지 말자는 의미에서 EU 창립의 초석이 되긴 하지만.
[9]
시모야마 사건을 비롯한 '철도 3대 사건'이 바로 이 시기에 터진 것이다.
[10]
미국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라고 양국 정부를 강력하게 압박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루 빨리 국교 정상화를 통해서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의 부담을 일본에 떠넘기고 동북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확고한 삼각군사동맹 체제를 굳히려던 것이다. 이런 미국의 압박 때문에 결국 협상은 졸속으로 진행되었고 이게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11]
다만 개입주의 자체는 이후
네오콘 세력 등에 의해 부활하였고 여전히 미국 외교정책의 주요 골자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트루먼 독트린의 영향은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