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섬서성 정부주석 겸 17로군 사령관 | ||
정체 | 楊虎城 | |
간체 | 杨虎城 | |
한국식 독음 | 양호성 | |
영문 | Yang Hucheng | |
출생 | 1893년 11월 26일 | |
청나라 섬서성 포성현 | ||
사망 | 1949년 9월 6일 (향년 55세) | |
중화민국 충칭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직업 | 군인, 정치가 |
[clearfix]
1. 소개
중화민국의 서북 군벌. 본명은 양중으로 장쉐량과 함께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성격이 용맹하여 호신(虎臣)이란 별명이 있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93년 섬서성 포성현(蒲城縣)에서 태어났다. 원래 비적에 가담했었으나 1911년 신해혁명에 가담하였고 1917년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1918년에 위유런의 섬서정국군(陝西靖國軍)에 참여하여 북양군벌에 대항하였다. 1922년 섬서정국군 3로군 사령관이 되었다. 1924년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키고 국민군을 조직하자 국민군 가입을 선언하여 국민군 3군에 소속되었다.국민당 가입 초창기의 양후청 |
이후 줄곧 섬북에 주둔하다가 1927년 펑위샹이 중국국민당 가입을 선언하고 2집단군 사령관에 취임,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가하여 하남성으로 진공하면서 국민혁명 2집단군 9방면군 10군 군장으로 재편되었고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에 9방면군 산하 10군 군장으로 참가하여 다시 북벌에 나섰다. 이후 6방면군 10군을 재편성한 잠편 21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9년 편견회의 때문에 장제스와 펑위샹의 관계가 악화되자 공직에서 사직하여 군사 연구를 핑계로 일본 외유를 떠났다. 장제스가 여비를 보내주면서 귀국을 촉구하자 6개월 후에 귀국, 신편 14사단장에 임명되어 1929년 5월, 1차 장풍전쟁에서 펑위샹을 비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1930년 중원대전에서 장제스 편으로 참전하여 평한선에서 펑위샹 군대에 맞섰다.
2.2. 중원대전에서 초공작전까지
1930년 5월, 펑위샹을 견제하려는 장제스의 의도에 따라 섬서성 주석 겸 동관 행영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중원대전 이후인 1930년 11월에 정식으로 임명되어 1931년부터 17로군 사령관을 겸하면서 휘하의 3만의 병력을 거느려 섬서성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서북군이 화북전선으로 나아가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청하면서 항일을 주장했다.하지만 1933년 장제스가 후쭝난 휘하의 제1군을 홍군 추격을 위한 명목으로 섬서성에 배치하여 양후청을 감시하게 하면서 섬서성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고 장제스의 중앙집권 정책에 따라 갑작스럽게 섬서성 정부 비서 남한신 해임에 이어 양후청 본인도 섬서성 주석에서 해임되어 주석직을 전 감숙성 주석 소역자에게 내주었다. 양후청은 동관 수정공서 주임에서 서안 수정공서 주임으로 이임했고 이 때문에 자신의 땅에 타지인이 들어온다고 여겨 장제스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여기에 당시 17로군 안에는 남한신을 비롯하여 200여명의 공산당원이 활동하면서 반장을 선전하였고 양후청 본인도 중국공산당에 가입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중국 공산당 하남성 위원회는 양후청의 공산당 가입을 거부했다.
1935년 10월, 국민정부는 서안에 서북 초비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장제스를 총사령관에,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을 부사령관에 임명했다. 장쉐량이 대량의 동북군을 통솔하여 서안에 오자 양후청은 큰 압박을 느끼고 크게 불쾌해했으며 대부분이 섬서인으로 구성된 17로군 장병들은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도 못하고 동북을 잃어버린 장쉐량과 동북군에게 모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한 산전수전 다 겪은 50대의 양후청은 30대에 불과한 어린 장쉐량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장제스나 장쉐량에게 개길 힘이 없었기 때문에 불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소한 저항은 했는데 장쉐량은 사령부를 양후청이 서안 수정공서를 두고 있는 신성에 설치하고 싶어했으나 양후청은 일부러 모른 척 했다. 이에 장쉐량은 부하인 설영자를 보내 상업지대에 있는 남원문의 낡은 관서를 수리해 수정공서를 이전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양후청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초비 총사령부를 남원문에 설치해야 했다. 동북군 도착 이후, 양후청은 홍 제4방면군과 불가침협정을 체결하고 병력을 농해선 연선과 서안 부근으로 철수시켜 공산군과의 전투를 회피했다. 양후청과의 관계 악화가 부담스러웠던 장쉐량은 양후청의 부인 사보정의 동창인 비서 정잠화를 보내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일부러 동북군 대부분을 섬서, 감숙 전선에 배치한 다음에 서안 시내에는 자신을 호위하는 1개 영만을 두었다.
2.3. 서안 사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Xian_incident.jpg |
장쉐량과 양후청 |
1935년 11월 초비 작전에서 장쉐량은 공산군의 공격에 직계 2개 사단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장쉐량은 중앙정부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109사단과 110사단을 보충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중앙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109사단과 110사단을 해체했으며 하립중 등 전사한 동북군 사단장에 대한 구휼금 지금조차 거절하면서 장쉐량은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양후청은 장쉐량에게 위로의 뜻을 전했는데 이때 장쉐량은 더 이상 초공작전을 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양후청에게 털어놓았다. 이에 양후청도 자신이 초공을 싫어한다는 속내를 밝히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급진전되었다. 또한 섬북인들 사이에서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북군에 대한 동정여론이 퍼지면서 동북군과 17로군 사이의 협력관계가 조성되었다. 장쉐량이 섬서성을 탈취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양후청에게 거듭 밝히며 안심시키자 양후청은 휘하 장병들에게 동북군에 대한 인식을 바꿀 것을 지시했다.
여기에 양후청의 전 비서 남한신은 톈진에서 지하공작을 벌이면서 장쉐량의 친구 고승민을 서안에 보내 양후청과 장쉐량 사이의 관계개선에 나섰다. 이어 1935년 12.9 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내부의 항일여론이 거세지자 장쉐량과 양후청은 거리낌없이 내전 정지와 항일 문제를 논하는 수준의 관계로 발전했고 군관훈련단을 설치하여 장쉐량이 단장을, 양후청이 부단장을 맡아 공동으로 항일정치교육을 실시하였다. 1936년 2월 마오쩌둥이 동정항일을 개시하자 공산군과 내통하면서 섬북의 공산군 근거지를 토벌하라는 장제스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6년 11월 23일 상하이에서 7군자 체포 사건이 일어나자 장쉐량과 양후청은 1936년 12월, 6차 초공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서안을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하여 국공합작을 강요하기로 하였고 1936년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곧 우유부단해졌지만 양후청은 강경하게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이후 장제스는 구두로 국공합작에 동의하여 석방되고 서안 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양후청은 해외시찰을 명목으로 구미로 외유를 떠나야 했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귀국했지만 즉각 특무기관에 체포되어 중국 곳곳을 전전했다.
2.4. 최후
1941년의 양후청 |
1946년 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고 1948년 가을부터 전세가 바뀌어 국민당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장제스는 총통에서 사임하였다. 후임총통 리쭝런은 양후청과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석방명령을 내렸으나, 양후청을 관할하고 있던 조사통계국(국통)은 장제스의 사조직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난징 정부가 함락되기 직전인 1949년 9월 충칭에서 장제스의 명령에 의해 맏딸과 함께 총살당했다. 양후청의 아내의 경우, 남편의 무죄를 호소하며 단식하다 사망했다고 한다.
3. 가족
아내는 3명이었고 4남 6녀를 두었다.장남 양정민은 군에서 장교로 근무하다가 제대후 섬서성 부성장, 톈진시 부시장, 건축재료공업부 부부장, 2~9기 전국정협 위원을 맡았다.
차남 양정중은 19세에 사망했다.
장녀 양정쿤은 중앙선전부에서 근무했고 6~8기 베이징시 정협위원을 맡았다.
차녀 양정메이는 인민대를 졸업하고 간쑤성 통계국에서 근무했고 8, 9기 전국정협위원을 맡았다.
3녀 양정잉은 중학교에서 교육자로 근무했고 5~8기 섬서성 정협위원을 맡았다.
5녀 양정루는 지질학자로서 석유탐사중 갑작스런 한파로 22세에 사망했고 혁명열사로 지정되었다.
손자이자 양정민의 아들 양한은 11, 12기 전국정협위원이다.
4. 여담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이자 집권의 일등공신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유자녀들은 공산당에 구출되어 고위직으로 진입하는 등 대우받았고 [1], 문화대혁명 중에는 무덤에 홍위병들이 몰려와 "군벌개새끼"라고 욕하며 그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를 당하는 능욕을 당했지만 문혁 이후에 복구되었고 현재는 서안에 그의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5. 참고문헌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코민테른과 대장정, 오토 브라운, 일월서각.
- 두산백과 양후청 문서
6. 관련문서
[1]
장남 양정민(杨拯民:1922-1998)은 서안사건 이후 1938년 중공에 입당했다. 이후 죽 공산당과 행동을 함께 했고, 섬서성의 간부를 맡다가 중앙으로 전직하여 건축부 부부장(차관)까지 오르는 등 크게 출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