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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30 09:16:50

헤르만 크리벨

파일:크리벨.jpg
헤르만 크리벨 (Hermann Kriebel)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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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의 군인, 바이마르-나치 독일의 정치인, 돌격대 상급집단지도자, 중국에 파견되어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장 대리를 지냈다.

2. 생애

1876년 바이에른 왕국군의 장군인 카를 크리벨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 해군에 입대하였으며 1901년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중국에 파견되었다. 이후 육군으로 전속하여 바이에른 전쟁대학을 졸업했고, 세계대전이 터지자 서부정선에서 종군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령계급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게오르크 에셔리히가 조직한 에셔리히단과 바이에른 시민방위군에서 참모장을 맡았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듣보잡 정치인이 군소정당이었던 나치당에 들어가 전국구 레벨로 키우기 시작하면서 헤르만 크리벨도 나치당에 참여했다. 에른스트 룀은 돌격대 오버란트동맹, 제국깃발, 비킹동맹, 니더바이에른투쟁연대 등 군사조직들을 규합하여 애국투쟁연대노동공동체를 창설하였고 헤르만 크리벨은 이 조직의 지휘를 맡았다. 크리벨의 위치는 더욱 확대되어 1923년 9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독일의 날 행사 이후 다른 군사조직들을 규합하여 결성된 <독일투쟁동맹>의 군사분야를 총괄하게 되었다.

1924년, 히틀러가 뮌헨 폭동을 일으켰을 때, 참여하였다. 이때 바이에른 주지사 구스타프 폰 카르 등과의 담판에 참석했으며 바이에른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하자는 강경론을 주장했다.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간 후에도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진압당한 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풀려난다 하더라도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매우 강경한 성향을 보였다. 이후 징역 5년과 벌금 200금마르크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수감 몇달만인 9월에 사면되었다. 이에 바이에른 검찰청의 슈텡글라인 검사는 히틀러와 크리벨은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사면 취하를 요청하였고 잠시 석방이 연기되었으나 10월에 대법원에서 불법 준군사조직에 참여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최종 사면해주었고 12월에 석방되었다.

이후 중국에 파견되어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초대 단장인 막스 바우어가 급사하자 그 뒤를 이어 1929년부터 1930년까지 대리단장을 지냈으나 장제스와 그닥 친밀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진 않았고 게오르크 베첼 중장이 2대 단장으로 부임하면서 금방 자리를 비워주었다. 재임 중 첫 독일식 교도사단 창설을 추진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 후 1934년 상하이의 독일 총영사로 임명되어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나치당 극동지부 수장을 맡았다. 중국 주재 시기 중국에 파시즘을 전파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나 위치라던가 영향력이 제한적이었으므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히틀러의 초기 맹우였던 것에 비해서 대단한 활동을 보이지 못했으며 괴벨스나 리벤트로프 등 거물들과 충돌을 빚었다. 귀국 후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치러진 193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40년 예비역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얼마 후 사망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