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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5:13:58

세르게이 타보리츠키

'''세르게이 타보리츠키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Таборицкий[1] | Sergey Taboritsky
'''
파일:세르게이_타보리츠키.jpg
출생 1897년 8월 12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980년 10월 16일 (향년 83세)
서독 림부르크안데어란
가족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자페발로프(부)
안나 블라디미로브나 자페발로프(모)
니콜라이 타보리츠키(제)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
[[독일|]][[틀:국기|]][[틀:국기|
속령
서독
]]
직업 저널리스트, 정치 운동가
정당
,(1940 ~ 1945),

1. 개요2. 일생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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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게이 타보리츠키는 러시아의 국수주의, 군주주의 성향 언론인이다.

2. 일생

러시아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국에서 기병으로 복무하여[2] 적군과 싸우다가 나중에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표토르 사벨츠크-보크를 만나 마약을 복용하고 같이 파벨 밀류코프 암살[3]을 시도하던 도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에비치 나보코프를 의도치 않게 죽여서 14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얼마 뒤 사면되었다가 게슈타포와 함께 러시아 난민 사무국에서 근무하였고, 1938년에는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다. 타보리츠키는 꼴통 왕정주의자라 독일 내 백계 러시아인 커뮤니티에서도 극단성과 완고함 때문에 배제당하기 일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의 유대계 혈통을 속이고[4] '폰 타보리츠키'라는 가상의 발트 독일인 귀족 행세를 하며 NORМ이라고도 불리는 러시아 국가 청소년 기구라는 나치 소년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이로 인해 1942년에는 나치당의 당원 자격[5]을 얻게 된다. 타보리츠키의 삶을 다룬 게시물(러시아어) 나치즘에 매료된 타보리츠키는 이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러시아 내에서 볼셰비키 물을 빼려면 나치 독일이 소련을 25년간 지배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만 나치 측에서는 타보리츠키가 러시아계 왕정주의자라 국가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독일과 상충된다고 보고 기껏해야 선전용으로 써먹었다.

나치 독일의 패전 이후, 친독 성향이였지만 딱히 전쟁범죄 혐의가 없었던 타보리츠키는 소련으로 송환되지 않고 베를린을 떠나 서독 림부르크안데어란에서 계속 거주하였고 말년에는 브라질의 왕당파 잡지 'Vladimirsky Vestnik(블라디미르츠키 베스티니크)'에 가끔 일부 글들을 기고하며 살았다.

3. 대중매체

집권하게 될 시 "신성 러시아 제국의 축복받은 섭정"을 자칭하며 순수한 러시아를 만들기 위해 폭정과 학살, 사리사욕을 위한 수탈을 벌인다. 추축국의 침공과 소련의 붕괴로 분열된 러시아를 통일한 뒤에도 정신 건강이 계속 악화되고 그를 대하기 두려워한 사람들이 점차 그를 피하여 물리적으로 고립되게 되자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자 손을 사실상 쓸 수 없게 되어 뇌출혈 쇼크로 사망하고 만다.[7]

타보리츠키 사후 타보리츠키의 수하이자 제국의 2대 섭정이 된 빅토르 라리오노프[8]는 타보리츠키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며, 타보리츠키 충성파를 숙청하고 권력 장악을 시도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각지에서 레지스탕스들의 봉기가 일어나며 제국은 수도권을 제외한 전 영토가 통제력을 상실하며 붕괴하게 된다.

그의 수하였던 안드레이 디키 유리 엡투코비치[9] 는 여전히 고립된 채로 타보리츠키의 정책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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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성씨의 정확한 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표기가 타보리츠키로 굳어진 것은 러시아 혁명을 피해 독일로 망명한 이후로 보고 있다. [2] 타보리츠키는 골수 왕당파 반동주의자라 우크라이나인 같은 소수민족의 권리에는 반대하는 편이였으나 당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뒤엎은 반동주의 성향의 우크라이나국 정부에서 구 친러시아 제국 성향의 관료나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3] 밀류코프는 차별받던 유대인과 소수민족의 권리보장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타보리츠키는 민주적인 요소를 전면 부정하는 왕정주의자였기에 자연히 밀류코프가 그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4] 타보리츠키 본인은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매우 혐오하여 본인의 이러한 혈통을 카인의 표식이라 스스로 일컫기도 했으며 유년 시절 정교회 이단 계열의 신비주의 종교단체에서 혈통을 지우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의외로 이런 자기혐오적인 반유대주의는 서양권에서는 흔한 편으로 근대나 전간기, 2차 세계대전 시기에 활동한 반유대주의자나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단체(그 나치 독일도 해당된다!)에 소속된 인물 중에는 유대계 혈통도 은근 있었다. [5] 자격은 1942년에 와서야 얻었지만 1940년 가입으로 소급 적용되었다. [6] 정작 현실의 타보리츠키는 알렉세이 생존설을 믿지도 않았고 왕위 후계자도 그 동생인 미하일 2세 대공 옹립을 주장하였다. [7] 사망하는 과정을 묘사한 이벤트를 보면 그의 정신상태가 묘사되는데 실타래가 점점 보이지 않게 되어 여전히 두서없으나 어느정도 정신을 챙기게 된 타보리츠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자신의 모순을 깨닫는 동시에 알렉세이가 살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감에 빠지고 졸지에는 죽은 알렉세이의 환각을 보면서 자신이 암살한 나보코프의 이름을 부르며 후회에 이른 뒤 죽음을 맞는다. [8] 현실에서도 타보리츠키가 창설한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하였다. [9] 현실에서 타보리츠키가 창설한 백계 러시아인 청소년 단체를 지휘, 전쟁 후반에 자기 휘하의 소년병들에 의해 고발되었다. 본인은 아이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상부에서 약간의 돈과 식량, 담배만 지원받고는 파병되었다고 한다. 이는 나치가 백계 러시아인을 신뢰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옙투코비치가 아이들을 이용해 지역 주민들의 동정심을 사려는 심리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