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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21:39:16

포르피로게니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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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라틴어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 포르피로게니타(Porphyrogenita)
그리스어 포르피로예니토스(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포르피로예니티(Πορφυρογέννητη)


1. 개요2. 기원3. 유명한 사례4. 그 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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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재위 중인' 황제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일컫는 말.[1]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남부의 마르마라 해가 내다 보이는, 대황궁 옆 부콜레온 궁의 포르피라(Porphyra)라는 황후 전용의 산실에서 태어난(Genitus) 아이들을 의미하여, 동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권이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국내에선 영문 표기를 직역해 자줏빛 혈통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영어로는 'Born in the Purple'이다.

찬탈이 빈번했던 제국에서 그나마 안정적인 세습을 위한 장치이자 계승의 중간 과정의 역할을 수행했다. 찬탈을 통해 제위에 오른 황제이더라도 재위 중에 자식을 보면 이들은 포르피로예니토스로 인정받았고, 아버지와는 달리 찬탈과 그 과정에서 수반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채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2] 또한 아버지가 훌륭한 통치를 했을 경우 그 덕을 보기도 쉬웠다. 특히 왕조의 지속 기간에 비해 찬탈 위협이 많았던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자들과 황녀들이 덕을 상당히 보았다.

포르피로예니티인 황녀의 경우 다른 나라에 시집 가는 것이 지양되었지만, 바실리오스 2세의 경우 누이 안나를 처음으로 키예프 루스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에게 시집 보내 많은 외교적·군사적 이득을 보았다. 물론 제국의 상황이 악화되는 말기에는 그런거 없다가 되어 그냥 시집 보내졌다(...).

포르피로예니토스인 것이 전가의 보도는 아닌지라 권력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것 하나만으로 버티기는 어려웠다. 알렉시오스 2세가 좋은 예인데, 명군 마누일 1세의 적자였지만 당숙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 선임 황제 자리를 내주고 나중엔 살해당했다. 물론 마누일의 치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폭거를 듣자마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름의 기원이 된 포르피라가 있던 대궁전과 13~ 14세기에 이름을 따서 세워진 포르피로예니토스 궁전은 모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파괴되어 유적지로 남은 상태이다.

2. 기원

이견이 많긴 하지만, 대체로 콘스탄티노스 5세 하자르족 출신 이리니와의 사이에서 본 레온 4세를 시초로 본다. 레온 4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남부의 마르마라 해가 보이는, 대황궁 옆 부콜레온 궁의 보라색[3]으로 둘러싸인 포르피라(Porphyra)라는 방[4]에서 태어났고 이후 이것이 전통이 되고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특별해졌다.

후대의 본격적인 동로마 시절과 달리 제대로 정립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5세기 후반 레오 1세의 황녀인 레온티아 포르피로예니타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 부부는, 레온티아가 비록 언니 아리아드네 황후보다 동생이지만 언니와 달리 아버지 레오가 황제일 때(457년으로 딱 즉위년도) 태어났으므로 계승권상 아리아드네- 제노 부부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었다. 즉 후대의 포르피로예니토스 개념의 효시는 벌써 5세기부터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5]

보라색과 로마 제국의 이미지가 덧씌워져서 그렇지, 왕과 왕비의 적장자, 그중에서도 부모가 이미 왕위에 오르거나 왕위계승자이던 시기에 태어난 자식이 비범한 혈통적 정통성을 가졌다고 여겨졌던 것 자체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당장 조선 왕조의 경우를 보더라도, 성종의 경우 연산군이 태어나자 임사홍을 비롯한 신하들이 "지금까지 세자 저하들[6]이 모두 사저에서 태어나 이런 경사가 없었습니다"라고 경하를 올렸을 정도. 그리고 아버지 문종이 세자였던 시기에 태어난 단종에 대한 설명에서도 '사실상 조선의 역대 국왕 중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가졌던 인물'이라는 평가가 빠지지 않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왕의 적장자 중에서도 왕이 이미 즉위한 상태 또는 확고한 계승자로 여겨지던 상태[7]에서 태어난 사례의 경우 더욱 특별하게 여겨졌던 것. 이외에도 사산 왕조 샤푸르 2세 같은 경우도 '태어나면서부터 황제'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정통성을 가졌다고 여겨진 사례가 있다. 이는 말하자면 왕조 국가에서 정통성의 가장 중요한 기반 중 하나는 혈통이고, 혈통이란 후천적인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인 만큼 태어나면서부터 잠정적 왕위(제위) 계승자로 여겨진 인물이 왕위 계승자로 여겨지지 않다가 그 자리에 오른 인물보다 더 비범한 혈통적 권위를 가진 인물로 여겨진 사례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3. 유명한 사례

이 중 유명한 것은 레온 6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7세 콘스탄티노스 8세의 딸들인 조이, 테오도라 그리고 알렉시오스 1세의 장녀 안나 콤니니이다.

뛰어난 행정가이자 입법가였던 레온 6세는 오랫동안 적자를 못 봤다. 첫째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둘째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딸 하나만을 보았다. 삼혼을 위해 교회법에서 요구하는 고된 참회 끝에 결혼한 셋째 아내는 출산 중에 죽었다. 결국 레온 6세는 애인을 들여서 임신시켰는데, 이에 교회 측에서는 '사혼(四婚)은 짐승들이나 할 짓'이라며 네 번째 결혼에 대해 경고했다. 결국 동거 상태를 유지하던 아내를 출산 후에 수녀원으로 보내는 대신 아들의 세례성사 견진성사를 받고 적자로 인정받기로 했는데, 레온 6세는 포르피라에서 태어난 아들이 성사를 받자마자 아내를 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여 황후로 맞아들였다. 이에 세계 총대주교는 길길이 날뛰어 황제를 파문하는 등 갈등을 벌였고, 결국 파문을 거두는 대신 사혼불가에 대한 법을 명문화 시키는 것으로 아이를 적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레온 6세의 진땀나는 고생은 헛되지 않아서[8] 콘스탄티노스 7세가 장인 로마노스 1세와 그 아들들에게 찬탈 압박을 받는 와중에도 버티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고, 그의 조부와 아버지의 치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제위를 되찾게 해주었다. 이렇게 말많은 출생부터 탈 많은 황제까지의 길에 우여곡절이 많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콘스탄티노스 7세는 자신의 저서 '궁중 예법(Περὶ τῆς Βασιλείου Τάξεως))'에 포르피로게니토스에 대해 따로 기술하였고, 그렇게 '보라색 방에서 태어난 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이가 되었다.

특히 콘스탄티노스 8세는 명목상 공동황제지만 사실상 황태제 신분일 때 딸들을 보았는데, 그 딸들이 확고하게 포르피로게니티로 인정받았던 것을 보면 공동황제 상태였어도 부콜레온 궁의 자줏빛 산실을 사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형인 불가르인의 학살자 바실리오스 2세가 집권 황제였고, 본인은 형과 동시에 제위에 올랐지만 통치는 형이 혼자 했다. 즉, 사실상 (미혼인 형의) 황태제였음에도 그 딸들은 포르피로게니티였던 것이다. 조이 테오도라 여제의 경우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남은 후예이자 포르피로게니티였기에 미하일 5세를 몰아내고 다시 권력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콘스탄티노스 7세의 경우처럼 전임자들에 대한 좋은 기억 - 특히 백부 바실리오스 2세라던가 - 도 그러한 요인들 중에 하나였겠지만 말이다.

안나 콤니니의 경우는 위의 두 사례들보다 좀 더 복잡한 정치공학적 의미를 가진다. 안나 콤니니의 아빠인 알렉시오스 1세(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동로마의 마지막 중흥기를 연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긴 하지만 어쨌건 찬탈로 즉위했고, 그의 쿠데타에는 전 황실이던 두카스 가문의 협력이 큰 역할을 했던 것. 그래서 콤니노스 왕조 출신인 현 황제와 두카스 왕조 출신인 황후( 이리니 두케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이자, 두카스 가문 출신 황태자( 미하일 7세 알라니아의 마리아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약혼녀로써 두 황실 가문의 결합과 정통성을 상징했기에 여러가지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옥좌에 오를 때와 오른 뒤 마음이 달라진 아버지 알렉시오스는 자신의 권좌가 튼튼해지자 두카스 황실의 계승자인 콘스탄티노스와 안나의 약혼을 파기하고 자신의 친아들인 요안니스 2세를 후계자로 삼았던 것이다.

하지만 포르피로게니타중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가졌던데다 재능과 야심 역시 남달랐던 안나 콤니니는 자신이야말로 로마 제국의 정당한 계승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요절한 전 약혼자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및 남동생 요안니스 2세 대신 새 약혼자가 된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해당 항목의 인물들 중 소짜이다)를 통해 차기 제위를 노리기도 했다. 즉, 마케도니아 왕조의 조이나 테오도라 여제가 했던 역할을 능동적으로, 게다가 남성 제위 계승자들이 있는 상태에서 하려고 했던 것으로, 자줏빛 출생이 가지는 위상을 이용해 적극적인 정치행위를 시도했던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안나의 남편인 브리엔니오스의 반대로 이 계획은 실패했고, 안나 콤니니는 쿠데타의 실패로 수도에서 일시 추방되었다가 복귀가 허락된 이후 역사서 알렉시아스를 집필하였다. (정확히는 남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초안을 쓰다 죽은 것을 안나 콤니니가 완성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어쨌건 안나 콤니니 역시 역사상 가장 유명한 포르피로게니타 중 하나이며, 그녀의 저서 알렉시아스에도 포르피로게니토스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4. 그 외


[1] 단, 계승 예정자인 황태자도 대체로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기에 그 자식(원손이나 군주(郡主)들)도 포르피로게니토스로 인정받았다. [2] 찬탈자가 아들과 함께 공동 황제로 오르는 경우가 있었기에, 최소한 손자나 증손자 정도부터는 확실한 포르피로예니토스가 나타났다. [3] 19세기까지도 보라색은 그 색을 내는 데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해 중세 당시에는 매우 높은 지위의 명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색이었다. 보라색 문서의 '고귀한 색' 부분을 참조하자. [4] 보라빛을 띄는 이집트산 반암석으로 건축한 방에 보라색 비단을 둘렀다. [5] 영어 위키백과 Leontia Porphyrogenita 중 'Ousted from both thrones, Marcianus and Leontia plotted a revolt against Zeno, in 479, which was based on Leontia's right of precedence over her sister as porphyrogenita; the revolt was however quelled.' [6] 태조, 정종, 태종이야 고려시대에 출생했고, 세종대왕은 1397년에는 아버지 태종이 일개 왕자 정안공 시절이었으며, 문종은 1414년생인데 그 때에는 아버지 세종대왕 또한 일개 왕자 충녕대군 시절이었다. 단종은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에 원손으로 태어나 조선왕조 처음으로 흠결 없는 혈통적 정통성을 갖추었지만 계유정난으로 퇴위당했고, 연산군이 태어난 당시(1476)는 계유정난(1453)에서 채 2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라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세조야 말할것도 없이 차남으로 장손을 처치하고 찬탈했고, 예종 역시 태어났을 때는(1450, 세종대왕 승하 이전) 계승권과 인연없어보이던 왕의 차남의 차남이었다. 즉 당시 기준 연산군은 '언급할 수 있는 사례'중에서는 처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잠정적 왕위계승권자가 되는 왕자였던 것이다. [7] 로마 제국의 경우 복수 황제 전통이 있어 공동 황제로 임명받는 것이 왕위 계승자의 자격을 입증하는 과정이었던 것. 공동 황제 전통이 없던 조선 왕조의 경우라면 '왕세자 책봉' 정도가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8] 황후가 아닌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교회법의 인정을 받지 못한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은 정통성에 흠결이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정도가 아니라 애시당초 크리스트교에서 사생아는 왕위 계승권을 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연히 이 아들도 레온 6세의 아들로 인정만 받을 뿐 왕위에 오를 수는 없었던 것. 그래서 이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정부를 아내로 인정받으려고 애쓴 것이다. 총대주교 역시 길길히 날뛰긴 했지만 역시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고. [9]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계승법이 장자 계승법이던 시절에는 그냥 장자보다 자줏빛 출생이 있는 자식 중 장자가 우선하되, 제위에 오르기 전에 태어난 자식이라도 판히페르세바스토스 작위를 주면 보랏빛 출생과 같이 여기게 하여 선택의 폭을 조금 넓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계승법이 제국 선거제, 즉 기본적으로 세습 제정이지만 비잔티움 특유의 고도화된 정치적 갈등+공화제적 전통의 유산에 의해 유력자, 특히 고위 관료와 군 지휘관의 영향력이 개입하는 제국 고유의 특수한 제도로 변경되면서 그런 유력자들 사이에서 좀 더 많은 지지를 얻기 쉬워지는 특성이 된 것. [10] 포르피로게니투스란것이 결국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혈통적 정통성의 상징'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오히려 로마 제정에서 현직 황제의 후계자(황태자)가 '공동 황제'라고 불리던 것은 로마식 제정(원수정)의 제도적 기원으로 인해 나타난 특수한 현상이고 일반적인 세습군주정의 보편적 논리로 보면 군주-세자-세손으로 이어지는 계승권과 혈통적 정통성의 연결을 구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시스템상 구현하기 귀찮았는지 이걸 그냥 생략해 버린 것. [11] 게임 시스템 상 한계이니 어쩔 수 없다. 한국 삼국시대는 너무한 거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