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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10:37:34

샤푸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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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10대 샤한샤
𐭱𐭧𐭯𐭥𐭧𐭥𐭩 |샤푸르 2세
파일:Mithra_(4684713252).jpg
케르만샤 타케 보스탄의 샤푸르 2세 부조
제호 한국어 샤푸르 2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𐭱𐭧𐭯𐭥𐭧𐭥𐭩
영어 Shapur I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309년~ 379년
재위 기간 309년~ 379년
1. 개요2. 생애3. 참고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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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10대 샤한샤. 샤푸르 1세 이후 제국의 기나긴 침체기를 종식하고 로마 제국이 빼앗아간 영토를 탈환하고 번영을 구가한 명군이다.

여담으로 태어나고 바로 군주가 되었기에 재위 기간이 무려 71년으로 엄청 길다.

2. 생애

호르미즈드 2세와 쿠샨 출신의 왕비 이프라의 아들이다. 서기 309년, 호르미즈드 2세는 사막에서 사냥하던 중 가산 왕국 사람들에게 습격당해 치명상을 입고 크테시폰 인근에서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죽기 전에 이프라의 뱃속에 있는 태아가 아들이라면 샤푸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샤한샤로 옹립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프라는 출산 전까지 왕관을 다리 사이에 뒀다가 태아가 태어나자마자 즉위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프라가 귀족들과 짜고 호르미즈드 2세를 암살한 뒤 유언을 조작했다는 설도 있으며, 그리스 문헌에서는 샤푸르 2세 이전에 호르미즈드 2세의 장남 아두르 나르세가 즉위했지만 얼마 안가 잔인하다는 이유로 폐위된 뒤 살해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호르미즈드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차남은 실명형에 처해졌다고 하며, 셋째 아들 호르미즈드는 감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탈출한 뒤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의 원정에 동행했다. 이로 볼 때, 샤푸르 2세가 즉위하기 직전에 심각한 정쟁이 벌어졌던 건 분명하다.

샤푸르 2세가 즉위한 뒤, 이프라와 대신들은 아기 군주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섭정들은 무능한 행보로 일관했다. 아랍 부족들이 남쪽에서 사산 왕조를 침략하여 파르스와 마준 (오만)을 약탈하고 아예 정착하기까지 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사제 계급인 마기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져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제어하지 못했고, 나르세스 1세 시기에 로마 제국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어떠한 정책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6살의 나이에 크테시폰에서 대관식을 치른 후, 샤푸르 2세는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아랍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325년, 그는 중무장한 기병대를 이끌고 가벼운 무장을 한 아랍 경기병들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격멸하였고, 사산 보병과 궁병들은 아랍 보병들을 무력화하였다. 파르스와 마준을 빠르게 탈환한 뒤, 그는 여세를 몰아 페르시아 만의 해안선을 공략하였다. 이후 함대에 군대를 싣고 페르시아 만을 건너 바레인, 가테프, 야마마를 점령하고, 아랍군을 여러 차례 섬멸하고 아랍 마을을 짓밟았다. 그 후 아랍 포로들을 본토로 끌고 갔다. 아라비아에서의 그의 활약은 후에 아랍 전설로 길이길이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샤푸르는 포로들의 어깨에 줄을 꿰어 이동하게 했다고 한다. 아랍인들은 그에게 '어깨 뚫는 자'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잔인하고 포악한 군주로 묘사했다. 샤푸르는 귀국 후 시리아의 로마 성벽과 요새를 본떠 제국의 남쪽 경계를 따라 방어벽을 쌓도록 해, 두 번 다시 아랍인들이 침략할 엄두를 못내게 하였다.

샤푸르는 뒤이어 나르세스 1세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 대에는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았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 기독교를 제국의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하고 자신을 사산 왕조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의 보호자이자 수호자라고 선언했다. 또한 아르메니아 왕으로 기독교인을 앉혔다. 샤푸르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국내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샤푸르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에서 자신이 예수를 진심으로 믿으며, 자신의 성공은 예수의 뜻에 부합하기 때문이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산 왕조 내 기독교인을 박해한다면 다른 박해자들처럼 몰락하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서신은 오히려 역효과를 야기했다. 샤푸르는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과 내통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박해의 강도를 강화했다. 그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기존에 내던 세금에 더해 종교세를 내라고 명령하고, 이를 따르지 말라고 권고한 기독교 지도자 세몬 바르 사바에(Shemon bar Sabbae)를 비롯한 기독교 신자들을 처형했다. 소조멘에 따르면, 그의 치세 동안 16,000명에 달하는 기독교 신자가 처형되었다고 한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한 직후, 샤푸르는 40년간 이어진 평화를 깨고 로마와의 전쟁을 단행했다. 그는 로마령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아르메니아를 타격한 뒤 싱가라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이후 니시비스(오늘날 터키 누사이빈) 공략을 338년, 346년, 350년에 시도했으나 매번 격퇴당했다. 350년 세번째로 니시비스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동방에서 백훈족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중단한 뒤 동생 아르다시르 2세의 도움을 받으며 7년간 백훈족과 맞붙었다. 그 결과, 357년 백훈족을 완전히 몰아내고 쿠샨-사산 왕국을 안정시켰다. 이후 로마와의 전쟁에 복귀한 그는 359년 최전방의 요새도시인 아미다를 포위하여 73일간 이어진 공성전 끝에 함락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막심한 손실을 봐야 했고[1], 싱가라 등 로마의 다른 요새들을 공격해봤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점령한 지역에 수비대를 남긴 뒤 본국에 철수해야 했다.

아랍인과 유목 민족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데서 알 수 있듯이, 샤푸르의 군사적 재능은 훌륭했다. 그러나 유독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오랫동안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이는 로마 제국의 동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군사적 재능은 떨어졌지만 군대의 기강을 확고히 잡고 반역의 기미가 보이는 자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면서도, 전선을 늘 순시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 다져진 요새 방어망에서 누수가 발생하지 않게끔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면서도 싱가라 전투에서 패한 뒤에는 야전에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이러니 샤푸르가 아무리 공세를 퍼부어도 요새 몇 개 함락하느라 막대한 손실만 입다가 동방에서 유목 민족의 침략을 받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363년, 새 황제 율리아누스는 동방 전선에 계속 집적거리는 사산 왕조에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그는 65,000명에서 95,000명 사이로 추정되는 대군을 일으켰고, 자신이 크테시폰으로 직접 진군하면서 이종사촌 프로코피우스 휘하의 별동대를 북쪽으로 보내 아르메니아를 탈환한 뒤 크테시폰으로 남하하도록 하였다. 율리아누스는 몇 번의 전투에서 샤푸르를 격파하고 여러 도시를 함락하였고, 트라야누스 황제가 250년전에 만든 운하에 함대를 투입하여 주력군의 보급물자를 운송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크테시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수적으로 훨씬 많은 사산 왕조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프로코피우스의 별동대는 50일이 지나도록 올 기미가 없었다. 여기에 샤푸르가 파견한 장군 메파이발라타스는 율리아누스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했고, 사산 왕조군이 퇴각하면서 청야전술을 썼기 때문에 식량을 공출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적에게 빼앗기는 걸 피하기 위해 함대를 불태우게 하였다. 하지만 그 바람에 물자를 육로로 운송할 수밖에 없어서 후퇴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고, 사산 왕조군은 그들을 따라잡은 뒤 6월 23일 사마라에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율리아누스는 갑옷을 챙겨입을 겨를도 없이 진영에서 뛰쳐나와 적을 상대로 분투하다가, 적군이 던진 창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요비아누스는 샤푸르에게 퇴로를 열어달라고 애원했고, 샤푸르는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 일찍이 로마 제국이 뜯어간 모든 영토를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가 사산 왕조의 영도하에 있는 걸 용인하라고 요구했다. 요비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뒤 귀국길에 올랐다가 몇 달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샤푸르는 새로 확보한 도시들에서 로마인들을 추방하고, 페르시아인들을 빈 도시에 정착시켰다. 니시비스와 수사를 복구하고 새 도시 에란샤흐르 샤푸르(Eranshahr-Shapur)를 건설해 로마 포로들이 그곳에서 살게 하였다. 또한 구전으로 전해지는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글로 옮긴 <아베스타>를 반포하는 등 신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지만, 조로아스터교 사제 집단인 마기가 왕위 계승에 대한 간섭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하고, 명확한 계승 규칙을 제정해 귀족들의 간섭을 사전에 차단했다. 하지만 360년경부터 키다르족, 백훈족 등 북쪽의 침략자들의 빈번한 침략이 펼쳐졌고, 그 과정에서 박트리아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샤푸르는 요비아누스로부터 영도권을 인정받은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아르메니아 국왕 아르사케스 2세를 붙잡았고 이베리아를 침략했으며 아르사케스 2세의 아들 파파스를 367년 무렵에 아르토게라사 요새에서 포위했다. 이듬해(368년) 봄, 파파스는 요새를 탈출하여 마르키아노폴리스에서 고트족과 맞붙고 있던 발렌스와 합류했다. 고트족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후, 발렌스는 파파스를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휘하 장군인 아인타이우스를 파견했다. 아인타이우스는 무사히 임무를 수행해 파파스를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세울 수 있었다.

그러자 샤푸르 2세가 재차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파파스를 축출했고, 파파스는 일단 탈출했다가 370년에 훨씬 더 많은 로마군의 호위를 받으며 아르메니아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371년) 봄, 로마군은 이베리아를 되찾고 아르메니아를 수비하기 위해 테렌티우스 장군의 지휘를 받는 더 많은 군대를 아르메니아로 파견했다. 이후 페르시아군과 로마군은 아르메니아에서 맞붙었으나 371년 로마군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샤푸르 2세가 페르시아 동쪽 국경 지대를 침략한 이민족들을 막으러 바쁜 덕분에 5년간 전쟁이 중단되었다.

그런데 로마군에 의해 아르메니아 국왕이 된 파파스가 아르메니아 주교 나르스를 처형하고 에데사를 포함한 로마인이 거주하는 여러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는 등 고압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에 발렌스는 그가 로마를 배신하고 페르시아와 손잡을 것을 우려해 암살하려 했다. 타프수스에 유인해서 죽이려는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374년 또는 375년 테렌티우스 장군이 파파스를 연회에 초대한 후 시해했다. 이후 발렌스는 새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바라다테스를 선임했다.

376년, 발렌스는 동방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해 페르시아와 일전을 벌이려 했다. 그런데 앞서 발칸 반도에 이민을 받아준 고트족이 지역 관료들의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그는 급히 샤푸르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샤푸르 역시 동방 전선에 자꾸 쳐들어오는 유목민족을 처리해야 했던 터라 로마와의 전쟁을 계속 할 수 없어 받아들였다. 이후 발렌스는 고트족과 맞붙었지만, 378년 8월 9일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379년, 샤푸르는 아들 샤푸르 3세가 성인이 될때까지 통치하는 조건으로 동생 아르다시르 2세를 새 샤한샤로 지목한 후 자연사했다. 그는 사후에 사산 왕조 샤한샤의 모범으로 각인되었고, 역대 샤한샤들은 그의 후손임을 내세워서 입지를 다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강력한 외적의 침략과 내부분열에 시달렸고, 사산 왕조는 그에 버금갈 명군인 호스로 1세가 등장할 때까지 120여 년간 침체되었다.

3. 참고항목


[1] 고대 기록에 따르면, 10만의 페르시아군 중 3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