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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43대 샤한샤 پنرسی |나르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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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나르세 |
중기 페르시아어 | 𐭭𐭥𐭮𐭧𐭩 | |
한문 | 泥涅師 | |
영어 | Narsieh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불명~ 708년 | |
재위 기간 | 679년~ 708년 |
[clearfix]
1. 개요
사산 왕조의 비정통 샤한샤. 페로즈 3세의 뒤를 이어 당나라에 충성했다. 구당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신당서에는 니날사(泥涅師 )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2. 생애
페로즈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해는 불명이나, 아버지의 나이로 미루어 보아 650년대에서 660년대 사이에 태어난 것만 알 수 있다. 어린 나이에 파사도독인 아버지에 의해 당나라 장안에 볼모로 보내져 장안에서 줄곧 성장했다. 이후 아버지가 670년에서 673년 사이에 장안에 입조하면서 아버지와 재회하여 몇 년 동안 장안에서 함께 벼슬살이를 하다가[1], 조로 원년(679년)에 아버지가 죽자 당고종에 의해 파사왕으로 임명받았다. 고종은 이부시랑 배행검을 안무대식사로 삼아 군사를 주고 나르세를 페르시아 국왕직에 돌려놓도록 지시했다.[2] 사실 이는 나르세를 이란으로 돌려보내는 것보다도, 당시 서역에서 일어난 돌궐 반란 진압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배행검은 자신의 군대는 파사왕 나르세를 모시고 가는 군대일 뿐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고 돌궐 수장 아사나도지, 이차복 등을 속인 후 기습하여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르세에게는 무척이나 황당하게도, 배행검은 이란은 커녕 파사도독부까지도 가지 않고, 쇄엽[3]에 나르세를 놔두고 장안으로 귀환해 버렸다. 애초에 당나라 조정이 바란 게 이 정도였기 때문에, 배행검은 승장으로 취급받아 예부상서, 검교우위대장군에 제수되며 크게 출세하여 돌궐 전선의 핵심 인물로 발전하게 된다. 반면 나르세는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당나라 내에서의 정세까지 어려워졌는데, 나르세와 사산 왕조의 적국인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사산 왕조 잔당들을 버리고 국교를 맺을 것을 청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필 이 시기에 아버지 페로즈 3세를 좋게 보고 비호해주던 당고종이 건강 악화로 뒷방으로 물러나고 측천무후가 섭정을 시작하던 시기라, 이 사안이 긍정적으로 검토되었다. 곧 장안에 모스크 건립이 허가되었다. 또 당나라 내의 사산 왕조 사람들에게 중화 문명에 완전히 동화될 것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나르세에게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서역에서의 영향력 문제로 당나라와 이슬람 제국이 우호 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사산 왕조 망명 정부에 대한 지원 자체는 계속되었다. 나르세는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지금은 중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라는 말을 남기고 이를 모두 수용했다. 그러면서 사산 왕조 망명 정부와 휘하의 당군을 이끌고
토하리스탄 일대에서 이란 진입을 시도하며 20여 년간 이슬람군과 싸웠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인하여 이란 수복은 할 수 없었다. 오랜 게릴라전 끝에
707년에
장안으로 복귀했으며,
708년에 병사했다. 생전에 아버지
페로즈 3세와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겨서 후세에 그 존재를 전할 수 있었다. 그의 일가는 당나라 귀족층에 편입되었고, 자식들은 당나라 귀족들과 통혼했다. 그의 사후 아들 푸샹이 사산 왕조 재건 운동에 계속 참했으나, 망명 왕조의 중심은 페로즈 3세의 형제
바흐람 7세에게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