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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06 10:17:56

바흐람 추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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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28대 샤한샤
𐭥𐭫𐭧𐭫𐭠𐭭 |바흐람 추빈
파일:바흐람 추빈.jpg
제호 한국어 바흐람 6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𐭥𐭫𐭧𐭫𐭠𐭭
영어 Bahram V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 ~ 591년
재위 기간 590년 ~ 591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사산 왕조의 제28대 샤한샤.

2. 생애

사산 왕조의 파르티아 7대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미흐란 가의 바흐람 구슈나프의 아들이며, 지금의 테헤란 남쪽의 도시인 레이(ray) 출신이다. 형제자매로 고르디야, 고르두야, 마르단시나가 있었다. 그는 처음엔 레이의 마즈드반을 역임했다가 572년 동로마 제국의 요새를 공략하는 데 기여한 뒤 호스로 1세의 눈에 들어 아두르바다간과 메디아의 육군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이후 베소포타미아 북부에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투입되어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하였다.

588년, 바가(Bagha) 카간이 이끄는 튀르크군이 옥소스 강을 건너 사산 왕조의 동방 영토를 침공하여 발흐에 주둔하고 있던 사산 왕조군을 격파하고 발흐를 정복했다. 이후 탈라칸, 바드기스, 헤라트를 점령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호르미즈드 4세는 바흐람 추빈에게 이들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12,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출격하였고, 588년 4월 히르카니안 산맥 전투에서 약탈을 마치고 귀환하던 튀르크군을 매복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589년, 그는 발흐에 입성한 뒤 튀르크의 보물과 카간의 황금 왕좌를 탈취했다. 뒤이어 옥소스 강을 건너 튀르크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고, 달아나는 바가 카간을 향해 화살을 쏴 사살했다. 이후 부하라 근교의 바이칸트까지 이르렀고, 바가 카간의 아들 비르무다의 역습을 물리치고 비르무다를 생포해 크테시폰으로 압송하였다. 호르미즈드는 비르무다를 성대하게 대접했고, 40일 후에 바흐람에게 비르무다를 돌려보내면서, 그가 트란스옥시아나로 돌아가서 튀르크의 카간이 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튀르크에게서 얻어낸 전리품 문제로 호르미즈드 4세와 바흐람 추빈의 사이가 벌어졌다. 호르미즈드의 고위관료 아젠 구슈나프는 바흐람이 전리품 중 가장 좋은 걸 취하고, 사소한 것만 호르미즈드에게 보냈다고 모함했다. 호르미즈드가 분노하여 사죄를 요구하자, 바흐람 추빈은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면서 끝이 구부러진 단검을 같이 보냈다. 황제는 이 단검의 양끝을 잘라 되돌려 보냈다. 이후 바흐람 추빈은 카프카스로 보내져 하자르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파하였고,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사산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해 조지아에서 동로마군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아라스 강둑에서 로마누스가 이끄는 적군에게 패배했다.

호르미즈드는 이 패배 소식을 듣고 쇠사슬과 굴대, 그리고 여성의 의복을 바흐람 추빈에게 보냈다. 그 의미는 "나는 네놈을 여자 노예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1]. 바흐람 추빈은 격노하였고, 군대를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호르미즈드는 사라메스에게 군대를 맡겨 이들을 격퇴하게 했지만, 사라메스는 전투 도중 코끼리에 짓밟혀 죽었다. 그 후 그는 아두르바다간에서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이베리아인들의 공격을 격퇴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여 니시비스에 이르렀고, 니시비스 수비대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호르미즈드는 재차 진압군을 보냈지만, 그들 마저 바흐람의 위명에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항복했다.

호르미즈드는 티그리스 강의 다리를 파괴하고, 라흠 왕국의 수도인 알 히라에 안식처를 마련하고자 보물을 그쪽으로 보냈다. 그러면서 파루칸 장군 휘하의 새로운 토벌대를 파견했다. 파루칸은 감옥에 갇혀있는 대귀족 자드스프람을 석방시켜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이를 따랐다. 파루칸과 바흐람 추빈의 군대는 상류 잽 강에서 대치했지만, 강을 섣불리 건너려다 큰 피해를 입을 걸 두려워해 어느쪽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드스프람이 부하들을 선동해 봉기를 일으켜 파루칸을 살해하고 바흐람 추빈에게 귀순했다. 그리하여 대세는 기울었고, 호르미즈드는 크테시폰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처남 비스타힘과 빈두이가 사병들을 이끌고 궁정에 난입하는 바람에 사로잡혔다. 두 사람은 호르미즈드의 두 눈을 붉게 달아오른 바늘로 찔러 시력을 잃게 만들었고, 호스로 2세를 황위에 앉혔다.

그러나 바흐람 추빈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크테시폰으로 쳐들어갔다. 호스로는 바흐람에게 서신을 보내 "모두의 증오를 받은 폭군은 시력을 잃었다. 그대는 이란을 구한 영웅이나, 나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왕좌를 차지했다. 그대를 후히 대접할 테니,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숙고하라."고 알렸다. 그러나 그는 이를 무시하고 크테시폰에 이르렀고, 몇 차례의 전투 끝에 호스로의 군대를 격파했다. 호스로는 아내와 비스타힘, 빈두이, 그리고 30명의 귀족들과 함께 동로마 제국으로 도주했고, 크테시폰은 바흐람 추빈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는 천년기가 끝날 무렵 에프탈과 로마인들과의 파괴적인 전쟁으로 모두가 도탄에 빠져 있을 때 구세주가 나타날 거라는 조로아스터교 종말론적 예언이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면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활을 선포해, 새로운 천년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알렸다. 많은 백성들은 그 말에 혹하여 그를 구세주로 추앙했으나, 많은 귀족과 사제들은 호스로 2세의 편을 들었다. 한편 호스로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에게 자신이 복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아미다, 카르에, 다라, 마티로폴리스, 이베리아, 아르메니아, 라지스탄 등의 지배권을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자신의 딸인 마리암을 주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591년, 호스로의 부하 빈두이는 동로마 제국 사령관 미스타콘과 함께 아두르바디간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얼마 후, 호스로는 동로마의 또다른 장군 코멘티올로스와 함께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했다. 니시비스와 마티로폴리스는 즉각 호스로에게 귀순했고, 바흐람 추빈이 파견한 자츠파람은 전투에서 패한 뒤 곧 죽었다. 또다른 지휘관 브리자키우스는 모실에서 사로잡힌 뒤 코와 귀가 잘린 채 호스로에게 끌려와 처형되었다. 호스로와 동로마 장군 나르세스는 다라를 공략한 뒤 여세를 몰아 마르딘을 점령했다. 그 후 호스로는 마흐부드를 크테시폰으로 파견했고, 바흐람 추빈은 더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제국의 동방 영토로 도주했다.

그는 동쪽으로 도망치는 동안 하르카니아의 카란 가의 군대를 격파했고, 튀르크의 영역인 페르가나에 도착한 뒤 튀르크 카간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호스로는 그가 살아있는 한 안심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고, 자객을 보내 그를 처단하였다. 그의 누이 고르디야는 호라산으로 잠입한 뒤 호스로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비스탐과 결혼했다. 바흐람의 장남 샤푸르 역시 비스탐의 반란에 가담했다. 그러나 반란은 실패했고, 샤푸르는 처형되었다. 이와 달리 샤푸르의 둘째 아들 미흐란은 사산 왕조에 귀순하였고, 633년 무슬림이 사산 왕조에 쳐들어왔을 때 그들과 맞섰다. 한편, 후일에 등장한 사만 왕조는 바흐람 추빈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1] 원래 페르시아 남자들한테 가장 큰 욕은 바로 상대방을 여자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사산 왕조보다 약 700년 이전의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공격했을 때 페르시아 병사들이 그리스 병사들을 도발하기 위해 던진 욕설이 바로 "너희들은 여자다!"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