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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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
1986 | 1987 | 1988 | 1990 | |||||||||||||||||||||||||||||||||||||||||||||||||||||||||||||||||||||||||||||||||||||||||||||||||||||||||||||||||||||||||||||||||||||||||||||||||||||||||||||||||||||||||||||||||||||||||||||||||||||||||||||||||||||||||||||||||||||||||||||||||||||||||||||||||||||||||||||||||||||||||||||||||||||||||||||||||||||||||||||||||||||||||||||||||||||||||||||||||||||||||||||||||||||||||||||||||||||||||||||||||||||||||||||||||||||||||||||||||||||||||||||||||||||
1991 | 1992 | 2000 |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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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리그 역대 최우수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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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아라마키 아츠시 마이니치 / 투수 |
카케야마 카즈오 난카이 / 내야수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내야수 |
토요다 야스미츠 니시테츠 / 내야수 |
타쿠와 모토지 난카이 /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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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에노모토 키하치 마이니치 / 내야수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투수 |
키무라 타모츠 난카이 / 투수 |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외야수 |
장훈 토에이 / 외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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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수상자 없음 |
토쿠히사 토시아키 킨테츠 / 투수 |
오자키 유키오 토에이 / 투수 |
수상자 없음 | 수상자 없음 | |
<rowcolor=#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이케나카 마사아키 니시테츠 / 투수 |
수상자 없음 |
타카하시 요시마사 토에이 / 투수 |
수상자 없음 |
아리토 미치요 롯데 / 외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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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사토 미치오 난카이 / 투수 |
미나가와 야스오 토에이 / 투수 |
카토 하지메 니시테츠 / 투수 |
니이미 사토시 닛타쿠홈 / 투수 |
미츠이 마사하루 롯데 /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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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야마구치 타카시 한큐 / 투수 |
후지타 마나부 난카이 / 투수 |
사토 요시노리 한큐 / 투수 |
무라카미 유키히로 난카이 / 투수 |
마츠누마 히로히사 세이부 /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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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키다 이사무 닛폰햄 / 투수 |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 내야수 |
오오이시 다이지로 킨테츠 / 내야수 |
후타무라 타다미 닛폰햄 / 외야수 |
후지타 히로마사 한큐 / 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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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쿠마노 테루미츠 한큐 / 외야수 |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 내야수 |
아와노 히데유키 킨테츠 / 투수 |
모리야마 료지 세이부 / 투수 |
사카이 츠토무 오릭스 /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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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투수 |
하세가와 시게토시 오릭스 / 투수 |
타카무라 히로시 킨테츠 / 투수 |
스기야마 켄토 세이부 / 투수 |
와타나베 히데카즈 다이에 /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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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히라이 마사후미 오릭스 / 투수 |
카네코 마코토 닛폰햄 / 내야수 |
코사카 마코토 롯데 / 투수 |
오제키 타츠야 세이부 / 외야수 |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 투수 |
|
<rowcolor=#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수상자 없음 |
오쿠보 마사노부 오릭스 / 투수 |
쇼다 이츠키 닛폰햄 / 투수 |
와다 츠요시 다이에 / 투수 |
미세 코지 다이에 /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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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쿠보 야스토모 롯데 / 투수 |
야기 토모야 닛폰햄 / 투수 |
다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투수 |
코마츠 사토시 오릭스 / 투수 |
셋츠 타다시 소프트뱅크 / 투수 |
|
<rowcolor=#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사카키바라 료 닛폰햄 / 투수 |
마키타 카즈히사 세이부 / 투수 |
마스다 나오야 롯데 / 투수 |
노리모토 타카히로 라쿠텐 / 투수 |
이시카와 아유무 롯데 /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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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아리하라 코헤이 닛폰햄 / 투수 |
타카나시 히로토시 닛폰햄 / 투수 |
겐다 소스케 세이부 / 내야수 |
타나카 카즈키 라쿠텐 / 외야수 |
타카하시 레이 소프트뱅크 /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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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타이라 카이마 세이부 / 투수 |
미야기 히로야 오릭스 / 투수 |
미즈카미 요시노부 세이부 / 투수 |
야마시타 슌페이타 오릭스 / 투수 |
타케우치 나츠키 세이부 /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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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역대 1루수 베스트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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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 1940년, 1947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40 | 1947 | 1948 | 1949 |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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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니시자와 미치오 주니치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니시자와 미치오 나고야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니시자와 미치오 주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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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후지모토 카츠미 오사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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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
후지모토 카츠미 오사카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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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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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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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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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후지타 타이라 한신 |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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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랜디 바스 한신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래리 패리쉬 야쿠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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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짐 파쵸렉 한신 |
히로사와 카츠미 야쿠르트 |
타이호 야스아키 주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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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토마스 오말리 야쿠르트 |
루이스 로페스 히로시마 |
코마다 노리히로 요코하마 |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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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조지 아리아스 한신 |
타이론 우즈 요코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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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
타이론 우즈 주니치 |
우치카와 세이이치 요코하마 |
토니 블랑코 주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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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크레이그 브라젤 한신 |
쿠리하라 켄타 히로시마 |
토니 블랑코 주니치 |
토니 블랑코 DeNA |
마우로 고메즈 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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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하타케야마 카즈히로 야쿠르트 |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
호세 로페즈 DeNA |
다얀 비시에도 주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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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제프리 마르테 한신 |
호세 오수나 야쿠르트 |
오오야마 유스케 한신 |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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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25 | 2026 | 2027 | 2028 | 20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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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카와이 코조 한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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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스기야마 코헤이 난카이 |
에노모토 키하치 마이니치 |
오카모토 켄이치로 한큐 |
스탠리 하시모토 토에이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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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에노모토 키하치 오리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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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타카키 타카시 킨테츠 |
에노모토 키하치 오리온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에노모토 키하치 오리온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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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카토 히데지 한큐 |
클라렌스 존스 킨테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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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카토 히데지 한큐 |
사카기바라 준이치 닛폰햄 |
카토 히데지 한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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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레온 리 롯데 |
사카기바라 준이치 닛폰햄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부머 웰즈 한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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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리처드 데이비스 킨테츠 |
부머 웰즈 한큐 |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
부머 웰즈 오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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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
짐 트레버 킨테츠 |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
이시이 히로오 킨테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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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훌리오 프랑코 롯데 |
카타오카 아츠시 닛폰햄 |
필 클라크 킨테츠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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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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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훌리오 줄레타 소프트뱅크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알렉스 카브레라 오릭스 |
타카하시 신지 닛폰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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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알렉스 카브레라 오릭스 |
코쿠보 히로키 소프트뱅크 |
이대호 오릭스 |
아사무라 히데토 세이부 |
에르네스토 메히아 세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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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나카타 쇼 닛폰햄 |
긴지 라쿠텐 |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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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나카타 쇼 닛폰햄 |
브랜든 레어드 롯데 |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톤구 유마 오릭스 |
야마카와 호타카 소프트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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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2025 | 2026 | 2027 | 2028 | 2029 | |
}}}}}}}}}}}} ||
1988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 | ||||
부머 웰즈 ( 한큐 브레이브스) |
→ |
기요하라 가즈히로 ( 세이부 라이온즈) |
→ |
아이코 타케시 ( 롯데 오리온즈) |
1990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 | ||||
아이코 타케시 ( 롯데 오리온즈) |
→ |
기요하라 가즈히로 ( 세이부 라이온즈) |
→ |
짐 트레버 ( 킨테츠 버팔로즈) |
1992~1994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 | ||||
짐 트레버 ( 킨테츠 버팔로즈) |
→ |
기요하라 가즈히로 ( 세이부 라이온즈) |
→ |
훌리오 프랑코 ( 치바 롯데 마린즈) |
1990, 1992 퍼시픽 리그 최고 출루율 |
1988 퍼시픽 리그 최다 승리타점[1] |
보유 기록(NPB) | |
통산 최다 끝내기 안타 | 20안타 |
통산 최다 끝내기 홈런 | 12홈런 |
통산 최다 몸에 맞는 공 | 196개 |
신인 한 시즌 최다 홈런 | 31홈런 |
최다 올스타전 MVP | 7회 |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3번 | ||||
제리 화이트 (1984) |
→ |
기요하라 가즈히로 (1986~1996) |
→ |
타마노 히로마사 (1997~1999)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5번}}} | ||||
히로사와 카츠미 (1988~1996) |
→ |
기요하라 가즈히로 (1997~2005) |
→ |
조 딜런 (2006) |
{{{#ffffff [[오릭스 버팔로즈|오릭스 버팔로즈]] 등번호 5번}}} | ||||
야마사키 타케시 (2003~2004) |
→ |
기요하라 가즈히로 (2006~2008) |
→ |
프레디 바이넘 (2010) |
기요하라 가즈히로 清原和博 | Kazuhiro Kiyohara |
|
생년월일 | 1967년 8월 18일 ([age(1967-08-18)]세) |
오사카부 키시와다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PL학원고등학교 (오사카) |
신체 | 188cm, 104kg |
포지션 | 1루수, 3루수[3], 지명타자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5년 드래프트 1라운드 (세이부) |
소속팀 |
세이부 라이온즈 (1986~1996)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7~2005) 오릭스 버팔로즈 (2006~2008) |
등장곡 | 나가부치 츠요시 - とんぼ |
응원가 |
세이부 시절 원곡 - Hordillidia[4][5][6] 요미우리 시절[7][CD판][구장판] 오릭스 시절[10] |
SNS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 야구 선수. 세이부 라이온즈의 레전드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타로, 198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의 세이부 라이온즈에 고교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하여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거쳐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2008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실력과 더불어 거구이면서 호탕한 성격으로 많은 팬을 보유한 선수였다. 고교 시절 함께 'KK 콤비'를 이뤘던 친구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쿠와타 마스미와의 관계도 자주 회자된다.
별명이 많은데 가장 유명한 별명은 '야구계의 반쵸'[11]와 '무관의 제왕'.
2016년 2월 2일 각성제 소지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당하면서 마약사범으로 전락했으나[12] 이후 활발한 외부 활동으로 조금씩 이미지를 회복해가고 있다.
2. 프로 데뷔 전
|
친구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쿠와타 마스미와 함께.[13] |
오사카 출생인데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대부터 골수 요미우리 자이언츠팬으로 유명했었으며 야구를 시작한 것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동경 때문일 정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최전성기인 V9[14]이후, 주니치 드래곤즈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밀려 2년 연속 우승을 놓치던 장면이 어린 기요하라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기요하라에게 어렸을 때 "오사카에서 최고가 되면 오사카내에서만 최고지만, 도쿄에서 최고가 되면 일본최고가 된다라는 말을 했고, 이 말은 기요하라가 도쿄를 대표하는 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가 되는 꿈을 꾸게 하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한신 타이거스팬이었고, 어머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팬이었다고 한다. 한신 팬과 요미우리 팬의 결혼이나 교제는 상상도 못할 정도라는 일본 야구팬들에겐 굉장히 신기한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기요하라는 어린 시절 요미우리가 이긴 날에는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고 잤고 한신이 이긴 날에는 한신의 유니폼을 입고 잤다고 한다. 다음날 학교에 등교할 때도 한신이 이긴 날에는 한신 모자, 요미우리가 이긴 날에는 요미우리 모자를 쓰고 등교했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며 오 사다하루의 활약과 V9로 대표되는 요미우리의 최전성기를 보면서 요미우리팬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고교 졸업 후 그토록 열망하던 요미우리에서 드래프트 1위로 지명받지 못하고 세이부 라이온즈에 지명되어 버렸다. 거기다 198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드래프트 1위 지명은 그와 오사카 PL학원의 동기이자 평생 친구였던 쿠와타 마스미. 운명의 장난도 이 이상이 없었다.
정확한 정황은 기요하라는 고교 시절 인터뷰 내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겠다는 뜻을 밝혀왔고 쿠와타는 "고교 시절 내내 어느 팀이 날 지명하든 난 무조건 와세다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대외적으로 말을 해 왔다. 그러므로 쿠와타를 지명해도 대학에 가버리면 1라운드 지명을 날려버리는 셈이다. 또한 당시 요미우리 감독 오 사다하루는 여러 인터뷰에서 쿠와타는 대학에 간다니 힘들고, 자신의 후계자인 거포 1루수로 기요하라를 지명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 그리하여 쿠와타는 와세다대학 입학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대학 야구부에서 쿠와타 입단 환영 행사를 준비 할 정도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역시 구와타가 아닌 기요하라의 부모님에게 접촉하여 지명의사를 피력했다. 그리고 드래프트 당일 무려 6개구단[15]이 기요하라를 1순위에 지명했으나 요미우리는 기습적으로 쿠와타 마스미를 지명하여 단독으로 교섭권을 따냈다. 당연히 모두가 경악.
그러나 쿠와타는 여전히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날 지명한 건 감사하지만 난 와세다 대학에 가겠다"라고 얘기했고, 당연히 야구계는 요미우리가 지명권 하나 날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생각했다. 와세다대학은 쿠와타 환영회를 준비했지만... 정작 쿠와타는 환영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쿠와타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모두의 뒤통수를 갈겨놓은 것이다. 당시 여러 설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요미우리가 쿠와타와 물밑 교섭을 통해 대학에 간다는 말을 흘려 아무도 지명 못하게 막은 후 단독 기습 지명으로 교섭권을 획득했다는 설과 쿠와타는 정말 대학에 가려고 했으나 지명 후 계약금에 흔들려 입단했다는 설이 있다. 일본에서는 전자의 가능성을 높게 치고 있다. 사실 요미우리 입장에서도 기요하라가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3루수엔 입단 당시 입단 5년차로 리그 MVP까지 수상했던 하라 다쓰노리가 버티고 있었고, 1루에는 1984년에 32홈런을 때렸으며 매년 3할 언저리 타율과 20홈런 내외를 기록하면서 쇼맨십으로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나카하타 키요시가 있었다.
어쨌든 6개 구단에서 기요하라를 지명하였고, 일본프로야구 1차 지명은 모든 구단이 자유롭게 지명을 한 후 지명한 선수가 복수 구단과 겹칠 경우 제비뽑기를 하여 당첨된 팀이 선제 교섭권을 따내는 룰에 따라 기요하라는 복수의 구단에서 제비뽑기를 했고 세이부가 1차 교섭권을 갖게 되었다. 세이부와의 교섭에 안 나가려 하는걸, 모친의 거의 폭언에 가까운 설득을 받고 프로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여 세이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입단 기자회견에서 기요하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쿠와타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울면서 다짐했다. 쿠와타에게도 원한이 있음을 피력한 것을 보면[16] 쿠와타와 요미우리의 물밑교섭론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구와타에 대한 경쟁심을 사그라들지 않아, 1988년 올스타전에서 쿠와타를 상대로 홈런 기록 및 1994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쿠와타를 상대로 홈런 두 방을 연달아 때려내기도 했다.
이러한 과거가 있어서 1987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와 맞붙었을 때, 세이부의 우승이 확정되기 직전인 6차전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기요하라는 갑작스레 눈물을 흘렸다. 당시 중계를 보면 카메라맨의 당황가득한 카메라워크가 일품이다. 우승 직전 상황에서 일본 야구 중계는 보통 선수 한 명씩을 비추면서 우승 직전의 설렘과 긴장어린 표정을 찍는 것이 관행인데, 이걸 찍다가 갑자기 1루에서 기요하라가 울기 시작하니까 카메라를 1루로 돌리고 허둥지둥 한다. 2루수였던 츠지 하츠히코가 기요하라를 다독이는 장면도 나왔다. 아무래도 과거 요미우리에게 당했던 심적인 아픔이 컸을 터. 그 요미우리를 자신이 기어코 이기고 있다는 긍정의 감정과,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요미우리가 일본시리즈에서 패배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일종의 가해자가 되어버린 부정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눈물이었을 것이다.[17]
고교 시절 "KK 콤비"라고 불린 키요하라와 쿠와타의 인기는 이미 고시엔 스타급을 넘어서서 당시 일본프로야구 최고 스타였던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넘어선 수준으로 일본 스포츠신문에 오치아이가 그 둘의 인기를 질투하는 인터뷰가 실릴 정도였다고 한다.[18]
이후 기요하라와 쿠와타는 화해를 했지만, 서로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라이벌 의식만큼은 내려놓지 않았다. 하락세가 완연했던 쿠와타가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하고 선수로 복귀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기요하라가 술자리에서 은퇴하겠다고 말을 했다가 번복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먼저 은퇴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서로를 의식했다. 결국 미국에서의 기록을 합쳐도 기요하라가 1년 더 하긴 했는데, 둘 다 말년의 성적은 처참하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을 듯.
3. 선수 생활
3.1.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세이부의 붙박이 4번 타자 시절 |
1994년 일본 시리즈[19] 1차전에서 쿠와타와의 승부 |
프로 데뷔를 함께 한 세이부에서의 활약은 곧 기요하라의 전성기였다. 첫 선발 출장일에 홈런을 때려내며 혜성같은 데뷔를 함과 동시에 그 해 31홈런으로 고졸 신인의 루키 시즌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활약으로 신인왕을 획득하며[20], 그 해 세이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다.
이후로도 꾸준히 팀의 주포로서 활약하며 1980년대 세이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당시 최연소 100홈런, 200홈런 달성(21세 9개월, 24세 10개월), 최연소 1억엔 연봉 도달(1990년, 23세), 여기에 전설적인 아키야마 코지-기요하라 가즈히로-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AKD포의 주역이 되는 등 시작부터 화려함의 연속이었다.
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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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와타[21]와 동료로서 재회하는 모습 |
1996년에 기요하라는 FA 자격을 얻어 꿈에 그리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사실 그간의 행적을 보면 그가 FA로 요미우리를 선택할게 너무 뻔한 상황이였기에 FA 경합을 벌였던 한신 타이거스의 당시 감독 요시다 요시오는 세로줄무늬를 가로줄무늬로 바꿔서라도 그를 데려오겠다 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요미우리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기요하라에게 어서 내 품으로 날아들어오게라는 말을 했다. 물론 웃돈을 얹어준다고 할 지라도 기요하라가 한신을 선택할 리는 없었다. 참고로 기요하라는 이 당시 상황에 대해서 자신의 자서전에 '가고 싶었던 구단은 1위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위가 한신이었으나, FA를 얻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붙은 시점부터는 원래 꿈을 이룰 생각으로 이미 세이부 시절부터 FA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자신을 원한다면 다 던지고 갈 생각이었다' 라고 기술했다. 그렇기 때문에 요미우리 입단 후 자신의 등장 테마곡으로 쓴 나가부치 츠요시의 とんぼ( 잠자리)역시, 도쿄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좌절을 나타내고 싶어서 썼다고 한다.
이 과정은 기요하라의 자서전을 드라마화한 KINSMA란 프로그램에서는 한신에서 10년간 30억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배팅했고 고향팀이란 사실에 한신 입단을 준비했으나 어머니의 너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 왜 고민하냐는 조언에 요미우리 자이언츠행을 결심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결국 요미우리 입단 후 쿠와타와 같은 팀이 되었고, 고교 시절의 KK 콤비가 같은 팀으로 뭉쳤다는 사실은 일본 전역을 들썩이게 하였다. 입단 후 3번째 경기. 부상으로 재활 중이던 쿠와타의 복귀전이 성사되었고 이 경기에서 쿠와타의 활약과 기요하라의 결승 홈런으로 둘이서 10여년 만에 승리를 합작하게 되었다. 이 경기 시청률은 25퍼센트가 넘었고 히어로 인터뷰 최고 순간 시청률이 40퍼센트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전성기를 지나 30대에 들어서면서 하락세가 본격적으로 나타날 조짐이 보여 요미우리 입단 후에는 들쭉날쭉한 타격을 보였다. 게다가 돈지랄로 최고의 선수만 사오는 요미우리의 특성 때문에 타격이 약간만 부진해도 다른 쟁쟁한 강타자들[22]에 밀려 그의 프라이드인 4번에서 내려가는 일이 많았다. 결국 요미우리에서의 순탄치 않았던 8년 간 팬들에게 이렇다 할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한 채 2003년부터는 급격히 타격 페이스가 저하됐다. 그리고 세이부 시절부터 문제였던 습관성 어깨 탈구 등으로 맨날 실려나가다 보니 2005년 시즌 종료 후 결국 전력외 통고를 받게 된다. 그가 홈런을 치고 난 후 호리우치 츠네오 당시 감독의 하이파이브를 거절하여 구단 수뇌부의 눈에 거슬리게 만든 것도 한 몫했다.
그래도 특유의 호쾌한 인상+명문 야구단 요미우리의 스타라는 점 때문에 인기만큼은 절정이었다. 기복이 꽤나 심했다지만 커리어 최다 안타, 최다 타점도 요미우리 재적 시기였던 2001년에 기록했다.(139안타 121타점) 참고로 기요하라는 2001년 시즌을 빼면 한번도 100타점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없다.[24] 게다가 140안타를 기록한 시즌은 단 1번도 없다
그와 구단의 트러블은 '신사' 이미지를 강조했던 구단 수뇌부와 ' 반쵸'로 대표되는 그의 캐릭터 사이의 충돌로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또한 타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기요하라 군단"이라 불리는 파벌을 조직해 코치들 마저도 쩔쩔 매게 만들어서 순혈을 강조하는 요미우리 구단 이미지에 타격을 준 것도 그를 내보내게 한 이유 중 하나를 들 수 있다.( 항목 참조)
3.3.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2005 시즌 후 요미우리에서 방출된 뒤 당시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이자 기요하라의 친정팀 라이온즈의 대선배인 오기 아키라 감독이 오사카로 돌아와라! 너의 마지막 영광의 길은 내가 만들어주마라고 말하며 그에게 정식으로 오퍼를 넣었다.[25] 그 요청에 따라 2006년 오릭스에 입단하면서 그의 선수 생활 마지막 3년을 고향인 오사카에서 보내게 된다.
팀 전력이 딱히 좋지 않았던 오릭스였지만 고향 팀에 온 대우를 나름 극진히 한 덕에 요미우리 시절보다는 많은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도 부상 등으로 인해 시즌을 통째로 날리기도 했고, 노쇠화에 따른 기량의 완연한 쇠퇴로 전성기 때의 활약을 펼치진 못했다. 여담으로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방출당한 쿠와타 마스미가 오사카로 와서 기요하라의 배팅볼을 던져준 일화도 있다.
그리고 2008년 10월 1일, 수많은 팬들 앞에서 풍운의 남자 기요하라는 그가 평소에 좋아했고, 자신의 테마곡으로까지 썼었던 나가부치 츠요시[26]의 '톤보(とんぼ, 잠자리)'[27]를 라이브로 들으며 현역에서 공식 은퇴했다.
그의 마지막 은퇴 경기에는 20여년 전 드래프트 사건의 3인이 다시 모여 감동을 더했다. 상대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이 오 사다하루였으며 친구를 보러온 쿠와타가 관중석에 잡혔다.[28] 은퇴 경기 3번째 타석에서는 적시 2루타를 기록했으며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는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길고 길었던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29]
오 사다하루는 기요하라에게 꽃다발을 건내며 "다음 생애에는 꼭 같은 팀에서 홈런 레이스를 펼처보자" 라고 말했다. 20여년 전 드래프트 사건의 3인은 이 해에 모두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야구평론가, 스포츠 해설가(게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선수 시절에 얻은 무릎 통증으로, 장시간 앉아서 해설하는 데는 무리가 온다고 한다. 후일 코치로서 요미우리에 복귀할 가능성도 점쳐지고는 있으나 아직은 가능성 단계.
일본 야구 팬들은 기요하라와 구와타의 은퇴나 요미우리에서 버려지다시피 한 상황을 굉장히 아쉽게 생각하며 일본프로야구의 대스타인 이 두 명이 요미우리에서의 아름다운 은퇴가 아닌 팀과의 트러블로 팀을 떠난 점을 현재도 굉장히 아쉽게 생각한다.
4. 은퇴 이후
2011년 정식 해설위원으로 데뷔를 했지만 잦은 펑크와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도마 위에 오르게 되면서 결국 방송계에서 퇴출당했다.기요하라도 언젠간 지도자가 될 수도 있겠는데, 워낙 자기가 위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만약에 지도자를 한다고 쳐도 바로 감독이 되지 않는 이상 본인의 성에 차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NPB 감독들도 그런 기요하라를 밑에 코치로 두기 껄끄러워 할 듯하다.
본인이 변하든가 하지 않는 이상 NPB에서 지도자가 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요미우리 시절에도 팀 내에 파벌을 만들어서 기요하라 군단이라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로 팀 분위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평가이다. 요미우리 시절 코치에게 모토키 다이스케와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키라고 대놓고 얘기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오다 코헤이를 괴롭힌 일화는 유명하며 공공연하게 편가르기를 했을 정도였다. 은퇴 후에도 일본 대표팀을 방문했을 때 하라 타츠노리 감독이 자리를 피해줘야 했을 정도였다. 존경은 받지만 지도자감으로서는 분명 실격감이다. 본인 자신부터 야구계 선배를 존중해야 하는데 감독이 자리를 비키게 만들고 코치한테 자리 비키라고 하는데 과연 자신이 지도자가 된다면 선수들이 겉으로 따른다 해도 마음으로 따르진 않을 듯하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까지 어떤 팀에서든지 팀의 구심점으로써 한 가운데에 있었다는 점을 보면 카리스마 있는 뛰어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그가 이기적인 선수였다면 세이부의 황금시대도 없었을 것이며 안좋은 상황에서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의 2회 일본시리즈 우승이나 오릭스에서의 후배들의 태도 등을 본다면 저런 나쁜 일화 속에서도 카리스마 하나는 확실하다 평가된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는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과거 그를 아끼던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고 한다. 마약 복용과 문신(야쿠자와의 관련), 불륜 등 스캔들이 터져나오더니 급기야 2014년 9월 22일 패션 모델인 부인 키무라 아키[30]와의 이혼을 공식 발표했다. 팬들은 KK 콤비의 쿠와타나 AK포의 아키야마 코지도 건실하게 살고 있는데 왜 기요하라만 인생을 망치고 있냐고 안타까운 분노를 표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엄청난 커리어와 명성에도 프로야구 코치나 감독을 못하는건 기요하라 역시 선수 시절 코치들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후배들을 괴롭히고, 파벌을 만드는 등 부적절한 처신을 한 책임이 크기에 본인의 자업자득인 측면도 크긴 하다.
2014년 경부터 당뇨병에 걸려 인슐린 주사 처치를 받고 있다고 한다. 2015년경에는 해설위원 계약도 해지되고 방송에 출연하거나 파칭코 영업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는 여전히 구원이 있는지 자이언츠 OB회의 초청을 지금까지도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그리고 이후..기요하라는 큰 사고를 저지르는데..
2015년 중반부터 각종 주간지 등을 통해 마약[31] 투약 의혹이 불거졌으며, 2016년 2월 2일에 가택수사를 통해 자택에 소지하고 있던 마약이 발견되고, 본인의 소지품임을 인정하면서 체포되었다. 경찰측의 발표에 의하면 강제 가택 수사에 이르기까지 1년 이상의 면밀한 내정 수사를 거쳤다고 한다. 이 사건이 TBS 테레비의 NEWS23[32]을 통해 처음 보도된 이후로 일본 방송에서는 이를 연일 뉴스로 다뤘다. 일본 제1스포츠인 야구의 슈퍼스타로써 대단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그 몰락 또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쿠와타 마스미 등 야구계 인사들도 기요하라의 마약 사건에 대해 심각한 유감을 표했다. 심지어 절친이었던 쿠와타에 의하면 3년 전 기요하라 측에서 돌연 "나에게 이제 참견하지 말아달라" 며 일방적으로 절연당했고, 그 뒤로 한 번도 만나거나 연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유명했던 KK 콤비의 인기를 생각하면 꽤 충격적인 사실. 그 와중, 테레비 아사히의 보도에 따르면 과거 PL학원 선배에게 쿠와타와 기요하라가 직접 전동 휠체어를 선물했다고 한다. 나중에 쿠와타는 "야구는 위기 상황에서 대타나 중간 계투를 올릴 수 있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기요하라는 그걸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갱생을 바라는 한 마디를 했다.
그리고 보도가 계속되며 기요하라가 현역 시절에도 마약을 했다라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요미우리 시절의 팀 동료 노무라 타카히토였다.[33]
기요하라를 모델로 삼아 1987~1994년까지 연재되었다가 2014년부터 재연재되고 있었던 야구 만화 "날려라! 기요하라 군"은 이 일 때문에 휴재하게 되었고 결국 연재 중단되었다. #
기요하라가 마약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기 직전 CHAGE and ASKA의 멤버 ASKA도 마약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ASKA의 운전수와 기요하라의 운전수가 동일인물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 때문에 기요하라가 마약 혐의로 언론에 포화를 받던 중에 기요하라의 사무소에서 운전수 겸 매니저를 모집하는 광고를 싣던 구직사이트 DODA에 그 문제의 운전수가 누구냐는 문의가 엄청나게 쇄도했던 적이 있었다.
여담으로 기요하라를 비롯해 마약 사건에 연루된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의 마약 구매 출처가 거의 일치하는데 바로 한구레 조직 중 한 곳인 '기무라 형제' 일파와 협력 관계이며 거대 술집 사장이 공식 직함이지만 실제로는 폭주족 '산겐자야 구렌타이'의 간부 출신이기도 한 '카와나 츠요시'와 그의 가게라는게 거의 정설이다. 음성적인 일본 먀약 시장을 카와나 츠요시가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카와나 츠요시는 몽골 출신 스모 스타였던 '아사쇼류'에게 봉변을 당하며 깨강정이 될 정도로 얻어맞은 적도 있었는데 일반 언론에는 그냥 술집 사장이라고만 소개되었다. 여담으로 나중에 술집을 찾은 어떤 손님이 아사쇼류에게 맞은 일로 약올리다 열받은 카와나가 집기로 그 손님의 머리를 후리며 뒤지게 팼다고 한다.
2016년 마약 스캔들 당시[34] |
2016년 3월 17일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2016년 5월 17일에 첫 공판이 열렸는데, 방청석 20석을 두고 방청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3,700명이나 재판소에 몰려들어 행렬을 이루었다. 일본에서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검찰은 징역 2년 6개월을 구형하였다. 여담이지만 재판 때 대마신 사사키 카즈히로가 증인으로 나왔다.(이 두 사람도 고교 때부터 친했다) #
명포수-명감독 노무라 카츠야는 기요하라의 신인 시절 세이부 감독이었던 모리 마사아키를 문제삼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에 입단하여 어린 나이에 성공을 맛 본 기요하라에게 인성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 기사에서는 짧게 언급되었지만, 일본 위키를 보면 알 수 있다. 기사재판에서는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일본 미디어에서 기요하라의 마약 사건이 해당 뉴스의 분량을 할애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개 마약 사건에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과잉취재가 문제가 되었다. TBS 라디오 등을 비롯한 일부 미디어에선 이게 언론의 본분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으며, 마약 중독자의 심리적 어둠을 과도하게 부각해 마약 중독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조장한다는 의견 또한 제기되었다. 관련 방송내용
2016년 12월 24일 유죄 판결 확정 후 처음으로 TV프로에 출연해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팬들에게 사과하였다, 마약은 자신이 평생 싸워야 할 적이라며 앞으로도 많은 노력을 할 것이라며 갱생을 약속했다.
2019년 10월 21일 공개 트라이아웃의 감독을 맡게 되어 야구계에 복귀했다.
2020년 6월 15일부로 집행유예 기간이 만료되었다. 이후에는 TV, 라디오, 유튜브 등에서 활동 중이다.
2021년 2월 15일 아마추어(초, 중, 고, 대학, 사회인) 지도자 자격증 취득에 성공했으며 팬들과 약속한 몸에 문신 지우는 시술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기요하라가 마약 혐의로 집행유예가 끝난지 5년이 지나야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2025년 6월 15일 부터 선수 지도가 가능하다고 한다.[35] 여담으로 일본의 아마야구 지도자 자격시험은 상당히 까다로워서 어지간한 커리어의 NPB 프로 출신들도 몆 번이고 자격증 취득에 실패할 만큼 절대 쉬운 시험이 아니다. 공부하는 야구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들었던 기요하라가 이 시험을 통과한 걸 보면 독하게 마음먹고 공부한 듯하다.
다만 지도자로 돌아올 지는 미지수인데, 유튜버로 아주 잘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야구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도 기요하라와 쿠와타는 다 알 정도로 야구계를 넘어서 전국구 연예인급 스타였다. 심지어 전성기 시절 기요하라의 인기는 스즈키 이치로도 부럽지 않았을 정도였다. 또한 본인이 일본프로야구 레전드들 중 하나여서 출연하는 게스트들도 굉장한데 무려 후지카와 큐지나 히가시오 오사무가 출연할 정도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과거의 잘못된 행동들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반성하고 있고, 건전하게 운동하는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호감도를 많이 쌓은 끝에 벌써 구독자 50만 명을 바라보는 대형 유튜버로 발돋움하고 있다. 방송 스타일은 젊은이들처럼 막 오버하고 소란 떨면서 자극적으로 진행하는 여타 유튜버들과는 달리 기요하라 본인이 이젠 나이가 오십을 넘다 보니 담담히 진행하는 편이다. 그래서 기요하라의 전성기를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방송을 선호하는 중, 장년층들이 선호하는 채널이다. 50만 구독자를 넘긴 이후에는 본인의 발언 문제로 인해[36] 일부 구독자들이 떨어져 나갔지만 그래도 50만대 초반을 유지 중이다. 현 시점에선 사토자키 토모야의 유튜브 채널과 구독자 수 1위를 두고 경쟁 중에 있는 상황.
2022년 2월 교통사고 현장에서 인명 구조를 해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다.
2023년 9월 20일 주니치 드래곤즈 차기 시즌의 수석 코치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언론 기사가 나왔다. # 이에 주니치 구단 대표가 해당 보도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고, # 주니치 팬들 또한 "여기가 PL학원이냐"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본인의 PL학원 2년 후배 카타오카 아츠시가 수석 코치로 선임되면서, 기요하라 수석 코치썰은 그냥 루머에 그쳤다.[37]
5. 플레이 스타일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통산 2,338경기 출장, 타율 .272, 출루율 .389, 장타율 .520 OPS .909, 2,122안타, 1530타점, 525홈런(역대 5위), 1955삼진(역대 2위[38]), 1346볼넷, 몸에 맞는 볼 196개(역대 1위)
통산 성적을 보면 당연히 수많은 타이틀을 차지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타격, 홈런, 타점 1위를 단 한 번도 획득해 본 적이 없는 속칭 무관의 제왕이다.[홈런][타점기록]
게다가 우승 10회, 일본시리즈 우승 8회 등 여러 번 우승을 경험했음에도 시즌 MVP는 커녕, 일본시리즈 MVP도 수상한 적이 없다. 다만 신인왕, 최고출루율, 최다승리타점,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3회), 일본시리즈 감투상(2회), 골든글러브(5회) 등은 수상했었다.[41]
그래도 홈런만큼은 꾸준히 기록한 덕택에 25+홈런 시즌을 13번 기록했고, 부진을 거듭했던 요미우리 시절 통산 500홈런도 힘들지 않을까 평가했지만 결국 500홈런을 돌파, NPB 통산 홈런 5위에 올라있다.[42]
통산 삼진 2위, 몸에 맞는 공 1위라는 아이러니한 기록이 있다. 통산 삼진 2위야 당연히 그의 호쾌한 타격 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됐다고 할 수 있는데, 시즌 삼진 1위를 무려 세 번(1986, 1997[43], 2001)이나 했고, 시즌 100삼진 이상도 9번 기록했다. 이런 삼진 생산능력(?)에도 불구, 무시무시한 타격을 보여줬던 이유는 세이부 시절 감독이었던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장타력을 통한 위압감과 괜찮은 선구안
몸에 맞는 볼이 많은 점에 대해, 그의 타격 스승이었던 도이 마사히로[44]는 코치 자신이 도박 혐의로 입건되는 바람에 루키 시절 기요하라에게 피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한 척이 있다. 도이는 코치 복귀 후 마쓰이 가즈오 등에겐 이를 철저히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도 전설의 강타자 중의 하나였던 도이였던지라 그래도 "루키 시절의 기요하라에게는 1군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부터 가르쳤다"라고 술회했을 정도다.
6. 평가
고교 시절부터 고시엔 대회 최고 홈런 기록을 경신하면서 일찌감치 슈퍼 루키로 이름이 알려졌고, NPB 데뷔 첫 해부터 고졸 신인 최고 기록인 31홈런 및 이후로도 최연소 100호, 200호 홈런을 잇달아 기록하며 일찌감치 리그 최고의 스타가 된 선수였다.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도 기요하라가 활약하는 동안 리그 우승 8회, 일본시리즈 우승 6회라는 팀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보냈고 그 중심에 기요하라가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부터 커리어가 완만하게 내리막을 탔지만, 활약 여부와 별개로 그간 쌓아올린 입지와 카리스마에 힘입어 늘 리그에서 주목받는 선수였다.실력 외에도 'KK 콤비'를 이루며 고교야구계를 평정한 친구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쿠와타 마스미와의 드라마틱한 관계도 자주 회자되며, 단순한 활약 외에 이런 스토리와 더불어 소위 반초 이미지로 회자되는 특유의 이미지 및 카리스마와 겹쳐 큰 스타성을 지닌 선수였다. 이 때문에 적어도 인기 면에서는 기요하라가 어떤 탑클래스 선수와 견줘도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말년 오릭스 시절에는 거의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음에도 성대한 은퇴 경기와 함께 선수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7. 엔터테이너? 익살스런 반쵸?
- 선수 시절 초~중기에는 특유의 덧니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런데 방송 출연 등을 고려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임플란트로 바꿨다. 본인 왈, "부상 재활 치료하느라 시간도 좀 있고 해서 그냥 싹 갈아버렸죠."
- 요미우리 시절 오다 코헤이라는 포수를 선수 생활 내내 괴롭힌 것으로 유명했다. 예능 프로에서 기요하라가 오다의 팔에 암바를 걸고 오다가 괴로워하는걸 신 동물의 왕국의 약육강식으로 묘사하며 출연진들이 대폭소하는 장면도 있었다. 거기에 무려 치명적인 똥침을 두 번씩이나 놨다. 그 중 한번은 시즌 종료 후 선수단 납회식 때 TV로 생중계되는 와중에 놓은 것. 제대로 똥침 맞았는지 오다 코헤이는 정말로 고통스러워했다는... 2006년 기요하라가 요미우리를 떠난 해에 똑같이 요미우리를 떠나면서 찢어지기 성공. 나름 미트질 괜찮은 포수인데 기요하라의 이지메 때문에 연습에 집중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45]
- 모토키 다이스케는 이 기요하라의 충실한 꼬붕이자 말동무로 유명했다. 물론 오다에게 한 쓰레기짓도 기요하라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8. 겁쟁이 기요하라?
기요하라가 반쵸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후배 선수들이 무서워한다고 하지만, 의외로 기싸움은 몇 번 있었어도 몸싸움을 벌인 적은 거의 없었다. 생각 외로 허당일 가능성도 있다.왼쪽의 걷어차이는 투수가 히라누마, 오른쪽의 걷어차는 타자가 기요하라 |
사건 당시 영상
1989년 9월 23일 롯데 오리온즈전에서는 타석에서 빈볼 위협을 당해 자신이 벤치 클리어링을 시도했는데 투수와 아이-투-아이를 하기도 전에 배트를 먼저 마운드 쪽으로 내던져 상대 투수를 향해 폭행을 가했다. 이 당시 롯데 투수는 히라누마 사다하루(平沼定晴)였다. 그 배트에 직격으로 얻어맞은 히라누마가 기요하라에게 달려들었고, 기요하라가 무릎차기를 날린 후 전속력으로 도망가는 몸개그를 벌였다. 배트에 맞아 열받은 히라누마가 달려들자 기요하라는 투수에게 니킥을 날렸는데 이걸 보고 열받은 롯데 선수들이 집단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도망다니는 처지가 됐다. 결국 롯데 선수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어 다구리를 가했고, 결국 그때까지 진행됐던 연속 출장 기록을 이 벤치 클리어링으로 마감하고 덤으로 출장 정지 징계를 받기까지 했다.[46] 히라누마는 기요하라보다 3년 앞선 선배였는데, 이런 선배한테 배트를 직격으로 던지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벌였다. 한국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배트를 던지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완전히 찍혀서 프로에서 지도자 생활도 못 했을 것이다. 이게 일본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개그 소재로 쓰일 정도였다. 2015년 10월 일본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긴 했는데 이게 거의 25년이 지난 일이라...
요미우리 시절 한신과의 벤치클리어링 때 성질머리로 야구계 최강급이라는 호시노 센이치 감독한테 뒷덜미 잡혀 끌려나오고 나서 약간 겁먹은 듯한 표정과[47] , 2003년 7월 23일 당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소속이던 투수 톰 데이비에게 빈볼을 맞고선 평소완 달리 얌전히 나가다가 톰 데이비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면서 터벅터벅 오는데도 별 반응 없었다는 점... 그 이후에 승부에서 기요하라에게 삼진을 얻어낸 톰 데이비가 F자로 시작하는 욕설을 했는데도 무반응인 걸 봤을 때 기요하라가 의외로 자기보다 드세보이는 사람한테는 역시 약한 것 같다.[48]
기요하라가 한신전에서 데드볼을 맞고 세번이나 맞았다며 손가락 3개를 펼쳐보인데 대해 당시 한신의 투수였던 야부 케이이치는 기자가 그걸 물어보자 연봉 3억을 받고 있다는 의미겠지 하면서 쿨하게 비웃어주기도 했다. 야부 역시 기요하라에게 데드볼을 많이 기록한 바 있는데 저렇게 자신있게 비꼰 것은 시비를 걸어와도 자신있다는 의미인 듯...
험악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일본 야구계에서의 이미지는 의외로 목소리만 큰 쫄보였다. 2005년 4월 한신전에서 후지카와 큐지에게 제멋대로 직구 승부를 요구했는데 후지카와가 눈도 까딱하지 않고 변화구로 삼진을 잡아내자 악에 받쳐 후지카와를 공개 비난했다. 그리고 며칠 뒤의 승부에서 또다시 직구 승부를 요구, 이번엔 정말로 직구로 삼진을 당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증언이나 정황 등을 봤을 때 어린 시절 골목대장은 확실했던 것으로 보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팬으로 오사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이지메를 각오하고 살아간다는 소리인데 이런 역경을 모두 이겨내고 항상 무리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을 보면 반쵸 이미지에 걸맞은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9. 기타
- 1985년 한미일 3국 대항 고교 야구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한 적이 있다. KK 콤비로 불렸던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쿠와타 마스미가 일본 대표로 출전한 유일한 대회였으며, 일본 대표팀이 4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하이라이트 영상
- 다카라즈카 가극단 주조의 남역 배우인 유우키 시온이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친인척 관계이다.
- 대두라서 헬멧이 크기로 유명한데, 그 헬멧은 사실 다름 아닌 퍼시픽 리그의 명 포수 노무라 카츠야가 쓰던 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노무라도 대두여서 머리에 맞는 헬멧이 없었는데, 1970년 미일 야구 친선경기 때 미국 측 더그아웃에 갔다가 찾아서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 노무라가 은퇴하면서 더 이상 헬멧을 쓸 일이 없게 되었으니 세이부에 남겨놓고 떠난 걸, 훗날 입단 후 마찬가지로 머리에 맞는 헬멧이 없어서 곤란에 빠진 기요하라가 우연히 이 헬멧을 찾아 쓰게 된 것이었다.
-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수들과는 두루두루 친한 편이었다. 쿠와타 마스미와는 알다시피 절친으로 유명하고 같은 팀 동료들이었던 이토 쓰토무, 아키야마 코지,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등과도 모두 친했으며 같은 PL학원 후배였던 타츠나미 카즈요시와도 매우 친하다. 타팀 소속인데다가 본인과 인연이 별로 없는 다카쓰 신고, 야마모토 마사, 사사키 가즈히로와도 모두 친했고 본인보다 세대가 조금 뒤인 후배들인 마쓰이 히데키와 스즈키 이치로와도 모두 돈독한 사이였다.
-
반쵸 이미지를 대표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2005년 4월 21일
요미우리 vs 한신 당시
후지카와 큐지와의 대결이었다. 당시 한신이 8점이나 앞서 가던 7회 말 2사 상황에서 통산 500홈런 달성까지 단 1개를 남겨둔 기요하라가 후지카와를 상대로 타석에 섰는데, 당연히 홈런을 맞아도 4점 차가 남기 때문에 던지는 후지카와 입장에서도 부담이 없었을 테고, 본인이 스트레이트에 자신있어 했으므로 당연히 직구 승부를 하러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기에 홈런을 노려 직구 타이밍에 배트를 휘둘렀으나 후지카와의 선택은
포크볼이었고 기요하라는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후지카와 입장에서는 아직 2이닝이 남아서 4점차가 되면 위험하다는 판단이었을테고 시즌 초반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기선제압을 해 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봤을 수도 있었지만, 500홈런을 노리고 있던 기요하라는 후지카와가 직구 승부를 하지 않은 것에 격분하여 기자들이 있는 앞에서 "배짱도 없는 놈아! 너 X알은 달려있냐 짜샤!(ケツの穴小いさいわ。 チンポコ付いてんのか!)"[49]라고 돌출발언을 날려버렸고 그게 다음날 스포츠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려버렸다.[50]
기본적으로 강타자에게 변화구 던져서 삼진을 잡는 게 문제될 일도 아니었고, 일본인의 정서상으로 봐도 그렇게까지 막말을 할 상황도 아니었건만, 본인의 홈런 기록에 눈이 멀어서[51] 승부를 안해 준다고 대놓고 저런 쫄보 같은 발언을 날렸으니 당하는 후지카와 입장에선 참으로 황당한 상황이었을 듯. 당연하지만 상대인 한신은 기요하라의 이 발언에 분노했고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 호시노 센이치 前 감독으로부터 자기가 못한 걸 왜 투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냐는 비판을 받았다. 사건 4일 후 비슷한 상황에서 이번엔 제대로 직구로 삼진을 잡은 후지카와는 "어쩌다 보니 그리 됐습니다(たまたまです)"[52]라는 고급진 디스를 시전했는데, 저 말은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매우 겸손한 표현이라 이것만으로도 쫄보에게 이긴 것일 뿐더러 일본어로 타마(たま, 玉)는 구슬을 뜻하기 때문에 남자의 그곳라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어서[53] X알 두 쪽 다 잘 있다는 대답으로 맞받아친 셈이 되었다.
이후 2020년 후지카와의 은퇴식에서 기요하라가 비디오 메세지로 축하 인사를 남길 때 해당 사건을 언급하면서 "후지카와는 잘못이 없다. 사인을 낸 건 야노 감독이다"[54] 라는 코멘트로 좌중을 폭소시키면서 이 해프닝은 어찌저찌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 2011년 LG 트윈스의 스프링캠프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는데 당시 훈련하던 정의윤을 보고 "정말로 정의윤이 후보란 말인가?" 하며 놀랐다고 한다. 당시 정의윤은 만년 유망주에 머물렀기 때문에 야갤에서 정의윤은 '기요하라의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정의윤이 활약을 하면 기요하라도 덩달아 칭찬을 받고 부진하면 같이 욕을 먹는다. 하지만 정의윤은 2015년 7월 SK로 이적하며 돌풍을 일으키는 바람에 재평가 되었다.
- 재일 루머가 많은 유명인 중 한명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재일 루머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근거는 전혀 없다. 애당초 기요하라는 성인이 되기 전 고교생 시절에 국민체육대회[55]에 참가한 적이 있고, # 일본의 관보에 귀화자로 고시된 적도 없다.
- 둘째 아들 기요하라 카츠지(清原勝児)는 어렸을 때부터 도쿄에 있는 유소년 야구팀에서 야구 선수로 활동했는데, 이 당시에는 주로 3번 타자로 나왔고 팀 내 에이스 투수였으며 주장도 맡았다고 한다. 소학교 6학년 때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어팀에 뽑히기도 했다. 관련 기사 그 후 2023년 여름 게이오기주쿠고등학교 2학년[56]으로 여름 고시엔에 참가했고 팀은 107년만의 우승을 차지했다. # 선수들 사이에서 '팀 분위기를 밝게 조성한다. 쾌활하게 행동한다. 슈퍼스타의 아들이라는 부담감이 클 법한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등 긍정적인 평이 많다. 다만 실력면에서는 크게 성장하지 못했는지, 고교에서는 벤치 멤버로 출장했고 프로에 갈 만한 포텐셜이 보이지 않는다는 냉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 #
- 2020년 유튜브를 시작한 오다 코헤이의 유튜브 채널에 나와서 야구계 썰 및 소소한 에피소드를 풀었다.[57] # 그리고 2019년에는 전 한신, 닛폰햄 선수 출신 카타오카 아츠시의 유튜브 채널에 나와 마약의 위험성과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
- 2020년 들어 야구 관련 유튜브 및 TV 예능에 많이 나오고 있는데, 코로나로 인해 일이 줄어들어 유튜브를 시작한 톤네루즈의 이시바시 타카아키와 가위바위보를 하기도 했다. 방송에서는 가족들에게 격려와 응원을 많이 받는다고 밝혔다. 톤네루즈 이시바시와의 가위바위보
- 유튜브에서 요미우리, 한신, 주니치 외의 구단에 지명되었을 경우 사회인 야구단에 입단하려 했지만, 쿠와타에게 질 수 없어서 세이부에 입단했다고 말했다.
- 2021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오랫동안 마약에 빠져있어 극복하는 과정에서 금단증상의 하나일 수 있다. 사실 마약이라는게 의지만으로 끊을 수 있다면 그건 마약이 아니란 말도 나올 정도니... 교도소 소재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유한양 이란 인물의 결말만 봐도 마약 투약 재소자들은 출소날 가족들이 포승줄로라도 묶어서 납치를 해 마약 브로커가 접근도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도 괜히 나온게 아니다. 실제로 마약혐의로 처벌을 받고 치료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마약 경력자의 말에 따르면 '마약을 끊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참는다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라고 말할 정도. 덴키 그루브의 멤버이자 멀티 엔터테이너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피에르 타키 역시 2019년 3월 코카인 흡입 혐의로 처벌을 받은 후 같은 문제로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한다.
- 2021년 시즌 중 '기요하라 2세'라고도 불리는 닛폰햄의 스타 나카타 쇼가 큰 사고를 쳤다.[58] 후배[59]가 뇌진탕을 일으킬 정도로 폭행을 한 것이다.[60] 일이 생각보다 커져서 일본 야구계에서 영구 퇴출될 것으로 많은 일본 야구 원로들과 전문가들이 예상했지만 나카타 쇼는 2021년 8월 20일에 요미우리로 무상 트레이드되었다. 이에 대해 기요하라는 제일 좋은 구단으로 갔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고,[61] 2022 시즌에 나카타 쇼가 부활에 성공하자 기쁘다고 코멘트하는 등 사고 이후에도 변함없이 나카타 쇼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62]
왼쪽이 기요하라, 오른쪽이 이치로 |
* 후배인 스즈키 이치로도 기요하라와 마찬가지로 파벌을 만들면서 평판이 좋지 못했지만 이쪽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로 파벌을 만들 정도로 악명은 있었지만 이치로와는 사이가 괜찮았다. 이치로가 오릭스에서 한창 활약하던 시절부터 친한 형·동생처럼 지낸 사이이며 기요하라 본인도 은퇴 후에는 직접 미국까지 가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던 이치로를 만나는 등, 서로 나이를 먹은 이후에도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 전성기였던 세이부 시절에는 한국의 장종훈과 종종 비유되었다. 기요하라의 세이부 시절이 장종훈의 빙그레 전성기 시절과 겹치고, 비슷한 나이에, 고졸출신 우타거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오히려 다른 점이 더 많다. 기요하라는 은퇴 후 마약으로 체포되기도 하는 등 사생활이 좋지 못 했지만 장종훈은 딱히 그런 부분에서 문제는 없었으며, 고교 시절부터 스타 선수였던 기요하라와는 달리 장종훈은 고졸 연습생 신고선수로 빙그레에 입단해 성공한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또한 여러 팀을 옮겨다닌 기요하라와는 달리 장종훈은 이글스 프랜차이즈의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스타로 영구결번까지 받았고, 또 일본시리즈 우승 경력은 화려하지만 개인 타이틀 측면에서 주요 타이틀을 먹은 적이 없는 기요하라와는 달리 장종훈은 한국시리즈 우승은 단 1회뿐이지만 대신 여러 차례 홈런왕 등 개인 타이틀을 많이 먹어본 편이었다.
- 오히려 은퇴 시점에서의 기요하라를 한국의 프로야구 선수로 비유하면, 장종훈보다는 양준혁과 좀 더 비슷한 위치에 있다. 기요하라는 고졸 데뷔고 양준혁은 대졸에다가 상무를 거쳐서 늦게 데뷔했지만 기요하라와 양준혁 모두 나이가 각각 67년생, 69년생이라서 또래뻘이다. 그리고 둘 다 푸른색 유니폼과 라이온즈 팀에서 뛰었고 리그 우승, 시리즈 우승 경험도 수 차례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둘 다 자국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였지만 이종범, 이승엽, 스즈키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같은 당대 최고의 타자들에게 밀린 2인자 이미지가 강했다. 게다가 기요하라는 머리가 매우 큰 편인데 양준혁도 역시 머리가 크기로 유명하다. 다만 차이점도 있는데 양준혁은 KBO 리그 기준에서는 파워는 물론이고 컨택에 주루까지 갖춘 타자였지만 기요하라는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이긴 했지만 컨택은 그리 좋지 않았다. 또한 양준혁은 기요하라와 달리 타격왕 같은 주요 타이틀을 많이 차지한 바 있다.
- 세이부 시절 경찰의 마약퇴치 포스터에 모델로 등장한 적이 있다. 문구는 "각성제(히로뽕)을 치지 말고(일본어에서는 히로뽕을 하는 것을 각성제(히로뽕)를 치다라고 표현한다), 홈런을 치자라는 문구가 쓰여있고, 기요하라의 타격모습이 게재되어 있다. # 마약퇴치 모델로 나왔던 사람이 실제로 마약을 했으니 기요하라의 마약투약이 발각되고, 일본웹에서 이 포스터 등이 발굴되어 소소하게 화제가 되어서 지금도 이 문구는 인구에 회자 되고 있다.
10. 연도별 기록
역대 기록 (NPB)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AR |
1986 | 세이부 | 126 | 471 | 123 | 18 | 1 | 31 | 66 | 78 | 6 | 49 | 109 | .304 | .392 | .584 | .976 | 4.7 |
1987 | 130 | 536 | 115 | 25 | 3 | 29 | 66 | 83 | 11 | 80 | 88 | .259 | .382 | .525 | .907 | 6.3 | |
1988 | 130 | 551 | 129 | 21 | 0 | 31 | 97 | 77 | 7 | 82 | 102 | .286 | .410 | .539 | .949 | 6.8 | |
1989 | 128 | 557 | 126 | 22 | 2 | 35 | 92 | 97 | 7 | 94 | 60 | .283 | .424 | .578 | 1.002 | 6 | |
1990 | 129 | 560 | 134 | 19 | 2 | 37 | 99 | 94 | 11 | 105 | 85 | .307 | .454 | .615 | 1.068 | 7.4 | |
1991 | 126 | 539 | 121 | 20 | 0 | 23 | 73 | 79 | 3 | 80 | 77 | .270 | .390 | .469 | .859 | 4.2 | |
1992 | 129 | 556 | 134 | 17 | 0 | 36 | 82 | 96 | 5 | 85 | 98 | .289 | .401 | .558 | .959 | 6 | |
1993 | 128 | 540 | 120 | 15 | 1 | 25 | 66 | 75 | 3 | 84 | 120 | .268 | .389 | .473 | .862 | 5.3 | |
1994 | 129 | 565 | 127 | 29 | 0 | 26 | 78 | 93 | 5 | 100 | 117 | .279 | .441 | .514 | .925 | 5.1 | |
1995 | 118 | 505 | 99 | 13 | 3 | 25 | 63 | 64 | 2 | 90 | 111 | .245 | .392 | .478 | .870 | 4.8 | |
1996 | 130 | 563 | 125 | 30 | 0 | 31 | 67 | 84 | 0 | 70 | 122 | .257 | .357 | .509 | .866 | 3.9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AR |
1997 | 요미우리 | 130 | 550 | 115 | 24 | 0 | 32 | 65 | 95 | 0 | 69 | 152 | .249 | .356 | .509 | .865 | 3.5 |
1998 | 116 | 470 | 103 | 14 | 0 | 23 | 67 | 80 | 1 | 67 | 76 | .268 | .379 | .484 | .863 | 3.3 | |
1999 | 86 | 323 | 62 | 12 | 0 | 13 | 39 | 46 | 4 | 46 | 68 | .236 | .365 | .430 | .795 | 1.4 | |
2000 | 75 | 252 | 64 | 10 | 0 | 16 | 41 | 54 | 0 | 18 | 51 | .296 | .385 | .565 | .950 | 2.5 | |
2001 | 134 | 552 | 139 | 29 | 0 | 29 | 67 | 121 | 0 | 65 | 140 | .298 | .396 | .546 | .942 | 3.4 | |
2002 | 55 | 174 | 47 | 1 | 0 | 12 | 24 | 33 | 0 | 18 | 36 | .318 | .414 | .568 | .982 | 2 | |
2003 | 114 | 403 | 99 | 9 | 0 | 26 | 47 | 68 | 0 | 42 | 97 | .290 | .390 | .545 | .935 | 1.9 | |
2004 | 40 | 120 | 23 | 2 | 0 | 12 | 18 | 27 | 0 | 15 | 41 | .228 | .350 | .604 | .954 | 0.5 | |
2005 | 96 | 375 | 68 | 6 | 0 | 22 | 42 | 52 | 0 | 41 | 111 | .212 | .317 | .436 | .753 | 0.1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AR |
2006 | 오릭스 | 67 | 203 | 45 | 7 | 0 | 11 | 21 | 36 | 0 | 36 | 83 | .222 | .340 | .419 | .759 | 0.6 |
2008 | 22 | 22 | 4 | 2 | 0 | 0 | 0 | 3 | 0 | 3 | 11 | .182 | .280 | .273 | .553 | -0.1 | |
NPB 통산 (22시즌) |
2338 | 9428 | 2122 | 345 | 12 | 525 | 1280 | 1530 | 59 | 1346 | 1955 | .272 | .389 | .540 | .909 | 79.4 |
11. 관련 문서
[1]
1981~1988년까지 양대리그에서 승리타점(결승 타점)이 가장 많은 선수에게 주던 타이틀로, 1989년부터 양대리그 모두 타이틀을 폐지,
센트럴리그에서만 특별상 형식으로 시상하다가 2000년을 끝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2]
2016년 이후 머리를 길렀다. 출처는 스포츠 잡지 Number와의 인터뷰. 단 2019년부터 다시 밀었다.
[3]
일본시리즈 등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센트럴 리그 팀 홈 경기에서는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가 1루를, 기요하라가 3루를 보기도 했다.
[4]
光り輝く 日はまた昇る 燃える男だ チャンスに強いぞ清原(눈부시게 빛나라 해는 또다시 뜬다 불타는 사나이다 찬스에 강하다 기요하라) 해당 가사는 1990년부터 요미우리 이적 전인 1996년까지 사용했으며 현재는 세이부의 찬스테마 2번으로 사용되고 있다.
[5]
1990년 이전 가사는 다음과 같다. 光り輝く 大空高く 燃える男の チャンスに強い清原(눈부시게 빛나라 넓은 하늘 저 높이 불타는 사나이인 찬스에 강한 기요하라) 이전에 쓰던 응원가에서 멜로디는 유지한채 가사만 바꾸었다.
[6]
여담으로 이 원곡이 우리나라 학교 종소리8번의 원곡이기도 하다.
[7]
전주: ジャイアンツの ジャイアンツの 旗のもと(자이언츠의 자이언츠의 깃발 아래) / 1998년 시즌 도중 응원가 가사 변경과 함께 추가된 전주로, 197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다룬 애니메이션
사무라이 자이언츠의 주제가 끝부분을 가사까지 그대로 가져왔다. 전주 추가 후에도 CD판에선 해당 전주가 미수록되었다.
[CD판]
薮から虎出る 空に竜 鯉を叩いてベイを退治 一気呑みヤクルト(
덤불에서
호랑이가 나온다 하늘엔
용이
잉어를 때려잡고
베이를 퇴치 원샷이다
야쿠르트), 해당 응원가는 CD 버전과 구장 버전이 따로 있는데 CD 버전은 말그대로 센트럴 리그 상대팀(+야부)을 때려잡자는 내용이다. 다만 이적 첫 해인 1997년엔 CD판 가사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다음 해인 1998년 시즌 도중 실제 구장에서 연주되는 응원가에 한해 가사가 바뀌었다. 링크는 CD판 버전으로 CD판은 키요하라의 퇴단 때까지 해당 가사를 유지했다.
[구장판]
勝利の一撃 空高く 放り込めバットに夢乗せて ホームラン清原(승리의 일격을 하늘 높이 때려넣어라 배트에 꿈을 싣고서 홈런 키요하라) / 앞 각주에서 상술했듯이, 1998년 시즌 도중 실제 구장에서 불리는 응원가 한정으로 가사가 바뀌었다.
[10]
闘え士(つわもの)よ 傷だらけのその体で輝けこの場所で 威光放つ男(싸워라 용사여 상처투성이의 그 몸으로 빛나라 이 곳에서 위광을 발하는 사나이)
[11]
대장, 캡짱, 대빵, 두목 등의 의미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12]
이에 대해
장훈은 "눈 앞에 있으면 후려쳐주고 싶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
[13]
이들은 'KK 콤비'로 불리며 고교야구를 제패하고 프로 무대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에서
오마주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14]
1965~1973까지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
[15]
난카이 호크스,
긴테츠 버팔로즈,
닛폰햄 파이터즈,
한신 타이거스, 세이부 라이온즈,
주니치 드래곤즈가 기요하라를 1순위로 지명했다. 그리고 기요하라는 세이부行.
[16]
이 당시 쿠와타의 요미우리 지명 소식에 격분한 기요하라가 쿠와타를 손 봐주겠다며 이리저리 찾아다니자 기요하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PL 학원 야구부 3학년 전원이 나서서 2시간 동안 배팅볼을 던져줬다는
썰이 있다.
[17]
당시 마운드에 있었던 투수
쿠도 키미야스가 회고하기를, 자신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어떤 세레머니를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울고 있는 기요하라를 본 순간 어떻게든 1루수 쪽으로 타구가 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결국 마지막 아웃카운트는 중견수였던
아키야마 코지가 중견수 뜬공을 잡으며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참고로 쿠도는 요미우리에서 기요하라와 재회했다.
[18]
그리고 오치아이는 기요하라가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오자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해 거기서 은퇴했다.
[19]
이 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가 선수노조 파업으로 인해 월드 시리즈를 포함한 포스트시즌 일정이 전면 취소되는 바람에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 등지에서도 관심이 쏠렸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 표지에
세이부 라이온즈의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등장하고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전 경기가 중계되었을 정도.
[20]
이는 1953년
토요다 야스미츠가 기록한 고졸 신인 시즌 최다 홈런 기록(27홈런)을 경신한 것이기도 하다. 토요다는 기요하라의 팀 대선배이다.
[21]
말년에는 4번타자였던 이승엽과도 한솥밥을 먹었다.
[22]
기요하라가 요미우리에 이적했던 1990년대 후반에는 히로사와 카츠미+잭 하웰(전 야쿠르트 4번), 이시이 히로오(전 킨테츠 4번), 도밍고 마르티네스(전 세이부 4번) 등이 비슷한 시기에 요미우리로 이적했으며 대부분은
먹튀로 전락했지만, 커리어 하이급 성적을 1번 찍고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걸다 방출되었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에토 아키라(전 히로시마 4번),
로베르토 페타지니(전 야쿠르트 4번),
터피 로즈(전 킨테츠 3번),
고쿠보 히로키(전 다이에 4번) 등이 비슷한 시기에 요미우리로 이적한데다
마츠이 히데키,
타카하시 요시노부 등 요미우리 순혈 강타자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23]
여담으로 이승엽은 기요하라와 생일이 똑같다.
[24]
앞타자들이 워낙에 강타자들이 즐비한것도 큰 원인이었다. 특히 세이부에선 팀 선배이자 함께 클린업을 이룬 호타준족 강타자
아키야마 코지가 앞 타순에서 타점을 적립했던 게 컸다. 요미우리 시절에는 부상 등의 여파로 성적의 기복이 다소 심했던 데다
마츠이 히데키와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대두했던 것도 크고...
[25]
하지만 오기 감독은 2005년 12월
폐암으로 사망했다.
[26]
'
RUN'으로 유명한 일본의 가수. 기요하라와는 절친한 사이로, 은퇴 사실도 그에게 가장 먼저 밝혔다고 한다.
[27]
여담으로 나가부치 츠요시 본인이 직접 출연한 드라마 이름이기도 하다. 최고 시청률 21.8%를 기록한 유명 야쿠자 드라마이며, 사실상 나가부치 츠요시를 스타로 만들어준 기념비적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의 주제곡이 바로 나가부치가 직접 만들고 노래한 동명의 곡 톤보이다. 이 곡도 커리어 첫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 곡은 훗날 한국 가수
홍수철에 의해 '보고싶다 친구야'라는 곡으로 표절당하기도 했다. 표절 이후 장본인 홍수철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홍수철 문서 참조.
[28]
이날 관중석에는 쿠와타와 오 사다하루 뿐만이 아니라 고교 시절 당시 야구부 감독이었던 나카무라 준지, 그의 현역 초창기 시절 은사였던
도이 마사히로를 비롯해
스즈키 이치로,
추성훈, 배우 후지와라 노리카, 시모야나기 츠요시 등이 관중석에서 포착되었다.
[29]
이날 경기에서 기요하라의 타석마다 세이부, 요미우리, 오릭스 시절의 응원가가 일제히 연주되었다. 타팀의 응원가를 은퇴 경기에서 사용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이런 점에서 당시 기요하라의 전국적인 인기를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30]
결혼했으니 정식 이름은 "기요하라 아키"이다.
[31]
일본 뉴스에서는 각성제라고 보도되었으나, 일본에서는 마약류를 각성제라고 표현하며, 대한민국의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해당하는 법률의 이름이 '각성제취제법(覚醒剤取締法)'이다.
[32]
이 당시 TBS는 연일 독점 영상을 보도했는데, TBS 라디오의 Session-22에서는 약물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약물 중독자 치료 시설 어드바이저를 초청해서 토론하기도 했다.
[33]
참고로 그도 2006년 각성제취제법 위반죄로 경찰에 체포돼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노무라에 따르면 그가 체포된 후 기요하라가 전화해서 "나에 대한 걸 경찰에 말하진 않았지?"란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34]
사진은 2016년 2월 2일 체포되어 차로 연행되는 장면을 찍은 사진.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의 처참한 몰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씁쓸한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35]
물론 이 기간 동안에도 비영리적으로써 비공식적이나 재능기부 형식으로 학생들을 계속 지도해왔다고 한다. 이런 형태는 징계 중에도 가능하다.
[36]
신조 츠요시의 감독 취임회견과 관련해 언급한 내용들이 매우 구시대적이고 꼰대스럽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다만 앞서 말했듯 장년층이 선호하는 채널인지라 지지기반이 워낙 탄탄해서 유튜브 활동에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37]
다만 키요하라
수석 코치 선임썰과는 별개로,
카타오카도 코칭에서는 평이 최악을 달린다.
[38]
1위는
나카무라 다케야
[홈런]
기록 시즌 최고 홈런이 1992년의 37홈런인데 이해 리그 홈런왕은 팀 동료인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41홈런)였으며 1995년
다이에 호크스의
고쿠보 히로키가 28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했을 때에는 25홈런밖에 못쳤고 1996년에는 31홈런을 쳤는데 당시
오릭스 블루웨이브 소속이었던
트로이 닐(2001년
두산 베어스에서도 뛰었으나 두산에서는 17경기 .193 1홈런 3타점만 기록하고 폭행사건에 휘말려 퇴출)이 32홈런을 쳐서 딱 1개차로 밀렸다...
[타점기록]
상술했듯 시즌 최고 타점이자 유일한 100타점 이상 기록은 요미우리 시절이었던 2001년의 121타점, 하지만 그 해엔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로베르토 페타지니(127타점)에게 밀려 타점 2위에 그쳤다. 세이부 시절 최고 타점인 96타점을 기록한 1992년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부머 웰즈에게 딱 1점차로 밀려서 타점왕을 놓쳤고,
스즈키 이치로를 포함, 무려 3명의 공동 타점왕(그것도 고작 80타점)이 나온 1995년엔 타율 .245 25홈런 64타점으로 다소 부진했던 바람에..
[41]
그 외에도 올스타전 MVP 통산 7회 수상으로 일본프로야구 1위 기록이다. 다만 일본프로야구는 올스타전을 시즌당 1경기만 하는게 아니라 2, 3경기를 한다. 한국
KBO 리그도 80년대에는 그랬던 적이 있긴 하다.
[42]
NPB 통산 홈런 1~4위는
오 사다하루,
노무라 카츠야,
카도타 히로미츠,
야마모토 코지.
[43]
특히 이 시즌에
선동열과의 맞대결은 전부 삼진으로 끝났다. 그 때문에 요미우리는 9월 초까지 꼴찌에서 맴돌았다.
[44]
도이 마사히로도 기요하라처럼 고졸 신인 1년차 때부터 4번 타자로 뛰었고 현역 시절 통산 465개의 홈런과 2,452개의 안타를 기록한 강타자다.
[45]
물론 야구에 만약이란 없다. 그리고 오다는 미트질이 좋다곤 해도 공격은 완전 자동 아웃 수준이었으니...
[46]
거기다 이 여파인지는 몰라도 이 해 세이부는 불과 승률 2리(0.002) 차로
킨테츠 버팔로즈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며 리그 5연패 달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47]
이때 호시노가 기요하라에게 던진 말은 "이미(벤치 클리어링) 끝났어 바보자식아!" 그것도 그런게 당시 벤클에서 엄청 늦게 나오고 허리띠를 주섬주섬 매며 동네 마실 나가듯 나갔으니...
[48]
공교롭게도 톰 데이비와 기요하라는 2006년 오릭스에 입단하여 2008년까지 재적하여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오릭스 시절에는 부상도 있긴 했지만 톰 데이비 때문에 요미우리 시절의 반쵸 기질을 나타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49]
한국어로 직역하면 "붙어(는) 있냐?"라고 말한 것.
[50]
덤으로 기요하라는 이 일과 관계 없는
터피 로즈까지 끌고 오면서 "터피도 질렸다더라"라고 후지카와를 깠다
[51]
기요하라는 8일 후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원정 경기에서 통산 500홈런을 달성했다.
[52]
"타마타마데스" - 직역하면 "우연입니다" 라고 한 것.
[53]
그럴 때는 보통 킨타마(金玉, 금구슬)이라는 비속어가 쓰인다. 이 단어가 나오면 옆 사람이 그만 하라고 오디오를 물리면서
츳코미를 날리는 것이 일본 예능의 주요 패턴.
[54]
사건 당시 한신 포수가 야노였고 야노는 후지카와의 은퇴식 당시 한신의 감독이기도 했다.
2005년 4월 21일자 요미우리 vs 한신 경기 기록표
[55]
일본의 국민체육대회는 2006년부터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도 참가할 수 있게 됐지만 그 이전까지는 외국인은 절대 참가할 수 없는 대회였다. 그래서 대만 국적의
오 사다하루는 고교생 시절에 국민체육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56]
1학년 때
유급하여 2024년에는
고시엔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
[57]
오다 코헤이 문서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모토키 다이스케와 더불어 선수 시절 오다 코헤이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장본인이 기요하라지만, 오다 입장에서는 기요하라가 나와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어마어마한 스타인 기요하라가 게스트로 나오면 조회수 떡상은 일도 아니기 때문. 실제로 기요하라가 나온 편만 조회수의 자릿수가 다르다. 기요하라 입장에서도 오다를 괴롭힌 것도 어쨌든 귀엽게 여기니까 괴롭힌 것. 기요하라의 괴롭힘은 정도가 너무 심해서 그럴 뿐 똥침이나 망신주기 같은 우스운 장난이 많았지, 구타나 험악한 욕설같은 정말 음습하게 악의가 담긴 이지메는 아니었다. 그런 후배가 유튜브를 한다고 하니 선배로서 돕기 위해 출연해준 것. 실제로 오다의 유튜브에 기요하라의 요미우리 시절 오다와의 일화를 폭로(?) 하는 컨텐츠 영상은 어마어마한 조회수 신기록을 세웠다!
[58]
나카타 쇼는 평소 기요하라를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고 기요하라 또한 나카타 쇼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바 있다.
관련 기사
[59]
이구치 카즈토모이며 대졸 불펜 유망주다. 이구치가 뇌진탕 증상이 일어나서 일이 커졌고 그 뒤에 다른 후배들도 나카타 쇼의 장난에 불만을 호소하기도 했다.
[60]
기요하라도 현역 때 모토키와 함께 악질적인 장난을 많이 쳤지만 최소한 외부에도 알려질 정도의 폭행까지는 없었는데 나카타 쇼는 장난의 강도도 이미 기요하라를 한참 넘었다.
[61]
관련 기사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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