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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1:48:26

걸프 전쟁

사막의 폭풍 작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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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Gulf War
حرب الخليج الثانية
أم المعارك
حرب تحرير الكوي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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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990년 8월 2일 ~ 1991년 2월 28일
장소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페르시아만
원인
이라크 쿠웨이트의 분쟁 심화
결과
다국적군의 승리
영향
쿠웨이트의 국권 회복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수
페르시아만의 환경 오염
이라크 영공 내 비행금지구역 설정 및 남부 감시 작전 시행
교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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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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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하산 알 마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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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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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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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다국적군 956,600명[3] [[틀:깃발|]][[틀:깃발|]][[이라크군|]] 650,000명
군사적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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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292명 전사
776명 부상
전차 31대 파괴 및 손상
M2 브래들리 전투차 28대 파괴 및 손상
M113 장갑차 1대 파괴
영국군 수송차 2대 파괴
야포 1문 파괴
항공기 75기 격추
[[틀:깃발|]][[틀:깃발|]][[쿠웨이트군|]]
420명 전사
12,000명 포로
전차 200대 파괴 및 노획
차량 850대 파괴 및 노획
항공기 57기 격추
항공기 88기 노획
선박 17척 격침
선박 6척 노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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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틀:깃발|]][[이라크군|]]
20,000~50,000명 전사
75,000명 이상 부상
80,000명 포로
전차 3,300대 파괴
수송차 2,100대 파괴
대포 2,200문 파괴
항공기 110기 격추
선박 19척 격침
선박 6척 손상
}}}}}}
민간인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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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틀:국기|]][[틀:국기|]]
1,000명 이상 사망
600명 실종

[[이스라엘|]][[틀:국기|]][[틀:국기|]]
[[사우디아라비아|]][[틀:국기|]][[틀:국기|]]
75명 사망
309명 부상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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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191919>[[틀:깃발|]][[틀:깃발|]][[이라크|]]
3,664명 사망
}}}}}}

1. 개요2. 명칭3. 전쟁의 원인4. 전쟁 과정
4.1. 발단: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4.2. 전개: 사막의 방패 작전4.3. 절정: 사막의 폭풍 작전4.4. 지상전역 돌입: 사막의 기병도 작전
4.4.1. 죽음의 고속도로4.4.2. 승리 임박
4.5. 결말: 완벽한 승리
5. 종전 이후
5.1. 패전 이후의 이라크5.2. 잘못된 교훈5.3. 이후의 쿠웨이트5.4. 이라크 전쟁 후
6. 전쟁사적 의의
6.1. 언론의 역할
7. 기타
7.1. 걸프전 증후군
8. 세기말 아마게돈?9. 걸프전과 한국10. 대중문화11.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white CNN의 사막의 폭풍 작전 실시간 보도화면과 당시 컨트롤 룸}}}
1분 37초경 사막의 폭풍 작전 개시를 알리는 공습 경보가 울린다.
1991년 1월 17일부터 1991년 2월 28일까지 벌어진, 이라크 다국적군 사이의 전쟁이다. 다국적군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군을 격퇴하고 이라크에게 강제 병합 쿠웨이트 독립 주권을 회복하였다.

한국 역시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의료진과 군수송기 등 비전투병들을 파병했다.

2. 명칭

걸프(gulf)는 바다(灣)을 의미하며[4]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은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 그래서 1차 이라크 전쟁 혹은 페르시아 만 사태로 부르기도 한다.

중국, 일본, 북한에서는 각각 '해만전쟁(海灣戰爭)', '만안전쟁(湾岸戦争 わんがんせんそう)', '페르샤만전쟁(Persia灣戰爭)'이라고 한다. 북한의 경우, 줄여서 '만전쟁'이라고 하는 경우가 잦다.

한국에서도 언론보도 초기에는 페르시아만 사태, 페르시아만 전쟁이라고 불렀다가, 걸프 주변국의 명칭 분쟁 때문에 걸프 전쟁이라는 명칭을 바꾸었다.[5]

걸프(gulf)는 만을 뜻하는 영어 일반명사로서 한국어 명칭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페르시아 만'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서 'gulf'의 용법이 새로 생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Gulf'라고 대문자로 쓰는 것이기도 하다.

3. 전쟁의 원인

갑작스럽게 발생한 전쟁이었기에, 국제정세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과 그 배경에 다양한 가설과 주장들을 내놓았다. 미국 국무부에서 설명하는 걸프전 문서도 참조. 확실한 것은 후세인은 처음부터 미국과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고 자신이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미국이 묵인할 것이라고 망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고 전쟁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자 이번에는 소련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근거없이 믿었지만 당시 소련도 남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기에 그냥 무시했다.[7] 그러자 이라크는 미국과 소련을 다 비난하며 사실상 전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꼴이 된다.

사담 후세인은 공식적으론 쿠웨이트가 자신들의 석유를 훔쳐가는 건 물론 석유를 과잉 공급하여 이라크 경제를 위협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후 전비 조달 등으로 지게 된 막대한 차관상환 부담 등 국내외적으로 경색상태인 이라크의 국정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또한 전쟁의 원인은 목적과 다르지 않다. 미국의 대 중동정책과도 관련있지만, 미국은 현 상태를 유지해서 안정적인 석유공급을 확보하는 것이 중동문제를 접근하는 시각이다. 여기에서 석유의 시레인(sea lane)이 나오는 것이고 시레인을 유지하기 위해 전세계 바다에 미국의 함대를 파견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 목표를 유지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미국은 지역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예를 들어 팔레비의 몰락 이후 이란 제재를 발동했고,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 무자헤딘을 지원한 것도 설명된다. 아프간 전쟁 내내 미국과 이슬람 수니파에서는 무자헤딘을 지원했고, 소련의 영향력이 중동으로 확장되면 곧바로 시레인이 위협받는다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미국이 중동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고 친소련 정책을 취할까봐 리비아 카다피, 시리아 아사드, 이라크 후세인 같은 독재자들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즉 미국의 목표는 현상태 유지와 석유의 안정적인 수송로 확보였고,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시간을 끌면 미국은 시레인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 점령을 인정받으리라는 오판을 한 것이다. 애초에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라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인구, 면적, 군사력, 경제력 등의 모든 요소를 비교해도 이라크가 이길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8년이나 전쟁이 지속되며 이라크는 1,000억 달러에 이르는 부채를 지게 되었다. 이 중 140억 달러 정도가 쿠웨이트의 채권이었고,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점령 또는 친 후세인 정권을 세움으로 부채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전쟁 양상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도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잘 드러난다. 이라크군이 대량으로 학살된 '죽음의 고속도로'에서도 나타났고, CNN 중계 역시 미국의 압도적인 물리력을 선전할 뿐 중동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걸프전에서 승리했음에도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세인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않는 결과를 보인 것이다.

다만 아버지 부시 정부의 후세인 온존 결정은 미국 내에서도 불만이 있었는지 아들 부시 정부때는 끝내 후세인을 없애버렸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글자 그대로 지역에 헬게이트를 열어젖힘과 동시에 레바논-시리아-이라크-이란이라는 반미 시아파 벨트를 완성시켰고, 이에 아라비아 반도 이남의 수니파 국가들이 반응하면서 즉, 미국은 여전히 중동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지만 예전처럼 주도권을 행사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국익에는 후세인이나 아사드가 존재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결과가 돼버렸다.[8][9]

4. 전쟁 과정

파일:April-1990-President-of-I-033.jpg
전쟁 얼마 전인 1990년 4월, 군대 앞에서 연설 중인 사담 후세인
오직 미국만이 가능한 전쟁… 걸프전![10]

4.1. 발단: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파일:쿠웨이트 침공.jpg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이라크군 탱크들

1990년 8월 2일 새벽 2시, 이라크군은 최정예 공화국수비대 소속 3개 기갑사단(함무라비, 타와칼나, 메디나)을 주력으로 한 7개 사단, 10만 대군을 4개 공격축선으로 배분하여 전 국경에 투입하는 총공세를 기습적으로 감행했다.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완벽한 이 기습으로 이라크와의 갈등을 흔한 주변국과의 분쟁 정도로 생각하고 전쟁은 생각치도 않고 있었던 쿠웨이트군은 전쟁 준비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으므로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했다. 물론 전면전 상황이라는 사실을 미리 파악한다고 해도 애초부터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력 차를 감안할 때 승리가 거의 불가능했고 대군의 기습에 대응하기에는 종심 자체가 너무 얕았다. 어쨌거나 3만에 불과한 쿠웨이트군은[11] 곳곳에 분산된 채 각개격파당하고,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동시에 이라크군은 헬리콥터 공중강습 부대를 투입하여 전격적으로 쿠웨이트의 주요 공항과 활주로들을 점거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국경을 차단한 데 이어 해군으로 이름뿐인 쿠웨이트 해군을 격파하여 쿠웨이트를 외부와 차단하였다.

그 다음엔 쿠웨이트의 수도 쿠웨이트 시티를 공격한다. 이 와중에 쿠웨이트 왕실이 거주하는 다스만궁으로 이라크군의 맹공이 펼쳐졌다. 개전과 동시에 벌어진 이라크 특수부대의 1차 공격을 격퇴하고, 오전 5시에 감행된 이라크 해군 육전대의 공격까지 막아낸 쿠웨이트군이었으나 결국 시가지를 장악한 이라크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전차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쿠웨이트군은 더는 막아내지 못하고 수비부대 병력 대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이때 쿠웨이트군 사령관인 왕제 셰이크 파우드 알 아마드 알 사바는 국왕과 나머지 왕족들을 피신시킨 후 남아서 수비대를 지휘하다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이라크는 같은해 8월 8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합병을 선포[12]하고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주인 쿠웨이트 주로 삼았다. 그 다음엔 쿠웨이트 국회 해산, 공항과 항구 폐쇄, 무기한 통금령 발동, 왕정 폐지 및 공화정 수립[13], 화폐 통합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강제 합병에 쿠웨이트인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어 이라크 점령군에 대항해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물론 이라크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한 진압을 했고 이와중에 많은 쿠웨이트인들이 이라크군에게 학살당했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를 조직적으로 약탈해서 재화와 박물관의 유물들을 이라크로 싣고 갔고 기존 쿠웨이트의 신분증을 모두 무효화하면서도 이라크 신분증을 신속하게 지급하지도 않아 사실상 쿠웨이트를 경제적 식민지로 삼아 수탈했다. 이라크 신분증이 없는 쿠웨이트 시민들은 생필품과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모두 차단되었고 이라크 신분증이 있는 사람들도 현저한 차별을 받았다. 그리고 의사를 비롯한 이라크에 필요한 엘리트들도 납치되어 이라크로 끌려갔다. 외노자들의 대우는 더욱 처참했는데 이라크군은 병원을 점거하고 병원에서 일하던 필리핀 간호사들을 집단 성폭행해서 미국 의회에서도 나중에 문제가 될 정도였다.

4.2. 전개: 사막의 방패 작전

파일:사우디 사막 행진.jpg
사우디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미군들

미국은 이라크가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를 병합한 것에 크게 반발하며[14] 이라크에게 당장 쿠웨이트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국제연합에서도 이라크에 쿠웨이트에 대한 합병 철회와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철군시한은 1991년 1월 15일까지였다. 이 결의안 채택과 함께 이라크에 경제 제재가 가해졌다. 그러나 이라크는 배급제를 시행하며 버텼고[15] 국민들이 전쟁에 익숙해서 평소 8~10개월분 식량을 가정마다 비축해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식당은 무기한 영업정지 조치를 내려 식량 반출을 막았고 사재기를 엄하게 단속해 사재기하다 적발된 사재기업자들은 최소 징역 15년 형 이상의 중형에 처하는 엄벌을 내렸다. 거기다 접경 국가들로부터 밀수가 이뤄져 경제 제재의 효과가 없었다.

이렇듯 후세인의 야욕이 명백해지자 미국은 사막의 방패 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을 통해 1차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보호해 교두보로 삼기로 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만인 8월 9일 이미 2개 여단의 공수부대가 빠르게 전개되었으며, 추가적으로 아파치 헬기등의 항공전력을 배치하여 방어를 굳건히 했다.

당시 세간에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무적이자 세계의 경찰 지위가 아니라는 인식이 많았고 사담 후세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과 미국 내에서도 걸프전이 베트남전의 재림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으며, 과연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베트남전은 사실상 미국이 치렀던 전면전으로는 마지막으로 치른 전쟁이었다. 물론 그 후에도 여러 군사작전은 전개됐었지만 파나마 사태는 국지전으로 치러진 소규모 작전이었다는 점에서 그다지 부각되지는 않았다. [16]

게다가 당시 이라크군은 중동의 군사강국으로 100만이 넘는 대규모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지금의 북한군보다도 뛰어난 수준이었다. 특히나 수도 바그다드의 방공 능력은 저고도 구형 위주라고는 해도 웬만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 뺨치는 수준으로, 바그다드보다 방공망이 강력한 곳은 모스크바, 바르샤바, 평양[17], 캄차카반도 등 모두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미군은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큰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전에 중부사령부[18]에서 걸프전과 유사한 시나리오로 실시한 워게임에서 져버린 적이 있는 데다, 쿠웨이트에 주둔한 이라크 병력은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증강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미군 중부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는 개전 전까지 휘하 병력을 2배로 늘리고, 서유럽 방위의 중핵이나 다름없던 육군 제7군단의 배치를 요구했다. 당시 미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 장군도 이라크군의 전투력이 상당하리라고 판단하여 중부사령부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였고, 거기에 본토에 대기하고 있던 제1보병사단을 추가로 더 얹어준다.

미군은 자국의 정예 병력들은 물론 다수의 최신예 병기와 동맹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서 전 세계의 친미 국가들이 거의 대부분 참여했으며, 영국, 프랑스의 병력 파견을 이끌어냈다. 이들은 ' 다국적군'으로 불리며 사령관은 슈워츠코프 중부사령관이 맡았다.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드문 규모의 '다국전'이기도 하다. 이걸 보면 납득이 가는데, 우측의 교전국에서 다국적부대의 숨겨진 항목을 열어보면 된다. 그야말로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일방적인 다굴전(…)이다.

미국은 이 전쟁을 길게 끌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엄청난 손실을 본 적도 있었고, 베트남전의 악몽도 있었으며, 10월부터 4월까지 기간에 맞춰 전쟁을 끝내야 더운 기후로 인한 전투력 저하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맞춰 철저한 작전 계획인 헤일 메리 기동과 정예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섬멸 및 쿠웨이트의 해방이 목표로 세워졌으며, 속전속결을 의도하였다. 파월 의장이 유럽 전선에서 최정예 군단을 빼서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들어준 것도, 거기다 본토의 사단을 더 얹어준 것도 압도적인 전력으로 빨리 전쟁 목표를 달성하고 빠져나오라는 뜻이었다.

미군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쉽게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전사자들을 담기 위해 만 단위의 시체 수습용 바디백을 준비했고, 전문가들 역시 엄청난 수의 전사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체적으로 추정한 전사자 수만 무려 3만 명에 달했으므로 주머니 재고가 부족할 거 같아서 부랴부랴 1만 개를 더 질러서 쌓아두었다. 전후에 보면 다행스럽게도 불필요한 작업이 되었다. 비슷한 일로, 미군은 전차포탄 소요량을 대규모 소모전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 무려 22만 발가량으로 어림잡고 보급망으로 미친 듯이 실어날라 쌓아놨는데 그중에서 실제로 쏜 건 고작 수천 발 수준이었다. 100만의 군대를 철저하게 준비한 몰락 작전보다도 더 철저할 정도로 미군 역사상 전쟁 규모 대비 전쟁 준비가 이 정도로 철저한 경우도 없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수십만의 미군의 대규모 해외 파병[19]을 하게 되어 병참 소요가 천문학적으로 엄청났는데 미 육군 제22지원사령부 사령관 겸 중부사령부 군수참모부장이던 윌리엄 파고니스 육군 소장이 초기에 현지 배치되어 총지휘를 했고, 파고니스 장군의 노력으로 미군은 병참상의 혼란 없이 전쟁을 잘 치렀다. 파고니스 장군은 공로를 인정받아 사우디 현지에서 중장으로 조기 진급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쓰였던 생화학무기가 위협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미군은 M1 에이브람스 전차의 엔진의 열로 화학 무기를 제독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였으며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투병력을 파견한 영국, 프랑스도 각각 챌린저 1, AMX-30B2 전차 엔진열로 화학 무기를 제독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 것은 후세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미국을 소모전으로 몰아넣어 일정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게 되면 미국 내 반전주의 여론 때문에 미국이 손을 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1980년대까지 전 세계에서 벌어졌던, 그리고 각국이 준비했던 전쟁의 양상인 소모전식 전쟁을 생각하면 심각할 정도로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들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 1990년 12월 부터는 이라크, 쿠웨이트에 억류되어 있던 서방인들의 출국을 허용하면서 미국의 반전 여론을 부추기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후세인이 간과했던 것은 바로 부시 정부는 사막의 방패 작전을 펼치는 동시에 자국의 반전 여론을 돌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여론은 이라크의 침공에 분노했지만 반전여론이 좀 더 강력했다. 1990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부시 행정부가 패배하면서 기세가 오른 민주당은 부시 행정부의 참전 움직임에 청문회에서 과연 군사적 행동이 옳은가에 대해 추궁하였다. 이때 청문회에 참석하여 미군 투입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힌 사람 중에는 케네디 정부의 국방부 장관이자 베트남 전쟁 참가 결정의 주역 로버트 맥나마라도 있었다. 이러한 반전 여론을 뒤집은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나이라 알 사바라는 15살 소녀였다. 중간 선거 조금 이전인 10월 10일 나이라 알 사바는 의회에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이라크의 악행을 고발하였다.
친애하는 의장님과 의원 여러분, 저는 나이라라고 하며 방금 막 쿠웨이트로부터 빠져나왔습니다.어머니와 저는 8월 2일 평화로운 여름을 쿠웨이트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희 언니는 7월 29일 임신을 하였고 저희 가족은 그녀와 쿠웨이트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저는 제 10학년 친구들이 저와 같은 여름방학을 보내지 않았길 바랄 뿐입니다. 저는 가끔 제가 빨리 자라서 어른이 되길 원했습니다. 제가 제 조국 쿠웨이트와 쿠웨이트의 아이들에게 생긴일을 보면서 저의 인생, 모든 쿠웨이트의 어른, 어린이, 노인들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제 언니는 5살 조카와 안전을 위해 사막을 건너갔습니다. 쿠웨이트에는 아기를 위한 우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차가 고장났을 때 간신히 사우디 아라비아의 도움을 받아 사막을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뒤에 남아서 제 조국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길 원했습니다. 전쟁 발발 2주후 저는 12명의 저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Alldar 병원에 지원했습니다. 제가 제일 어린 지원자였습니다. 대부분 20~30세의 어른들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있는 동안 저는 이라크 병사들이 병원으로 무장을 한채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기들 인큐베이터에서 꺼내더니 죽도록 차가운 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태어난 제 조카가 저렇게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병원을 떠난 뒤 친구들과 이라크군을 규탄하는 전단지를 배포하였는데 이라크 군이 본다면 죽일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그만두었습니다,
이라크인들은 쿠웨이트의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슈퍼마켓의 음식, 약국의 약, 공장의 의료 보급품과 쿠웨이트 인들의 집을 약탈했고 제 친구들과 이웃들을 고문했습니다.
저는 이라크 군으로 부터 납치되어 고문받은 뒤 풀려난 제 친구를 보고 대화를 나누었었습니다. 그는 22살이었지만 훨씬 나이가 들어버린 얼굴이었습니다. 이라크 군들은 그를 익사하기 직전까지 물에 얼굴을 박았었습니다. 이라크 군들은 그의 손톱을 뽑아버리고 그의 신체부위를 전기 고문했습니다. 그가 죽지않은 것이 행운이었습니다.
만약 이라크 군이 이웃에서 죽은 채로 발견이 된다면 마을 전부를 불태우고 전소될 때 까지 소방관들이 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라크 군들은 부시 대통령을 조롱하며 언어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쿠웨이트를 탈출하는 저와 저희 가족을 괴롭혔습니다. 우리는 쿠웨이트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탈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숨게하고 우리 국가와 정부를 상징하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했습니다.
저는 쿠웨이트가 저희의 어머니이며 아버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이 말을 쿠웨이트의 저희 집 지붕에서 이라크 군이 저희를 쏠 때까지 계속 외칠 것이며 반드시 그렇게 반복할 것입니다. 저는 제가 15살인 것이 자랑스럽고 쿠웨이트가 사담 후세인에게 파괴당하기 이전을 기억하고 다시 재건할 수 있을 만큼 어린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1990년 10월 10일 나이라흐 증언 전문
해당 증언은 티비로 중계되었고 미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ABC nightline과 NBC Nightly News에서 중계한 해당 방송은 무려 3천 5백만에서 5천 3백만 사이의 미국인들이 시청하였고 이 증언을 공화당 주전파들은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바로 그 다음주 부시 대통령은 해당 증언을 총 10번이나 인용하며 군사 개입의 정당성을 설파하여 여론전에 사용했다. 1992년 걸프전 종료 이후 밝혀지길 해당 증언을 했던 나이라는 쿠웨이트 왕족이자 주미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었으며 이라크 침공 기간 동안 쿠웨이트에 있지도 않았음이 밝혀지며 해당 증언이 미국 의회와 국민을 대상으로한 거짓 증언임이 밝혀져 크게 논란이 된다.

재미있게도 이라크군과 거의 완전히 동일한 군사장비를 운용하며 주요 교리 또한 이라크군과 비슷한 시리아군이 사단급 병력을 파견해 걸프전에 다국적군 편으로 참전해 이라크군을 견제하는 작전에 동참한 바 있다. 거기다가 양국의 정치 수반도 둘 다 바트당이란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예전부터 시리아-이라크 통일 문제에 대해서 시리아의 독재자 하페즈 알아사드는 이라크가 강한 국력으로 시리아를 병합할 가능성을 우려해 거절한 적이 있었다. 거기다가 이란-이라크 전쟁 시절 때 부터 시리아는 이란에 간접적인 지원을 했고 사담과 하페즈 간의 노선 갈등도 있었으니 이 때다 하고 이라크를 친 것이다.[20] 또한 시리아는 미국과의 정상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원했고 미국에게 점수 따기 위해 다국적군 편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이에 화답해 전후 빌 클린턴 하페즈 알아사드의 회담으로 양국간 수교가 성립되기에 이른다. [21]

4.3. 절정: 사막의 폭풍 작전

1일차 공중전
파일:사막의 폭풍 작전 미 공군 편대비행.jpg
사막의 폭풍 작전 중 불타는 유전을 배경으로 편대비행하는
미 공군 제4전투비행단 소속 F-16A, F-15E와 F-15C

이라크가 합병 철회와 철군을 모두 거부하자 마침내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월 12일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했고[22]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토마호크 순항미사일로 이라크에 폭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작전명이 '사막의 방패'에서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으로 변경되었다.

첫 테이프를 끊은 게 누구냐는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발사한 것으로 따지자면 B-52 ALCM이지만, 가장 먼저 이라크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외곽지역의 레이더 기지를 파괴하며 돌아다닌 AH-64 아파치 헬리콥터들이다.[23] 그리고 가장 먼저 국경을 넘은 유인기는 F-117. 보통은 Fail-Safe Line을 최초로 넘은 B-52의 순항유도탄 발사 시간을 개전 시점으로 보는 편.
파일:걸프전 바그다드 공습.jpg
연합 공군기들의 바그다드 공습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자 미국의 F-117 이라크의 심장을 찔렀으며[24], 이후 곧바로 토마호크 미사일의 대공세, B-52의 폭격, 그 외 다양한 공군기, 해군기의 공격이 이라크의 중심부를 강타하였다. 39일간의 강력한 미 공군, 미 해군항공대 & 다국적군 공군의 공습으로 이라크는 생화학무기 생산처로 의심받는 공장들, 군의 지휘부, 통신시설, 대공망, 발전소가 무력화되었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국과는 또 다른 훨씬 발전된 정교한 화력을 보여주었으며, 베트남 전쟁과 달리 적의 목표물을 계획적으로 착실하게 파괴하며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사실 베트남 전쟁 남베트남을 방어하는 데 중점을 둔 방어전이었으므로 미군 정규부대가 국경을 넘어 북베트남으로 진격한 적이 없다. 비공식적인 특수부대의 침투 작전과 호치민 루트에 대대적인 폭격만 있었을 뿐. 이러한 방어 위주 작전은 현지인이 아니면 시계확보 및 지형 지물 파악이 어려운 미군이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방어선 침투를 수없이 했고 패배하게 된것 이었다. 그리고 사실 시야를 가리는 정글이 주 전장이던 베트남과 탁 트인 사막지대가 주 전장인 이라크 중 어느 쪽이 더 공습을 가하기 쉬운지는 명약관화했다.
Dogfights: Air Combat Transformed in Desert Storm (S2, E12) | Full Episode | History

당시 이라크는 세계에서 가장 고밀도한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서방과 관계가 우호적이었던 시절 프랑스의 도움으로 방공망들을 거미줄같이 체계적으로 통합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미군은 먼저 이라크의 방공지휘시설과 발전소들부터 무력화시켰고 머리가 잘려진 이라크의 레이더와 지대공 미사일들은 다국적군의 방공망 제압작전에 의해 각개격파당하고 수천문의 구식 대공포들은 그저 한 발이라도 맞추자는 심정으로 허공을 향해 불을 뿜을 뿐이었다.

이라크는 방공망이 무력화당하자 공군기들을 전부 기지에서 계류시키는 방향으로 대응했다. 격납고에 전투기들을 숨겨두었고 이를 통해 전력들을 온전히 보존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다국적군은 정밀도와 관통력이 발달된 레이저 유도폭탄들을 투입했고 격납고 속에 숨은 이라크 전투기들은 고가치 지상 표적으로 전락해버렸다. 결국 100대가 넘는 이라크 전투기들을 이란으로 도피시키기로 결정했고 많은 이라크 전투기들이 한때 전면전을 치렀던 이란으로 도망가게 되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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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쿠웨이트의 유전들

이라크군은 스커드 미사일 사우디아라비아[26], 이스라엘[27]등을 보복 공격하여 전쟁을 확대하려 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는 이미 다국적군이 배치되어 카프지 전투에서 이라크군의 진격을 막았고, 이스라엘에 쏜 스커드 미사일은 상당 부분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요격되거나 특수부대&항공전력에 파괴되었다. 그러자 이라크군은 물귀신 작전으로 쿠웨이트의 유전에 불을 질렀고, 걸프전 내내 이러한 풍경이 목격되었으며 이는 걸프전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모습이 되었다.

4.4. 지상전역 돌입: 사막의 기병도 작전

1일차 지상전

사막의 폭풍 작전 중 공중 폭격이 주가 된 3단계가 끝나고, 마지막 4단계로 넘어가자 다국적군은 2월 24일부터 "사막의 기병도(Desert Sabre)"라는 작전명 아래 본격적으로 지상전에 돌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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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은 영국 제1기갑사단, 사령부 예비인 제1기병사단까지 배속받아 총 5개 기갑/기계화 사단을 거느린 미 7군단이었으며, 기동력이 강한 제18공수군단이 수차례의 강습 작전으로 치고 들어가 좌측방을 엄호했다. 미 육군 제1기갑사단 2여단전투단을 배속받은 해병대는 다국적군이 쿠웨이트 방면으로 침공할 것처럼 기만 목적의 조공 작전을 수행하여 이라크군을 끌어들인다. 지도상에 실제로 쿠웨이트-사우디 국경으로 공격하는 병력이 아예 없는 것이 보이는데, 이라크군은 '사담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의외로 열심히, 잘 설치해놨었다. 전차를 꼭짓점마다 배치한 삼각형 방어진지를 다시 꼭짓점에 놓는 더 큰 삼각형으로 이어지는 식에, 기름이 흐르는 참호를 파 유사시에는 불을 붙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다국적군이 이 사담 라인을 정면으로 치지 않았고, 정밀 타격으로 전차와 중화기를 부숴버리면서 이라크군 병사들은 불도저가 달린 M1 전차를 피해 도망치거나 이에 실패해 흙더미에 파묻히기도 했다.

다국적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기하고 있던 30만의 지상 병력과 장비를 수백 km 기동시켜 이라크를 가로질러 쿠웨이트를 포위하게 했고, 뒤가 막혀 도망치던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성공적으로 포위, 섬멸하였다. 이 데저트 세이버 작전(Operation Desert Saber)의 핵심인 우회기동은 헤일 메리 기동작전(Hail Mary Play)로 이름 붙여졌는데 고대로부터 이어진 불후의 전술인 망치와 모루 전술이 현대전에서 작전적인 차원으로 적용된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름의 유래가 된 미식축구의 헤일 메리 패스와 마찬가지로 이 작전 역시 군단을 넘어서 집단군 수준의 병력을 수백km 기동시키는 대규모 작전인지라, 이라크군과 직접 맞붙는 것 이상으로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실제로 이 작전 준비 및 기동 중에 사고로 잃은 병력이 이라크군과의 교전으로 인한 전사자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적국의 내로 크게 침투하여 우회하는 기동 특성상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으며 특히 쿠웨이트 북쪽으로 포위한 부대의 경우 서남쪽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출발하여 기동거리도 엄청났지만 측면이 노출되어 있는 데다 비록 이라크와 사이가 좋지 않은 데다 전쟁 피해 복구에 열중해야 하는 관계로 미국과 적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지만 엄연히 적성 국가에 속하는 이란을 후방에 둔 형세가 된다. 이란 입장에서 이를 곱게 볼 리 없는지라 상황에 따라 개입할지도 모르는 불안 요소였다. 헤일 메리 플레이란 이름은 정말 적절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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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하는 미 육군 제3기갑사단

지상전역의 핵심 표적이었던 공화국 수비대와 이라크 육군 정예사단들은 헤일 메리 기동 막판에 포착됐다. 미 육군 제2기갑사단과 제1보병사단은 알부사야(Al Busayyah) 인근 도로교차점에 설정된 목표 "노포크"(Objective Norfolk)에서 이라크 육군 제52전차사단과 공화국 수비대 타와칼나 기계화사단을 중핵으로 한 대규모 기갑부대와 조우했고, 7군단 최좌익의 제1기갑사단 역시 바스라 서쪽 50마일 근방에서 공화국 수비대 메디나 전차사단과 맞닥트렸다.

양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프로호로프카 대 전차전 이래 최대 규모의 전차전으로 일컬어지는 노포크 전투(Battle of Norfolk)에서 미 육군은 550대의 전차를 격파했으며, 2기갑사단/1보병사단 좌우측방에서 병진하던 미 제3기갑사단과 영국군 제1기갑사단도 각각 300대가 넘는 전차 및 장갑차량 파괴/노획 전과를 올렸다. 이때 양군의 선봉이 접촉하여 벌어진 '73 이스팅 전투(Battle of 73 Easting)'에서 단 9대의 전차만으로 이라크 전차 80여 대를 무찌르는 눈부신 전공을 세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기갑기병중대장이 바로 허버트 맥매스터이다. 제1기갑사단 역시 이라크군에 186대에 달하는 전차 손실을 가하며 메디나 능선 전투(Battle of Medina Ridge)를 압도적인 승리로 종결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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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64 헬파이어 미사일에 피격된 함무라비 사단 소속 T-72. 1991년 3월 2일

당시 미군의 기갑사단은 주로 M1A1(HA) 에이브람스를 운용했는데, 이는 열화우라늄 날탄인 M829A1과 함께 1988년부터 배치되었고 당대 최고의 화력과 방호력을 자랑하였다. T-72를 두려워하여 지휘관들이 야전에서 급히 열화우라늄 장갑과 포탄으로 보강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기존의 M1A1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개조한 사례도 있긴 하지만, 야전 개수가 아니라 제대로 된 공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지휘관들의 성화 속에 상당한 속도로 빠른 시일 내에 교체가 된 것은 사실이다.

반면 이라크의 T-721970년대에 개발된 수출용 날탄을 사용하여 공격력이 T-62 전차의 115㎜ 활강포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수준이었으며 때문에 에이브람스 전차들에게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그리고 미 공군과 육군의 A-10 AH-64 등도 전장에 투입되어 함무라비 사단의 전차를 대부분 파괴했으며, 함무라비 외에도 메디나 사단, 타왈카나 사단 등 이라크 공화국수비대 소속 정예사단들을 거의 무력화했다. 반면에 이 전투에서 미군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30명뿐이었다.

이라크군은 나름 8년 간 치렀던 이란-이라크 전쟁의 교훈으로 "대포밥 전술"로 미군의 진격을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했다. "대포밥 전술"은 2선급 전력을 최일선에 내세워서 적이 2선급 전력으로 이루어진 방어선을 돌파하느라 전력과 보급이 소모되면 그때 정예 부대로 반격해 격퇴한다는 개념이었다. 물론 이란군도 우세한 병력과 기갑전력으로 이라크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지만 워낙 견고한지라 피해만 커졌고, 돌파하는 데 성공해도 공세종말점에 도달해 진격이 제한되게 마련이었다. 이라크군이 사막 전체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우회공격을 시도해 봤으나 보급 부족으로 부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이것도 포기했다. 따라서 이라크는 미군이 화력으로 방어선에 구멍을 뚫고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돌파할 것이며, 이란군보다 난이도가 높긴 하겠지만 방어는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사막의 기병도 작전 당시 촬영된 영상

그러나 미군은 이라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대응했다. 군단급 병력들을 4백여km라는 어마어마한 거리로 우회할 수 있는 풍부한 보급능력과 GPS 같은 첨단기술을 이용해 사막에서 전혀 낙오되지 않는 기염을 토해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이라크군은 포위를 피하기 위해 퇴각을 개시했으나 그 결과 오히려 미군의 화력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폭격과 포격, 전선을 돌파한 미군의 공격으로 대부분의 중장비를 잃었다. #

4.4.1. 죽음의 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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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죽음의 고속도로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퇴각하면서 이용한 이라크-쿠웨이트 간의 도로로, 모여든 이라크 전차들과 차량으로 인해 병목 현상이 생겨났다. 이곳에 집중적으로 가해진 미공군의 폭격은 치명적이었다.[28] 미군은 대열의 선두와 후미를 폭격해서 되돌아갈 수 없도록 만들었고 이라크군은 차량의 전조등을 끄고 은폐하려 했지만 유전에 질러놓은 불 때문에 주변이 환해서 거의 의미가 없었다. 후세인의 주접이 자충수로 돌아온 셈. 이틀간 퍼부어진 폭격에서 1,500여대의 차량이 파괴되었는데 차량 대수만 따지면 상당수 차량들이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마구잡이로 약탈한 승용차들이 상당했다.

사우디 북동부로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가 돈좌된 작전에 투입된 한 이라크 공화국수비대 장교는 자기 여단이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8년 동안 입은 피해보다 30분 간 미군 공습으로 입은 것이 더 크다고 말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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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미군의 폭격을 두고 "퇴각하던 병력을 폭격했으므로 전쟁범죄"라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으나, '항복'이 아니라 '퇴각'하는 병력에 대한 폭격은 정당한 것이다. 퇴각은 저항의 의지를 갖고 전력 보존을 목적으로 병력을 물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며, 실제로 퇴각을 시도하다 적군에 궤멸된 사례는 전사에 차고 넘친다. 심지어 이라크과 미국은 휴전한 상태였다면서 미국을 비난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런 정보는 확인 가능한 소스가 전무한 완벽한 날조이다. 소위 '휴전설'의 진실은 소련이 제안한 종전 및 철수안이 이라크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던 것을 지극히 반미적인 입장에서 날조한 것이다.[30] 실제로 죽음의 고속도로에서 미군의 폭격이 비난받는 포인트는 피난 행렬에 섞인 민간인이 입은 피해에 있지, 퇴각/휴전 중인 적군을 공격한 것에 있지 않다.

4.4.2. 승리 임박

슈워츠코프 장군은 전쟁은 이미 끝났다고 판단한 상태라서 정리를 시작하는 한편 전설의 기자회견을 열어서 당당하게 다국적군이 승리했음을 선언했다.

그후 쿠웨이트를 수복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수도 쿠웨이트 시티를 탈환하게 된다. 이때 쿠웨이트 시티에는 아랍국의 군대가 먼저 진입하게 하여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최소 2만 명의 전사, 실종자를 포함한 10만여 명의 사상자라는 심각한 손실을 입은 이라크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지상전 돌입 100시간[31]만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전쟁 종결을 선언했다. 전쟁은 더 없이 깔끔하고 신속하게 미군의 의도대로 끝났다. 슈워츠코프는 공화국수비대를 확실하게 조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결정에 대해서 다소 아쉬워했지만 슈워츠코프도, 중부군 부사령관 켈빈 왈러도 백악관에 직접 맞설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정전을 수용했다. 당시 바스라로 탈출하는 도로가 지상군 부족으로 차단되지 못했기 때문에 공화국수비대를 모조리 작살낸다는 초기 계획은 완전히 이행되지 못하고 최소 이라크군 4개 사단이 탈출하는 것을 허용하게 된다. 이 퇴각하던 4개 사단을 끝장내는 최종 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중부군에선 쓴 입맛을 다셨다. 이라크군을 완전히 끝장내지 못했다는 것은 화려한 전과 때문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현대에선 이라크 공화국수비대가 궤멸되지 않았다는 학계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32] 부시 역시 정치적 이유로 지상전을 빨리 끝내버렸음을 알았기 때문에 기자회견에서 걸프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은 다르다고 말했다.

이라크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으며, 쿠웨이트 일대에 투입된 침공군은 말 그대로 소멸되었다. 본토 역시 초토화되었으며 방공망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라크군의 방공망 70%가 전쟁 당일에 파괴되었으며, 이중 남은 30%도 대부분 침공 루트와 전혀 상관이 없는 대공레이더와 지대공 미사일들이었다. 사실상 하루 만에 소수의 전투기와 ZU-23같은 구식 대공포, 휴대용 SAM을 제외한 모든 대공망이 마비된 상황. 물론 이는 이라크 방공망이 현대 전쟁에는 걸맞지 않은 구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33]

당시 이라크군은 MiG-29 등에 이란-이라크 전쟁 등에서 활약한 베테랑 파일럿들을 탑승시켜 미 공군과 붙어보려고 했지만 장비에서 밀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사 장비가 비슷하다 해도 소련군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하여 준비되어 온 미국의 프로 조종사들을 당해낼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이라크군 MiG-25가 조기경보기의 탐지 범위 밖에서 비행하던 F/A-18을 기습하여 격추시키기도 하였고, 영국군 토네이도 전투기는 MiG-29에게 격추당하는 어이없는 사례도 있었다. 토네이도야 공격기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지만…막상 이라크군의 삽질은 다국적군을 능가했는데, 어떤 MiG-29는 앞서가던 동료기를 격추하고 자신도 추락하는가 하면, 한 미라주 F1은 저공으로 도망치는 비무장 기체인 EF-111을 뒤쫓다 EF-111 조종사의 계략에 낚여 그대로 지면에 들이받는 일도 있었다. 그 EF-111은 격추 스코어를 인정받았다. 다만, 미국과 싸운 수많은 나라들이나 10년 후의 이라크군(...)과 비교해도 이 시기 이라크 공군은 상당히 잘 싸웠다. MiG-25로 F-15를 내쫓는다던지... 문제는 공군/방공군 교리 상 지상 관제가 있어야 하는데, 이 지상 관제소는 전쟁 극초기에 미군의 정밀타격으로 모조리 터진 뒤였다. 이라크군에도 프랑스제 미라주 전투기가 있긴 했는데, 성능상으로는 별반 차이 없는 구식이었다.

이라크군도 전쟁 당시 나름대로 반격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스커드 미사일 이스라엘에 발사하여 아랍국들이 미국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려는 작전이 실행되었다. 이에 미군은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를 추적하여 파괴하거나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요격하였다. 대부분의 스커드 미사일은 요격되어 성과를 못 냈지만, 한발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 기지로 떨어져 미군 병사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전투로 인해 사망한 150명가량의 미군 전사자 중 30명가량이 이 한 발에 희생된 것이다. 이라크가 스커드로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 다만 이마저도 온전한 성공이 아니라 해당 기지의 패트리어트 시스템이 정비에 들어가 작동되지 않는 것과 맞아떨어진 결과라 이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생화학 무기 등을 사용할 우려가 있었지만 미국이 화생방(CBRN) 공격을 얻어맞으면 핵으로 보복하겠다고 이미 공표한지라 생화학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스커드 공격도 생화학 무기가 아닌 통상 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사용했다. 다만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및 자국 내 시아파/쿠르드족 학살 때 화학 무기를 사용하는 등 화학 무기를 자주 사용한 전력이 있고 또 후세인이 완패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34] 다국적군도 이라크군이 화학 무기를 쓸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상당히 조심했다. CS탄 사용요청을 화학탄 사용의 빌미가 될 수 있다며 거절할 정도.

4.5. 결말: 완벽한 승리

이 전쟁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이라크군의 병력과 장비와 지휘 체계가 초토화되는 동안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전사자 수가 고작 292명이었다. 더욱이 이 전사자들 중 비전투 사망이 145명으로, 전투에서 희생된 병력은 아군 오사 44명[35]을 포함해도 147명에 그쳤다.[36][37] 국가별 전사자는 미군 146명, 세네갈군 92명[38], 영국군 47명, 사우디군 24명, 이집트군 11명, 프랑스군 9명, 아랍에미리트군 6명, 카타르군 3명, 시리아군 2명, 쿠웨이트군(다국적군 소속) 1명이다.

반면 이라크군은 무려 약 2~5만 명이나 전사하고 8만 명이나 포로로 생포당하는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사담 후세인은 전쟁 전, 미군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는데...
미국 공군력에 의존하고 있는데, 전쟁사를 통해 볼 때 공군이 결정적인 전력이 된 경우는 없었다.
사담 후세인
이 발언 직후 이라크와 후세인은 현대전에서 공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느끼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공군은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이래로 결정적인 전력 요소 중 하나였다. 독소전쟁이야 워낙 양측 지상군 스케일이 커서 묻혔지만 분명 제공권은 중대급 제대 전투에서는 막강한 영향을 미쳤고[39] 서부전선과 북아프리카-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연합군의 압도적 공군력이 독일군의 기동을 완벽하게 타격하여 독일 육군은 언제나 전력이 대거 상실된 상태에서 압도적 물량을 보유한 연합군 육군을 상대해야했다.[40] 6·25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은 어디까지나 미군이 공군력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치, 외교적인 마이너스 요인이 너무 컸기에 6·25 전쟁 미국 무승부, 베트남 전쟁 미국 패배 전쟁이 된 것이다. 사담 후세인은 이것을 잘못 이해하고 공군력이 별 것 아니라는 그야말로 착각에 가까운 결론을 낸 것이다.[41]

물론 코소보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 공군력만으로 전쟁에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걸프전 당시에도 여전히 지상군이 핵심적인 전력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지상군 전력도 다국적군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40일 가까이 되는 항공작전으로 인한 이라크군의 피해는 전체 피해 중 절반에 미치지 못했고, 나머지 피해는 이후 단 100시간의 지상작전에서 비롯되었다. 후세인의 기대와 달리, 이라크군은 가장 기초적인 보병 대 보병의 사격술에서도 다국적군에 크게 뒤지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걸프 전쟁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승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미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로 군사적 힘을 의심받던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례이기도 하다.

5. 종전 이후

5.1. 패전 이후의 이라크

전쟁이 끝난 이후 이라크는 미국에게 경제 봉쇄를 당해 모든 무역을 통제받게 되었고, 1500억 달러라는 거액의 전쟁배상금까지 물게 되었다.[42] 특히 이라크가 조금이라도 미국에 대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 페르시아 만에 항시 대기 중이던 미 함대가 그 즉시 토마호크 F/A-18, F-14 등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공습을 가했기 때문에 반미의 목소리를 대외적으로 표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세인은 이라크 전쟁으로 몰락할 때까지 반미노선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 이라크는 망가진 군대를 재건하지 못한 채 10여 년 후 다시 벌어진 전쟁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본국에서 치르는 방어전이라 미군과의 격차가 상대적으로 줄었음에도 정작 병력손실은 절반 이하였고, 전투에서도 미군에게 걸프전 못지않은 손실을 강요하는 데 그쳤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는 전 세계적인 협조를 받아 전비 부담을 상당히 덜었다.

이라크군은 군사력 면에도 열세였으며 전쟁의 정당성이나 명분은 다국적군에게 있었고, 주변의 아랍권 국가들과 소련, 중국도 이라크에게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참혹한 패배를 피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이집트와, 이라크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바트당이 일당 집권한 시리아조차 쿠웨이트 구원을 외치며 참전했다. 후세인은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그나마 이라크에게 동정적이었던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종전 후 페르시아 만 연안 아랍국가들의 지원이 단절되면서 꽤나 고생해야 했다.[43]

언론 역시 패배자의 반열에 들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언론을 자유롭게 풀어두면 전쟁에서 불리하게 된다는 사실[44]을 깨달은 미군은 철저하게 기자들을 통제했고, 취재에 많은 제한을 받자 다국적군의 언론플레이도 그만큼 용이해졌다. 일례로 다국적군이 상륙 작전을 연습하는 것을 기자들이 보도한 것을 본 이라크군이 상당수 병력을 쿠웨이트 해안가에 배치했고, 다국적군의 사막 쪽으로 우회 기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교훈으로 미국은 한 단계 더 성장한 것이다.

개전 초기 군사전문가들은 베트남 전쟁처럼 진흙탕 싸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다국적군이 속전속결로 끝낸 일방적인 승리였다. 1980년대까지의 전쟁 양상 자체가 소모전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제대로 미래를 볼 수 없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격력과 기동력은 1990년대부터 전쟁 교리 자체를 바꿔놓았다. 사실 미군 자신조차도 이 전쟁은 엄청난 소모전이 될 것으로 예상했고, 1990년대에도 소모전 개념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걸프전 승전 이후에도 미군은 언제까지나 예외 경우라고 봐서 북핵 파동 당시인 1994년에도 여전히 80년대식 소모전 개념으로 접근했다. 1994년 북핵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클린턴 행정부가 영변 핵시설 폭격 대신 지미 카터의 방북을 통한 협상으로 기울어진 것은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발생하면 북한을 붕괴시키기까지 전쟁은 최소 3개월 정도 걸리고 한국은 군인 49만, 민간인 포함 100만명이 사상하고, 미군은 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워게임 결과 때문이었다. 이런 개념이 완전히 바뀐 것은 2003년 이라크전 이후이다.

그러나 미군 입장에서는 모든 결과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기대치를 너무 높여 놓았다. 지나치게 낮은 전투 사상자 비율로 인해 이제 미군은 희생자가 조금만 나오면 큰 비판 여론에 시달리게 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은 이후 벌어진 이라크/아프간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국은 이 때문에 PMC와 계약하고, 우방국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등 미군외 다른 병력을 끌어오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또한 미군의 허술한 전후 처리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던 적이 있다. 쿠웨이트 해방을 달성한 뒤로 백악관은 더 이상 확전을 원치 않았지만, 정작 군은 이 기회에 이라크군을 완전히 제압하고 후세인을 처단해야 된다고 주장하며, 의견을 달리했다. 하지만 군의 원칙은 문민통제 상명하복이니 노먼 슈워츠코프 다국적군 사령관은 휴전을 원하는 백악관의 지시에 따르는 수 밖에 없어 가능하면 빠르게 미군을 철수시키는데 급급했다. 이라크측 휴전 협상단이 헬기를 띄워도 되냐는 질문에 미군 기지 근처에만 안 오면 된다는 식으로 대응할 정도로 급했다. 이로 인해 이라크는 헬기를 동원해 자국내 봉기 세력들을 신속하게 탄압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후세인 세력을 확실히 제거하지 않고 미래의 화근을 남겨둔 격이었다.

다만 그 시점에서 후세인을 몰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미국은 베트남전에서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며, 출구전략은 걸프전 기간 동안 미국 수뇌부의 핵심 화두였다. 실제로 이를 망각한 10년 후의 미국은 큰 곤욕을 치렀다. 또한 걸프전은 쿠웨이트의 해방이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아랍 연합국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미국이 이라크를 정벌한다고 선포했을 때도 그 지지가 이어졌을지는 미지수이다. 당장 10년 후의 이라크전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고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이 끝임없는 비정규전의 수렁에 빠진 것을 감안하면, 걸프전 당시 이라크를 물리치는 선에서 마무리한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련한 테크닉과 결단력으로 부시 대통령은 걸프전 기간 중 다국적군이 내포하고 있던 다양한 이해 관계와 어려움 등을 헤쳐나갔다. 부시 대통령은 정치와 전쟁 수행의 균형을 잘 유지했다. 베트남전 때의 상황과는 달리 그는 야전 사령관들의 손을 「등 뒤로 묶지 않고」 많은 자율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승전을 거둠으로써 부시 대통령의 이런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걸프전의 승전은 미국인들이 베트남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소련과의 민감한 관계에서도 노련함을 과시했다. 그는 걸프 지역에서의 안정과 평화는 소련과의 적대 관계를 통해서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냉정한 사리 판단에 의거, 소련을 상대했다. 지상전 개시 직전의 숨막히는 국면에서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으로 하여금 후세인 카드를 활용하게 배려해 모스크바와의 관계 악화를 방지했다.

5.2. 잘못된 교훈

한편, 걸프전 당시의 빛나는 승리를 기억하고 있던 21세기 초의 미국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어차피 이라크군도 붕괴되었고[45] 희생자도 많이 안 생길 텐데 전투 병력은 조금만 데리고 다녀도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2~3만에 불과한 규모의 지상전투병력만으로 이라크에 돌입했다가 베트남 전쟁 시즌 2를 찍게 된다.

이는 양자의 상황이 너무나도 달라서 벌어진 것으로 걸프전의 경우에는 쿠웨이트의 여론이 우호적이었고 당장은 테러 조직 등이 대두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치안활동 등은 원래 정부인 쿠웨이트 정부에게 맡기고 미국은 사담이 헛짓거리 못하도록 병력만 주둔할 목적이었다.

문제는 걸프전을 전후로 해서 테러 활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 문서에 서술된 그가 2004년 알 자지라에 나와 했었다는 TV 연설에 따르면, 걸프전 이후 미국은 친미 아랍 국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를 이슬람의 땅에 이교도의 군대가 들어오는걸 묵인한 타락한 중동 독재 왕가에 대한 후원이라 생각한 빈 라덴이 미국과의 투쟁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되었고, 이는 그가 알 카에다를 통해 아프리카 주재 미 대사관 폭파 사건 같은 테러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애초에 빈 라덴은 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때 미국의 후원을 받는 무자헤딘으로 전쟁에 참전한 친미파였다. 하지만, 아프간 전쟁이 끝나고 고작 1년이 지난 90년 걸프전이 터졌을때, 모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을 찾아가 쿠웨이트를 침략한 사담 후세인을 자신의 무자헤딘으로 타도할 수 있다고 자원했지만 거절당한뒤 미군을 들이는 걸 계기로 미국이 중동의 싸움에 개입하는 외세임을 인식하고 그동안 미국 돈 받고 테러를 지원하던 용병에서 미국의 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극단주의 무슬림이 오사마 빈 라덴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때부터 이런 극단주의 지역군벌들이 반미의 기치로 단결하게 된 것. 그리고 그렇게 단결한 무슬림들과 1년 뒤인 91년 소련 붕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면서 생겨난 소련 접경지대 각 지역 반군세력들과 이들의 결합이 일어나고, 여기에 테러 그 자체로 밥벌어먹고 사는 국제 테러조직이 새로운 밥벌이를 위해 분쟁지역이 곳곳에 산재한 중동으로 내려왔고, 그런 90년대 말 혼탁한 중동정세속에 큰 테러리즘의 끝이 바로 9.11 테러.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며 벌인 이라크전은 이라크 정부를 전복시키는 게 전쟁의 목표였고 이라크의 반발, 테러집단의 유입 등으로 치안공백이 오래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정규군과의 전투에서는 기갑사단이나 공군으로 충분하지만 게릴라를 소탕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선 거리를 누비는 알보병들이 필수인데 이것을 망각한 것이다. 즉 럼즈펠드는 걸프전의 전훈은 생각했어도, 베트남 전쟁의 전훈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하다.

더군다나 전쟁을 앞두고 설계한 기본 뼈대가 달랐다. 당시 콜린 파월은 전쟁을 단시간에 종결짓고 바로 철수한다는 기본 전략 구상을 그대로 실천해서 결과적으로 미군 주둔 및 기동으로 인한 후폭풍이나 부작용이 야기되지 않았지만, 반면 럼즈펠드는 미군의 첨단장비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한 나머지 소수의 정예 고기동 부대로 이라크를 일정 기간 점유하고 거기서 또 이를 기반으로 중동 전체를 컨트롤해 보려는 터무니없는 구상을 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식의 소수의 정예 기동부대를 통한 적 방어종심의 붕괴를 노리는 작전술은 전쟁의 목적에 따라서는 상당히 효율적인 방법이며, 특히 이스라엘군이 수 차례의 중동전쟁을 통해 발전시킨 바 있다. 실제 전역의 전개에서도 빠른 종전을 가능케 했고. 그런데 이라크 전쟁의 목적은 이라크군을 패배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점령, 나아가서는 과도정부 구성까지의 안정적인 통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목표에 적합하지 않은 접근방식이었다.

게다가 군사력 운용 이전에 전략적인 견지에서 문제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이라크 인구의 다수는 시아파 무슬림이었다. 여기서 미국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선거를 실시하면, 아직 부족주의 성향이 강한 이라크에서는 당연히 친이란 성향을 가진 시아파 정권이 들어설게 뻔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기득권을 쥐고 있던 이라크 국내 수니파와의 내전 가능성을 높임과 동시에, 외교적으로는 소수 시아파가 독재하던 시리아를 왼쪽에, 그리고 시아파의 종주국 이란을 오른쪽에 두고 지중해에서 걸프만에 이르는 시아파 벨트를 사우디(수니파의 종주국)-요르단-이스라엘-레바논 머리 위에 올려놓게 되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당시에 전망못할 일이 전혀 아니었으며, 후세인 정권을 끝장내기로 작정했다면 당연히 그 대책도 마련해 적절하게 실시해야 했다. 그런데 훗날 알게 되었듯이 당시 미국 정부는 그러하지 못했다. 이것은 군사적인 해법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시 정부의 미국이 한 것은, "우리가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고 경제지원을 해주면 이라크인들이 민주정부를 구성해 한국처럼 발전할 것입니다" 이런 순진한 생각이었다.[46]

네오콘이 과신하던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도 미국 혼자만의 단기결전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교훈을 이라크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보여주었다. 그 뒤로 오바마 정부는 공약대로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는데, 아랍의 봄 사태가 터져버렸다. 유럽 연합으로 밀려드는 난민의 처리, 그리고 오랫동안 NATO의 앓는 이였던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의 쇠락으로 유럽 연합이 시작한 개입에 미국이 끌려들어가면서 중동은 아랍의 겨울이라는 혼란을 겪게 된다.

5.3. 이후의 쿠웨이트

그들은 나라를 되찾았고, 다국적군에 참가한 나라에 감사를 표했다. 전쟁 초기에는 왕궁을 수비하다가 전사한 왕제는 쿠웨이트 올림픽 위원장이자 IOC 위원이었는데, 전쟁 발발 얼마 후 중동국가들의 요구에 따라서 이라크 아시안 게임 회원자격 박탈과 동시에 왕제의 아들에게 부친의 자리를 계승시켰다. 이라크는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이후인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이 되어서야 참가가 가능해졌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쿠웨이트 내에서는 전쟁 전 쿠웨이트의 국정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전쟁 중에는 국내에 잔류한 인사들에게 암살자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이는 카더라일 뿐이지만…'국정에 대해 비판적이고', '적국 군대가 국토를 거의 장악했는데도 국내에 잔류했다.' 이 말을 곰곰히 잘 따져보면 '친 이라크 성향'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쿠웨이트 정부 입장에서는 나라까지 뺏길 뻔했으니 제거할 생각을 할 만도 하다.

그리고 미국이 9.11 테러 이후 이라크를 침공하자 10여년 전 이라크에게 당한 원한이 남아있었던 쿠웨이트[47]는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고, 미군의 육군 병력 전개를 위한 전진 기지 역할을 하였다.

2017년 카타르 단교사태에서 쿠웨이트가 사우디와 대립하고 있는 카타르의 편을 드는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가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에게 모국이 점령, 병합당한 트라우마라는 설도 있다.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게 점령당한 쿠웨이트나 현재 진행형으로 사우디에게 외교 보복을 당하고 있는 카타르 모두 성격은 다르지만 이웃 영토 대국들에게 핍박 받는 소국의 처지라는 점에서는 다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48] 정작 쿠웨이트의 앙숙이었던 이라크도 이 사태 당시 쿠웨이트와 같이 사우디의 보복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던 카타르를 지지했다.

5.4. 이라크 전쟁 후

사담 후세인 미국의 악연은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쪽은 걸프전과는 정반대로 미국이 여러 문제로 골머리만 잔뜩 앓고 있는 중. 하지만 결과적으론 빠른 시기에 후세인을 처형했다. 문제는 후세인 정권 말고는 제대로 된 야당도 없었던 이라크 신정부는 부패와 민심에서 멀어져 이미 후세인을 처형하고 점령을 끝낸 미국 입장에선 소규모 군대로는 점령지를 계속 관리하는 것이 힘든 일이다. 또한 이라크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시리아 등지의 IS가 이라크에 건너오기도 하였다.

이라크 정부는 전후 약 31년 간 유엔이 이라크에 부과한 전체 배상금 524억 달러(약 61조 8천억원)에 대한 배상을 진행했다. 종전 이후 2019년까지 28년간 이라크가 유엔배상위원회(UNCC)에 지급한 배상금은 93%인 487억 달러(약 57조 4천억 원)이었다. 이후 2022년 2월 9일, 이라크 정부의 배상금 전액 지급이 완료되면서 걸프전쟁에 대한 경제적 책임이 끝이 났다. 지난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욕심으로 시작된 걸프전쟁이 적어도 재정적으로는 3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종지부를 찍은 셈이 되었다.

한편 걸프전 종전에 대해 이스라엘에서는 안도와 불신이 엇갈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면서도 40기의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수많은 사상자와 재산상의 피해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 보복공격을 자제했다. 후세인의 의도대로 이스라엘이 보복공격을 했다면 중동 전체에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야기될 뻔했다.

6. 전쟁사적 의의

히스토리 채널 영상 토크멘터리 전쟁사 영상

현대전의 대표적인 예시로, 스텔스 공격기인 F-117, M270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AH-64 아파치 미군의 하이테크 무기들이 대중에게 처음 선보여 그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준 전쟁으로, 전 과정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면서 여러 면에서 전 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었다. 특히 공군을 비롯한 공중전력이 현대전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력요소인가를 명확히 보여주기도 했다. 개전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라크의 군사 핵심시설을 박살낸 것도 결국 항공기 등의 공중 전력이었다.

때문에 군사학계에서 전쟁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전쟁으로 평가받으며, 대중에게도 2차대전의 유럽 구릉지대와 태평양, 베트남 전쟁 정글 이후 현대전의 새로운 무대인 사막에서 싸우는 전쟁의 이미지를 만든 첫번째 전쟁이다. 이후 20년 동안 모가디슈 전투[49], 9.11 테러로 인한 미국-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이 줄줄이 터진 덕분에 ' 이슬람 문화권'은 한동안 가상의 배경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였다.

소련 중국은 이 결과를 보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불타는 이라크 무기 상당수가 소련 또는 중국제였기 때문이다. 이 전쟁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군은 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고 아직도 미군에게 열세인 상황이나 이전과 비교하면 크게 발전했으며 군사협력을 통해 미군을 견제중이다.

걸프전에 병력까지 파견하던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컸는데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89년, 냉전 종식으로 인해 미국 내부에서 점차적으로 늘어나는 국방비 감축 기조로 인한 위기감을 안그래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걸프전에서 보였던 전황을 보고 처음으로 국방개혁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

미국은 신속대응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쿠웨이트가 점령당한 근 몇달 간 상대적으로 기동력이 나쁜 해상 수송 부대가 주요 군사 장비를 옮기기까지 미군은 고작 급히 공수되어 온 M551 셰리든으로 눈치를 보는 것이 끝이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점령 후 미군 증원 이전에 사우디로 신속하게 쳐내려왔을 경우 미국은 대단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당장 현지에 전개할 수 있는 2개의 알몸뚱이 경보병사단과 수십 대 수준의 전투기, 항모전단 1~2개 정도로는 이라크군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6.1. 언론의 역할

언론의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전쟁 전 과정이 생중계로 전세계에 보도된 전쟁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구정 공세 등의 현장이 방송되어 미국의 반전 여론에 불을 붙인 사례가 있었으나, 걸프전은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카메라가 달린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이 날아가 목표물을 정확히 제거하는 장면, 전투기 관점에서처럼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이미지가 인공위성으로 전세계에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CNN은 24시간 뉴스 채널이라는 자사의 강점을 십분 활용해, 네트워크 뉴스들과 달리 바그다드에서 전쟁의 시작을 실시간으로 보도할 수 있었다. 10년 넘게 위성으로 전세계를 대상으로 방송을 하던 CNN은 손쉽게 전쟁을 중계했다. 엄격한 검열을 하던 중동 국가들은 이전처럼 뉴스를 통제할 수 없었고, 유럽 국가들도 미국의 관점만 일방적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불평했지만 CNN이 엄청난 시청자들을 끌어모으며 세계 제1의 뉴스 전문 채널이 되는 건 막지 못했다. 걸프전을 교훈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아랍 국가들까지 독자적인 24시간 위성 방송을 만들게 된다.

베트남 전의 교훈에 따라 전쟁 당시 다국적군은 언론에게 전달되는 정보를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최첨단 무기를 강조해 전쟁의 참상을 보도하기 힘들게 했다. 슈워츠코프 사령관은 기자들 앞에서 직접 브리핑을 하며,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다리에서 도망친 이라크 군인을 '이라크에서 가장 운좋은 인간'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민간인들에게 작전명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사막의 폭풍). 그 결과 걸프전은 베트남전과 달리 미군의 관점에서, 스포츠 경기나 비디오 게임처럼 신나게 보도되어 걸프전 지지도를 올려 주었다. 이라크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언론을 이용했다. CNN은 사담 후세인과의 인터뷰, 다국적군 포로, 벙커에 있다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 등의 내용을 보도해 미국 내에서 비애국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7. 기타

이라크는 종종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인해 시야가 극히 안 좋을 때가 많았고, 이 때문에 전진하던 미국의 M2 브래들리 장갑차가 바로 옆에 매복해 있던 이라크 T-72 전차를 뒤늦게 보고는 기관포로 쏴서 잡은 일이 있다. 이후 2대의 브래들리가 TOW로 4대를 더 잡아서 총 5대를 잡았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에서 25㎜ 기관포로 T-72 상대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힘들다. 전차 포탑 위의 얇은 장갑을 기관포로 때릴 수 있는 아주 운 좋은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전쟁 초반에 이라크군은 다국적군이 상륙작전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실상은 속이려고 만든 가짜 기사였고, 예상 상륙지점에 미국이 네이비 씰 팀1 대원들을 약 12명 정도 파견해 해변가에 C4를 무더기로 설치한 다음 터트려서 진짜 다국적군이 상륙해서 교전하는 것처럼 속였다. 근데 이라크는 또 여기에 속아서 2개의 사단을 그 해변으로 보내버렸고, 당연히 그 후는 이라크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미합중국 해병대 2개의 사단이 상륙작전 대신 이라크의 지뢰지대를 신속하게 돌파하여 육상으로 전진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은 백만 대군과 수천 대의 탱크를 자랑하던 이라크 군대가 100시간 만에 괴멸당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서 미국과의 싸움을 대비해 레이더 탐지기를 교란시키겠답시고 전국에 가짜 포대, 전투기, 전차, 방사포를 배치하고 쓰지도 않는 갱도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또한 걸프전은 북한이 재래식 전력을 포기하고 핵무기 등의 비대칭 전력을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전쟁이 되기도 했다.

전쟁 와중에 끔찍한 환경 오염이 발생했다. 이라크군은 다국적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쿠웨이트 점령지 및 이라크 국내의 유전지대에 방화하고 페르시아 만에 대량의 원유를 방류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 만의 생태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때 유출된 원유의 양은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1,000만 배럴 이상으로 추정한다.

미 해군 구축함모함 아카디아함(AD-42)은 걸프전에 참전한 동안 360명의 여성 승무원 중 36명이 임신해 지상으로 재배치되었다. 이 일로 아카디아는 사랑의 유람선이라는 별명을 얻게되었다.

미 해병대의 LAV-25는 카프지 전투 당시 LAV-AT와의 협동 사격이 있었는데 T-62에 LAV-25가 고폭탄을 갈기면 고폭탄이 터지는걸 보고 LAV-AT가 거기다 쏘는 방식으로 이라크군의 전차대대를 막았다 한다.[50]

걸프전 개전시 미군의 최초 공격은 아파치 헬기에 탑승한 데이브 존스 준위의 헬파이어 미사일 발사였는데, 이 때 전 부대의 무전망에 연결된 것을 모르고 " 이건 네놈 몫이다 사담(This one's for you, Saddam)…!"이라는 중2병 넘치는 대사를 남겼다가 걸프전 관련된 거의 모든 책에 적히는 엄청난 업적을 만들었다. #

전쟁 당시 우회기동을 실시한 미 7군단에서 고성능 확성기를 장착한 험비 등의 차량으로 발퀴레의 기행을 틀어 제끼면서 진군했다고 한다.[51]

M1 에이브람스 챌린저 1, 2세대 전차였던 AMX-30 M60A1 이 빛을 발했던 전쟁중 하나이다. 당시 M1 에이브람스전차가 이라크군의 T-72 전차와 붙은 적이 있었다. 그때 M1 에이브람스 열화우라늄탄 1발로 T-72 전차 3대를 박멸시킨 이야기가 있다.

이원복 교수의 시사만화 현대문명진단 '하늘의 별만 보다가 구덩이에 빠지는 이야기' 편[52]에 따르면, 프랑스군 개선 당시 프랑스 정부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이래 47년만의 승리자로서 전사자 2명[53]에 전투기 2대 및 탱크 1대 손실이라며 자화자찬했으나, 종전선언 얼마 뒤 모리스 슈미트 원수가 "우리 프랑스군은 핵무기 편중 독트린 탓에 실제 전력은 쓰레기였다"고 보고해 충격을 줬다. 실제 파병 당시 투입된 AMX-30 전차는 1967년식[54]에 노후 상태였고, 전투기들은 야간이나 악천후에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전체 다국적군의 2.5%인 52대 중 1%만 제 몫을 했다.

파병 역시 난항을 겪었다. 육군 288,000명 중 12,000명을 차출해야 하는데 당시 육군 60%, 해군 26%, 공군 37%를 각각 차지하는 의무병들은 유럽 외 분쟁에 참여 못하도록 법적으로 명시됐기 때문이다. 일부 군인들과 언론 사이에선 '군 현대화' 호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핵에만 목을 맸는데, 냉전 종식의 문턱에 선 1991년 들어서 쓸모없는 무기가 되었다. 오히려 이는 프랑스의 '군사 강국' 타이틀에 먹칠을 한 것이며 미국, 영국 등 핵 보유국도 비슷한 실정이다.

걸프전이 시작하던 당일, 쿠웨이트 시티에 착륙했던 비행기의 승객과 승무원들이 피랍당한 사건이 있었다. 영국항공 149편 피랍 사건 참고.

중동의 미디어 업계에도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걸프전을 계기로 해서 CNN의 위력을 본 중동의 방송사업자들이 위성방송에 진출하면서, 위성TV도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군이 후퇴하면서 유정에 닥치는대로 불을 지르고 도망쳤었는데, 전쟁이 끝나도 수많은 유정의 화재를 진압할 수 없기에 일각에선 세계 종말의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었다. 해결책은 의외로 신속하게 발견되었다. 헝가리의 MB Drilling이라는 회사에서 MiG-21 제트 엔진 2대를 이용해 화염을 날려버리는 소방차 '빅 윈드'를 만들었다. 제트 엔진에서 뿜어진 기류는 유정에서 배출되는 기름을 날려 탈 것을 없애고 화염을 질식시켜 화재를 진압했다. 또한 제트 엔진과 함께 뿜어진 물은 달아오른 유정을 식혀 추가 화재를 방지해주었다.

다국적군을 총 지휘했던 노먼 슈워츠 코프 대장의 월급은 전쟁 특별수당·주택수당 등을 포함, 9,427달러 80센트(6,835,000원)였다. 자식 1명을 둔 사병(병장 기준)은 1,644달러(120만 원), 전투기 조종사(소위 기준)는 1,745달러(1,255,000원)를 받았다. 2차 대전 중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장군의 월급이 666달러, 전투기 조종사의 월급이 200달러, 병장 월급이 165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물가상승을 고려하더라도 대우가 크게 나아진 편이다.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의 주범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veigh)가 걸프전에 참전하였고 훈장도 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생전 첫 대국민 연설이 바로 이 걸프전 지상작전이 개시된 2월 24일 진행되었다.[55]

7.1. 걸프전 증후군

걸프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과 그 가족들 사이에서 만성 피로, 인지 능력 저하, 불면증, 발진 및 설사, 루게릭병, 뇌종양 등의 증상이 나타났고 이를 걸프전 증후군(Gulf War Illness)이라고 부른다.[56] 처음에는 열화우라늄탄에서 나온 우라늄으로 인한 부작용 증세가 아닌가하는 추측이 처음 나왔다. 그 외에도 실전을 겪은 참전 군인들의 스트레스성 장해 때문에 상기의 병세가 나타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 외에도 이라크 군이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면서 방화한 유정에서 나오는 유독 기체 때문에 생긴 중독 증세가 아닌가하는 추정도 있었다. 이후의 조사에 따르면 이라크 군이 사용 할 것으로 예상했던 화학무기에 대한 해독제인 피리도스티그민 브로마이드(Pyridostigmine Bromide)를 참전 군인들이 복용하였는데 이의 부작용으로 인해 걸프전 증후군이 발병했다고 알려졌다. 그 외에도 개인 위생을 위해서 살충제를 군복 등에 지속적으로 살포[57]했는데 이로 인한 중독 증상도 있었음이 밝혀졌다.[58][59]

8. 세기말 아마게돈?

걸프 전쟁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걸프 전쟁이 그저 빨리 끝나버린 전쟁 중 하나로만 치부되지만, 정작 걸프 전쟁이 막 벌어졌을 무렵, 한국 사회에는 적지 않은 두려움과 불안이 휩쓸었다. 1990년대가 시작되자 벌어진 전쟁인 데다가, 가뜩이나 90년대는 세기말의 분위기 때문에 머지않아 세계의 종말이 온다는 공포심이 한국 사회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60]

또한 걸프 전쟁이 막 벌어졌을 무렵에는 아직 소련이 존속하고 있던 터라 한국 사회에서는 "소련이 결코 미국의 걸프 전쟁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소련이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반드시 미국에 맞서려 들 것이다. 그러면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는 불길한 예측이 꽤나 강했다. 한 예로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인 국민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던 김성일 장로[61]는 그의 칼럼을 모은 책인 <비느하스여, 일어서라>에서 이렇게 예측했다.
"소련은 중동에서의 소외를 만회하기 위해 리비아 이란 등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리비아와 이란은 그들과 손을 잡는 조건으로 이스라엘 침공을 제안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바로 에스겔 38장에 나오는 종말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미 이란 리비아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중동의 모든 산유국들은 걸프전쟁 이후 미국편이 되어 있다. 결국 이 산유국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소련은 이들 세나라와 함께 아랍 국가들의 공적으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치는 수밖에 없다. 이미 이 전쟁의 참패가 성경에 예언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소련은 이 자살적 공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비느하스여 일어서라/ 김성일 지음/ 신앙계/ 260~281쪽 #
그러나 걸프 전쟁 당시 소련은 국가 사회 전반이 만신창이 상태여서 도저히 걸프 전쟁에 끼어들어 미국과 싸워볼 처지가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1991년 막바지에 그만 15개의 나라들로 분열되어 소멸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중동 나라들이 소련과 연합군을 결성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든가 하는 일도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정작 이스라엘을 침공한다던 소련은 미군 부대에 옵저버 장교들을 파견하였으며, 미군의 첨단무기에 감탄하며 양에서 질을 우선시하는 군사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물론 그 해 말 소련이 붕괴되며 망했지만…

하지만 걸프 전쟁이 불러온 세기말의 불안감은 걸프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한국 사회에 계속 남았고, 그러한 공포심이 불러온 집단 패닉 현상이 바로 1992년 휴거 대소동이었다.

9. 걸프전과 한국

베트남전 이후 처음으로 한국군이 파병된 곳이다. 국군 의료지원단 100여명과 공군 56항공수송단 '비마부대'가 파병되었다. 대한민국 국군/파병부대 항목 참조

1991년 1월 23일, 경기도 성남 공군비행장에서 출국할 때만 해도 베트남전 이후 최초의 파병이니,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세계사의 주역이니 하며 띄워줬고, 사지로 간다고 해서 환송객은 물론 국군 장병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파병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의식한 정부는 명령이 아닌 자원자를 모집하는 형식을 택하였고, 적지 않은 '특별 수당'도 제시하였다.

미국은 원치않은 의료 봉사에 노골적으로 한국군을 무시하였고, 이에 '일단 파병한 뒤 현지에서 문제를 풀어보자'라는 막무가내 정신으로 출발하여 다음날인 1월 24일에 사우디 다란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의료지원단을 외면하였고, 이에 일주일간 다란에서 대기하는 촌극을 빚었다. 사우디에서는 마땅한 곳이 없으니 후방으로 가라고 하였지만, 비장한 환송식까지 한 우리군은 그럴수는 없다며 고심 끝에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조건으로 그나마 쿠웨이트에 가까운 '알 누아리아'라는 작은 마을로 가서 의료 업무를 보게 된 것이다.

그외에도 다국적군은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생활하고, 한국군은 모래폭풍이 주기적으로 오는 사막에 텐트 치고 생활하는 등 무척 조악한 생활을 하고 있어 불만이 엄청났다. 게다가 국방부 측에서는 고국에다가 계속하여 "의료지원단이 멋지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UN은 물론 주둔지 주민들에게도 박수를 받고 있다."라는 거짓 보도자료만 줄기차게 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약속했던 '특별 수당'이 없었다. 이 특별수당이라는게 베트남전 파병의 각종 논란의 핵심인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지독히도 가난하던 베트남전때 처럼 단지 특별 수당을 받기 위해 파병 간 것은 아니지만, 약속이 깨진건 병사들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특별 수당을 안 준 이유는 무척 간단하다. 베트남전 당시 특별 수당은 미군이 수고 했다고 준 것이고, 걸프 전쟁에서는 다국적군 차원에서 지급되었어야 하는데 한국군은 다국적군이 아니니 특별 수당을 줄 주체가 없던 것이었다.

이에 파병된 한국군은 개판이 되어 목적도 없고, 사명감도 없고, 자부심도 없고 심지어 위계질서까지 없어졌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목숨걸고 싸우겠다는 목적으로 걸프전 파병에 자원한 것인데, 막상 와보니 할일도 없고 '특별 수당'이라는 대우도 없기 때문에 순식간에 당나라 군대화가 돼버린 것이었다.

이 불쌍한 한국군을 위해 교민들이 나섰다. 처음에는 김치를 만들어 퍼 날라 우리 장병들을 먹여주었다. 그런데 배를 채운 한국군은 이번에는 사무 집기를 달라고 했다. 행정 일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갖고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 집기를 갖다주니, 다음으로는 승용차를 한대 구해달라고 했다. 군용트럭 말고, 연락 등에 이용할 승용차 1대조차 안 갖고 왔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로 거지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비참한 상황은 10년 후 이라크전에서도 반복 되었다. 세계 최강의 M1 전차와 브래들리 장갑차도 터져 나가는 상황에서 한국군은 60톤짜리 민수용 트럭만 타고 나타났다. 이걸 본 미군이 경악을 해서 MRAP를 주며 그걸 패트롤 차량으로 굴리려고 하다니 제정신이냐고 말하면서 타고 다니라고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번 평화 유지군 때도 또 민수용 트럭에 철판만 두르고 나타나 남는 MRAP 좀 있으면 적선 해달라고 동냥질을 하였다.[62]이런 목불인견의 현상이 매번 반복되었다. 이런 이유는 걸프 전쟁에서 다국적군의 일원이 아니기도 했지만, 자체적으로 아무 준비 없이 맨몸으로 병사들을 보내 놓고 진지한 반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차마 이런 문제를 방송에 내보낼 수가 없어, 병사들이 음식이 입에 안맞아 조금 힘들다는 정도의 한국 언론의 기사가 나가자 국방부 장관은 오히려 "전쟁터에 가서 어렵다니 정신상태가…."라며 격노했다고 한다.

이 다국적군 문제는 병사들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 의료지원단장인 최명규 대령 조차 몰랐다는 말이 있다. 그저 청와대 일부와, 이종구 국방장관, 그리고 협상대표였던 황 모 대령등 극소수 사이에서 쉬쉬하던 일이었다. 현지에 가서야 사정을 알게된 우리 군인들은 대놓고 정부를 비난하며 군기는 개판이 되었다.

이 문제는 전쟁이 터지며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일단 후세인의 사우디 침공 작전인 카프지 전투가 벌어지자 병원에 사우디 부상자들이 쏟아져 들어와 정신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병사들이 원하던 것은 전장에 나가 의료 지원을 하는, 바로 이런 일이었다. 목적 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특별 수당' 문제는 국방부의 '해외 연수' 예산을 전용하기로 했다. 파병된 장병을 일종의 해외 연수생 취급한 것인데 일단 돈을 받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던 사우디 전통 식사는 사우디 측에서 향신료를 빼주기로 하여 일단 먹을 수는 있게 되었다.

걸프전쟁 당시 전비는 미국쪽만 4~5백억 달러에 이른다. 전쟁 초기에는 미국 의회에서 비용 부담이 부결되어, 당장 필요한 결재 대금을 못내 미군이 파산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대신 세계 각국이 비용 부담을 매꾸어주었는데 사우디아라비아가 1백68억 달러로 가장 많았고 쿠웨이트 1백60억 달러, 일본이 1백7억 달러 순이며 한국은 5억 달러를 부담하였다. 이중에서 일본은 천문학적인 전비만 부담하고 실제 파병은 안해 국제 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일 기회를 잃었다며 일본내 우파들이 두고두고 비난하였다.

한국은 원래 전비 부담 요청도 이라크에 대한 금수 조치로 퉁 치려고 하였으나, 미국측이 강력하게 "너희 나라는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중동 평화의 반사 이익을 얻으려 하는가”라고 하여 결국 5억 달러를 부담한다. 즉 미군 및 다국적군이 받았던 특별 수당의 일부는 한국측에서 부담한 것이고, 정작 파병된 한국군은 못 받았다는 것이 아이러니.

쿠웨이트에도 교민들이 꽤 살고 있었는데 현지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피난 안가고 남은 사람들은 9명이었다. 후세인이 쿠웨이트에 남아 있던 외국인들을 인간 방패로 쓰겠다고 공언 하였기 때문에 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한번에 다 죽을 수 없다며 흩어져 지냈는데, 쿠웨이트가 해방되자 바로 한국 대사관에 모여 감동적인 대사관 태극기 계양식을 지켜보게 된다.

소녀시대 써니가 3살 때 이 전쟁을 쿠웨이트에서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급거 귀국하였으며, 현재도 폭죽 소리가 들리면 심하게 놀란다고 한다. 멤버들이 귀를 막아 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걸프만 일대의 우리 교민들을 대피 시키기 위해 4차례나 특별 전세기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현장을 지키라는 정주영의 지시로 일부 현대건설 직원들은 오히려 특별 전세기를 타고 사우디로 날아갔다. 하위직들이 죄다 못가겠다고 사표를 써서 임원들만 갔다고 한다.

전쟁을 위해 사우디내 대규모 수송이 필요 했는데, 미군은 이를 민간 수송에 의존하였다. 이때 운전사중 일부를 한국에서 모집하였다.

10. 대중문화

이 걸프전을 배경으로 여러 게임이 나왔다.

11. 참고 자료


[1] 당시 시리아는 반미성향의 하페즈 군사정권 시절이였음에도 미국과 관계개선을 위하여 다국적군에 참전했다. [2] 이라크에 합병 [3] 이 중 미군은 70만 명 [4] 만(灣, bay)보다 더 큰 표현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만을 뜻하는 영어단어는 워낙 많다. 한국에서는 모두 만이라고 부르지만 해외에서는 만도 세분화 되어있다. [5] 다만 한국의 지리교과서에서는 이 지역을 페르시아 만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아라비아 만이나 걸프 만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다. [6] 우선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쿠웨이트는 이라크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7] 명분 없는 기습침공이라 도와줄 정당성도 부족했고, 원래 후세인이 소련산(정확히는 소련과 동맹국 동독산 독가스) 생화학무기로 자국민들을 대거 학살하는 등 소련도 학을 뗄 짓을 많이 했다. 도리어 그 당시에 소련이 미국보다 후세인 제거를 원했고 KGB를 통해 반 후세인 봉기도 사주하기도 하였다. 설령 도와준다 해도 소련 자체의 여건도 좋지 않아 지원을 받지 못했을 것은 뻔했다. 이 시기 소련은 온갖 악재 끝에 이미 발트 3국이 사회주의를 버리고 소련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8] 사담 후세인과 아사드의 공통점은 각각 자국의 인구 구성에서 소수인 이슬람 종파를 대표하는 정치세력인데, 다수의 인구가 공통적으로 극도의 빈곤과 저개발로 인해 이슬람 극단주의에 노출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사담 후세인과 아사드 모두 실제 그들의 종교적 성향과 상관없이 이슬람 극단주의를 요구하는 다수를 무력으로 철저히 탄압해 이 지역에 극단주의 무장테러단체의 창궐을 막았다는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 그런 불안하지만 최소한 통제가능한 무정부상태를 유지했던 그들이 사라지자 마치 봇물이 터지듯 이들이 무장테러단체로 창궐해 이전만 못한 아수라장이 된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말았다. [9] 그나마 아사드 일가는 시리아 내전에서 시리아 정권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후세인의 일가족들은 여전히 이라크 내에서도 재기는커녕 배척당하는 처지이다. 다만 뒤로 든든한 뒷배 하나 없던 이라크의 후세인과 다르게 시리아의 아사드는 러시아 등 다른 강대국의 지지를 받는다는 차이가 있다. [10] 지식해적단의 관련 영상 [11] 쿠웨이트 인구의 과반수가 외국인이다 보니 전쟁이 벌어지자 전부 자국으로 피난을 갔고 자국민으로 열심히 끌어모았던 숫자가 고작 3만에 불과했던 것이다. [12] 공식 합병은 8월 28일에 이루어졌다. [13] 임시정부 수립과 공화국 선포 자체는 합병 선언 이전에 실행되었다. [14]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의 소멸은 미국 입장에서 중동의 지지 세력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라크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친선관계를 맺고있었지만 어차피 이라크에서 먼저 전쟁을 일으킨 이상 이라크의 뒤를 더 이상 봐줄 이유가 없었다. [15] 전 국민에게 하루 두 끼씩만 먹도록 권장하고, 비누 부족을 이유로 남자들은 이틀에 한 번씩만 세수하도록 권장하기도 했으며, 빵집에서는 한 종류의 만 만들도록 지시하기까지 했다. [16] 걸프전은 공화당 대통령이 주도한 20세기의 유일한 전면전이기도 했다. [17] 방공망은 방공 무기와 공중표적에 대한 탐지/획득 능력이 결합되어야 위력을 발휘하는 것인데, 평양은 단지 구형 방공 무기의 숫자만 많이 깔려있다 뿐이지 탐지/획득 능력은 처참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1980년대에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미 공군 전투기가 실수로 개성 옆까지 날아와도 전혀 탐지를 못했고, 납치 부호 달고 평양상공을 3바퀴 도는 중공 민항기가 있는데도 요격은 커녕 눈치채지도 못했으며 링크 2017년에 미 공군이 B-1과 F-15를 북한 영공까지 날려보내도 대응은 커녕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바람에 미군이 직접 비행궤적을 공개하기까지 했다! 링크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진영의 현대전은 바로 이 걸프 전쟁 문서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개전과 동시에 상대방의 방공망, 특히 방공 레이더와 통신망을 박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18] 중동 지역을 담당하는 미군의 통합군 사령부. [19] 그나마도 베트남에선 미군이 단계적으로 병력을 증가해서 54만 명까지 3년이 넘게 걸렸고 시간적 여유(?)로 인해 병참 부담을 약간 덜었지만 걸프전의 미군은 6개월 만에 70만 명이 배치되었다. 규모를 소폭 줄인 몰락 작전에 육박한다. [20]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은 시아파의 하위 분파인 알라위파 출신으로 이 때문에 시아파의 맹주를 자처하는 이란과 협력관계이다. 지금도 이란 대외전략의 기본은 이란-이라크 중남부-시리아-레바논를 연결하는 시아파 초승달 벨트를 구축해서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를 압박하는 것이다. [21] 이후에도 시리아는 알 카에다 관련 정보들을 미국에게 제공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양국의 입장 차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 북한의 핵개발 협조 문제로 미국이 시리아를 테러 지원국에 지정하며 양국간 관계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했고 결국에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여러 가지 요인으로 미국이 시리아와 단교해 완전히 무산되었다. [22] 이날 미 상원에서 이라크를 상대로 군사력 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이 찬 52, 반 47로 통과되었다. [23] H아워는 1월 17일 오전 3시였으며 아파치의 레이더 기지 기습은 그보다 약 20분 전이었다. [24] 문서 최상단의 영상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작전의 시작은 전쟁사 최초로 생중계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개전 후 처음으로 바그다드에 울린 공습경보였으며, 직후 CNN 현지 특파원의 생중계 전화연결이 끊기는 것으로 상황의 긴박함을 알 수 있다. [25] 당연히 이 전투기들 대부분은 이란 공군이 감사히(?) 받아먹었다. [26] 사우디는 이란-이라크 전쟁 때 전비 감당을 못해서 지원금을 끊어서 이라크와의 사이가 틀어졌었다. [27] 이스라엘이 다국적군으로 참전하면 사우디 같은 아랍 국가들이 더 이상 협조하지 않고 이탈할거라는 계획이였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보복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고 이스라엘도 반격하지 않았다. [28] 참고로 이 잔해들은 적어도 2005년까지는 대부분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후엔 대강 치워졌지만 아직도 현장 주변에선 간간이 불탄 자동차의 부품이나 불타다 만 시체조각이 나오기도 한다고. [29] 《Made in war》, 맥스 부트, 플래닛미디어 p.672. [30] War in the Gulf: Diplomacy; Soviets Say Iraq Accepts Kuwait Pullout Linked to Truce and an End to Sanctions; Bush Rejects Conditions: War Is to Go On. # [31] 딱 떨어지는 100이란 숫자가 미디어 홍보에 효과가 탁월한 것이라는 파월 합참의장의 제안이었다. 이것을 부시 정권이 받아들이면서 처음부터 지상전 작전시간을 100시간으로 정했다. 군인이지만 정치감각이 남달랐던 파월 장군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일화이자,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것의 한 예이다. [32] 학계에서는 걸프전이 냉전 말기 미군의 공지전 교리를 실현했다는 것에 회의적이며 걸프전에서 다국적군 기동의 실상이 망치와 모루의 응용이라기보단 그저 거대한 모루로 이라크군을 격멸한 것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즉 적 방어선의 약점이나 간격을 파악하고 해당 지점으로 우회 침투하거나 돌파하는게 아닌, 그저 적 병력에 정면으로 선형으로 전진하여 넓은 전선에서 접촉하여 파괴하는 전면 공격에 가까웠단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슈워츠코프가 수립한 작전계획은 대규모 우회기동을 통한 포위섬멸전이 맞았지만 정작 주공부대 지휘관인 7군단장 프랭크스 중장이 부대의 안전을 우선시하여 야간에는 군단 기동을 중지하거나 좌우 인접 사단의 간격 조정을 통해 측방노출을 방지하는 등 과감한 작전 수행 대신 신중한 행동을 보였고, 이 때문에 슈워츠코프의 의도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33] 비슷한 이유로 북한군 역시 개전 초 방공망이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게다가 이라크와 달리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한국 공군이 건재한 데다 태평양 지역의 미 공군 전개 전력이 워낙 막강하여 굳이 준비할 시간조차 필요없는 상황이다. [34] 당시 서방에서 독재자는 기본적으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후세인 본인은 자기 지지세력과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고, 권력을 잃은 뒤에도 그냥 잡혀죽고 순교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지, 화학무기 따위는 손대려고도 들지 않았다. [35] 미군 35명, 영국군 9명. [36] 이 숫자도 매우 적은 숫자였다. 피아식별이 극도로 어려웠던 과거 전쟁,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선 야간에 오인사격으로 연대 병력이 붕괴된 사례도 간간히 나온다. 통계를 보면 오히려 베트남 전쟁 이후로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상자가 극도로 적어진 것이다. [37] 다만 이번 전쟁은 적국과의 격차가 엄청났던 데다 장거리 무기체계와 기동성으로 장비와 병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막 지형의 특성 탓에 오인사격의 감소율보다 전투 사상자 자체의 감소율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현재에는 피아식별 기술이 훨씬 더 진일보하고 있지만, 아직도 갈길이 멀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하는 그린베레 대원들이 오폭에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대규모 정규전이 아닌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근접 전투의 비중이 올라가는데, 이때 아군의 화력 지원에 오히려 아군이 당할 확률이 증가한다. [38] 특히 미군 다음으로 많은 사망자를 기록한 세네갈의 경우 사우디에 주둔한 병력이 메카 순례를 갔다 오던 길에 비행기가 추락해서 전원 사고사한 것이다. [39] 쿠르스크 전투 당시 많은 수의 전차를 지원받았던 그로스도이치란트 사단의 공격이 돈좌된 것이 대표적인 예로, 안그래도 신뢰도 문제로 골치를 앓던 독일군 전차 전력들을 소련 공군이 공격하여 공세를 돈좌시켰다. 괜히 독일군이 소련공군을 상대로 독일 공군이 압도적인 교환비를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의 활동 공백을 노려 공격해오는 IL-2를 검은 흑사병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전투 전력의 손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급 전력의 손실이 심대하기 때문에(위의 죽음의 고속도로 사진에서도 전투 장비보단 수송 차량이 대부분이다.) 보병 수준에서도 탄약과 식량 수급의 문제가 생기고, 현대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지닌 야포/차량/기갑 따위의 장비는 아예 마비가 되어버린다. 쉽게 말해 현대적인 완편 기계화사단이 AKM 들고다니는 게릴라와 다름 없는 수준으로 전투력이 떨어져버린다는 의미다. [40] 오죽하면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서부전선에서는 대낮에 도로를 이용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현장 지휘관인 롬멜, 클루게는 물론이고, 심지어 후방에 있던 알베르트 슈페어까지 토로했겠는가. [41] 그리고 정치적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이 때 미 공군이 보여준 수준의 항공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공군은 2020년대 기준으로도 손에 꼽기 때문에 90년대에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70년대 이후의 전자공학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공군의 정밀타격 전술이 엄청나게 발전하였으나, 이를 원자로 폭격, 공군기지 폭격 따위의 '일회성 작전' 따위가 아니라 전쟁 단위에서 지속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국가는 현대에도 극소수이고, 미 공군조차도 70년대에나 완전히 구현할 수 있던 전례 없는 능력이다.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조차도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드론과 유도미사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42] 이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이라크 국민들에게 대량의 돈을 걷어서 민생이 어려워졌고, 이라크 내에서는 후세인에 대한 경멸, 증오가 커졌다. [43]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은 여전해서 얼마 후 PLO에 대한 지원은 다시 재개되었다. [44]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가장 큰 적은 반전 여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쟁에 반대하는 언론사에서 반전 여론을 조성하는 기사를 썼고, 북베트남도 이를 적극 활용하여 미국 정부를 곤란에 빠트린 적이 있었다. [45]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군은 과거 걸프전 이전의 잘 나가던 때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수준이었다. [46] 사실 마냥 순진한 생각만은 아니고 정말 체계적인 정부와 자본주의를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라크전 당시의 미군정은 이라크 재건을 도와주는게 아니라, 이라크를 더이상 재기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사보타주 작전을 한것이 아닌가 싶을정도의 의도적인 이라크 현지 행정력 말살과 경제구조 붕괴를 일으켰다는데에 있다. 의도적이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게, 럼즈펠트와 당시 미국 정부는 이라크에서 재건 명목으로 일어나는 온갖 부정부패와 촌극을 실시간으로 다 보고받으면서도 말로만 좀 뭐라고 할 뿐, 결국에는 인사교체 같은것도 없이 그냥 무시로 일관했다. [47] 비록 국토는 완전히 되찾았지만 침공 과정에서 왕족이 전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거나 학살당한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48] 본래 쿠웨이트는 카타르 단교 사태 초반기에 사우디와 카타르의 평화협상을 중재하려 했으나 협상이 카타르와 사우디간 입장 차이로 결렬되면서 카타르 지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49] 이쪽은 이후 영화가 크게 성공하면서 이후 제작되는 작품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50] 출처 - 걸프전 전차전사 카와츠 유키하데 저 [51] 출처 : 지상 최대의 전차전 1편. [52] 조선일보사판 단행본 2권 수록. [53] 이들은 지뢰를 밟아 폭사했다. [54] 그것도 20㎜ 기관포가 동축으로 달려 있지만, 별다른 개량은 미미한 구형이었다. 당시 최신 개량형이었던 AMX-30B2는 소수였다. [55] 엘리자베스 2세 치세 동안 총 5번의 대국민 연설을 진행했는데 걸프전 지상작전 실시 이후 다이애나 스펜서 사망 이후,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사망 이후, 2012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이후 마지막은 2020년 코로나 펜데믹때 진행되었다. [56] 걸프전 증후군에 대한 초기 문제제기 1994년 기사 https://www.mk.co.kr/news/home/view/1994/07/37056/ [57] 베트남 전쟁 참전군인들의 고엽제 피해와 비슷한 경우이다. [58] America's Economic Way of War 313~315쪽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62093725_America%27s_Economic_Way_of_War_War_and_the_US_Economy_from_the_Spanish-American_War_to_the_Persian_Gulf_War_by_Hugh_Rockoff [59] 2008년 미국의 재향군인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한 기사 https://www.voakorea.com/archive/35-2008-11-20-voa18-91316894 [60] 당시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걸프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제 곧 세상을 끝장낼 대전쟁인 아마게돈이 일어난다"는 공포스러운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61]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기독교 관련 소설들을 여럿 발표했는데, 성서무오설에다가 1990년대에 계속 세계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종말론까지 진지하게 주장했던 이력이 있어서 그의 주장들을 그대로 믿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하다. [62] 심지어 이 땐 민수용 트럭인 마이티 짐칸에 대충 방탄판을 붙여놓고 M60 기관총을 얹은 다음 병력수송에 이용해먹는 것을 뉴스에 띄웠다. 당연히 이딴 물건에 군인들을 태우냐며 반발이 일었고, 바라쿠다 장갑차가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63] 리퀴드는 태생 및 성장과정 특성상 폭스하운드 이전까지 정규군에 들어간 적이 전혀 없다. 오로지 용병 및 스파이 활동이 전부이고 그마저도 모든 전적이 말소된다. [64] 사막 한가운데서 서로 대치 중이던 이라크 병사 '마담'과 신원불명의 미군 병사. 나중에 둘은 둘리 일당의 주선으로 서로 휴전하고 어깨동무한 채 전장을 떠나려 하지만…그 직후 지뢰를 밟고 둘리 일당 앞에서 둘 다 폭사하고 말았다. [65] 둘리 일행이 만난 가족을 잃은 소녀는 하필 죽은 이라크 병사 마담의 여동생이었다. 부모가 묻힌 폐허 위에서 먹을 것도 없어서 죽은 양을 뜯어먹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둘리 일행이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해봤지만 집도 가족도 없어졌는데 오빠가 돌아왔을 때 자기라도 남아있어야 한다면서 거절한다. 둘리 일행이 마담의 유품으로 챙겼다가 흘리고 간 목걸이를 주운 소녀가 목걸이 안에 있는 마담과 자기 사진을 본 아이가 미소지으면서 오빠 빨리 와….라고 말하면서 해당 에피소드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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