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세계사의 미스터리의 유럽 부분을 서술한 문서.2. 고대사
- 베드로의 유해 : 베드로가 순교한 뒤 성경에 따르면 그의 유해가 바티카누스 언덕에 묻혀왔다는 전승이 20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는데, 최근 고고학계에서 이 언덕으로 추정되는 장소[1]를 조사해본 결과 정말로 1세기에 사망한 60대 중반의 남성으로 추정되는 유골 1구가 발견[2]되어서 이 유골이 정말 베드로였는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상술한 각주처럼 "바티카누스 언덕"이 아직까지는 추측에 가까운데다가 당시의 그리스도교의 박해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관해 쉬쉬했던 것 때문에 그의 묘를 사실상 무명묘로 만들어 놨던 정황이 존재해서[3] 박해 후에 그의 유골이 온전히 있었을지도 의문인 상황이라 확실한 결론을 못 내렸다.
- 안티키테라 기계: 서기 1세기 무렵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로, 인류 역사에서 1642년 파스칼이 기계식 계산기를 발명하면서 등장했다고 알려진 톱니바퀴를 이용한 작동 원리를 적용시킨 물건이라서 고고학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온갖 도시 전설과 조작 의혹이 짙은 오파츠 중에서 단 세 개뿐인 진품들 중 하나이다.[4] 다만,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자연과학이나 공학 부문에서 비약적인 성과가 자주 나왔다는 점을 들어서[5] 안티키테라 기계도 그런 성과들의 일부라고 보고 있다. 진짜 미스터리한 건, 이걸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다. 당대의 네임드 학자들[6]이 이 기계의 발명자라고 주장되긴 했으나, 모조리 부정당하여서 이 기계의 실제 발명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 인도유럽어족 도래 이전의 유럽 선주민들: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들의 공통 조상인 원시 인도유럽인은 기원전 4500년 경에 우크라이나 및 캅카스 일대에서 발원하였고, 당연히 그 이전부터 유럽에서 살았던 선주민들의 입장에서는 한참이나 후발주자로서 들어온 이들이다. 일단, 유럽 선주민들의 언어나 문화에 대해서는 차탈회위크같은 선사 시대 유적에 대한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의 꾸준한 연구를 통해 그 전말이 조금씩 밝혀지고있고[7], 유럽 선주민계 민족으로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이들인 바스크인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도 조금씩 정보가 나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언어나 문화에 대한 정보는 절망적일 정도로 부족하며, 따라서 이들이 세운 문명인 타르테소스 문명이나 미노스 문명, 에트루리아 문명의 전반적인 모습이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황이다.
- 미노스 문명: 그리스의 크레타에 건설된 유럽 최초의 문명이지만, 이들이 남긴 기록들이 전부 해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8] 미노스 문명에서 사용한 언어나[9], 미노스 문명의 주민들의 계통[10], 미노스 문명의 실제 이름[11]이 모두 불명이다.
- 파에스토스 원반: 미노스 문명 시대의 유물 중 하나인 파에스토스 원반은 발견 당시부터 고고학계와 언어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우선 이 유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알려져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보다 무려 2400년이나 더 오래된 인쇄물로[12], 현존하는 인류사 최고(最古)의 인쇄물로 밝혀진 유물이다. 당대에는 흔치않게도 일종의 활자 역할을 하는 도장을 진흙으로 만든 원반에 찍어서 글자를 새겼는데, 이 기술이 후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소실된 것을 두고,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런 인쇄 기술을 사용할 곳이 많아질만큼 당대의 경제 수준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금방 잊혀져버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문제는 이 유물에 쓰여져있는 언어인데, 언어학자들은 이 언어를 미노스 문명에서 쓰이던 언어인 미노스어로 보고있으나, 미노스어 자체가 비교언어학적으로 명확하게 분류되지 못한 미분류 언어고 이 원반에 쓰인 글자도 전혀 해독되지못한 관계로[13], 원반에 적힌 내용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인 상태다.
- 에트루리아 문명의 기원: 로마 제국보다 앞서서 이탈리아에 존재했던 문명인데, 정확한 기원도, 다른 민족과의 친연 관계 여부도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14].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에트루리아인은 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기근을 피해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한 민족이라 하며,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이들을 이탈리아의 선주민이라고 추정했는데, Y염색체 하플로그룹을 조사한 결과로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이주해온 이들로 밝혀졌고[15], mtDNA 조사 결과로는 현지 토착민에 가깝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둘의 주장이 모두 사실임이 밝혀졌다. 즉, 에트루리아인은 토착민과 아나톨리아계 이주민의 혼혈인인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이네이아스 설화[16]와도 어떤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티레니아어족: 에트루리아에서 사용된 언어인 에트루리아어는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오늘날의 그리스의 렘노스 섬[17]에서 쓰였던 렘노스어와 알프스산맥의 선주민인 라이티아족들이 썼던 언어인 라이티아어[18]와 함께 티레니아어족이라는 단일 언어군을 이루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언어 각각이 쓰인 지역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들이 실제로 하나의 어족을 이룬다는 전제 하에서, 비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들도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들 못지않게 장거리 이주를 활발히 했다는 근거로 해석할 수 있다[19]. 문제는 이와 관련한 사료가 너무 적다는 것인데, 에트루리아어로 된 사료도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금석문같은 것이 꽤 남아있는데 반해, 렘노스어로 된 사료는 유물 두 점이 전부라서, 이것만으로 티레니아어족 가설을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 타르신 신전: 달리 타르시엔 신전(It-Tempji ta' Ħal Tarxien)이라고도 불리는, 몰타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유적지로,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몰타의 거석 신전의 일부다. 문제는 이 유적의 건립 시기가 기원전 3250년경에서 기원전 2800년경 정도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유럽에는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 말고는 다른 문명이 없었기에 이 신전을 건립한 이들이 누구인지가 밝혀지지 않았다.[20] 더욱이 타르신 신전을 세운 이들이 무슨 신을 믿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신전 내부에는 제단(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존재함을 확인했기 때문에 종교적 건축물임을 알 수 있었을 뿐이지, 이곳에서 지냈으리라고 보여지는 종교 의식과 관련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고, 신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도 존재하지 않아서 의문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 타르테소스: 테오티우아칸, 티와나쿠, 나스카 문명과 함께 고고학자들을 하악거리게 하는 고대 문명인데, 문제는 타르테소스 문명과 관련된 것들이 전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는 점이다. 타르테소스인들이 기록한 문자가 적힌 글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전혀 해독되지 않았고 지중해의 고대 문명들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부유했던 타르테소스의 수도의 위치도 불명이다. 일단 이 문명을 세운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이라고 추정된다.[21]
- 톨렌제 싸움터 유적: 1996년에 독일 북동부 톨렌스 계곡에서 기원전 1200년경의 대규모 전투 현장 유적지가 발굴돼서, 그 동안 청동기 시대 유럽에서 문명이 없었을 것이라는 기존 학설을 뒤집었다. 유적을 조사한 결과 수천 명에 이르는 전사자의 유골이 나왔고, 이 주변에서 잘 정비된 도로와 다리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므로[22], 이 시기의 중부유럽 어딘가에 못해도 초기 도시국가 연맹 수준은 되는 정부의 통치를 받는 문명이 있었을 가능성이 커졌다. # # # 이외에도 이 유적과 관련해서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와 연관성도 있을 것라는 추측도 나왔다. #
- 트라키아인: 고대 시대에 그리스의 북쪽에 살던 민족으로, 서기 6세기 경에 슬라브족에게 정복된 뒤에 그들에게 동화되어 소멸되었다. 트라키아인 자체는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이라는 것은 알려져있지만, 이들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그리스인의 자매민족이나, 현대 알바니아인[23]의 자매민족 내지는 원시 슬라브인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오늘날의 헝가리 일대에서 거주했던 다른 인도유럽어족계 민족인 다키아인과 동계로 보는 설도 있으나, 남아있는 트라키아어로 된 사료가 거의 없는 관계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 팔라리스의 황소 : 기원전 6세기 경 시칠리아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화형기구로 어지간한 화형, 팽형 뺨치는 수준의 잔혹성 등으로 오랜 기간 유럽에서 사형기구하면 떠오르는 상식으로 알려졌으나 이 이야기에서 놋쇠황소의 발명자 팔라리스가 직접 이 기구에 처형당했다는 식의 전개가 전통적인 구전 이야기들의 클리셰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이것의 실존 여부에 의문이 들고 있다. 사학계에서는 이게 실존한 게 아니라면[24] 당시 유럽인들에게 공포심을 줄 목적으로 지어낸 허구의 물건 내지 괴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 한니발의 알프스 등반 경로: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급습해 로마가 한때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한니발이 정확하게 어떤 경로로 알프스를 넘었는지는 현재까지도 논쟁거리이다.
3. 중세사
- 대 모라비아 왕국의 멸망 과정: 대 모라비아 왕국은 체코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인데, 멸망 직전의 과정이 기록의 부족으로 인해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25] 말하자면, 발해의 유럽 버전인 셈이다. 대 모라비아의 멸망 이후에 체코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보헤미아 왕국으로 넘어간다.
- 로빈 후드의 정체 : 로빈 후드라는 중세 잉글랜드의 의적 이야기는 거의 전설에 가깝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이 로빈 후드가 실존인물이거나, 최소한 전설의 모티브가 된 실존 도적이 있었으리라는 가설이 꾸준히 제기된 바 있다. 대체로는 실제로 로빈 후드라는 이름을 가진 도적이 중세 시대에 활동했다는 설과 당대 도적들이 즐겨쓰던 가명이라는 설[26], 실존한 도적인 록슬리[27]나 또다른 실존 범죄자인 로저 갓버드의 별명이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정설은 없다.
- 보이니치 문서: 발견 직후에 알 수 없는 글자들로 되어 있어서 큰 화제를 모았던 미해독 문서다. 대충 중세기의 여러 가지 자연과학 지식들을 집대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라고 짐작되었고, 최근에는 여러 여성들이 물 속에 몸을 담그는 모습이 나오는 페이지가 있는 점과 책 전반에서 여러 약초들이 두루두루 소개되는 점으로 미루어 중세 시대의 건강관리법을 다룬 책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28]. 문서에 적힌 언어의 정체[29]가 밝혀져 있지 않고, 저자도 미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30]
- 아서 왕의 정체: 그가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했는지, 애초에 모티브가 된 인물 따위 없는 가상인물인지부터가 학계에서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고 있다. 그리고 실존인물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치더라도, 그 인물로 지목된 이들 중 확실하게 아서 왕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인물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 에드워드 5세: 폐위된 뒤 동생과 함께 런던 탑으로 납치된 이후 사실상 암살당하기까지의 행적이 불명이며 유골부터가 사망 추정 시점으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나서야 발견된 터라 언제,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해 암살되었는지가 오리무중이다. 그나마 유력한 용의자로 헨리 7세나 리처드 3세가 제기되고 있다.
- 잔 다르크: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잘 알려진 인물. 그러나 어떻게 시골 촌뜨기에 불과했던 그녀가 전쟁을 뒤집을 만큼 뛰어난 용병술을 펼쳤는지, 이단재판에서 70명이나 되는 신학자들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는지가 상당히 불가사의하다. 이 때문에 여러 의문점들이 산재해 있다. 잔 다르크/의문점 참조.
- 키예프 루스와 관련된 미스터리:
- 루스인의 기원: 루스인은 현대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선조이지만 기원이 불분명하다. 서유럽의 학자들은 이들이 중세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노르드인의 분파인 바랑인의 일원이 현지의 동슬라브족에게 동화되어 생겨난 민족으로 본다. 반면 러시아의 학자들은 슬라브 민족주의 관점에서 루스인이 순수한 슬라브족이라고 주장했다. 요즘에는 노르드인과 슬라브인이 섞인 혼성민족이라는 학설이 많다.
- 류리크의 실존 여부 및 출신 민족: 류리크는 키예프 루스를 세운 것으로 알려진 전설 상의 군주다. 노르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가 어떤 민족인지는 불분명하며 실존 여부도 불확실하다.
- 키예프 루스 건국 이전의 동슬라브족: 키예프 공국 건설 이전에도 동슬라브족이 살았지만, 이들이 세운 국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 피의 독수리형: 중세 바이킹족들이 항복을 거부한 적장이나, 역모 또는 패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가한 극형. 등 가죽을 갈라 늑골과 폐를 적출하여 독수리 모양으로 늘어뜨리는 등 실행 방법이 잔인하기로 유명하다. 다만 바이킹 족의 법률이나 문화가 문자 기록 보다는 구전으로 주로 전해지고 그나마 있는 문자 기록도 해석하기 난해한 룬 문자로 되어있어, 팔라리스의 황소처럼 실제 집행했는지 여부는 미스터리하다. 따라서 집행 기록 자체는 있다고 하나, 그 기록 조차도 부분적으로 실전되어 다른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을 정도이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당시 브리튼 섬의 캔터베리 대주교와 노섬브리아의 왕이 이 형으로 처형 당했다고 한다. 또한 의사들에 따르면 해부학적으로 집행 자체가 불가능한건 아니지만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며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 하자르족: 중세기에 유대교를 국교로 삼았던 유일한 민족으로, 이들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는 물론,[31] 이들이 무엇을 계기로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문화적, 종교적 헤게모니를 유대인과 동화시켰는지가 불분명하다. 일단 이들이 튀르크 계통이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현재 폴란드에 살고 있는, 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유대교 신자들인 카라임이 하자르족의 후손들이다.
4. 근대사
-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관련된 미스터리
- 불멸의 연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스스로 남긴 기록에서 '불멸의 연인'이라고 언급한 인물이다. 그의 젊은 시절의 첫사랑인 줄리에타 귀차르디라는 여자[32]나 그녀를 소개해준 친구 테레제 폰 브룬스비크,[33] 그리고 그의 말년에 맞은 동명이인인 여제자라는 설도 있고, 앞서 언급한 여사친 테레제의 언니인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34]가 불멸의 연인이라는 설도 있다. 베토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엘리제를 위하여의 '엘리제'가 이 '불멸의 연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도 있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사인: 훗날 베토벤의 모발을 분석한 결과 납 성분이 검출된 것으로 미루어 베토벤의 말년 건강 악화와 사망 원인이 납 중독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납 중독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가설 중 하나는 당시 공장 폐수에 오염된 도나우 강에서 잡힌 생선 요리를 베토벤이 즐겨 먹었기 때문에 체내에 납이 축적된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35]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관련된 미스터리
- 모차르트의 무덤의 위치: 모차르트의 무덤은 그가 사망했을 당시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요제프 2세가 시행했던 정책때문에[36] 2024년 현재는 그가 매장된 곳을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우연하게 그의 유골이 어딘가에서 발견되면 모를까[37],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 모차르트의 사인: 클래식 음악계의 불세출의 천재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35살의 젊은 나이로 급작스럽게 요절한 이야기는, 1984년에 영화 아마데우스로도 만들어질 만큼 세간의 큰 관심을 모았다. 그래서 그가 사망한 원인에 대해 당대부터 상당한 논란이 이어져왔다. 일단, 세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설은 실제로는 두 사람이 꽤 친한 편이었다는 점과, 살리에리가 워낙 대인배에 겸손한 성품을 지녔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전혀 가능성이 없다. 당시의 진료 기록에는 모차르트가 고열과 발진이 동반된 증세를 보였다고 쓰여있으므로, 어떤 질병을 앓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 질병이 무엇이냐인데, 돼지고기를 즐겨먹다가 선모충에 감염됐다는 설에서, 폐결핵같은 호흡기질환이 원인이라는 설, 심혈관질환으로 사망했다는 설 등이 제기되었으나, 모차르트의 무덤이 현재 실전되었으므로[38] 그의 시신을 발굴해서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해서, 정확한 사인은 2024년 현재까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 센 강의 미지의 여인: 프랑스 센 강(Seine river)에서 건져올린 신원불명의 익사체로, 자는 듯이 반듯한 외모라 화제를 모았다. 일부는 시신의 얼굴이 오늘날 인공 호흡 훈련용 마네킹의 모티브가 되었다고도 하지만, 망자가 도대체 누구였는지는 불명이다.
-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 사망 사건과 가짜 드미트리: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는 러시아의 황태자로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황자였으나, 7살 때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타살당했다. 현재까지도 드미트리 황태자를 살해한 인물이 누구인지,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 드미트리 황태자를 사칭한 사람들의 존재도 역사학자들을 엿먹이고 있는데, 3명의 가짜들 중, 첫 번째로 드미트리 황태자를 사칭한 인물[39]을 제외하면, 나머지 둘의 정체는 밝혀진 바가 없다.[40] 러시아를 한동안 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만든 대사건치고는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관련된 미스터리
- 작품의 집필 방식: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살아생전에 많은 수의 작품을 집필했는데, 그 양이 매우 방대해서 과연 이것을 혼자서 모두 집필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작품들의 절대다수는 명백히 셰익스피어의 창작물이 맞는데, 단지 이 작품들을 집필하는 방식에 대해서만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가령, 에드워드 3세는 셰익스피어의 초기작 중의 하나인데, 그 자신은 40%만 집필하고 나머지는 다른 선배 극작가들이 집필한 것이다. 또다른 작품인 헨리 6세는 세익스피어 이전에 잉글랜드 최고의 극작가로 꼽히던 크리스토퍼 말로와의 합작품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협업이 아닌 그의 단독 집필작의 집필 방식은 여전히 의문이 남는데, 이에 대해 이런 작품들은 작품의 얼개와 대사 작성, 플롯 구성같은 큰 틀은 본인 직접 맡고, 나머지를 후배 극작가나 제자들에게 맡기는 식의 공장식으로 집필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에 대한 물증은 없는 상황이다.
- 제보당의 괴수: 위 중종 시기의 괴수 출현 소동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순전한 오인이나 집단 히스테리일 가능성이 높은 중종 시기의 소동과는 달리, 이쪽은 늑대는 확실히 아니라는 당시의 증언도 많거니와, 늑대라는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기록이 존재해서[41] 이쪽은 짐새의 사례처럼 실제로 존재했던 생물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그렇다면 이것의 정체가 뭐냐는 것인데, 학계에서는 실존한다는 전제 하에 이것이 대형 늑대와 개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인 늑대개일 가능성을 가장 유력하게 제시하고 있다. 첨언을 하자면 늑대와 개는 생물적으로 동일한 종이라서, 서로 번식이 가능하며 시베리아 등지에서 이 괴수와의 묘사와 흡사한 늑대개가 여러번 목격된 바 있었다.[42] 이 사건은 뒷날 영화 늑대의 후예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 차이코프스키의 사인: 흔히 차이코프스키는 콜레라 감염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작 당대의 관습대로 그의 시신에 입을 맞추는 의식을 했던 장례식의 조문객들이 콜레라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사실이 아니라고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였다는 점을 근거로, 당시의 분위기에 따라 음독 자살을 권유받았다는 설이 있는데, 이 설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 역사학자들도 독극물에 의한 사망을 유력한 사인으로 보지만, 심지어 진짜로 독살당한 게 맞는가하는 논란까지 있다.[43]
- 철가면: 17세기 프랑스의 정체불명의 재소자로, 볼테르는 그가 루이 14세의 쌍둥이 형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최근에는 상당히 유력한 가설이 제기되었는데, 이 사람의 정체는 외스타슈 도제라는 왕실 주치의라는 것이다.[44]
- 카스파 하우저 : 19세기 바이에른에 등장한 정체불명의 인물로 본인 주장대로라면 일종의 야생아로 추정되지만, 이 인물의 구체적인 출생 성분과 발견 이전의 과거가 무엇인지[45] 야생아가 맞다면 어떻게 발견 당시에도 상당한 언어 구사와 지식 습득이 가능했는지[46] 더 나아가 사망 이전의 피습 정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밝혀지지 않았다. 아예 인생 일부 또는 그 자체가 자작극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 역시 근거가 부족하다.[47]
- 테클라 봉다제프스카바라노프스카 : 동북아시아 등지에서 학교의 차임벨로 많이 쓰이는 소녀의 기도의 작곡가로 유명한 폴란드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살아생전에는 프랑스의 유명 음악 잡지에 그 활약상이 소개되거나[48] 모국에서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3급에 서임될 정도로 매우 성공한 음악인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봉다제프스카 본인이 겨우 38살의 나이로 요절한데다 그녀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나 그 모습을 그린 초상화, 그녀가 작곡한 작품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군이 가한 대대적인 폭격으로 인해 대거 소실되면서 그녀의 생애 전반과 작품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49] 냉전이 종식된 후에 폴란드 정부에서 남은 자료들을 박박 긁어모아서 그녀의 작품을 복원하고 있으나, 확실하게 봉다제프스카의 작품이라고 공인된 것은 소녀의 기도 하나 뿐으로 나머지는 그저 그녀의 곡이라는 추정만 있는 상태다.
- 피리 제독의 지도: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지도 제작자였던 피리 레이스가 만든 지도들은 당대의 다른 지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유사역사학자들이나 초고대문명설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남극 대륙이 그려진 지도를 운운하는 건 순전한 낭설에 불과하지만, 당시만 해도 영국이 찻주전자 비스무리한 모양으로 그려진다던가, 한반도가 섬으로 오인되는 등, 정밀도가 개판이던 시기에 어떻게 고도의 정밀함을 자랑하는 지도를 그렸는지가 수수께끼.
5. 현대사
- 그리고리 라스푸틴: 사망 원인 및 이전의 행적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문제가 된 잔치에서 그가 먹을만한 거의 모든 음식에 독을 타서 먹게끔 유도했는데도 시신 부검 결과 독극물이 검출되지 않았고 이후 다른 황족들에게 총에 맞은 뒤 말에 끌려가 네바 강에 던져지기 전 암살자들에게 둔기로 실컷 얻어 맞는 등 치명상이란 치명상은 다 입었는데도 당대에 확인된 최종 사인은 익사였다. 이에 대해 현대의 연구에서는 독극물의 경우 라스푸틴이 생전에 느끼던 암살 위험 때문에 음식을 가려먹던 터라 어쩌다 독이든 음식을 먹지 않았었고, 사망 당시 언제 폐에 물이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기에 익사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런 추가적인 연구 결과가 있음에도 사망 정황이 여러모로 의문스러운 건 마찬가지이다.
-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범인: 아래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방화와 함께 세계사, 그 중에서도 특히 전간기를 대표하는 미제 방화사건이자 세계사 연구의 중요한 떡밥[50]으로 1933년 당시 독일 국회의사당을 방화한 범인을 밝혀내는 것인데, 방화범이 누구인지는 현재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당시에는 용의자로 체포된 네덜란드 출신 공산주의자 마리뉘스 판데르뤼버가 단독범행이라고 자백했으나 히틀러 측이 이를 무시하고 사회주의 "세력"의 음모라고 노골적인 정치선전을 한 점, 재판상의 문제가 많고 결정적으로 증거가 없다는 점 때문에 마리뉘스 판데르뤼버가 범인이라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지고 현대에는 오히려 당시 나치가 불안정적으로 집권한 상황에서[51] 일당제 구축 및 사회주의자 탄압의 구실 생성 등의 유리한 요소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누명을 씌워 정치공작을 세울 목적으로 벌인 일이며 방화 사건도 이 중 일부(나치당 관계자가 직접 방화했거나,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를 매수해 시켰거나)라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참고로 이후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는 전후 독일 앙겔라 메르켈 내각 시기에 재판 상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하여 사면 및 복권되었다. 다만 이때도 진범이 누구인지는 특정하지 못했다.
- 라울 발렌베리의 최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될 뻔한 수많은 유대인들을 스웨덴 시민권자로 둔갑시켜서 구출해낸 의인으로, 소련에게 납치된 후의 그의 최후가 미스터리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소련군에 의해 굴라그에 수감되어 사망했다는 설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의 친 나치 행적: 일단 마르틴 하이데거가 나치당에 가입했고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나타낸 바 있어 하이데거가 나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 자체는 하이데거를 옹호하는 측에서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까지 나치에 개입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이데거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하이데거가 나치를 지지하는 주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별다른 정치적 활동 없이 학자 본업에 충실했음을 들며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가 그리 깊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그가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재임 시절 유태인, 반나치 성향 교수 추방 및 나치 이념에 맞지 않는 도서 정리 사업에 협력한 점 들어 나치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에 동조한 진성 나치임을 주장한다. 특히 하이데거의 직계 제자들이 학계에서 거의 은퇴한 21세기 들어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가 그동안 알려진 것 이상으로 긴밀했다는 의혹들이 속속들이 제기되고 있다.
- 소련 대중음악사와 관련된 미스터리
- 빅토르 초이 의문사 사건: 소련의 록 밴드인 키노의 리더였던 빅토르 초이가 지금의 라트비아 영토인 투쿰스에서 차를 타고 가던 중에 다가오는 버스와 정면충돌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한 사건인데, 이 사건은 당시 공산권 국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52]. 왜냐하면 빅토르 최는 단순히 잘 나가는 록 스타가 아니라, 당대 가장 유명하고 활동적이었던 자유주의 운동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못마땅히 여긴 소련 당국의 수뇌부들이 그를 사고로 위장해서 고의로 죽였다는 설이 심도 있게 제기된다. 당시의 정황도 단순 사고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다.
-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의 지하 록 밴드들의 활약상: 1953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로 서방권 록 밴드들을 모방하는 지하 록 밴드들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이 당시에 이들이 처한 환경이 너무 열악했던 나머지 상당수의 밴드들이 제대로 된 음반을 남기지 못했고, 이름이나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이 많아서, 많은 지하 록 밴드들에 대한 기록이 실전되었다. 이는 관제 밴드가 아닌 이상, 제대로 된 녹음 장비를 갖춘 스튜디오를 이용할 수 없었던 탓이 크다[53]. 이 당시의 사제 록 밴드들은 병원에서 폐기처분하는 X선 촬영 필름을 레코드판에 대고 누르는 식으로 조잡한 간이 레코드를 만들어서 앨범을 제작했는데[54], 축음기로 단 10번 가량만 재생을 시켜도 금방 망가져버릴 만큼 내구도가 형편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록 밴드들의 곡이 소실된 바람에, 소련의 대중음악사를 연구하는데 크나큰 장애로 남았다.
- 스페인 보르본 왕조와 관련된 미스터리
- 스페인의 왕정복고 과정: 스페인을 철권통치했던 독재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유언으로 왕정복고를 명령하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왕위 요구자였던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스페인의 국왕으로 추대했다. 허나, 그가 후계자를 지명하는 대신, 왕정복고를 강행한 이유는 불명이다. 심지어 합스부르크 왕가를 옹립하는 방안 대신에 부르봉 왕가를 복위시킨 원인도 미스터리하고[55], 왕정복고 과정에서 후안 카를로스 1세 측과 프랑코 측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이것 역시 상세한 내용이 알려진 바가 없다.
- 알폰소 왕자 총격 사망사건: 1956년 3월 20일에 스페인의 왕자이자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인 후안 백작이 가족들과 포르투갈에서 부활절 휴가를 지내고 있던 와중에, 그의 차남 인판테 알폰소가 15세의 나이에 의문의 총기 사고로 죽은 사건이다. 헌데 이 사건에 대해서, 다름아닌 형이자 후일 스페인의 왕이 되는 후안 카를로스가 알폰소에게 총을 쏘았다는 의혹이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전말은 2024년 현재까지도 밝혀진 바가 없다.
- 애거서 크리스티: 1926년 12월경부터 11일간 실종된 적이 있었는데, 이 실종과 관련된 의혹들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해소된 바 없다. 특히 애거서 크리스티 본인이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더군더나 언급을 피했기 때문에 수많은 추측만 남았다. 공식적으로는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일으켰던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렇게 볼 수 없는 부분도 많아서...
- 필트다운 인의 위조범: 화석은 위조된 것으로 판정되었지만, 위조범이 누구인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위조 용의자로 거론되는 인물들 가운데에는 추리 작가 아서 코난 도일, 화석학자이자 예수회 신부인 테아르 드 샤르뎅도 있다.
6. 여러 시기에 걸친 사건 및 시기 불명
여러 시기에 걸친 사건 또는 발생 시기가 불분명한 사건을 다룬다. |
- 로마노프 왕조와 관련된 미스터리
- 니콜라이 2세 일가 총살 사건의 배후 : 암살한 범인은 볼셰비키와 우랄 소비에트에 의해 선발된 "처형자"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의 지시를 받고 벌였는지가 밝혀져 있지 않다. 강경파였던 트로츠키가 그랬다는 설이 있지만 그의 회고록에는 레닌이 처형을 지시했다는 정황이 적혀있으며, 둘과는 별개로 우랄 소비에트에 명령을 내리는 게 가능했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라는 설도 제기되지만 당시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문서화된 기록이 없다시피 해서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56]
- 바실리 필라토프의 정체: 바실리 크세노폰트비치 필라토프(1907~1988)는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를 사칭한 인물이다.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 중 알렉세이 황태자와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황녀의 유해는 2007년까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알렉세이와 마리아는 당시 죽지 않고 탈출했다는 생존설이 돌았다. 필라토프는 알렉세이를 사칭한 수많은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다른 사칭자들과 다른 점은 일단 다른 사칭자들은 돈을 노리고 생전에 본인이 알렉세이라고 주장했으나 필라토프는 죽기 전 유언으로 본인이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라고 남겼다. 또한 필라토프의 전체적인 골격과 얼굴 생김새 등이 알렉세이와 매우 유사했으며, 그는 일개 구두 제화공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르간, 피아노, 하프시코드 등 여러 악기들을 연주할 수 있었고, 고전 음악과 러시아의 민속 음악, 오페라에도 조예가 깊었고 러시아의 역사에 박식했으며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포함해서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6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필라토프는 하층민인 일개 구두 제화공의 자녀라기에는 상식적으로는 납득될 수 없는 다방면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사기를 위해 노력 혹은 조작했다고 반론할 수도 있으나, DNA 검사 결과 필라토프의 자녀들의 유전자와 로마노프 왕조의 유전자가 일치하였다. 즉 필라토프는 로마노프 왕가의 일원이었던 것. 이러한 점들 때문에 학자들은 그가 탈출에 성공한 알렉세이 황태자라고 믿었으나, 2007년 알렉세이 황태자와 마리아 황녀의 유골이 발굴되면서 필라토프는 알렉세이 황태자가 아님이 밝혀졌다. 필라토프는 유언으로 자신이 알렉세이라고 밝혔기에 가짜 아나스타시야처럼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함이라고 볼 수 없다. 더군다나 DNA 검사 결과까지 로마노프 왕조와 일치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필라토프는 로마노프 왕조의 방계 후손이거나, 니콜라이 2세의 혼외자녀 또는 숨겨진 자녀였기 때문에 일반 귀족으로 숨겨 키워서 로마노프 왕조 숙청 때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필라토프 본인도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의 동생 혹은 이복동생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소련 치하에서 자신의 친족들이 숙청당하는 것을 보고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임종 직전에 그걸 공개했는데, 노년에 기억에 혼선이 생겨 자신이 알렉세이 본인이었다고 잘못 기억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필라토프 본인이 이미 사망했고, 자녀들도 필라토프의 임종 직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돼서 앞으로도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많다.
- 알렉산드르 1세의 최후: 공식적으로는 1825년 12월 1일 크림반도에서 요양중 병사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은거했다는 설이 있다. 차르가 죽은지 11년후 나타난 성직자 표토르 쿠즈미치가 은거한 알렉산드르 1세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알렉산드르 1세가 크림 반도로 요양간 것도 병약한 옐리자베타 황후를 위해서였는데, 정작 죽은 것은 건강한 차르였다. 또한 차르의 시신을 일반에 공개하는 전통행사도 치러지지 않았다. 폭행치사당한 표트르 3세나 파벨 1세의 시신도 공개됐음을 생각하면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또한 차르의 주치의는 차르의 사망증명서에 사인하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나중에 차르의 관을 열어보았더니 관이 텅 빈 상태였다.
- 애나 앤더슨 사기사건의 배후: 애나 앤더슨은 오랫동안 생존설이 있었던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를 사칭한 인물이며, 위의 바실리 필라토프와는 달리 로마노프 왕조와는 아무런 혈연도 없던 진짜배기 사기꾼이다[57]. 문제는 러시아 제국의 황녀를 사칭한 사기꾼치고는 아나스타시야 공주의 사생활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과, 러시아 황실의 복잡한 예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그녀가 사기꾼임을 진작에 알고있던 이들도 당혹스럽게 하는 부분이었고, 때문에 당대에도 그녀의 사기극에 대해 배후가 따로 있다는 설이 줄곧 제기되었다. 일단은 생존한 로마노프 왕조의 구성원이나 그 주변인이 이 사기극의 배후일 가능성이 높지만, 애나 앤더슨 본인이 사기꾼임을 완강히 부정하며 배후에 대해 함구하다가 사망했으므로, 그녀를 사주한 진범이 누구인지를 특정할 수 없게 되었다. 단독범 설도 존재하는데, 애나 앤더슨이 결코 다루기 쉽지 않은 인물[58]이었고, 애나의 평생 행보를 조사해도 누군가 그녀를 조종했다고 볼 만한 뚜렷한 정황도 없기 때문이다. 애나를 조종한 용의자로 꼽히는 글렙 봇킨[59]만 해도, 전문가들은 오히려 애나에게 속아 넘어가 평생 그녀에게 놀아난 피해자에 가깝다고 본다.
- 로마 제국과 관련된 미스터리
- 고대 로마의 초창기 역사: 황당하게도 뒷날 온 지중해를 호령하게 되는 희대의 대제국의 초기 역사의 많은 부분이 기록 부족으로 인해 수수께끼에 싸여있는 상태이다[60]. 로마 국왕에 해당하는 왕들의 정체에서부터, 로마가 당대에는 다소 생소했던 공화정 체제를 무슨 경위로 받아들였는지가 모두 의문에 싸여 있다.[61] 관련 기록이 부족해진 이유는 초창기에 켈트족[62]의 침공으로 로마 시가 불타고 각종 공물을 뜯기면서 관련 기록들이 불타서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방화 주체: 중세 이후부터 내려온 오래된 논쟁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운 자가 누구냐는 것이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도서관의 건립을 명령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측근들이 직접 남긴 기록물이나, 당대의 학술서적 및 문학 작품들이 대거 소장되어 있어서 도서관의 소실은 대단히 뼈아픈 손실로 여겨지므로, 이 도서관에 방화를 저지른 주체가 누구인지 논쟁이 활발하다. 한때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방화한 주체로 무슬림으로서는 최초로 이집트를 지배한 사람인, 정통 칼리파 우스만과 그를 따라온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추정되었으나 분명한 근거가 없었고, 현대에는 되려 고대 로마 시대의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도서관을 불태웠다는 설도 있다[63].
- 9군단 히스파나의 해산 계기와 과정: 고대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창설된 9군단 히스파나는 이름대로 로마의 히스파니아 속주에 주둔해있던 군단이다.[64] 이 군단은 서기 120년 경을 전후하여 갑자기 모든 사료에서 기록이 사라져버렸고, 이에 대한 전말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서 역사학자들의 의문을 낳고 있다. 독일의 역사학자인 테오도어 몸젠은 히스파니아 제9군단이 108년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발생한 켈트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동원되었다가, 현지 반란군에게 전멸당했다는 가설을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오히려 제9군단이 이 반란에서 살아남아서 브리타니아에서 철수했고[65], 이후에 다른 무력 분쟁을 해결하는데 동원되었다가 거기서 궤멸되었다는 설도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브리타니아 속주에서의 반란 이외에 이들을 전멸시켰던 무력 분쟁으로 오늘날의 이스라엘 지역인 유대 속주에서 현지 유대인들이 일으킨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에 있었던 파르티아와의 분쟁이 지목되기도 하나, 모두 분명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현재까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치세 이전에 이 군단이 완전히 해산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 글리케리우스의 최후: 글리케리우스는 일시적으로 서로마 황제로 재위하다가 율리우스 네포스를 추대한 동로마군에 의해 축출된 인물이다. 476년에 서로마가 멸망하고도 4년이 지난 시점인 480년, 달마티아에서 황제를 칭하며 할거하던 율리우스 네포스가 암살당했는데, 그 배후로 추정되는 게 글리케리우스라서 그 당시까지는 살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최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475년 율리우스 네포스가 축출된 이후 서로마 황제로 즉위했다가, 476년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되며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로 기록된 인물이다. 일단 그 당시에는 살해당하지 않고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최후: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동시에 고대부터 2,200여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며 제국이 멸망할 때 최후까지 항전하다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사람이 없어서 그게 확실하다고 단정할 순 없다. 서유럽인이나 오스만인이 남긴 기록에는 그가 도망치다 잡혀서 목이 달아났다는 기록도 있지만,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그것도 사실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래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 마게이트 조개 동굴: 1835년에 발견되었기에 그 이전에 지어진 것은 확실하나 보존을 잘못하는 바람에(...)[66] 이 조개 동굴의 정체는 미지로 남게 되었다.
- 에든버러의 미니어처 관: Edinburgh's miniature coffins. 1836년에 지역 소년들이 토끼굴 속에서 우연히 발굴한, 길이 3~4인치 정도의 17개의 작은 관(棺). 그 속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작은 목제 조각상들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이 작은 관들을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든 것인지가 불명. 많은 민속학자들과 향토사학자들, 고고학자들, 스코틀랜드 문화 전문가들이 달려들어 연구했으며 나중에는 DNA 검출까지 시도했으나 별다른 진전은 없는 상태. 일단 제기된 가설들로서 중요한 정치 운동 지도자들을 기념하는 물건이라는 설, 또는 그 지역의 악랄한 범죄자가 피해자들을 살해한 후 기념품처럼 만든 것이라는 설이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관 속의 조각상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1]
즉, 바티카누스 언덕은 아직까지는 추정이라는 것이다. 현재 역사학계는 처음부터 그가 여기에 묻힌 건 아니라고 보는데, 로마의 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에 묻힌 뒤 장소의 지리적인 사항이 바꼈거나 시신이 이동된 것으로 보고 있다.
[2]
기록대로라면 베드로가 순교했을 때가 기원후 66년경이며, 그의 나이는 향년 64~66세가 된다. 즉 저 유골의 감식 결과와 맞아 떨어지는 것.
[3]
정확히 말하면, 베드로가 순교한 뒤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의 무덤의 위치가 비밀로서 내려져왔었다, 그러나 로마의 박해가 끝날 때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 비밀이 왜곡이나 와전이 되어 버린 것. 현재 그의 무덤이 논란인 것도 그래서이며, 이들 증언만 믿자니
베드로의 무덤이 여러개가 되어버리니 확실하게 밝히지를 못하는 것이다.
[4]
나머지는
네브라 하늘 원반과
파에스토스 원반이다.
[5]
안티키테라 기계가 만들어지기 2세기 전에
에라토스테네스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아스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두 곳에서
태양의 남중 고도를 측정한 다음에, 이를 토대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낸 바가 있었다. 당연히 현대에
지구과학자들이 계산해낸 수치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6000km정도로 고대인의 계산 결과치고는 상당히 정확한 수치를 얻어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헤론은 무려
증기 기관을 이용한 장난감을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물론 경제성의 문제로 인해 증기 기관이 실용화되려면 18세기
산업 혁명기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고대의 인류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성과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있던 건 사실이다.
[6]
예를 들어
아르키메데스,
헤론 등
[7]
기원전 3300년 경에 오늘날의
알프스산맥 일대에서 살았던
외치라는 고대
유럽인의 미라에 대한 연구 성과가 대표적인데, 외치 본인은 수렵채집 생활로 먹고살던 전업 사냥꾼이었으나, 그의 내장에서 다량의 곡물이 발견되었고
치아의 마모 형식에서 장기간의 채식의 흔적이 나타나므로, 전형적인 농경민족 출신이었음이 분명하게 밝혀져있다. 외치의 사인은 외지인과의 전투 중에 화살을 맞은 뒤에 뒤통수를 가격당하여 전사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그가 살던 시기에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나 비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들의 유입과 이주가 매우 활발했고, 이에 따른 유혈 충돌 또한 잦았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8]
미노스 문명의 주민들은
선형문자 A라는 일종의 선형 문자로 된 기록을 남겼는데, 아직 이 문자의 해독에 성공한 학자가 없다. 이외에도
파에스토스 원반에 쓰였던 문자도 있었지만 이것 역시 해독에 성공하지 못했다.
[9]
인도유럽어족 계통 언어라는 주장은 다시 고전 그리스어의 직계 조상이나 자매 언어라는 설과,
아나톨리아어파라는 설로 나뉜다. 그 이외에는
에트루리아어가 속한 어족으로 추정되는 티레니아어족이라는 설도 있고,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의
베르베르어파나
셈어파로 분류하는 설도 있으며,
아나톨리아 선주민들이 구사한 언어인
하티어와 동계라는 설도 있다.
[10]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라는 설도 있고,
에게해 제도의 토착민들로,
에트루리아인의 사촌 격인 민족으로 추정되는 티레니아인이나,
아나톨리아 반도의 선주민과 동계라는 설,
중동의
셈족 계통 민족이라는 설도 있지만,
미노스 문명에서 사용한 문자인
선형문자 A도 해독되지 못해서 알기 어렵다.
[11]
고대 이집트 측의 기록을 보면
크레타 출신 용병들을 '케프티우(Keftiu)'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이
미노스 문명의 주민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으리라는 추정이 있다.
[12]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서기 700년 경의 작품인데 반해,
파에스토스 원반은 기원전 1700년 경의 물건이다.
[13]
미노스어는
선형 A 문자로 표기되었는데, 이 문자도 2024년 현재까지 해독이 전혀 안 된 글자고,
파에스토스 원반의 문자는 선형 A 문자가 아닌 별개의
상형문자다.
[14]
아래의
티레니아어족 가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에트루리아어는
비교언어학적 고립어로 추정된다.
[15]
발굴된
에트루리아인의 유골을 조사해본 결과로는
하플로그룹 G의 비중이 높게 나타났는데, 이 하플로그룹은
조지아인이나
체첸인같은
캅카스 선주민들에게서 흔하다.
[16]
트로이의 왕자였던
아이네이아스가 멸망한 조국의 유민들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하여,
로마 제국의 선조가 되었다는 설화다.
[17]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헤파이스토스가
올림포스에서 떨어져서 추락한 섬으로 전해지는 그 섬이다.
[18]
달리
레트어라고도 한다.
[19]
에트루리아인들은 오늘날의
이탈리아의
에밀리아로마냐 주와
라치오 주에서 흥성했던 초기
철기 시대 문화인
빌라노바 문화의 후손들인데, 이 문화는
중부유럽에서 발흥했던
선사 시대 문화인
언필드 문화의 분파다. 즉, 에트루리아인과 그 친척 민족으로 추정되는 렘노스인, 라이티아인은 전부 중부유럽에서
남유럽으로 기나긴 이주를 했다는 뜻이다.
[20]
몰타가
북아프리카와 매우 가깝다는 점을 들어, 당시에
누미디아라고 불리던 북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인들이 세운 것이 아닐까하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지만, 현재까지
이집트 및
수단 이외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발견된 문명의 흔적은 기원전 800년경에 지금의
튀니지 일대에 건설된
카르타고를 포함한
페니키아인들의 식민도시가 최초다. 그 이전에는 문명을 이룰 정도로 발전한 문화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에
신석기 시대의
인류가 건설한 유적인
괴베클리 테페가 발견되면서, 타르신 신전을 건립한 이들이 꼭 문명을 이루고 산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21]
바스크인들의 조상 격 민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애초에
바스크어와
이베리아 반도 원주민들의 언어인
이베리아어 간의
비교언어학적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료가 부족하여 바스크어와 이베리아어가 실제로 친연성이 있는 언어인지, 단순한
언어동조대인지는 규명되지 않았다. 또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미 기원전부터
켈트족들이 오늘날의
스페인의
갈리시아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에,
타르테소스가 켈트계 국가이거나, 켈트계와 이베리아계 또는 바스크계와의 혼혈인 집단이 건설한 국가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 이외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해서 세운 나라라는 설도 존재한다.
[22]
전사자들의 유골에서
청동제 무기로 공격당한 흔적이 대거 발견되었지만, 정작 청동기 유물은 그리 많이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고고학자들은 당대에는 꽤 귀한 물건이었던 청동기들을 승리한 쪽이 전리품으로서 탈취한 것으로 추정했다.
[23]
참고로
알바니아인은
아르메니아인과 함께
그리스인의 자매민족으로 유력시되는 민족이다.
[24]
박물관에 전시된 놋쇠황소는 전해지는 추정을 기반으로 복원해 본 것이다.
[25]
확실한 것은, 오늘날의
헝가리를 세운
마자르족의 침략이 멸망의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다만 마자르족의 침략 이후로
대 모라비아 왕국이 얼마나 버텼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 모라비아의 마지막 왕이 누구인지는 다소 분명치 않다.
[26]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까지도
로빈 후드의 이름을 걸고 활약했던 도적들이 있었다.
[27]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인
월터 스콧 경이 저술한 소설
아이반호의 등장인물로 잘 알려져있는데, 작중에서는
로빈 후드의 정체가 그라고 설정되어있다.
[28]
참고로 이 문서에는 무려
은하가 나온다. 은하라는 개념이 처음 밝혀진건 19세기 말엽의 일이며, 그 존재가 확실히 입증된 건 1917년에
미국의
천문학자인
에드윈 허블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중세시대의 문서에 어떻게
은하가 나올 수 있겠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데, 옛날에는 은하의 정체를 모른 채로 그 모양만 알아서 이를 '소용돌이 성운'이라는 이름의
성운의 한 종류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중세기의 기록에 은하가 나오는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니며, 단지 은하로서 인식된 게 아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은하 그림때문에 이 문서의 정체가
중세
유럽의
자연과학 관련
백과사전 내지는 교양과학 서적이라는 설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29]
만주어,
베트남어 등의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쪽 언어라는 주장도 있고,
아랍어나
히브리어라는 주장도 있으며, 문서의 저자가 창안한
인공어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문서에 적힌 언어를 기술하는 데 쓰인 문자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서 모두 가설에 불과한 상태이다.
[30]
2017년에 이 문서를 해독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오류로 끝났다. 다만, 문서 해독 방식에서 유의미한 진전은 있었다.
항목 참조.
[31]
이들이
튀르크 계통이라는 점에서
돌궐의 분파일 것이라는 설은 있다.
[32]
귀족 출신 여성이었는데, 일개 평민에 불과했던 베토벤과의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혼에 실패했다.
[33]
문자 그대로의 친구, 즉,
여사친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고, 사실은 줄리에타와의 이별 이후에 친구 사이를 넘어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34]
사족으로 이 사람과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가 있었다는 설이 있으며, 주류 역사학계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있다. 자세한건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이 남긴 화제 문서 참조.
[35]
음악, 문화예술의 도시 이미지에 가려져 있지만 빈은 베토벤 당시에도 중부 유럽에서 손꼽히는 상공업 도시였다.
[36]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은 병의 확산을 막기위해, 다른 시신과 함께 공동으로 매장하도록 강제한 정책이다. 당시
모차르트는
티푸스로 사망했다고 추정되었으므로, 이 정책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묻혔다.
[37]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무덤은 현존하므로, 모차르트 본인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된다면 레오폴트의 무덤을 발굴해서 친자확인을 하면 그만이다.
[38]
당시
모차르트는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 여겨져서 다른 이들과 함께 공동으로 매장되었고, 당시의 장례 관습에 따라 매장 과정을 유가족들이 참관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의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39]
그리고리 오트리피예프라는
정교회
수도자 지망생이었는데, 가족들이 수도자의 길을 걸으라고
수도원에 들여보냈더니 되라는 수도자는 안 되고 달아난 양아치였다. 그런데 이 인간이 별안간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자, 갑자기 자기가 그 사라진 황태자였다고 믿고는
폴란드 귀족 여인
마리나 므니셰흐와 결혼하고 폴란드 세력을 끌어들여서 러시아의
차르의 지위를 차지했다. 근데 이게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사라진 왕자를 자칭하면서 외국군을 끌고 와서 보위를 강탈한 격이라서 러시아 국민들이
피꺼솟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그를 차르의 지위에서 끌어내버리고는 대포에 장전해서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해버렸다. 일개
양아치 하나가 거하게 오해를 해서 나라를
헬게이트로 만든 셈이다.
[40]
일단 2번째 가짜는
리투아니아의 감옥에서 탈옥한 죄수라고 하며, 3번째는
동방정교회
사제 양성 과정을 밟던
부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과거 행적이나 본명 등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골때리는 건 이 둘은 자기가 진짜로 사라진 황태자라고 믿은
첫 번째 가짜와는 달리 자기들이 가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출세하려고 전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간 큰 사기꾼이라는 소리다.
[41]
사체는 악취를 이유로 왕실측의 지시로 인해 매장되었지만(어딘지는 모른다.) 매장 전에 부검을 한 기록을 남겨뒀기 때문이다. 후술할
개-늑대 잡종이 아닌 일반적인 경우에는 전반적인 크기가 일치하는 종이 없다.
[42]
늑대개는
사람으로 치면,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끼리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라고 보면 된다.
[43]
소련 시절에
차이코프스키의 유해를 분석한 결과,
비소가 검출되기는 했다.
[44]
실제의 철가면은 검은 벨벳으로 된 복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 철가면의 정체가 외스타슈 도제라는 최근의 가설에서는 왜 그가 복면을 쓸 것을 강요받았냐는 의문점을 도제가 그저 왕실 주치의, 즉, 범털(돈 많고 백 있는 복역수)이라서 복면이 씌워진 것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의 복면은 그저 죄수에게 씌우는 용수의 역할이었을 뿐, 딱히 죄수의 신분을 숨기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45]
출생 성분에 대해서는 어느 왕가나 귀족의 자식이지만 후계 구도로 인해 존재가 지워지고 유폐시켰다는 설이 있고, 실제로 20세기에 그가 감금당했다고 주장한 장소와 거의 흡사한 모습의 공간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다만 특정 왕가의 후손이란 설은 현대의 DNA 조사를 통해 일부 부정된 상태이며 발견된 장소 또한 그가 감금당했다는 정황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46]
야생아인 것이 사실이라면 현재 언어학계에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결정적 시기 가설의 중요한 반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설대로라면 그 시기에 있던 언어적 상호작용이 없다시피 한 감금으로 인해 언어 습득 시기를 놓친 카스퍼는 언어를 구사할 수 없어야 하지만 일반 사람처럼 유창하게 구사했다는 것이 논점이다. 다만 단순히 언어적 상호작용 외에도 '야생소년 지니'의 사례처럼 후천적인 이유로 인한 정신장애 등의 요인도 변수가 될 수 있어 이 부분은 현재도 논쟁 사항이긴 하다.
[47]
현재는 사망에 대해선 애정결핍이나 관심병 비슷한 것으로 인한 자작극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는 있지만, 야생아였다는 점이 거짓일 가능성은 상술한 자신의 환경에 대한 상세하고 일관적인 진술로 인해 다소 낮다고 보고 있다.
[48]
소녀의 기도가 이 잡지에 실린 작품인데, 이 때문에 이 작품은
봉다제프스카의 곡들 중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게 보존되어 현존하고있다.
[49]
그나마 외모는 당대에 발간된 잡지에 실린 캐리커처로 대강 유추는 할 수 있으며, 정확한 생년월일과 사망 당시 나이도 불명이었다가, 2023년에 그녀의 출생 기록이 발견되면서 1823년 9월 17일생이고 38살의 나이로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명이다.
[50]
전자는 가설의 사실 여부에 따라 당시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만행을 추론해 볼 수 있으며, 후자는 독일 나치당의 수권법 처리 과정을 설명해줄 열쇠가 될 수 있다.
[51]
앞에 써있지만 나치당은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아직은 복수정당제의 여당에 불과했으며 우리가 아는 나치 독일인 완벽한 일당제는 이 사건 직후에 완성되었다. 타이밍이 절묘해서 이러한 인과관계도 후술할 가설의 근거로 주로 인용되고 있다.
[52]
자본주의 진영에서의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과 동급의 여파를 가져왔다고 보면 된다.
[53]
페레스트로이카 이후로 활동했던 지하 록밴드들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때문에 이들의 초기 음반은 영구히 실전되거나, 일부 곡만 온전히 남아 현존하는 경우도 많다.
[54]
이를
러시아어로
갈비뼈라는 뜻의 '료브라'(ребра)라고 불렀다.
[55]
다만,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미 18세기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스페인 왕위를 상실한데 비해,
부르봉 왕가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975년을 기준으로 44년 전인
1931년까지는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던 터라, 왕위 계승에 더 명분이 있는 편이었다.
[56]
시간이 지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 보리스 옐친 시기의 러시아 연방이 셋 다 공식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결론내린 적은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소련을 악마화하려던 입장이 강했는데도 저런 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이 몰살의 배후에 대한 정확한 내막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57]
본명은 프란치슈카 샨코프스카(Franciszka Szankowska)로,
러시아인의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않은
폴란드인이다.
[58]
애나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인물이었다. 정신병원 입원 경력도 있고, 퇴원 이후에도 꾸준히 정신적 혹은 심리적 문제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트러블을 일으켰다.
[59]
니콜라이 2세 사망 당시 함께 살해당한 주치의의 아들이다.
[60]
초기
라틴어로 된 기록은 여럿 발견되고 있지만, 현대의
언어학자들은 물론
고대 로마의 지식인들도 해독에 실패했다. 그래서 이 기록만으로는
로마의 초기 역사를 알아내는 건 무리다.
[61]
물론 전근대 시대에
공화국이었던 나라는 생각보다 많았다.
고대 로마는 물론, 로마의 대선배격으로
그리스의 각 폴리스들이 먼저 공화정을 실시하였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인
이로쿼이 연맹도 연맹의 총 수장을 부족 회의에서 선출했다. 말기의
카르타고나,
판관기 시기의
이스라엘도 공화국이었으며, 심지어는
동북아시아에서 공화(共和)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는
주나라부터 시작해 한반도의
동예나
옥저까지도 왕이 없었다고 나온다.
[62]
390년 브렌누스가
알리아 전투 승리 후 로마 시를 약탈했다.
[63]
고대 로마 시기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당대의 존경받던 학자인
히파티아를 잔혹하게 살해한 적이 있으니 그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이 때문에 히파티아가 살해당할 당시에 도서관도 같이 불탔다는 설도 있다.
[64]
영화
센츄리온과
더 이글은 이 9군단을 소재로 만들었다.
[65]
여기서 다시
9군단 히스파나가
켈트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는 설과 진압에 실패했다는 설로 나뉜다.
[66]
발견 이후 동굴 내부를 밝게 하기 위해 조명을 켰는데, 문제는 이 조명이 조개를 오염시켜버려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