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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관련 정보/역사 관련 정보/세계사/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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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사3. 중세사4. 근대사5. 현대사6. 여러 시기에 걸친 사건 및 시기 불명

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세계사의 미스터리의 유럽 부분을 서술한 문서.

2. 고대사

3. 중세사

4. 근대사

5. 현대사

6. 여러 시기에 걸친 사건 및 시기 불명

여러 시기에 걸친 사건 또는 발생 시기가 불분명한 사건을 다룬다.


[1] 즉, 바티카누스 언덕은 아직까지는 추정이라는 것이다. 현재 역사학계는 처음부터 그가 여기에 묻힌 건 아니라고 보는데, 로마의 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에 묻힌 뒤 장소의 지리적인 사항이 바꼈거나 시신이 이동된 것으로 보고 있다. [2] 기록대로라면 베드로가 순교했을 때가 기원후 66년경이며, 그의 나이는 향년 64~66세가 된다. 즉 저 유골의 감식 결과와 맞아 떨어지는 것. [3] 정확히 말하면, 베드로가 순교한 뒤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의 무덤의 위치가 비밀로서 내려져왔었다, 그러나 로마의 박해가 끝날 때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 비밀이 왜곡이나 와전이 되어 버린 것. 현재 그의 무덤이 논란인 것도 그래서이며, 이들 증언만 믿자니 베드로의 무덤이 여러개가 되어버리니 확실하게 밝히지를 못하는 것이다. [4] 나머지는 네브라 하늘 원반 파에스토스 원반이다. [5] 안티키테라 기계가 만들어지기 2세기 전에 에라토스테네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아스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두 곳에서 태양의 남중 고도를 측정한 다음에, 이를 토대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낸 바가 있었다. 당연히 현대에 지구과학자들이 계산해낸 수치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6000km정도로 고대인의 계산 결과치고는 상당히 정확한 수치를 얻어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헤론은 무려 증기 기관을 이용한 장난감을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물론 경제성의 문제로 인해 증기 기관이 실용화되려면 18세기 산업 혁명기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고대의 인류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성과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있던 건 사실이다. [6] 예를 들어 아르키메데스, 헤론 [7] 기원전 3300년 경에 오늘날의 알프스산맥 일대에서 살았던 외치라는 고대 유럽인의 미라에 대한 연구 성과가 대표적인데, 외치 본인은 수렵채집 생활로 먹고살던 전업 사냥꾼이었으나, 그의 내장에서 다량의 곡물이 발견되었고 치아의 마모 형식에서 장기간의 채식의 흔적이 나타나므로, 전형적인 농경민족 출신이었음이 분명하게 밝혀져있다. 외치의 사인은 외지인과의 전투 중에 화살을 맞은 뒤에 뒤통수를 가격당하여 전사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그가 살던 시기에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나 비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들의 유입과 이주가 매우 활발했고, 이에 따른 유혈 충돌 또한 잦았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8] 미노스 문명의 주민들은 선형문자 A라는 일종의 선형 문자로 된 기록을 남겼는데, 아직 이 문자의 해독에 성공한 학자가 없다. 이외에도 파에스토스 원반에 쓰였던 문자도 있었지만 이것 역시 해독에 성공하지 못했다. [9] 인도유럽어족 계통 언어라는 주장은 다시 고전 그리스어의 직계 조상이나 자매 언어라는 설과, 아나톨리아어파라는 설로 나뉜다. 그 이외에는 에트루리아어가 속한 어족으로 추정되는 티레니아어족이라는 설도 있고, 아프리카아시아어족 베르베르어파 셈어파로 분류하는 설도 있으며, 아나톨리아 선주민들이 구사한 언어인 하티어와 동계라는 설도 있다. [10]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라는 설도 있고, 에게해 제도의 토착민들로, 에트루리아인의 사촌 격인 민족으로 추정되는 티레니아인이나, 아나톨리아 반도의 선주민과 동계라는 설, 중동 셈족 계통 민족이라는 설도 있지만, 미노스 문명에서 사용한 문자인 선형문자 A도 해독되지 못해서 알기 어렵다. [11] 고대 이집트 측의 기록을 보면 크레타 출신 용병들을 '케프티우(Keftiu)'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이 미노스 문명의 주민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으리라는 추정이 있다. [12]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서기 700년 경의 작품인데 반해, 파에스토스 원반은 기원전 1700년 경의 물건이다. [13] 미노스어 선형 A 문자로 표기되었는데, 이 문자도 2024년 현재까지 해독이 전혀 안 된 글자고, 파에스토스 원반의 문자는 선형 A 문자가 아닌 별개의 상형문자다. [14] 아래의 티레니아어족 가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에트루리아어 비교언어학적 고립어로 추정된다. [15] 발굴된 에트루리아인의 유골을 조사해본 결과로는 하플로그룹 G의 비중이 높게 나타났는데, 이 하플로그룹은 조지아인이나 체첸인같은 캅카스 선주민들에게서 흔하다. [16] 트로이의 왕자였던 아이네이아스가 멸망한 조국의 유민들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하여, 로마 제국의 선조가 되었다는 설화다. [17]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헤파이스토스 올림포스에서 떨어져서 추락한 섬으로 전해지는 그 섬이다. [18] 달리 레트어라고도 한다. [19] 에트루리아인들은 오늘날의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주와 라치오 주에서 흥성했던 초기 철기 시대 문화인 빌라노바 문화의 후손들인데, 이 문화는 중부유럽에서 발흥했던 선사 시대 문화인 언필드 문화의 분파다. 즉, 에트루리아인과 그 친척 민족으로 추정되는 렘노스인, 라이티아인은 전부 중부유럽에서 남유럽으로 기나긴 이주를 했다는 뜻이다. [20] 몰타 북아프리카와 매우 가깝다는 점을 들어, 당시에 누미디아라고 불리던 북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인들이 세운 것이 아닐까하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지만, 현재까지 이집트 수단 이외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발견된 문명의 흔적은 기원전 800년경에 지금의 튀니지 일대에 건설된 카르타고를 포함한 페니키아인들의 식민도시가 최초다. 그 이전에는 문명을 이룰 정도로 발전한 문화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에 신석기 시대 인류가 건설한 유적인 괴베클리 테페가 발견되면서, 타르신 신전을 건립한 이들이 꼭 문명을 이루고 산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21] 바스크인들의 조상 격 민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애초에 바스크어 이베리아 반도 원주민들의 언어인 이베리아어 간의 비교언어학적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료가 부족하여 바스크어와 이베리아어가 실제로 친연성이 있는 언어인지, 단순한 언어동조대인지는 규명되지 않았다. 또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미 기원전부터 켈트족들이 오늘날의 스페인 갈리시아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에, 타르테소스가 켈트계 국가이거나, 켈트계와 이베리아계 또는 바스크계와의 혼혈인 집단이 건설한 국가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 이외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해서 세운 나라라는 설도 존재한다. [22] 전사자들의 유골에서 청동제 무기로 공격당한 흔적이 대거 발견되었지만, 정작 청동기 유물은 그리 많이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고고학자들은 당대에는 꽤 귀한 물건이었던 청동기들을 승리한 쪽이 전리품으로서 탈취한 것으로 추정했다. [23] 참고로 알바니아인 아르메니아인과 함께 그리스인의 자매민족으로 유력시되는 민족이다. [24] 박물관에 전시된 놋쇠황소는 전해지는 추정을 기반으로 복원해 본 것이다. [25] 확실한 것은, 오늘날의 헝가리를 세운 마자르족의 침략이 멸망의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다만 마자르족의 침략 이후로 대 모라비아 왕국이 얼마나 버텼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 모라비아의 마지막 왕이 누구인지는 다소 분명치 않다. [26]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까지도 로빈 후드의 이름을 걸고 활약했던 도적들이 있었다. [27]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인 월터 스콧 경이 저술한 소설 아이반호의 등장인물로 잘 알려져있는데, 작중에서는 로빈 후드의 정체가 그라고 설정되어있다. [28] 참고로 이 문서에는 무려 은하가 나온다. 은하라는 개념이 처음 밝혀진건 19세기 말엽의 일이며, 그 존재가 확실히 입증된 건 1917년에 미국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중세시대의 문서에 어떻게 은하가 나올 수 있겠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데, 옛날에는 은하의 정체를 모른 채로 그 모양만 알아서 이를 '소용돌이 성운'이라는 이름의 성운의 한 종류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중세기의 기록에 은하가 나오는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니며, 단지 은하로서 인식된 게 아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은하 그림때문에 이 문서의 정체가 중세 유럽 자연과학 관련 백과사전 내지는 교양과학 서적이라는 설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29] 만주어, 베트남어 등의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쪽 언어라는 주장도 있고, 아랍어 히브리어라는 주장도 있으며, 문서의 저자가 창안한 인공어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문서에 적힌 언어를 기술하는 데 쓰인 문자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서 모두 가설에 불과한 상태이다. [30] 2017년에 이 문서를 해독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오류로 끝났다. 다만, 문서 해독 방식에서 유의미한 진전은 있었다. 항목 참조. [31] 이들이 튀르크 계통이라는 점에서 돌궐의 분파일 것이라는 설은 있다. [32] 귀족 출신 여성이었는데, 일개 평민에 불과했던 베토벤과의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혼에 실패했다. [33] 문자 그대로의 친구, 즉, 여사친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고, 사실은 줄리에타와의 이별 이후에 친구 사이를 넘어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34] 사족으로 이 사람과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가 있었다는 설이 있으며, 주류 역사학계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있다. 자세한건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이 남긴 화제 문서 참조. [35] 음악, 문화예술의 도시 이미지에 가려져 있지만 빈은 베토벤 당시에도 중부 유럽에서 손꼽히는 상공업 도시였다. [36]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은 병의 확산을 막기위해, 다른 시신과 함께 공동으로 매장하도록 강제한 정책이다. 당시 모차르트 티푸스로 사망했다고 추정되었으므로, 이 정책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묻혔다. [37]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무덤은 현존하므로, 모차르트 본인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된다면 레오폴트의 무덤을 발굴해서 친자확인을 하면 그만이다. [38] 당시 모차르트는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 여겨져서 다른 이들과 함께 공동으로 매장되었고, 당시의 장례 관습에 따라 매장 과정을 유가족들이 참관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의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39] 그리고리 오트리피예프라는 정교회 수도자 지망생이었는데, 가족들이 수도자의 길을 걸으라고 수도원에 들여보냈더니 되라는 수도자는 안 되고 달아난 양아치였다. 그런데 이 인간이 별안간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자, 갑자기 자기가 그 사라진 황태자였다고 믿고는 폴란드 귀족 여인 마리나 므니셰흐와 결혼하고 폴란드 세력을 끌어들여서 러시아의 차르의 지위를 차지했다. 근데 이게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사라진 왕자를 자칭하면서 외국군을 끌고 와서 보위를 강탈한 격이라서 러시아 국민들이 피꺼솟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그를 차르의 지위에서 끌어내버리고는 대포에 장전해서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해버렸다. 일개 양아치 하나가 거하게 오해를 해서 나라를 헬게이트로 만든 셈이다. [40] 일단 2번째 가짜는 리투아니아의 감옥에서 탈옥한 죄수라고 하며, 3번째는 동방정교회 사제 양성 과정을 밟던 부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과거 행적이나 본명 등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골때리는 건 이 둘은 자기가 진짜로 사라진 황태자라고 믿은 첫 번째 가짜와는 달리 자기들이 가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출세하려고 전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간 큰 사기꾼이라는 소리다. [41] 사체는 악취를 이유로 왕실측의 지시로 인해 매장되었지만(어딘지는 모른다.) 매장 전에 부검을 한 기록을 남겨뒀기 때문이다. 후술할 개-늑대 잡종이 아닌 일반적인 경우에는 전반적인 크기가 일치하는 종이 없다. [42] 늑대개 사람으로 치면,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끼리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라고 보면 된다. [43] 소련 시절에 차이코프스키의 유해를 분석한 결과, 비소가 검출되기는 했다. [44] 실제의 철가면은 검은 벨벳으로 된 복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 철가면의 정체가 외스타슈 도제라는 최근의 가설에서는 왜 그가 복면을 쓸 것을 강요받았냐는 의문점을 도제가 그저 왕실 주치의, 즉, 범털(돈 많고 백 있는 복역수)이라서 복면이 씌워진 것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의 복면은 그저 죄수에게 씌우는 용수의 역할이었을 뿐, 딱히 죄수의 신분을 숨기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45] 출생 성분에 대해서는 어느 왕가나 귀족의 자식이지만 후계 구도로 인해 존재가 지워지고 유폐시켰다는 설이 있고, 실제로 20세기에 그가 감금당했다고 주장한 장소와 거의 흡사한 모습의 공간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다만 특정 왕가의 후손이란 설은 현대의 DNA 조사를 통해 일부 부정된 상태이며 발견된 장소 또한 그가 감금당했다는 정황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46] 야생아인 것이 사실이라면 현재 언어학계에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결정적 시기 가설의 중요한 반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설대로라면 그 시기에 있던 언어적 상호작용이 없다시피 한 감금으로 인해 언어 습득 시기를 놓친 카스퍼는 언어를 구사할 수 없어야 하지만 일반 사람처럼 유창하게 구사했다는 것이 논점이다. 다만 단순히 언어적 상호작용 외에도 '야생소년 지니'의 사례처럼 후천적인 이유로 인한 정신장애 등의 요인도 변수가 될 수 있어 이 부분은 현재도 논쟁 사항이긴 하다. [47] 현재는 사망에 대해선 애정결핍이나 관심병 비슷한 것으로 인한 자작극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는 있지만, 야생아였다는 점이 거짓일 가능성은 상술한 자신의 환경에 대한 상세하고 일관적인 진술로 인해 다소 낮다고 보고 있다. [48] 소녀의 기도가 이 잡지에 실린 작품인데, 이 때문에 이 작품은 봉다제프스카의 곡들 중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게 보존되어 현존하고있다. [49] 그나마 외모는 당대에 발간된 잡지에 실린 캐리커처로 대강 유추는 할 수 있으며, 정확한 생년월일과 사망 당시 나이도 불명이었다가, 2023년에 그녀의 출생 기록이 발견되면서 1823년 9월 17일생이고 38살의 나이로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명이다. [50] 전자는 가설의 사실 여부에 따라 당시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만행을 추론해 볼 수 있으며, 후자는 독일 나치당의 수권법 처리 과정을 설명해줄 열쇠가 될 수 있다. [51] 앞에 써있지만 나치당은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아직은 복수정당제의 여당에 불과했으며 우리가 아는 나치 독일인 완벽한 일당제는 이 사건 직후에 완성되었다. 타이밍이 절묘해서 이러한 인과관계도 후술할 가설의 근거로 주로 인용되고 있다. [52] 자본주의 진영에서의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과 동급의 여파를 가져왔다고 보면 된다. [53] 페레스트로이카 이후로 활동했던 지하 록밴드들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때문에 이들의 초기 음반은 영구히 실전되거나, 일부 곡만 온전히 남아 현존하는 경우도 많다. [54] 이를 러시아어 갈비뼈라는 뜻의 '료브라'(ребра)라고 불렀다. [55] 다만,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미 18세기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스페인 왕위를 상실한데 비해, 부르봉 왕가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975년을 기준으로 44년 전인 1931년까지는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던 터라, 왕위 계승에 더 명분이 있는 편이었다. [56] 시간이 지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 보리스 옐친 시기의 러시아 연방이 셋 다 공식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결론내린 적은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소련을 악마화하려던 입장이 강했는데도 저런 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이 몰살의 배후에 대한 정확한 내막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57] 본명은 프란치슈카 샨코프스카(Franciszka Szankowska)로, 러시아인의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않은 폴란드인이다. [58] 애나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인물이었다. 정신병원 입원 경력도 있고, 퇴원 이후에도 꾸준히 정신적 혹은 심리적 문제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트러블을 일으켰다. [59] 니콜라이 2세 사망 당시 함께 살해당한 주치의의 아들이다. [60] 초기 라틴어로 된 기록은 여럿 발견되고 있지만, 현대의 언어학자들은 물론 고대 로마의 지식인들도 해독에 실패했다. 그래서 이 기록만으로는 로마의 초기 역사를 알아내는 건 무리다. [61] 물론 전근대 시대에 공화국이었던 나라는 생각보다 많았다. 고대 로마는 물론, 로마의 대선배격으로 그리스의 각 폴리스들이 먼저 공화정을 실시하였으며, 아메리카 원주민 이로쿼이 연맹도 연맹의 총 수장을 부족 회의에서 선출했다. 말기의 카르타고나, 판관기 시기의 이스라엘도 공화국이었으며, 심지어는 동북아시아에서 공화(共和)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는 주나라부터 시작해 한반도의 동예 옥저까지도 왕이 없었다고 나온다. [62] 390년 브렌누스가 알리아 전투 승리 후 로마 시를 약탈했다. [63] 고대 로마 시기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당대의 존경받던 학자인 히파티아를 잔혹하게 살해한 적이 있으니 그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이 때문에 히파티아가 살해당할 당시에 도서관도 같이 불탔다는 설도 있다. [64] 영화 센츄리온 더 이글은 이 9군단을 소재로 만들었다. [65] 여기서 다시 9군단 히스파나 켈트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는 설과 진압에 실패했다는 설로 나뉜다. [66] 발견 이후 동굴 내부를 밝게 하기 위해 조명을 켰는데, 문제는 이 조명이 조개를 오염시켜버려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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