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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관련 정보/역사 관련 정보/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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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럽3. 아시아4. 아프리카
4.1. 북아프리카4.2.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5. 아메리카 및 오세아니아6. 2 대륙 이상

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세계사의 미스터리를 서술한 문서.

2.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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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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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프리카

4.1. 북아프리카

4.2.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5. 아메리카 및 오세아니아

6. 2 대륙 이상

특정 지역의 역사로 간주하기 어려운 두 대륙 이상이 연관된 기록에 대한 미스터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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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몰타인이나 에티오피아인, 에리트레아인, 레바논 아랍인 기독교를 믿는 등, 대부분의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열 민족들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을 지언정, 일단 아브라함계 종교를 믿는 이들이긴 했다. 그러나 관체족은 그것도 아니고, 절멸 직전까지 자신들의 토착 신앙을 고수했다. [2] 대한민국에도 이런 용도로 지은 구조물이 있다. 1박 2일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전라남도 여서도라는 섬은 강한 바닷바람을 막아내고자 주민들이 돌을 쌓아서 벽을 조성했는데, 그 모양이 고대 유적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기묘해서 종종 ' 한국 마추픽추'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3] 관체족이 전멸할 때까지 카나리아 제도는 계속 부족 사회를 유지했으며, 거대 규모의 피라미드의 건축을 명령할 정도의 강력한 지배자가 나온 적도 없었다. [4] 아케나톤 사후의 기록에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이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이름의 유사성말고는 이 사람이 네페르티티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고,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이라는 인물 자체가 정체불명의 인물이다. [5] 네페르티티 본인 또는 그 친족으로 추정되는 미라는 발견되었다. [6] 애초에 투탕카멘은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긴 했으나, 그 배경에서 자신의 장모이자 계모인 네페르티티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즉위했다는 점과 더불어, 즉위 후에 그가 능동적인 통치를 했다는 점, 그의 파라오위를 노릴 수 있는 강력한 상대인 아이가 그의 사후에나 투탕카멘의 이복누나이자 왕비인 안케센나멘과 결혼하면서 즉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살아생전의 투탕카멘은 생각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더군다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정적도 없어서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은 적도 없다는 사실 역시 밝혀지면서, 그가 살해당했다는 설은 힘을 잃었다. [7] 투탕카멘의 치세 중에 누비아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노예나 기타 진귀한 야생동물 등의 물품을 조공으로 받은 기록이 있고, 그가 궁궐 내에서 무예를 익힌 기록도 확인되었다. [8] 투탕카멘 미라에서 심장이 제거되어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설이다. 이는 심장이 인간의 이성이 발현되는 곳이라고 생각하여 미라 제작 시에도 심장을 남겨두던 당대 이집트인의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으로, 당시 미라 제작자들이 그의 심장을 보존하는데 실패하여 그들의 내세관과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게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심장이 손상될 정도의 사인으로 사고사를 거론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이와 관련하여 제기된 가설 중에는 투탕카멘이 전차 경기를 하던 중에 전차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는 설도 있었다. 사고사했다는 가설들의 공통점은 투탕카멘이 가지고 있던 선천적 기형때문에, 통상의 비장애인들이 당하는 사고에 비해 훨씬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것이다. [9]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에 나오는 그것이다. [10] 현재의 추정에 따르면, 말라가시인은 현재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일대에서 발원한 민족으로, 중도에 아라비아 반도나, 인도, 몰디브 등에 상륙한 바 없이 인도양을 서쪽으로 직접 횡단하여 마다가스카르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대의 기술로 인도양의 편서풍을 어떻게 뚫고 지나갔는지에 대한 의문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11] 흔히 가나 제국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2] 11세기 경의 아랍인 상인들이 오늘날의 짐바브웨까지 내려가서 관련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는 비슷한 시기에 북아메리카로 갔던 바이킹 탐험가들 수준으로 일회성 방문에 그친 터라, 문화적으로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다만, 고고학적 조사 결과로는 적어도 1830년대까지는 그레이트 짐바브웨 주변에 사람이 살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13] 일단 주류 학계에서는 서아프리카 이집트에서 너무 멀다는 점을 들어 반투족들 스스로가 농업 기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기는 하다. [14] 일단 음악학자들은 당대에 남겨진 기록을 토대로, 팔머 맥아비 백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있다. [15] 텍사스 알렉산더에 대해 흑인라는 점과 텍사스 주의 소도시인 주어트에서 살다왔다는 점, 생몰년도와 출생지까지 몽땅 밝혀져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친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알려진 내용들도 모두 텍사스 알렉산더 본인의 증언에 의한 것뿐이라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16] 네임드 블루스 가수들 중 한 명. [17] 둘 중 시몬 볼리바르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에서, 호세 데 산 마르틴 아르헨티나에서 국부로 숭앙받는다. [18] 회담 자체가 두 사람 외에는 누구도 참관하지 않았고, 회담의 내용과 진행에 대해서 두 사람 중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고 죽었다. [19] 호세 데 산 마르틴 자신이 직접 군주가 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럽의 왕족들 중 한 사람을 군주로 옹립하고 실권을 정부와 의회가 행사하는 방식을 지향한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 왕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목숨걸고 투쟁했던 상황에서 그런 주장을 하겠다는 얘기는, 시몬 볼리바르에게는 그냥 스페인 치하로 되돌아가겠다는 얘기로 들렸을 법하다. [20] 과야킬 회담 이후로 추방당한 호세 데 산 마르틴은 이후로 경조사 때문에 임시 귀국한 것 빼고는, 두 번 다시는 아르헨티나 땅을 밟지 못했다. [21] 실제로 줄리어스의 간첩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로젠버그 부부는 이런 석연치않은 부분때문에 매카시즘의 대표적인 희생양으로 꼽힌다. [22] 지금의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와 뉴질랜드 전역을 관할하는 총독부였으며, 오늘날의 호주 연방 정부의 전신이다. [23] 당시의 호주 대륙은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비견될 정도로 헬게이트였다. 백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억울하게 땅을 빼앗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이 원한 때문에 지나가는 백인 탐험가들에게 적대적이었으므로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광활한 초원 사막이 펼쳐져 있어서 탐험 도중에 식량이나 물이 바닥나면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기가 무척 쉬웠다. 즉, 이런 곳을 탐험하다 돌아오지 못했으면 십중팔구는 현지에서 사망했다고 보아야 했다. [24] 비슷한 사례로, 영국 해군 장교인 존 프랭클린이 이끄는 탐사대 전원이 북극에서 조난사한 사례가 있다. 이쪽은 항해 일지와 같은 기록물이 일체 발견되지 않아서 사건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은 경우이다. [25] 대표적으로 금주단속 관리관이 있는데, 미국은 당시에도 인구가 1억명에 가까웠음에도 관리 인원은 주 단위도 아닌 국가단위로 고작 4000여명 밖에 산정하지 않았다. 그런 수의 인원으로 단속이 가능했을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26] 다만 대통령령이나 일반 입법은 냅두고 왜 굳이 헌법까지 갔냐는 것 자체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한 법의 일반적인 원칙인 상위법 우선의 원칙 때문인데, 사회문화 현상에 특성상 금주법을 미국인 100%가 찬성하라는 법은 없어서 대통령령이나 법률만으로 했다간 반대파가 언제든지 위헌 선고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당연하고 당시의 미국 헌법으로도 금주법을 법률로 만들었다간 충분히 위헌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았다.(수정 헌법 제17조까지. 금주법은 18조, 폐지 조항은 21조이다.) 따라서 대통령령이나 법률을 뛰어넘는 최고법인 헌법에다가 아예 박아버려서 위헌 판결같은 귀찮은 가능성을 없애버리려던 것이다. [27] 다만 원주민 감소의 경우, 섬을 발견한 원주민에 의한 환경파괴가 기근으로 변해 이로 인한 식인, 전쟁 때문에 원주민들이 많이 감소된 것은 과장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외 석상을 지으려고 통나무들을 대규모로 많이 베어서 섬이 황폐화된 것이 근본적 이유라고 알려졌지만 이 외에도 여러 추측이나 가설들이 나돌았으며 숲의 중요성을 모를리 없었던 원주민들이 왜 그토록 많이 나무들을 베어야 했는지에 대한 반론이 있었다. 그 중 유력한게 항해할 때 먹을 목적으로 데려오거나 혹은 원주민들이 항해할 때 몰래 따라온 폴리네시아 쌀쥐들 때문에 야자열매와 어린 나무들이 많이 사라져 숲의 생태가 많이 황폐화된 것이라는 유력한 추측이 있다. [28] 이들의 거주 위치 상, 주류 역사학계는 이들의 정체를 베오투크족이나 알곤킨족으로 비정하고 있다. [29] 캐나다 뉴펀들랜드가 실제 출생지라는 설도 있어서 확실치는 않다. 일단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출생지가 어디든지간에, 일단 스노리가 북아메리카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30] 이에 대한 이유로 현지 원주민들이 체포된 바이킹 포로들을 곧장 죽여버렸던 것이 거론된다. [31] 케트어가 속한 언어군으로,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일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 [32] 나바호어, 애서배스칸어, 에야크어 등이 속한 언어군이며, 북아메리카 서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 [33] 이누이트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며, 이들의 언어인 유픽어 이누이트어와 함께 이누이트알류트어족으로 분류된다. [34] 유픽족이나 이누이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분류되는 다른 민족들과는 기원이 전혀 다르다. 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코카소이드 동아시아인의 공통조상인 고대 북유라시아인(ANE)계이고, 유픽족이나 이누이트족은 그 이후에 형성된 동아시아인 계통이다. [35] 아메린드어족 가설이라 하여, 이누이트 유픽족, 알류트족이 쓰는 이누이트알류트어족 계통 언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전체를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가설은 있지만,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기정사실로 취급되고 있기라도 하는 데네예니세이어족과는 달리, 완전히 가설로만 취급되고 주류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학설이 아니다. [36] 바이킹들이 그린란드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이누이트족과 조우했다는 설도 있다. 9세기경에 아이슬란드에 막 상륙한 바이킹들의 기록에서 조난당해 사망한 국적불명의 사람 두 명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들의 정체가 그린란드에서 표류해 온 이누이트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7] 그 근거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메리카 도래 이전의 폴리네시아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구마의 존재와 고구마를 가리키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소속 언어들의 어휘들이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말레이 폴리네시아어군 조어로 고구마를 가리키는 단어인 쿠우말라(kuumala)는 케추아어로 고구마를 뜻하는 쿠마라(kumara)에서 차용한 말이다. 인류학자들은 형질인류학 연구를 통해, 폴리네시아인들이 케추아계 부족들과 조우한 곳이 지금의 페루 칠레의 국경지대에 해당하는 곳임을 밝혀내었다. [38] 9세기 경부터 바스크족들은 유럽에서 어부나 무역상같은 항해사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을 만큼, 전통적으로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전해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아이슬란드까지 진출해서 어업이나 포경업에 종사하곤 했고, 그 흔적이 바로 바스크어 아이슬란드어 피진이라는 혼종이다. 이런 관계로 어쩌면 바스크인들이 아이슬란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린란드를 통해 오늘날의 캐나다 북동부 지역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39] 이 주장은 아래의 오크 섬의 보물 떡밥과도 연결된다. [40] 여담으로, 뜻밖에도 고구마의 전파 과정에 대한 미스터리가 바이킹 북아메리카 진출 이전에도 아메리카 원주민과 접촉한 이들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오세아니아에서의 고구마 전파 과정에 대해서는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11세기에 남아메리카까지 가서 고구마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나머지 지역의 경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그 이후의 탐험가들이 고구마를 가져왔던 것이 시초라는 설이 부정되면서 생물학계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때 종래의 학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된 게 고구마 DNA 정보를 연구한 결과인데, 이 연구에 의해 무려 1200년 전부터 아메리카 밖으로 고구마가 전파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식물이 사람의 도움도 없이 타 대륙으로 퍼져나갈 수는 없으므로, 결국 이미 폴리네시아 원주민들보다도 먼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조우했거나, 최소한 아메리카 땅이라도 밟은 이들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41] 공룡이 그려져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화제를 모았던 이카의 돌이 현지인의 날조로 만들어진 것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던 만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42] 문명의 이름인 올멕은 훨씬 후대에 중앙 아메리카에 정착한 아즈텍족이 붙인 이름이었는데 나우아틀어로 고무 인간이라는 뜻이다. [43] 이때 리치는 디온에게 자신의 기타를 맡겼다고 한다. [44] 볼리비아의 전(前) 대통령이었던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라족 출신이다. [45]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도래했을 시기에는 이미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나 자기들끼리만 교류를 했을 뿐이었다. [46]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 대양어군에 속한다. [47] 고구마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다. [48] 다만,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폴리네시아 방면으로 진출한 적이 있었다는 설이 있긴 하다. 잉카 제국의 제2대 황제인 투팍 잉카 유판키가 상인들로부터 황금으로 그득한 전설의 땅인 니나 춤피와 하와 춤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직접 태평양 방향으로 원정을 떠나서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돌아왔다. 일단 주류 역사학계는 당시 잉카 제국에 원양 항해 기술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 기록이 진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일부 이 설화의 진위 여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니나 춤피와 하와 춤피를 갈라파고스 제도 이스터 섬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이스터 섬 원주민들인 라파누이인들의 모아이 관련 전설에서 언급되는 옛 지배층들인 장이족을 이때 투팍 잉카 유판키가 이끌고 온 잉카인 탐험대라고 보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49] 다만 냉전 즉, 미국과 소련과의 갈등은 원인이 아닐거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당시 시기가 냉전이라 저런 타이틀이 붙은 것. 다만 이하에 서술했듯이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어 소련이 배후라는 음모론도 없지는 않다. [50] 재클린 케네디는 취임선서 직전까지 에어 포스 원의 화장실 안에서 틀어박혀 있었다. 또한 그녀가 입은 옷에는 케네디의 피가 묻어있었고, 그녀는 이것을 닦을 생각조차 못할 만큼 패닉상태였다. [51] 참고로 이 둘은 미국 영상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특수효과 전문가이자, 수준급 공학자들이다. [52] 실제로 해럴드 홀트는 이전에도 이 증세로 인해 수영 도중에 익사할 뻔한 적이 몇 번 있었다. [53] 복소해석학의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인 미타그레플레르 정리로 유명하다. [54] 알프레드 노벨이 생전에 지정한 노벨상 부문은 노벨평화상, 노벨물리학상, 노벨화학상, 노벨생리학·의학상, 노벨문학상인데, 전부 그의 유언장에서 지정받은 분야들이다. 허나, 문제의 이 유언장에는 저 부문들을 무슨 이유로 지정했는지까지는 전혀 쓰여있지않고, 뜬금없이 저 분야에 대해서 업적을 세운 사람들에게 시상하라고만 되어있다. 참고로, 노벨경제학상은 1969년에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노벨의 유언과 상관없이 제정한 상이다. [55] 2023년 현재까지 수학자로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199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수학자인 존 내시와 2020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가 있다. [56] 후배 탐험가인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1500년에 오늘날의 브라질 해안 지역에 상륙하면서,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사람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업적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포르투갈 왕실이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바스쿠 다 가마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혹은 알려지지않은 다른 탐험가들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하여 해당 대륙의 존재를 알고있었기 때문에, 카브랄의 탐사 결과에 대해 태연작약한 반응을 보였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구대륙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정작 자신이 탐험한 곳을 인도 아시아 어디쯤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별개의 대륙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입증된 건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503년에 같은 지역을 재탐사한 뒤의 일이다. 더 이상한 것은 1498년에 이미 두아르트 파셰쿠 페레이라가 먼저 브라질에 도달한 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도 포르투갈 측이 매우 조용했다. 그래서 실제로 포르투갈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사람은 바스코 다 가마가 아닐까하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57] 우선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실제로 브라질에 도달한 적이 있는데, 위의 각주에서 선술한 카브랄의 탐사 당시에 그의 함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58] 일단 기록을 보면, 기원전 1700년대 쯤에 처음 기록이 등장해서 기원전 1100년대에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가 남긴 "더 이상 바다 민족이란 없다!"라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의 역사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즉, 이들은 최소 6세기 동안이나, 악명을 떨쳤던 이들이라서 '단번에' 지중해권 문명들의 리즈 시절을 끝낸 건 아니다. 하지만, 바다 민족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당시에는 이들의 존재가 지중해 일대의 국가들에게 상당히 충공깽스럽게 받아들여진것도 사실이며,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패망하기까지 했으므로 그 후로도 6세기 동안은 바다 민족 출신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쓰거나, 이들의 침략을 무척 두려워하는 기록이 속속들이 나올 만큼, 공포의 대상으로 불린 것도 사실이다. 이는 비슷한 이미지인 바이킹이나 몽골인들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둘 다 각각 9세기에서 12세기까지, 그리고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실제로 서유럽 동유럽, 남유럽의 수많은 나라를 무력으로 위협하여 내내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첫 등장 시에 이들을 보고 '신의 징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고대에는 이런 바이킹과 몽골인들의 역할을 바다 민족이 했다고 볼 수 있다. [59] 미케네 문명외에도 오늘날의 스파르타를 포함한 그리스의 라코니아 지방 주민들의 기원이 되는 도리아인을 말한다. [60] 뒷날 로마 제국을 세운 로마인들의 먼 친척뻘되는 민족이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로마인들의 언어인 라틴어 시칠리아 원주민들의 언어는 큰 틀에서는 전부 인도유럽어족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나, 어군 수준에서 분류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61] 성경에도 나오는 민족들이며, 다윗 왕의 즉위와도 관련있는 민족이다. 인도유럽어족 계통으로 추정되지만, 세부적으로 어느 어파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단은 구약 성서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나, 당대의 다른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리스인과 동계이거나, 아나톨리아 반도를 거쳐온 그리스인 이민자들이라고 추정된다. [62] 바다 민족으로 분류되는 민족들 중에는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트로이인들( 히타이트인들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다.)과 에트루리아인의 조상격인 민족인 티레니아인도 있다. [63] 바이킹의 경우와 같이 원거리 무역 활동이나 용병 활동을 동반한 일종의 해적 행위가 목적이었다는 설과 중세 초의 게르만족의 대이동처럼 외적의 침입이나 기후환경의 변화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인해 목숨을 건 대이동을 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64] 미국 정부가 타국의 핵실험 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발사한 벨라 위성에 의해 감지되었기 때문에, 벨라 사건이라고 한다. [65] 섬광이 발생한 지점에서 서쪽으로 200km쯤 떨어진 곳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속령인 프린스 에드워드 제도가 있다. [66] 알다시피 이 시기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잔인하고 끔찍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벌어지고 있었기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이들에게 대대적인 경제 제재를 벌이고 국교를 단교한 바 있다. 그래서 남아공 정부는 이에 대한 반항으로 핵무기 보유를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이스라엘 정부와 비밀리에 협력하여 핵무기를 개발한 바 있다. 따라서 훗날 F. W. 더클레르크 넬슨 만델라가 연이어 집권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할 때, 과거사 청산의 일환으로 이때 개발한 핵무기를 모조리 폐기했다. [67] 이 섬광 자체가 핵실험에 의한 것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 그 범인으로 지목되는 또다른 나라가 프랑스다. 섬광이 발생한 지점에서 동쪽으로 500~600 km 정도 떨어진 곳에 프랑스의 속령인 케르겔렌 제도가 있으며, 훨씬 뒤인 1995년에도 프랑스는 자국의 다른 식민지인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핵실험을 한 전적이 있다. [68] 아메리카는 몰라도, 호주에 도달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유럽인의 도래가 있기 훨씬 전부터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과 교류를 해 온 바가 있어서 퀸즐랜드 주에서는 이들의 영향으로 잠시나마 농업이 시도되기도 했고, 말루쿠 제도 뉴기니 섬 서부의 원주민들도 오래 전부터 중국이나 일본 및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해왔다. 그러니 명나라의 함대가 호주까지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심지어 정화의 대원정이 있기 훨씬 전부터 중국인들이 호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69] 애초에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부터가 1597년에 저술된 소설이며, 학술 서적이 아니다. [70] 물론 중요 물품을 수송할 기함만 특별히 거대하게 건조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것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71] 실제로 정화의 대원정 초기에 정화가 이끄는 명나라 함대에 의해, 오늘날의 베트남 앞바다에서 활동하던 한족 해적 진조의가 토벌된 사례가 있다. [72]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이 된 역사서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73] 타타르족이나 우즈베크인, 키르기스인 [74] 스티븐 앰브로스가 제안한 가설이다. [75] 안네 프랑크 일가의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안네 프랑크는 금수저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가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가 가세가 기울자,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었던지라, 전쟁 전만 해도 부족한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일가가 홀로코스트의 위협을 피해 달아나자, 그들의 막대한 돈을 노린 이들이 꽤 있었다. [76]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으나, 공산주의자나, 프리메이슨 단원, 성소수자 및 반(反) 나치 운동가들도 여럿 있었다. [77] 한때 '여교황'(La Papessa)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을 만큼, 비오 12세의 치세에서 바티칸의 실권자였다. 이는 비오 12세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힘든 상황으로 생긴 신경쇠약이 나날이 악화되어서, 바티칸의 국가원수로서의 행정 실무는 전혀 보지 못하게 되면서 가톨릭 교황으로서 종교 관련 업무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황이 행해야 할 행정 처리를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대행하였는데, 문제는 수녀는 사제가 아닌 수도자이기 때문에 교회 행정에 관여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당대에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78]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 견시요원의 초인적인 능력과 산소 어뢰의 위력으로 야전에서 일본군이 미군을 압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보섬 해전.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일본군의 숙련된 견시요원들이 죽어나갔고, 미군의 레이더 기술이 발전하면서 야전에서도 미군이 일본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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