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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관련 정보/역사 관련 정보/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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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럽3. 아시아4. 아프리카
4.1. 북아프리카4.2.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5. 아메리카 및 오세아니아6. 2 대륙 이상

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세계사의 미스터리를 서술한 문서.

2.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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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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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프리카

4.1. 북아프리카

4.2.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5. 아메리카 및 오세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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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 대륙 이상

특정 지역의 역사로 간주하기 어려운 두 대륙 이상이 연관된 기록에 대한 미스터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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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몰타인이나 에티오피아인, 에리트레아인, 레바논 아랍인 기독교를 믿는 등, 대부분의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열 민족들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을 지언정, 일단 아브라함계 종교를 믿는 이들이긴 했다. 그러나 관체족은 그것도 아니고, 절멸 직전까지 자신들의 토착 신앙을 고수했다. [2] 대한민국에도 이런 용도로 지은 구조물이 있다. 1박 2일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전라남도 여서도라는 섬은 강한 바닷바람을 막아내고자 주민들이 돌을 쌓아서 벽을 조성했는데, 그 모양이 고대 유적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기묘해서 종종 ' 한국 마추픽추'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3] 관체족이 전멸할 때까지 카나리아 제도는 계속 부족 사회를 유지했으며, 거대 규모의 피라미드의 건축을 명령할 정도의 강력한 지배자가 나온 적도 없었다. [4] 아케나톤 사후의 기록에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이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이름의 유사성말고는 이 사람이 네페르티티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고,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이라는 인물 자체가 정체불명의 인물이다. [5] 네페르티티 본인 또는 그 친족으로 추정되는 미라는 발견되었다. [6] 애초에 투탕카멘은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긴 했으나, 그 배경에서 자신의 장모이자 계모인 네페르티티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즉위했다는 점과 더불어, 즉위 후에 그가 능동적인 통치를 했다는 점, 그의 파라오위를 노릴 수 있는 강력한 상대인 아이가 그의 사후에나 투탕카멘의 이복누나이자 왕비인 안케센나멘과 결혼하면서 즉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살아생전의 투탕카멘은 생각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더군다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정적도 없어서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은 적도 없다는 사실 역시 밝혀지면서, 그가 살해당했다는 설은 힘을 잃었다. [7] 투탕카멘의 치세 중에 누비아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노예나 기타 진귀한 야생동물 등의 물품을 조공으로 받은 기록이 있고, 그가 궁궐 내에서 무예를 익힌 기록도 확인되었다. [8] 투탕카멘 미라에서 심장이 제거되어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설이다. 이는 심장이 인간의 이성이 발현되는 곳이라고 생각하여 미라 제작 시에도 심장을 남겨두던 당대 이집트인의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으로, 당시 미라 제작자들이 그의 심장을 보존하는데 실패하여 그들의 내세관과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게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심장이 손상될 정도의 사인으로 사고사를 거론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이와 관련하여 제기된 가설 중에는 투탕카멘이 전차 경기를 하던 중에 전차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는 설도 있었다. 사고사했다는 가설들의 공통점은 투탕카멘이 가지고 있던 선천적 기형때문에, 통상의 비장애인들이 당하는 사고에 비해 훨씬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것이다. [9]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에 나오는 그것이다. [10] 현재의 추정에 따르면, 말라가시인은 현재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일대에서 발원한 민족으로, 중도에 아라비아 반도나, 인도, 몰디브 등에 상륙한 바 없이 인도양을 서쪽으로 직접 횡단하여 마다가스카르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대의 기술로 인도양의 편서풍을 어떻게 뚫고 지나갔는지에 대한 의문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11] 흔히 가나 제국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2] 11세기 경의 아랍인 상인들이 오늘날의 짐바브웨까지 내려가서 관련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는 비슷한 시기에 북아메리카로 갔던 바이킹 탐험가들 수준으로 일회성 방문에 그친 터라, 문화적으로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다만, 고고학적 조사 결과로는 적어도 1830년대까지는 그레이트 짐바브웨 주변에 사람이 살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13] 일단 주류 학계에서는 서아프리카 이집트에서 너무 멀다는 점을 들어 반투족들 스스로가 농업 기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기는 하다. [14] 복소해석학의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인 미타그레플레르 정리로 유명하다. [15] 알프레드 노벨이 생전에 지정한 노벨상 부문은 노벨평화상, 노벨물리학상, 노벨화학상, 노벨생리학·의학상, 노벨문학상인데, 전부 그의 유언장에서 지정받은 분야들이다. 허나, 문제의 이 유언장에는 저 부문들을 무슨 이유로 지정했는지까지는 전혀 쓰여있지않고, 뜬금없이 저 분야에 대해서 업적을 세운 사람들에게 시상하라고만 되어있다. 참고로, 노벨경제학상은 1969년에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노벨의 유언과 상관없이 제정한 상이다. [16] 수학자로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199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수학자인 존 내시와 2020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가 있다. [17] 후배 탐험가인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1500년에 오늘날의 브라질 해안 지역에 상륙하면서,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사람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업적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포르투갈 왕실이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바스쿠 다 가마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혹은 알려지지않은 다른 탐험가들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하여 해당 대륙의 존재를 알고있었기 때문에, 카브랄의 탐사 결과에 대해 태연작약한 반응을 보였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구대륙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정작 자신이 탐험한 곳을 인도 아시아 어디쯤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별개의 대륙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입증된 건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503년에 같은 지역을 재탐사한 뒤의 일이다. 더 이상한 것은 1498년에 이미 두아르트 파셰쿠 페레이라가 먼저 브라질에 도달한 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도 포르투갈 측이 매우 조용했다. 그래서 실제로 포르투갈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사람은 바스코 다 가마가 아닐까하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18] 우선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실제로 브라질에 도달한 적이 있는데, 위의 각주에서 선술한 카브랄의 탐사 당시에 그의 함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19] 일단 기록을 보면, 기원전 1700년대 쯤에 처음 기록이 등장해서 기원전 1100년대에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가 남긴 "더 이상 바다 민족이란 없다!"라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의 역사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즉, 이들은 최소 6세기 동안이나, 악명을 떨쳤던 이들이라서 '단번에' 지중해권 문명들의 리즈 시절을 끝낸 건 아니다. 하지만, 바다 민족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당시에는 이들의 존재가 지중해 일대의 국가들에게 상당히 충공깽스럽게 받아들여진것도 사실이며,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패망하기까지 했으므로 그 후로도 6세기 동안은 바다 민족 출신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쓰거나, 이들의 침략을 무척 두려워하는 기록이 속속들이 나올 만큼, 공포의 대상으로 불린 것도 사실이다. 이는 비슷한 이미지인 바이킹이나 몽골인들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둘 다 각각 9세기에서 12세기까지, 그리고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실제로 서유럽 동유럽, 남유럽의 수많은 나라를 무력으로 위협하여 내내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첫 등장 시에 이들을 보고 '신의 징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고대에는 이런 바이킹과 몽골인들의 역할을 바다 민족이 했다고 볼 수 있다. [20] 미케네 문명외에도 오늘날의 스파르타를 포함한 그리스의 라코니아 지방 주민들의 기원이 되는 도리아인을 말한다. [21] 뒷날 로마 제국을 세운 로마인들의 먼 친척뻘되는 민족이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로마인들의 언어인 라틴어 시칠리아 원주민들의 언어는 큰 틀에서는 전부 인도유럽어족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나, 어군 수준에서 분류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성경에도 나오는 민족들이며, 다윗 왕의 즉위와도 관련있는 민족이다. 인도유럽어족 계통으로 추정되지만, 세부적으로 어느 어파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단은 구약 성서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나, 당대의 다른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리스인과 동계이거나, 아나톨리아 반도를 거쳐온 그리스인 이민자들이라고 추정된다. [23] 바다 민족으로 분류되는 민족들 중에는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트로이인들( 히타이트인들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다.)과 에트루리아인의 조상격인 민족인 티레니아인도 있다. [24] 바이킹의 경우와 같이 원거리 무역 활동이나 용병 활동을 동반한 일종의 해적 행위가 목적이었다는 설과 중세 초의 게르만족의 대이동처럼 외적의 침입이나 기후환경의 변화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인해 목숨을 건 대이동을 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25] 미국 정부가 타국의 핵실험 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발사한 벨라 위성에 의해 감지되었기 때문에, 벨라 사건이라고 한다. [26] 섬광이 발생한 지점에서 서쪽으로 200km쯤 떨어진 곳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속령인 프린스 에드워드 제도가 있다. [27] 알다시피 이 시기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잔인하고 끔찍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벌어지고 있었기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이들에게 대대적인 경제 제재를 벌이고 국교를 단교한 바 있다. 그래서 남아공 정부는 이에 대한 반항으로 핵무기 보유를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이스라엘 정부와 비밀리에 협력하여 핵무기를 개발한 바 있다. 따라서 훗날 F. W. 더클레르크 넬슨 만델라가 연이어 집권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할 때, 과거사 청산의 일환으로 이때 개발한 핵무기를 모조리 폐기했다. [28] 이 섬광 자체가 핵실험에 의한 것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 그 범인으로 지목되는 또다른 나라가 프랑스다. 섬광이 발생한 지점에서 동쪽으로 500~600 km 정도 떨어진 곳에 프랑스의 속령인 케르겔렌 제도가 있으며, 훨씬 뒤인 1995년에도 프랑스는 자국의 다른 식민지인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핵실험을 한 전적이 있다. [29] 바울로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30] 그래서 가짜 디오니시우스라는 뜻으로 위(僞) 디오니시우스라고 불린다. [31] 5세기에서 6세기는 기독교가 공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로마 제국 국교로 지정될 만큼 제국 내 종교적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라서, 굳이 기독교 신학자나 성직자들이 자신의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32] 아메리카는 몰라도, 호주에 도달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유럽인의 도래가 있기 훨씬 전부터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과 교류를 해 온 바가 있어서 퀸즐랜드 주에서는 이들의 영향으로 잠시나마 농업이 시도되기도 했고, 말루쿠 제도 뉴기니 섬 서부의 원주민들도 오래 전부터 중국이나 일본 및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해왔다. 그러니 명나라의 함대가 호주까지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심지어 정화의 대원정이 있기 훨씬 전부터 중국인들이 호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33] 애초에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부터가 1597년에 저술된 소설이며, 학술 서적이 아니다. [34] 물론 중요 물품을 수송할 기함만 특별히 거대하게 건조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것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35] 실제로 정화의 대원정 초기에 정화가 이끄는 명나라 함대에 의해, 오늘날의 베트남 앞바다에서 활동하던 한족 해적 진조의가 토벌된 사례가 있다. [36]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이 된 역사서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37] 타타르족이나 우즈베크인, 키르기스인 [38] 스티븐 앰브로스가 제안한 가설이다. [39] 안네 프랑크 일가의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안네 프랑크는 금수저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가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가 가세가 기울자,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었던지라, 전쟁 전만 해도 부족한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일가가 홀로코스트의 위협을 피해 달아나자, 그들의 막대한 돈을 노린 이들이 꽤 있었다. [40]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으나, 공산주의자나, 프리메이슨 단원, 성소수자 및 반(反) 나치 운동가들도 여럿 있었다. [41] 한때 '여교황'(La Papessa)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을 만큼, 비오 12세의 치세에서 바티칸의 실권자였다. 이는 비오 12세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힘든 상황으로 생긴 신경쇠약이 나날이 악화되어서, 바티칸의 국가원수로서의 행정 실무는 전혀 보지 못하게 되면서 가톨릭 교황으로서 종교 관련 업무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황이 행해야 할 행정 처리를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대행하였는데, 문제는 수녀는 사제가 아닌 수도자이기 때문에 교회 행정에 관여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당대에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42]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 견시요원의 초인적인 능력과 산소 어뢰의 위력으로 야전에서 일본군이 미군을 압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보섬 해전.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일본군의 숙련된 견시요원들이 죽어나갔고, 미군의 레이더 기술이 발전하면서 야전에서도 미군이 일본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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