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9:51:16

미스터리 관련 정보/역사 관련 정보/세계사/아메리카·오세아니아

1. 개요2. 아메리카
2.1. 콜럼버스 도래 이전2.2. 근대2.3. 현대
3. 오세아니아

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세계사의 미스터리의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부분을 서술한 문서.

2. 아메리카

2.1. 콜럼버스 도래 이전

2.2. 근대

2.3. 현대

3. 오세아니아



[1] 이들의 거주 위치 상, 주류 역사학계는 이들의 정체를 베오투크족이나 알곤킨족으로 비정하고 있다. [2] 캐나다 뉴펀들랜드가 실제 출생지라는 설도 있어서 확실치는 않다. 일단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출생지가 어디든지간에, 일단 스노리가 북아메리카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3] 이에 대한 이유로 현지 원주민들이 체포된 바이킹 포로들을 곧장 죽여버렸던 것이 거론된다. [4] 케트어가 속한 언어군으로,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일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 [5] 나바호어, 애서배스칸어, 에야크어 등이 속한 언어군이며, 북아메리카 서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 [6] 이누이트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며, 이들의 언어인 유픽어 이누이트어와 함께 이누이트알류트어족으로 분류된다. [7] 유픽족이나 이누이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분류되는 다른 민족들과는 기원이 전혀 다르다. 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코카소이드 동아시아인의 공통조상인 고대 북유라시아인(ANE)계이고, 유픽족이나 이누이트족은 그 이후에 형성된 동아시아인 계통이다. [8] 아메린드어족 가설이라 하여, 이누이트 유픽족, 알류트족이 쓰는 이누이트알류트어족 계통 언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전체를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가설은 있지만,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기정사실로 취급되고 있기라도 하는 데네예니세이어족과는 달리, 완전히 가설로만 취급되고 주류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학설이 아니다. [9] 바이킹들이 그린란드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이누이트족과 조우했다는 설도 있다. 9세기경에 아이슬란드에 막 상륙한 바이킹들의 기록에서 조난당해 사망한 국적불명의 사람 두 명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들의 정체가 그린란드에서 표류해 온 이누이트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0] 그 근거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메리카 도래 이전의 폴리네시아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구마의 존재와 고구마를 가리키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소속 언어들의 어휘들이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말레이 폴리네시아어군 조어로 고구마를 가리키는 단어인 쿠우말라(kuumala)는 케추아어로 고구마를 뜻하는 쿠마라(kumara)에서 차용한 말이다. 인류학자들은 형질인류학 연구를 통해, 폴리네시아인들이 케추아계 부족들과 조우한 곳이 지금의 페루 칠레의 국경지대에 해당하는 곳임을 밝혀내었다. [11] 9세기 경부터 바스크족들은 유럽에서 어부나 무역상같은 항해사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을 만큼, 전통적으로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전해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아이슬란드까지 진출해서 어업이나 포경업에 종사하곤 했고, 그 흔적이 바로 바스크어 아이슬란드어 피진이라는 혼종이다. 이런 관계로 어쩌면 바스크인들이 아이슬란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린란드를 통해 오늘날의 캐나다 북동부 지역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2] 이 주장은 아래의 오크 섬의 보물 떡밥과도 연결된다. [13] 여담으로, 뜻밖에도 고구마의 전파 과정에 대한 미스터리가 바이킹 북아메리카 진출 이전에도 아메리카 원주민과 접촉한 이들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오세아니아에서의 고구마 전파 과정에 대해서는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11세기에 남아메리카까지 가서 고구마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나머지 지역의 경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그 이후의 탐험가들이 고구마를 가져왔던 것이 시초라는 설이 부정되면서 생물학계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때 종래의 학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된 게 고구마 DNA 정보를 연구한 결과인데, 이 연구에 의해 무려 1200년 전부터 아메리카 밖으로 고구마가 전파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식물이 사람의 도움도 없이 타 대륙으로 퍼져나갈 수는 없으므로, 결국 이미 폴리네시아 원주민들보다도 먼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조우했거나, 최소한 아메리카 땅이라도 밟은 이들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14] 공룡이 그려져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화제를 모았던 이카의 돌이 현지인의 날조로 만들어진 것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던 만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5] 문명의 이름인 올멕은 훨씬 후대에 중앙 아메리카에 정착한 아즈텍족이 붙인 이름이었는데 나우아틀어로 고무 인간이라는 뜻이다. [16] 볼리비아의 전(前) 대통령이었던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라족 출신이다. [17]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도래했을 시기에는 이미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나 자기들끼리만 교류를 했을 뿐이었다. [18]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 대양어군에 속한다. [19] 고구마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다. [20] 다만,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폴리네시아 방면으로 진출한 적이 있었다는 설이 있긴 하다. 잉카 제국의 제2대 황제인 투팍 잉카 유판키가 상인들로부터 황금으로 그득한 전설의 땅인 니나 춤피와 하와 춤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직접 태평양 방향으로 원정을 떠나서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돌아왔다. 일단 주류 역사학계는 당시 잉카 제국에 원양 항해 기술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 기록이 진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일부 이 설화의 진위 여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니나 춤피와 하와 춤피를 갈라파고스 제도 이스터 섬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이스터 섬 원주민들인 라파누이인들의 모아이 관련 전설에서 언급되는 옛 지배층들인 장이족을 이때 투팍 잉카 유판키가 이끌고 온 잉카인 탐험대라고 보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21] 둘 중 시몬 볼리바르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에서, 호세 데 산 마르틴 아르헨티나에서 국부로 숭앙받는다. [22] 회담 자체가 두 사람 외에는 누구도 참관하지 않았고, 회담의 내용과 진행에 대해서 두 사람 중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고 죽었다. [23] 호세 데 산 마르틴 자신이 직접 군주가 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럽의 왕족들 중 한 사람을 군주로 옹립하고 실권을 정부와 의회가 행사하는 방식을 지향한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 왕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목숨걸고 투쟁했던 상황에서 그런 주장을 하겠다는 얘기는, 시몬 볼리바르에게는 그냥 스페인 치하로 되돌아가겠다는 얘기로 들렸을 법하다. [24] 과야킬 회담 이후로 추방당한 호세 데 산 마르틴은 이후로 경조사 때문에 임시 귀국한 것 빼고는, 두 번 다시는 아르헨티나 땅을 밟지 못했다. [25] 다만, 이 지도의 진위여부는 불명이다. [26] 문제의 사본이 진품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 지역이 어떻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전부터 유럽인들에게 그 존재가 알려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대강 설명이 가능하다. 서기 10세기에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바이킹들이 오늘날의 캐나다 뉴펀들랜드 일대를 탐험하고 빈란드라는 식민지를 건설해 11세기까지 이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때 바이킹 탐험가들이 노바스코샤를 탐험하고 오크섬의 존재를 확인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렇게 제작된 섬의 지도가 유럽의 타 지역으로 흘러들어갔다고 하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탐험 이전에도 오크섬의 존재가 유럽인들에게 알려질 수도 있었다. [27] 일단 음악학자들은 당대에 남겨진 기록을 토대로, 팔머 맥아비 백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있다. [28] 텍사스 알렉산더에 대해 흑인라는 점과 텍사스 주의 소도시인 주어트에서 살다왔다는 점, 생몰년도와 출생지까지 몽땅 밝혀져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친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알려진 내용들도 모두 텍사스 알렉산더 본인의 증언에 의한 것뿐이라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29] 네임드 블루스 가수들 중 한 명. [30] 실제로 줄리어스의 간첩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로젠버그 부부는 이런 석연치않은 부분때문에 매카시즘의 대표적인 희생양으로 꼽힌다. [31] 대표적으로 금주단속 관리관이 있는데, 미국은 당시에도 인구가 1억명에 가까웠음에도 관리 인원은 주 단위도 아닌 국가단위로 고작 4000여명 밖에 산정하지 않았다. 그런 수의 인원으로 단속이 가능했을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32] 다만 대통령령이나 일반 입법은 냅두고 왜 굳이 헌법까지 갔냐는 것 자체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한 법의 일반적인 원칙인 상위법 우선의 원칙 때문인데, 사회문화 현상에 특성상 금주법을 미국인 100%가 찬성하라는 법은 없어서 대통령령이나 법률만으로 했다간 반대파가 언제든지 위헌 선고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당연하고 당시의 미국 헌법으로도 금주법을 법률로 만들었다간 충분히 위헌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았다.(수정 헌법 제17조까지. 금주법은 18조, 폐지 조항은 21조이다.) 따라서 대통령령이나 법률을 뛰어넘는 최고법인 헌법에다가 아예 박아버려서 위헌 판결같은 귀찮은 가능성을 없애버리려던 것이다. [33] 이때 리치는 디온에게 자신의 기타를 맡겼다고 한다. [34] 다만 냉전 즉, 미국과 소련과의 갈등은 원인이 아닐거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당시 시기가 냉전이라 저런 타이틀이 붙은 것. 다만 이하에 서술했듯이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어 소련이 배후라는 음모론도 없지는 않다. [35] 재클린 케네디는 취임선서 직전까지 에어 포스 원의 화장실 안에서 틀어박혀 있었다. 또한 그녀가 입은 옷에는 케네디의 피가 묻어있었고, 그녀는 이것을 닦을 생각조차 못할 만큼 패닉상태였다. [36] 참고로 이 둘은 미국 영상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특수효과 전문가이자, 수준급 공학자들이다. [37] 참고로 지미 호파는 1975년에 실종되었으나 실종선고 만료로 사망 의제된 것은 1982년이다. [38] 지금의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와 뉴질랜드 전역을 관할하는 총독부였으며, 오늘날의 호주 연방 정부의 전신이다. [39] 당시의 호주 대륙은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비견될 정도로 헬게이트였다. 백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억울하게 땅을 빼앗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이 원한 때문에 지나가는 백인 탐험가들에게 적대적이었으므로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광활한 초원 사막이 펼쳐져 있어서 탐험 도중에 식량이나 물이 바닥나면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기가 무척 쉬웠다. 즉, 이런 곳을 탐험하다 돌아오지 못했으면 십중팔구는 현지에서 사망했다고 보아야 했다. [40] 비슷한 사례로, 영국 해군 장교인 존 프랭클린이 이끄는 탐사대 전원이 북극에서 조난사한 사례가 있다. 이쪽은 항해 일지와 같은 기록물이 일체 발견되지 않아서 사건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은 경우이다. [41] 다만, 마이클 록펠러는 평소에도 인류학에 관심이 많아서, 뉴기니로의 탐험을 동경해왔다. 상류층으로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자신을 구해준 부족민들과 여생을 보내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는 셈이다. 애초에 그가 뉴기니를 탐험한 이유도 인류학적 조사를 목적으로 현지 원주민들을 만나려던 것이고, 그 와중에 카누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42] 다만 원주민 감소의 경우, 섬을 발견한 원주민에 의한 환경파괴가 기근으로 변해 이로 인한 식인, 전쟁 때문에 원주민들이 많이 감소된 것은 과장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외 석상을 지으려고 통나무들을 대규모로 많이 베어서 섬이 황폐화된 것이 근본적 이유라고 알려졌지만 이 외에도 여러 추측이나 가설들이 나돌았으며 숲의 중요성을 모를리 없었던 원주민들이 왜 그토록 많이 나무들을 베어야 했는지에 대한 반론이 있었다. 그 중 유력한게 항해할 때 먹을 목적으로 데려오거나 혹은 원주민들이 항해할 때 몰래 따라온 폴리네시아 쌀쥐들 때문에 야자열매와 어린 나무들이 많이 사라져 숲의 생태가 많이 황폐화된 것이라는 유력한 추측이 있다. [43] 실제로 해럴드 홀트는 이전에도 이 증세로 인해 수영 도중에 익사할 뻔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