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세계사의 미스터리의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부분을 서술한 문서.2. 아메리카
2.1. 콜럼버스 도래 이전
- 빈란드: 9세기 경에 바이킹들이 오늘날의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일대에 정착하여 세운 식민지인 빈란드는 오랫동안 단순한 구전 전설로만 전해지다가, 1960년에 노르웨이의 탐험가인 헬게 잉스타드와 그의 부인이자 노르웨이의 고고학자인 안네 잉스타드가 캐나다 래브라도 반도의 랑스오메도스 지역에 있던 정착지 유적을 발굴하면서 역사적인 사실로 밝혀졌다. 이 빈란드 정착지는 금방 스크렐링기(Skrælingi)라고 불리는 원주민[1]들에게 패망하여 멸망했다고 여겨지지만, 미국의 메인주 해안에서 발견된 11세기에 주조된 노르웨이 동전들인 메인 페니의 존재나, 랑스오메도즈의 빈란드 유적지에서 11세기까지 소급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연대 측정 결과가 나온 것, 빈란드를 탐사했던 토르핀 카를세프니의 장남인 스노리 토르핀손의 출생지가 오늘날의 미국 뉴욕주로 비정된다는 점에서[2], 실제로는 바이킹들의 정착이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된다. 일단 스크렐링기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알곤킨족이나 틀링깃족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이들에게서 바이킹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호 간의 인적교류는 전무했음이 밝혀져있다[3]. 적어도 15세기까지는 그린란드에 정착한 바이킹들이 우수한 목재를 조달하는 곳으로서 빈란드를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이후로도 재정착이 시도되었거나 최소한 원주민들과의 교류라도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를 입증한 증거가 전무하여 빈란드 역사의 전반적인 면모는 분명치 못한 부분이 많다.
- 아나사지 문명: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미국 애리조나 주 일대에서 번성한 문명인데,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애리조나 현지의 선주민 푸에블로족의 조상이나 사촌 격의 민족이 건설했다는 것 말고는 문명의 전반적인 모습이나 멸망 원인이 의문투성이이다. 오늘날의 미시시피 강 일대에서 번성한 도시 국가군인 미시시피 문명이 이들의 후손 내지는 자매 문화권이며, 아나사지 문명과 함께 오늘날의 미국 영토에 속한 지역에서 도시 국가를 이룰 정도로 크게 번성한 단 둘뿐인 문명이다. 특히 아나사지 문명은 현대의 미국을 제외하면 앵글로아메리카 유일의 대제국이었다.
- 아메리카 원주민과 관련된 미스터리: 거의 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아메리카 이주나, 그들과 타 민족 간의 접촉 여부에 대한 것들이다.
- 데네예니세이어족: 비교언어학계에서 예니세이어족[4]와 나데네어족[5]이 하나의 어족인 데네예니세이어족을 이룬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화인류학계와 역사학계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의 첫 물증이 나왔다고 여기고 있다. 헌데, 둘은 실제로 기본 어휘와 문법에서 유사점이 대거 발견되었으므로, 하나의 어족을 이룬다는 설이 기정사실로 인정받고 있지만, 과연 예니세이어족의 화자들이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조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거꾸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일부가 아시아로 재이주해서 오늘날의 예니세이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고,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에서 유픽족[6]은 실제로 일부가 알래스카에서 그들의 기원지로 추정되는 시베리아로 되돌아간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분명한 것을 알기 어렵다[7]. 거기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분화하는 과정을 학계에서 분석하는 와중에, 어느 민족이 어떤 민족의 후손인지에 대한 계통 분류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 가설을 따라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조상 민족을 특정하는 건 무리가 있다[8].
- 최초로 아메리카 원주민과 조우한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아메리카에 정착한 이래로, 흔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최초로 원주민들과 조우한 자로 알려져 있으나, 콜롬버스 도래 이전에 이미 바이킹이 북아메리카 동북부 해안에 상륙한 바 있으며,[9] 폴리네시아인 역시 남아메리카 서해안에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0] 거기다가 고대 페니키아의 탐험가들이나, 중세기의 바스크인 어부들[11], 혹은 정화가 이끈 명나라 대함대의 일부가 아메리카에 도달한 적이 있었다는 설도 있으며, 심지어 14세기 무렵에 성전기사단의 잔당들이 아메리카로 달아났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12] 이에 따라 현대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하플로그룹을 분석한 결과, 원주민 전체가 몽골로이드와 코카소이드가 분화되기 전에 유라시아 대륙에 살았던 고대 북유라시아인 계통 민족의 후손들임이 밝혀지면서, 누가 먼저 이들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든지 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도래 이전까지는 폴리네시아인들을 제외하고는 원주민들과 타 민족 사이에 혼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이 밝혀졌다[13].
- 테카식-칼릭스틀라우아카 머리: 1933년에 멕시코의 톨루카 계곡에 있는 15세기 경의 무덤에서 출토된 두상인데, 이 조각상의 얼굴 모습이 흡사 유럽인을 연상케해서 고고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때 이 두상에 대해 이것을 '발굴'했다고 주장하는 연구진들이 날조한 것이라는 설이 제기된 바 있지만[14], 조사 결과 이 조각상은 진품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서 고고학계에서는 이 조각상이 어떤 사람을 조각한 것인지에 대해 큰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인이나 고대 그리스인같은 고대의 유럽인이 실제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것을 본 현지 원주민들이 이를 조각한 것이라는 설, 역시 백인계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페니키아나 유럽 등지의 선박이 오늘날의 모로코나 포르투갈 앞바다에서 난파하면서 떠내려온 물품이 해류를 타고 아메리카까지 떠내려와서 현지인들에 의해 건져졌다는 설, 고대 이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앞서서 아메리카를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는 설과 연구자들의 단순한 착각이라는 설까지 난무하지만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 잉카 제국 건국 이전의 안데스산맥 원주민들의 역사: 잉카 제국 자체도 문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그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은데, 잉카의 건국 이전에 있었던 치무 왕국이나 아이마라족의 문명의 역사도 문자 사용 이전의 것인지라서, 상세한 역사는 불분명하다. 일단 아이마라족은 현재도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잘 보존하고 있어서[16] 대강의 역사를 유추해볼 여지는 있으며, 치무 왕국은 그 경쟁자인 잉카 제국 측의 전승으로 단편적으로나마 문화의 양상을 추정할 수도 있고, 각 원주민 부족들의 전승을 토대로 역사를 재구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문증 가능한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는, 고고학적 연구만으로 이렇게 역사를 재구해보는데는 한계가 분명하므로, 여전히 안데스산맥의 옛 문명들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은 불분명하다.
- 나스카 문명: 나스카 지상화로 유명한 문명. 아직도 문명의 전반적인 모습이 불명이다.
- 중앙아메리카 문명들과의 교류: 의외로 안데스산맥의 문명들은 중앙아메리카 문명들과 어느 정도의 교류는 했었음이 밝혀져있는데, 그 증거가 바로 옥수수의 전파 과정이다. 옥수수는 멕시코 일대가 그 원산지로 추정되는데,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기 이전까지는 파나마 지협 주변에는 옥수수가 전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전파가 된 것은 분명하다. 허나,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파나마 지협을 중심으로 거대한 정글 지대가 펼쳐져 있어서 유라시아의 경우와는 다르게 활동적인 문물 교류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문에 옥수수 이외에는 남아메리카의 라마와 중앙아메리카의 문자 등의 여러 유용한 문물들이 전파되지는 못했다. 노르웨이의 아마추어 고고학자이자 탐험가인 토르 헤이에르달이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발사나무로 건조한 배인 콘티키 호를 이용해서 페루의 카야오에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라로이아 섬까지 항해하는데 성공하면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배로도 원양 항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입증되었으나, 바닷길을 이용한 교류가 언제부터 시작해서 언제 중단이 된 것인지[17], 옥수수 말고도 상호 간에 무슨 영향이 오갔는지는 사료와 고고학적 연구 결과의 부족으로 인해 의문에 싸여있다.
- 티와나쿠: 티와나쿠는 잉카 제국의 건국 이전에 번성했던 가장 거대한 규모의 대도시였다. 전성기에는 당대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관광지로 기능하였지만, 잉카 제국을 세운 케추아족이 도래하기도 전에 도시 전체가 버려졌고, 그 유적지만 남았다. 티와나쿠 유적을 조사하던 페루의 고고학 연구진들은 이곳에서 상당한 수준의 가뭄이 들었던 사실을 확인했지만, 이것이 티와나쿠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16세기에 이 지역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이 가톨릭의 성당을 짓기위한 석재를 조달하느라고 유적지의 상당 부분을 훼손해서, 이 도시의 거주민들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특징을 알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극도로 부족해졌다.
- 폴리네시아인과의 교류: 잉카 제국 건국 이전부터 안데스산맥 일대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폴리네시아인과 교류를 한 사실은 이미 주류 역사학계로부터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폴리네시아 제어의 공통조어[18]로 고구마를 뜻하는 단어인 *kuumala는 같은 뜻의 마오리어 단어 kumara와 동원어로, 잉카 제국의 공용어인 케추아어 kumara의 차용어이며, 11세기의 폴리네시아인 유적에서 고구마가 출토된 사례도 있다[19]. 체질인류학 연구 결과로는 12세기 경에 오늘날의 콜롬비아 지역에서 폴리네시아인과 현지 원주민 간의 혼혈이 대거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입증되기도 했다. # 문제는 폴리네시아인과 남아메리카 원주민 간의 문물 교류가 언제 시작하고 언제 중단되었는지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애초에 너무 먼 거리때문에 활발한 교류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중론인데, 그럼에도 잠깐이나마 교류가 이루어졌다가 중단된 시기가 불분명하다는 점과 더불어, 폴리네시아의 각 섬들에 비해 땅도 넓고 더 풍요로운 남아메리카로의 폴리네시아인의 대규모 이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 반대로 남아메리카 원주민 측에서 폴리네시아로 진출한 흔적이 전무하다는 점은 주류 학계를 의문에 빠뜨리고 있다[20].
2.2. 근대
- 과야킬 회담: 남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되는 회담으로, 남아메리카 독립의 거물 두 사람인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21]이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벌였던 이 회담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22] 일단 볼리바르가 공화주의자였던 데 반해, 산 마르틴은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는 점[23]에서 갈등을 빚은 것이 과야킬 회담의 전말이 아닌가하는 추정은 있으나, 회담의 내용이나 진행 과정, 그 결과는 밝혀진 바가 없다. 확실한 것은 회담 당시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굉장히 냉랭했고, 회담 이후에 산 마르틴이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당하여 프랑스로 망명했다는 것뿐이다.[24]
- 로어노크 식민지: 1588년부터 1589년까지 북아메리카 지역에 세운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CROATOAN'이라는 의미불명의 글자만 남긴 채로 주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멸망했다. 현재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들이 기근으로 인해 식민지를 버리고 인근의 다른 원주민 부족에 합류하여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지만, 어느 부족에 동화된 것인지가 불명이다.
- 아즈텍 제국과 관련된 미스터리
- 몬테수마의 보물: 아즈텍 제국을 침공했던 에르난 코르테스는 일시적으로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을 점령한 다음에, 당시 아즈텍의 황제였던 몬테수마 2세를 협박해서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를 강탈했다. 그러나 이후에 몬테수마 2세가 의문의 죽음을 맞으면서, 분노한 테노치티틀란의 시민들이 쿠아우테목을 중심으로 봉기하여 코르테스가 이끈 스페인 군대를 일시적으로 쳐부수면서 약탈당한 보물들이 도시 주변을 둘러싼 텍스코코 호수에 대거 수장되었다. 몬테수마의 보물이란 이 금은보화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것을 아즈텍 제국이 완전히 멸망한 후에 콩키스타도르들이 회수해갔다는 기록이 없어서, 그 행방은 2023년 현재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아즈텍 제국의 주류 민족이었던 나와틀인들의 전승에서는 멸망한 아즈텍 제국의 유민들이 회수해서 지금의 미국 유타주로 가져갔다고 묘사되고 있지만, 유타주에서 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 어떤 문화재도 발견되지 않아서 의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 몬테수마 2세의 사인: 자세한 건 문서 참조.
- 에드가 앨런 포우의 최후: 죽기 직전의 행적이 미상이며 목격담은 있으나 확실치 않다.
- 오크섬의 보물: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에 위치한 오크섬에서 전해져오는 보물과 관련된 괴담이며, 보물의 매장지로 유력시되는 곳이 발견된 1795년 이래로 2024년 현재까지 그 진위 여부가 불명인 상황이다. 보물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발견 당시에 굴착하였으나, 이 지역이 해안가인 관계로 발굴 시마다 물이 들어차는 바람에 실패했고, 보물 대신 각종 기묘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일단 보물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 주인으로 성전기사단의 잔당이나 17세기에 활약한 영국 해적인 윌리엄 키드, 마리 앙투아네트 등이 거론되어 왔으나 확실치는 않다. 그리고 섬의 지도가 묘사되어 있는 12세기 문서의 사본이 발견되기도 하여[25], 보물의 존재 여부와 관련없이 오크섬 자체가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이 지적받고 있다[26]. 그러나 2024년 현재는 오크섬의 대부분이 미국인 형제의 개인 사유지가 되었고, 고고학자들이 아닌 이들 형제가 개인적으로 발굴작업을 진행하다보니 그 속도가 너무 늦은데다, 캐나다 정부와의 법적 갈등때문에 작업이 수시로 중단되는 관계로 여전히 이 섬과 관련된 미스터리는 해소되지 못한 상황이다.
- 파라과이 건국부터 1870년 이전까지의 역사: 3국 동맹 전쟁 패전으로 파라과이 초기 역사와 관련된 기록물 및 유물들이 대거 브라질 제국군에 전리품으로 약탈되어 브라질로 옮겨졌는데, 이 파라과이 초기 역사의 기록물 및 유물들이 2018년 9월에 발생한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사고로 대부분 소실되면서 파라과이 건국으로부터 1870년에 이르는 역사는 이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되고 말았다.
2.3. 현대
-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블루스 음악가들의 정체와 생애: 20세기 초엽은 블루스 음악과 이를 기반으로 하여 생겨난 재즈 음악이 태동하던 시기이기에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중요한 시기다. 하지만, 이 시기에 활동했던 블루스 음악가들의 대부분이 그 정체나 전반적인 생애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에 미국 음악사 연구에서 크나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로큰롤과 록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블루스 음악가인 로버트 존슨 또한 죽음에 관한 여러가지 가설이 있으나, 로버트 존슨은 그래도 사진 3장과 생애가 공개되는 등 가장 잘 알려진 음악가이며, 키드 베일리처럼 음악가와 관련된 사료가 음반 밖에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키드 베일리는 아예 음반 한장 빼고는 불명확한 목격담이 전부이며, 유튜버들 사이에선 대체로 윌리 브라운이 그의 정체일 것으로 추측되지만, 음악사학자들조차 키드 베일리와 윌리 브라운이 동일인인지에 대해 확신을 못하고 있다. 거스 깁슨처럼 대강 정체가 알려지긴 했으나 생몰연도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경우도 많아서, 각각의 음악가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었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도 파악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블루스 음악가들이 미국 사회에서 극심하게 차별받던 흑인이라서 관련 기록이 많이 안 남았다는 추정이 있으나, 팔머 맥아비처럼 인종 자체에 대해 논란이 일어난 경우도 있어서[27], 꼭 그런 이유로 정체를 알 수 있는 인적 자료가 소실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 1951년에 미국인 부부인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에델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에 미국의 기밀정보를 넘긴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53년에 처형된 사건이며, 이 사건의 전말은 당대부터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일단 냉전이 끝난 후에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이들 중 남편인 줄리어스는 정말로 간첩이었다고 밝혀졌고, KGB의 전직 요원인 알렉산드르 페클리소프의 증언에 의해 에델 역시 남편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보를 적극 지지했다는 사실 역시 밝혀졌다. 헌데, 에델의 경우는 남편 줄리어스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그녀도 간첩이었는지가 의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의 간첩 여부를 떠나서 줄리어스가 제공한 정보가 과연 소련 측에게 유용한 것이었냐는 문제도 있다. 미 연방 검찰 측의 주장에 의하면, 로젠버그 부부는 소련 측에 원자폭탄과 관련된 기밀을 넘겼다고 하며, 사형 선고 시에도 판결문에 이 점이 반영이 되었다. 그러나, 선술한 페클리소프의 증언이나, 기밀해제된 소련과 미국 양측의 자료에 의하면, 연방 검찰 측의 주장을 뒷받침할 물증이 나오지 않아서, 결국 미국의 사법부가 이들의 간첩 여부와 무관하게 사법살인을 저질렀다는 논란이 거세다[30].
- 미국의 금주법: 비록 당시 국민 감정이 금주법이나 비스무리한 걸 제정하는 걸 원했던 건 사실이나 현실성이 전혀 없는[31] 악법인 금주법을 역사/문화적으로 술을 퍼마시던 국가인 미국의 헌법에도 쓸 수준으로 이끈 원동력이 된 사상/단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완벽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시 원인으로는 기독교 근본주의 단체의 영향이나 독일계 이민자 견제의 일환으로 나뉘는데, 독일 이민자 견제 쪽의 가설은 모순점이 있어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설이 조금 우세하고 두 개의 결합가설도 간혹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마피아 배후설까지 나왔다.[32]
- 앰브로스 비어스: 악마의 사전으로 유명한 작가로, 1913년에 멕시코 혁명의 영웅인 판초 비야를 만나러 가다가 영영 실종되어 버렸다. 판초 비야에 의해 총살되었다는 주장은 그가 판초의 지지자였다는 점에서 부정되고 있으며, 아마도 판초가 이끄는 혁명군을 따라가다가 전사했거나, 멕시코로 건너가기 전에 앓고있던 천식의 악화로 인해 사망했다는 추정이 있으나, 현재 그의 최후 행적을 알 수 있는 어떠한 기록도 남지 않아서, 끝내 그의 행방은 미스터리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하는 에토레 마요라나 실종 사건 및 애거서 크리스티 실종 사건과 함께 20세기 초반에 발생한 실종 사건 중에서는 가장 사회적 파장이 컸다.
- 어밀리아 에어하트 실종 사건: 미국의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 중 하나로, 가장 널리 알려진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해 사망했다는 설 이외에도 무인도인 가드너 섬에 조난당했다 사망했다는 설, 심지어 일본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 엔론 사태의 원인: 엔론은 한때 미국 7대 기업으로 손꼽혔으나 9.11 테러 이후 분식회계의 교과서로 전락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16만명에 이르는 실직자를 만들고 2007년에 파산한 부실기업인데, 2010년에 미국 의회의 재조사에서 분식회계만으로 파산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9.11 테러 이후 한달만에 파산한 건 부자연스럽다는 결론이 나와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파생상품 설이 제시되고 있지만, 근거가 될만한 자료를 엔론 측이 인멸하거나 숨겼고, 분식회계 당사자들은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나서 진실은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이 파생상품이라는게 미국 의회의 재조사 이전에 이미 세계를 뒤흔들만큼의 재앙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여기에 무게를 두고 있다.
- 음악이 죽던 날의 미스터리: 음악이 죽던 날은 1959년 2월 3일 미국 중서부에서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다니던 버디 홀리, 리치 밸런스, 빅 바퍼가 아이오와주 클레어 레이크에서 다음 행선지인 미네소타주 무어헤드로 비행기로 이동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조종사 로저 피터슨까지 합쳐서 4명이 전원 사망한 사고를 뜻한다. 비행사고 자체는 조종사 로저 피터스슨의 단순과실로 인해 일어났지만, 이 사고에서 여전히 풀리지않는 미스터리는 리치 밸런스와 빅 바퍼가 비행기를 타게 된 경위다. 가장 잘 알려진 경위는 영화 라 밤바에도 나왔듯이 독감에 걸린 빅 바퍼가 웨일런 제닝스로부터 자리를 양보받았고 이후 리치가 토미 올섭과 동전던지기를 한 끝에 리치가 승리해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것이다. 이때 리치는 비행기를 타는 것을 두려워 했지만, 살면서 누구에게 이겨본 것이 처음이라 용기를 내어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당시 겨울 댄스 파티 투어에 빅 바퍼, 리치와 함께 게스트로 참가했던 디온&더 벨몬츠의 리더인 디온(가수)이 2009년에 한 인터뷰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디온에 따르면 홀리가 게스트였던 빅 바퍼, 리치, 그리고 자신을 탈의실로 따로 부른 후 비행기를 타고 갈 것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이때 자리가 하나 부족했기에 디온과 리치가 동전던지기를 했고, 디온이 이겼지만 비행기 좌석값이 자신의 한달 하숙비와 같은 36달러라는 것에 부담을 느껴, 리치에게 양보했으며[33], 당시 독감에 걸린 것도 빅 바퍼가 아닌 리치라고 주장했다. 제닝스와 디온의 주장 중 어느쪽이 맞는 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비교적 현대인 1960년대에 발생한데다가 국가 원수가 살해당했고 저격 당시 비디오까지 생생히 찍혔던 사건임에도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 순방을 돌며 카 퍼레이드를 하던 중 머리를 저격당해 암살당했다." 빼고는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는 냉전 시기의 희대의 사건이다.[34] 덕분에 공식적인 수사결과보다 음모론이 더 신빙성있게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어서, FBI 설, CIA 설, 전직 대통령 배후설, 부통령 설 등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고 있었으나 최근 미국의 기밀 문서의 잇따른 공개로 CIA가 사실상 암살에 개입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 암살범에 관련된 논란: 존 F. 케네디를 암살한 혐의로 체포된 리 하비 오즈월드에게 배후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서 논란이 되고 있으며, 실제로 오즈월드 본인도 자기는 음모의 희생자라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진상이 밝혀지기도 전에 오즈월드마저 잭 루비의 손에 암살당하여 모든 것이 의혹 수준에 그치게 되었다. 이런 의혹과 관련하여, 잭 루비의 오즈월드 암살 역시 누군가가 배후에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잭 루비가 오즈월드를 살해하고 1년뒤에 암으로 급사해버려서 알 방도가 없어졌다. 그러나 상술한 기밀 문서 공개로 인해 실제로 음모론의 희생자였을 거라는 가설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 린든 B. 존슨의 취임선서 논란: 당시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은 갑작스런 케네디의 암살로 케네디의 시신을 실은 에어 포스 원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이때 케네디의 아내인 재클린 케네디도 참석했는데, 이때문에 케네디가 사람들과 케네디의 부하측근들이 남편을 잃고 충격을 받은 재클린 여사를 그 자리에 참석시켜야 했냐며 불만을 토해냈다.[35] 이에 린든 B. 존슨은 재클린 케네디의 참석은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법무부장관인 로버트 케네디의 제안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이것에 대해 부정하며 린든 B. 존슨의 독단적 행동이라며 비난했다. 현재까지 재클린 케네디가 린든 B. 존슨의 취임선서에 참석한 것은 누구의 제안인지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 쥘 리메 컵의 행방: 오늘날 FIFA 월드컵 우승국에게 수여되는 FIFA 월드컵 이전에 우승 트로피로 쓰였던 쥘 리메 컵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통산 3회 우승을 달성하면서 브라질 축구 연맹이 영구 소유하게 되었는데, 1983년 12월 19일 도난당했다. 비록 용의자들은 체포되었지만 이들로부터 물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였고, 이후 쥘 리메 컵의 행방은 40년이 다 되도록 오리무중이다.
- 지미 호파 실종사건: 미국 노동운동계의 거물 지미 호파가 실종된 사건은 미국의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이다. 그가 의문의 실종을 당한 것에 대해 세간에서는 마피아들에게 납치되어 죽임을 당한 뒤에 뉴욕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메트라이프 스타디움 등지에 암매장당했다는 설이 퍼져 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인 디스커버리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인 Mythbusters의 진행자인 애덤 새비지와 제이미 하이네만[36]이 초음파 탐지기를 이용해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을 조사한 결과, 이 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다. 지미 호파의 생년월일로 보나, 갑작스럽게 실종된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현재까지 그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고, 정황상 살해당한 후에 어딘가에 암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지만[37], 현재까지도 그 위치는 불명이다. 2019년 개봉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아이리시맨이 이 사건을 다룬다. 영화 속에서는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지미 호파의 오른팔 ‘프랭크 시런’을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실제로는 그조차 확실하지 않다.
3. 오세아니아
- 난마돌: 미크로네시아 현지의 토착민들이 세운 도시였는데, 이곳이 왜 버려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도시가 되었는 지가 불명이다. 애초에 미크로네시아 토착민 문명 자체가 이걸 세운 이들이 지금의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오스트로네시아계 민족들이었다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밝혀진 바 없다. 다만, 난마돌과 관련된 설화가 미크로네시아 연방 현지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으므로, 이 설화가 난마돌과 관련된 역사를 밝혀줄 중요한 열쇠로 여겨진다.
- 롱고롱고: 이스터 섬에서 발견된 고대 원주민들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이지만 확실하지 않다.
- 루트비히 라이히하르트의 마지막 행적: 루트비히 라이히하르트가 누구냐하면, 독일 출신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탐험에 공헌한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였다. 1848년 당시의 뉴사우스웨일스 총독부[38]의 의뢰로 호주 북부를 탐사하다 영영 실종되었다.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설과 탐험 도중에 기갈로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며, 어찌되었건 간에 당시의 호주의 상황으로 보아서[39] 탐험지에서 사망한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40]
- 마이클 록펠러 실종 사건: 록펠러 가문의 일원이며 당시 뉴욕 주지사였고 후일 미국 부통령을 지냈던 넬슨 록펠러의 아들 마이클 록펠러가 1961년 뉴기니 탐험 도중 실종된 사건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실종 사건 중 하나이며, 흠좀무하게도 가장 유력한 설은 원주민에게 식인을 당했다는 것이다. 록펠러 가에 대한 평전에서도 식인종에 의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1973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뉴기니섬의 원주민인 아즈맛 부족을 촬영한 영상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발가벗고 노를 젓는 백인 남성이 나와 그가 마이클 록펠러가 아니냐는 추정이 있다. 만약 이 백인 남성이 진짜 마이클 록펠러라면 그는 식인종에게 사망한 것이 아닌 아즈맛 부족의 부족원으로 받아들여져 그들과 함께 생활하다 병사 또는 자연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마이클 록펠러가 록펠러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미스터리다[41]. 문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해당 영상 속 백인 남성이 발견된 게 50여년이 지난 2020년대라 더이상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모아이 문명과 이스터 섬(라파누이) 원주민들: 구체적으로 당시 폴리네시아의 기술로 어떻게 커다란 대규모 석상들을 세웠을 수 있었는지, 또한 모아이 주민들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되었는지, 동시에 그들의 문명이 쇠퇴 또는 멸망이 되었는지에 대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42]
- 해럴드 홀트 실종 사건: 위의 마이클 록펠러 실종 사건 및 애거서 크리스티 실종 사건과 함께 20세기를 떠들썩하게 한 실종 사건으로 호주의 수상이었던 해럴드 홀트가 1967년에 현직 총리 신분으로 지인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던 중에 실종되어 버린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당시 홀트 수상은 경호원들도 뿌리치고 혼자 바다로 헤엄쳐 갔는데, 그 뒤로 그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고, 호주 해군 및 해안경비대, 주 경찰의 수색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헤엄치던 도중에 파도에 쓸려서 익사했다는 설과, 그가 유례없는 친중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사실 해럴드 홀트는 중국 측에 포섭된 스파이이며, 당시에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그가 사고를 가장하여 미리 약속된 지점까지 헤엄쳐서 중국 스파이와 접선한 뒤에 그대로 중국으로 망명했다는 설도 있으나,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내용이라서 무시되었다. 그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개판 5분 전이라 그럴 여력이 없었다. 오히려 베트남 전쟁이 한참인 시기여서 북베트남을 돕던 소련이 납치해서 굴라크에 끌려갔다는 썰도 있다. 그 이외에 상어에게 물려서 사망했다는 설, 수영 도중에 비타민 결핍증으로 인해 몸에 마비가 와서 익사했다는 설도 있으나,[43] 유력한 가설은 없는 상태이다. 일단 호주 정부는 공식적으로, 그가 수영하던 도중에 사고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1]
이들의 거주 위치 상, 주류
역사학계는 이들의 정체를
베오투크족이나
알곤킨족으로 비정하고 있다.
[2]
캐나다의
뉴펀들랜드가 실제 출생지라는 설도 있어서 확실치는 않다. 일단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출생지가 어디든지간에, 일단 스노리가
북아메리카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3]
이에 대한 이유로
현지 원주민들이 체포된
바이킹 포로들을 곧장 죽여버렸던 것이 거론된다.
[4]
케트어가 속한 언어군으로,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 일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
[5]
나바호어,
애서배스칸어,
에야크어 등이 속한 언어군이며,
북아메리카 서부에 화자들이 주로 분포해있다.
[6]
이누이트의 사촌뻘되는 민족이며, 이들의 언어인
유픽어는
이누이트어와 함께
이누이트알류트어족으로 분류된다.
[7]
유픽족이나
이누이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분류되는 다른 민족들과는 기원이 전혀 다르다. 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코카소이드와
동아시아인의 공통조상인
고대 북유라시아인(ANE)계이고, 유픽족이나 이누이트족은 그 이후에 형성된 동아시아인 계통이다.
[8]
아메린드어족 가설이라 하여,
이누이트나
유픽족,
알류트족이 쓰는
이누이트알류트어족 계통 언어들을 제외한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전체를 하나의
어족으로 묶는 가설은 있지만, 주류
언어학계로부터
기정사실로 취급되고 있기라도 하는
데네예니세이어족과는 달리, 완전히 가설로만 취급되고 주류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학설이 아니다.
[9]
바이킹들이
그린란드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이누이트족과 조우했다는 설도 있다. 9세기경에
아이슬란드에 막 상륙한 바이킹들의 기록에서 조난당해 사망한 국적불명의 사람 두 명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들의 정체가
그린란드에서 표류해 온
이누이트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0]
그 근거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래 이전의
폴리네시아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구마의 존재와 고구마를 가리키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소속 언어들의 어휘들이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말레이 폴리네시아어군 조어로
고구마를 가리키는 단어인 쿠우말라(kuumala)는
케추아어로 고구마를 뜻하는 쿠마라(kumara)에서 차용한 말이다.
인류학자들은 형질인류학 연구를 통해,
폴리네시아인들이 케추아계 부족들과 조우한 곳이 지금의
페루와
칠레의 국경지대에 해당하는 곳임을 밝혀내었다.
[11]
9세기 경부터
바스크족들은
유럽에서 어부나 무역상같은 항해사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을 만큼, 전통적으로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전해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아이슬란드까지 진출해서 어업이나 포경업에 종사하곤 했고, 그 흔적이 바로
바스크어와
아이슬란드어의
피진이라는
혼종이다. 이런 관계로 어쩌면 바스크인들이
아이슬란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린란드를 통해 오늘날의
캐나다 북동부 지역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2]
이 주장은 아래의
오크 섬의 보물 떡밥과도 연결된다.
[13]
여담으로, 뜻밖에도
고구마의 전파 과정에 대한 미스터리가
바이킹의
북아메리카 진출 이전에도
아메리카 원주민과 접촉한 이들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오세아니아에서의 고구마 전파 과정에 대해서는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11세기에
남아메리카까지 가서 고구마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나머지 지역의 경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그 이후의 탐험가들이 고구마를 가져왔던 것이 시초라는 설이 부정되면서
생물학계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때 종래의 학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된 게
고구마의
DNA 정보를 연구한 결과인데, 이 연구에 의해 무려 1200년 전부터
아메리카 밖으로 고구마가 전파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식물이 사람의 도움도 없이 타 대륙으로 퍼져나갈 수는 없으므로, 결국 이미
폴리네시아 원주민들보다도 먼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조우했거나, 최소한 아메리카 땅이라도 밟은 이들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14]
공룡이 그려져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화제를 모았던
이카의 돌이 현지인의 날조로 만들어진 것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던 만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5]
문명의 이름인 올멕은 훨씬 후대에 중앙 아메리카에 정착한
아즈텍족이 붙인 이름이었는데
나우아틀어로 고무 인간이라는 뜻이다.
[16]
볼리비아의 전(前) 대통령이었던
에보 모랄레스가
아이마라족 출신이다.
[17]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도래했을 시기에는 이미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나 자기들끼리만 교류를 했을 뿐이었다.
[18]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
대양어군에 속한다.
[19]
고구마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다.
[20]
다만,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폴리네시아 방면으로 진출한 적이 있었다는 설이 있긴 하다.
잉카 제국의 제2대 황제인
투팍 잉카 유판키가 상인들로부터
황금으로 그득한 전설의 땅인 니나 춤피와 하와 춤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직접
태평양 방향으로 원정을 떠나서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돌아왔다. 일단 주류
역사학계는 당시 잉카 제국에 원양 항해 기술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 기록이 진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일부 이 설화의 진위 여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니나 춤피와 하와 춤피를
갈라파고스 제도나
이스터 섬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이스터 섬 원주민들인 라파누이인들의
모아이 관련 전설에서 언급되는 옛 지배층들인 장이족을 이때 투팍 잉카 유판키가 이끌고 온 잉카인 탐험대라고 보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21]
둘 중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에서,
호세 데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에서
국부로 숭앙받는다.
[22]
회담 자체가 두 사람 외에는 누구도 참관하지 않았고, 회담의 내용과 진행에 대해서 두 사람 중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고 죽었다.
[23]
호세 데 산 마르틴 자신이 직접 군주가 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럽의 왕족들 중 한 사람을 군주로 옹립하고 실권을 정부와 의회가 행사하는 방식을 지향한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 왕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목숨걸고 투쟁했던 상황에서 그런 주장을 하겠다는 얘기는,
시몬 볼리바르에게는 그냥 스페인 치하로 되돌아가겠다는 얘기로 들렸을 법하다.
[24]
과야킬 회담 이후로 추방당한
호세 데 산 마르틴은 이후로 경조사 때문에 임시 귀국한 것 빼고는, 두 번 다시는
아르헨티나 땅을 밟지 못했다.
[25]
다만, 이 지도의 진위여부는 불명이다.
[26]
문제의 사본이 진품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 지역이 어떻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전부터
유럽인들에게 그 존재가 알려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대강 설명이 가능하다. 서기 10세기에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바이킹들이 오늘날의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일대를 탐험하고
빈란드라는 식민지를 건설해 11세기까지 이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때 바이킹 탐험가들이
노바스코샤를 탐험하고 오크섬의 존재를 확인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렇게 제작된 섬의 지도가
유럽의 타 지역으로 흘러들어갔다고 하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탐험 이전에도 오크섬의 존재가 유럽인들에게 알려질 수도 있었다.
[27]
일단 음악학자들은 당대에 남겨진 기록을 토대로,
팔머 맥아비가
백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있다.
[28]
텍사스 알렉산더에 대해
흑인라는 점과
텍사스 주의 소도시인
주어트에서 살다왔다는 점, 생몰년도와 출생지까지 몽땅 밝혀져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친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알려진 내용들도 모두 텍사스 알렉산더 본인의 증언에 의한 것뿐이라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29]
네임드
블루스 가수들 중 한 명.
[30]
실제로 줄리어스의 간첩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로젠버그 부부는 이런 석연치않은 부분때문에
매카시즘의 대표적인 희생양으로 꼽힌다.
[31]
대표적으로 금주단속 관리관이 있는데, 미국은 당시에도 인구가 1억명에 가까웠음에도 관리 인원은 주 단위도 아닌 국가단위로 고작 4000여명 밖에 산정하지 않았다. 그런 수의 인원으로 단속이 가능했을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32]
다만 대통령령이나 일반 입법은 냅두고 왜 굳이 헌법까지 갔냐는 것 자체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한 법의 일반적인 원칙인 상위법 우선의 원칙 때문인데, 사회문화 현상에 특성상 금주법을 미국인 100%가 찬성하라는 법은 없어서 대통령령이나 법률만으로 했다간 반대파가 언제든지 위헌 선고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당연하고 당시의
미국 헌법으로도 금주법을 법률로 만들었다간 충분히 위헌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았다.(수정 헌법 제17조까지. 금주법은 18조, 폐지 조항은 21조이다.) 따라서 대통령령이나 법률을 뛰어넘는 최고법인 헌법에다가 아예 박아버려서 위헌 판결같은 귀찮은 가능성을 없애버리려던 것이다.
[33]
이때 리치는 디온에게 자신의 기타를 맡겼다고 한다.
[34]
다만 냉전 즉, 미국과 소련과의 갈등은 원인이 아닐거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당시 시기가 냉전이라 저런 타이틀이 붙은 것. 다만 이하에 서술했듯이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어 소련이 배후라는 음모론도 없지는 않다.
[35]
재클린 케네디는 취임선서 직전까지 에어 포스 원의 화장실 안에서 틀어박혀 있었다. 또한 그녀가 입은 옷에는 케네디의 피가 묻어있었고, 그녀는 이것을 닦을 생각조차 못할 만큼 패닉상태였다.
[36]
참고로 이 둘은
미국 영상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특수효과 전문가이자, 수준급 공학자들이다.
[37]
참고로 지미 호파는 1975년에 실종되었으나 실종선고 만료로 사망 의제된 것은 1982년이다.
[38]
지금의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 주와
뉴질랜드 전역을 관할하는 총독부였으며, 오늘날의 호주 연방 정부의 전신이다.
[39]
당시의 호주 대륙은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비견될 정도로
헬게이트였다. 백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억울하게 땅을 빼앗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이 원한 때문에 지나가는 백인 탐험가들에게 적대적이었으므로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광활한
초원과
사막이 펼쳐져 있어서 탐험 도중에 식량이나 물이 바닥나면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기가 무척 쉬웠다. 즉, 이런 곳을 탐험하다 돌아오지 못했으면 십중팔구는 현지에서 사망했다고 보아야 했다.
[40]
비슷한 사례로,
영국 해군 장교인
존 프랭클린이 이끄는 탐사대 전원이
북극에서 조난사한 사례가 있다. 이쪽은 항해 일지와 같은 기록물이 일체 발견되지 않아서 사건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은 경우이다.
[41]
다만,
마이클 록펠러는 평소에도
인류학에 관심이 많아서,
뉴기니로의 탐험을 동경해왔다. 상류층으로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자신을 구해준 부족민들과 여생을 보내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는 셈이다. 애초에 그가 뉴기니를 탐험한 이유도 인류학적 조사를 목적으로 현지 원주민들을 만나려던 것이고, 그 와중에
카누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42]
다만 원주민 감소의 경우, 섬을 발견한 원주민에 의한 환경파괴가 기근으로 변해 이로 인한 식인, 전쟁 때문에 원주민들이 많이 감소된 것은 과장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외 석상을 지으려고 통나무들을 대규모로 많이 베어서 섬이 황폐화된 것이 근본적 이유라고 알려졌지만 이 외에도 여러 추측이나 가설들이 나돌았으며 숲의 중요성을 모를리 없었던 원주민들이 왜 그토록 많이 나무들을 베어야 했는지에 대한 반론이 있었다. 그 중 유력한게 항해할 때 먹을 목적으로 데려오거나 혹은 원주민들이 항해할 때 몰래 따라온 폴리네시아 쌀쥐들 때문에 야자열매와 어린 나무들이 많이 사라져 숲의 생태가 많이 황폐화된 것이라는 유력한 추측이 있다.
[43]
실제로
해럴드 홀트는 이전에도 이 증세로 인해 수영 도중에 익사할 뻔한 적이 몇 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