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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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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1대 국왕
진성여왕 | 眞聖女王
파일:양산 진성여왕릉.jpg
양산 진성여왕릉 전경.
출생
(음력)
865년 ~ 868년
신라 금성
(現 경상북도 경주시)
퇴위 897년 7월 8일[A][2]
신라 금성
(現 경상북도 경주시)
사망 898년 1월 4일[B] (향년 30~33세)
신라 금성 북궁
(現 경상북도 경주시)
능묘 황산(黃山)[4]
재위기간 신라 제51대 국왕
887년 음력 7월 ~ 897년 7월 8일[A] (10년)
신라 태상왕
897년 7월 8일[A] ~ 898년 1월 4일[B] (5개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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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曼)[8] / 탄(坦)[9] / 만헌(曼憲)[10][11]
부모 부왕 경문왕
모후 문의왕후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녀[12]
국서 김위홍[13]
자녀 1남 이상?
김양패[14][15]
종교 불교
시호 진성대왕(眞聖大王)[16]
별호 매금지존(寐錦之尊)[17]
찰니나제(刹尼那帝)
북궁공주(北宮公主)[18]
골품 진골(真骨) }}}}}}}}}
태위대왕(太尉大王)께서는 은혜를 온 나라에 베푸시고 덕 있는 사람을 높은 산처럼 존숭하셨다.
太尉大王 流恩表海 仰德高山
최치원이 작성한 『성광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朗慧和尙 白月光塔碑)』에서 발췌

1. 개요2. 생애
2.1. 즉위 배경2.2. 재위 전반기의 국정 운영2.3. 난세의 개막2.4. 재위 후반기의 행보2.5. 자진 퇴위와 최후
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 삼국사기》 기록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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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년 이래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내가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은 결정되었다.
近年以來, 百姓困窮, 盗賊蜂起, 此孤之不徳也. 避賢讓位, 吾意決矣.
삼국사기》에서 진성여왕이 조카 김요에게 양위를 선언한 말. #
신라의 제51대 국왕.[19]

신라와 한국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여왕으로 진덕여왕이 승하한 654년 이후에 233년 만에 등장한 여왕이다. 한국사의 여왕들 중 유일하게 남매 계승을 했다.

2. 생애

2.1. 즉위 배경

제48대 경문왕 영화부인 사이의 2남 1녀 중 셋째이자 고명딸로, 제49대 헌강왕과 제50대 정강왕의 여동생이었으며, 제52대 효공왕의 고모다. 두 오빠에게는 서자인 효공왕을 제외하고는 아들이 없었다. 정강왕 김황은 왕위에 오르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병이 들었는데, 승하하기 전에 "누이동생 만이 총명하며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전례도 있으니 잘할 것이다."라며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총명하다=좋은 군주'는 아니었다. 외모에 대해서는 오빠 정강왕이 남긴 유조에 따르면 "골격이 흡사 건장한 사내와 같다"라고 적혀 있다. 어지간한 남자들 못지 않게 체격이 컸던 듯 하다.

이와 같이 신라의 왕통은 왕자에게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공주에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왕자가 없는 경우에 공주나 왕서(王壻, 군주의 사위)가 계승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대 남해 차차웅 승하 직후 아들 유리와 사위 석탈해가 왕위 계승을 두고 다투고 있는 것에서부터 신라의 왕위 계승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추측된다. 따라서 진성여왕은 정강왕 사후 왕위 계승 1순위로 즉위했기에 그 당시 기준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즉위였지만, 후대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관점에서는 여자가 왕이 된다는 것이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고, 마침 나라가 무너져가는 시기가 진성여왕과 맞물렸기에 망국의 원인 중 하나를 진성여왕에게서 찾게 되었다.

다만 더 앞 시대의 헌안왕(제47대)이 친딸이 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위 김응렴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비록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전례가 있지만 본받을 만하지 않다."라고 선포한 기록을 보아, 9세기 신라 사회에서도 여왕에 대한 찬반 논란은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논란을 떠나서 여왕 자체가 아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조선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신라 사회 역시 남녀가 완전히 계승권이 대등한 상황은 아니었다. 뭣보다도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왕위 계승은 '여자가 오를지언정 성골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뿌리 깊은 신라 골품제가 우선 순위가 더 높았던 예시로 보는 게 더 옳을 것이며, 성골이 완전히 씨가 마른 진덕여왕 사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골이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게다가 두 여왕은 삼국시대 신라였고, 이때는 통일신라인데, 여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고구려 백제 계통 지방인들이 더욱 여왕을 부정적으로 보았을 가능성 역시 제기되고 있다.

진성여왕 시호의 '진'()자 역시 옛날 두 여왕의 전례를 따른다는 진성여왕의 컨셉과 관련이 있는데, 이 글자는 통일 이전 중고기 왕실의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덕여왕 때의 불교적 시호에 집중적으로 쓰였고[20] 이후로는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다가 진성여왕에 갑자기 들어갔다. 이는 여왕의 즉위라는 특수 상황을 설명하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교적 권위 및 과거 두 여왕이 존재했고 나라가 강해지던 중고기 전성기 시절의 향수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부왕 경문왕 문의왕후가 860년에 혼인한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865년~868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는데, 19세~22세 정도의 젊은 나이에 즉위했다는 의미이다.

2.2. 재위 전반기의 국정 운영

삼국유사》에는 "진성여왕이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진성여왕의 유모 부호부인과 부호부인의 남편 위홍 등이 실권을 잡고, 정치가 어지러워졌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김위홍이라는 사람의 신분은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숙부이므로 신라의 왕족이다. 그런데 진성여왕은 유모 부호부인의 남편 겸 자신의 숙부가 되는 위홍과 불륜 관계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 삼국사기》에는 " 임금이 평소 각간 위홍과 간통했는데 그가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위홍 사후 임금이 은밀히 미소년과 미장부 2~3명을 에 끌어들이니 음탕하고 문란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정치를 맡겼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21][22] 그러나 왕이 후궁을 거느리는 것이 당대에도 후대에도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년과 미장부 두 셋을 끌어들였다는 사실만으로 마냥 암군이라고 칭하기는 어려운 편이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권력을 잡게 하여 왕경 서라벌의 정치를 어지럽게 한 것이다.

진성여왕 3년(서기 889년)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물을 바치지 않아 재정이 궁핍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百座講經)[23]을 한 것 외에는 민심 수습을 위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 효녀 지은 설화>가 진성여왕 시대의 일인데, 당시 가난을 이기지 못해 구걸하고 다니거나 부잣집의 종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구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현춘이라는 인물은 895년 배 100여 척, 병력 2,5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규슈 지역을 약탈하다 사로잡히기도 했다.[24]

이처럼 진성여왕이 즉위하자마자 신라 조정이 재정난에 시달린 배경에는 황소의 난을 위시한 중국 대륙의 혼란과 이로 인한 해상무역의 위축이 있었다. 특히 황소는 870년대 후반 내내 강남을 휘저으며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인 항주, 복주, 광주 등 해안 도시들을 휩쓸었고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아랍 등지의 외국 상인들이 엄청나게 피를 보았다. 당연히 해상 실크로드에 포함되어 당과 일본 사이의 무역을 중계해 부를 쌓았던 신라는 이러한 혼란의 영향을 직격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25]

그 외의 업적으로는 888년 군주가 각간 위홍에게 명해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게 하니, 그 책 이름을 《 삼대목》이라 하였다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은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연회장에서 불리는 향가의 가사가 조금씩 달라 국가 공인 ' 노래방 가사집'을 만들려 한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

다만 아버지 경문왕이 화랑 출신이고, 향가는 화랑도나 승려가 주로 지었다거나, < 찬기파랑가>나 < 모죽지랑가>처럼 여러 화랑들을 칭송하는 향가들이 존재하는 점을 감안하면 《삼대목》 편찬도 단순히 문화적 동기가 아니라 경문왕가 신성화 작업=왕권 강화책의 일환이라는 해석도 있다. 즉 훗날 조선에서 《 용비어천가》를 지은 것과 같은 목적으로, 단순한 노래 수집 여흥이 아니라 흔들리는 하대 왕권을 다잡아보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 단서로 숙부 김위홍과 함께 승려 대구화상에게 향가를 수집하도록 했는데, 대구화상은 《 삼국유사》에서 요원랑, 계원랑, 숙종랑 등 화랑들에게 경문왕을 칭송하는 노래를 만들게 한 기록이 있다. 물론 《삼대목》에는 적어도 대구화상이 관여한 이 노래들은 분명히 들어갔을 것이다.

참고로 학습 만화 《신라 왕조 1000년》에선 진성여왕이 "내 유일한 업적인 《삼대목》이 전하지 않다니."라고 외치며 대성통곡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진성여왕의 재위 중 그녀가 제대로 뭘 했다는 기록이 설화를 제외하면 이거 하나뿐이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2.3. 난세의 개막

한국의 군주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50대 정강왕 김황(신라) 51대 진성여왕 김만(신라) 52대 효공왕 김요(신라)
태봉 1대 궁예
후백제 1대 견훤

진성여왕이 즉위한 시점에서 이미 신라 혜공왕(제36대) 때를 시발점으로 해서 국력도 쇠락하고 민심도 흉흉해 서서히 무너지던 망국이었다. 888년에 누군가가 정치를 비방하는 방을 써 몰래 길거리에 붙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51대 진성여왕은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그의 남편 위홍 잡간 등 서너 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정사를 어지럽히니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근심하여 다라니(陀羅尼) 은어를 지어 길 위에 던져두었다.
삼국유사》 제2<기이> -진성여대왕-
이미 진성여왕 재위 하반기에는 왕실 측근을 비방하는 다라니 유포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왕경 서라벌 사람들(國人)의 여론도 진성여왕과 경문왕계를 거세게 비판할 정도로 민심이 악화돼 있었다. 신라 지방에서 불만이 폭발하는데 중앙에서도 당연히 문제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아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삼국유사》 <진성여왕조> -거타지-
《삼국유사》에 의하면 저기서 '나무망국'은 신라가 망한다는 뜻이었으며, '찰니나제'는 여왕,[26] '판니판니소판니'는 소판(잡간) 위홍, '우우삼아간'은 여왕의 총신 3명[27], '부이'는 여왕의 유모 부호부인을 뜻했다.

이에 왕거인(王巨仁)이라는 사람을 범인으로 붙잡았지만 그날 저녁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떨어져 여왕이 두려워 그를 풀어주는 사건이 있었다. 우박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왕거인이 뒤에 정치적인 인맥이 컸거나, 아니면 진범이라는 증거를 잡지 못했다거나, 서라벌 내 국인(國人), 즉 사람들의 여론이 왕거인을 풀어주라는 쪽으로 항의하는 데 모였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있다. < 태조 왕건>에서는 6화에서 도선대사가 조정의 주최로 열린 백고좌에서 법문을 구실로 신라 조정을 비판하며 천둥과 번개가 일어났을 때 갇혀 있던 왕거인이 홀연히 빠져나가는 판타지스러운 각색을 넣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거인은 감옥에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연단[28]의 피눈물에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29]이 품은 슬픔은 여름에도 비를 내리네
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으니
황천은 어이하여 아무 상서로움도 없는가
《삼국유사》 <진성여왕조> -거타지-

889년 결국 사벌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났다. 진성여왕은 영기(令奇)에게 군사를 주고 토벌을 명령했는데, 영기는 막상 가 보니 반란군의 규모가 커서 겁을 먹고 진군하지 못했고, 정작 중앙군이 제 역할을 못할 때 지역 촌주 우연(祐連)이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에 진성여왕은 영기의 목을 베고 우연의 아들을 촌주로 삼았다. 이후 원종과 애노의 난이 진압되었는지는 확실히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아자개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거병하는 걸 봐선 언젠가 다른 반란군에 흡수되거나 자멸한 듯하다. 아무튼 원종과 애노의 난은 더 이상 신라 정부가 지방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것을 인증하는 사건이었고, 곧이어 전국에서 반란군이 일어나 난세가 시작되었다.

5년(서기 891년) 10월 북원(北原)의 군벌 양길 궁예에게 100여 명의 기병을 맡겨 북원(北原) 동부락과 명주(溟州) 관내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졌고, 6년(서기 892년) 견훤이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왕을 자칭하니[30] 무주 동남의 군현이 항복하여 그에게 소속되어 버렸다. 이후 8년(서기 894년) 10월에 궁예가 600명의 병력으로 북원에서 하슬라(지금의 강원도 강릉시)를 침범해오니, 그 무리가 3,500여 명에 달하고, 궁예는 스스로 장군이라 칭했다는 기록과 9년(서기 895년) 8월 궁예가 저족(猪足), 성천의 두 군을 취하고 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쳐서 공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직 궁예와 견훤이 후고구려 후백제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후삼국시대의 기틀은 진성여왕 시대에 거의 다 잡힌 것이다.

893년 견당사 김처회는 당나라에 가던 도중 서해 바다에 빠져 죽었고, 894년 최치원을 당나라에 보내려다가 도적이 많아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해적이 많아 황해를 건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31]

2.4. 재위 후반기의 행보

894년 2월에 최치원이 <시무(時務) 10조>를 올리자 여왕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시무 10조>의 내용은 기록에 직접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의 정치를 개혁하자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시대 상황과 최치원의 사상을 감안하면 <시무 10조>의 내용은 진골 중심의 골품제 타파, 전제왕권 강화, 호족 억제책, 인사 행정과 조세 제도 개혁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32]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 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시무 10조>의 조항 중 일부는 시행됐는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지만[33][34] 일단 그의 다른 저작에서 나타나는 최치원의 성향상 분명히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 6두품 중심의 유교적 개혁과 관련한 내용은 결국 관철되지 못했다. 이는 1,000년의 세월간 고착화된 신라의 정치 체제로서는 실현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이 개혁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신라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지만, 이미 양길 견훤이 독립한 상황이니 개혁을 제대로 시도했더라도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당대 민중에게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선종 고승들을 수도 서라벌로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현대와 달리 후삼국시대에는 불교의 영향력이 컸고 궁예나 훗날의 왕건, 견훤이나 김해 소충자 등 여러 호족들도 앞다퉈 이름 높은 선승을 자기 지역으로 초빙하려고 노력하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진성여왕의 이런 시도는 전국 각지의 고승비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무염선사가 열반에 들자 그를 위도 부도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에게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제작을 맡겼으며, 월광사 원랑선사의 비를 세우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이런 노력으로 일부 고승들은 후삼국시대 신라 조정에 협력했으나 그 외 여러 고승들은 중앙보다는 지방 세력에 더 눈을 돌렸다. 봉림산문의 심희 선사처럼 진성여왕의 소환령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896년에는 적고적이라는 붉은 바지로 의상을 통일한 도적단이 나라 서남쪽에서 나타나 서라벌 바로 옆 모량리까지 노략질하기도 했다. 나라가 망해가니 적고적 같은 도적 떼가 창궐하고 호족의 반란과 자연의 이상 현상이 잦았다는 듯하다. 제법 똑똑했다고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재위 9년(서기 895년) 10월에 큰오빠 헌강왕 서자인 요(嶢)(뒷날의 효공왕)를 태자로 봉했다.

2.5. 자진 퇴위와 최후

11년(서기 897년) 6월에 결국 지방 도적들의 반란이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고 후삼국시대 개막의 책임을 지고 자진 퇴위했다. 태자 김요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북쪽 궁궐(北宮)로 거처를 옮긴 뒤 반 년 동안 태상왕으로 있다가 같은 해 12월에 승하했다. 당시 나이는 30세~33세 사이로 추정되는데, 상당히 젊은 나이에 죽었다. 신라 역사상 유례 없이 특이하게도 자진 퇴위한 데다 요절했다는 이러한 정황으로 봐서 자연스러운 양위가 아니라 쿠데타나 그에 준하는 원인 때문이고, 그 배후에 이후 즉위하는 신덕왕, 그리고 신덕왕의 양아버지 박예겸 등 박씨 세력이 있다는 설도 있다.

박예겸은 헌강왕(제49대) 재위 전반기까지는 시중으로서 국정에 참여했지만 헌강왕 후반기부터 경문왕계가 중앙 정계를 장악하면서 잠시 밀려났었다. 그러나 위와 같이 경문왕계의 통치가 후삼국시대라는 파국을 맞았고, 서라벌 사람들조차도 진성여왕과 김위홍을 은어로 비난하는 상황이 되었다. 꼭 쿠데타 같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도 자연스레 경문왕계 및 경문왕계와 밀접한 김효종 대신 대안으로서 박예겸의 박씨 세력이 부상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진성여왕 재위 후반기 어느 시점에 박경휘와 헌강왕의 딸이 혼인해, 김효종과 마찬가지로 왕의 사위로서 신라 법도상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충족해 명분을 쌓기 시작했다. 이어 즉위한 효공왕 김요는 서자라는 혈통상 약점이 있는 데다 10대의 어린 나이로 실권이 없었고, 박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늦어도 진성여왕 하반기에 이르면 박씨가 실권을 쥐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진성여왕이 갑작스레 붕어한 것도 박씨가 배후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오빠, 뒤를 이은 조카가 모두 단명하였음을 고려하면, 당시 의학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가족력이었을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누대에 걸쳐 근친혼을 거듭해온 신라 왕실 특성상 유전병이 발병했었어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제38대 열조 원성왕부터 제48대 경문왕의 직계 조상들은 모두 근친혼을 6번 했다. 김충공-귀보부인(김인겸 또는 김헌정의 딸), 희강왕-문목부인(김충공의 딸), 김균정- 정교부인(김충공의 딸), 김균정- 조명부인(김충공의 딸), 김계명-광화부인(제45대 신무왕의 딸), 그리고 경문왕- 영화부인(제47대 헌안왕의 딸). 둘 사이의 소생이 경문왕의 직계 조상인 것만 넣은 거라서 애는 안 낳고 결혼만 한 것까지 추가하면 훨씬 늘어난다. 이러면 신라 후대에 암군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설명 가능하다.

《삼국사기》에는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35] 삼국유사》 <왕력>에는 " 화장하여 뼈를 연량(年梁)의 서훼(西卉) 또는 미황산(未黃山)에 뿌렸다"라고 되어 있다.

3. 평가

진성여왕의 재위 중에 여러차례 반란[36]이 일어나는 등 신라가 분열되었기에 후대에는 대표적인 암군으로 여겨졌다.[37] 다만 동양 전통 역사관에서 멸망한 전조의 혼란상을 평가할 때 당시 재위한 군주와 몇몇 신하들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대 정치적 혼란상을 혼자 뒤집어썼다는 견해도 있다.[38] 진성여왕 당시에는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나고 견훤 무진주를 점령한 뒤 스스로 칭왕하며, 도적이 들끓는 등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모조리 진성여왕의 탓이라고는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계속 쌓인 신라 자체의 문제가 진성여왕 시대에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듯하다. 일단 경문왕 시절에도 잘 수습하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재난들이 있었고, 헌강왕 시절에도 심상치 않은 조짐은 있었다.

삼국사기 진성왕 대의 기록을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진성여왕은 김요의 반란을 진압한 후 대사면령과 함께 1년 조세 면제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그 이후 2년차부터 갑자기 각간 위홍이 진성여왕과 붙어먹으며 국정을 농단했다는 기록과 함께 마치 진성여왕의 실정이 수십년간 쌓여온것마냥 말하는 기록이 나오며, 세금이 올라오지 않아 국고가 비어 독촉했더니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는 신라 말기의 행정체계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1년 조세 면제 이후 다시 세금이 중앙으로 올라왔어야 하지만 한번 면제된 조세를 지방 호족들과 관리들이 내는 것을 거부하고 배째라를 시전하는데도 독촉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는 것을 증빙하는 것이며, 동시에 위에 말한 대로 신라의 병폐가 진성여왕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것이 진성여왕의 1년 면세와 그에 뒤이은 세금 독촉으로 인해 한꺼번에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진성왕은 그런 상황에서도 최치원의 시무 10조를 받아들여 개혁을 시도하는 등 '진성여왕이 아무것도 안하고 나라를 망쳤다'라는 프레임과는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 최치원이 진성여왕을 칭찬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중앙의 정치투쟁에 밀려 한산주로 내려간 진골 귀족 김요의 반란의 규모가 사서에 간단히 묘사된 것과는 달리 매우 컸고, 이를 진압하는 데에 사벌주를 비롯한 원신라 지역에 엄청난 수탈과 징발이 가해져 지방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던 차에 중앙의 세금 독촉이 중앙이 지방의 상황을 무시한다고 여긴 지방 호족들과 관리들의 불만을 사 반란+독립이 이어지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즉 진성여왕의 1년 면세조치는 본인 딴에는 민심을 사기 위한 수단이었을지 몰라도 면세기간이 끝난 후에는 다시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당시 신라의 행정제도는 그러한 유연성과 탄력성에 이미 결여되어 있었고, 이 현실을 간과한 탓에 후삼국시대라는 초대형 폭탄을 본인의 재임기에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통념과 달리 최치원의 개혁책은 완전히 좌절된 것도 아니다. 신라 말기에 보면 골품에 따라 극히 폐쇄적이었던 관등 체계에 비진골 출신 지방 유력자에게 진골 관등을 수여하거나,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배우고 돌아온 지주사체제가 시행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있는 등 삼국사기에 묘사된 파천황적인 면모와는 달리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다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골품제 자체를 타파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지주사체제가 시행됨으로서 신라 왕실의 직할지가 수도 서라벌 주변 지역으로 줄어드는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원신라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확보하여 후일 신덕왕-경명왕-경애왕의 치세 하에 그나마 신라가 버틸 수 있었다. 비록 경애왕이 견훤에게 서라벌 습격으로 인해 비참하게 자살하는 바람에 고려의 반속국으로 굴러떨어지고 그 때까지도 버티던 경상도 친신라 호족들이 모두 왕건에게 귀부하긴 했지만 이는 왕건이 경주 코앞까지 와서 무력시위를 하는 바람에 그런 것이고, 대부분의 신라 호족들은 끝까지 신라에 충성을 바쳤다. 만약 진성여왕이 기존의 평가대로 암군이었고 신라 조정이 6두품, 호족들의 지지를 잃어버렸다면 신라가 후삼국 중 하나로 남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동국통감》의 평가는 나라를 망하게한 왕으로 혹평했다.
"진성(眞聖)은, 음탕 방자함이 당나라 무조(武瞾, 칙천무후(則天武后))보다 더하여 나라의 기반을 잃게 되었으니, 여기서 신라에 망조가 들었습니다. 이로부터 뭇 도적이 마구 일어나게 되어 궁예(弓裔)는 북원(北原)에서 모반을 하고, 견훤(甄萱)은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강토는 날로 위축되었던 것입니다."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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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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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진성왕 본기>
一年秋七月 진성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죄수 사면하고 주군의 조세를 면제해 주다
一年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설법을 듣다
一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다
二年春二月 소량리의 돌이 저절로 움직이다
二年 삼대목을 편찬하다
二年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으로 추존하다
二年 왕이 미소년과 음란한 행위를 하다
二年 거인이 정치를 비방하는 글로 곤욕을 치르다
二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年 죄수에 대한 사면과 승려에 대한 도첩을 수여하다
二年夏五月 가뭄이 들다
三年 원종(신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키다
四年春一月 햇무리가 5겹 생기다
四年春一月十五日 황룡사에서 연등 행차를 보다
五年冬十月 궁예가 북원과 명주관내를 습격하다
六年 견훤 후백제를 세우다
七年 병부 시랑 김처회가 당나라에 가던 도중 익사하다
八年春二月 최치원이 시무 10여 조를 건의하다
八年冬十月 궁예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다
九年秋八月 궁예가 10여 군현을 깨뜨리다
九年冬十月 요를 태자로 책봉하다
十年 서남쪽에 도적이 일어나다
十一年夏六月 진성왕이 태자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十一年冬十二月四日 진성왕이 죽다

삼국사기》 11권은 문성왕부터 시작되어 진성여왕에서 끝난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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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밀양 박씨 왕조 [聖] 경주 김씨 성골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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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추존 국왕 및 왕족
[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A] 음력 6월 1일, 율리우스력 7월 4일 [2] 고운집》과 《 동문선》 기록. [B] 음력 897년 12월 4일, 율리우스력 897년 12월 31일 [4] '황산'이란 지명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를 가리키고 있고, 실제로 양산시에 진성여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이 있는데 문화재청이 인정한 곳은 아니다. [A] [A] [B] [8]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기록. [9] 최치원 문집에 실린 <사사위표> 기록. [10] 삼국유사》 <왕력> 기록. [11] 참고로 원문은 '金氏名曼憲 即定康王之同母妹也'(성은 김이고 이름은 만헌이니, 즉 정강왕의 동복 여동생이다)인데, 이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헌강왕~진성여왕 세 남매의 어머니가 바뀌는 골 때리는 상황이 연출된다. 우선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진성여왕의 다른 이름이 '만헌'이고, 정강왕의 동모제라 해서 헌강왕을 경문왕의 첫째 부인 영화부인 소생으로, 정강왕과 진성여왕을 둘째 부인 차비 김씨 소생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한편, 위의 한자 원문은 '헌'(憲)과 '즉'(即)의 위치가 뒤바뀐 오류라고 보아(즉 이 견해에 따라 시정하면 '金氏名曼 即憲定康王之同母妹也' : 성은 김이고 이름은 만이니, 즉 헌·정강왕의 동복 여동생이다) 헌강왕~진성여왕 남매를 모두 영화부인(혹은 차비 김씨) 소생으로 볼 수도 있다. [12] 오빠 김정, 김황 [13] 1차 사료인 《 삼국유사》 <왕력>에 진성여왕의 배우자가 '위홍'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여러 역사학자들의 해석이 있다. [14] 삼국유사, 고려사에서만 등장한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거타지 설화에서 김양패가 계자(季子, 막내아들)로 등장하는 점을 보면 최소 아들 2명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고려사에 수록된 작제건 설화에서는 김양정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5] 만약 김양패가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진성여왕은 한국사의 국가원수 중 유일하게 출산한 적이 있는 국가원수가 된다. [16]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기록 [17]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발췌. 모든 신라 국왕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음. [18] <봉위헌강대왕결화엄경사원문>(奉爲獻康大王結華嚴經社願文) 기록. [19] 통일신라 최후의 임금이기도 하다. 다음 왕인 효공왕부터는 후삼국 분열 후 신라 군주이다. [20] 그리고 '성'() 자 역시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21] 삼국유사》 <왕력>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위홍 대각간(大角干, 한편 <진성여왕조> -거타지-에서는 잡간(匝干)으로 나온다)은 왕의 남편으로 사후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22] 이 기록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위홍은 아내 부호부인이 사망한 후에 조카 진성여왕과 재혼한 것으로 보았다. 출처 이배용 교수는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이전까지는 여왕과 정식 혼인관계가 아니었다가 여왕이 즉위한 후 정식 남편이 되었다고 보았다. 전기웅 교수는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후부터 그녀와 공공연한 관계를 드러냈으나 정식 혼인은 아니라고 보았으며, 김창겸 교수는 위홍이 본래 진성여왕의 사통하는 정부였다가 여왕 즉위 뒤에 남편이 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권영오 교수는 진성여왕 근처 시기를 다룬 《삼국유사》 <왕력>의 기록들이 전반적으로 부정확하다는 이유로 김위홍이 여왕의 남편이라는 기록의 신뢰도 역시 낮다고 보았다. 다만 권 교수는 《삼국사기》의 김위홍과 여왕이 '통'(通)했다고 한 기록을 서로 검열삭제하는 관계였다고 해석하는 것 또한 부정했다. 이러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모아놓은 글로는 문화원형백과 위홍 문서가 참고된다. [23] 인왕백고좌회, 약칭 '백고좌회'를 의미한다.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의 번영과 안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호국불교 행사다. 주로 신라 시대에 행해졌으며, 마지막 기록은 고려 원종 강화도에서 행한 것이다. [24] 현춘은 자신을 보낸 이가 신라 왕이라 주장했는데, 이때의 왕이 진성여왕이다. 현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진성여왕이 대마도를 약탈해오라 지시했단 말이 된다. 세계사에서 비슷한 사례가 여럿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물론 어떤 지방 호족이 진성여왕의 명령이라 사칭해서 현춘을 대마도로 가게 했을 가능성이나 현춘 스스로가 블러핑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일각에선 재정난에 시달리던 신라 조정이 반독립적인 신라구 세력을 사주해서 대마도의 물자로 재정난에서 벗어나려 한 게 아닌가라는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889년 원종·애노의 난과 더불어 적고적이 창궐하고, 896년 적고적이 서라벌 근처까지 쳐들어 와서 본진이 불타려는 판국에 작은 섬의 약탈 물자로 뭔가를 시도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25] 500년 후 고려의 몰락과 멸망 역시 원나라 주도의 초원 실크로드 무역이 흑사병으로 붕괴되어 시작되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러한 무역 의존의 취약성에 학을 뗀 조선은 아예 자급자족적인 농업국가 노선을 확고하게 견지하게 되었다. [26] 산스크리트어 단어 크샤트리아의 음역어인 '찰제리'(刹帝利)를 비튼 말로 보인다. [27] 진성여왕 치세에 아찬 관등을 달고 있는 사람은 병부시랑 김처회, 혜성군(현 당진시) 태수 김준, 그리고 진성여왕의 막내아들로 전하는 김양정이 있다. [28] 형가를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연나라 왕자. [29] 연나라 소왕의 스승이며 소왕의 아들인 혜왕이 즉위하자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는데, 그 때가 여름이었지만 감옥에 서리가 내렸다는 전설이 있다. [30] 900년에 완산주( 전라북도 전주시)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후백제를 자칭하지는 않았다. [31] 다만 897년 최치원은 결국 다시 시도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890년대는 아직 후삼국 정립 이전 과도기이기 때문에 신라의 통제력이 닿는 지역이 전국에 여럿 있었고, 상황이 유동적이었다. [32] 이기백, <골품체제하의 유교적 정치이념>, 《신라시대의 국가불교와 유교》, 한국연구원, 1978, p. 164~166 [33] 가령 후삼국시대 각 호족들이 실제로 자칭했던 성주, 장군 등의 호칭은 각 호족들이 자칭했다는 설과, 신라 정부가 부여했다는 설이 있다. 후자의 경우 통일신라 정부는 본래 전국 9주 5소경 450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해 직접통치의 비중이 높았으나, 9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 이상 지방을 직접 통치하기 어렵다 판단한 신라 중앙 정부가 당나라의 지주군주사를 모방한 지주제군사(知州諸軍事) 제도를 시행해, 지방 세력가에게 경제적, 군사적 독립성을 일부 인정하고, 대신 왕실에 대한 충성을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최치원 본인은 고병의 종사관으로 머물며 당나라 말의 지주군주사 제도를 충분히 접할 수 있었고, 당나라가 절도사의 난립을 100여 년 동안 겪으면서도 어찌저찌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균형만 맞는다면 왕조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가 너무 빨리 궁예 견훤이란 두 큰 세력으로 정리되면서 9세기 당나라의 상황과는 다르게 흘러간 것이 문제였다. 다만 견훤처럼 자칭일 가능성이 높은 케이스가 보이기 때문에 자칭과 신라 조정의 인정 둘 다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34] 한편 부산대학교 전기웅 교수는 소판 왕지본, 잡찬 소충자 등 성씨로 보아 진골이 아닌 지방 세력가가 진골의 관등을 가진 것도 자칭이 아니라 진성여왕 대에 이르러서 지주제군사에게 진골의 위계를 정식으로 수여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미 늦었지만 후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뒤늦게나마 골품제의 벽을 일부 개방했다는 것이다. [35] 삼국사기》에서 '황산'이란 지명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지역을 가리키기 때문에,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 후기의 동경잡기에서부터 진성여왕릉이 양산 황산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다만 멸망 이후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한 모든 신라왕릉이 경주시 지역에 있는데 진성여왕릉이 뜬금없이 양산에 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과, 다른 몇몇 문헌들을 근거로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는 것을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황산이란 지명이 여러 곳이었을 수도 있다. [36] 원종과 애노의 난이 농민반란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37] 진성여왕 치세에 최치원이 작성한 『성광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朗慧和尙 白月光塔碑)』에 의하면 "은혜가 바다같이 넘쳤다"라며 명군으로 묘사가 되어 있지만 당연히 당대 군주를 대놓고 폭군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38] 대표적으로 백제 의자왕의 타락이 있다. [39] 선덕여왕의 경우 제37대 왕인 선덕왕 김양상과의 구분을 위해서 따로 구분을 하고 있기도 하다. 선덕여왕은 善(착할 선), 선덕왕은 宣(베풀 선)자로 서로 한자 표기법이 다르다. [40] 설사 실존인물이었다고 쳐도 헌강왕의 서자 출신인 효공왕이 다음 왕위에 오른 것과 진성여왕 시기 당으로 간 사신들 중 김양패/김양정의 이름이 없다. [41] KBS드라마 삼국기에서 선덕여왕을 연기한 배우 김혜정과는 동명이인이다. [42]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강비 역. [43] "골격이 흡사 건장한 사내와 같다"라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마른 편인 노현희가 맡은 게 고증오류. 당시에 체격이 크고 연기 경험이 풍부한 젊은 여왕 배역을 담당할 만한 배우를 찾기 힘들었을 수 있고, 굳이 체격 고증을 일부러 할 만큼 비중이 높은 인물도 아니었다. 그리고 노현희의 연기력이 준수하여 배역과 잘 맞기도 했고. [44] 실제 김위홍의 나이는 죽을 당시 40대 초반 정도였는데, 그 정도 나이는 삼국시대라도 노인으로 취급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김위홍이 궁예와 대화가 파토난 뒤 헤어지고 나서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보였다. 김위홍을 한심하게 여기던 궁예도 작별하기 전 "지금이라도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야 살 수 있다"라고 경고했는데 이는 단순히 권력에 집착하지 말라는 충고일 수도 있지만 의술을 배운 적이 있는 만큼 요양을 하라는 의도도 포함됐을 수 있다. [45] 다만 극중의 묘사로 보면 한심한 모습이지만, 그래서 역사적으로 어땠느냐 하면 여왕의 말이 맞긴 하다. 항목 참고. [46] 김위홍의 대사에서 "오죽하면 어린 네 누이로 왕통을 이었겠느냐"라는 대사로 잠깐 언급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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