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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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김해의 호족
소율희 蘇律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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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63><colcolor=#ddd> 이름 |
소율희 | 김율희 蘇律熙 / 金律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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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알 수 없음 | |
사망 | 알 수 없음 | |
재위 기간 | 알 수 없음 |
1. 개요
후삼국시대에 김인광, 그리고 형 소충자에 이어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를 차지했던 호족 세력. '김율희'라는 이름 기록도 있다.삼국사기나 고려사 등 문헌기록에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오직 당시에 활동한 여러 승려들의 비문에만 등장한다. 소율희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고승들을 후원하고 후삼국시대 거친 난세에서 안전하게 보호했으며 그를 거쳐간 승려들은 소율희를 잊지 않고 비문에 기록했다. 이런 금석문을 통해 후삼국시대 당시 김해가 선종(禪宗)의 안식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 수도 서라벌에서 거리가 가까운 지역 호족으로서 신라 조정에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후삼국시대 신라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의 침투가 본격화된 920년대 중후반에 몰락하고 만다.
2. 성씨
'태자사낭공대사비'와 '광조사진철대사비'에는 소씨(蘇氏), '봉림사진경대사비에서'는 김씨(金氏)로 되어있다. 시대와 지역이 동일하므로 소율희와 김율희는 정황상 동일인물임이 거의 확실하다. 즉 같은 사람이 당대에 김씨 혹은 소씨로 불린 것이다.역사학자 이기백은 金은 음이 '김 · 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므로 蘇라는 글자와 서로 통용되어 쓰일 수 있다는 추론을 했다. 소씨도 김씨와 마찬가지로, 순우리말 '쇠'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한 방식일 뿐이고 실은 둘 다 똑같은 성이라는 뜻. 이런 식으로 한자의 음독(金은 금/김)과 훈독(쇠, 이후 음차해 蘇로 추정)으로 읽기를 병용하는 방식은 현대 한국어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1] 고대 한국어에서는 향찰 등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최병헌 교수 역시 김율희와 소율희는 ‘쇠유리’의 한자 음차 표기라고 추정하였다.
신라 중대의 귀족 알천이 삼국사기 기록상 진골인데도 진주 소씨 족보에서 소씨의 시조 소알천(蘇閼川)으로 나오는 점도 이러한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다.
3. 생애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양강구도+겨우 버티는 신라의 후삼국 구도가 거의 완성되었던 908년, 그 이전에 김해지역을 지배했던 관군 세력을 소충자(충지, 忠至)가 몰아내고 진례성[2]을 중심으로 김해 일대를 지배했다. 소율희는 그 소충자의 동생이었다.그러나 911년에 제작된 광조사진철대사비의 기록에는 소충자가 빠지고, 동생 소율희의 이름만 있는 것으로 보아서 3년 사이에 형 소충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
얼마 안되어 멀리 김해(金海)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문득 이 산을 떠났다. 그 소문이 남쪽 경계에 미치고 (대사가) 진례(進禮)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렸다. 이에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란 자가 있어 (대사의)도를 사모하는 정이 깊고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대사를) 기다리다가 맞이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인하여 절을 수리하고 법의 가르침을 자문하는 것이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난 듯하며, 병자가 훌륭한 의사를 만난 듯하였다. 효공대왕(孝恭大王)이 특별히 정법전의 대덕인 여환(如奐)을 보내어 멀리 조서를 내리고 법력을 빌었다.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김인광과 소충자 시대부터 김해 호족들이 선종(불교)을 후원한 결과 신라 전국에 김해가 복림(福林)으로 소문이 나서 많은 불교계 이름높은 승려들이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피해 김해에 자리잡게 된다.
5소경 중 하나인 김해처럼 신라에서 손에 꼽히는 대도시를 포함해 작지 않은 세력을 형성했지만 왕건이나 견훤처럼 따로 왕을 칭하거나 왕봉규처럼 독자적인 행보는 걷지 않고, 신라 조정에 우호적인 몇 안 되는 세력 중 하나였다. 여러 비문을 보면 승려들이 신라 수도 경주와 김해를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며, 진경대사가 김해에서 923년 4월 24일 사망하자 신라 경명왕이 대사의 장례식 물자를 지원하고 조문하는데 신라 중앙정부와 소율희의 김해 세력이 그럭저럭 순조로운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신라 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아니라 힘으로 차지한 지역에서 장군을 자칭한 걸 보면[4] 순수한 충신은 아니지만, 김해처럼 신라 수도 서라벌과 가까운 지역을 지배하는 호족이 적어도 신라 조정을 적대하고 위협하지는 않았던 점에서 그나마 신라 조정에는 한동안 다행이었던 셈.[5]
한편 후백제왕 견훤은 920년에 대야성을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함락시켰는데, 김해 진례성은 당시 후백제에서 신라 서라벌로 쳐들어가는 주요 루트 중 하나로, 신라를 완전히 집어 삼키는 것을 목표로 하던 견훤은 당연히 소율희의 진례성을 타깃삼아 공격하게 된다. 이 때 신라 경명왕이 왕건에게 진례 방면에 구원군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소율희의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가 경상남도 일대에서 계속 투닥거리면서 그 사이에 끼인 소율희도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가 되어 몰락한다. 광조사진철대사비와 흥법사진공대사비의 뒷부분 기록에서도 김해가 적의 소굴(賊窟)과 가까워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승려들이 김해 땅을 떠나는 기록에서 소율희의 몰락과 전쟁으로 위험해진 김해의 실상이 드러난다.
선종을 후원하였고, 대표적으로 선각대사 형미와 함께 해동 4무외대사, 즉 후삼국시대 4대 대사로 꼽히는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6]의 귀국을 도운 후원자였다. 이로서 당시 김해는 선종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게다가, 왕건은 진철대사를 통해 소율희와 다리를 놓게 되었다.
[1]
한국어에선 이런 활용이 중세 이후로는 사라졌지만
일본어에서는 지금도 이런 식으로 한자를 음독과 훈독으로 모두 병용해 읽을 수 있다.
[2]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일대.
[3]
형 소충자의 사망으로 인해 소율희가 지배권을 물려받은 것인지, 아니면 둘 사이에 틈이 생겨 형과 싸운 끝에 그를 꺾고 휘하 세력을 차지한 것인지는 기록의 부재로 인해 알 수 없다.
[4]
다만 후삼국시대 호족들의 성주, 장군직 자체가 어차피 통제권 밖으로 떨어져나간 호족들을 간접적으로라도 묶어두기 위해서, 당나라 케이스를 참고해서 신라 중앙정부에서 지방세력가들에게 명목상 수여한 정식 칭호라는 설도 있다.
[5]
후삼국시대 중후반부까지도 왕봉규나 소율희를 비롯해, 신라의 내지에 해당했던 영남권에는 신라 조정을 충직하게 따르지는 않더라도 그 역사성을 감안해 동정적이고 협력적인 호족이 많았는데, 927년 견훤의 잔혹한 서라벌 침공으로 인해 견훤이 영남권의 친신라 호족들의 지지를 잃어버려 이후 계속 왕건에 밀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적어도 이들이 고려에 붙을 때 내세울 명분 정도로는 작용했을 거라 추정된다.
[6]
생몰연도는 870∼936년, 수미산문의
해주 광조사 - 조동종(曹洞宗) 계열의 승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