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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1:26:35

다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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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대 국왕
다루왕 | 多婁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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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2월 이전[1]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사망
(음력)
77년 9월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백제 왕태자
10년 2월 ~ 28년 2월 (18년)
백제 제2대 국왕
28년 2월 ~ 77년 9월 (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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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 온조왕
왕후 기루의 모후
태자 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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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삼국사기》 기록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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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루왕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그릇이 크고 넓으니 위망이 있었다.
多婁王 溫祚王之元子 器宇寬厚 有威望.
《삼국사기》의 다루왕 소개.

백제의 제2대 군주이자 건길지. 제1대 온조왕의 장남.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초기 기록에서 많이 드러나는 문제점이지만 재위 기간이 굉장히 길고 고고학적 기록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아 계보 및 기년에 큰 의심이 있다. 다루왕 뿐만이 아니라 온조왕부터 고이왕까지 재위 기간이 죄다 부자연스러운 점도 삼국사기상 출생, 사망 및 재위 연도를 신뢰할 수 없음이 현재로서는 정설이다.

2. 생애

삼국사기상 계보와 기년으로는, 온조왕의 장남으로 온조왕의 서기 10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서기 28년에 온조왕이 세상을 떠나자 군주로 즉위했다고 되어 있다.

온조왕과 마찬가지로 말갈[3]과 미친듯이 싸우면서도 계속 내정을 살피려 한 군주다. 서기 29년(다루왕 2년) 시조 동명묘에 참배했고[4] 말갈과는 30년 10월에 동부의 장수 흘우가 마수산 서쪽, 31년 8월에 고목성의 곤우가 말갈을 상대로 승리했으나 34년 마수성을 말갈에 빼앗기는 등 일진일퇴가 이어졌다. 55년에도 말갈이 쳐들어왔고 다루왕은 대비하기 위해 우곡성을 쌓았다.

다루왕 시대는 자연재해가 심해 곡식을 아끼기 위해 38년 빚는 행위를 금지하고[5] 가난한 자에게 2섬씩 곡식을 나눠주는 등 민심 달래기에 힘썼다. 55년에는 심한 가뭄이 들자 사형수까지 모두 용서해 주기도 했다.

다루왕은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백제의 군주들 중 최초로 신라와 칼을 맞댄 군주다. 다루왕 재위 후반부 39년인 63년 음력 10월에 지금의 청주인 낭자곡성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신라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만나려고 했지만 탈해 이사금이 무시해버린걸 계기로 악연이 싹트게 된다. 64년 음력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이겼으며 64년 겨울 음력 10월에 또 신라의 구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탈해 이사금이 기병 2,000명을 보내는 바람에 졌다. 66년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00명을 주둔시켰으나 신라에게 곧 다시 빼앗겼다. 70년에 다시금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기록이 누락돼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74년에는 신라의 변방을 공격했으나 탈해 이사금이 군사를 보내는 바람에 졌다. 75년 음력 10월에 또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그러나 76년 음력 9월에 신라가 군사를 보내는 바람에 와산성을 다시 빼앗겼다.

하지만 정말로 다루왕 시대에 백제가 신라와 전쟁을 벌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두 국가 모두 서로 마주할 수 있는 소백산맥 일대까지 아직 진출하지 못하였기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다른 역사서와의 기록 충돌도 있는데 또 다른 사서 《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훨씬 이후 시대인 4세기 신라 왕 걸해 이질금( 흘해 이사금) 때에 백제와 신라가 처음 군사적으로 충돌했다고 쓰고 있다.[6] 그래서 이 기록들을 해명하기 위한 수많은 학설이 쏟아졌는데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현재는 훨씬 후대 임금들 사이에서 벌어진 백제-신라간 교전을 끌어올렸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다루왕 시기 신라와의 전장은 진한의 영역이 아닌, 충북 일대 마한 일대고 전부 목지국 계열과 고고학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이 2020년대 고고학적 발굴로 밝혀낸 사실인 이상, 다루왕 때 기사는 실제로는 고이왕 이후에 비류왕 초기까지 백제국과 목지국 잔여 세력이 벌인 전쟁 기록이란 설도 새롭게 설득력을 얻어가는 상황이다.

3. 여담

부여왕 해부루(비류 시조설에 따르면 비류의 아버지인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 된다),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명왕(해유류), 고구려의 제3대 왕인 대무신왕(해주류) 등 婁(별이름 루), 留(머무를 류) 등을 왕명으로 쓰는 왕들이 모두 해씨였기 때문에(비류는 流(흐를 류)자를 쓰지만 역시 해씨이다.) 婁를 쓰는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을 모두 마찬가지로 해씨로 보고[7] 해부루 우태 비류 다루왕 기루왕 → 개루왕으로 이어지는 소위 해씨의 비류왕계 왕가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다루왕 및 '루'자 돌림 왕들은 온조왕계와는 다른 왕통이 되며 후에 초고왕이 즉위함으로써 비류왕계 왕가가 물러나고 부여씨의 온조-초고왕계 왕가의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8] 게다가 이후 고이왕이 집권한 뒤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권력 투쟁을 벌이다 근초고왕 대부터 초고왕계로 일원화되는데 고이왕 시기 우씨(우태를 통해 연관된다) 왕족의 대거 출현을 근거로 고이왕계를 비류왕계를 이은 우씨의 비류-고이왕계 왕가로 해석[9]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초기 백제를 온조-초고왕계와 비류-고이왕계의 권력 다툼으로 볼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다루~개루왕이 비류계인지, 온조계인지, 혹은 구태의 계승을 이은 임금들인지 자체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인데, 초기 백제가 신라처럼 사위에게도 분명히 계승권을 인정했을 가능성은 아주 없다곤 못하지만 초기 백제의 국가 운영 체제가 의외로 낙랑군, 대방군하고는 거의 연관성이 없고 기원후 2세기의 나름 꽤 발달한 고구려 제도와 비슷한 이상, 복수 왕계끼리의 암묵적 합의라면 모를까 신라에서처럼 아예 사위 계승권까지 인정한 여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다루왕이 온조왕의 사위로서 계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인다. 다루왕의 직전 선대 군주이자 초기 백제의 진정한 건국자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다루왕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현재로선 철저히 미상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사서에서는 온조왕 46년, 다루왕 49년, 기루왕 51년, 개루왕 39년, 초고왕 48년, 구수왕 20년, 사반왕 1년 미만, 고이왕 52년 재위로 나오지만 기년들 자체가 전부 합리적 상식으로 해석이 어려워서 이는 참고 사항만 될 뿐이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고구려계 세력이 임진강 유역에 처음 등장하는 건 2세기 후반~3세기 초반이며, 하남위례성의 토돈분구묘계 및 고구려계 세력의 연합 정권이 처음 출현한 상한은 기원후 3세기 중반이다. 고로 백제 건국자 바로 다음 임금으로 설정된 다루왕은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해석할 경우 실존했고 재위도 했을 확률이 높으며, 따라서 2세기 후반~3세기 초반에 재위했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신라사와 맞춰서 해석하면 박혁거세~남해 차차웅의 실제 추정 재위기와 비슷한데, 그러나 이렇게 고고학적 데이터로 합리적 인하를 한다한들 결코 탈해 이사금 재위기와는 여전히 맞지 않음이 드러난다. 삼국사기상 기년으로만 보면 근초고왕이 처음 교섭한 신라 군주는 나물 마립간이지만 실제로는 흘해 이사금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례[10]와 비슷한 경우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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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다루왕 본기>

一年春二月 다루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二年春二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三年冬十月 흘우가 말갈과 싸워 대승을 거두다
四年秋八月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다
四年秋九月 횡악 아래에서 사슴을 사냥하다
六年春一月 기루를 태자로 삼고 죄수를 사면하다
六年春二月 주군에 명하여 쌀농사를 짓도록 하다
七年春二月 흘우를 우보로 임명하다
七年夏四月 동방에 붉은 기운이 나타나다
七年秋九月 말갈이 마수성을 침입하다
七年冬十月 말갈이 병산책을 습격하다
十年冬十月 흘우와 진회를 좌보와 우보로 임명하다
十年冬十一月 지진이 일어나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다
十一年 술 빚는 것을 금하다
十一年冬十月 백성을 위무하고 곡식을 나눠주다
二十一年春二月 왕궁의 홰나무가 저절로 말라죽다
二十一年春三月 좌보 흘우가 사망하다
二十八年 가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다
二十八年秋八月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二十九年春二月 우곡성을 쌓고 말갈을 방어하다
三十六年冬十月 사신을 보내 신라 왕을 만나기를 청하다
三十七年 신라의 와산성과 구양성을 공격하다
三十九年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다
四十三年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四十六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四十七年秋八月 장수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四十八年冬十月 와산성을 함락시키다
四十九年秋九月 와산성을 신라가 회복하다
五十年秋九月 다루왕이 죽다

신라와 말갈의 무한 반복. 참고로 36년차부터는 전부 신라측 기록을 끌어다 채운 것이기 때문에 백제의 단독 기록은 29년차에서 끝나는 것이나 다름없고 11년차~21년차 기록은 전부 말소되어 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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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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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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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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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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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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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문단 참조 [2] 《신찬성씨록》 <백제> 단락에 동명성왕의 손자로 등장하는 사람. [3] 말갈 문서에 있듯 만주 쪽 말갈이 아니라 2번 단락의 가짜말갈, 즉 동예 예맥계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1권에서는 백제사에서 등장하는 말갈이 주로, 백제국, 신분고국과 마찬가지로 경기도 북부에 있었으나 한군현의 회유로 목지국을 버리고 한군현 측에 선 마한 거수국들로 보고 있다. [4] 고구려 동명성왕일 수도 있지만 부여 동명왕으로 보기도 한다. [5] 이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기록이 남아있는 금주령 기록이다. [6] 《삼국유사》 <왕력>편 "第十六乞解尼叱今: 昔氏. 父于老音角干, 即奈解王第二子也. 庚午□立, 治十六年. 是王代百済兵始來侵." 제16대 걸해 이질금은 석씨이다. 경오년에 즉위하여 16년을 다스렸다. 이 군주대에 백제의 병사가 처음으로 침공해왔다. [7] 해씨는 고구려 국성인 고씨와 동일시되고, 부여계 성씨로 추정되며 한성백제 때부터 활동한 귀족으로 백제 개국공신 해루도 있다. 후에 해씨는 대성팔족 중 하나가 된다. [8] 노중국. 1988.《백제정치사연구》 [9] 천관우. 1976.《한국의 국가형성》, 노중국. 1988.《백제정치사연구》 [10] 한성백제박물관 시리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