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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22:46:57

부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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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국 후작
부여례 | 扶餘禮
<colbgcolor=#4eae47><colcolor=#fbe673> 출생
(음력)
미상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사망
(음력)
미상[1] (향년 불명)
백제 위례성(?)[2] / 웅진성(?)[3]
작위 불사후(弗斯侯)
직위 관군장군(冠軍將軍)
부인 개로왕의 딸[4]
성씨 부여(扶餘)
례(禮)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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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 개로왕 시기에 활동한 왕자, 후작, 부마, 사신.

2. 생애

개로왕 남진의 압력을 계속 가하고 있는 강대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북위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외교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 때 이 외교적 임무를 맡은 사람이 부여례였다. 472년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 장무(張茂)와 함께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북위 백제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강대한 고구려와의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 백제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따라서 부여례의 임무도 실패로 돌아가고, 아울러 백제 북위와의 외교관계도 단절되고 말았다(...)

이후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데 개로왕의 서신 사건[5]으로 분개한 장수왕 475년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는 과정 속에서 사망했거나 혹은 그 이전에 사망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한성백제의 멸망 속에서도 살아남아 웅진성에서 490년 전에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6]

3. 기타




[1] 490년 동성왕 대에 부여고(扶餘固)가 불사후로 임명된 점을 미루어 보면, 늦어도 490년 이전에 사망했거나 불사후에서 물러난 것으로 추정된다. [2] 위례성 함락 이전 혹은 함락 과정에서의 사망을 가정하면 위례성으로 추정된다. [3] 부여례가 만약 위례성에 살아남아 웅진성으로 갔을 경우 [4] 북위에 같이 파견된 개로왕의 공주가 있기 때문에 그녀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5] 자세한 서신 내용은 개로왕 문서 참고 [6] 490년에 부여고(扶餘固)가 불사후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7] 북위에 같이 파견된 개로왕의 공주가 있기 때문에 그녀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