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be673> 제후왕 및 후작 | |||
우현왕 | 좌현왕 | 불사후 | 면중후 | |
부여기 | 부여곤지 | 부여례 | 목간나 | |
도한왕 | 아착왕 | 매로왕 | 불사후 | |
저근 | 부여고 | 부여력 | 부여고 | |
매라왕 | 벽중왕 | 불중후 | ||
사법명 | 찬수류 | 해예곤 | ||
섭정 | 비정통 | |||
전지왕 섭정 | 찬탈 | 비정통 | 비정통 | |
부여훈해 | 부여설례 | 진이왕 | 부여태 | |
부흥운동 | 대방군왕 (멸망이후) | |||
제32대 국왕 | 대방군왕 | 대방군왕 | ||
풍왕 | 부여융 | 부여경 | ||
문헌 상 언급 | ||||
음태귀수왕 | 덕좌왕 | 호왕 | 진왕 | |
추존 | ||||
태조 도모왕 | ||||
}}}}}}}}} |
백제국 후작
부여례 | 扶餘禮 |
|
<colbgcolor=#4eae47><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미상 |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
|
사망 (음력) |
미상[1] (향년 불명) |
백제 위례성(?)[2] / 웅진성(?)[3] | |
작위 | 불사후(弗斯侯) |
직위 | 관군장군(冠軍將軍) |
부인 | 개로왕의 딸[4] |
성씨 | 부여(扶餘) |
휘 | 례(禮) |
[clearfix]
1. 개요
백제의 개로왕 시기에 활동한 왕자, 후작, 부마, 사신.2. 생애
개로왕은 남진의 압력을 계속 가하고 있는 강대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북위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외교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 때 이 외교적 임무를 맡은 사람이 부여례였다. 472년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 장무(張茂)와 함께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당시 북위는 백제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강대한 고구려와의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 백제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따라서 부여례의 임무도 실패로 돌아가고, 아울러 백제와 북위와의 외교관계도 단절되고 말았다(...)
이후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데 개로왕의 서신 사건[5]으로 분개한 장수왕이 475년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는 과정 속에서 사망했거나 혹은 그 이전에 사망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한성백제의 멸망 속에서도 살아남아 웅진성에서 490년 전에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6]
3. 기타
- 부여례의 사신의 외교 수립은 당시의 배경을 본다면 시작부터 거의 불가능에 수렴했다고 볼 수 있다. 잠시 그 시대 상황을 보자면 고구려는 장수왕이 재위한 시기였고 고구려의 위상은 엄청나게 높아서 북위와 유송은 경쟁적으로 장수왕의 직위를 올려주고 백제보다 높이 대우하였다. 심지어 이 시기에 북위는 고구려에게 정략결혼까지 맺자며 처음 제안할 정도였으니(...) 오히려 고구려는 혼인 적령기에 이른 공주가 없으니 기다려 달라고 주장하며 차일피일 미뤘다. 여러 사정을 고려하면 북위의 입장에서는 백제를 돕기 위하여 고구려와의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는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까지 적극적으로 고구려를 적대시 할 의도가 생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북위에 사신으로 갔을 때 부여례의 관직은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였는데, 왕의 사위에게 부마도위라는 직책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는 개로왕의 딸[7]과 결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기록 중 백제 왕족끼리 근친혼이 기록된 사실상 유일한 사례이다.
- 부여례의 작위인 ‘불사후(弗斯侯)’의 불사(弗斯)는 오늘날의 전주로 비정되고 있다.
[1]
490년
동성왕 대에
부여고(扶餘固)가 불사후로 임명된 점을 미루어 보면, 늦어도 490년 이전에 사망했거나 불사후에서 물러난 것으로 추정된다.
[2]
위례성 함락 이전 혹은 함락 과정에서의 사망을 가정하면 위례성으로 추정된다.
[3]
부여례가 만약
위례성에 살아남아
웅진성으로 갔을 경우
[4]
북위에 같이 파견된
개로왕의 공주가 있기 때문에 그녀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5]
자세한 서신 내용은
개로왕 문서 참고
[6]
490년에
부여고(扶餘固)가 불사후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7]
북위에 같이 파견된
개로왕의 공주가 있기 때문에 그녀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