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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8 08:32:44

정교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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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white,#2d2f34> 정교부인(貞矯夫人) / 진교부인(眞矯夫人) / 헌목태후(憲穆太后)
본관 경주 박씨(慶州 朴氏)
성씨 박(朴)[1]
이름 정교(貞嬌)
아버지 김충공
어머니 귀보부인
형제 민애왕
자매 조명부인 / 문목부인
배우자 김균정 / 태자(헌덕왕의 아들)
아들 신무왕
정계부인[2]
생몰연도 793년 전후[3] ~ 822년 이후[4]/839년 이전[5]

신라 하대의 추존 왕후. 김충공(선강왕)과 귀보부인의 딸이자 민애왕의 누이. 김균정(성덕왕)과 혼인하여 아들 신무왕을 두었다.

관련 기록은 3개 있다.
당숙(5촌) 김균정과의 근친혼으로 신무왕을 낳았다. 그 뒤인 822년 3월에는 헌덕왕의 태자[7]와 4촌 간 근친혼을 했는데, 한편 여동생인 조명부인이 본래 남편이었던 김균정과의 근친혼으로 헌안왕을 낳는다. 839년, 아들 신무왕이 왕이 되고 헌목태후로 추봉된 점을 보면 822년 ~ 839년 사이에 사망한 듯하다.

역사상으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기록에 남은 결혼 관계가 하도 막장인 인물이라[8] 이 정교부인만 단독으로 다룬 논문이 2개나 있다.
정교부인의 큰아버지인 흥덕왕이 777년생이므로 그 동생인 김충공은 777년 이후에 태어났다. 그런데 정교부인의 아들인 신무왕은 822년 3월 김헌창의 난 진압에 대아찬으로서 삼군을 이끌고 참여한 사실이 있다.[9] 흥덕왕의 생년을 777년으로 잡고 김충공과 정교부인이 각각 만 15세에 자식을 낳았다고 가정해도, 822년에 신무왕의 나이는 만 15세로, 군대를 이끌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다. 그러나 당시 김우징은 아버지인 김균정과 동행했으므로,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군대를 통솔했다고 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는 828년 흥덕왕 3년에 우징이 시중에 임명되었다가 834년 균정이 상대등에 피임된 것으로 물러났는데, 뒤를 이어 시중에 오른 것이 817년생이라고 생각되는 흥덕왕의 조카 김명이다.
[1] 김충공의 딸이지만 삼국사기에서는 분명히 박씨로 기록되어 있다. 모계인 선의태후의 성을 따른 듯. 참고로 선의태후 역시 김인겸의 딸인데 박씨를 쓰고 있다. [2] 후에 정종태후로 추존. [3] 백부 흥덕왕이 777년생인 것과 아들 신무왕의 추정 생년을 대조했다. [4] 헌덕왕의 태자와 재혼한 시점. [5] 아들 신무왕에 의해 왕후로 추봉된 시점. [6] 이 구절은 약간 문제가 되는 것이 헌덕왕은 흥덕왕의 동복형이자 전임왕으로 동년 정월 기록에 동복 아우이자 상대등인 수종, 곧 흥덕왕을 부군으로 삼아서 후계자로 공표하였다. 그리고 균정은 원성왕의 3남 예영의 아들이자 흥덕왕 말년 왕위를 다투던 희강왕 제륭의 숙부이고, 헌덕왕과 흥덕왕은 모두 원성왕의 장남 인겸의 아들들이다. 다만 헌덕왕의 아내가 예영의 딸로, 균정의 누이가 되기는 한데, 그렇다고 처남인 균정을 태자라고 불렀을리 만무하다. 태자를 말 그대로 “큰 아들”이라고 해석하면 왕위 계승자와 병립하는 것이 그리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7] 이름은 실전되었지만 혜충태자의 손자 항렬이 명(明) 자 돌림을 쓴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름은 김○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신무왕의 아내인 정종태후의 아버지의 이름이 ○명이고, 정종태후의 딸인 광의왕태후는 헌목태후와 같은 박씨이다. [8] 신라-고려 시기 여성의 재혼은 일반적으로 여겨졌지만 그건 남편이 죽은 후의 이야기고, 이 여자는 남편인 김균정이 멀쩡히 살아있고 애까지 낳은 상태에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정교부인의 두 남편 다 근친혼이며 남편 중 김균정은 자매인 조명부인과 공유한다. [9] 삼국사기 신라 본기: [헌덕왕 14년(822) 3월\] 일길찬 장웅(張雄)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衛恭)과 파진찬 제릉(悌凌)이 뒤를 따랐으며, 이찬 균정(均貞)과 잡찬 웅원(雄元)과 대아찬 우징(祐徵)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蚊火)의 관문을 지켰다. 一吉飡張雄先發, 迊飡衛恭波珍飡悌凌繼之, 伊飡均貞迊飡雄元大阿飡祐徵等掌三軍徂征. 角干忠恭迊飡允膺守蚊火關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