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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추존 국왕
신흥왕 | 神興王 |
|
생몰년 | 미상 |
본관 | 경주 김씨 |
휘 | 효종(孝宗) |
부모 | 아버지 김인경 |
배우자 | 계아태후 |
형제자매 |
2남 중 막내 형 - 김억렴 |
자녀 |
슬하 1남 아들 - 경순왕 |
종교 | 불교 |
시호 | 신흥대왕(神興大王) |
골품 | 진골(真骨) |
[clearfix]
1. 개요
金 孝 宗신라 46대 문성왕의 후손인 방계 왕족이자, 따르는 낭도만 수천 명에 이르는 이름난 화랑이었다. 사후 아들인 김부가 신라 제56대 경순왕에 즉위하면서 왕으로 추존되었다.
아버지는 김인경, 형으로는 고려 왕건의 장인이 되는 김억렴이 있다. 아내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 김씨.
2. 생애
통일 신라 말기 화랑의 우두머리로, 효녀 지은 설화에서도 등장한다. 어머니를 향한 지은의 효심에 감복하여 지은을 도와주고 그 미담이 진성여왕에게까지 전해져 그 인연으로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신라에서는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잇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헌강왕의 딸과 결혼한다는 것은 방계 왕족인 그가 왕위 계승권에 한결 가까워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효종의 부인은 나중에 아들 경순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 계아태후로 추존되었다. 여하튼 이 설화는 신라가 무너져가던 시대임에도 화랑의 의협심이 여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삼국사절요는 이 사건의 시점을 897년으로 비정하였으나 이는 진성여왕이 사망한 해일 뿐이다. 편년체 사서에서 정확한 연대를 모르는 사건은 일반적으로 당시 재위하던 왕의 맨 마지막 해에 넣는 관례에 따라 비정한 것에 불과하며, 실제 897년의 일이라는 보장은 없다. 강수의 경우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보인다.서기 901년 신라가 견훤의 대야성 공격을 막아내는 전과를 올렸을 것으로 여겨진다. 훗날 형인 김억렴이 지대야군사 직책, 즉 대야성을 관할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김억렴과 김효종의 화랑으로서의 동원력[1]을 포함한 사병을 털어서 이뤄낸 성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전투 직후인 902년 효공왕 때 시중이 된 것도 이 군공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2]
효공왕을 마지막으로 경문왕계 직계는 끊길 상황이었기에 남아있는 김씨 왕족 중에서는 효종이 왕위 계승권자로 가장 가까웠지만, 박씨 족단도 박경휘가 헌강왕의 또다른 딸과 혼인해 효종과 대등하게 왕위 계승의 조건을 얼추 맞춰놓았고, 결국 박씨인 신덕왕이 효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효공왕의 시호에 공(恭) 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과 기록상 효공왕의 왕권이 불안정했다는 점은 박씨가 정변을 일으켰다는 설의 주요 근거로 꼽힌다. 그리고 만약 쿠데타가 벌어졌다면 폐위 관련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과정에서 이미 시해당했을 가능성도 추론해볼 수 있다. 물론 기록에는 없으니 순전히 추측의 영역일 뿐이지만.
물론 신덕왕도 헌강왕의 딸과 결혼해 사위가 되었으므로 신라 왕위계승 조건을 충족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미 김씨가 왕위에 오르는 게 수백년간 정착한 상황에서 효종을 제치고 즉위한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다만 신덕왕이 처음부터 박씨였는지조차 논란이 있다는 점을 보면 쿠데타를 섣불리 단정지을 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실제 박씨가 아니었다고 쳐도 경문왕계나 효종을 비롯한 다른 김씨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혈연적으로 거리가 좀 더 먼 가문집단 출신이긴 했을 것이다.
또 효공왕 시기 시중으로서 왕의 최측근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 때 정쟁에 휘말려 암살당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여러 정황 탓에 아닐 가능성도 꽤 있다. 어쨌든 적어도 927년 이전에는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이며, 이후 후백제 왕 견훤이 서라벌에 쳐들어와 경애왕을 주살하고 효종의 아들 김부를 임금으로 세우고 돌아가니 그가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었다. 이후 경순왕의 직계 조상이 추존될 때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존되었다.
3. 가족 관계
4. 창작물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김효원이 열연했다.[3] 견훤의 공격에 맞서는 신라 대야성의 성주로 나오며, 신라 말의 마지막 화랑이자 명장격 인물로 나온다. 또한 왕건이 나주를 공략할 당시의 신라 각간으로 등장한다. 후삼국시대에 대야성에서 신라군이 견훤에 두 차례 승리한 기록이 있고, 당시 대야성주는 아마 지대야군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김효종의 형 김억렴으로 추측되는데[4],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같은 가문이자 당시 유명 화랑이었던 효종을 대야성주라고 설정한 것이다. 이후 다른 창작물에서도 대야성 성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소설 전화앵에서는 궁예가 대야성을 공격하면서 김억렴이 맞서면서 이흔암, 환선길 등을 상대해 이기는 것을 보고 은부가 나서자 김억렴을 돕기 위해 나서서 은부와 싸웠으며, 김억렴이 궁예와 직접 싸울 때는 궁예가 밀려서 달아나자 군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려 태봉의 군사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집사성 시중에 올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다.
[1]
삼국통일전쟁 때도 그렇고
김헌창의 난 때도 명기 등 화랑들이 나라를 위해 휘하
낭도를 이끌고 김헌창이 이끄는
반란군을 토벌하기도 했다.
[2]
이에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대야성을 효종이 방어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3]
아들인 경순왕 역의 신귀식보다 13살이나 어리다.
[4]
참고로 삼국사기에 정확히 누가 성주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