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등재 기준2.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2.1. 그리스2.2. 나바라(나바르) 국왕2.3. 네덜란드2.4. 독일2.5. 라트비아2.6. 러시아 황제2.7. 루마니아2.8. 룩셈부르크 공작2.9. 리투아니아2.10. 몬테네그로2.11. 벨기에2.12.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왕2.13. 불가리아2.14. 세르비아2.15. 스위스2.16. 스페인2.17. 슬로베니아2.18. 아르메니아 국왕2.19. 아이슬란드 국왕2.20. 아일랜드2.21. 안도라 공동대공2.22. 알바니아2.23. 영국2.24. 오스트리아2.25. 우크라이나2.26. 이탈리아2.27. 조지아2.28. 체코2.29. 크로아티아2.30. 포르투갈2.31. 폴란드2.32. 프랑스2.33. 핀란드2.34. 헝가리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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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재 기준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작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현재 유럽의 작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해당 국가가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해당 작위를 주장한 사례가 있었던 경우.
-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왕위나 작위와 같이 만약 해당 정권이 존속했다면 해당 정권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등재하며, 계승권을 실제로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작위 이외에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
- 작위 소유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작위를 포기, 또는 해체한 경우.
- 식민국가나 피정복국가가 독립하고, 상대국이 해당국가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면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 합의
토론 합의에 따라,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가 직위를 자손에게 계승했거나 계승하려 시도한 경우는 등재하지 않는다. 단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라도 '몽골의 칸' 등 세습 군주의 칭호를 자칭한 경우는 등재한다.
2.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2.1. 그리스
그리스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1.1. 국가
2.1.1.1. 카이세리 룸
관련 칭호 |
오스만 황제(
파디샤) 술탄 칼리프 로마 황제(카이세리 룸) |
작위 요구자 | 하룬 오스만오을루[1] |
전임자 | 뒨다르 알리 오스만오을루 |
계승 실패 원인 | 1922년 오스만 제국 멸망 |
작위 요구자/아시아 문서에 오스만 제국 황제위 요구자가 있는데 왜 굳이 본 문서에도 기재했냐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오스만 제국 역대 황제들은 청나라 역대 황제들과 비슷하게 여러 작위를 동군연합 형식으로 가지고 있었다.[2] 이러한 작위들 중 카이세리 룸(로마 황제)이 유럽 군주로서의 칭호였으므로 여기에 기재한다.
현대 그리스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왕정복고파들 중 정교회를 믿는 대다수는 상술한 것처럼 그리스 왕국 글뤽스보르 왕조 왕위 요구자를 지지하고 소수의 무슬림들(특히 민족 정체성이 튀르키예인인 튀르키예계 그리스인들)은 본 문단에 나온 오스만 제국 황제위 요구자를 지지한다. 하지만 글뤽스보르 왕조의 재건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에서, 소수의 튀르키예계 무슬림들을 제외한 현대 그리스 국민 대다수에게 침략자의 수괴로 취급받는 오스만 제국 황실의 후손이 로마 황제(카이세리 룸) 칭호를 쓰며 군주정이 부활한 그리스의 군주로 즉위할 가능성은 사실상 완전한 0%에 가깝다.[3]
2.1.1.2. 그리스 국왕
관련 칭호 | 그리스 국왕 | |
작위 요구자 |
(
글뤽스보르 왕조) 파블로스 |
(
비텔스바흐 왕조) 프란츠 폰 바이에른(프란기스코스)[4] |
전임자 | 콘스탄티노스 2세 |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
후임자 | 콘스탄티노스 알렉시오스[5] | 막스 폰 바이에른 |
계승 실패 원인 |
1862년
오톤 퇴위(비텔스바흐 왕조) 1973년 군주제 폐지 |
그리스의 민족주의자 중 일부는 그리스 슬레스비-홀스텐-쇤더보르-글뤽스보르 왕가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위를 계승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는 국민뿐 아니라 왕가에게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리스 슬레스비-홀스텐-쇤더보르-글뤽스보르 왕가부터 덴마크 왕가의 분가 출신이라 제국주의 열강들의 낙하산이었기 때문에 이는 극우 민족주의자 사이에서조차 그다지 인기있는 주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스의 극우 민족주의자들[6]은 글뤽스보르 왕가는 가짜 그리스인이니까 쫒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연고권을 요구하거나 아테네를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별칭하자는 견해도 있다.
글뤽스보르 왕조 이전의 비텔스바흐 왕조에서도 여전히 그리스 왕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다.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의 유일한 국왕이었던 오톤은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오톤 사후 그의 동생 루이트폴트에게 명목상의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 왕위가 넘어갔다가 훗날 루이트폴트의 장남 루트비히가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국왕 루트비히 3세로 즉위하면서 바이에른 왕국의 왕위 요구자가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의 왕위 요구자를 겸하게 되었다. 다만 그리스에서 그나마 존재하는 왕정복고파들은 대부분 글뤽스보르 왕조를 지지하는지라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가 재건될 가능성은 그리스 글뤽스보르 왕조가 재건될 가능성보다도 더욱 희박하다.
2.1.1.3. 스파르타 공작
그리스 왕세자 문장 | |
관련 칭호 |
스파르타 공작 그리스 왕세자 |
작위 요구자 | 콘스탄티노스 알렉시오스[7] |
전임자 | 파블로스 |
계승 실패 원인 | 1973년 군주제 폐지 |
비텔스바흐 가문 계통의 그리스 왕국 왕위 요구자들은 스파르타 공작위가 창설되기 6년 전에 오톤이 폐위되었으므로, 스파르타 공작위의 요구자가 아니다.
2.1.2. 지방
2.1.2.1. 네오파트라스 공작
네오파트라스 공국 국장 | |
관련 칭호 |
네오파트라스 공작 아라곤 국왕 스페인 국왕 |
작위 요구자 | 펠리페 6세 |
전임자 | 후안 카를로스 1세 |
후임자 |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계승 실패 원인 | 1390년 공국 멸망 |
2.1.2.2. 아테네 공작
아테네 공국 국장 | |
관련 칭호 |
아테네 공작 아라곤 국왕 스페인 국왕 |
작위 요구자 | 펠리페 6세 |
전임자 | 후안 카를로스 1세 |
후임자 |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계승 실패 원인 |
1381년 공가 교체 1458년 공국 멸망 |
2.2. 나바라(나바르)[8] 국왕
관련 칭호 |
프랑스 국왕 나바르 국왕 앙주 공작 부르봉 공작 |
나바라 국왕 양시칠리아 국왕 칼라브리아 공작 |
|
작위 요구자 |
(프랑스 직할령 나바르)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9] |
(
나바라 왕국) 페드로 후안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10] |
|
전임자 | 알퐁스 2세[A][B] | 카를로스 마리아 알폰소 마르셀로 | |
후임자 |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 하이메 | |
계승 실패 원인 |
1643년 프랑스에 완전 병합(나바라 왕국) 1830년 왕조 교체 및 나바라(나바르) 국왕 칭호 완전 폐지 |
스페인 보르본 왕가 쪽 왕위 요구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는 루이 14세 때부터 시작되고 루이 16세 때 폐지되었다가 부르봉 왕정복고로 부활하여 7월 혁명 때까지 이어진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Roi de France et de Navarre) 칭호를 요구한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 때부터 아버지인 루이 13세 때까지 동군연합 형식으로 각각 따로 존재했던 프랑스 왕위와 나바르 왕위를 통합하여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라는 칭호를 만들었으며 그에 따라 나바라(나바르)를 프랑스의 직할령으로 완전히 병합함으로써 명목상의 동군연합을 폐지했다. 이후 루이 16세가 프랑스 국민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나바라(나바르) 국왕 칭호가 폐지되었다가 프랑스 제1제국 멸망 후 부르봉 가문의 왕정복고로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칭호가 부활했으나, 7월 혁명으로 즉위한 루이필리프 1세가 프랑스 국민의 왕 칭호를 부활시키면서 나바라(나바르) 국왕 칭호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양시칠리아 왕위 요구자이기도 한 칼라브리아 계통의 수장은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하지 않으며, 그에 따라 루이 13세 때까지 명목상 프랑스 왕국의 왕위와 별개로 존재했던 나바라 왕국의 왕위를 요구한다. 양시칠리아 보르보네 왕가는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분가인데, 스페인 보르본 왕가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분가이므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입장에서 양시칠리아 보르보네 왕가는 분가의 분가다.
2.3.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3.1. 호르네 백작
호르네 백국 국장 | |
관련 칭호 | 호르네 백작 |
작위 요구자 | 에드워드 비니아크 |
계승 실패 원인 | 1795년 백국 멸망 |
2.3.2. 홀란트 국왕
관련 칭호 |
홀란트 국왕 프랑스 황제 베스트팔렌 국왕 |
|
작위 요구자 | 샤를 나폴레옹[14] |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15] |
전임자 | 나폴레옹 6세(루이 나폴레옹) | |
후임자 |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16] | 루이 나폴레옹[17] |
계승 실패 원인 | 1810년 왕국 멸망 |
2.4. 독일
자세한 내용은 작위 요구자/유럽/독일 문서 참고하십시오.2.5. 라트비아
라트비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5.1. 쿠를란트-젬갈렌 공작
관련 칭호 | 쿠를란트-젬갈렌 공작 | |
작위 요구자 |
(
호엔촐레른 왕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비론 왕조) 에른스트 요한 비론 |
전임자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 카를 비론 |
후임자 | 카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미하엘 비론 |
계승 실패 원인 |
1795년 공국 멸망(비론 왕조) 1918년 공국 멸망(호엔촐레른 왕조) |
1918년에 독일 제국의 괴뢰국으로 세워진 쿠를란트-젬갈렌 공국 또한 공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다. 해당 국가는 독일 제국의 황제가 쿠를란트-젬갈렌 공작을 겸하는 동군연합이었는데 독일 11월 혁명으로 독일 본토의 군주제가 폐지되고 토착민인 라트비아인들이 독립을 선언하자 결국 독일군이 독일 본토로 돌아가고 라트비아가 독립하면서 멸망했다.
2.5.2. 발트 연합 공작
관련 칭호 | 발트 연합 공작[19] |
작위 요구자 | 하인리히 8세 |
전임자 | 보이츨라바 페오도라 |
후임자 | 하인리히 20세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공국 멸망 |
2.6. 러시아 황제
관련 칭호 |
전(全)러시아의 황제 러시아 대공[마리아] 러시아 공작[앤드류] |
||
작위 요구자 |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 앤드류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 카를 에미히 추 라이닝겐 |
전임자 |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24] | 드미트리 로마노비치 로마노프 | 에미히 키릴 추 라이닝겐[25] |
후임자 |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26] | 안드레아스 추 라이닝겐[27] |
계승 실패 원인 | 1917년 제국 멸망 |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연금되었으며, 1918년 적백내전 중에는 결국 일가가 볼셰비키에 처형된다.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도 이 때 죽었다.
니콜라이 2세 사후 키릴 블라디미로비치가 다음 러시아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키릴 블라디미로비치는 알렉산드르 2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사촌으로, 빅토리아 멜리타의 남편이기도 한데 1938년 죽었다. 그의 외아들인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1992년에 죽었다.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 마리아 블리디미로브나는 왕가 내의 계승 법칙에 따라[29] 후사가 없으므로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겠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니콜라이 1세의 후손인 러시아 공작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등의 반발을 불렀다. 로마노프 가문에서 파벨 1세 이후 여계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마리아 대공녀 계열의 황위 요구는 논쟁이 있다.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이후 알렉산드르 2세와 그의 동생 콘스탄틴의 후손은 러시아 혁명 시 사망 혹은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이 없었고[30], 니콜라이 1세의 3남 니콜라이의 증손자인 니콜라이 로마노비치가 황위 계승권을 요구하였다.
니콜라이 로마노비치는 러시아 황실 종친회에서 선출된 회장으로, 종친회장으로는 대대로 니콜라이 1세의 후손인 남성 황족들이 선출되었다. 니콜라이는 마리아의 아버지 블라디미르가 종친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자신이 블라디미르를 계승하겠다고 선언했다. 니콜라이는 2014년에 죽었고, 동생인 공작 드미트리 로마노프가 뒤를 이었으나 2년 뒤인 2016년 죽었다. 드미트리의 뒤를 이은 것은 1923년생 러시아계 미국인 공작 앤드류 로마노프다. 앤드류는 니콜라이 1세의 4남인 러시아 대공 미하일의 증손자로 미국 민주당 의원 앤드류 로마노프와는 다른 인물이다.
앤드류 로마노프는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전부 남계를 두지 못하였다. 앤드류 로마노프 계열 이후에는 그의 5촌 조카인 1985년생 로스티슬라프에게 후계가 이어질 전망이다.
마리야 여대공은 프로이센의 왕자 카를 프란츠와 혼인해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를 낳았는데, 게오르기가 왕위를 요구하게 되면 호엔촐레른-로마노프 가문으로 이름이 바뀐다. 여담으로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는 로이스-그라이츠 공작 하인리히 22세의 후손이다.
슈탄데스헤어 중 하나인 라이닝겐 후작 후계자였다가 귀천상혼으로 동생 안드레아스에게 라이닝겐 공국 공위 요구자 자리를 넘겨준 카를 에미히 폰 라이닝겐[31] 또한 러시아 황제위를 요구하고 있다. 이쪽은 레이닌겐-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니콜라이 3세를 자칭한다. 이 사람은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의 큰 누나인 마리아 키릴로브나가 라이닝겐 공녀로 시집가면서 이어진 라이닝겐 공작 계열에서 러시아 황위를 요구하고 있다. 이 사람과 그를 지지하는 자들은 앞서 이야기한 마리야 여대공의 작위 요구를 부정하는 쪽인데, 이들은 마리야 여대공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대공이 바그라티온 가문 출신 여자와 결혼한 것이 귀천상혼이니, 파벨 1세가 정한 러시아 제위 계승법에 따라 계승권이 박탈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카를 에미히 역시 러시아 제위 계승법에 따르면 재혼과 3혼 모두 귀천상혼을 했으므로, 그의 후계자는 그의 자식들 대신 동등결혼을 한 동생 제8대 라이닝겐 후작 안드레아스에게 간다고 한다.
2.7. 루마니아
루마니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7.1. 국가
2.7.1.1. 루마니아 공작
관련 칭호 |
루마니아 공작 몰다비아 공작 왈라키아 공작 |
작위 요구자 | 디미트리에 칼리마치 |
계승 실패 원인 | 1866년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강제 퇴위 |
2.7.1.2. 루마니아 국왕
관련 칭호 | 루마니아 국왕 | ||
작위 요구자 |
(로므니에 가문) 마르가레타 왕세녀 |
(루마니아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 가문) 파울 필리페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 |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본가) 카를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
전임자 | 미하이 1세 | ||
후임자 | 엘레나 아 로므니에이 | 카롤 페르디난드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 | 알렉산더 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
계승 실패 원인 |
1947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성립 1989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붕괴, 루마니아 제1공화국 수립 |
원래는 남성의 상속권만을 인정하는 살리카 법을 적용하였으나, 미하이 1세와 루마니아 의회가 왕위 계승의 법칙을 변경하여 여성 상속권도 인정하게 되었다.[32] '루마니아 왕실 관리인(Custodele Coroanei Române)'이라는 어정쩡한 칭호를 쓰고 있다. 단순히 왕위 요구자가 아닌 것이, 루마니아 정부 사이트 뉴스에서도 현 당주인 마르가레타 왕세녀에게 폐하(Majestatea Sa Margareta)라는 경칭을 사용하고 있다. 루마니아어 영어
2017년 12월 5일, 미하이 1세가 96세로 타계하면서, 첫째 딸이자 왕세녀였던[33] 마르가레타 왕세녀(1949~)가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단, 마르가레타 왕세녀 부부는 자녀가 없어[34] 후임자는 미하이 1세의 둘째 딸이자 마르가레타 왕세녀의 큰 여동생인 엘레나 공주(1950~)이며, 이후로는 엘레나의 큰아들(이자 마르가레타 왕세녀의 장조카) 니콜라에(1985~)가 왕가를 잇게 되어야 하지만 니콜라에는 2015년에 사생아를 낳았다는 사유로 왕위계승권에서 배제되고 왕족 지위도 박탈당했다. 고로 다음 계승순위는 엘레나 공주의 딸인 엘리자베타 카리나(1989~)에게로 돌아간다지만 오빠와 달리 루마니아에 관심이 있는지는 의문.
미하이 1세 사후 루마니아 왕실의 또 다른 인물인 파울 필리페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35]도 왕위를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본가인 독일 본토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에서도 왕위 요구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울 필리페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은 일단 돈세탁, 직권남용 공모 등의 혐의로 루마니아 당국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고 국외 도피 중인 범죄자인지라 루마니아에서 왕으로 인정해줄 리가 없다.
2.7.2. 지방
2.7.2.1. 트란실바니아 공작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헝가리 국왕 트란실바니아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공국 해체 1920년 루마니아에 합병 |
2.8. 룩셈부르크 공작
관련 칭호 |
룩셈부르크 공작 스페인 국왕 |
작위 요구자 |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전임자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37] |
후임자 |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 |
2.9.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9.1. 리투아니아 대공
관련 칭호 |
작센 국왕 바르샤바 공작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
|||
작위 요구자 |
(작센-게사페 가문) 알렉산더 |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다른 친족) 뤼디거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 미하엘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
|
전임자 | 마리아 에마누엘 | |||
후임자 | 게오르크 필리프 | 다니엘 |
(임시) 레오니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38] |
(장래) 안드레아스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
계승 실패 원인 | 1795년 대공국 멸망 |
2.9.2. 리투아니아 국왕
관련 칭호 |
리투아니아 국왕 우라흐 공작 |
작위 요구자 | 빌헬름 알베르트 폰 우라흐 |
전임자 | 카를 안젤름 폰 우라흐[39] |
후임자 | 카를 필리프 폰 우라흐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왕국 멸망 |
2.10. 몬테네그로
몬테네그로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10.1. 국가
2.10.1.1. 몬테네그로 국왕
관련 칭호 | 몬테네그로 국왕 |
작위 요구자 | 니콜라 페트로비치-네고시 |
전임자 | 미차엘 페트로비치-네고시 |
후임자 | 보리스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세르비아 왕국으로 합병되어 왕호 폐지 |
참고로 왕정복고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쪽은 이 항목에 있는 사람 중에서는 실제로 요구하던 왕위에 즉위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케이스다. 이미 몬테네그로 정부와 국민들은 페트로비치-네고시 가를 자국의 왕가로 대우하고 있고, 실질적인 수도인 체티녜에 새 왕궁을 건설하였으며, 몬테네그로 대통령과 함께 외국의 귀빈을 맞는 업무까지 하고 있어서 왕정복고가 '사실상' 성공한 상태다. 문제는 이를 헌법에다 못을 박으려고 시도는 하고 있으나, 가난한 나라 살림 꾸리느라고 자꾸만 이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중이다(...). [44][45]
게다가 이 나라 왕실은 살리카법에 따라 남계 계승만을 인정하는데, 문제는 이 때문에 왕위 계승할 사람이 없어서 왕가가 단절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 공화국 의회가 2011년 통과시킨 ' 페트로비치-녜고시 왕조의 후손들에 대한 지위법(Zakon o Statusu Potomaka Dinastije Petrović Njegoš)' 5조를 보면 '왕가 수장의 지위는 남계 남자로 잇는다'고 했는데, 니콜라(2세)의 외아들 보리스(1980~)는 아직 두 딸밖에 없다. 니콜라(2세) 왕자도 외아들이고 증조할아버지 니콜라 1세 기준으로 다른 남계 후손도 없다.[46] 다만 왕족들의 의사와 관계없이도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니.. 그래서 기껏 왕정복고를 시켜줬더니 왕가가 단절돼서 도로 공화정으로 되돌아가야 되는 엿같은 상황이 나올 수도 있어서, 정치권에서 왕실의 부활에 대해 망설이는 것도 있다. 다만, 이 문제 때문에 살리카법을 폐지한 루마니아의 예도 있으니 향후에 이 법을 손보면 딱히 상관은 없을 것이다.[47]
2.10.2. 지방
2.10.2.1. 코토르 영주
관련 칭호 | 코토르 영주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영지 상실 |
2.11. 벨기에
벨기에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11.1. 플란데런 백작
관련 칭호 |
플란데런 백작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스페인 국왕 |
|
작위 요구자 |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카를 폰 합스부르크 |
(
보르본 왕조) 펠리페 6세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안 카를로스 1세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계승 실패 원인 |
1706년 백작위 포기(보르본 왕조) 1794년 백국 멸망(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
2.11.2. 브라반트 공작
관련 칭호 |
브라반트 공작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스페인 국왕 |
|
작위 요구자 |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카를 폰 합스부르크 |
(
보르본 왕조) 펠리페 6세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안 카를로스 1세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계승 실패 원인 |
1714년 공위 포기(보르본 왕조) 1795년 공국 멸망(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
2.11.3. 에노 백작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국왕 크라쿠프 대공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795년 백국 멸망 |
2.12.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왕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헝가리 국왕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왕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적 |
2.13. 불가리아
불가리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13.1. 불가리아 공작
불가리아 공국 국장 | |
관련 칭호 | 불가리아 공작 |
작위 요구자 | 아젠 폰 바텐베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886년 퇴위 1887년 왕조 교체 1908년 불가리아 왕국으로 개편 |
2.13.2. 불가리아 차르
관련 칭호 |
불가리아 차르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공작 |
작위 요구자 | 시메온 2세[49] |
전임자 | 보리스 3세 |
후임자 | 보리스 카르다모프 삭스코부르고츠키 |
계승 실패 원인 | 1946년 왕국(차르국) 멸망 |
본래 시메온 2세의 후임자는 장남인 카르담 시메오노프 삭스코부르고츠키였으나 2008년에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여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2015년 4월 7일에 끝내 아버지인 시메온 2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현 후임자는 시메온 2세의 장손이자 카르담의 장남인 보리스 카르다모프 삭스코부르고츠키다.
2.14. 세르비아
세르비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14.1. 국가
2.14.1.1. 세르비아 차르
세르비아 제국 국장 | |
관련 칭호 | 세르비아 차르 |
작위 요구자 | 안토니예 조우파노시 |
계승 실패 원인 | 1371년 세르비아 제국 해체 |
2.14.1.2. 세르비아 보호자
관련 칭호 | 세르비아 보호자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세르비아 보호자 칭호 폐지 |
2.14.1.3. 세르비아 국왕
관련 칭호 |
세르비아 국왕 유고슬라비아 국왕[알렉산다르] 몬테네그로 국왕[니콜라] |
||
작위 요구자 |
(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알렉산다르 왕세자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
(
오브레노비치 왕조) 프레드라그 야코블리에비치 |
(
오브레노비치 왕조) 니콜라 페트로비치-네고시 |
전임자 | 페타르 2세 | 게오르게 오브레노비치 | 미차엘 페트로비치-네고시 |
후임자 | 필리프 | 보리스 | |
계승 실패 원인 |
1903년 왕조 교체(오브레노비치 왕조) 1918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합병되며 왕호 폐지 1941년 왕국 멸망 1945년 망명 정부 해체 2003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2006년 몬테네그로 분리 |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에서는 1918년부터 페타르 1세가 세르비아 왕국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합치면서 세르비아 왕 대신 유고슬라비아 왕 칭호를 사용한다. 구 세르비아 왕가는 유고슬라비아 왕호를 사용하다 1941년 나치 독일에 왕국이 망하자 영국으로 망명한다. 페타르 2세는 유고슬라비아 왕위를 요구했는데, 페타르 2세의 독자인 왕세자 알렉산다르의 대에서 왕호에 문제가 생긴다.[53]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구성원들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2003년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연합"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사라졌다. 거기다 2006년에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일부인 몬테네그로가 독립했다. 알렉산다르 왕세자는 유고슬라비아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석이었던 "세르비아 왕"을 2003년부터 새로이 요구하게 되었다. 알렉산다르 왕세자 본인은 왕정복고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자신이 "세르비아 왕세자"라면서 왕실이 회복될 때까지 왕세자 칭호를 고수한다.
2022년 4월 27일 알렉산다르 왕세자의 장남 페타르가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 #
세르비아 국민의 64%가 왕정 복고에 찬성한다는 점에서 정말 왕이 될 수 있을지도..
2.14.1.4. 유고슬라비아 국왕
관련 칭호 |
세르비아 국왕 유고슬라비아 국왕 |
작위 요구자 | 알렉산다르 왕세자(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
전임자 | 페타르 2세 |
후임자 | 필리프 |
계승 실패 원인 |
1941년 왕국 멸망 1945년 망명 정부 해체 2003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2006년 몬테네그로 분리 |
2.14.2. 지방
2.14.2.1. 보이보디나-바나트 공작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헝가리 국왕 보이보디나-바나트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공국 해체 1920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합병 |
2.15. 스위스
스위스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15.1. 합스부르크 백작
관련 칭호 | 합스부르크 백작 |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펠리페 6세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안 카를로스 1세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계승 실패 원인 | 1315년 영지 상실 |
2.15.2. 뇌샤텔 공작
관련 칭호 |
프로이센 국왕 뇌샤텔 공작 |
작위 요구자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전임자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
후임자 | 카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계승 실패 원인 | 1857년 공국 멸망 |
2.15.3. 루체른 자치주 군주
관련 칭호 |
독일 황제(
카이저) 프로이센 국왕 루체른 자치주 군주 |
작위 요구자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전임자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
후임자 | 카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군주제 폐지 |
2.16. 스페인
스페인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16.1. 국가
2.16.1.1. 스페인 국왕
관련 칭호 |
스페인 국왕 에트루리아 국왕 파르마 피아첸차 공작 |
양시칠리아 국왕 칼라브리아 공작 |
프랑스 국왕 나바르 국왕 앙주 공작 부르봉 공작 |
||
작위 요구자 |
(카를로스 정통주의) 식스토 엔리케 데 보르본-파르마 이 보르본-부세트 |
(카를로스주의)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
(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카를로스주의) 페드로 후안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54] |
(자유주의)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
전임자 | 하비에르[55]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56]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57] | 카를로스 마리아 알폰소 마르셀로 | 알퐁스 2세[A][B] |
후임자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잔도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하이메 |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30년 국본 조칙 |
2.16.1.2. 아스투리아스 공작
관련 칭호 |
아스투리아스 공작 스페인 왕세자 지로나 공작 세르베라 백작 몽블랑 공작 발라게르 공작 비아나 공작 |
||||
작위 요구자 |
(
카를로스주의)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
압스부르고 왕조)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카를로스주의) 하이메 |
(자유주의)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
|
전임자 |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페드로 후안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63] |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30년 국본 조칙 |
카를로스주의의 분파인 카를로스 정통주의[64] 계열은 스페인 왕위 요구자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대외적으로 공표된 바가 없어서, 이쪽 계열의 아스투리아스 공위 요구자를 알 수 없으므로 이 문단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2.16.2. 지방
2.16.2.1. 마요르카 국왕
마요르카 왕국 국장 | ||
관련 칭호 |
스페인 국왕 카스티야 국왕 아라곤 국왕 마요르카 국왕 |
|
작위 요구자 |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전임자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후임자 |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 1715년 왕국 멸망 |
2.16.2.2. 아라곤 국왕
관련 칭호 |
스페인 국왕 카스티야 국왕 아라곤 국왕 |
|
작위 요구자 |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전임자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후임자 |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 1716년 왕국 멸망 |
2.16.2.3. 카스티야 국왕
관련 칭호 |
스페인 국왕 카스티야 국왕 아라곤 국왕 |
|
작위 요구자 |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전임자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후임자 |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 1715년 왕국 멸망 |
2.16.2.4. 갈리시아 국왕
관련 칭호 |
스페인 국왕 갈리시아 국왕 |
||
작위 요구자 |
(카를로스 정통주의) 식스토 엔리케 데 보르본-파르마 이 보르본-부세트 |
(카를로스주의)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
(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전임자 | 하비에르[65]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66]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67] |
후임자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30년 국본 조칙(카를로스주의) 1833년 왕국 해체 |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된 1700년과 페르난도 7세가 자기 딸 이사벨 2세를 후계자로 정한 1830년은 갈리시아 왕국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1833년보다 앞선 시기이므로, 압스부르고 왕조 왕위 요구자와 카를로스주의자들은 갈리시아 왕국의 해체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2.16.2.5. 그라나다 국왕
그라나다 왕국 국장 | |||
관련 칭호 |
스페인 국왕 그라나다 국왕 |
||
작위 요구자 |
(카를로스 정통주의) 식스토 엔리케 데 보르본-파르마 이 보르본-부세트 |
(카를로스주의)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
(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전임자 | 하비에르[68]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69]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70] |
후임자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잔도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30년 국본 조칙(카를로스주의) 1833년 왕국 해체 |
2.17. 슬로베니아
2.17.1. 일리리아 국왕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일리리아 국왕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849년 왕국 해체 |
2.17.2. 크라인 공작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크라인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적 |
2.18. 아르메니아 국왕
아르메니아 바그라투니 왕조 문장 | ||
관련 칭호 | 아르메니아 국왕 | |
작위 요구자 |
(콘스탄티네 2세의 후손) 다비드 바그라티오니 |
(기오르기 11세의 후손) 누그자르 바그라티오니 |
전임자 | 기오르기 바그라티오니[71] | 페트레 그루진스키[72] |
후임자 | 기오르기 바그라티오니[73] | |
계승 실패 원인 | 1045년 왕국 멸망 |
2.19. 아이슬란드 국왕
관련 칭호 |
덴마크 국왕 아이슬란드 국왕 |
작위 요구자 | 프레데리크 10세 |
전임자 | 마르그레테 2세 |
후임자 | 크리스티안 발데마르 앙리 욘 |
계승 실패 원인 | 1944년 왕정 폐지 |
2.20.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20.1. 국가
2.20.1.1. 에린 지고왕
관련 칭호 | 에린[74] 지고왕( 아르드리) |
작위 요구자 | 코너 마일즈 존 오브라이언 |
계승 실패 원인 | 1198년 왕국 멸망 |
2.20.1.2. 아일랜드 영주
아일랜드 영지 문장 | |
관련 칭호 | 아일랜드 영주 |
작위 요구자 |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
전임자 |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
계승 실패 원인 |
1485년 영주 가문 교체 1542년 아일랜드 왕국으로 개편 |
2.20.1.3. 아일랜드 국왕
관련 칭호 |
아일랜드 국왕 잉글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바이에른 국왕 |
작위 요구자 | 프란츠 폰 바이에른[75] |
전임자 |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
후임자 | 막스 폰 바이에른 |
계승 실패 원인 |
1688년 제임스 2세 폐위 1714년 왕조 단절 및 교체 1801년 영국에 합병 |
2.20.2. 지방
2.20.2.1. 렌스터 국왕
관련 칭호 | 렌스터 국왕 |
작위 요구자 | 윌리엄 버틀러 카바나 |
계승 실패 원인 | 1198년 왕국 멸망 |
2.20.2.2. 먼스터-데스몬드 국왕
관련 칭호 | 먼스터-데스몬드 국왕 |
왕위 요구자 | 리엄 트랜트 맥카시 모어 |
계승 실패 원인 | 1198년 왕국 멸망 |
2.20.2.3. 먼스터-소몬드 국왕
관련 칭호 | 먼스터-소몬드 국왕 |
작위 요구자 | 코너 마일즈 존 오브라이언 |
계승 실패 원인 | 1198년 왕국 멸망 |
2.20.2.4. 얼스터 국왕
관련 칭호 | 얼스터 국왕 |
작위 요구자 | 휴고 리샤르디 오닐 |
계승 실패 원인 | 1198년 왕국 멸망 |
2.20.2.5. 코노트 국왕
관련 칭호 | 코노트 국왕 |
작위 요구자 | 데스몬드 로더릭 오코너 |
계승 실패 원인 | 1198년 왕국 멸망 |
2.21. 안도라 공동대공
관련 칭호 |
안도라 공동대공 프랑스 국왕[장][루이스] 나바르 국왕[루이스] 프랑스 황제[샤를][장-크리스토프] 베스트팔렌 국왕[샤를][장-크리스토프] |
|||
작위 요구자 |
(
부르봉-오를레앙 왕조) 장 도를레앙 |
(
부르봉 왕조 본가)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세고비아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84] |
(
보나파르트 왕조) 샤를 나폴레옹[85] |
(
보나파르트 왕조)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86] |
전임자 | 앙리 7세 | 알퐁스 2세 | 나폴레옹 6세(루이 나폴레옹) | |
후임자 | 가스통 도를레앙 |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87] | 제롬 나폴레옹[88][89] |
계승 실패 원인 |
1830년 왕조 교체(부르봉 왕조 본가) 1848년 프랑스 왕국 멸망(부르봉-오를레앙 왕조) 1870년 프랑스 제2제국 멸망(보나파르트 왕조) |
2.22. 알바니아
알바니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22.1. 알바니아 공작
관련 칭호 |
알바니아 공작 비트-노이비트 공작 |
작위 요구자 | 막시밀리안 폰 비트-노이비트 |
전임자 | 카를 폰 비트-노이비트[90] |
후임자 | 프리드리히 폰 비트-노이비트[91] |
계승 실패 원인 | 1925년 공국 멸망 |
사실 밑에 나올 조구 1세도 원래는 알바니아 공국의 마지막 총리였다.
2.22.2. 알바니아 국왕
관련 칭호 | 알바니아 국왕 |
작위 요구자 | 레카 2세(레카 조구 2세) |
전임자 | 레카 1세(레카 조구) |
후임자 | -[93] |
계승 실패 원인 |
1939년
이탈리아 침공 1997년 알바니아 왕정복고 실패 |
이후 1961년 조구 1세가 세상을 뜨면서 외동아들 레카 1세(레카 조구)가 왕위 요구자가 되었고, 1993년, 레카 1세는 54세의 나이로 조국 알바니아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는데, 당시 극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레카 왕자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상당히 높은 것에 불안감을 느낀 정부에 의해 입국이 거부되기도 했다. 이후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으로 나라가 혼란해지자, 왕정복고를 주장하며 무력시위를 하다가 실패하여 망명했다가 2002년 알바니아로 되돌아왔다.
2011년 72세로 레카 1세가 사망한 후, 레카 1세의 외동아들인 레카 2세(1982 ~ )가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 결혼하여 아직 차기 계승자는 없다. 심지어 아버지인 레카 1세도 외동아들이었기 때문. 2020년 레카 2세 슬하에 1녀가 출생했으나 여자이기에 상속권은 없다. 이후 레카 2세가 끝내 아들을 얻지 못할 경우, 여성의 왕위 요구권 계승을 허용하는 쪽으로 바뀐다면 레카 2세의 딸이 ( 아버지인 레카 2세보다 먼저 사망하는 경우가 아닌 한) 명목상의 알바니아 여왕이 될 것이고, 계속 남성의 왕위 요구권 계승만 인정한다면 조구 1세의 형의 후손인 6촌 남계가 왕위를 잇게 될 것이며, 어느 쪽으로도 확실히 정해지지 못할 경우 레카 2세 사후 레카 2세의 딸과 6촌 남계가 알바니아 왕위 요구권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여 대립 왕위 요구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단, 현 왕가 구성원들의 관계가 나쁘지 않고 6촌 친척들도 왕정복고에 적극 찬성하고 협력하는 것을 보면 레카 2세의 딸과 6촌 남계의 후손들이 혼인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23. 영국
자세한 내용은 작위 요구자/유럽/영국 문서 참고하십시오.2.24.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이긴 하나 동군연합의 성격이 강했던 오스트리아의 특성상 오스트리아 대공 작위를 제외하곤 전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수장이 요구자이다.2.24.1. 국가
2.24.1.1. 오스트리아 대공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대공 신성 로마 황제(임페라토르) 스페인 국왕 |
작위 요구자 | 펠리페 6세 |
전임자 | 후안 카를로스 1세 |
후임자 |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계승 실패 원인 |
1521년 동군연합 해체 1804년 대공국 분열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
2.24.1.2. 오스트리아 황제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보헤미아 국왕 (생략)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제국 해체 |
오스트리아는 제1공화국이 설립될 때부터 꾸준히 제정과의 단절을 시도해 복벽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오토는 결국 제정복고를 포기하고 공화국 시민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2011년 오토가 죽고 아들 카를 폰 합스부르크가 제위 요구자가 되었다. 카를은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4개국에서 미디어 기업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카를의 아들 페르디난트는 현재 오스트리아 국적 카레이서로 활동하고 있다.
2.24.2. 지방
2.24.2.1. 상오스트리아 대공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하오스트리아 대공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대공국 해체 |
2.24.2.2. 하오스트리아 대공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상오스트리아 대공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대공국 해체 |
2.24.2.3.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공국 해체, 오스트리아에 합병 |
2.24.2.4. 잘츠부르크 공작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잘츠부르크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공국 해체, 오스트리아에 합병 |
2.24.2.5. 케른텐 공작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케른텐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공국 해체, 오스트리아에 합병 |
2.24.2.6. 포어아를베르크 백작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포어아를베르크 백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후백국 해체 |
2.25.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25.1. 크림 칸
관련 칭호 | 크림 칸 |
작위 요구자 | 사히브 |
계승 실패 원인 | 1783년 칸국 멸망 |
2.25.2. 카자크 대수령
돈 카자크 문장 | |||
관련 칭호 |
전(全)러시아의 황제 러시아 대공[마리아] 러시아 공작[앤드류] 카자크 대수령 |
||
작위 요구자 |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 앤드류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 카를 에미히 폰 라이닝겐 |
전임자 |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98] | 드미트리 로마노비치 로마노프 | 에미히 키릴 폰 라이닝겐[99] |
후임자 |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 에미히 폰 라이닝겐[100] |
계승 실패 원인 | 1917년 대수령 계보 단절 |
2.25.3.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국왕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국왕 크라쿠프 대공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왕국 해체 |
2.25.4. 부코비나 공작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부코비나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공국 해체 |
2.25.5. 우크라이나국 군주
관련 칭호 |
헤트만 우크라이나국 세습군주 |
작위 요구자 | 올레나 스코로파즈카오트 |
전임자 | 올렉산드라 스코로파즈카오트 |
후임자 | 디미트리 쾨니히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군주국 멸망 |
파울로 스코로파즈키는 퇴위한 뒤에도 자신을 적법한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으로 칭하였고, 우크라이나 군주제 복고 운동에 영향을 미쳤지만 사후 1957년 그의 장남인 다닐로 스코로파즈키가 암살당하고 지지자들도 고령화되어 1980년대 이후로는 동력을 급속히 상실했다.
전임 헤트만위 요구자였던 올렉산드라 스코로파즈카오트는 파울로 스코로파즈키의 손녀이며, 2014년 캐나다에서 사망했다.
2.26. 이탈리아
자세한 내용은 작위 요구자/유럽/이탈리아 문서 참고하십시오.2.27. 조지아
조지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101]2.27.1. 카르틀리-카케티 국왕
관련 칭호 | 카르틀리-카케티 국왕 | |
작위 요구자 |
(콘스탄티네 2세의 후손) 다비드 바그라티오니 |
(기오르기 11세의 후손) 누그자르 바그라티오니 |
전임자 | 기오르기 바그라티오니[102] | 페트레 그루진스키[103] |
후임자 | 기오르기 바그라티오니[104] | |
계승 실패 원인 | 1801년 왕국 멸망 |
2.27.2. 압하지야 공작
압하지야 공국 국장 | |
관련 칭호 | 압하지야 공작 |
작위 요구자 | 안드레아 니키티치 셰르바시드제 |
계승 실패 원인 | 1864년 공국 멸망 |
2.28. 체코
체코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28.1. 슈바르첸베르크 공작
슈바르첸베르크 공국 국장[106] | |
관련 칭호 |
슈바르첸베르크 공작 크룸로프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렐 슈바르첸베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789년 공국 멸망 |
2.28.2. 모라바 변경백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모라바 변경백 보헤미아 국왕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변경백국 해체 |
2.28.3. 보헤미아 국왕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보헤미아 국왕 모라바 변경백 (생략)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왕국 해체 |
2.28.4. 트로파우 공작
트로파우 공국 국장 | |
관련 칭호 |
트로파우 공작 리히텐슈타인 공작 |
작위 요구자 | 한스아담 2세 |
전임자 | 프란츠 요제프 2세 |
후임자 | 알로이스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공국 멸망 |
2.29.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29.1. 달마티아 국왕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달마티아 국왕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적 |
2.29.2.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국왕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헝가리 국왕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국왕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이적 |
2.29.3. 크로아티아 독립국 국왕
관련 칭호 |
크로아티아 독립국 국왕 아오스타 공작 |
작위 요구자 | 아이모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108] |
전임자 |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
후임자 | 움베르토 디 사보이아-아오스타[109] |
계승 실패 원인 |
1943년
토미슬라브 2세 퇴위 1945년 크로아티아 독립국 멸망[110] |
2.30. 포르투갈
포르투갈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30.1. 알가르브 국왕
알가르브 왕국 국장 | ||
관련 칭호 |
포르투갈 국왕 알가르브 국왕 브라간사 공작[두아르트] 스페인 국왕[펠리페] |
|
작위 요구자 |
(
브라간사 왕조) 두아르트 피우 |
(
압스부르구 왕조) 펠리페 6세 |
전임자 | 두아르트 누누 | 후안 카를로스 1세 |
후임자 | 아폰수 |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계승 실패 원인 |
1640년 동군연합 해체(압스부르구 왕조) 1834년 폐위(브라간사 왕조) 1910년 왕정 폐지, 포르투갈에 합병 |
브라간사 왕조 이전의 압스부르구 왕조 또한 여전히 알가르브 왕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다. 포르투갈 독립 전쟁으로 포르투갈 왕국과 알가르브 왕국이 스페인 왕국과의 동군연합을 청산하고 자신들끼리 브라간사 왕조의 동군연합이 되면서 스페인 왕실은 포르투갈 국왕 칭호를 폐지하였으나, 알가르브 국왕 칭호만큼은 오늘날의 보르본 왕조에서도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이어지고 있다.
2.30.2. 포르투갈 국왕
관련 칭호 |
포르투갈 국왕 알가르브 국왕 브라간사 공작 |
작위 요구자 | 두아르트 피우 |
전임자 | 두아르트 누누 |
후임자 | 아폰수 |
계승 실패 원인 |
1834년 폐위 1910년 왕정 폐지 |
두아르트 피우는 미겔 1세의 후손인 브라간사 왕조에 대한 포르투갈 입국 금지 법령 때문에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114] 포르투갈 시민권은 출생 당시부터 갖고 있었다. 이후 1950년에 입국 금지가 풀려 1952년에 포르투갈로 영구 귀국하였다. 두아르트 피우의 어머니인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장녀 이자베우의 맏아들인 페드루의 차녀이기 때문에, 두아르트 피우는 페드루 4세의 후손이기도 하다. 한편 두아르트 피우는 동티모르의 독립 운동에 나선 공로로 2012년에 동티모르 정부로부터 국적을 받아 동티모르 시민권도 갖고 있다.
두아르트 피우는 1995년에 50세의 나이로 21살 연하의 포르투갈인 귀족 여성과 결혼했으며 현재 이들의 장남 아폰수가 명목상의 왕세자다. 포르투갈 왕가가 포르투갈인과 결혼하는 것은 1862년 루이스 1세의 혼인 이후 처음이다.
2.31. 폴란드
폴란드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31.1. 국가
2.31.1.1. 폴란드 국왕
관련 칭호 |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작센 국왕 바르샤바 공작 |
|||
작위 요구자 |
(작센-게사페 가문) 알렉산더 |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다른 친족) 다니엘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 미하엘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
|
전임자 | 마리아 에마누엘 | 뤼디거 | 마리아 에마누엘 | |
후임자 | 게오르크 필리프 | 게로 |
(임시) 레오니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115] |
(장래) 안드레아스 폰 작센-코부르크-고타[116] |
계승 실패 원인 |
1795년 왕국 멸망 1815년 바르샤바 공국 멸망 |
2.31.2. 지방
2.31.2.1. 바르샤바 공작
관련 칭호 |
작센 국왕 바르샤바 공작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
|||
작위 요구자 |
(작센-게사페 가문) 알렉산더 |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다른 친족) 다니엘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 미하엘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
|
전임자 | 마리아 에마누엘 | 뤼디거 | 마리아 에마누엘 | |
후임자 | 게오르크 필리프 | 게로 |
(임시) 레오니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117] |
(장래) 안드레아스 폰 작센-코부르크-고타[118] |
계승 실패 원인 | 1815년 공국 멸망 |
2.31.2.2. 폴란드 차르
관련 칭호 |
전(全)러시아의 황제 러시아 대공[마리아] 러시아 공작[앤드류] |
||
작위 요구자 |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 앤드류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 카를 에미히 추 라이닝겐 |
전임자 |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122] | 드미트리 로마노비치 로마노프 | 에미히 키릴 추 라이닝겐[123] |
후임자 |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124] | 안드레아스 추 라이닝겐[125] |
계승 실패 원인 |
1832년 자치권 박탈 1867년 러시아 제국에 완전 병합 1915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러시아령 폴란드 강탈 1917년 러시아 제국 멸망 1918년 폴란드 군주정 완전 폐지 |
러시아령 폴란드가 동군연합 형식의 자치령에서 러시아의 직할령으로 바뀐 뒤에도 러시아 황제의 폴란드 차르 칭호는 명목상 계속 이어졌으며, 러시아 제국 멸망 후에도 러시아 제국의 황제위 요구자들에 의해 폴란드 차르 칭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치하 폴란드인들이 러시아인들에 의해 엄청나게 탄압을 받은 역사를 감안하면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황실 후손들 중 누군가를 자신들의 군주로 추대할 가능성은 완벽하게 0%다. 무엇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기점으로 폴란드의 반러 감정이 더더욱 극에 달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 황제위 요구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명목상의 폴란드 차르로만 남게 될 것이다.
2.31.2.3. 크라쿠프 대공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국왕 크라쿠프 대공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대공국 해체 1919년 폴란드에 합병 |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실한 가톨릭 가문이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실이 크라쿠프 대공국을 포함한 여러 구성국들의 자치권을 많이 보장했기 때문에 아래의 폴란드 왕위 요구자들과 폴란드 차르위 요구자들에 비하면 폴란드인들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오스트리아도 엄연히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폴란드와 역사적 악연이 있는 나라이다. 그렇다 보니 폴란드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크라쿠프의 오스트리아계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나 지지를 받을 뿐, 토착 폴란드인에게는 프로이센 왕국의 호엔촐레른 가문과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증오의 대상이며, 그에 따라 크라쿠프 대공국이 재건될 가능성은 없다.[127]
2.31.2.4. 아우슈비츠 공작
아우슈비츠 공국 국장 | |
관련 칭호 | 아우슈비츠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공국 멸망 |
2.31.2.5. 노이데크 영주
문장 | |
관련 칭호 | 노이데크 영주 |
작위 요구자 | 게르트루트 폰 힌덴부르크 |
전임자 |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1945년 폴란드에 합병 |
2.32. 프랑스
자세한 내용은 작위 요구자/유럽/프랑스 문서 참고하십시오.2.33. 핀란드
핀란드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 참고로 이중에 스웨덴 출신은 없다. 애초에 스웨덴 치하의 핀란드는 근대의 자치령이나 식민지(possession)가 아니라 주가 설치된 본토였다.[128] 그에 따라 당시 스웨덴 국왕은 즉위 이전 핀란드[129] 공작이었던 요한 3세 외에는 의전 때 핀란드 대공(Storfurste av Finland)을 말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핀란드 관련 칭호를 쓰지는 않았다.2.33.1. 핀란드 대공
관련 칭호 |
전(全)러시아의 황제 러시아 대공[마리아] 러시아 공작[앤드류] 핀란드 대공 |
||
작위 요구자 |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 앤드류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 카를 에미히 폰 라이닝겐 |
전임자 |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133] | 드미트리 로마노비치 로마노프 | 에미히 키릴 폰 라이닝겐[134] |
후임자 |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로마노프 | 에미히 폰 라이닝겐[135] |
계승 실패 원인 | 1917년 대공국 멸망 |
만약 니콜라이 2세가 적어도 핀란드인들에게만큼은 좋은 군주였다면 러시아 혁명 당시 핀란드로 망명하여 핀란드 대공위라도 유지하는 방법을 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할 수도 있지만, 핀란드는 칼레발라 이래로 민족주의가 꾸준히 강화되고 있었고, 산업혁명으로 노동계급도 꾸준히 성장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지기 직전인 1916년 총선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이 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나라라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심지어 우파들도 절반이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나 퀴외스티 칼리오 같은 공화주의자였고,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같은 왕당파도 친독파였기 때문에, 핀란드에서 니콜라이 2세 일가가 발붙일 땅은 전무했다. 더구나 니콜라이 2세가 핀란드로 망명하여 핀란드 대공위를 유지한다면 그 존재 자체가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할 좋은 명분이 되는데[136], 핀란드인들이 이를 좌시했을 리가 없다.[137] 오히려 니콜라이 2세의 대공위 퇴위를 선언한 핀란드인에 의해 소련에 넘겨졌을 확률이 더 높다.
2.33.2. 핀란드 국왕
관련 칭호 |
핀란드 국왕 카렐리아 국왕 올란드 공작 라플란드 대공 칼레발라와 포흐욜라의 주인 |
|
작위 요구자 | 하인리히 도나투스 폰 헤센[138] | |
전임자 | 모리츠 폰 헤센[139] | |
후임자 | 모리츠 폰 헤센[140] | |
계승 실패 원인 | 1919년 왕국 멸망 |
2.34. 헝가리 국왕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보헤미아 국왕 (생략)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왕국 해체 1921년 복위 무산 1946년 군주정 완전 폐지 |
[1]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성이 없었으나 1932년 튀르키예의 성씨법 제정 이후로 편의상 오스만 1세의(Osman) 자손(Oğul의 3인칭 한정형인 oğlu)'이라는 의미로 오스만오을루(Osmanoğlu)라는 성을 쓰고 있다.
[2]
그래서 작위 요구자/아시아 문서에서도 오스만 제국 황제위 요구자 문단과
이슬람교
수니파
칼리프위 요구자 문단이 각각 따로 존재한다. 오스만 제국 황실에서 오스만 제국 황제위(파디샤), 수니파 칼리프위, 로마 제국 황제위(카이세리 룸)는 명목상 제각기 별개의 작위였다.
[3]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마이너 갤러리 등 21세기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혐한에 미친 일뽕 정신병자들조차 지금의 대한민국 영토에 일본의
천황을 국가원수로 하는 새로운 군주국을 세우자는 미친 소리는 대놓고 하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일본의 경우 명목상 군주제가 완전히 폐지된 건 아니지만 어차피 황실에 실권이 없는 점에서 오스만 제국 황제위 요구자와는 도긴개긴이다.
[4]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
[5]
파블로스의 장남
[6]
그리스 해법,
황금새벽당,
스파르타인당 등
[7]
그리스 왕국 왕위 요구자인 파블로스의 아들이자, 명목상의 그리스 왕세자
[8]
나바라(Navarra)는
스페인어 명칭이며
나바르(Navarre)는
프랑스어 명칭이다.
[9]
루이스 알폰소 곤살로 빅토르 마누엘 마르코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10]
페드로 후안 마리아 알레요 사투르니노 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
[A]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당피에르
[B]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의 아버지로 카디스 공작(Duque de Cádiz)이었다.
[13]
프랑스 제1제국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나폴레옹 2세 그리고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는 나바르 국왕 칭호를 쓰지 않았다.
[14]
샤를 마리 제롬 빅토르 나폴레옹
[15]
장-크리스토프 루이 페르디낭 알베릭 나폴레옹
[16]
샤를 나폴레옹의 장남
[17]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의 장남
[18]
사실 나폴레옹 3세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이 있는데, 이게 맞다면 홀란트 왕실의 직계 혈통은 나폴레옹 3세 이전에 이미 단절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건 나폴레옹 3세 문서 참고.
[19]
보이츨라바 페오도라의 남편 하인리히 1세가 1935년 당시
로이스-게라 공작이었던 하인리히 45세의 양자가 되어 그의 재산과 부동산을 상속받았지만 공위는 계승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로이스-게라 공위 요구자는 아니다. 더불어 보이츨라바 페오도라는 하인리히 45세의 외조카이기도 하다.
[20]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와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공주 마리의 3남. 더불어 이들의 4남은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의 남편 하인리히/헨드릭이다.
[마리아]
러시아 여대공
[앤드류]
황태자 전하, (러시아) 공작
[카를]
귀천상혼으로 라이닝겐 후작위 요구 포기
[24]
마리아 여대공의 아버지.
[25]
카를 에미히의 아버지. 어머니가
알렉산드르 2세의 증손녀이다.
[26]
앤드류 안드레예비치의 아들.
[27]
제8대 라이닝겐 후작, 카를 에미히의 동생.
[28]
러시아 제국 기본법 37조에 따르면 «Божіею поспѣшествующею милостію, Мы, NN, Императоръ и Самодержецъ Всероссійскій, Московскій, Кіевскій, Владимірскій, Новгородскій; Царь Казанскій, Царь Астраханскій, Царь Польскій, Царь Сибирскій, Царь Херсониса Таврическаго, Царь Грузинскій; Государь Псковскій и Великій Князь Смоленскій, Литовскій, Волынскій, Подольскій и Финляндскій; Князь Эстляндскій, Лифляндскій, Курляндскій и Семигальскій, Самогитскій, Бѣлостокскій, Корельскій, Тверскій, Югорскій, Пермскій, Вятскій, Болгарскій и иныхъ; Государь и Великій Князь Новагорода низовскія земли, Черниговскій, Рязанскій, Полотскій, Ростовскій, Ярославскій, Бѣлозерскій, Удорскій, Обдорскій, Кондійскій, Витебскій, Мстиславскій и всея сѣверныя страны Повелитель и Государь Иверскія, Карталинскія и Кабардинскія земли и области Арменскія; Черкасскихъ и Горскихъ князей и иныхъ наслѣдный Государь и Обладатель; Государь Туркестанскій, Наслѣдникъ Норвежскій, Герцогъ Шлезвигъ-Голстинскій, Стормарнскій, Дитмарсенскій и Ольденбургскій, и прочая, и прочая, и прочая»(대략 일부만 번역하자면 전 러시아의 황제이자 군주로서 카잔, 아스트라한, 폴란드, 시베리아, 크림반도, 그루지야의 왕이며 프스코프의 영주이자 스몰렌스크와 리투아니아와 볼히니아, 포돌리아와 핀란드의 대공이자 에스토니아,리보니아, 크룰란드 등등의 공작과 영주이자 모든 북방국가의 주인이며 노르웨이의 후계계승자 및 슐레스비히 공작 등.
[29]
러시아 제국의 황위 계승법은 엄밀히 말하면 준살리카법이라, 남자 계승권자가 없는 경우에 한해 딸의 계승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러시아 황실의 남계후손은 모두 본인이나 조상이 비왕족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귀천상혼한 후손을 제외한 러시아 황실의 남계후손이 없으므로 본인이 적법한 계승자라라고 주장한 것.
[30]
사실 한 명 있긴 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6남 파벨의 장남 드미트리의 아들 폴 로마노프-일린스키(1928-2004)가 알렉산드르 2세 계열의 유일한 계승권자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황위 요구를 공개적으로 한 적이 없었으며, 미국에 정착하여 플로리다의 팜비치라는 소도시의 시장을 3선할 정도의 정치가였으니 후에 러시아 황위를 요구하기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아들 둘, 딸 둘에 친손녀 넷을 두었다.
[31]
러시아식 이름은 니콜라이 키릴로비치 레이닌겐-로마노프(Николай Кириллович Лейнинген-Романов)
[32]
폐지된 왕실의 계승 문제에 왜 공화국인
루마니아의 국회가 간섭하느냐면, 루마니아 정부가
미하이 1세의 가족들을 비공식적으로 자국의 왕가로 모시기로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근데 왜 공식적으로는 공화국이냐면, 나라가 가난해서 왕실을 공인하는 문제를 뒷전으로 미뤄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명목상의 왕실 신세를 못 벗어날 듯 하다.
[33]
미하이 1세는 딸만 5명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딸 이리나가 미국에서 마약 범죄를 저질러 제명되었다(...).
[34]
마르가레타 왕세녀는 결혼을 40이 넘어서 하였다. 참고로 배우자인 라두 두다는 왕족/귀족이 아니며, 부인보다 11세 연하다.
[35]
미하이 1세의 이복형 카롤 람브리노의 아들이다.
[36]
트란실바니아는 본래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는데 루마니아 왕국은 트란실바니아의 주민 과반수가
루마니아인임을 근거로 내세워 합병하였다. 당시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헝가리인에게 지독하게 탄압을 당했기 때문에, 루마니아인 입장에선 하루빨리 헝가리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숫자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으며, 루마니아 합병으로 헝가리인이 졸지에 고립되어버리다 보니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는
그리스-튀르키예 관계 만큼 최악이다.
[37]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38]
미하엘의 딸.
살리카법 때문에 정식적인 수장은 되지 못한다.
[39]
현재는 귀천상혼으로 왕위 요구권을 박탈당한 상태다.
[40]
뷔르템베르크의 마지막 국왕
빌헬름 2세(뷔르템베르크)와는 사촌지간이다. 모나코 공위 계승이 유력시되었으나, 이후 열강의 조정에 따라 알바니아 공국의 초대 공작으로 거론되기도 했고, 최종적으로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추대된다.
[41]
정확히는 첫 왕이자 마지막 왕, 유일한 왕이다. 왜냐면 그 전까지는 몬테네그로 공국이었고, 니콜라 1세의 삼촌이 본래 공작이었으나 후세없이 암살당하면서 공작직위를 니콜라가 물려받았고, 그 공작직위를 물려받은지 50년이 되던 1910년에 스스로 왕을 자칭하면서 왕국의 초대왕이 된 것이다.
[42]
니콜라 1세의 차남, 미르코(1879~1918)의 아들
[43]
니콜라 1세는 3남 9녀를 슬하에 두었는데, 장남 다닐로와 삼남 페테르(1889~1932)는 모두 결혼은 했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사실상 적손은 미차엘뿐이었다. 그렇기에 당시에 이미 40세를 넘긴 다닐로의 부인 밀리차(1880~1946)의 상황 등을 고려하여 계승권을 넘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뒷이야기가 있고, 다닐로가 정략결혼에 의해 일부러 아이를 낳지 않았다가 나중에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우치고 왕위계승을 포기한 체 그녀를 찾아 떠난다는 스토리의 영화도 존재한다.
[44]
일단
몬테네그로는
의원내각제 국가라서
대통령은 단순한 명예직에 불과하다. 따라서
왕정복고를 법적으로 명문화하려면, 그냥 대통령직을 폐지하고 그 자리에 왕실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면 된다. 절차상의 문제는 없는 것이다.
[45]
위의
루마니아의 옛 왕가도 비공식적으로 자국 정부와 국민들로부터 루마니아의 왕실로 대접받고 옛 왕궁을 돌려받기까지 했지만, 나라 살림이 어려워서 자꾸만 자신들의 지위를 공식화해달라는 요구가 개무시당한다(...).
왕정복고를 반대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지금 그 문제를 굳이 거론해야겠냐는 논리다. 게다가
몬테네그로는 정치권과 국민들의
왕정복고 여론이 드높은데 반해, 정작 그 수혜자가 될 왕실이 그 문제에 대해 영 시큰둥한 반응이라서(...), 왕정복고 논의가 지지부진한 탓도 있다.
[46]
이름이 자꾸 2대에 걸쳐 반복돼서 헷갈리겠지만 정리하자면, 니콜라 1세는 여자형제만 둘 있고, 혼자 외아들이었다. 니콜라 1세는 3남 9녀를 두었는데, 첫째와 셋째는 자녀가 없다. 유일하게 자녀를 둔 미르코 왕자는 다섯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단명하고 사실상 외동인 미차엘 왕자를 두었다. 그리고 미차엘 왕자는 아예 외동으로 니콜라(2세)왕자를 낳았다. 니콜라(2세) 왕자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그 아들이 보리스다. 사실상 보리스는 5대 독자인 셈이다. 그런 그가 딸만 둘이고, 보리스의 아내는 연상이다. 보리스가 80년생이니 그의 아내가 연하였다면 2022년 기준으로도 아직 남계 계승의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아내는 76년생으로 사실상 자녀를 더 낳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니 애초에 니콜라나 보리스는 왕정복고에 큰 관심이 없다고 한다.
[47]
참고로 보리스의 누나, 알티나이는 2009년 5월에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와 결혼하여
2009년 9월(!!)에 득남했다. 여담으로, 보리스의 장녀가 알티나이의 외동아들보다 1살 많다.
[48]
오드프랑스 레지옹 출범 이전엔 노르파드칼레(Nord-Pas-de-Calais) 레지옹 소속
[49]
시메온 보리소프
삭스코부르고츠키
[알렉산다르]
왕세자 전하
[니콜라]
몬테네그로의 명목상의 국왕
[52]
초대 국왕인 밀로시 1세(Miloš I)의
이부형제 야코브(Jakov)의 6세손으로 현재 남은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후예는 모두 야코블리에비치(Jakovljević) 계통이다. 참고로 야코브의 친부의 이름이 바로 오브렌(Obren)이며, 밀로시 1세의 친부 테오도르(Teodor) 사후 가문명을 테오도로비치(Teodorović)에서 오브레노비치(Obrenović)로 바꿨기 때문에 현재 왕위 요구자인 프레드라그는 초대 국왕인 밀로시 1세와 부계로 혈연관계가 없는 복잡한 가정사를 갖고 있다.
[53]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구별상 문제가 될 건 없는 게, 만약 왕실이 복고되면 알렉산다르 왕세자는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2세'로 즉위할텐데,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와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는 구별되기 때문.
[54]
페드로 후안 마리아 알레요 사투르니노 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
[55]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
[56]
하비에르의 장남.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아버지.
[57]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A]
[B]
[60]
더 가까운 보르본-도스 시칠리아스 가문을 건너뛰고 보르본-파르마 가문을 지지하는 이유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1738년 빈 조약으로 스페인과 나폴리-시칠리아(양시칠리아) 동군연합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동군연합 금지가 규정된 시기가
이사벨 2세의 즉위 이전이므로 카를리스타도 이를 따라야 한다.
[61]
마지막에서 두 번째 수장인 하이메 3세의 누나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토스카나 분가로 시집가서 만든 가문이다. 그런데 카를리스타 자체가 여계 계승을 부정하면서 만들어졌기에 만약 압스부르고-보르본 가문이 카를리스타 가문을 계승한다면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62]
카를로스 3세의 3남인 양시칠리아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후손으로 또한 현 수장 페드로의 외할머니가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딸
이자베우의 손녀라서, 페드루 2세의 할머니
카를로타 호아키나를 통해
카를로스 4세의 여계후손이기도 하며,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를 통해
알폰소 12세의 여계후손이 되기도 한다. 1738년 빈 조약으로 스페인과 나폴리-시칠리아의 동군연합은 불가능하지만, 분열된 양시칠리아 왕가의 두 계통 중 카스트로 계통의 입장에 따르면 다른 계통인 칼라브리아 계통은 양시칠리아의 왕위 계승권이 없으므로, 이론상으로는 카스트로 계통을 양시칠리아 왕가의 적통으로 인정할 경우 칼라브리아 계통의 수장이 카를리스타 왕위요구권을 갖는 것이 가능해진다. 다만 칼라브리아 계통 쪽은 명목상의 양시칠리아 왕위를 주장하는 집안이라 스페인 왕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63]
페드로 후안 마리아 알레요 사투르니노 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도스-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
[64]
카를로스주의 계열 작위 요구자들 중의 한 분파인데,
귀족 가문으로선 이례적으로 가문 차원에서
극좌 성향을 띄는 특징이 있다.
[65]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
[66]
하비에르의 장남.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아버지.
[67]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68]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데 브라간사
[69]
하비에르의 장남.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아버지.
[70]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71]
다비드의 아버지
[72]
누그자르의 아버지
[73]
다비드 바그라티오니가 누그자르 바그라티오니의 딸인 안나와 결혼해서 얻은 아들이다.
[74]
아일랜드의
아일랜드어 명칭인
에이레를 영어로 표기한 것이다.
[75]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
[76]
로우랜드 지역은 10세기 경부터 이미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장]
[루이스]
[루이스]
[샤를]
[장-크리스토프]
[샤를]
[장-크리스토프]
[84]
루이스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세고비아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85]
샤를 마리 제롬 빅토르 나폴레옹
[86]
장 크리스토프 루이 페르디낭 알베릭 나폴레옹
[87]
샤를 나폴레옹의 장남
[88]
제롬 그자비에 마리 조제프 빅토르 나폴레옹
[89]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의 남동생.
[90]
막시밀리안의 아버지.
[91]
막시밀리안의 동생.
[92]
루마니아의 사례를 보면 중간에 계보가 단절되었을 때 본가 수장의 차남이 그 계보를 계승한다. 그러나 카롤 빅터 사망 당시 가문의 수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장남인 알렉산데르는 2000년 비트-노이비트 공작의 계승을 포기하고 현 가문의 수장인 차남 막시밀리안에게 작위를 넘겼기 때문에 둘은 동군연합이 이뤄진다.
[93]
레카 2세가 아직 남계 자녀가 없는 관계로, 굳이 찾으려면 할아버지
조구 1세의 형제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94]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막내아들.
[마리아]
러시아 여대공
[앤드류]
황태자 전하, (러시아) 공작
[카를]
귀천상혼으로 라이닝겐 공위 요구 포기
[98]
키릴 블라디미로비치의 아들, 마리아 여대공의 아버지.
[99]
카를 에미히의 아버지. 어머니가
알렉산드르 2세의 증손녀이다.
[100]
카를 에미히의 아들.
[101]
참고로
조지아는 지리적으로는 종종
아시아로 간주되기도 하나, 이 문서에서는
유럽으로 간주하기로 한다.
[102]
다비드의 아버지
[103]
누그자르의 아버지
[104]
다비드 바그라티오니가 누그자르 바그라티오니의 딸인 안나와 결혼해서 얻은 아들이다.
[105]
현재는 이혼.
[106]
꽤나 무시무시하게 생긴 문장인데,
변발을 튼 채로
잘려 있는
튀르키예인의 목에서
까마귀가
눈을 파먹는 그림이 문장 오른쪽 아래에 그려져 있다(...).
[107]
그래서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조상들은 대부분 오파바 일대에 묻혀있다.
[108]
아이모네 움베르토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루이지 아메데오 엘레나 마리아 피오렌초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109]
아오스타 공작 아이모네의 아들.
[110]
토미슬라브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실권자였던
안테 파벨리치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완전한 1인 독재자가 되어 '수령' 칭호를 얻었다. 그래봤자 2년 후에 크로아티아 독립국 자체가 무너졌지만...
[111]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이 공식적으로 조상 대의 크로아티아 독립국 국왕 칭호를 부정한 적은 없다. 그러나 토미슬라브 2세가 왕 행세를 하겠다고 크로아티아로 건너간 적도 없다.
[두아르트]
브라간사 공작
[펠리페]
스페인 국왕
[114]
이 법령은 1834년에 제정되었지만 공화정 전환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공화정 전환 후에는
마리아 2세와
페르난두 2세의 후손인
브라간사
사셰코부르구고다 왕가 구성원도 별도의 법령으로 입국이 금지되었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이쪽 계통이 단절되어 해당 법률은 그대로 사문화되었고, 남은 포르투갈 구왕족들의 입국 금지는 포르투갈 입국은 왕정 시기 제정된 미겔 1세의 후손에 대한 입국 금지 법령을 근거로 하였다.
[115]
미하엘의 딸.
살리카법 때문에 정식 수장은 되지 못한다.
[116]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의 현 수장,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가 단절되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에서 명목상의 대공위를 계승하게 된다.
[117]
미하엘의 딸.
살리카법 때문에 정식 수장은 되지 못한다.
[118]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의 현 수장,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가 단절되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에서 명목상의 대공위를 계승하게 된다.
[마리아]
러시아 여대공
[앤드류]
황태자 전하, (러시아) 공작
[카를]
귀천상혼으로 라이닝겐 후작위 요구 포기
[122]
마리아 여대공의 아버지.
[123]
카를 에미히의 아버지. 어머니가
알렉산드르 2세의 증손녀이다.
[124]
앤드류 안드레예비치의 아들.
[125]
제8대 라이닝겐 후작, 카를 에미히의 동생.
[126]
루스 차르국이 러시아 제국으로 개편됨에 따라 러시아에서 차르는 황제를 뜻하는 단어에서 국왕을 뜻하는 단어로 격하되었다. 그 영향인지 훗날 불가리아가 독립하여
불가리아 왕국이 되었을 때 불가리아 군주가 차르 칭호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에서 차르는 국왕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반면
세르보크로아트어권에서 차르는 여전히 황제를 뜻하는 단어다.
[127]
예외적으로
카를 알브레히트 폰 합스부르크는
폴란드를 자신의 모국으로 여기고 폴란드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폴란드인의 존경을 받기는 했지만 카를 알브레히트가 생전에 폴란드 내의 그 어떤 작위도 자칭한 적이 없었던지라, 그의 후손들은
크라쿠프 대공국의 공위 요구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128]
현재 스웨덴 국토인 남부
스코네와 북부
옘틀란드가 근세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 땅이었기에 오히려 식민지 취급을 받았다.
[129]
핀란드 전체가 아닌 오늘날의
남서수오미 일대. 앞서 말했듯 본래 스웨덴은 핀란드를 자신들의 본토로 여겼기 때문에 동쪽 땅이라는 뜻의 외스테르보텐(Österland)이라 불렀다.
[마리아]
러시아 여대공
[앤드류]
황태자 전하, (러시아) 공작
[카를]
귀천상혼으로 라이닝겐 공위 요구 포기
[133]
키릴 블라디미로비치의 아들, 마리아 여대공의 아버지.
[134]
카를 에미히의 아버지. 어머니가
알렉산드르 2세의 증손녀이다.
[135]
카를 에미히의 아들.
[136]
동아시아의 비슷한 케이스로는
북송의 망명 왕조인
남송,
원나라의 망명 왕조인
북원,
명나라의 망명 왕조인
남명,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지만 일단 명목상
청나라의 망명 왕조를 칭했던
만주국이 있다. 해당 망명 왕조들 모두 망명의 원인을 제공한 세력(남송은 금나라, 북원은 명나라, 남명은 청나라, 만주국은
중화민국)과 지속적으로 대립했으며, 금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남송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그러한 대립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도
대만으로 망명한 중화민국 정부와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정부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티베트를 점령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지속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137]
이는 위에 있는 폴란드 차르 문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혁명을 피해
러시아령 폴란드로 망명하여 폴란드 차르위를 유지했다면 러시아의 공산정권은 러시아령 폴란드를 침공했을 것이며, 이 경우 러시아령 폴란드는 자본주의 국가인
폴란드 제2공화국이 아니라 러시아 공산정권의 괴뢰국이 들어서거나 아예 러시아 공산정권의 직할령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138]
하인리히 도나투스 필리프 움베르토.
[139]
하인리히 도나투스의 아버지.
[140]
하인리히 도나투스의 장남. 할아버지와 동명이인이다.
[141]
임시로 핀란드 국왕 프레데리크 카를레 1세라는 칭호를 받았다.
핀란드 왕국 문서도 참조.
[142]
마지막 왕
카로이 4세가 헝가리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호르티 미클로시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