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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09:45:14

오르도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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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르도뉴 2세.jpg
Ordoño II de León
가문 아스투리아스 왕조
생몰년도 876년 ~ 924년 1월 18일
출생지 아스투리아스 왕국 오비에도
사망지 레온 왕국 사모라
재위
기간
갈리시아 왕국 국왕 910년 - 924년
레온 왕국 국왕 914년 - 924년
아버지 알폰수 3세
어머니 팜플로나의 히메나
형제 가르시아 1세, 프루엘라 2세, 곤잘로, 라미루
배우자 엘비라 메넨데스, 아라곤타 곤살베스, 안차 사노이츠
자녀 산추 오르도녜스, 알폰수 4세, 라미루 2세,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히메나 오르도녜스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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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리시아 왕국 초대 국왕, 레온 왕국 2대 국왕.

2. 생애

876년경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수도 오비에도에서 아스투리아스 왕국 13대 국왕 알폰수 3세와 팜플로나의 히메나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가르시아 1세, 프루엘라 2세, 곤잘로, 라미루가 있었다. 일찍이 갈리시아의 총독으로 부임했으며, 910년 이전에 무슬림들에 대한 원정을 감행해 세비야까지 진군하면서 각지를 파괴하고 약탈한 뒤 귀환했다.

909년 형 가르시아 1세의 정변에 어머니 히메나, 동생 프루엘라 2세와 함께 가담하여 아버지를 산 살바도르 데 발데디오스 인근의 볼리데스 마을에 유폐시킨 뒤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 개로 나누었다. 형 가르시아 1세는 레온 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그는 갈리시아 국왕이 되었고, 동생 프루엘라 2세는 아스투리아스 국왕이 되었다. 익명의 아랍 역사가가 저술한 알 나시르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913년 8월에 에보라로 쳐들어가 하루 만에 도시를 공략하고 총독 마르완 아브드 알 말리크와 수비대를 포함한 700여 명을 살해하고 4,000명의 주민을 갈리시아에 강제로 끌고 갔다고 한다.

914년 형제 가르시아 1세가 사모라 시에서 사망했다. 가르시아 1세는 생전에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그는 가장 가까운 형제로서 레온 국왕을 겸임했다. 916년 여름 레온의 왕으로서 군사 원정을 시작하여 마크나사트 알 아스남(Miknasat al Asnam, 현재 메리다)를 위협한 뒤 라 쿨레브라 또는 칼라트 알 하나시(Kalat al-Hanash)를 정복했다. 이후 주변의 총독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챙기고 레온 왕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원정이 성공한 것을 긴며해 레온 시에 도착한 직후 산타 마리아 데 레글라 데 레온 대성당을 건립해 기존의 레온 대성당을 대체하게 했다. 916년 여름 무슬림에 대항하는 새로운 원정대를 이끌고 메리다 시 외곽을 포위 공격했다. 코르도바에서 파견된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메리다를 구하기 위해 접근했지만, 오르도뉴 2세는 이를 격파하고 무슬림 사령관을 사로잡아 레온으로 끌고 갔다.

917년, 후우마이야 왕조 에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계속되는 기독교 세력의 공세로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팅기타니아와 모리타니아 일대를 포함한 전 지역에서 대군을 소집한 뒤 그해 8월 2일 훌리트 압둘하바트에게 군대를 맡겼다. 압둘하바트는 코르도바를 떠나 두에로 강둑으로 진군하면서 경로에 있는 기독교인의 땅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무슬림군이 산 에스테반 데 고르메스 마을 인근의 카스트로모로스에 숙영지를 세우고 쉬고 있을 때, 오르도뉴 2세가 이끄는 레온군이 갑자기 나타나 무슬림 진영을 급습했다. 무슬림군은 이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고[1] 코르도바로 패주했다. 오르도뉴 2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한 압둘하바트의 유해를 확보한 뒤 산 에스테반 데 고르메즈 성벽에 매달게 했다.

918년 봄, 오르도뉴 2세는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안초 1세와 연합하여 알안달루스의 북동부 행정구역인 알 타흐르 알 아일라(الثغر الأعلى, 상부 고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나헤라 공략에 실패했지만, 바누 카시 일족에 영역에 속한 칼라호라, 아르네도, 비게라를 공략하고 발티에리 주변의 영지와 모스크를 파괴했다. 이에 분노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그해 7월 8일 시종 바드르 이븐 아흐마드(Badr ibn Ahmad)에게 기독교 세력을 응징하라고 명령했다. 무슬림군은 무토니야로 진군한 뒤 918년 8월 145일과 16일 두 번의 전투에서 나바라-레온 연합군을 격파하여 많은 전리품을 챙긴 뒤 코르도바로 돌아와 무슬림들의 환호를 받았다.

919년 10월, 오르도뉴 2세는 군대를 동원해 국경으로 이동해 이듬해의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즉시 친척 이스하크 무함마드 알 마르와니에게 군대를 맡겨 북부 국경을 수비하게 하자, 오르도뉴 2세는 적이 대비하는 상황에서 공세를 취해봤자 승산이 적다고 판단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 후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지하드를 선포하고 920년 6월 마르와니에게 대군을 맡겨 원정을 개시하게 했다. 마르와니가 이끄는 원정군은 톨레도, 과달라하라를 거쳐 메디나셀리로 진군했다. 이후 7월 8일 오스마와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즈를 탈환했으며, 연이어 부르고스, 클루니아, 투델라, 칼라호라를 공략했다.

무슬림군이 기세를 이어가 팜플로나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로 진격하자, 오르도뉴 2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안초 1세와 합세했다. 양측은 비구에라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를 치렀다. 그 결과 승리를 거둔 무슬림군은 팜플로나 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발데준케라 계곡에 자리잡았다. 920년 7월 26일, 무슬림군은 발데준케라 계곡에 침입한 레온-나바라 연합군을 다시 격파하고 투이와 살라망카의 주교인 헤르메길도와 두이실도를 체포했다. 기독교군 생존자들은 무에즈와 비구에라 요새로 피신했지만 두 곳 모두 얼마 안가 함락되었고,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생포된 기독교 장병들을 모조리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무슬림군은 코르도바로 철수하기 전 3주 동안 나바라 왕국의 평야 지대를 황폐화했다. 오르도뉴 2세는 이 뼈아픈 패전의 책임을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카스티야 백작 누뇨 페르난데스, 페르난도 안수레즈, 무니오 고메즈 등에게 돌리고 그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풀어줬다.

921년 봄, 오르도뉴 2세는 재차 군대를 소집한 뒤 과달라하라의 신틸리아로 진격해 그 일대를 황폐화했다. 이후 사르말론, 엘리프, 팔마세스 데 자드라케, 카스테혼 데 헤나레스 및 마그난자 성을 잇따라 공략한 뒤,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반격하기 전에 두에로 강을 건너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오르도뉴 2세는 921년 8월 1일 사모라에 도착했을 때 아내 엘비라가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고, 922년 곤살로 베토테스 백작의 딸 아라곤타 곤베레스와 재혼했다. 923년 여름 안초 1세의 요청에 따라 다시 군대를 일으켜 안초 1세와 가세했다. 안초 1세가 비게라를 공략하는 동안 그는 나헤라를 공략했고, 바누 카시 가문의 일원인 무함마드 아브드 압둘라 이븐 루브 및 여러 무슬림 귀족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레온 왕국으로 귀환한 그는 아라곤타 곤살베스와의 결혼을 무효화한 뒤 팜플로나 국왕 안초 1세의 딸 안초 사노이츠와 세번째로 결혼했으나 몇 개월 후인 924년 1월 18일에 사모라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일전에 그가 건립한 산타 마리아 데 레글라 데 레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형제 프루엘라 2세가 그의 자식들을 제치고 레온과 갈리시아의 왕위를 겸임했지만 1년만에 나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오르도뉴 2세의 아들들과 프루엘라 2세의 아들들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3. 가족 관계



[1] 알 나시르 연대기에 따르면, 두에로 강둑에서 아티엔자와 파라쿨레오스 성에 이르는 평원 전체에 무슬림들의 시신이 쌓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