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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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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7세
Alfonso VII
파일:220px-Alfonso_VII_of_Castile,_13th_c.jpg
출생 1105년 3월 1일
칼다스 데 레이스
사망 1157년 8월 21일 (52세)
시에라 모레나
재위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의 왕
1126년 ~ 1157년 8월 21일
갈리시아 왕국의 왕
1111년 9월 17일 ~ 1157년 8월 21일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1126년[1] ~ 1157년 8월 21일
배우자 바르셀로나의 베렝겔라 (1128년 결혼 / 1149년 사망)
폴란드의 리체차 (1152년 결혼)
자녀 산초 3세, 페르난두 2세, 우라카 라 아스투리아나
아버지 부르고뉴의 레이몽
어머니 우라카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의 왕. 또한 외할아버지 알폰소 6세, 어머니 우라카를 이어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칭했다. 갈리시아 왕국 왕위만 어머니의 생전에 일찍 물려받았다.

2. 생애

1105년 3월 1일 갈리시아의 중심지인 칼다스 데 레이스에서 부르고뉴 출신인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레온-카스티야-갈리시아 왕국의 군주 알폰소 6세의 딸인 우라카의 아들로 태어났고, 이름은 '알폰소 라이문데스'였다. 누나로 산차 라이문데스가 있었다. 당시 알폰소 6세는 정부 중 한 명인 자이다가 낳은 유일한 아들인 산초 알폰세스를 합법적인 자식으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자이다와 그녀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산초 알폰세스가 성년에 가까우니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라카와 부르고뉴 측 인사들은 알폰소 6세의 합법적인 자식은 오로지 우라카 뿐이며 그녀의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야말로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폰소 6세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한 끝에 1107년 5월 레온에서 열린 왕실 회의에서 15살이 된 산초 알폰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해 9월 레이몽이 사망한 후, 알폰소 6세는 딸 우라카를 갈리시아의 단독 영주로 삼고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갈리시아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리하여 후계 구도가 정해지는 듯했지만,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산초 알폰세스가 전사해버리면서 일이 어그러졌다.

알폰소 6세는 남쪽 국경으로 가서 무슬림의 추가 공세에 대한 방비를 수행한 뒤 톨레도로 귀환한 후 귀족들을 소집한 뒤 우라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우라카를 재혼시킬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여러 후보가 우라카와 결혼하러 나섰는데,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라라 가문의 우두머리이자 알폰소 6세의 측근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알폰소 6세는 신하였던 자가 자기 딸을 밀어내고 왕권을 행사할 것을 우려했고, 레온 귀족들과 카스티야 귀족 중 한 명을 택하면 다른 쪽이 반발할까 걱정했다.

알폰소 6세는 고심 끝에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를 딸의 결혼 상대로 낙점했다. 알폰소 1세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우라카와 같은 신분이고, 군사적 역량이 출중하고 용맹해서 무슬림들의 침략으로부터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을 거뜬히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우라카가 첫번째 남편 레이몽과 결혼한 뒤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때 함께 했던 부르고뉴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이 결혼으로 인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매사에 엄격하다는 평을 받던 아라곤 군주를 섬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부르고뉴 출신 성직자들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팜플로나 왕국의 선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니 근친상간이므로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청원했다. 여기에 지난날 우라카에게 구혼했지만 알폰소 6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우라카가 알폰소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반대가 심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폰소 6세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알폰소 1세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결국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레온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혼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폰소는 우라카에게 상당한 땅을 양도하며, 파문이나 친족 관계로 인해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양자는 상대방의 영토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알폰소가 죽으면 우라카가 알폰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고 우라카가 먼저 죽으면 역시 자식들이 그녀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우라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우라카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두 사람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레사 데 레온 엔히크 드 보르고냐 부부는 자신들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109년 알폰소 6세가 사망한 후, 우라카는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으로 등극했고 남편 알폰소 1세와 공동으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알폰소 1세를 여전히 자신들의 통치자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 귀족들이 많았고,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와 알폰소 라이문데스의 가정교사를 맡던 트라바 백작이 귀족들을 선동해 알폰소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군대를 이끌고 레온으로 진군해 몬테로소 성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고 주동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우라카와 알폰소 1세간의 분쟁이 갈수록 고조되면서 결혼 동맹은 점점 위태로워졌다. 그러던 1110년 여름 두 사람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니 인정하기 어렵다는 교황청의 메시지가 도착하자,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을 비롯한 반 알폰소 세력은 우라카의 친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으로 받들고 우라카와 알폰소의 결혼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대응해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고, 엔히크와 테레사 부부는 이 때를 틈타 독립 왕국을 세울 야심을 품고 내전에 뛰어들어 알폰소와 우라카 양자를 오가며 이득을 챙겼다. 그 도중인 1111년 9월 17일,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우라카로부터 갈리시아 왕위만 먼저 물려받았다.

한편, 우라카의 지지자인 페드로 프루엘라스 데 트라바 백작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가 조직한 군대가 우라카의 어린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와 함께 레온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폰소 1세가 공략했던 루고를 탈환한 뒤 수비대를 배치한 후 레온으로 계속 진군했다. 알폰소 1세는 이 소식을 듣자 군대를 돌려 비아당고스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페드로 프루엘라스는 체포되었고, 디에고 헬미레스는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데리고 포르티 카스텔로 오르질리오네(forti Castello Orzilione)로 도주해 그곳에 숨어있던 우라카와 합류했다.

이후 수년간 알폰소 1세와 우라카, 엔히크-테레사 부부간의 내전이 이어지다가 1113년부터 무슬림군이 톨레도를 위협하자 무슬림의 침략에 맞서 단합해야 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1114년 팔렌시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했고,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으로 군림하되 레온과 카스티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바스크, 라 리오하, 부르고스, 소리아, 세고비아, 과달라하라, 및 툴레도 등 자신이 일전에 점령했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와 결별한 후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라카 역시 사망할 때까지 전히스파니아의 여제를 자처했다.

1116년, 우라카는 갈리시아의 왕으로 세워둔 아들 알폰소에게 두에로 강 남쪽 땅과 톨레도 일대의 통치권도 양도했다. 그는 이때부터 카스티야를 여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탈취하려 드는 알폰소 1세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117년 11월, 젊은 알폰소는 알폰소 1세가 무슬림과 전쟁을 벌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아라곤군을 몰아내고 톨레도를 탈환했다. 그는 모친 우라카의 생전에 1117년 말부터 황제 칭호를 여러 차례 사용했다.

1120년 7월, 우라카는 디에고 헬미레스의 권세가 갈수록 커져 정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 거슬렸고, 장차 아들 알폰소를 등에 업고 자신을 정치에서 배제하려 들 거라고 의심한 끝에 아리아스 페레스를 통해 헬미레스를 카스트렐로에서 체포하여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권신이긴 했지만 그녀를 지금껏 따랐던 주교를 하루아침에 가둬버린 일은 심각한 후폭풍을 야기했다. 헬미레스의 추종자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여왕을 압박했고, 어머니가 자신을 해칠 지도 모른다고 여긴 알폰소는 산티아고 인근에 머물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와 합세했다.

이로 인해 곤경에 처한 우라카는 얼마 후에 헬미레스를 석방했지만, 그로부터 빼앗은 영지와 성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헬미레스는 테레사와 그녀의 연인이 된 트레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의 편에 섰다. 그해 가을에는 주교를 체포하고 주교의 영지를 몰수했다는 소식에 진노한 알폰소 7세의 삼촌인 현직 교황 갈리스토 2세가 우라카에게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121년 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행진한 뒤 헬미레스 주교와 프루엘라스 백작과 면담한 뒤 그들의 직위를 돌려주며 크리스마스 이전에 주교의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내전은 겨우 수습되었지만, 1121년 8월 사하군에서 개최된 의회에서 헬미레스의 지지자들과 여왕의 반대자들이 우라카를 몰아내고 알폰소를 새 왕으로 옹립하려 시도하는 등, 사건의 여파는 이어졌다.

한편, 테레사는 우라카가 곤경에 처한 틈을 타 1121년 미뇨 강변 영토를 공략했다. 이에 우라카는 아들 알폰소와 함께 갈리시아로 진군했고, 미뉴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테레사의 군대를 격파한 뒤 테레사를 란호소 성에 가둬놓고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1121년 여름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두에로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와 알폰소 7세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124년 5월 25일, 알폰소 라이문데스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헬미레즈 주교의 주도하에 기사에 선임되었다. 1126년 3월 8일 우라카가 리오 카리온 강변 살다냐에서 병사했을 때, 그는 인근의 사하군에 있었다. 그는 다음날 레온으로 달려가 귀족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아낸 뒤 1126년 3월 10일 레온 대성당에서 레온 국왕 알폰소 7세로 등극했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알폰소 7세가 자신이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사이 카스티야 전역을 석권해버리자 현실을 받아들여 1128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경계를 확정지은 타마라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알폰소 7세는 우라카 치세 말년에 갈리시아를 침략하여 자기 영역으로 삼은 이모 테레사를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포르투갈 백국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파괴한 뒤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은 뒤 테레사가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게 한 후 레온으로 돌아가 1128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의 딸 베렝겔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1128년 6월 24일 상 마메데 전투에서 테레사의 아들인 아폰수 엔히크스가 알폰소 7세에게 굴복했던 어머니 테레사와 페드로 페르난데스 등 레온-카스티야 왕국군 장성들을 물리치면서, 알폰소 7세가 복속시켰던 포르투갈 백국이 또다시 독립했다. 아폰수 엔히크스는 1129년에 자신을 포르투갈 프린스라 선언하며 알폰소 7세에 대항했고, 1139년에는 아예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

1130년 바르셀로나 백작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우려해 베렝겔라와의 결혼에 반대한 레온, 살라망카, 오비에도 주교들을 체포했다. 이에 귀족들은 대거 반발했고, 라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이었던 페드로 곤살레스는 우라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드로 페레스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그들을 포섭해 반기를 들었다. 반란군은 한때 팔렌시아, 아스투리아스, 코얀사 등지에서 기세를 드높였지만, 오소리오 마르티네즈가 이끄는 정부군에게 패배했다. 알폰소 7세는 그해 6월에 팔렌시아를 공략하여 페드로 곤살레스를 축출하고 나머지 반란자들과 화해했다.

1134년 아라곤과 팜플로나 국왕 알폰소 1세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팜플로나 대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며 아라곤 왕국에도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모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왕을 독자적으로 세웠다. 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국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1135년 5월 26일 레온 대성당에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 행사에서 처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고, 팜플로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톨로사 백작 알폰소 호르다네스, 가스코뉴 및 프랑스 남부의 여러 영주들,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6세, 루에다 데 하온의 영주이자 사라고사의 마지막 타이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아들 아흐메드 알 무스탄시르 사이프 알 다울라(자파둘라)도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라곤 국왕 라미로 2세와 포르투갈 프린스 아폰수 1세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듯 아라곤 왕국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그의 처남인 라몬 베렝게르 4세가 라미로 2세의 딸 페트로닐라와 결혼한 뒤 장인이 수도원에 은퇴한 뒤 아라곤 왕국의 통치를 주관하게 되면서 양국의 사이가 극적으로 호전되었다. 반면 포르투갈 왕국과의 전쟁은 이어졌다. 아폰수는 집권 이래로 포르투갈의 '프린스'를 칭하면서 알폰소 7세의 인정을 받고자 사절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자 않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137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시아로 진격해 어머니의 옛 연인이었던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갈리시아 귀족들을 상대로 체르네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뒤 투이 등 일부 요새를 공략했다.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알폰소 7세는 어쩔 수 없이 투이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아폰수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알폰소 7세의 충실한 친구가 될 것을 맹세했으며, 이번 전쟁에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고, 무슬림 및 기독교 통치자와의 전쟁을 치르는 황제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알폰소 7세는 그를 포르투갈 백작으로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39년,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로 쳐들어왔다. 아폰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이끌고 그들에 맞섰고, 그해 7월 25일 오우리케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군대와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초대 국왕에 선임되었다. 레온 왕국의 알폰소 7세가 이 소식에 격분해 아폰수를 참칭자라고 비난하자, 아폰수는 투이 협약을 깨고 갈리시아를 침공해 미뉴 강을 건너 발데베스 계곡의 여러 성채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7세는 카스티야 백작들에게 나바라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방어하게 한 뒤 1140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출진해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아폰수는 즉시 역습을 가하여 적군 선봉장 라미루 프로일라스 백작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뒤 발데베스 계곡에서 알폰소 7세와 본대와 대치했다. <황제 알폰소의 연대기>에 따르면, 양자는 펜하 다 레이하 성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진영이 좀더 높고 거친 지형에 자리잡았다. 이후 전투가 쉽게 결판나지 않고 양측의 여러 기사들이 생포되자, 포르투갈의 늙은 귀족들이 "기독교인끼리 무익한 전쟁을 이어간다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를 페허로 만들 것이니 이쯤에서 황제에게서 빼앗은 성들을 돌려주고 화친을 맺자"고 제안했다. 아폰수는 그들의 진언에 따라 알폰소 7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알폰소 7세 역시 희생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1143년, 알폰소 7세와 아폰수는 사모라 대성당에서 교황 대표 귀도 데 비코 추기경이 치켜보는 가운데 조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7세는 아폰수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양자는 그동안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다.

이후 레콩키스타에 전념하기로 한 그는 1138년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1139년 오레자 요새를 공략했고 1142년에는 코리아를 공략했으며, 1144년에는 하옌과 코르도바를 점령했다. 여기에 알 안달루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 근처에서 발흥한 무와히드 왕조가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면서, 무라비트 왕조는 급격히 몰락했다.

1145년 3월, 사라고사의 왕자 자파둘라는 알 안달루스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알폰소 7세의 지원을 받아 그라나다를 공략했다. 그러다가 무라비트 왕조의 알 안달루스 총독 이븐 가니야의 반격으로 그라나다를 빼앗기자 알폰소 7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알폰소 7세는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자파둘라는 카스티야군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과 전쟁을 벌이다 1146년 2월 5일 친칠라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알폰소 7세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다가 이븐 가니야로부터 우베다와 바에자를 할양받고 충성 서약을 받은 뒤 철수했다.

카스티야 왕국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메르톨라의 이븐 알 카시는 무와히드 왕조에 복속하며 원군을 요청했다. 무와히드 왕조의 지도자 아브드 알 무민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146년 5월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무와히드군이 접근해오자, 이븐 가니야는 곧바로 무와히드 왕조에 항복했다. 이후 무와히드 왕조와 대치한 알폰소 7세는 1147년 알메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그는 이를 위해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국의 실권자 라몬 베렝게르 4세, 제노바 공화국 함대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에 응한 프랑스 십자군의 지원을 받았다. 그 결과 그해 10월 알메리아 공략에 성공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처음으로 지중해 해상에 진출할 수 있었다.

1150년 11월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가 사망하자, 알폰소 7세는 1151년 1월 27일 투딜렌에서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만나 나바라 왕국의 영역을 분할하기로 했다. 안초 6세는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투딜렌 협약을 따르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여동생 블랑카를 알폰소 7세의 장남인 산초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소 7세의 호의를 얻어내려 애썼다. 1153년 중반에는 소리아에서 알폰소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봉신 협약을 갱신했으며, 1157년 6월 2일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현재 팔렌시아)에서 알폰소 7세의 딸 산차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7세는 1157년 중순에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새로운 협약을 맺었다. 안초 6세에겐 다행히도, 알폰소 7세가 레리다 협약을 이행하기 전인 1157년 8월 2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레리다 협약 집행이 미뤄졌다.

1157년, 무와히드 왕조가 알메리아를 습격해 순식간에 탈환했다. 알폰소 7세는 알메리아를 재정복하기 위해 원정에 착수했으나 실패하고 귀환하던 중 8월 21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톨레도 시로 옮겨져 그곳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두 아들 산초 3세 페르난두 2세가 각각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의 국왕을 칭하면서,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분열되었다.

3. 가족 관계



[1] 황제 대관식은 1135년 5월 26일에 레온 대성당에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