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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8:26:41

알리폰소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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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onso II de Aragón
가문 바르셀로나 왕조
생몰년도 1157년 3월 ~ 1196년 4월 25일
출생지 아라곤 왕국 우에스카
사망지 프로방스 백국 페르피냥
재위
기간
아라곤 왕국 국왕 1164년 - 1196년
아버지 라몬 베렝게르 4세
어머니 페트로닐라
형제 페드로, 라몬 베렝게르 3세, 둘세, 산초
배우자 카스티야의 산차
자녀 페드로 2세, 콘스탄사, 알폰소 2세, 레오노라, 라몬 베렝게르, 산차, 페르디난도, 둘시아
종교 기독교 (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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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7대 국왕.

왕호는 스페인어로는 '알폰소 2세(Alfonso II)', 아라곤어로는 '알리폰소 2세(Alifonso II)'이다.

2. 생애

1157년 3월경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국의 실권자인 라몬 베렝게르 4세와 아라곤 여왕 페트로닐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페드로, 라몬 베렝게르 3세, 둘세, 산초가 있었다. 1164년 형 페드로가 요절한 뒤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1164년 6월 18일 어머니가 퇴위하면서 아라곤 왕국과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상속받고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7살밖에 안 됐기에, 페트로닐라가 1173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섭정을 맡았다.

1166년 프로방스 백작이자 라몬 베렝게르 4세의 조카였던 라몬 베렝게르 3세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니스를 포위하던 중 사망하고 딸 둘세만 남았다. 이에 페트로닐라는 프로방스 백작령을 라몬 베렝게르 3세의 사촌인 알폰소 엘 카스토에게 넘겼다. 툴루즈의 레몽 5세가 이에 반발하여 지지자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자, 1167년 몽펠리에, 프로방스 주교관, 보 가문의 지원을 받은 아라곤군이 프로방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레몽 5세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시키지 못했다.

한편, 라몬 베렝게르 4세는 1157년 레온-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레리다 협약을 이행하기 전인 1157년 8월 2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뒤를 이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산초 3세 역시 1158년 8월 3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갓난아기였던 알폰소 8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라몬 베렝게르 4세 역시 1162년에 사망했기에 레리다 협약은 제때에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페트로닐라는 나바라 왕국을 적대하는 대신 화해하기로 하고, 1168년 안초 6세와 13년간의 휴전을 맺었다. 이때 앞으로 무슬림으로부터 정복한 땅을 나바라 왕국과 분할하기로 했다.

1173년 10월 어머니가 사망한 후 친정을 시작한 알폰소 2세는 1174년 1월 18일 16세의 나이에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전 국왕 알폰소 7세의 딸이자 현 국왕 알폰소 8세의 고모인 산차와 결혼했다. 이후 무슬림에 대한 공세를 개시한 알폰소 2세는 발렌시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그곳의 타이파로부터 공물을 2배 더 받기로 합의하고 물러났다. 뒤이어 자티바와 무르시아를 공격하던 중 안초 6세가 아라곤 왕국 국경지대를 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대를 돌렸다.

1174년 7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함께 나바라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2세는 밀라그로 성을 공략하고 파괴했으며,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나바라군을 격파한 뒤 안초 6세가 있던 르귄 성을 포위 공격해 함락시켰다. 안초 6세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산골짜기로 도주했고, 양군은 나바라 각지를 파괴한 뒤 철수했다.

알폰소 2세는 1177년 카스티야 왕국의 쿠엥카 정복전에 협력했으며, 1179년 카솔라 협약에서 알폰소 8세로부터 아라곤 왕국이 무르시아를 공략하는 것을 허용하게 하는 대가로 발렌시아에 대한 주권 주장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한 뒤 무르시아로 진군해 그곳의 타이파로부터 그동안 자신에게 바치지 않은 공물들을 납부하라고 강요했다.

한편 1176년 프로방스 일대의 패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던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와 타라스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툴루즈 백작은 이 조약에서 3만 리브르의 은화를 받는 대가로 프로방스, 가발다, 카라데스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다. 이후 프로방스의 지배력 확대에 관심을 가진 그는 프로방스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항하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 구엘프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1181년, 프로방스 일대에 대한 아라곤 왕국의 입지는 위기에 처했다. 먼저 툴루즈 백작 레몽 5세가 이끄는 군대가 나르본을 침공했고, 프로방스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이에 맞서다 몽펠리에 인근에서 살해되었다. 알폰소 2세는 동생 산초를 프로방스 새 백작으로 임명했지만, 1185년 툴루즈, 제노바를 상대로 자신의 허락없이 비밀 협상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를 해임했다. 하지만 레몽 5세는 툴루즈에서 일어난 반란 토벌에 애를 먹으면서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못했고, 1189년 양자는 1176년에 맺었던 타라스코 협약과 동일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후 알폰소 2세는 프로방스, 밀하우, 가발다, 로에르가 등 피레네 산맥 북부의 영토를 공고히하는데 힘을 기울였으며, 부라케스 델 피에몬테, 몽펠리에, 라세즈, 푸아, 비고라, 님스, 베지에, 카르카소나, 그리고 베른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 무렵 라 리오하 공략에 성공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나바라를 분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협약을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했으며,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손잡고 아라곤 왕국을 도모하려 했다. 이에 아라곤 2세는 1190년 카스티야 왕국의 적국인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과 사신을 교환해 반 카스티야 동맹을 결성하려 했다.

1192년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잉글랜드 국왕 겸 아키텐 공작 리처드 1세는 알폰소 2세에 맞서 툴루즈 백작 라몬 5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알폰소 2세는 아들 알폰소를 레몽 5세의 이전 동맹이었던 포르칼퀴에의 기욤 6세의 딸인 가르센다 데 사르단과 결혼시키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하지만 양자간의 큰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고, 1195년 알폰소 2세와 레몽 5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레몽 6세 사이에 평화 협약이 다시 맺어지면서 갈등이 종식되었다.

1195년 7월 19일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왕국군이 야쿱 알 만수르가 지휘하는 무와히드 왕조군에게 참패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내 기독교 세력이 약화되자, 교황 첼레스티노 2세는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 왕국에 공동으로 힘을 합쳐 무슬림을 무찌르라고 권고했다. 그는 이에 따라 반 카스티야 동맹 결성을 미루고 알폰소 8세와 함께 무슬림에 대한 합동 공격을 계획했지만 실행되지는 못했다.

1196년 프로방스 지역의 페르피냥에서 세상을 떠났고 산타 마리아 대 포블렛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장남 페드로 2세가 아라곤 국왕이 되었다.

3. 가족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