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1세의 왕비에 대한 내용은 나바라의 베렝겔라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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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A0044><colcolor=#FFF> 카스티야 왕국 이브레아 왕조 제5대 국왕 베렝겔라 Berengue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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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상상화 | |
출생 |
1179년 또는
1180년 부르고스 |
사망 |
1246년
11월 8일 (향년 65~67세) 부르고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 |
재위 |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
1217년 6월 6일 ~ 1217년 8월 31일 | |
배우자 | 알폰수 9세 (1197년 결혼 / 1204년 무효화) |
자녀 | 레오노르, 콘스탄사, 페르난도 3세, 알폰소, 베렝겔라 |
아버지 | 알폰소 8세 |
어머니 | 잉글랜드의 엘리너 |
형제 | 우라카, 블랑카, 페르난도, 마팔다, 레오노르, 콘스탄사, 엔리케 1세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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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17년에 짧게 재위한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레온 왕 알폰소 9세의 계비(繼妃)를 지낸 적도 있다. 알폰소 8세 사후 혼란에 빠진 카스티야 왕국을 조기에 수습하고 아들 페르난도 3세가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이끈 공로로 '라 그랑데(la Grande: 위대한 자)'라는 별칭이 붙었다.2. 생애
1179년 또는 1180년 카스티야 왕국 부르고스에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딸 엘레오노르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알폰소 8세의 할머니인 바르셀로나의 베렝겔라[1]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형제로 우라카, 블랑카, 페르난도, 마팔다, 레오노르, 콘스탄사, 엔리케 1세가 있었다.118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다섯번째 아들인 슈바벤 공작 콘라트 2세와 약혼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카스티야 측이 지참금으로 42,000 마라베디(Maravedí)에 달하는 거액을 신성 로마 제국에 지불했다고 한다. 그 후 콘라트는 카스티야로 가서 카리온에서 알폰소 8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받고 알폰소 8세의 가신이 되었다. 결혼식은 베렝겔라가 15살이 되었을 때 거행될 예정이었다.
셀리겐슈타트에서 합의된 결혼 계약에 따르면, 베렝겔라는 카스티야 왕국을 물려받고 카스티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지 않을 것이었다. 알폰소 8세가 향후 사망할 경우, 콘라트는 베렝겔라의 보호자이자 후원자로서 카스티야의 정치에 관여할 수 있지만 왕이 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베리아 반도 내 이웃 국가들과 마찰이 심했던 알폰소 8세는 신성 로마 제국을 뒷배로 삼아서 왕국의 안정을 확보하길 기대했고, 프리드리히 1세는 이 결혼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가하는 카스티야 왕국이 아들 콘라트의 수중에 넘어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1189년 11월 29일 알폰소 8세가 장남 페르난도를 낳으면서 왕위 계승권이 베렝겔라에서 페르난도에게 넘어가자, 프리드리히 1세는 크게 실망해 약혼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고,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역시 아키텐 공국의 이웃 국가인 카스티야 왕국이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교황청에 약혼을 취소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콘라트는 두 번 다시 카스티야로 돌아가지 않다가 1196년 돌연 사망했다.[2]
1194년 4월 20일,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와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는 바야돌리드 지방의 토르데후모스에서 장기간 이어진 전쟁을 종식하기로 합의했다. 카스티야 국왕은 페르난두 2세 사후 레온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알바, 루나, 포르티야, 발데라스, 볼라뇨스 등지를 돌려주기로 했으며,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장녀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앞으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알폰수 9세는 1196년 왕비로 삼고 있던 포르투갈의 테레사를 포르투갈로 돌려보낸 뒤 1197년 12월 초 산타 마리아 데 바야돌리드 교회에서 베렝겔라와 결혼했다. 베렝겔라는 알폰수 9세와의 사이에서 페르난도 왕자를 포함한 다섯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폰수 9세와 베렝겔라의 결혼은 사촌지간끼리의 근친혼이니 교회법에 어긋난다며 당장 헤어지라고 요구했으며, 파문하겠다고 여러 차례 위협했다. 알폰수 9세는 이교도와의 항쟁을 위해 이웃 국가들끼리 단합하고자 단행한 것이니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교황은 끝내 거부했다. 다만 그들의 자녀들이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는 인정받았다. 결국 1204년 알폰수 9세는 베렝겔라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 후 베렝겔라는 레온 왕국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어 레온에 남은 페르난도를 제외한 다른 자녀들을 돌봤다.
1211년,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던 페르난도가 아버지 알폰소 8세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에 알폰소 8세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엔리케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214년 10월 5일, 알폰소 8세가 열병에 걸려 사망하고 엔리케 1세가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다. 당시 엔리케 1세는 10살에 불과했기에, 알폰소 8세는 죽기 전에 아내 엘레오노르에게 섭정을 맡겼다. 그러나 엘레오노르 마저 남편이 죽은 지 24일만에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장녀 베렝겔라에게 엔리케 1세의 섭정을 맡겼다.
하지만 베렝겔라의 섭정은 엔리케 1세의 가정교사를 맡은 알바로 누녜스 데 라라 백작의 방해를 받았고, 베렝겔라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의 압박에 못 이겨 엔리케 1세의 후견인 자리를 그에게 넘겼다. 알바로 누녜스는 레온 국왕 알폰수 9세의 딸 산차와 엔리케 1세의 결혼을 주선해,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을 통합시키고 베렝겔라의 아들 페르난도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려 했다.
그러던 1217년 6월 6일, 엔리케 1세는 팔렌시아의 에피스코팔 궁전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지붕 위에서 떨어진 타일에 머리를 직격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엔리케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부르고스와 두에냐스 사이에 위치한 타리에고 데 세라토 마을에 그 시신을 숨겼다. 그러나 베렝겔라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두에냐스 시를 점거하고 엔리케 1세의 유해를 확보한 뒤 팔렌시아와 부르고스의 주교들을 보내 유골을 관리하게 했다.
베렝겔라는 알폰수 9세가 엔리케 1세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 왕실의 혈통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 그녀는 일단 엔리케 1세가 죽었다는 것을 숨기고 알폰수 9세에게 아들 페르난도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올 때까지 임시로 카스티야 여왕을 맡았다. 알폰수 9세가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페르난도를 보내자, 베렝겔라는 곧바로 엔리케 1세의 사망을 대내외에 공개한 뒤 아들을 카스티야 국왕으로 옹립했다.
알폰수 9세는 베렝겔라가 자신을 속였다며 격분했고,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엔리케 1세의 전 섭정이었던 알바로 누녜스 데 라라와 손잡고 카스티야를 전격 침공해 우루에냐, 비야가르시아, 카스트로 몬테, 아로요를 점령했다. 그 후 베렝겔라로부터 협상을 요청받자, 그는 베렝겔라와 재혼하고 그녀가 카스티야 여왕이 되는 것을 용인하며, 그와 베렝겔라가 죽고 난 뒤 페르난도가 레온과 카스티야의 유일한 왕으로 군림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카스티야인들이 제안을 거부하자, 알폰수 9세는 무력으로 밀어붙이기로 하고 부르고스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조언에 따라 라구나 데 두에로, 토르케마다, 토르도마르를 거쳐 부르고스로 향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민중들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곳곳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병력이 계속 소모되자, 그는 부르고스를 공략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레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돌아가는 동안 팔렌시아를 통과하면서 기론과 메네세스 가문의 영지를 초토화했다. 한편 페르난도 3세는 아빌라와 세고비아, 라라, 팔렌시아 일대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곳의 병력을 차출해 1217년 8월 중순 부르고스에 입성해 민중의 환호를 받고 8월 31일에 부르고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간의 전쟁이 1년간 지속되다가 1218년 봄 강경파였던 알바로 누녜스가 사망하자 평화를 논의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베렝겔라는 전 남편 알폰수 9세와 아들 페르난도 3세 사이에 중재 역할을 수행해 두 사람이 화해하도록 힘썼다. 그 결과 1218년 8월 26일, 알폰수 9세와 페르난도 3세는 토로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아버지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고, 알폰수 9세는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고 다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로 부자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그 후 베렝겔라는 아들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이자 슈바벤 공작 필리프의 딸인 슈바벤의 베아트리스와 결혼하도록 1년간 주선한 끝에 성사시켰다. 결혼식은 1219년 11월 30일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결혼은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이 대공위시대를 맞이할 때 페르난도 3세와 그의 아들 알폰소 10세가 혼란에 빠진 제국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독일왕을 자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222년, 베렝겔라는 차남인 알폰소를 최근에 사망한 몰리나 백작 곤살로 페레즈 데 라라의 상속녀인 마팔다와 결혼시키고 라라 가문과의 갈등을 종식하기 위한 자프라 협정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1224년에는 자기 딸 베렝겔라를 예루살렘 국왕 장 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수 9세가 포르투갈의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산차를 장 1세와 결혼시키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그녀는 이를 통해 알폰수 9세가 산차의 레온 여왕 등극을 도모하는 것을 억제하려 했다.
1230년 9월 24일, 알폰수 9세가 빌라누에바 데 사리아에서 사망했다. 카스티야 왕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은 알폰수 9세에게 테레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산차와 둘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유했다. 알폰수 9세 역시 자신의 동의 없이 카스티야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베렝겔라와 감히 자신에게 대항한 페르난도 3세 모자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의 설득에 따랐다. 그리하여 알폰수 9세 사후 산차와 둘세가 레온과 갈리시아의 공동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성직자와 레온 시민들은 두 여왕을 인정하지 않고 페르난도 3세를 초청했다. 페르난도 3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토로에 입성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힘을 합쳐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을 제압했다. 이후 베렝겔라가 산차와 둘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협상한 끝에 1230년 12월 11일 베나벤테에서 연간 3만 메라베디(maravedí)에 달하는 거액의 연금과 토지를 받는 대가로 왕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에 이어 레온과 갈라시아의 국왕이 되었다.
1135년 슈바벤의 베아트리스 왕비가 사망했다. 당시 페르난도 3세는 7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베렝겔라는 아들이 여러 정부와 관계를 맺고 있어 왕의 미덕이 훼손되는 상황을 우려해 새 왕비를 들일 것을 강하게 권고해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아들의 재혼 상대를 몸소 물색한 끝에 퐁티외 백작 시몬의 딸이며 당시 퐁티외 여백작이었던 잔 드 퐁티외를 아들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베렝겔라는 이후에도 아들에게 많은 조언을 했고, 페르난도 3세는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국정을 운영했다. 페르난도 3세가 레콩키스타에 몰두하는 동안, 그녀는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을 대리 통치했다. 그녀의 통치술은 준수한 편이었기에, 페르난도 3세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내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편, 그녀는 종교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에 많은 재산을 기부했으며 모든 세금을 면제해줬다. 그리고 산 페드로 데 에슬론자 수도원에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레온 왕실의 전통을 이어갔다. 또한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그녀는 투이 주교 루카스에게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에 대한 연대기를 작성하게 해, 후대 국왕들이 통치할 때 이 연대기를 지침서로 삼게 했다.
1246년 11월 8일, 베렝겔라는 부르고스에서 사망했다. 사후 부르고스 인근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에가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그녀를 카스티야와 레온의 통합과 번영을 이끌어낸 고결한 여인으로 호평했다.
3. 가족 관계
- 알폰수 9세(1171 ~ 1230): 레온 왕국의 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