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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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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1세
Alfonso XI
파일:알폰소 11세.jpg
<colbgcolor=#AA0044> 19세기 상상화
출생 1311년 8월 13일
살라망카
사망 1350년 3월 26일 (38세)
지브롤터
재위 카스티야 왕국 레온 왕국의 왕
1312년 9월 7일 ~ 1350년 3월 26일
배우자 콘스탄사 마누엘 (1325년 결혼 / 1327년 결혼 무효)
포르투갈의 마리아 (1327년 결혼)
자녀 페르난도, 페드로, 페드로 알폰소( 사생아), 산초 알폰소(사생아), 엔리케 2세(사생아), 파드리케 알폰소(사생아), 페르난도 알폰소(사생아), 텔로 알폰소(사생아), 후안 알폰소(사생아), 후아나 알폰소(사생아), 산초 알폰소(사생아), 페드로 알폰소(사생아)
아버지 페르난도 4세
어머니 포르투갈의 콘스탄사
누이 레오노르, 콘스탄사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별칭은 "엘 후스티끼에로(el Justiciero: 복수하는 자)".

2. 생애

1311년 8월 13일 살라망카에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4세와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의 딸 콘스탄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두 누이로 레오노르, 콘스탄사가 있었다. 1312년 9월 7일, 나스르 왕조와의 전쟁에 착수한 아버지 페르난도 4세가 하옌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에 따라 그가 왕위에 올랐지만, 고작 1살밖에 안 된 갓난아기였기에 할머니 마리아 데 몰리나와 어머니 콘스탄사의 섭정을 받았다. 1313년 11월 18일 어머니 콘스탄사가 사망한 후 마리아가 단독으로 섭정했고, 페르난도 4세의 동생 페드로와 알폰소 10세의 아들 후안 왕자가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페드로와 후안 왕자는 최고 권력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고, 1318년에는 카스티야 왕국 내 바야돌리드와 레온 왕국 내 메디나 델 캄포에서 별도의 코르테스가 소집되어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서로를 비방했다. 마리아 왕비의 중재로 내전으로 확산되는 것은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왕국 내부의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었다. 두 사람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나스르 왕조에 대한 습격 원정을 몸소 지휘했다.

1319년 늦봄, 페드로와 후안은 합동으로 그라나다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기로 합의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이 원정을 축복했고, 교회는 십일조를 원정군에 보내기로 했다. 1319년 6월 코르도바에 집결한 원정군은 페드로의 지휘하에 국경을 넘었고, 후안이 별동대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여기에 산티아고 기사단, 칼라트라바 기사단, 알칸타라 기사단이 함께 했으며, 톨레도와 세비야 대주교도 동행했다. 원정군은 행군하는 동안 여러 마을을 습격해 많은 양의 약탈물을 수집했다. 그러다가 베가 데 그라나다에 도착해 인근 지역을 약탈했지만, 그라나다의 방비가 강고한 것을 보고 지금까지 확보한 전리품에 만족하고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1319년 6월 25일, 원정군은 귀환길에 올랐다. 이때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아불 왈리드 이스마일은 반격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아부 사이드 우트만 이븐 아비 알 울라[1]가 정예 아랍 기병대를 이끌고 출격해 후퇴하는 적군을 괴롭혔다. 카스티야 장병들이 약탈물을 지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자, 우트만은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위기에 빠진 후안은 선봉을 이끌던 페드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페드로는 후안이 이참에 큰 손실을 입기를 바랐기에 일부러 시간을 끌다가, 장군들의 거듭된 재촉에 못 이겨 후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접전을 치르던 중 말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했고, 병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게닐 강을 급하게 건너던 중 익사하거나 아군 장병들에게 짓밟혀 죽었다. 후위대 역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후안은 적을 피해 정처없이 달아나다가 뇌졸중 또는 열사병으로 쓰러져 죽었다. 이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의 손실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수년간 국경을 지킬 인력이 너무 부족해서 무슬림군이 마음껏 약탈을 자행할 수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실로 막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을 보좌하며 귀족들의 리더를 자처하던 두 사람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카스티야 왕국은 깊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1319년 8월 26일 안달루시아 도시 대표들은 페냐피엘에서 긴급 회의를 소집한 뒤 앞으로 닥칠 권력 공백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련의 예방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그들은 페드로 폰세 데 레온 델 비예호와 후안 폰세 데 카브레라 등 저명한 귀족들에게 국경 수비를 일임하기로 했고, 왕실 수입에 대한 사용을 통제하고 육지와 해상 경계를 강화하기로 했다. 여기에 각 도시의 '형제단'이 공동으로 어린 왕을 보좌하며, 형제단 중 누구도 단독으로 왕의 후견인을 수행하기를 열망하는 자를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페드로와 후안 왕자 사후, 페르난도 3세의 손자이며 알폰소 10세의 조카인 후안 마누엘과 페르난도 4세의 동생인 펠리페가 대두되었다. 그들은 교황청과 유럽 각지에 십자군을 요청하는 한편, 나스르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고자 노력했다. 카스티야 왕국엔 그나마 다행히도, 나스르를 몰아내고 타이파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스마일이 카스티야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반대 세력을 모조리 제압하여 입지를 굳히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기에 협상이 진전되었다. 1320년 6월 18일, 카스티야 왕국과 나스르 왕조는 8년간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을 이뤄내는 데 공헌한 후안 마누엘은 자신의 딸 콘스탄사 마누엘을 알폰소 1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위신을 드높였다.

그러나 페드로와 후안 왕자가 그랬듯이, 펠리페와 후안 마누엘은 곧 정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지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규합하여 최고 권력을 얻고자 했으며, 각자가 서명한 계약을 존중하지 않고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서로를 공격했다. 대귀족들은 중앙 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세금을 제대로 바치지 않고 자기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했다. 마리아 데 몰리나 왕비는 이런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1321년 7월 1일에 사망했고, 어린 왕은 궁궐 한 구석에 틀어박혀 지냈다.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이스마일은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1324년 휴전 협정을 깨고 침략을 감행해 1325년까지 바자, 오르체, 우에스카르, 갈레라, 마르토스 등을 공략했다.

1325년, 알폰소 11세는 아직 14세가 되지 않은 시점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친정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8월 바야돌리드의 코르테스에서 자신이 성년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왕으로서 선서했다. 그 후 왕실의 군대를 장악한 그는 통제에 따르지 않은 몇몇 귀족들을 잡아들여 처형해 왕의 권위를 강화하려 애썼다. 그러던 중 하로 가문의 수장이자 케야르 영주인 후안이 그를 이용해 카스티야 왕위를 꿰차려는 마음을 품은 아라곤 국왕 알폰소 4세의 회유를 받아들여 알폰소 4세의 딸 블랑슈와 결혼하려 하자, 알폰소 11세는 위기감을 느꼈다.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아라곤 왕국과 하로 가문이 손잡고 카스티야 왕위를 노릴 테고, 그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하로 가문의 수장을 대놓고 처형하는 건 무리라는 것을 잘 알았던 그는 책략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1326년 10월, 알폰소 11세는 토로에서 후안 데 하로와 만나 "내 누이와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나"라고 제안했다. 후안이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자, 그는 궁궐에서 개최될 연회에 초대할 테니 거기서 좀더 자세히 논의하자고 권유해 승낙을 얻어냈다. 후안이 별다른 의심 없이 그해 11월 1일 연회에 참석하자, 알바 누녜스 오소리오가 이끄는 왕실 근위대가 습격해 후안 데 하로와 두 명의 기사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사르미엔토, 로페 아즈나레스 데 페르모셀을 처단했다. 이후 알폰소 11세는 알바 누녜스 오소리오에게 후안 데 하로가 소유했던 모든 영지를 수여했다. 그는 이후에도 몇몇 귀족들을 상대로 암살을 감행했고, 어린 왕을 우습게 여기던 귀족들은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고 왕에게 복종했다.

그러나 후안 마누엘 만큼은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카스티야군이 베자 데 그라나다 전투에서 궤멸된 뒤 다들 무슬림군의 침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선전했고, 1326년 8월 29일 과달오르세 전투에서 우트만을 상대로 적병 3,000명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327년 알폰소 11세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딸 콘스탄사와의 결혼을 무효로 해버리자, 후안 마누엘은 이에 분노해 나스르 왕조와 손잡고 반기를 들었다가 교황청의 중재로 왕과 화해했다. 후안 마누엘은 이후에도 알폰소 11세와 여러 차례 마찰을 벌였고, 1332년에는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알폰소 11세는 그가 없이는 나스르 왕조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직위를 일시적으로 박탈하고 유폐시켰다가 나중에 레콩키스타를 단행했을 때 사면시키고 원정군에 동행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한편, 나스르 왕조는 내란에 휩싸였다. 베자 데 그라나다 전투의 영광을 얻어냈던 이스마일이 1325년 암살당한 뒤 10살의 아들 무함마드 4세가 새 타이파로 즉위했다. 어린 술탄을 두고 와지르 (재상) 무함마드 이븐 알-마흐루크와 장군 우스만 이븐 아불 알라는 국정 주도권을 두고 서로 내전을 벌였다. 우스만 이븐 아불 알라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말라가로 후퇴한 뒤 1327년 무함마드의 숙부인 무함마드 빈 파라즈를 대립 술탄 알-카임 비아므랄라로 선포하고 알폰소 1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무함마드 이븐 알 마흐루크는 마린 왕조의 술탄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에게 론다, 마르벨라, 알헤시라스 등의 할양을 대가로 원군을 청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엘비라 성채를 공략하는 등 이득을 챙겼다.

1328년 무함마드 4세와 우스만이 비밀 협정을 맺고 각각 재상 이븐 알-마흐루크의 살해와 대립 술탄 알-카임의 축출을 이행하면서 내전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나스르 왕조는 내전으로 인해 쇠락해졌고, 알폰소 11세는 레콩키스타를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1330년, 알폰소 11세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4세와 연합하고 그라나다를 함께 침공했다. 카스티야 군은 테바를 점령했고, 우스만은 카스티야군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한 뒤 얼마 후 사망했다. 무함마드 4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막대한 공물을 매년 바치겠으니 평화 협정을 맺어달라고 호소했고, 알폰소 11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1331년 카스티야군이 협정을 깨고 재침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무함마드 4세는 1332년 마린 왕조의 신임 술탄 아불 하산 알리에게 직접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1333년, 아불 하산 알리는 아들 아부 말리크 압둘와히드의 지휘 하에 5천 병력을 보내어 카스티야령 지브롤터를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11세가 지브롤터를 포위했지만 무함마드가 보급로를 차단하자 1333년 8월 휴전 협정을 맺고 철수했다. 이리하여 무함마드 4세는 위기를 벗어났지만, 얼마 후 마린 왕조와의 동맹을 반대한 신하들에게 피살되었다.

1334년 2월 나스르 왕조의 새 타이파 아불 핫자즈 유수프와 평화 협약을 맺고 한동안 내치에 전념한 알폰소 11세는 1340년 아불 핫자즈 유수프가 마린 왕조 술탄 아불 하산 알리와 손잡고 타리파를 포위하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이때 그로부터 원군을 요청받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는 "내 딸 마리아를 박대하고 정부와 놀아나는데 무슨 염치가 있어서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하느냐?"라고 비난했다.

사실 알폰소 11세는 준수한 통치력과 군사적 재능을 갖춘 군주였지만, 남편과 아버지로서는 좋게 평가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1327년 아폰수 4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해 페르난도(1332 ~ 1333)와 페드로(1334 ~ 1369)를 낳았지만, 정부로 삼은 레오노르 데 구즈만에게 흠뻑 빠져 사생아를 10명이나 낳았다. 급기야 마리아 왕비를 세비야의 산 클레멘테 수녀원에 보내버리고 페드로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고 제대로 된 교육도 시켜주지 않았다. 아폰수 4세는 알폰소 11세에게 레오노르와의 관계를 끊고 딸을 아껴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알폰소 11세는 아폰수 4세로부터 원군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했기에, 수녀원에 가 있던 마리아 왕비를 설득해 아버지에게 가서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그러면서 원군을 보내준다면 레오노르와 사생아들을 추방하고 마리아에게 왕비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폰수 4세는 이를 믿고 원군을 보내줬고, 카스티야-포르투갈 연합군은 1340년 10월 살라도 전투에서 나스르-마린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알폰소 11세는 적군을 물리친 후 앞서 맺었던 약속을 무시하고 레오노르를 계속 총애했다.[2]

알폰소 11세는 살라도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여세를 이어가 알카자 데 벤자이데, 로쿠빈, 프리에고, 베나메히 등을 점령했고, 1342년부터 알헤시라스를 포위해 2년간 공성전을 치른 끝에 1344년 3월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나스르 왕조와 10년간 평화 협약을 맺은 그는 마침 발발한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중 어느 한 쪽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플랑드르 도시들의 양모 판매를 금지한 잉글랜드의 조치를 이용해 양모 수출을 크게 늘림으로써 왕국의 재정을 눈에 띄게 개선시켰으며, 브뤼헤 같은 항구 도시에 카스티야 출신 상인들이 모여사는 거주지를 신설했다.

1348년, 알폰소 11세는 32개의 목차와 125개의 법률로 이뤄진 알칼라 조례를 반포했다. 이 법은 왕권 행사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민법, 행정법, 사법, 요새 설립 등 다양한 분야를 다뤘다. 또한 이 법령에서 법률이 적용되는 우선 순위가 결정되었다. 첫번째는 국왕의 명령 자체에 포함된 법률이고, 그 다음은 지방 자치 특권에 해당하는 법률이며, 마지막으로 알폰소 10세가 반포한 <시에테 파르티다스(Siete Partidas)>가 적용되었다.

1349년, 알폰소 11세는 마린 왕조의 아불 하산 알리가 반란군에게 폐위된 틈을 타 지브롤터 탈환에 착수했다. 그러나 지브롤터는 쉽사리 공략되지 않았고, 아불 핫자즈 유수프는 카스티야 변경을 공격하며 후방을 교란했다. 그러던 1350년 3월 26일, 알폰소 11세는 진영에 창궐한 중세 흑사병에 걸려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세비야로 옮겨졌는데, 유수프는 알폰소 11세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의 시신이 담긴 운구를 수송하는 적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세비야 대성당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1371년 코르도바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1736년 산 히폴리토 왕립 대학 교회로 이송되었다. 알폰소 11세는 생전에 사생아인 엔리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알폰소 11세의 급사로 인해 실패했고, 사후 유일한 적자였던[3] 페드로가 왕위에 올랐지만, 알폰소 11세의 사생아 엔리케 2세와 왕위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그 암투의 결과 엔리케 2세가 승리함에 따라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개창되게 된다.

3. 가족 관계




[1] 마린 왕조의 왕자로, 에미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뒤 나스르 왕조로 망명한 후 나스르 왕조의 핵심 장군이 되었다. [2] 알폰소 11세가 페드로를 폐태자시키고, 총애하던 엔리케에게 카스티야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 것은 페드로를 추방시키고, 엔리케에게 제대로 된 후계 교육을 시킨 것으로 보아 정황상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또다른 적자 페르난도는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