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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폰소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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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riosto,_after_-_Alphonso_IV_of_Aragon.jpg
Alfonso IV de Aragón
가문 바르셀로나 왕조
출생 1299년 11월 2일
나폴리 왕국 나폴리
사망 1336년 1월 24일 (향년 36세)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재위
기간
아라곤 왕국 국왕 1327년 ~ 1336년
아버지 차이메 2세
어머니 앙주의 비앙카
형제 하이메, 마리아, 콘스탄사, 후안, 이사벨라, 페드로
배우자 에텐사의 테레사,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자녀 알폰소, 콘스탄사, 페로 4세, 우르헬 백작 하이메 1세, 이사벨, 페데리코, 산초, 페르난도, 후안
종교 기독교 (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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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제13대 국왕.

왕호는 스페인어로는 '알폰소 4세(Alfonso IV)', 아라곤어로는 '알리폰소 4세(Alifonso IV)'이다.

2. 생애

1299년 11월 2일 나폴리 왕국의 수도 나폴리에서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의 딸 비앙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1314년 에텐사 영주 곰바우의 딸이자 우르헬 여백작으로 예정되었던 테레사와 결혼하고 우르헬 백작위를 승계했다. 1223~1324년 왕실군 사령관의 신분으로 80척의 전함과 1,000명의 기사, 4,000명의 보병, 2,000명의 석궁병, 3,000명의 보조병으로 구성된 아라곤 원정대를 이끌고 사르데냐 섬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섬에 깊은 이해관계가 있던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의 방해를 받아 사르데냐의 핵심 도시인 칼리아리 공략에 실패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1327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형 하이메가 수도자가 되겠다며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면서 알폰소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부인 테레사는 하이메 2세가 사망하기 5일전에 아들 산초를 낳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생전에 아라곤 왕비가 되지 못했다. 그는 1327년 크리스마스에 바르셀로나 백작으로서 카탈루냐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고, 1328년 부활절에 사라고사에서 아라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재위 초기, 아라곤 왕국은 심각한 곤경에 처했다. 먼저, 제노아 함대가 사르데냐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에서 해상운송되던 밀을 막아버렸다. 제노아와의 전쟁은 그가 사망한 1336년까지 이어지며 아라곤 왕국의 경제를 황폐화시켰다. 여기에 자연재해도 여러 번 벌어져 수확량이 급격히 떨어져버려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그 결과, 바르셀로나 시에서 한 해에 10,000명에 달하는 시민이 굶어죽는 등 카탈루냐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반면 발렌시아 일대는 풍요로움을 유지했기에, 이곳의 관할권을 얻기 위한 암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에 알폰소 4세는 1239년 국왕이 발렌시아의 관할권을 분배한다는 내용의 헌장을 공포했다. 이후 1329년에서 1330년 사이에 많은 귀족이 그로부터 발렌시아의 관할권을 받았다.

한편, 알폰소 4세는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의 딸이자 형 하이메와 결혼했던 레오노르와의 결혼을 진행했다. 이보다 앞서,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와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는 양국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하이메 2세의 장남 하이메와 페르난도 4세의 딸 레오노르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하이메 왕자는 수도자가 되기를 갈망했기에 이를 거부했지만, 아버지의 강압을 못이겨 1319년 10월 18일 레오노르와 결혼했다. 그러나 하이메는 하이메 2세에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전달하고 1319년 12월에 타라고나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졸지에 붕뜬 처지가 되어버린 레오노르는 토른토사, 사라고사, 칼라타유드, 아티카 등 여러 도시를 떠돌다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왕이 된 알폰소 4세는 불안한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과 결혼동맹을 맺기로 하고 레오노르를 아라곤 왕국에 도로 불러들였다.

1329년 1월, 알폰소 4세와 레오노르는 아그레다에서 약혼식을 거행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2월 5일에 산 미겔 데 타라고나 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알폰소 4세는 새 아내에게 우에스카 시와 아라곤 왕가에 속하는 다른 마을들과 성들을 수여했다. 그 후 레오노르는 알폰소 4세가 전 아내 테레사에서 낳은 아이들보다 자신의 아이들이 더 많은 영지와 권력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차기 국왕에 자기 아들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알폰소 4세는 레오노르의 거듭된 설득을 받아들여 1329년 12월 28일 레오노르의 아들 페르난도에게 토르토사 후작령과 알바라신, 오리우엘라, 칼로사 단 사리아, 과르다마르, 알리칸테, 몬포르테, 엘다, 라몰라, 노벨다, 아스페 등의 도시들을 하사했다. 여기에 5년 후에 태어난 레오노르의 작은 아들 후안 역시 갓난 아기일 때 엘체, 비엘, 볼사 등지를 수여받았다.

이에 테레사의 장남이며 왕위 계승자로 공인되었던 페드로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왕실 내 불화가 조성되었다. 귀족들 역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 쪽은 레오노르 왕비와 그녀의 아들들을 지지했고, 다른 한 쪽은 페드로와 그의 친형제들의 특권을 옹호했다. 1333년, 알폰소 4세는 레오노르의 아들 페르난도에게 야티바, 알키라, 모르베드레, 사군토, 알리칸테, 모렐라, 카스텔론 및 부리아나 등지를 양도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자기들 의사를 묻지 않고 페르난도에게 관할권을 넘긴 그에게 반발했고, 알폰소 4세는 발렌시아 평의회의 경고를 받자 명령을 취소했다.

알폰소 4세는 사람들의 관심을 외부의 적으로 돌려서 이러한 불화를 잠재우고자 그라나다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지만, 알메리아 공방전에서 패하고 오리우엘라, 엘체 등 남부 영토 일부를 상실했다. 결국 그는 1335년 그라나다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인 1336년 1월 24일 바르셀로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장남 페드로가 페드로 4세로 즉위했다.

3. 가족 관계